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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남 자체만으로도 가슴설렌다. 내게 그런 자유가 있다는 것이 떠나고 싶어도 그렇지 못해하는 선배에게는 솔직히 미안함이 아니라 '행복해 미칠 지경이다'. 이유가 있어서 목적지로 향하고 다음을 꿈꿀 수 있으면 더 행복하다. 늘상 배낭여행은 자신과 많이 만나고 패키지 여행은 사람과 많이 만난다. 연수가 끝나는 때까지 부딪쳤던 모든 사람이 새롭고 즐거웠다.
환경교과 연수인만큼 자료집을 꼼꼼하게 읽었지만 미리 읽어 왔던 실크로드관련 2권 책도 막상 떠나는 순간 기억 저편으로 달아나버렸다. 그러나 한 가지! 황사의 진원지를 찾아서나 실크로드의 사막은 무관하지 않아 여로의 감상 첫 맛은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서역으로 향하는 그네들의 대장정이 인생을 망라하는 애환과 역경으로 결코 달콤하지 않았을 것을 고생을 모르고 자란 철딱서니 없는 내가 염치없이 낭만에 젖는 감상따위는 절제해야겠다는 무장으로 속내를 다지면서 그렇게 9일간의 실크로드를 시작했다.
1시간 늦추어진 출발에 인천에서 밀리는 차량으로 비행기를 제시간에 탈 수 있으려나 조바심이 컸는데 다행히 탑승이 순조로왔고 귀여우면서도 듬직한 초등4년 채호랑 농담따먹기도 좋았다. 밤 1시가 넘어서 우루무치 공항에 내렸을 때, 이국 밤하늘엔 정수리편에서 하현으로 기우는 보름달이 선명하고 연탄가스 같은 매연이 가득해서 첫 여행지 인도 델리공항이 생각났지만 야릇한 향내같은게 없이 순순해서 견딜만했다. 양복넥타이 정장에 몇 시간을 기다렸다는 최광용가이드의 간단한 인사가 있고 호텔숙소에 도착, 이남수 선생님과 짝지되어 505호 객실 잠자리에 드니 시각은 3시 30분이다.
둘째날 아침은 호텔 뷔페식사로 열렸다. 밥을 잘 챙겨주시는 이남수 선생님께 배운게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그분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가벼운 몸놀림은 지금도 눈에 삼삼하다. 조식후 버스로 천지천산에 다다라서는 케이블카로 밧데리차로 이동하면서 유람선도 타고 만년설을 배경으로 사진도 찰칵했지만 백두산 천지를 알아버린 님들에겐 감흥이 시드렁하다. 곳곳에 인도의 난과 비슷한 밀떡 낭을 구워파는 가게가 눈에 띄였고 결국은 맛을 봤는데 그 맛이 인도보다 다양하고 배고픈 참에 맛도 있었다. 현지식 점심은 다행이도 중국고유의 향이 적고 기름도 그닥 많지 않아 다들 만족이다. 그리고 투르판으로 가는 길..가도 가도 사막이다. 간간이 천산줄기가 옆에 나란하다가 멀리 나앉아 있기도 했지만. 그림으로 보던 기대했던 사막의 모래가 아니어서 창밖의 시선을 거두고 가이드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고비사막이란다. 자갈과 흙이 뒤섞인 모래사막이란 어의로 고비사막이란다. 차 안에서 장장 5시간을 가면서 각기 다른 구도의 길을 떠났던 법현과 현장, 혜초스님을 생각하며 최초로 비단길을 연 장건의 투구쓴 모습도 떠올려보고 유목민들의 삶의 일부였던 초원 길, 아랍 상인들의 생존의 대장정과 낙타행렬을 그려보기도 했다. 유라시아 대륙을 폭풍처럼 휩쓸다 사라져간 훈족(흉노족)병사들의 말발굽과 몽골족의 영예로운 정복은 세기를 달리한 채 역사속으로 사라져갔지만 그들의 흐미한 족적은 어느 사막에선가 모르는 결에 교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괜시리 들떠기도 했다.
최가이드님의 해설은 명료해서 수첩에 빽빽하게 적고 싶었지만 뒷좌석의 흔들리는 차안이다 보니 못난 글씨가 춤을 춘다. 신강자치구는 동력자원이 풍부해서 우리나라 입장에선 배가 아플 정도로 부럽다. 석탄, 석유매장량에 풍력발전까지 한다니(고비사막에 줄지어 늘어선 하얀 풍차는 200여개가 넘는다..) 동력자원이 무한한 사막이 결코 황무지가 아니다. 그리고 우루무치에서 난다는 판도 복숭아는 생김새가 너무 재밌어서 우습고 맛또한 일품인게 가이드의 일화인 어느 할머니가 욕심낼만하다. 밤 9시가 넘어 도착한 투르판..저녁후에 야시장이 있었지만 너무 피곤하여 바로 잠자리로 들었다. 외지에서 이렇게 곤하게 잠을 잘 잔 것은 정말 처음인 것 같다.
3일째, 기대에 찬 투르판. '불의 땅'이라는 별칭이 무색하지 않게 아침은 정말 뜨거웠다. 가장 지대가 낮은데다 산지로 막혀 바람이 통하지 않으니 사막 지열로 인해 이렇게 덥다는 것이다. 1년 강수량이래야 20mm정도라니 더운 열을 어찌 식힐까..다행한 것은 만년설 녹은 물을 지하수로로 통해 연결하여 물이 부족하지 않은 것이다. 버스에 타고 얼마 가지 않아서 그림에 본 그대로의 화염산이 나타난다. 500m정도 높이의 100여km라니 파노라마의 장관이다. 비탈의 굵은 골격이 화염같이 생생하여 어릴 때 읽었던 손오공의 재주를 어울려 상상의 나래를 그려낼 수도 있겠다싶다. 고창고성에 다다르서는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들어갔다. 말 한 마리가 열 사람도 넘게 태우고 얼마나 왔다갔다를 많이 했는지 지쳐보였는데 마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휘두르는 채찍이 안타까워 차라리 걸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든 듯하다. 고창고성은 예전 융성했던 불국왕국답게 궁성과 사찰이 많았던 듯하고 강원이 복원되어 그자리에 남아 있다. 불도가 깊은 국문태왕의 청에 못이겨 현장법사는 한달이나 머물며 설법하였다니 구법승의 장도에서 마땅히 지와 덕을 행한 그 높으신 도가 존경스럽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꼭 들리겠다는 약속대로 돌아왔으나 이십년도 채 못되는 짧은 세월에 조국의 무력으로 고창국은 무참하게 패망하였으니 폐허가 된 이 자리에서 현장법사의 심경은 어떠했을까...2000년 가까운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사진찍느라 시끌한 강원자리 한 귀퉁이에서 '무상하다'고 일축해버리려니 나자신이 못마땅하고 되려 속되다는 생각이 든다. 고성을 빠져나와서 맛본 옛 고창국의 수박맛도 일품이었다. 수박을 자를 때 휘두르는 위구르족의 칼은 가히 예술적이다. 곡선으로 등허리가 하늘로 멋들어지게 휘어진 모양이 날렵하게 춤추는 무희의 몸맵씨를 연상시켜서 찍으려고 서둘렀으나 디카에 잡히지 않았다.
'편히 쉬는 곳'이란 뜻을 가진 아스타나 고분군으로 향했다. 전체가 고요하고 평화로와서 이름에 어울린다. 입구가 좁아서 7-8명이 들어갔다 나오는 차례로 봤는데 의미가 함축된 사물의 벽화가 생생한 선비재상의 묘와 상인(거부)의 묘와 미이라 2구가 있는 묘였다. 미이라는 남자와 여자가 마주 나란했는데 남자는 편안해 보였고 여자는 고통스러워 보여서 폐결핵이었다는 얘기를 듣고 삶과 죽음의 연결고리에 놀랍지 않을 수가 없다. 누군가가 있어 생명의 기만 살짝 불어넣으면 근육이 살아나고 피부가 재생되어 화기롭게 일어설 것 같은데 육신을 떠난 혼령의 주인은 어디서 떠돌고 있을까..
화염산의 장관이 끝나지 않은 채 베제클릭천불동에 다다랐는데 벽화의 색채와 기술에 놀라기 앞서 도굴꾼들의 야박한 행실에 분노와 함께 동병상린을 느낀다. 혹여나 이들 세기적인 도굴꾼이 아니었다면 국보급의 문화재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역사의 한 장면이 끊어져 진실이 묻혀 졌을거라는 망발을 들을지언정 문화재도굴죄와 복구불가한 훼손을 어찌 변명할 수 있을까. 아주 기술적으로 교묘하게 떼어낸 자리엔 문명이란 이름하에 이기에 가득찬 인간의 시커멓게 썩어버린 양심만이 돋보인다. 구한말 선교사란 미명속으로 사라져간 우리네 유산들..지켜내지 못한 조국의 암울했던 운명이 제국열강보다 미개하여 벌어진 일은 결코 아닐진대. 또한 예보다 수량이 적다고 가치가 못하다고 덜 통탄해야 할 일이 아니다. 모형전시관에서 그들 도굴꾼의 모습과 도굴장면들을 스쳐가며 도굴해간 그림과 석불의 모습을 대하니 아쉬움은 덜어졌으나 모조라는 것에 고귀한 가치와 신비는 사라지고 제자리가 아니였으니 어찌 감흥을 얻겠는가.. 예술의 가치는 느끼는 자의 몫일진저! 여의봉온도계는 60도가 넘는다. 너무 뜨거워 양산밑에 들면 암치도 않다. 점심 후 오수에 들기로 하여 호텔로 돌아와선 2시간 정도 쉬었다.
미인탑이란 별칭에 걸맞는 이슬람탑 소공탑과 청진사를 둘러보고 포도농원에 들러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위그루인들의 융성한 대접? 투르판이라는 지형과 자연이 만들어낸 포도는 씨도 없고 껍질째 달고 시원하다. 민속의상?에 어우러진 춤에 의젓한 우리의 소년 정채호의 멋들어진 춤사위가 초대되어서 더 즐거웠다. 님들께선 건포도를 제법 많이 샀는데 원래 건포도가 싫어서 하나도 사지 않았다. 포도주 맛이 좋았다면 서너 병은 샀을텐데 그것도 아니었고 넝쿨에 달려있는 포도 몇 낱은 너무 싱거웠다.
한낮이 훨씬 지난 태양의 사막 바람은 교교하여 교하고성은 걸어서 둘러보는 기분이 최상이었는데 전략상 요충지다운 면모가 뚜렷하다. 밑으로 깍아내려가면서 만들었기에 훼손이 고창성보다 덜하다지만 세월이 좀벌레처럼 스미어 든 풍화작용을 감당할 수 없었을 터...버스 안에서 내도록 보아온 네모난 아파트같은 포도건조창(고)이 가까이 떼무덤처럼 열군하여 있고 다른 편으로 멀리는 한 쌍의 이슬람묘(마하지?)가 외롭다. 짧았지만 지난했던 교하고성에 얽힌 역사의 한 장을 읽어보라 하고 싶었을까.. 일몰 때까지 서성이다 내려오며 녹슬고 커다란 감옥자물통같은 쇠가 달린 냉동고박스를 열고 내주는 녹두아이스크림은 정말 오래동안 먹고 싶도록 달콤하고 시원했다. 그리고 저녁은 양고기 바베큐! 빨간천을 깔고 등장한 양고기는 의식이 있었다. 가장 경륜있는 분(의당 회장님!)이 칼로 배를 가른 다음에야 음식으로 나눠지는데 이 분에게 왼쪽 뺨을 잘라 드시게 하는 거다. 우훗~재밌다! 과연 오른쪽 뺨은 어찌 됐을까..요리장은 아닐테고 누구에게로? 식사 첫머리에 나왔으면 담백하고 부드러운 양고기 맛을 실컷 즐겼을텐데. 양꼬지 시시케밥?은 지난 북경여행때보다 입맛에 맞지 않아 못 먹겠다. 짝지샘은 낮의 건포도에 속이 달려서 물과 맥주만 마셨다한다. 식사 때마다 지혜롭게? 준비해주신 맥주맛은 한번도 거절하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끼니마다 비슷한 국수에 야채에 생선에 식상할 때가 많은 못된 뱃속이었지만 맥주는 늘 새롭고 신선했다. 식후에 발맛사지까지 있었으니 오늘은 호사에 겨운 밤을 맞는다..자정이 가깝지만 못생긴 달빛은 기운을 잃은 모양.. 황사가 안개처럼 촉촉하고 뿌연 도시의 불빛과 어울려 이국의 정취가 처음같이 낯설게 한다. 객실로 돌아와 하는수 없이 블랙커피를 한 잔하고 가져온 시집을 화장실에서 읽었다. 3시 40분쯤에 잠자리로 들다.
4일째..늘상 일어나는 그 언저리 시각 6시 30분 아니면 7시..일찍 일어나시는 짝지샘 덕분이다. 버스로 조금 이동하여 어제 가지 않았던 지하수로 카레즈를 보고 나오면서 민속음악 테이프를 샀다. 여행객이 가는 곳마다 확성기 음악이 귀를 찢는데 여기까지는 늘 조용해서 곡조가 어떨지 궁금하다. 대개는 애상적인 발라드풍 한 두곡에 나머지는 빠른 춤곡들이 아닐까 싶다. 선선에 도착해서 쿠무타크 사막은 정말 감흥이 컸다. 탱크바퀴가 내는 굉음의 사막차를 타고 가파른 사구를 오르내리는 스릴은 호들갑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사구정상에서 내려다 본 광활한 사막의 빛과 능선과 감촉은 아름다움에 대한 그리움과 미지에 대한 동경! 정녕 그대로이다. 아니 사막에서 홀로 멀어져 가 돌아오지 않은 고독한 수도자의 갈망을 헛되이 꿈꾸었다면 그것일수도 있다. 그리고..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포토제닉 최선애 선생님의 아라베스틱?(몸짓표정으로 치면 일천 일만가지나 다양하지 않은가!) 아라비안나이트의 천일야화 주인공(이 중요한 순간에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다니 쯧!)같이 우아한 자태..아니 요염한 자태로 사막의 여주인이 되어 사막을 맞이한 환희에 환호성을 더해 주었으니! 아하하하~~!! 과연 아름다운 사람이다. 사막으로 뜨는 별빛도 없고 낙타의 슬픈 눈망울의 하소연도 없었지만 오직 사막이라는 땅과 그 열풍 속으로 인간이 소란하여 일으키는 조화로움에 황량함은 사라지고 만다. 또 한번의 만남이 있을 것을 믿고 내려와 곧장 점심이다. 매끼니 하옥희선생님과 이남수선생님의 밑반찬 덕에 배를 채웠는데..무거운 반찬가방을 한번도 들어주지 못한 것이 늘 염치없고 죄송했다. 하미로 가는 길..버스 안에서 여행사 사장님의 멋들어진 노래가 정말 유쾌했다. 음악을 함께 하여 늘 즐거운 사람같다. 최가이드님의 역사얘기도 꽤나 들을만했는데 그만 잠들고 말았다. 40분쯤이나 잤을까..이틀동안 세네시간 수면이 정신을 부셔버렸나보다. 개운치 않은데 도로 양편으로 둔덕이 있는 곳에서 정차하여 왼편은 남자, 오른편은 여자화장실로 이용한다고 다리운동삼아 내리게 한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넓은 2차선도로로 큰 차들이 꽤나 요란하게 지나가기도 하고 더러 스치듯 빠르게 달린다. 예전엔 버스가 없어 찝차로 실크로드를 여행한 선험자들이 그려진다. 모래가 일으키는 바람속으로 사라져 가듯 달렸을까.. 현장법사가 해골을 이정표삼아 갔던 길을 짧은 순간이나마 만났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여정은 어디쯤에서 스쳤을까..저멀리 우루무치에서 따라온 천산산맥은 무뚝뚝하여 말해줄 수 없고 살갗을 태우고 피를 말리는 고통의 즙을 즐겼을 태양은 잔인하여 말이 없다. 가장 적게 먹고 가장 많은 짐을 지고 가장 멀리 간다는 낙타는 그림자도 없다... 사람들이 엎드려있어 무얼 줍는가 했더니 소금덩이를 줍는다..사막에 소금이라니..아주 오랜 옛날에 이곳이 바다였고 염호도 있다는 얘기를 들은 듯 하다. 군데군데 옆사람과 소담스런 웃음과 낮은 목소리는 아늑하여 안온한 현실을 깨우고 귀기울이다 말다 하며 도착한 시간이 8시 50분이닷. 하미에서의 하룻밤..집 떠나온 날을 헤릴 자 그 누구이뇨..
5일째.. 하미에서의 아침 식당에서 처음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서 깜짝 놀랐다. 12억 인구가 실감나는 중국인들의 단체관광인 것 같다. 만두 한 개와 우유 2잔..그리고 토마토로 배를 늘렸다. 버스에서 사장님의 건강체크레이더에 드뎌 신호가 점점이 잡힌다. 설사..연세도 있으신 분들이라 피곤해서 생기는 일이라 한다.
회왕릉은 단아하고 조촐하여 경외심을 갖게 한다. 왕과 신하가 차별없이 평등하게 묘를 쓴 회족들의 정행일치 종교관에 존경심이 든다. 기원전 6세기에 불교, 그리고 기독교, 기원후 6세기에 이슬람으로 가장 늦게 발흥했지만 가장 빠르고 폭넓게 전파됐다고 하니 이런 예하나로 이유가 충분하지 않은가 싶다. 다른 분들이 화장실에 갔다올 그 시간즈음에, 밖에서 처음으로 무슬림 여인을 만났다. 폭이 넓은 인도와 차도를 두 개나 떨어져 있었지만 순간 우리들의 눈빛은 마주쳤고 정지해 있었다. 온몸을 챠도르로 가렸으니 그녀가 나를 본다면 눈빛으로 만나지 않을 수 없는 운명같은 순간이었다. 어쩌면 필연같기도 하다. 잠시 디카를 들어올리며 찍어도 좋으냐는 신호를 던졌는데 살짝이 빗자루를 옆으로 치우며 포즈를 취해준다. 줌으로 최대한 당겨 흔들리지 않게 조심스레 받쳐 찍고는 살짝 손을 들어 답례했다. 그 여인은 이내 본래의 자태로 쓸기를 조용히 한다. 날 한번도 안 본 채..이편에서 내가 숨을 멎은 채 아직도 쳐다보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이렇게 아침 9시15분경의 고요한 만남은 끝났다. 그동안은 양편으로 한가롭게 뎅그러한 차도를 자동차 서너 대가 지났을 시간이다. 같은 동양인이지만 불교도와 회교도로서 무언의 교감이 있었지 않았나 싶다. 가슴 속 한켠에서 상큼한 바람이 일었다.
곧장 버스를 타고 빠리쿤 초원으로.. 승마가 있었다. 1시간 승마약속을 20-40분으로 어기고 팁문제로 상스런 얼굴들과 마주했던 어수선하고 분분한 시간이었다. 최가이드의 자존심과 노력이 가상했지만 돈맛을 알아버린 그들에게 통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승마값으로 반만 치루었다니 최가이드의 한판승! 점심 때 나온 특식 낙타발 요리가 느물거렸지만 귀한 것이라니 한 젓가락은 해야지 싶어 맛보았더니 에게! 무슨 맛일까..?? 용기가 부끄럽다.
이제 돈황가는 길이다. 최가이드와는 다시 우루무치에서 만나기로 하고 다른 버스에 오른다. 강대근 가이드를 만나고... 가도가도 끝이 없는 사방이 헤일수 없는 고비사막길이다. 더러 꽃도 보고 말로만 듣던 신기루를 본다. 사막 지평선 안쪽으로 길게 놓여져 있는 에메랄드빛 오아시스 바다! 손에 닿을 듯하여 길을 잃는다 해도..미친 듯이 달려가고 싶은 바다이다. 문득 신기루에 홀려 길을 잃고 정처없이 버스에 몸을 실려 어딘지도 모르고 사막을 가고 있지나 않는가 싶은 착각도 든다. 밤 9시 가까이 되어 도착한 돈황숙소는 가히 궁성답다. 식당으로 가는 회랑도 길다랗고 가운데 뜰에선 민속공연이 아리땁다. 화장실에 휴지가 단정하고 손을 말리는 기계도 최신형?이다. 그리고 돈황맛사지는 1시간 20분이나 받았으니 3불팁이 아깝지 않다. 괜시리 화사한 기분이 들어 잠들기가 아까운 밤이다.
6일째.. 작은 오아시스도시 돈황 아침이닷. 6시 40분경 일출을 일별하고..식당으로 가는 회랑이 짧지 않아 오히려 지나는 걸음이 가뿐하다. 어제부터 목이 아파서 편도선이 걱정됐지만 한낮이 되면 금세 잊어버리고 괜찮을 것 같다. 그리고 가장 기대되는 돈황에서의 하루이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명사산을 밟기 위한 헝겊장화가 유난스럽다. 형광빛의 주황색이 사람 가득하여 물결치듯 출렁거린다. 여린 모래가 들어올세라 꼭꼭 여미고 낙타에 올랐다. 낙타..낙타가 앉은 모습은 좀 눈물겹다. 앞다리와 뒷다리의 앉음새를 보면 얼마나 불편하게 느껴지는지! 나는 허리디스크 때문에 종종 꿇어앉는게 습관이 되어 보는 사람마다 편하게 앉으라고 일침?을 받는다. 저 낙타는 앞다리와 뒷다리의 꿇음방향이 반대이고 일어설 때와 앉을 때 충격을 느끼는데 이것이 바로 낙타의 불편한 앉음새때문인 것이다. 가슴이 철컥거리고 내 무릎이 꿇리는 듯해서 마음이 아프다. 말처럼 서있어서 타는 사람이 불편한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또 낙타의 순한 눈망울과 긴 속눈썹, 긴 턱입술이 가여운 동물의 태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하지만 전체적인 품새는 얼마나 귀족스러운가! 흔히 사람들은 말을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말궁뎅이가 도발적이고 잔망스러워서 싫다. 12,000km 비단길은 하루에 30-40km를 쉬지않고 간다해도 1년이 걸린다는데 낙타로 흔히 2-3년이 걸린다고 한다. 느림보이지만 낙타를 닮고 싶다는 어느 작가의 고뇌어린 독백을 낙타는 이해할 것 같다. 5분정도 갔을까.. 낙타에서 내려 5분정도 걸으니 명사산 사막이고 작은 오아시스 월아천도 보인다. 사진에서 보았던 그 진초록의 물빛은 아니었지만 초생달 모양은 여전히 신비롭다. 3000년 세월동안 한번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는데 수로공사?의 잘못이 있었는지 지금은 물을 대고 있으며 수심도 5m에서 2m로 낮아졌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옆에는 쉼터로 정자를 번듯하게 2층으로 지어올렸는데 그곳에서 내려다본 월아천의 모습이 별다르지 않았다. 곧장 150여m 명사산으로 올랐다. 열풍과 부드러운 모래로 걷기가 불편했지만 5500m고지 칼라파타르도 올랐던 몸을 자부하면서 열심히 올랐는데.. 최선애선생님의 핼쓱하신 얼굴이 보여 깜짝 놀랐다. 해발 2200m이다 보니 지병인 당뇨에다 화상 때문에 약을 무리하게 복용하여 설사가 겹친 몸으로는 정말 무리가 되신 것이다. 가장 늦게는 짝지샘이신 이남수선생님께서 클라이막스를 장식했다. 정말 연세가 있으셔도 한번도 빠지지 않으시고 웃음과 여유가 가득하셨던 선배선생님들께 존경의 고개가 숙여진다. 명사산 사구는 타클라마칸사막(한번 들어가면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죽음의 사막)의 끝자락이라 하지만 얼마나 넓은지 40km길이를 가늠할 수가 없고 폭 20km를 아름할 수도 없다. 바람에 모래알이 쓸려갈 때 울음소리가 난다하여 '우는 모래산'이란 뜻이라니 그 이름뿐인 명사산이 아니라면! ..이 사막 어디로 방향을 잡으며 어느 사구를 지나 저 끝없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나가야 했을까..우문이라도 늘어놓으면 현답할 자 누구일까...! 돌개바람 악령소리 없으니 그저 묵묵하니 사진만 찍고 모래썰매를 탔다. 비단결같이 고운 모래를 씻어도 씻어도 못다 씻어질만큼 흠뻑 맞았다. 점심 먹으러 가면서 껍질 푸른 배를 맛보았다. 껍질째 먹을 수 있어 좋았고 물이 많아 시원했다.
드디어 중국 3대 석굴(운강, 용문)중의 하나인 막고굴로 향했다. 우리가 원했던 이신교수님을 만나뵐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라고 좁은 길을 사람과 사람이 비껴나며 참 열심히도 오르내렸다. 한족이고 전라도말투여서 처음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2시간 넘게 함께 하다 헤어질 때가 되어서는 너무나 잘 이해되는게 야속하기도 하고..굴 속이 좁고 어두워서 한 팀이 들어가면 밖에서 기다렸다가 우르르 들어가고 또 급하게 나오고 어떤 곳은 자물쇠로 여닫기도 하여 갑갑하기도 했지만 왜 그럴 수 밖에 없는가는 저절로 이해되고 탄성이 터졌다. 막고굴은 명사산 동쪽 끝 절벽에 남북으로 1600m에 걸쳐 여러층으로 뚫려 있는데 벽화와 불상이 남아있는 굴만도 492개나 되며 아직 미발굴인 굴도 많다고 하니 규모만으로도 세계 최대의 노천 박물관이라 한다. 또 북위때인 4c부터 원나라 14c까지 10세기에 걸쳐 1000년 동안 이루어진 최장의 역사를 이어간 세기적인 보고인 것이다. 이신 교수님의 후래쉬불빛에 하나하나 드러날 때마다 정교한 채색의 아름다움이 그대로인 것을 보면서 한낱 기름등잔에 의지해 작품을 완성했을 그 장인의 정신이 어떠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종교적인 열정과 예술적 집념이 하나되어 승화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수준높은 예술품을 남길 수 있었을까..장인들의 치열한 삶의 경지는 바로 신에 다다른게 아닐까..어리석고 무지한 나 자신의 경지는 한없이 아래로 아래로 곤두박질한다. 참으로 아쉬운 것은 이토록 아름다운 벽화와 불상을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게 영원히 폐쇄한다고 한다.(마지막으로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벽화와 불상조각 석굴을 나서면서) 빛에 의해서 색채가 변질되고 습기 때문에 벽화가 훼손될 우려가 있음을 우리 눈으로 확인하면서 안타까움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몇 개의 석굴을 더 보았느니 덜 보았느니 하는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는 책으로 화보로만 대해야 한다니..참 서글픈 일이다. 조금전 마악 좀더 눈에 담아두지 못해 안달하고 좀더 자세히 보지 못하고 종종걸음치며 물러나와야 했던 조바심이 한낱 헛된 바램이라니..참 슬픈 일이다. 오늘의 경이로움과 경외심으로 앞으로 만나는 책속의 그림에서 사진에서 예술적 가치를 다시 대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이제 여기서 그만 나의 여행기를 접어야겠다. 그리고 조용히 경주 석가탑을 찾았던 내 모습을 그려내야겠다. 한때 석가탑 앞에 앉아서 하루종일 보아도 지치지 않는 그토록 아름다워 했던 미각을 살려내어 미련을 지워야겠다. 어쩌면 다시 석가탑을 찾으면서 막고굴의 벽화를 그리워할지도 모르겠다.
여행이랍시고 실크로드를 찾은 이유를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고전의 만남에 대한 기대뿐일 수도 있었고 인간의 소소한 이야기에 매료되어서이기도 하다. 덤으로 장인이 빚어낸 예술품의 지고지순한 아름다움을 탐한 것도 같다. 인류문명의 위대함은 거치른 황야의 사막 위에서도 끊임없었고 ..그리고 목숨을 다하여 그 길을 가고자 했던 무명인들의 삶은 역사의 탄탄한 버팀목이었음에 소박한 경외심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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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구머니이나..! 여기까정 읽지 않기를 바랬는데..쓰잘데없이 길게 적어서 죄송합니다.
첫댓글 잔잔하면서도 유식함이 막 묻어나고, 감성의 저편이 한없이 깨끗하고 고운 내음. 한비야도 울고, 유홍준씨도 울고 가야 하겠구려. 이글 보고 야코 죽어서 이제 보고서 못 쓴다면 책임 지셔요. 호호
아는 것 만큼 보인다더니, 역시... 준비된 저력이 느껴지네요. 구석 구석 맛깔스럽고 잔잔하게 고운 속내음이 묻어나는 여행기를 읽어내려가면서 다시한번 실크로드대장정(?)을 더듬으며 복습의 기회도 되었으니 더욱 더 좋을씨고. 숭니! 화이팅!
선생님 글을 읽고 있으니 지나간 여정들이 슬라이드 필름을 보는것 같습니다. 보고서 작성이 또 다른 걱정으로 압박해오네요...
선생님의 섬세함 , 감성적 여행기 놀랍습니다. 우리들의 발자취를 잘 표현해 주어서 고맙고..... 참고하겠습니다.
그간 얼마되었다고 지나온 시간들이 가물가물 했었는데, 영숙선생님 덕분에 새록이 기억이 되살아 나네요. 생생한 글 고맙습니다. 잊을만 하면 들려서 또 읽고 또 읽곤 해야겠어요. 내겐 너무나 고마운 글이었습니다. 아름다운 비단길!! 잊지 못 할 거예요. 땡큐~~~~~~~~~
후~ 숭니님 글 첨부터 끝까지 완주. 전 함께 여행하지 않았지만, 동행한 기분입니다. 글도 어찌나 맛깔스러운지- 같이 갔더라도 느끼지 못했으리라. 아마 선생님은 작가이신가봐. 좋은 글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고요, 차후 함께 동행하는 인연이 닿기를 기원합니다. 환경교과연구회 부회장 겸 약사초등학교 교감 백남호 드림.
헤헤헤..방학동안 뜻깊은 경험하셨네요. 그 장문의 글에 놀랐고 글의 표현이 감성이 넘쳐나는 듯 하여 애절하기까지 합니다. 여행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감성을 일깨워주는지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되는군요.. "천일야화에서 이야기하는 여인은 세레자드, 동생은 두냐자드이고 등장인물은 많지만 전 주인공을 꼽으라면 신드밧드를 꼽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