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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5-1274)는 로마 카톨릭의 스콜라 신학자
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스콜라 신학이란 중세 로마 가톨릭 신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빌어 설명하려고 한 신학입니다. 그래서 스콜라철학이라고도 하는 것이지요.
그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일반적 특징들로부터 출발하여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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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를 철학적으로 논증합니다. 이것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따르는 자연 철학적 방식인데 그는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신 존재 논증을 말합니다(Thomas Aquinas, Summa Theologica,
pt. Ⅰ. Q. 2, Art. 3). 논증(論證)은 전제(前提)가 있고, 그 전제에 따르는 증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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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idences)을 가지며, 그 증거들의 목표인 결론으로 구성됩니다. 이때 논증의 전제
들이 참이고 그 전제의 증거들이 만든 결론이 모든 조건들을 만족시키면 그 논증은
비로소 증명(證明, proof)이 됩니다. 따라서 신 존재 증명이란 말보다는 신 존재
논증이라 부르는 것이 좀 더 타당하다고 봅니다. 여기서는 신 존재에 대한 깊은
논증이 아닌 토마스 아퀴나스의 5가지 신 존재 논증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운동과 변화(motion or change)로부터의 논증입니다.
우리는 움직이고 있는 사물을 볼 때 그 물체가 스스로 자의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즉 움직이는 모든 것은 그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에
의하여 움직여집니다. 따라서 그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들을 운동시키는
제일의 (원인으로서의) 운동자(Prime mover)인 “부동(不動)의 동자(動者)”(unmoved
mover)가 있어야 합니다. 그 “부동의 동자”가 바로 신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둘째, 인과법칙에 따른 능동인으로부터의 논증입니다.
본래부터 능동적인 것은 아무것도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어떤 사물이 그 자체가
원인이 되려면, 자신보다 먼저 능동적 자신이 존재 해야 되는데 그것은 논리상 불
가능합니다. 본질에 있어 알려져있는 모든 원인이란 것은 동시에 다른 원인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런 관찰 가능한 유한한 원인에 대해서는 설명해 줄 수 없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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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원인들이 무한정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인과법칙으로서의
제일 원인(First-Cause)을 필요로 하며, 이것이 바로 신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우연적 존재들로부터 필연적 존재를 따지는 논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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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된 대상은 본질에 있어 우연적입니다. 우연적 존재들(contingent beings)이라
함은 대상이 자신의 존재를 다른 사물에 의존함을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면 대상들의
존재는 그들이 존재해 있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필연성이 아닌 가능성이지요.
이와 같은 존재의 가능성은 그 이외의 것에 의존하지 않는 필연적인 존재(Necessary
being)가 있음을 시사해주는데 이 필연적 존재가 바로 신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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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자연에는 상대적 가치가 존재하므로 이에 따른 절대적 가치가 있다고 보는
논증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보다 더 좋거나 더 나쁘다고 말합니다.
즉 가치의 등급(degrees of value)을 매깁니다. 이런 가치의 상대적 비교는 필연적으로
판단의 규정과 일치하는 절대 가치(Absolute value)의 기준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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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선함과 질서, 조화, 아름다움, 완전함 등 절대적 가치의 기준을 제공한 존재를 바로
신이라 여기는 겁니다. 다섯째, 자연에 존재하는 지적 목적성으로부터 신적 설계자를
논증하는 방법입니다. 자연에는 특정한 질서와 조화와 의미가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일은 알게 모르게 자신들에게 맞는 목적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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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질서나 조화나 모양을 단순한 운명이나 우연으로 돌리는 것은 잘 납득
하기 어렵습니다. 자연은 우연이 아닌 자신이 의도하는 지적 목적에 따라 모든
모양과 일을 이루어 나가는 어떤 지적 설계자가 있음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목적성(purposiveness)이 있습니다. 그 신적 설계자를 바로 신이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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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증의 처음 세 가지는 우주에 있는 모든 알려진 경험적 속성(운동, 원인과 결과,
우연과 필연)에서 나오는 원인을 다룬다는 점에서 근대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말
하는 우주론적 논증(cosmological argument)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목적론적
논증(Teleological argument)도 크게 보면 우주론적 논증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는
데 다섯 번째 논증이 이에 해당합니다(telos라는 헬라어는 끝, 목표, 목적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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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도 언급했듯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존재 논증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창안품이
아니라 헬라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철학적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그의 스승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요. 다만 중세
가톨릭의 스콜라 철학자들이 마침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을 접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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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라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플라톤의 책들이 번역
되었다면 당연히 플라톤의 사상도 흡수하였을 겁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이므로 플라톤을 아무리 뛰어넘으려 했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안에는 플라톤적인 요소들도 여전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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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존재 논증에도 그것이 남아 있습니다. 특별히 4번째 논증은
플라톤의 이데아 론과 많이 닮아있습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이 논증을 플라톤적
논증이라고 말하지요. 신 존재에 관한 논증에는 토마스 아퀴나스 말고도 인간은
절대적 완전한 존재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음을 가지고 논증하는 안셀름(Anse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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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Descartes) 등이 주장한 존재론적 논증(Ontological argument, Ont-라는
단어는 존재라는 의미의 헬라어에서 파생된 접두어)과 인간의 선악과 참과 거짓 등을
판단할,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령(定言命令, categorical imperative)을 내릴 궁극적인
입법자와 재판관과 같은 지고지선(至高至善)한 최고선(最高善)의 완전한 존재가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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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하다고 보는 도덕론적 논증(Moral argument) 등이 있습니다.
오늘날 토마스 아퀴나스적 자연철학, 자연은총적 논증은 일부 변증학이나 창조과학운동,
지적 설계 운동 등에서도 무의식적으로 많이 활용하는 것들입니다. 이것을 자연신학
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 신 존재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적 논증에 대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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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흄이나 버트란트 러셀 같은 세상 철학자들과 칼 바르트 같은 일부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의 신랄한 논리적 비판도 만만치 않은 편이지요. 그래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신 존재 논증에는 좀 더 진지한 신학적, 철학적 성찰과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 복잡한 논증은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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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은 신이 아니므로 아무래도 신 존재 논증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전혀 불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존재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에
대한 핑계치 못할 분명한 증거를 그 만물 안에 분명히 보여 알게 하셨다고 말합니다(롬 1:20).
성경은 또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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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온유와 두려움으로 항상 예비하라 하였으니
(벧전 3:15) 어떤 방식이 성경적이고 바른 대답인 가를 우리 기독교인들은 항상 고민하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묵상해야 한다고 봅니다. 즉 토마스 아퀴나스 적 단순한 자연신학
논증이나 변증이 아닌 참된 성경적 복음주의 창조신앙의 논증과 확산에 대한 전방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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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적인 고민을 해야 합니다. 조금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런
부분에서 너무 부족한 부분이 많다고 여겨집니다. 모든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 세상이요
우리들의 창조신앙의 영역입니다. 본 창조신학연구소는 신학을 단순한 이론적 책상
신학에 머물게 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신학의 눈높이를 낮추어 성도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종합적 창조신앙의 첨병 역할의 짐을 감당 하기를 다하겠습니다.
2. 강의를 듣고 간단한 서평
1)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플라토닉 러브가 대변하는 헬레니즘과 동정녀 마리아가 대변하는 헤브라이즘은 본질상으로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철학적으로 볼 때 이 양자 사이에는
매우 중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곧 헤브라임의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인데 반하여,
헬레니즘은 기하학의 하나님이라는 차이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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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존재 증명에 있어 철학과 신학사이 설전이 오가는데 중세에 있어 '철학은
신학의 시녀였다'는 말이 무색할 지경입니다. 이 지겨운 강의를 듣고 있는 나도
지적 호기심이 어지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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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이렇습니다. 안젤무스는 '신의 존재 증명'에서 "신은 완전하다
이것은 반드시 존재성을 내포한다. 고로 존재는 속성이 될 수 없다며"
'러셀의 디스커션 이론'에 브레이크를 걸었다고 해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토마스아퀴나스는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엑스니히로'로 차별 지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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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니히로'는 향수 이름이 아니고 질료를 포함한 무에서의 창조로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의미합니다. 혼돈 가운데 창조를 말하려는 것 같아요. 저는 '발견'
이 아닌 '발명'을 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제외한 철학자들은
창조란 '묵은 지'라는 질료가 있어야 김치 무침이든 찜이든 만들 수 있다는
뜻이고 토마스아퀴나스는 재료 없이 김치찜을 뚝딱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계시의 빛’아래서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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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기하학자 하나님은 질료를 다루지 않는다
우선 기하학자 하나님은 형상(형식)만을 다루며 질료(내용)를 대상으로 하지 않아요.
즉 기하학자들은 질료나 재료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인 겁니다. 똥에서 김나는 것이나
쿠린냄새가 지독하게 나는 것은 내과의사들의 관심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기하학자의
관심은 아닙니다. 기하학자는 기본적으로 설계자 그러니까 디자이너같은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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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집을 지을 때 사무실에서 머리로 짓고 도면으로 형상화 시킬 뿐이다. 양장점에
앉아있는 디자이너들은 있을 천을 재단만하며 옷을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디자이너들은
디자인만할 뿐이며 디자인의 재료가 되는 옷감을 생산하지는 않아요. 옷감은 주어진 것
이며 처음부터 있는 겁니다.
3) 데미우르고스
이우주를 기하학적인 하나님, 즉 희랍인들이 생각한 하나님은 이 우주의 탄생자체가
기하학자 하나님인 디자이너가 기존 용재를 써서 거기에다가 기하학젓 형상을 부여함으로
거기에다 기하학적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요. 하나님은 디자인만
했을 뿐이지 옥삼은 창조하지 않았다. 그러기 때문에 이 우주의 죄악도 질료 탓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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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리며 디자이너 하나님에게 귀속시키지 않아요. 인간의 죄악도 모두 재료탓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디자이너 하나님을 플라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야훼라는 이름과는
달리 데미우르고스(Demiurgos)라고 불렀어요. 이 데미우르고스의 사상은 플라톤의
대화편'티마이우스(Timaeus)의 핵심적 사상입니다. 그런데 이 대화편은 읽기가 좀 난해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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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가 그의 진지한 사색이고 어디까지가 그의 신화적 혹은 문학적 상상력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아요. 희랍인들은 본시 신을 명사로보다는 형용사로 사용했대요.
다시 말해 그들은 신을 주어에 놓기보다는 술부에 놓았던 겁니다. 기독교인들은 '신은
사랑이다(God is love)' 말합니다. 이것은 사랑이 신적인 그 무엇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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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승리는 신이다'와 같은 표현을 자주 씁니다. 승리는 인간을 넘어선다는 서술적
문장이지요. "친구간에 알아줌은 테오스이다" 그것은 어떤 신적마음의 상태라는 겁니다.
신을 유일의 인격적 존재자로 보는 것은 희랍인들에게는 낯섭니다. '티마이오스'의
데미우르고는 우주의 창조자로서 주격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그는 기존의 혼돈에 이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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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만을 부여하는 어떤 것이며 유대교의 유일신적 존재와는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의 이데아보다도 저급한 그 무엇입니다. 좋음의 원리가 우주적 질서에 동화되어
가는 모습을 플라톤은 데미우르고스의 행위를 통하여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질서는 궁극
적으로 수의 적도와 균형입니다.
4) 사막의 깡패
'여자란 무엇인가'를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중동사막의 깡패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사막의 깡패하나님의 특징은 창조의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이 야훼하나님의
특징은 희랍의 데미우르고스와 달리 디자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옷감까지 생산한다는
겁니다. 이 우주의 질료마저 창조했다는 것이지요. 사실 여기서도 생산과 창조는 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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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말입니다. 생산이라는 말은 반드시 있는 재료를 변형시키는 과정이지 없는 데서
마술을 부리는 것은 아닙니다. 옷감공장에서 옷감을 생산하는 것도 누에 고치가 뿜어낸
생사를 변형(transformation)시키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다시 누에고치는 도 뽕나무 잎을
변형시킨 것이며......,아렇게 하여 무한한 고리가 성립됩니다.
5) 크레아티오 엑스 니힐로
희랍인들의 우주의 탄생을 있는 재료를 가지고 데미우르고스가 디자인한 것으로 설명한
것은 그래도 합리적인 사상입니다. 그러나 우주 자체의 질료를 생산한다고 하는 야웨의
주장은 매우 불합리한 것입니다. 생산한다고 하면 무엇으로 생산했느냐하는 무엇이 있어야
할 텐데, 이 우주 자체의 생산의 경우에는 그 무엇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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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히브리인들의 설명은 야훼는 무로부터 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통 크레아티오 '엑스니힐로' 라고 부릅니다.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뜻입니다.
이 무로부터의 창조야말로 기독교적 세계관 헤브라이즘의 핵심입니다. 무로부터 창조할
수 있는 하나님이기에 위대하고 절대적이고 다른 신과 구분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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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러한 신앙을 수용할 수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비과학적이고 불합리 합니다.
현대과학에서도 진공은 존재하지 않아요. 비존재는 존재하지 않거든요. 아무것도 없는 것
이라곤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앞에서 테리툴리아누스는 나는 엉터리기 때문에 오히려 믿는다고
하지 않았을까.
2023.6.26.mon.악동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