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 선조의 건강법(5)
오늘도 조선의 제14대 임금인 선조의 건강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장동민 한의사, 연결돼 있습니다.
(전화연결 - 인사 나누기)
Q1. 오늘이 조선의 14대 임금,
‘선조’의 건강법 마지막 시간인데요.
지난 시간에도 살펴봤지만
선조가 임진왜란 당시의 언행 때문에
왕의 권위가 이미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죠?
네 맞습니다. 일단 이미 선조가 나라를 버리고 중국으로 도망가려 할 때부터 신하들은 왕을 비웃기 시작합니다. 선조 25년 6월 13일의 기록을 보면, 선조가 말하기를 “내가 천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적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라고 얘기하고 있는데요, 말 그대로 왜적을 피해 중국으로 도망가겠다는 얘기입니다.
신하들이 그래도 이 땅에 머물러야 한다고 계속 아뢰자, “이 일에 대한 내 생각은 이미 정해졌다. 세자는 여기 머무를 것이니, 여러 신하들 중에 따라오고 싶지 않은 사람은 오지 않아도 좋다.”고 얘기합니다.
급기야 8월 2일의 기록을 보면, 두 달이 지났는데도 이렇게 계속 도망치겠다는 선조에게, 아예 대놓고 신하가 비꼬는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동을 건너면 필부(匹夫)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거면 그냥 여기서 필부가 되어 도망 다니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왕에게 “당신은 왕도 아니고 그냥 한명의 별 볼일 없는 사람일 뿐이다.”라고 비꼬고 있는 겁니다.
Q2. 왕조국가에서 신하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정말 심한 상황이었는데요.
임진왜란 이후에도
선조가 8년이나 더 왕위에 있었잖아요.
이 때는 제대로 왕 노릇을 할 수가 없었을 것 같은데요?
그게 또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선조는 왜란이 끝난 후, 선조 32년 7월 5일에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병 5천명을 동원하여 한반도 북쪽의 여진족을 토벌합니다. 성과도 매우 좋았는데요, 무려 천 채가 넘는 집을 불태우고 여러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듭니다. 실제 아군 전사자는 7명인데 비해, 여진족은 참수된 자만 115명에 이를 정도로 대승리를 거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선조가 “북로(여진)에 대처함은 명석하고 뛰어났다. 그러나 남왜(일본)에 대함은 명석하지 못했다.”라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뿐만 아니라 전후 복구에도 많은 성과를 거둔 것이 사실입니다. 즉 전쟁 시기만 빼면 선조의 국정운영은 나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선조의 무덤인 목릉의 이름을 따서 ‘목릉성세’ 즉 선조의 다스림이 태평성대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매우 좋았다고 평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쟁영웅으로 부상한 아들 광해군에 대한 시기와 견제로 인해, 왕실은 다시금 피비린내 나는 분란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Q3. 아들이 자신을 대신해서 큰 공을 세웠으면
당연히 칭찬해주고
힘을 실어줘야 되지 않을까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게 참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선조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사실 조선시대 왕들의 평균수명은 46세입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났을 때 선조는 59세였고, 세자인 광해군은 29세였습니다.
원래 이 당시 대부분의 왕들은 이 정도 나이가 되면, 이미 건강상태가 나빠져서 세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가거나, 대리청정을 시키는 경우가 관례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태종이나 세종의 경우가 이에 해당되었지요. 하지만 선조는 광해군을 인정하기는커녕, 전쟁이 끝나자마자 바로 32세 연하의 어린 왕비를 맞이하여 새로 적자를 낳는데 열중합니다. 결국 적자인 영창대군이 출생하면서, 서자인 광해군과 대결하게 되는 막장 파국에 이르게 됩니다.
Q4. 그렇다면 선조가 이 당시 아주 건강했었나요?
그래서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본인이 계속 왕위에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은데요?
안타깝게도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원래도 병약했던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피난 다니면서 더욱더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실제 임진왜란 중인 선조 30년 4월 13일의 <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선조가 침과 뜸 치료를 해달라고 재촉하자 어의들이 치료가 불가하다면서 그 근거로 아뢰기를, “신들이 다시 의관과 상의하여 보니 모두 ‘성상의 증세에 귀가 울리는 것은 편허(偏虛)의 증세인데,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서 한두 번의 침으로는 치유가 되지 않고 또 침을 맞은 뒤에는 여러 날 조리하여야 그 효험을 볼 수 있다.
(중략) 또 귀가 울리는 증세는 모두 상화(相火)가 위로 치솟아서 일어나는 것인데, 지금은 날씨가 너무 더워 쑥불의 화기가 반드시 경락(經絡)의 열을 더할 것이어서 뜸질은 더욱 할 수가 없으니 우선 서늘해지기를 기다려서 가을에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습니다.”라고 얘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Q5. 신하들이 말한 귀가 울리는 증세가
이명 증상을 말하는 것 같은데요.
이런 이명 증상을
침이나 뜸으로 치료하기 어렵다는 얘긴거죠?
네 맞습니다. 선조는 이러한 증상을 ‘편허(偏虛)’라고 표현했는데요, 말 그 대로 몸의 한쪽편이 허약한 증상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선조의 몸이 허약해서 침 치료를 하기가 어렵다는 뜻이었는데요. 실제로 다음 날인 선조 30년 4월 14일의 기록에는 선조가 이르기를, “오른편과 왼편을 일시에 점혈(點穴)하고서 침을 놓았는가?”하니, 의관이 아뢰기를, “오른편의 허한 곳에 침을 놓으면 더욱 허해지기 때문에 오늘은 왼편에만 침을 놓았습니다. 오른편은 다음 날에 놓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는 기록이 나옵니다. 즉 몸이 허약해서 반대편에 침을 놓겠다는 뜻인데요.
실제 이렇게 허약할 때는 한약을 같이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조 36년 10월 8일의 기록을 보면, “두통이 있고서부터 약을 먹은 것만도 이미 20여 첩이나 되므로, 이제 와서는 병을 고칠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문득 입에 써서 싫은 것만을 생각하게 되니, 병이 낫지 않고 약이 효험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약을) 보기만 해도 머리가 희어지는 느낌이다. 1년 내내 먹더라도 어찌 다 먹어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매일 저녁마다 하나씩 끊이지 않고 먹어 반드시 효과가 이어지게 함으로써 경들의 간절한 정성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Q6. 결국 선조가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물러나지 않고
계속 왕위에서 버텼다는 거네요?
네 그렇습니다. 선조34년 4월 10일의 <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약방에서 선조에게 치료 내용을 보고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성상께서 맞으신 침이 이미 7차례나 되어 혈의 수효가 매우 많은 데다 성후(聖候)에 본래 허열(虛熱)이 있으셨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허열이 더할까 항상 염려되었습니다.”라고 아뢰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한 4월 13일의 기록에도 “성상께서 7차례의 침을 맞으시고 또 7장의 뜸을 뜨셨으니, 성상의 옥체가 무리하셨을 것입니다. 매우 걱정되어 문안드립니다.”라고 보고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다시 말해 선조의 질병 치료를 위해 시술되었던 침과 뜸이, 오히려 선조의 허약한 기력에 무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Q7. 그럼, 결국 침과 뜸 대신에 한약을 먹게 되나요?
네 맞습니다. 이어지는 4월 16일과 18일의 기록을 보면, 선조에게 한약이 처방됩니다. 그리고 어의들이 선조의 처방전에 대한 분석을 하는데, 처음에는 선조에게 담열(痰熱)이 있다고 판단되어 폐를 맑게 하는 처방을 먼저 투약했지만, 3첩을 복용해서 어느 정도 담열이 내리자, 부실한 원기(元氣)를 보충하기 위해, 바로 투약을 중지하고 다른 처방으로 바꿉니다.
이 때 바뀐 처방이 바로 대표적인 보약처방인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인데요. 실제 이 처방은 지금도 원기를 보강시키는 처방으로 많이 사용되는데, 특히 중기 즉 위장기운을 좋게 하기 때문에, 장에 70% 살고 있는 면역세포들을 증강시켜서 면역력을 높이는 데도 많이 처방됩니다. 어의들은 여기에 각종 약재를 가감하고, 나아가 약재를 모두 꿀에 볶는 과정까지 거쳐서 선조에게 바칩니다.
Q8. 지난 시간에도 황연이라는 차가운 약재를
구워서 사용했다고 하셨는데요.
이번에도 약재를 볶아서 처방한 걸 보면,
선조가 정말 차가운 성질의 약을 제대로 먹지 못했나 봐요?
네, 실제 선조 39년 5월 23일의 <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선조가 자신의 증상이 악화된 원인 중에 ‘차가운 한약을 많이 먹은 것’도 있다고 말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어의들이 아뢰기를, “지금 의관을 통하여 삼가 들으니, 전일 왼편이 시고 아파서 침을 맞으셨고 온천수(溫泉水)에 담근 후에 다리에서부터 어깨와 귀밑까지 기운이 오르내리며 시고 아프다고 하셨다니, 신들은 근심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니,
왕이 답하기를, “특별히 말할 만한 증세는 없는데, 아마 습냉(濕冷)한 기운에 저촉되어 다시 일어난 듯하다. 급히 침을 맞고 쑥뜸을 뜨고자 한다. 기(氣)가 오래가면 치료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또 손가락의 병 역시 냉약(冷藥)을 많이 복용한 소치인 듯 하여 매우 염려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병증이 악화된 원인이 축축하고 차가운 기운에 접촉된 것과 차가운 약을 과도하게 많이 먹은 것 때문이라고 얘기한 것이지요.
Q9. 이렇게 차가운 기운을 몰아내기 위해서
선조가 했던 방법에는 또 어떤 게 있나요?
몇 가지 있습니다. 일단 선조 39년 5월 24일의 기록을 보면, 약방이 문안하니, “평안하다. 털 담요로 싸 땀을 흘린 뒤에 그 증세가 거의 나은 듯 하나, 그래도 남은 기운이 있다. 다만 열을 감당하지 못하여 곧장 벗어버리고 마는데 오늘 다시 쓰고서 땀을 더 내어 시험해 보고자 한다. 매양 와서 문안하니 매우 미안하다. 문안하지 말라.”라고 얘기하는 기록이 나와, 담요로 싸서 땀을 내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결국 따뜻한 온기를 이용해 땀을 내서 차가운 기운을 몰아낸 것인데요, 선조 31년 3월 3일에는 왕의 왼쪽다리에 있는 차갑고 습한 기운을 제거하고 경맥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원래 처방에 약재인 마황을 높여서 투약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 마황은 신진대사를 촉진시키며 땀을 내서 차가운 기운을 몰아내는 효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에도 감기약이나 다이어트 한약에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장동민 한의사와 함께
선조의 건강법에 대해 살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