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천은 내가 신혼여행으로 갔던 곳이다. 금년은 내가 결혼한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마침 춘천에 있는 강원대학교 고문서센터와 한국고문서학회와 공동으로 강원대학교 박물관에서 "강원도 고문서의 보편성가 특수성"이란 제목으로 학회가 6월 11일에 개최되며, 이 때 명예회장인 나에게 축사를 해달라고 부탁을 해서 몇 주전에 응락을 했다. 나는 축사를 며칠간 준비하여 가지고 갔고, 집식구와 함께 갔다.
학회는 11일 10시 30분에 시작되었다. 축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강원도 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
鄭求福(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한국고문서학회의 지방 학회를 강원대학에서 개최함에 있어서 주최 측의 노력이 감사를 드립니다. 공동 주제를 고문서를 통해서 본 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이라고 잡았기에 저는 축사를 가름하여 일반적인 강원도 이야기를 중심으로 해보고자 합니다. 강원도 역사이야기를 하자니 동양의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야겠습니다.
전통 동양의 사상은 천지인 삼요소를 三才(세 가지 바탕)라고 하여 중시했습니다. 천은 만물을 덮는 부모와 같은 존재이고 땅은 만물을 얹고 있으면서도 한 번도 너무 무겁다고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천은 천문, 시간, 기후 등을 관장하고 인간의 행, 불행을 결정해주는 기능을 가졌다고 이해했고, 땅은 인간에게 먹거리를 생산할 수 있는 토대이고 살 자리와 활동할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양의 역사서인 25사도 대체로 천·지·인 순서로 편찬되는 관행을 파악할 수 있으며, 명나라 때 편찬된 "삼재도회 三才圖繪"라는 책에는 그림과 설명을 자연과 인간문명의 전부를 서술했습니다. 맹자는 천시 天時와 지리 地理 인화 人和를 들어 나라를 지킴에는 인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가 전국시대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동양의 사상은 精靈신앙, 유불도 삼교가 있습니다. 이는 서양학문이 전래하기 전의 것으로 그 공통점은 인간과 자연을 일체시하는 관점이었습니다. 지금 세계는 전쟁과 자연재해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그 모순점은 과학의 발달로 인간만을 생각해 온 자업자득의 결과입니다.
강원도라는 명칭이 처음 생긴 것은 1395년 조선 태조 5년 때입니다. 1830년대 강원도의 영역은 동서 300리, 남북 800리에 달하는 지역이었습니다. 강원도는 한국의 각도가 남북으로 나뉠 때에도 남북으로 나뉘지 않은 유일한 도입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반쯤이 두 나라로 편입된 지역입니다. 유일하게 남북한에 강원도라는 도명이 함께 있음도 특색이라 할 것입니다. 또한 강원도는 한국의 2대강인 한강과 낙동강의 젓줄의 근원지이기도 합니다.
강원도는 우리나라 산맥의 갈빗대에 해당하는 태백산맥이 남북으로 달리고 있고, 험준한 산세가 도시 생활에 지친 사람들의 심령을 달래줄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산맥을 파악한 것은 조선 후기부터입니다. "동국여지승람"의 단계에서는 산을 점으로 파악했는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우리 국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자 점의 산을 잇는 산줄기를 파악하고 이를 산맥으로 파악했습니다. 백두정맥이라는 말은 성호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에 처음 보이지만 전국의 산맥을 파악한 것은 여암 신경준(1712-1781)의 "산수고 山水考"를 통해 정리되고 이 내용이 영조(재위 1724-1776)대에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 輿地考」로 정리됩니다. 산맥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켜 준 것은 정상기 鄭尙驥(1678-1752)의 3대가 만든 한국 최초의 실측도인 "대동지도 大東地圖"에 의해서라고 여겨집니다.
어떻든 강원도는 태백산맥에 의해 영동과 영서로 크게 구분됩니다. 영동과 영서지역은 기온, 기후 섭생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인간이 이런 지리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정치가들은 이런 점을 깊이 인식하고 전국토의 균형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영동과 영서를 관통하기 위해서는 강릉에 철도가 건설되어야 합니다. 도청소재지인 춘천은 지형 산세 때문에 각 지방 시군으로 나가는 직통 도로가 제대로 나 있지 않은 점도 강원도의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강원도에 올적마다 산세의 힘찬 기상을 느끼곤 하여 언제가 도시가 황폐화되면 강원도는 삶의 고장으로 제 가치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하곤 했습니다. 수십년전 저는 강원도 산세를 보면서 아마 이 곳은 수십년 후 삶의 터전으로 진가를 발휘할 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도 이런 생각은 아직도 유효한 예측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지형과 알게 모르게 밀접한 관련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강원도는 특히 산이 82%정도가 될 정도로 산이 많습니다. 산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근검 소박합니다. 그리고 산세의 精靈을 받아 재주 있는 사람이 많이 태어날 수 있습니다. 硏經齋 成海應(1760-1739)은 우리나라 사람은 신령스러운 백두산 정기를 받아 태어나기 때문에 세계에서 뛰어난 인재가 출현할 것을 예언한 바 있습니다. 강원도에 인재가 많이 나는 것은 춘천의 박사마을이 그 예입니다.
산은 흉년을 당했을 때 민중의 삶의 먹거리를 대주는 자원이 되기도 했고 전쟁과 난리를 만나면 피신처도 되는 등 인간 생활의 보호막 역할을 해줍니다. 그리고 웬만한 가뭄에는 산에서 흐르는 도랑물이 참으로 소중한 역할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산골 사람은 평야에 사는 사람보다 일거리가 많은 관계로 아주 부지런합니다. 농부는 산과 골짜기에 밭을 개간하여 수많은 조그만 배미가 마련됩니다. 밭은 졸졸 흐르는 물을 이용하여 논으로 바꾸는 번답(反畓)이 생깁니다. 한 마지기의 논이 20여배미가 넘는 땅도 있습니다. 한 배미가 정말로 손 바닥한 논도 있다는 표현이 그리 큰 과장이 아닙니다.
또한 강원도는 산세가 너무나 험준하여 조선 시대에는 군사훈련을 위한 강무장으로 여러 번 선택된 곳도 있습니다. 특히 강원도에는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중요한 위치를 점유했을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강원도는 이런 산의 이점을 살리는 방향으로 노력을 한다면 엄청난 부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강원도에는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치악산 등 많은 명산을 가지고 있으며 도청소재지가 춘천으로 정해진 후 춘천이 행정도시로 되어 있으면서도 도내 군현간의 교통이 가장 불편한 지역에 해당합니다. 2003년에 제1회 경춘마라톤대회가 열린 후 매년 열리고 있습니다. 강원도 지역이 일반 국민에게 잘 알려지게 된 계기는 군 입대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강원도 지역은 군사적 요충지로서 많은 사람이 군대생활을 통해서 강원도와 인연을 가진 사람이 많고 결혼을 강원도 사람과 하는 계기가 된 사람도 많습니다.
강원도의 조선 초기 15세기 경의 인구는 총인구가 700만 명으로 추산할 때 30만 내외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강원도는 11,084호 구 29,000으로 파악되어 경상도의 4분지 1, 충청도의 3분지 1. 전라도의 3분지 1 인구였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도의 순서가 경기, 충청, 경상, 전라, 황해 강원도 순서였는데 18세기 말 정조 대에 편찬된 호구총수에는 경기도, 원춘도(강원도), 충청도 순서로 되어 있으며, 인구가 32만명으로 경상도의 5분지 1, 전라도의 4분지 1, 충청도의 2.6분의 1로 나와 있어 조선후기에 강원도 인구가 줄었음을 대충 파악할 수 있다.
강원도 지역은 산악지역이기 때문에 전염병의 유행이 크게 번지지 않는 장점을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19세기에 호열자가 전국을 휩쓸 때에 삼남지역보다 큰 피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는 산의 정령이 도와준 것이라기보다는 지리적 이점으로 해석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리를 역사연구에서 대단히 중시하여 해석하여야 할 것입니다. 고문서의 해석에도 지리적 환경과 인문적 환경을 함께 고려하여 해석하여야 할 것입니다. 인문적 환경이라 함은 양반들의 삶, 세거한 집안의 문제 등이 있을 것입니다만 이는 설명을 줄이겠습니다.
강원도에 찾아 오는 한국 사람은 하늘과 땅과 인간의 삼요소가 함께 부르는 자연의 교향곡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겉보기만 보고 가는 격이 될 것입니다. 자연과 일체되는 이런 인문 자연적 전통을 인식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천지인을 조화롭게 생각하는 것은 한국을 포함한 동양의 독특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이 일체라는 점을 외국 관광객에도 강조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저녁에 자면서 이 삼위일체의 교향곡을 꼭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건강에 달리 구할 수 없는 희귀한 종합적인 원동력이 생성될 것이며 하시는 일이 잘 성취될 것으로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
학회에 우리 내외를 싣고 간 안승준 박사가 선생님 구경이나 하고 오시라고 차를 빌려주어서 나는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춘천에 있는 청평사를 가기로 했다. 청평사는 내가 박사학위를 받을 때에 이자현이라는 거사가 머물렀던 곳이라 한번 꼭 가보고 싶었던 사찰이었다. 춘천에서 25킬로미터 쯤 떨어져 있지만 높은 고개를 넘어야 했다. 시간은 40분-50분이 소요된다.
청평사를 차를 몰고 가는데 가는 도중 38도 선을 넘었습니다라는 도로 표지판이 있었고, 엄청나게 굴곡이 진 도로를 구비 구비 돌아서 11시 50분 경에 도착을 했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1.8km를 걸어서 오봉산 청평사에 갔다. 이미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 들었다. 알고보니 소양강땜에서 배를 타고 오는 방법도 있었다고 한다. 육지로 오는 길은 멋진 산세를 느끼며 올 수 있고, 뱃길로 오는 길은 강과 산이 어울린 정취를 만끽하며 올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코스는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한 번 더 와보고 싶은 코스다.
청평사는 고려 예종, 인종 때 권좌의 핵심에 앉았던 이자겸의 4촌동생이었던 이자현이 관직인 대악서승 직을 버리고 청평사에 은둔한 곳으로 널리 알련 진 곳이고, 이에는 김부식이 지은 "문수원기"가 있는 곳이었다. 이는 일찍부터 금석문으로 소개되었고, 이자현은 고려가 승려불교에서 거사불교로 발전한 사례로 거론되는 잘 알려진 인물이다. 조선시대에는 그가 권력을 멀리하고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수양을 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 인물이다.
청평사는 주차장으로부터 1.8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1킬로미터는 평지이고 나머지 부분은 약간의 경사가 져 있다. 우리는 절로 올라가면서 안내판을 보니 신라의 공주와 중국 당나라의 태자의 사랑의 슬픈 사연이 쓰여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당나라 태자가 신라의 공주를 사랑하여 결혼하려고 하였는데 당나라 황실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아 태자가 목숨을 끊게 되었는데 그 날 구렁이가 나타나서 공주의 몸을 감싸고 있어서 여러 방법을 써 보았지만 풀어지지가 않았다. 하다 하다 안되니 황제는 신라의 어느 절에 가서 해결해보라고하여 공주가 돌아왔다. 청평사 자리에 거의 왔을 때 공주가 허기가 져서 "요기나 하고 갑시다!고 했더니 구렁이가 스스르 풀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구렁이는 태자의 원혼이고, 이 때 공주가 목욕한 곳을 공주탕으로 칭해오며, 구렁이는 하늘로 승천했다는 것이다. 그 곳에 곳에 탑을 세웠는데 그 탑이 공주탑이라는 전설이 전해온다고 썼습니다. 골짜기의 물을 보니 섞임이 없는 천연 그대로의 맑은 물이었다. 폭포는 더위를 한결 시원해주고 있었다.
거의 평지길을 가다가 7-800미터는 경사가 조금 진 곳이고 그 설명을 읽어보니 고려 광종 25년에 창건된 절로 이자현이 문수원을 창건하고 김부식이 찬하고 고려의 4대 명필인 탄연이 쓴 "문수원기"가 소개되고 이후 고려 왕실의 많은 도움을 받았며 고려 말의 나옹화상의 선종의 법맥이 이어진다고 써져 있었다. 고려 중기는 거사불교가 유행하였으니 이는 지도층이 불교 신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대부분의 국민이 불교에 귀의했음을 의미한다.
나는 대웅전에 들어가 참배를 하고 만등불사에 참여하였다. 낙암거사 권속을 위해서 등불을 밝혀달라고 부탁했다. 집식구는 늦게 대웅전까지 왔으나 무릎이 아파서 절을 할 수 없다고 참배는 하지 않았다. 절은 새로 지은 것이었지만 우리의 마음을 편안히 감싸준다는 느낌을 가졌다.
우리는 되집어 돌아왔다. 청평사는 소양호에서 배를 타고 오는 코스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청평사를 오르는 길은 산자가 수려하고 옆의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때로는 폭포를 지어 흐르고 있는 모습이 나에게는 참으로 감명을 주는 절이었다. 내가 카메라를 가지고 가지 않아서 사진을 한 장도 찍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었다.
4시 경에 학회에 돌아와 종합토론에 참석하고 학회는 6시 30분에 마쳤다. 우리는 춘천닭갈비 집으로 유명한 "신촌화로집"에 가서 식사를 하고 세종호텔에 와서 잤다. 손승철 교수의 배려로 아주 환경이 좋은 곳에서 편안한 잠을 잤다. 새벽 3시 30분에 나는 잠이 깨어 나와보니 참으로 조용한 분위기가 좋았고, 호텔 뒤에는 높다란 산이 감씨주고 있었다. 다음날 우리를 안내해주고 도와준 손승철 교수의 설명을 들으니 이 곳이 일제 시대 신사가 세워졌던 곳이라는 설명을 들으니 과연 경치가 빼낸 곳에 신사를 지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날 8시에 일어나 해장국 집에 가서 식사를 하고 우리는 강원대학교 박물관에 가서 2-3 .4층의 진열실을 돌아보았다. 동충하초에 대한 진열실이 특색이었다. 그리고 수집한 고문서를 참관하고 우리는 서면 신숭겸 유적지를 갔다. 신숭겸은 장절공이라는 시호를 받은 고려개국공신의 한 사람으로 팔공산 전투에서 견훈의 공격을 받았을 때 태조 대신 죽임을 당한 일화는 널리 알려진 상식이다. 그 묘소가 잘 가꾸어졌다. 신숭겸의 아명은 능산이라고 하나 이는 삼국사기 해석자들의 잘못으로 백옥삼, 능산으로 읽은 잘못때문이고 이는 백옥 삼능산으로 읽어야 옳다. 기념관에 들려서 여러 문헌을 보았다. 서면은 박사가 125명이 나온 곳으로 박사마을로 지칭한는 곳이다. 그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1시에 우리는 귀경길에 올랐다.
나에게는 참으로 의미 깊은 즐거운 여행이었고 학회의 좋은 발표를 들을 수 있었다.
여러분의 도움으로 즐거운 여행을 하고 의미있는 학술회의에 참가하였다.
: 본문 중 연경재 성해응을 "서명응"으로 잘못 서술되었던 것을 "성해응"으로 바로 잡았습니다. 오기를 해서 독자 여러분에게 심심의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11. 7. 26)
|
첫댓글 다음에 춘천을 방문하실때 연락주시면 소양호에서 도선을 이용하시는
코스로 청평사 구석 구석 제가 안내해 드릴께요.*^^*
제가 사는곳이 춘천 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