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프랑스를 발 아래 두었던 헨리 6세는 이제는 거꾸로 프랑스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입장이 되었으며, 1445년에 앙주의 마그리트와 결혼하는 등 여러 외교적 수단을 써서 전쟁을 그만두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그는 결국 1449년에 그때까지 버티고 있던 노르망디를 프랑스에 반환한다는 조건으로 화친조약을 끌어냈지만 잉글랜드 본국 귀족들의 반발로 조건을 이행하지 못했다. 그러자 분노한 프랑스는 공격을 재개해 노르망디를 짓밟았으며, 1453년에 가스코뉴까지 침공해 유서 깊은 잉글랜드의 보유지를 빼앗음으로써 백년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전쟁이 남긴 것
1453년은 영불해협을 사이에 두고 전쟁이 벌어진 마지막 해가 결코 아니었으며, 잉글랜드 왕실은 그 이후에도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하곤 했다. 하지만 이후 두 진영의 싸움은 잉글랜드 대 프랑스라기보다, 또는 프랑스 내전이라기보다 영국과 프랑스의 싸움이 되어 갔다. 이 전쟁으로 두 나라 모두 민족의식을 고취하게 되고, 왕을 중심으로 국가권력이 강화되면서 근대국가의 모습이 차차 갖춰졌기 때문이다.
결국 백년전쟁은 귀족들의 땅따먹기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 치열함과 오램 덕분에 귀족들은 이를 통해 상당히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수적으로도 전장에서 수없이 많은 전사자가 나온 결과 양국 모두 전쟁 이전보다 반 이하로 귀족의 수가 줄었다. 게다가 크레시와 아쟁쿠르에서 콧대 높은 귀족들을 때려잡았던 사람들, 자크리나 와트 타일러의 난에서 정의를 요구하며 분노의 깃발을 들었던 사람들, 주인 잃은 농토를 차지해 농장을 경영하고, 전쟁에 필요한 대포나 화약 등을 고안하고 생산하여 판매했던 사람들은 모두 평민이었다. 아직도 시민혁명이 일어나려면 몇 세기가 더 필요했다. 그러나 이전처럼 귀족과 사제가 혈통과 신의 뜻을 내세우며 무조건적인 지배권을 휘두르던 시대는 서서히 물러나고 있었다.
전후 영국과 프랑스가 걸었던 다른 길도 이후 두 나라의 역사에 영향을 주었다. 패배한 쪽인 잉글랜드에서는 왕의 권위가 한동안 추락했고, 징세나 외교 등에 대해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원칙이 강력히 대두하여 이후 영국식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전쟁을 이유로 상비군을 설치하고 인두세를 거두는 등 왕의 권한이 한껏 커졌으며, 큰 타격을 입은 귀족들은 이후 전개될 절대군주시대에 궁정을 드나들며 왕에게 아첨하는 궁정귀족들로 ‘전락’하게 되었다.
전쟁사적으로 백년전쟁은 '발사 무기'가 처음으로 서구 전쟁의 최종 병기로 등장한 전쟁이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당대의 최대 최강의 기사대가 잉글랜드 평민들이 쏘는 장궁 앞에 무력했던 것이다. 그나마 장궁도 사람의 근력과 기술로 쏘는 것이었지만 전쟁 말기에는 대포를 비롯한 화약무기가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사람의 힘과 용기가 아니라 과학기술이 전쟁의 주역이 되었다. 이제 전쟁은 사람과 사람이 맞부딪쳐 펼치는 드라마가 아니라, 원거리에서 적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소멸시키는 게임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당시의 화약 무기 발달 수준을 볼 때 지나친 해석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런 대규모 전쟁을 치르며 다소 낭만적이던 중세의 전쟁 방식이 오직 승리만을 노리는 근대전 방식으로 바뀌어간 점은 분명하다. 크레시에서 에드워드는 쓰러진 기사들을 포로로 해 몸값을 받는 데 시간을 쓰지 말고 적을 하나라도 더 죽이라고 명령했다. 오를레앙에서 잉글랜드가 진 원인은 기사도에 따른 체면에 연연했기 때문이라는 추정도 있다. 이래저래 백년 전쟁은 기사들의 시대, 중세가 청산되고 능률과 실질을 앞세우는 국가와 평민의 근대가 열리는 계기였다.
참고문헌: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책세상, 2004), 존 키건, [세계전쟁사](까치, 1996), 케네스 모건 편, [옥스퍼드 영국사](한울, 1997), 앙드레 모로아, [프랑스사](기린원, 1997), 어니스트 볼크먼,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이마고, 2003), 피터 터친, [제국의 탄생](웅진지식하우스, 2011),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까치, 1995), 존 린, [배틀, 전쟁의 문화사](청어람미디어, 2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