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점 부끄럼 적은 ‘나걷이’
2008년 9월 최영수 소장
가을 문턱인데도 아직은 한낮의 푹푹 찌는 더위가 미처 야물게 익지 못한 벼를 익히려는 배려이겠지만, 늦더위에 땀을 흘리는 나도 마치 더 익어야할 곡식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올려다 본 하늘은 마치 비질 해 놓은 양 엷은 구름 따라 파아란 하늘이 마냥 청량하다.
아, 가을이구나!
추석 뒤 명절증후군으로 환절기 몸살을 앓는 친구들을 보며
내 목덜미를 쓸어내린다. 감기가 두려워서.
너무 심하게 아플까 봐 지레 겁먹는 나를 본다.
일교차가 심한 환절기에
몸이 스스로 적응이 잘 안 된다는 신호가 ‘찌뿌드하다’이다.
그래도 조절이 안 되면, 감기로 잠시 억지로 일상을 접게 만든다.
그렇게 우리 몸은 자연의 일부처럼 겨울을 준비하는 과정을 스스로 조절한다.
그래, 아픔은 내 몸이 자연과 교감하는 하나의 신호이구나.
정말, 많이 반겨야겠다.
문제는 우리의 똑똑한 생각이나
너무나 익숙한, 그래서 그나마의 성취감에 빠져있는 우리의 습관이다.
생각의 시비가 분명하여 옳고 그름에 양보가 없는 생각이나 행동들이,
과거의 좋았던 그래서 잘 나가던 때의 기억들이 우리를 포로로 삼는다.
그리고 너무나 익숙하고 그래서 ‘조금만 더’가 주는 성취를 아는
우리는 몸을 인질까지 삼아 결코 일상의 놓아버림을 멈출 줄 모른다.
이 멈추지 않음이 우리를 좀 먹는다.
종내는 원치 않는 죽음으로까지 우리를 내 몬다.
평소에 삶의 초점이 ‘Well-living'이냐 ’Well-dying'이냐에 따라
순간적 선택에 차이가 있지만, 그 둘은 하나로 만난다.
육신의 소멸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정신은 사후에도 영혼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한 이들, 좋아하는 이들과 교류를 나누겠지만.
육신의 건사와 마무리가 우리의 일생 행복지표이자 성적표이니까.
최근 스스로 상담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교육프로그램을 반기며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특히, 아빠들이 가정에서의 역할을 잘 하려 애씀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사실, 상담하는 시간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장정리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상담시간은 스스로를 정리하는 시간이라고 여기며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데 보다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가을의 맑고 높은 하늘은 그런 나와 만나는데 안성맞춤이다.
그렇게 따가운 가을햇살 아래 나를 굽고 익힌다.
흐르는 세월에 맞는 ‘나걷이’를 할 수 있을까 해서.
일상의 사건을 계기로 잠시 삶에 브레이크를 걸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진다면
그래서 꾸깃꾸깃 주름잡혀 있는 마음을 잠시 알아챌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주름을 잠시라도 손으로 매만져 반듯하게 할 수가 있다면,
보다 많은 이들이 ‘한 점 부끄럼 적은 삶’을 살아 내리라 믿는다.
10월은 우리말로 ‘하늘연’이라 한다.
개천(開天)이란 뜻이다.
나도 너도 따가운 가을 햇살에 스스로를 충분히 그을려
가을걷이삼아 열린 하늘 향해 당당한 나걷이 하기를!
*나걷이 : 가을걷이와 같이 나를 수확한다는 의미로 만든 단어 <행가래로 7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