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太白山) 부석사(浮石寺)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북지리)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
창건 및 연혁
676년(문무왕 16) 2월에 의상 스님이 왕명으로 창건한 뒤 화엄종의 중심 사찰로 삼았다. 『송고승전』에 창건 설화가 있다.
의상 스님(625∽702)은 669년 당나라 등주 해안에 도착하여 신도 집에 머물렀다. 그 집의 선묘 낭자는 스님을 연모하였다. 그러나 의상 스님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선묘 낭자는 스님의 신도로서 스님을 모셨다. 이후 스님은 중국에서 공부를 마친 뒤 귀국 길에 올랐다. 뒤늦게 스님의 귀국을 알게 된 선묘낭자는 해안가로 달려갔다. 그러나 스님이 탄 배는 이미 항구를 떠나서 멀리 가고 있었다.
그녀는 기도를 올렸다. ‘이 몸이 큰 용으로 변하여 저 배의 선체와 노를 지키는 날개가 되어 대사님이 무사히 본국에 돌아가 법을 전할 수 있게 하리라.’ 그리고는 웃옷을 벗어 던지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진정한 원력으로 그녀의 몸은 용이 되어 배를 안전하게 이끌어 나갔다.
의상 스님은 귀국 후 불법을 펼칠 수 있는 장소를 찾아다녔다. 마침내 적절한 곳을 찾아서 법을 펼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미 삿된 무리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때 선묘룡은 스님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허공에서 대변신을 일으켜 커다란 바위로 변했다. 허공에 뜬 바위는 막 떨어질 듯하였다. 그 광경에 삿된 무리는 당황하며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마침내 스님은 화엄경을 펴기 시작하였다.
부석사 무량수전 뒤쪽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언제 새겼는지 모르지만 ‘浮石’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뜬 돌’이라는 뜻이다. 바로 부석사의 창건 설화와 관계있는 바위다.
창건 후 의상 스님은 이 절에서 40일 동안의 법회를 열고 화엄사상을 펼쳤다. 의상 스님의 존호를 부석존자(浮石尊者)라고 칭하고 의상의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 하였다. 의상 이후 신라 고승들이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배웠다.
창건 후 부석사는 신라 말 또는 고려 초기에 병화로 소실되었다. 이후 고려시대에 몇 번의 중창이 진행되었다.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고 하였다.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서 부석(浮石)의 다른 표기로 보기도 한다. 1372년(공민왕 21)에는 퇴락한 당우를 보수하고 많은 건물을 다시 세웠다. 조선시대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몇 번의 중건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보문화재
현존하는 당우로는 무량수전(국보), 조사당(국보), 범종루, 원각전, 안양루, 선묘각, 응진전, 자인당, 자인당, 좌우요사, 취현암, 성보전시관 등이 있다. 이 중에 범종루와 안양루는 대표적인 누각이고, 원각전·응진전·자인당은 법당이며, 선묘각은 부석사의 창건연기와 인연이 있는 선묘의 영정을 봉안하여둔 곳이다.
중요문화재로는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과 소조여래좌상(국보), 조사당벽화(국보), 삼층석탑(보물), 당간지주(보물), 고려목판(보물), 원융국사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7호) 등이 있다.
* 범종루 : 사찰의 중문(中門)에 해당하며, 본전을 향하는 입구 쪽에서는 팔작지붕을 하고 반대 방향은 맞배지붕이라는 특이성이 있다. 누각에는 ‘鳳凰山浮石寺(봉황산부석사)’라는 편액이 있다. 그런데 범종은 없다. 법고, 운판, 목어가 있다.
* 안양루 : 안양루는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놓인 누각이다. 이 건물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달린 편액이 서로 다르다. 난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은 ‘안양문’, 위층 마당 쪽에는 ‘안양루’라고 씌어 있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이중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안양’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따라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무량수전이 위치한 구조로 되어있다.
부석사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이다. 그래서 예부터 많은 문인이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의 장관을 시문으로 남겼고 그 현판들이 누각 내부에 걸려있다.
* 부석사무량수전(국보) :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無量壽佛)이다. <원융국사비문>에 의하면 1016년(고려 현종 7) 원유국사가 무량수전을 중창하였다. 이후 1358년(공민왕 7) 왜구의 침략으로 불에 타 큰 피해가 있었고, 1376년(우왕 2) 원응국사가 고쳐 지었다.
무량수전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다.
내부 서쪽에는 불단과 화려한 닫집을 만들어 고려시대에 조성한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국보)을 모셨다. 협시보살 없이 독존으로만 동향하도록 모신 점이 특이하다. <원융국사비문>에 따르면 의상 스님은 아미타불의 존엄을 높이려고 협시보살도 세우지 않고 불전 앞에 탑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원래 내부 바닥에는 푸른 유약을 바른 녹유전을 깔아서 매우 화려하였다. 정토 경전을 보면, 극락세계의 바닥은 유리로 되었다. 녹유전은 이러한 이상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장엄 도구의 하나였다.
현재 무량수전 밑에 석룡(石龍)이 묻혀 있다. 머리 부분은 아미타불상 바로 밑에서부터 시작되며, 꼬리 부분은 석등 아래에 묻혀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이 절을 개수할 때 이 거대한 석룡의 일부가 묻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으며, 자연적인 용의 비늘 모습이 있었다고 한다.
*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국보)
아미타부처님으로서 선정인에 항마촉지인을 하고 동쪽을 향하고 있다. 원융국사탑비의 비문에 협시보살이 없는 아미타불을 조성하여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 소조불상은 의상대사가 676년 이 절을 창건했을 때 모셨던 본존의 불상 형식을 그대로 따랐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8세기 중엽의 석굴암 본존불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 고려 초기에 많이 만들어진 촉지인 계통의 한 예라고 볼 수 있다.
* 선묘각 : 무량수전 북서쪽 옆에 있다. 의상 스님의 창건 설화와 관련된 인물인 선묘 낭자를 모신 건물이다. 내부에는 1975년에 그린 선묘의 영정이 걸려있다.
* 부석사조사당(국보) : 무량수전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산 중턱에 있다. 조사당은 고려 우왕 3년(1377)에 원응국사가 재건하였다.
조사당 바로 바깥에 있는 선비화는 의상이 사용했던 지팡이를 꽂아 놓았더니 살아난 것이라 한다. 『택리지(擇里志)』에 의하면 의상이 죽을 때 “내가 여기를 떠난 뒤 이 지팡이에서 반드시 가지와 잎이 날 것이다. 이 나무가 말라 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으리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 응진전 : 무량수전 영역의 북편 위쪽에 떨어져 있다. 응진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전각이다. 석가삼존불과 십육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 자인당 : 선방의 용도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부석사에서 동쪽으로 약 1.5km 떨어진 폐사지에서 옮겨 온 석불을 모시고 ‘자인당’이라고 고쳤다. 부처님을 자인(慈忍)대사라고 하는 데서 따왔다. 석조 삼존여래 좌상을 모셨다. 가운데는 석가여래이고 좌우는 비로자나불(보물)이다.
* 단하각 : 최근세에 지은 법당으로 응진전 뒤에 위치한다. 손에 쥐를 들고 있는 작은 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정면에 걸린 현판의 ‘단하’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 삼성각 : 칠성, 독성, 산신 세 분을 한 곳에 모신 전각으로 무량수전 서쪽 석축 아래에 있다. 원래 축화전(祝花殿)이라 불렀는데 영조 때 대비의 원당으로 지은 건물이라 한다. 1979년의 보수 때까지는 원각전(圓角殿)이라 하였고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을 모셨다.
* 석축 : 석축은 사찰을 짓기 위한 땅 다짐의 목적이지만, 간혹 석축 돌계단 그 자체에도 상징하는 바가 있다. 부석사 석축 돌계단은 극락에 이르는 중생을 분류한 상품상생에서 하품하생까지 3품3생관을 형상화하였다.
천왕문에서 요사채로 오르는 세 계단이 하품단, 여기서 다시 세 계단 오른 범종루까지가 중품단, 범종루에서 세 계단을 올라 안양루 밑을 지나 무량수전 앞마당에 다다르는데, 마지막 계단으로 상품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