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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지난 6월29일 서울 육군회관의 병기병과창설기념식에서 번 외로, 막간의 짧은 시간에 소란한 가운데에서 탄약분야 53년의 근무를 마치고 퇴임하는 저의 삶을 회상하면서 느끼는 소감을 말했는데 장내가 어수선하여 제대로 듣지 못했으니, 이제 병기동우회 회보를 통하여 현역과 예비역 병기장교들과 함께 서로 교훈을 나누고 싶다면서 한두 페이지 분량으로 써달라는 부탁을 병기동우회의 사무국장 김상보 예비역 대령님(육사 33기)으로부터 2012년 8월 27일 오후에 받았습니다. 김상보 대령님은 매 분기 동우회 회보를 6여 페이지 가득하게 매우 작은 글씨로 써서 보내는데, 매 번의 회보에는 동우회 회원 사무실 탐방시 대화를 거의 녹취하여 가보지 못한 사람도 그 분의 근황을 눈으로 보듯이 알려주고, 병원 문병, 회원 본인과 처족 및 자녀들의 애경사까지 자세히 홍보하여 병과 선후배의 삶을 나눔을 통하여 서로 배우고 병과의 단합과 발전에 중추적이 역할을 감당하시는 분의 부탁을 받고서 고민하였습니다. 그래서 저의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쓰기로 했습니다.
저
1961.4.22, 155기 OCS 이수 후 소위로 임관, 8사단 10연대 4중대 소대장으로 근무 중, 1963년초 병기로 전과 교육 이수한 후, 28사단 병기중대에서 이춘환, 김정곤 소령님을 병기참모로, 고인식 대위와 정규준 선배님의 지도로 첫 병기 근무를 시작하는 행운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66.3 차량재생창에서 생산통제장교와 본사 부관으로 근무 중 창 근무에 실망한 후, 미군원교육시험을 거쳐 미 병기학교 교육을 마치고(67.11-68.4) 병기학교 총포학 교관으로 재직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주월 한국군에 M16소총이 지급되는 때, 소총의 조작법 교육을 미군 교관과 함께 육.해.공군 순회 교육을 하게 되면서 저의 영어실력의 한계를 통절히 느끼게 된 것입니다.
병기학교 학생중대장 보직 후, 1971.3 에 파월하여 100군수사 11군지원대대 111탄약중대장으로 근무 중 한국군의 탄약 할당량이 적었기 때문에 청룡해병 작전을 위해 당시 다낭 미군 군수사와 ASP 담당장교의 특별 배려로, 초과 및 불출중지 탄약을 받아서 해병에게 제공하였으며, 그런 중에 다낭의 미군과 월남군 보급창으로 부터 지원되는 물품의 청구.수령권이 있는 다낭 미 군수사령부의 연락장교의 겸무 보직되었고, 근무 중에 차량의 전복사고로(71.10.1) 차량은 폐차되고 온몸의 타박과 팔 다리의 골절상을 입은채 살아났던 것입니다. 인원의 부족으로, 한 달간의 휴양 후부터 다시 오른 팔에 기브스를 한채 지팡이를 짚고서 청룡해병여단의 철군 군수협조주무관으로 임명되어 파월 후 지금까지 해병대에 제공된 장비와 보급물자의 반환 등의 철군준비로 밤낮없이 동분서주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여기 저기에서 주워모은 몇 가지 선물로 소형 B형 Box 1개와 함께 기브스한 모습으로 부산항에 귀국한 것입니다. 그때 만난 미군 장교들을 후일에 육군본부 재직 시 한미단일탄약보급체제(Single Ammunition Logistics System in Korea-SALS-K) 협상 시 미8군 탄약과의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게 된 것입니다. 어찌 그런 것이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귀국하여 한미1군단사령부의 의전장교와 탄약장교의 직을 마치면서 1973년 말에
교육이수 육본 병기감실 탄약검사정비장교로 보직되어, 정화용, 원병근,
지금까지 미8군이 수행하던 미군 탄약의 야전근무지원기능과 시설을 미국의 탄약 교리와 규정에 맞게 한국군이 인수 및 제공하는 한편, 미군은 한국군의 전시 탄약 부족분 XX개 사단 XX일분을 한국 내 비축과 근무지원비용은 적정협상가격으로 지불한다는 대원칙에 따라, 1978년 말 까지 거의 모든 미군 탄약시설과 기능을 인수받게 되여 6.7.8.9 및11 탄약창이, 그리고 수많은 1.3군의 ASP와 탄약대대가 창설 및 운영되므로 서, 명실공히 한미단약보급체제가 정립한 공로로 79.9에 중령 진급되는 혜택과 유엔군사령관 Vessey 대장의 감사장을 받는 영광을 가슴에 안고서 대망하던 김복동 장군의 5사단 병가근무대장으로 부임하여 1980년 4월 까지 근무를 하게 됩니다.
1980.4-85.5까지 연합사 탄약계획운영과장 재직 중, 연합사 탄약할당과 통제보급율(CSR)라는 개념의 발전 및 정립, 지하탄약고 시설 연구(후에 한국군 지중탄약고 건설에 기여)를 통해 미군의 훈장을 받았고 당시 ASP에 저장할 수 있다는 미군 탄약 저장방침을 변경시켜서, 최신형 ICM 탄약을 최전방 GOP선상의 xxx개의 포병대대 포진지 인근에 추진저장소(PSP)의 건축공사를 육군본부 율곡 계획으로 시행하므로 초전준비태세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기에 이른 것 입니다.(1983.10.1)
1985년초 중령 계급 정년을 앞두고, 아세아자동차의 김정권 전무님과 남궁균 상무님의 추천으로 김사묵 선배님의 후임 영업부장이라는 30여명의 부장(통상적으론 대령예편자로 선임)직으로 내정되어 축하선물까지 받았는데, 연합사/주한미군/미8군사령부 탄약처장이 탄약업무의 지속적인 도움이 필요해서 처장의 특별보좌자문직을 임시로 신설하였는데 수락을 요청했습니다. 자동차 생산 대기업의 최소한 4-5년간 신분이 보장되는 부장직과 명예나 급여가 엄청나게 낮은 직, 그것도 영구직이 아닌 임시직의 선택의 기로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내가 평생에 내 소신껏 업무수행을 하면서 보람과 자부심을 가졌던 분야에서 마음 편히 근무하며 성실히 근무하면 인정받을 수 있는 쪽을 선택하였고, 그 선택을 수락한 후 선임된 것을 통보 받고 5월31일 전역하고 6월1일부터 출근을 시작한 것입니다.
1985.6월 이후 2012.8월 현재 까지 제가 수행한 주요업무는 SALS-K체제의 시행에 관련된 지시서와 규정의 제정과 집행. 미군 탄약의 도입과 배치, 폭발물 안전 등의 현안의 해결처리.국방부와 육군본부 간의 상호 군수지원에 전반에 대한 기술적인 자문을 제공하는 것이며, 그 동안 주한미군사/미8군에서 한국군과 관련해 수행한 주요한 업무의 연대순 과제들을 간단히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탄약창의 화재로 미국소유 66mm LAW 등 많은 탄약의 폭발과 화재 사고가 발생하였을때 3일후에야 미국측에 인편으로 통보를 받는 결과로, 주한미군사령관이 한국 육군참모총장에게 긴급조치를 요청하는 긴박상황이 일어남에 따라, 한미군간 각급제대간의 긴급 사태 시 전화통신체계의 상호 제공 및 설치의 완성하였음 (85.10월경)
2. 미 국방부 폭발물안전위원회 (DDESB)가 모든 각군과 방위산업체에서 시행하는 폭발물안전 기준을 설정하고 주기적이 전국적인 안전검열을 실시하고 있음과 주한미군사령부내에도 폭발물안전위원가 설치운영됨을 예로 들어서 조속한 시일 내에 한국군 편제에 폭발물안전관리계획과 DDESB 설립을 당시 주한미군사령관 Louis C. Menetrey의 1988.12.28일자 서신과 국방부장관과 미국대사간의 2:2 토의 안건으로 추진하였으며, 그 결과는 국방부 탄약과로의 편제화 (1990), 국방부 폭발안전위원회의 설립과 탄약 및 폭발물안전규정의 제정. 집행으로 나타났을 때 10년간 애썼던 결과에 대한 보람에 차게 됨(1995.6.30).
3. 미2사단 교육탄약의 적시 지원의 불만해소를 위해, 511ASP의 탄약고 4동을 지정 집결저장하고 미2사단 ATP 1개팀(인원8명,MHE1대)을 상주시켜 지원하는 교탄지원팀(Training Ammunition Support Team-TAST)의 설립에 대한 한미공동의 SALS-K 시행지시13호(87,12.1)를 하달직후 집행을 완료함(87.12.10).
6. 전시와 우발시 한미간의 탄약보급협조단(ASCG)필요성을 연합사 군수참모부에 건의한 결과, 연합군수협조가구(CLCA) 산하의 연합지성구성군군수협조위원(CGLC)의 탄약팀으로 편성운영토록 관련 연합사 군수지원방침및 절차에 반영하여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운영되게 함(1992-94~2012).
7. 미국 본토군의 교탄을 충당하기 위해 한국에 비축된 WRSA-K계정의 155미리 고폭탄(15만발)의 사용을 위한 반출 협상팀원으로서, 이들 탄약의 과거저장비 $6,600여마 상당하는 M48A5전차 275대, 탄약 3만5천톤.장벽자재(500화차상당)를 한국에 Package Deal로 이양하는 협정에 서명(1995.8.16)에 성공하여 한국과 미국의 공동 유익 –Win-Win 목표 달성에 기여함-그 결과로 한국군 1개 기갑여단의 창설과 한국군의 부족탄약 확보 및 보충에 기여.
8. 당시까지 탄약의 보급,저장,수송,정비,처리,안전 각 분야별로 있던 SALS-K규정의 통합 작성의 책임자로 임명받고, 이들 각 규정의 통합, 편찬 및 발간에 중추적 역할을 통해 SALS-K체계의 세부적인 한미 각급제대의 책임과 세부적인 절차를 통합 재정립함(1996.1.16).
9. 미군의 유럽 철군으로 발생하게 될 초과 및 잉여 탄약 정보를 미측 실무자로 입수하여 한국 육군과 미국 육군성으로 한국 지원용 워사지원계획의 포함을 1997년도에 제안하였으며, 마침내 미 의회가 창군이래 최대 금액인 $3억2천만의 FY1999년도 WRSA-K 탄약지원 외국지원법(FAA)통과 통과로 당시 한국군의 부족으로 을지 연습 시마다 지목된 4.2인치 고폭탄을 포함하여 3만 5천 여톤을 일시에 도입으로 한미 연합 군 전투력 증강에 기여하였음. (미 육군성 근무공로훈장 수여-1998.5)
10.미 제III해병원정군(MEF)의 비축선단(MPS)의 Lopez호 선박이 오끼나와 해역 운항 중 엔진 화재로 해상운항능력을 완전상실로 선박의 정비 항만을 물색하는 III MEF사령관과 태평양군사령관(CINCPAC)의 긴급구원요청전문을 접수한 후(2002.8.16), 당시 UFL연습에 미국군 대령이 훈련장에 있어 주한미군사측 협조책임자라는 직임으로 한국 국방부, 수송사, 항만단의 대령급 협의에 성공하여(2002.8.20) 선박의 진해 탄약부두 입항과 MPS물자의 항만 하역, 선박의 정비, 적재된 각급 전투장비의 복구지원을 총괄적으로 협조지원을 함으로서 획기적으로 조속한 기간(2002,8.24-10.30)에 임무를 완료함으로써, 향후의 미국의 군과 상선의 진해항, 광양만항 등 사용의 활성화로 항만 사용료와 부수적인 수익의 증대에 기여함(IIIMEF사령관의 공로 표창장 수여-2003.5.7).
11.1985년도의 SALS-K 보상요율의 적정수준 협상을 통하여 1992년과 2006년의 양해각서를 통해서 매년 물가상승율을 기준으로 일괄 인상안을 통과시켜 업무의 단순화와 신속처리 시킴에 따라 분기당 51억원, 연평균 200여억 원의 지불을 조기 처리시키는데 중추적인 역활을 감당함.(2006.7이후 2012.6까지 6회).
12. 2006년 5월에 미군 수류탄 13발의 계정착오로 손망실 처리되는 사고로, 역사상 최초 폐창식 100% 전수 재물조사의 과제의 주무관으로 임명되어, 3군내 13개 ASP 전체를 순차적으로 실시를 완료하였음. 2006.8-2007.6).한국의 장비,유류와 인력지원비의 보상문제가 2009년까지 2년간 미결되어 한미군간의 신뢰성이 궁지에 처했을 때, 중재역을 하면서 제물조사 통하여 배우게 된 한국군의 실무교육의 유익과 미국의 예산절감 유익을 감안하는 Win-Win개념의 적용으로 협상의 성공에 기여함 (2009.7).
13.주한미군 보유의 WRSA-K탄약의 한국 이양 협상단의 일원으로서 한국군이 필요한 사용 가능한 탄약만을 선별적으로 이양한다는 합의각서의 체결서명(2008.10.17)을 통하여 미국의 WRSA 탄약의 지원종결을 가져오는데 기여함. (한국 국방부 장관 상장수여 2009.3.9).
14. WRSA-K 이양 후 한국군이 인수 거절한 탄약의 미국 본토 후송계획의 지원에 따르는 한국군 창의 교육훈련과 여타의 한국군 고유 업무수행에 따른 적정수량의 적기 반출문제의 원만하게 진행하여 한미간의 마찰과 갈등의 해소에 기여함 (2009-2012)
15. 6.25전 이래로 보유한 사용불가 및 도태 판정된 소구경탄의 소각 및 대구경 폭탄의 고온압력솥을 통해 용출처리 하는 비군사화 시설(Demilitarization Facility-DEFAC)의 건설운영 합의각서(MOA)의 협상을 1997-1999년의 3년의 협상을 하고 MOA서명을 완료하였음(1999.4.29). 그 후 국회의 인준과정에서 일부 문구의 불평등한 표현 때문에 2000년에 재협상이 한국이 요청함. 한편 미측에서도 환경문제와 비용의 지불방법과 절차에 대한 이의 제기로 12년동안의 협상 끝에 합의서명을 함(2011.11.4), 현재 설치된 미국 제공한 장비의 시험가동이 진행으로 2012년10월중에 공장 준공식을 논의 중에 있음.
16.2012년초 미 육군폭발물안전본부(USTCES)의 안전감사에서 진해탄약부두의 순폭약량 700만 파운드의 안전적인 처리능력의 확보문제가 심각한 조치를 위해 탄약임시보관소(AHA)의 신축과 병목형 교통흐름의 개선책이 건의되었고, 윤재관은 비상시 보안과 안전활동을 위한 소형 발전기의 운영을 2012. 8월초에 국방부에 건의하였음. 이에 2012년말 까지 소요예산과 건축계획이 국방부에서 성안되어 집행을 위한 방안이 논의 중인바,계획대로 집행된다면 탄약의 도입 항만취급 분배체제의 안전성을 확보하여 전평시 탄약지원체제를 크게 향상시킬 수 있음(2012.12.31 계획집행을 고대함).
이상으로 저의 하던 일을 회상해 보니, 75년의 생애 중 1959.10월 포병대대의 탄약서기 보직 후 지금까지 단 하루의 근무상의 단절 없이 만53년 동안 지속적으로 탄약의 확보,적정수준의 적시 보급 분배,저장,검사,정비, 안전, 사용불가 탄약의 종말적인 비군사화 처리라는 탄약의 항만 도입의 요람에서 시작해 무덤에 이르는 전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동안 한국군의 미군탄약지원문제가 발생시 마다 윤재관 개인을 향해 욕하는 소리를 듣게 되는 한편 미국 일부 장교들은 국방부와 한국육군을 위해서 일하니 국방부나 육군본부로 사무실을 옮기던지 아니면 봉급을 한국정부측에서 전담해야 한다는 불평 가운데 13번의 재임용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와 은혜로 이룬 것이며, 인간적을 부족한 군생활 내내 저를 사랑하고 아껴주신 병기 병과의
그리고 현역의 장교 외 부사관과 군무원으로 근무하게 될 후배들 남기고 싶은 사항은, 한 때의 절망과 실패 앞에 무릎 꿇지 말 것과, 한미간의 업무처리 시에 꼭 문서 한자 한자가 가지고 있는 법률적이 책임사항 때문에 합의문서 체결에 1997년부터 2011의 장기간 동안 수 많은 실무관과 책임자가 변경되었다고 해서 변경될 것이라는 생각을 접고서 일해서 성실성과 진리로 대응하여 성공에 이르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한국 방위의 책임은 한국이며 한국은 경제적인 능력과 기술력이 우수한 만큼, 미국에 의존을 벗어나서 자주 독립적인 자세로, 상호 이해와 신뢰를 통해 향후에 더 많이 발전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위에 하나님의 축복을 빕니다. 아멘, 샬롬!
2012년 8월 29 국치일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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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는 다른 사람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여유가 부족합니다. 서로가 마음이 바쁘기 때문에.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주의깊게 들으면 그 사람의 인생이 보이고, 그 사람의 훌륭한 점도 알수있게 됩니다. 평생동안 탄약분야에 근무하시면서, 나름대로 국가에 충성하신 한 분의 진솔한 삶의 얘기입니다. 선배님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한 분야에서 동일한 업무을 53년간 근무한 윤재관중령님의 노고에 감사드림니다. 궁금하던차에 근황을 알게되어 반갑습니다. 육본 병기감보좌관(병기감 이태섭장군님)시절 매일 마주하던 님의 얼굴이 선 합니다. 부디 남은 여생도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항상 병기동우회을 위하여 헌신노력하시는 김상보국장님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동우회의 무궁한 발전을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중국에서 김 완 택( 예 소령. 3사3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