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6장은 전체가 다 누가의 고유 자료입니다. 첫 본문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인데, 본문 속의 청지기는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고발이 들어왔고, 그래서 주인은 이 사람에게 해고통보를 합니다. 그런데 파직당할 위기에 처한 이 사람이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문서를 조작합니다. 기름 백 말을 빚진 사람의 문서를 쉰 말로 고쳐주고, 밀 백 섬을 빚진 사람의 문서는 여든 섬으로 고쳐주었습니다. 자기에게 빚진 사람의 문서를 고쳐주었다면 훌륭한 선행을 한 것이지만, 주인의 문서를 제 멋대로 고쳐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이야기가 이상하게 전개됩니다. 8~13절을 보겠습니다.
8 주인은 그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였다. 그것은 그가 슬기롭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아들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아들보다 더 슬기롭다.
9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10 가장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충실하고, 가장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11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참된 것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또 너희가 남의 것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의 몫을 너희에게 내주겠느냐?
13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이해가 되시는지요? 주인이 이 청지기를 칭찬했답니다. 슬기롭게 대처했기 때문이랍니다. 문서 조작을 해서 자기 재산에 손실을 끼쳤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더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런 주인의 처사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도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작은 일에 충실해야 큰일에도 충실하답니다. 재물에 관한 문제는 작은 일이고 하나님의 일은 큰일이라는 뜻일 텐데,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되지만 논리적으로도 문제가 많은 내용입니다.
저는 이 본문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누가가 창작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누가복음에 흐르는 전반적인 분위기를 보면, 누가는 꽤 따뜻한 사람이고 또한 매우 똑똑하고 논리적인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누군가가 초기 사본에 이 본문을 삽입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어쨌든 이 본문이 성서에 담겨있다는 이유로, 이 본문을 정당화하기 위해 보수적인 신학자나 설교자들이 온갖 해괴한 논리를 들이대며 억지 해석을 한다는 점입니다.
성서에는 걸러내야 할 불순물이 많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2장에 보면, 아이들이 엘리사 선지자를 보고 대머리라고 놀려대자 엘리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했더니, 두 마리의 곰이 숲에서 나와 42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찢어 죽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우리 하나님이 정말로 그런 분일까요? 이 설화는 완전한 허구적 창작이거나, 일부 사실에 근거한 해석일 수 있습니다. 만약 사실에 근거한 해석이라면, 이 설화의 원형은 어린 아이가 곰에게 희생당한 불행한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는데, 그것을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자기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는 의도로 내용을 각색하여 성서에 삽입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금으로 비유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성서의 문자 전체가 정금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책 자체는 정금이 아니라, 온갖 불순물을 함께 품고 있는 금광석과 같습니다. 그 금광석에서 정금을 얻어내려면, 용광로에 넣고 펄펄 끓여서 불순물을 걸러내야 비로소 정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복음 16장에 기록된 이 설화도, 열왕기하 2장에 기록된 엘리사 설화와 마찬가지로, 성서에 담긴 불순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앞의 이야기와 이어지는 것인데, 이 본문 또한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14~18절을 보겠습니다.
14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서, 예수를 비웃었다.
15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마음을 아신다.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그러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이다.
16 율법과 예언자들의 글은 요한의 때까지다. 그 뒤로부터는 하나님의 나라가 기쁜 소식으로 전파되는데, 모두 거기에 힘으로 밀고 들어가려고 애쓴다.
17 율법에서 한 획이 빠지는 것보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는 것이 더 쉽다.
18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 드는 남자는 간음하는 것이요,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 드는 남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를 비웃었답니다. 제가 현장에 있었어도 비웃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그러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이다.’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그런 것, 그러니까 돈에 매여 사는 것은 하나님이 혐오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앞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와 연결해 놓으니까 어색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의한 청지기를 슬기롭다고 칭찬하지 말았어야지요. 이제 와서 그런 일은 하나님께서 혐오하신다니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도 그렇고, 이 본문도 그렇고, 정말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일까요? 우리 예수님께서 이렇게 정신이 없는 분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본문은, 앞의 본문과는 별개의 독립된 전승이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억지로 이어놓으니까 계속 논리적으로 꼬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율법과 예언자들의 글은 요한의 때까지다.’ 라고 하면서 율법 얘기로 넘어갑니다. 그리고는 또 갑자기 어울리지 않는 간음 얘기로 넘어갑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 본문은 세 개의 독립된 전승을 하나로 묶어놓은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예수님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복음서 최종편집자의 문제이거나, 누군가 나중에 사본에 끼워 넣은 것일 수 있겠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도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누가의 고유 자료입니다. 좀 길지만 19~31절을 보겠습니다.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하나가 헌데 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하였다. 개들까지도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22 그러다가, 그 거지가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그 부자도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다.
23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눈을 들어서 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그의 품에 나사로가 있었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해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살아 있을 때에 너는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불행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26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오지도 못한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조상님, 소원입니다. 그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나는 형제가 다섯이나 있습니다. 제발 나사로가 가서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고통받는 이 곳에 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29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30 부자가 말하였다. '아닙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나서 그들에게 가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31 아브라함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날지라도, 그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이 본문은 뚜렷한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이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보통은 본문의 내용을 소개하기 전에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 라고 말하거나, 내용을 소개한 후에 비유의 뜻을 설명하시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 본문에는 그런 게 전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고, 나중에 등장해서 사건에 담긴 뜻을 설명해주는 인물은 예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도 예수님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본문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메시지도 히브리 전통에서 시작된 이웃 사랑에 대한 것과 헬라의 종교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흔적이 함께 묻어납니다. 본문에서 부자가 직접 어떤 나쁜 짓을 했다는 기록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가난하고 병든 나사로를 도와주지 않은 것뿐입니다. 그런데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돌보지 않았다는 죄로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이 설정은 매우 히브리적입니다. 모세오경은 가난한 자에 대한 부자의 의무를 지속적으로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은 자가 받게 될 형벌에 대한 묘사는 지극히 헬라적입니다. 죽은 다음에 부자가 간 지옥과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천상의 세계가 함께 묘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오경 어디에도 천국과 지옥에 대한 얘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죽은 사람이 부활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예언서에도 천국이나 지옥, 부활에 대한 얘기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이스라엘의 위대한 영도자들인 모세나 다윗도, 그냥 죽어서 어디에 장사되었다는 기록뿐이지, 부활했다거나 하늘나라로 갔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모세오경에, 에녹이 죽지 않고 하늘로 옮겨갔다는 얘기가 한 번 나오고, 예언서에도,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다는 기록이 딱 한 번 나올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이지, 죽은 다음에 부활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죽은 사람이 부활한다거나 부활했다는 얘기가 성서에 등장한 것은, 그리스 시대로 들어선 서기전 4세기 이후에 기록된 성문서부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