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야의 잔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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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丹旦 이동용 (수필가/철학자)
섣달 그믐달이 되면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2020년에서 2021년으로 넘어가는 올해는 이 타종 행사가 없을 것이라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가 더 급선무라는 인식에서 이런 결정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나라의 태평과 국민의 건강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연말을 맞이하여 반성도 할 겸 역사를 되돌아볼까 합니다. 늘 현상 뒤에는 본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해석의 문제입니다. 늘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해석을 요구할 뿐입니다.
종로 보신각에서 이뤄졌던 제야의 종 타종 행사는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났던 해에 시작되었습니다.
명성황후 대 흥선대원군, 청나라 세력 대 친일파 세력 간의 다툼이 극에 달했던 시점이었습니다. 동학사상으로 싹이 트고 있던 민족진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쉽지만 삼국통일도 타국의 원조로 실현될 수 있었습니다. 당나라의 13만 군대를 끌어들여 삼국통일을 일궈내는 통일신라가 바로 그 역사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1281년 고려 시대 승려 일연은 《삼국유사》라는 역사서를 편찬해냈는데, 여기에는 고조선의 건국신화에 해당하는 ‘단군신화’가 눈길을 끕니다. 하늘의 신 환인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정신으로 환웅을 태백산에 내려보냅니다. 그때 환웅은 곰과 호랑이에게 자신의 배필이 될 기회를 줍니다. 규칙은 이렇습니다.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만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안 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 규칙은 겨울잠을 잘 수 있고 또 잡식성인 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습니다.
이렇게 기원을 하늘의 뜻에 둔 정신이 사람도 아닌 외부세력을 끌어들였고, 어느 한 쪽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규칙 속에서 단군왕검이 탄생하게 됩니다. 늘 역사가 그렇듯 이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백성의 시각은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
언젠가 초등학생들에게 안중근 의사의 위업에 대해 설명을 해줄 기회가 있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초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던 안중근 의사는 현장에서 붙잡혔고 1910년 3월 26일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1910년 8월 22일에 한일병합조약이 이루어졌습니다. 경술년에 당한 나라의 치욕스러운 일이라 해서 경술국치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설명을 하자 한 어린아이가 질문을 해왔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그토록 위대한 일을 해냈는데, 왜 경술국치를 당했나요?” 정말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때도 알아서 기었던 정치인들이 있었습니다. 내각총리대신이란 높은 직위에 있었던 이완용을 필두로 하여 훗날 을사오적이라고 불리게 되는 5명의 친일파 정치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일본에게 나라를 맡기면 잘 될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나랏일을 다른 민족에게 맡기면 그 민족의 부하나 노예는 될 수 있을지언정 결코 그 민족으로 환생할 수는 없습니다. 36년 동안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기를 겪어오다가 1945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함으로써 간접적인 영향으로 독립을 얻게 됩니다.
사실 이 독립도 우리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서 혼란의 씨앗이 되기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그해 12월 17일자〈자유신문>에 이육사의〈광야〉라는 희망에 찬 시 한 편이 게재됩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연은 이렇습니다.
“다시 천고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초인을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우리 민족을 구원해줄 기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부르게 될 노래를 위해 그 노랫말을 위한 씨앗을 뿌리는 심정으로 이 시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재야의 잔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제야의 종소리를 대신하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되어 인용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