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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7월 15일 월요일
[(백)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보나벤투라 성인은 1221년 무렵 이탈리아 에트루리아의 바뇨레조에서 태어났다.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수도자가 된 그는 파리에서 공부한 뒤, 파리 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학문 연구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작은 형제회의 총장으로 선출된 보나벤투라는 자신이 속한 수도회 설립자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전기를 완성하였으며, 철학과 신학 분야에서도 권위 있는 저서를 많이 남겼다. 1274년 무렵 선종하였으며, 1482년 식스토 4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1588년 식스토 5세 교황은 중세의 뛰어난 철학자며 사상가로 존경받던 보나벤투라 주교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소돔과 고모라에게, 주님의 눈앞에서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시며, 당신의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이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너희 자신을 씻어라. 내 눈앞에서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1,10-17
10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11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12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13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14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나는 지쳤다.
15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 버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 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16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17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4─1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에페 3,14-19)와 복음(마태 23,8-12)을 봉독할 수 있다.>
오늘의 묵상
사랑을 하여 보았나요?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버리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가족의 평화가 깨지기도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 찾아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길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단절되는 고통이 그 사람과 함께하며 겪을 고통보다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믿음에도 당신에 대한 사랑이 있기를 바라십니다. 사랑이 담긴 믿음은 의무가 아니라 기쁨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게 합니다. 예수님을 먼저 선택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기도 시간이 소중해지도록 합니다. 그분의 말씀이 가슴에 남아 우리를 움직이게도 합니다. 어쩌다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 찾아와도, 저마다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르게 합니다. 그분을 외면하고 잃어버리는 것이 더 큰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후반부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믿음’을 가지게 될 때,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여 줍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바오로 사도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고백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믿음 안에 살아 계신 신비가 우리에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사랑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자주 만나고 그와 자주 대화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고, 그러다 사랑하게도 됩니다. 이 방법을 예수님께도 써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체 앞에 머무는 신앙생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신앙생활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믿음’을 지닐 수 있도록 합니다.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모든 일을 하느님 현존 안에 행하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꽤 납득하기 힘든 의아한 말씀을 선포하십니다.“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심사숙고해서 잘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행간에 숨겨져 있는 말씀의 진의를 찾는 일이 중요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들은 어쩌면 우리가 세상 안에서 극진히 섬겨야 할 세상 안의 하느님입니다. 그들을 미워하고 배척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강조하시는 것은 하느님께 우선권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하느님의 위치를 가장 중심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제 삶 안에서 하느님의 입지가 참 많이도 위축되어 있습니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다른 많은 것들이 하느님 앞에 위치해 있습니다. 중심에 계셔야 할 하느님께서 밀려나고 또 밀려나서 제일 구석진 곳, 한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때로 주방에서, 때로 들판에서 일하면서 부활의 라우렌시오 수사님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분은 끊임없이 하느님의 현존을 자신의 구체적인 일상 안으로 끌어오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님은 동료 수도자들을 위해 스프를 주걱으로 저으면서 깊은 묵상에 잠겼습니다. 형제들의 구두를 수선하면서도 하느님과 깊이 일치했습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님의 말씀입니다. “반드시 큰일만 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프라이팬으로 작은 계란 하나를 요리하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뒤집습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 모두 성인의 길을 걸어갈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매일 놓이는 작고 궂은 일들,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 매일 반복되는 별 의미없어 보이는 일들, 그 일을 하느님 현존 안에서 행한다면 우리 역시 성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저도 라우렌시오 수사님 비슷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형제들과 아이들을 위한 식단을 짜고, 시장을 봐오고, 지지고 볶고, 끓이고 튀기고 있습니다.
열심히는 하지만, 더 노력할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단순한 일들을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 작고 하찮아 보이는 일들도 하느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행한다면, 아주 훌륭한 묵상기도요 관상 기도가 됨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고 말씀 가운데,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며느리, 시어머니 같은 용어들을 들으면서 진정한 의미의 가족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그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나 고민하게 됩니다.
우리의 부모 형제, 형과 동생, 누이는 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그들은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들이 확실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서 이 세상사는 동안 연을 맺어주신 선물입니다.
당연히 그들에게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지극정성으로 서로를 보살펴줘야 합니다. 무한한 인내로 서로를 참아내야 합니다. 서로의 성장을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족이 아무리 소중하다 할지라도 창조주이자 절대자이신 하느님과는 비교가 안 되는 존재들입니다. 당연히 그 어떤 존재라 할지라도 최고선이신 하느님보다 우위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하느님을 우리 삶의 가장 한 가운데로 끌어와 모시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상 안에 하느님께서 굳건히 현존하신다는 진리를 기억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이사야 예언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했던 임마누엘은 마리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셨고, 이제는 성체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임마누엘과 관련된 일화가 있습니다. 전쟁 중에 성당이 폭격을 당했고, 성당 앞에 있던 예수님의 동상도 폭격으로 손이 부서졌습니다. 성당에서 기도하던 군인이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나는 이제 팔이 없다. 네가 나의 팔이 되어다오.” 성당을 복구하면서 예수님의 동상은 팔이 없는 그대로 보존했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들이 ‘임마누엘’이 되어야 한다는 다짐을 표현하였다고 합니다.
임마누엘과 관련된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힘겨운 삶을 살다가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젊은이의 지나온 날을 영상처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젊은이의 옆에는 발자국이 같이 있었습니다. 젊은이가 하느님께 물었습니다. 아니 제 옆에 저 발자국은 누구의 것입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에 늘 함께 있었단다. 젊은이는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젊은이가 힘들고 어려웠을 때는 발자국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젊은이가 하느님께 물었습니다. 하느님 어째서 제가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 때는 제 곁에 없었습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란다. 그때는 내가 너를 업고 걸었단다.” 임마누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제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헐벗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고통 받는 이들에게 ‘임마누엘’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통의 순간에도, 영광의 순간에도, 절망의 순간에도, 기쁨의 순간에도 주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저는 임마누엘 주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믿습니다. 저는 뉴욕에서 2번이나 차와 접촉사고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인도를 걸어가는데 후진하던 차와 부딪혔습니다. 잠시 정신이 없었지만, 주님께서 함께하셔서 큰 탈 없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또 한 번은 횡단보도의 파란불에 걷고 있는데 좌회전 하는 차와 부딪혔습니다.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이번에도 큰 탈 없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곳 댈러스에 와서 신부님들과 함께 샌안토니오의 미션엘 다녀오는 길에 고속도로에서 접촉사고가 있었습니다. 서행하던 우리 차를 뒤에 오던 차가 받았습니다. 차 트렁크의 유리가 깨지고, 파손이 있었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이번에도 큰 탈 없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힘들고 어려울 때, 저와 함께 계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것에는 인색했습니다. 어려운 이들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외로운 이들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려 했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천사들이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왜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이 있는 곳에 찾습니까? 그분은 예전에 말씀하신대로 갈릴래아에 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에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셨고, 표징을 보여주셨던 갈릴래아에 계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가난한 이들 곁에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래아에 갔을 때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바뀌었습니다. 고통도, 시련도, 박해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 영원한 생명을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화려하고 웅장한 궁궐에서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라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를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이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병든 이,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물질과 자본이 가득한 곳에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소유와 욕심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당신 닮은 나>
상지종 베르나르돗 신부님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0,40)
보내시는 당신
계시어
보내지는 나
있으니
보내지는 나
받아들임이
보내시는 당신
받아들임이도록
보내시는 당신
닮은
보내지는 나
되리라
오늘의 성인
성 보나벤투라(Bonaventure)
신분 : 추기경, 신학자, 교회학자
활동연도 : 1217?-1274년
같은이름 : 보나벤뚜라, 보나벤처
조반니 디 피단차(Giovanni di Fidanza)라는 이름의 성 보나벤투라(Bonaventura)는 아버지 조반니 디 피단차와 어머니 마리아 디 리텔로(리텔라)의 아들로 바뇨레조에서 태어났다. 불확실한 전설이긴 하지만 보나벤투라는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받은 이름이라 한다. 그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그가 어렸을 때 중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어머니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에게 중재 기도를 바쳐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는 1238년에 작은 형제회 수도자가 되어 영국의 유명한 헤일스의 알렉산데르 문하에서 공부하려고 파리(Paris)로 갔으며, 그로부터 총애를 받는 제자가 되었다. 그는 1248-1255년까지 파리 대학교에서 신학과 성서를 가르쳤는데, 그의 강의는 새로운 탁발 수도자를 반대하던 교수들 때문에 중단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생 아무르의 빌리암을 비롯한 반대자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탁발 수도회를 옹호하는 논쟁에 뛰어들어서, “마지막 시대의 환난”과 “그리스도의 가난에 관하여”라는 저서를 남겼다. 마침내 1256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생-아무르를 단죄하고 탁발 수도회에 대한 공격을 중단시켰다. 탁발 수도회가 파리에서 다시 부흥될 때 그는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1월 28일)와 함께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와 비슷한 초창기에 성 보나벤투라는 작은 형제회의 총장으로 피선되었고, 수도회의 내부 분쟁자들을 화해시키는 일을 하였으며, 온건한 정책을 추구함으로써 극단주의 그룹을 단죄하였다. 1260년 나르본(Narbonne)에서 열린 수도회의 총회에서 그는 오랫동안 수도회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되는 회칙에 대한 회헌을 선포하였다.
그는 1265년 요크의 대주교좌를 거절하였고, 1271년에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Gregorius X)의 선출을 적극 지지하였다. 1273년 그는 알바노(Albano)의 교구장 추기경이 되었으며, 다음 해에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로마(Roma)와 동방 교회의 일치를 토의하려는 리옹(Lyon) 공의회의 의사일정을 짜도록 그를 위촉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공의회가 열리고 있는 회기 중인 7월 15일에 리옹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보나벤투라는 중세 시대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사상가 중의 한 분이다. ‘세라핌 박사’로 알려진 그는 수많은 글을 썼고 또 남겼는데, “베드로 롬바르드의 금언에 대한 주석”,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 “하느님께 가는 영혼의 여정”, “세 갈래 길”, “완덕 생활” 등의 영성 서적을 비롯하여 성서 주석, 약 5백 편의 설교 등이 유명하다.
그는 1482년 4월 14일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에 의해 시성되었고, 1588년 교황 식스투스 5세(Sixtus V)로부터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성체와 성합 그리고 추기경 모자가 그의 상징이다.
성 블라디미르 1세(Vladimir I)
활동년도 : 975-1015년
신분 : 왕
지역 : 러시아(Russia)
같은 이름 :
키예프(Kiev)에서 스뱌토슬라프(Svyatoslav) 대공작의 서자로 출생한 성 블라디미르는 989년에 그리스도인으로 세례를 받고 비잔틴 황제의 여동생인 안나와 결혼하였다.
그의 개종은 러시아에서 그리스도교가 탄생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스도인이 된 그는 자신의 생활을 완전히 개혁하고, 학교와 교회들을 세우는 한편 우상을 파괴하였으며, 그리스 선교사들을 영입하였다. 또한 그는 로마(Roma)와 대사를 교환하였고, 특히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6월 5일)의 선교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는 키예프 인근의 베레스토바(Berestova)에서 서거하였다.
성 블라디미르는 러시아 가톨릭의 수호성인이다.
복녀 안젤리나 (Angelina)
활동년도 : 1377-1435년
신분 : 과부
지역 : 마르시아노(Marsciano)
같은 이름 : 앤젤리나, 엔젤리나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 지방 오르비에토(Orvieto)의 몬테지오베(Montegiove)에서 태어난 안젤리나는 마르시아노의 영주 안지오발리(Angioballi)와 코르바라 백작 가문인 안나(Anna)의 딸이다. 그녀는 15세 때에 치비텔라(Civitella)의 백작인 테르니(Terni)의 요한과 결혼하였으나, 2년도 살지 못하고 과부가 되었다.
이때부터 안젤리나는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어 자기 집을 3회원의 공동체로 만들어 엄격한 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신적, 물질적 도움을 베풀기 시작하였다. 안젤리나와 동료 3회원들은 보속하는 행렬을 비롯하여 수많은 고행을 행하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동정을 지키는 성소를 소녀들에게 일깨우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위들은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는데, 나폴리(Napoli)의 왕 라디슬라우스(Ladislaus)는 그녀를 조사하여 유죄로 판명되면 화형을 시킬 작정까지 하였다.
불과 18세의 과부이던 그녀는 주님의 인도로 아시시로 가서 그때까지 폐쇄되었던 성 프란치스코 율수 3회 수도원을 재건하여 성녀 안나에게 봉헌하고, 안젤리나는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것이 최초의 율수 3회 수도원이 되었다. 성녀 안젤리나는 폴리뇨(Foligno) 외에도 스폴레토(Spoleto), 아시시(Assisi), 비테르보(Viterbo) 등 11곳에 율수 3회 수도원을 세우고, 비록 작은 공동체이지만 엄격한 수도생활을 하다가 58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다
복자 이냐시오 아제베도(Ignatius Azevedo)
활동년도 : 1528-1570년
신분 :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이그나티오, 이그나티우스, 이냐시우스, 이니고
이냐시오 아제베도(Ignatius Azevedo)는 부유한 가문 태생으로 포르투갈의 오포르토에서 태어나서 20세 때에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모범적인 수련자였고, 불과 25세의 나이에 리스본(Lisbon)의 성 안토니우스(Antonius) 대학의 학장으로 선출되었다. 1566년 그는 브라질의 시찰자가 되어 예수회원들의 활동상을 둘러보고는 자신의 선교열을 더욱 높이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산티아고(Santiago)로 갔다가 40여명의 동료들과 함께 학살당하였다. 그들은 모두 1854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