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곡만 듣고 나면 살맛이 난다(99) 글쓴이 정태상 (chung7808) 날짜 2004년 11월 30일 9시 43분 메시앙-관현악곡 미소(Un Sourire)
내고(乃古) 박생광(朴生光 1904-1985)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2004.9.1-10.31)이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소재 이영미술관(利瑛美術館)에서 열린다는 ㅈ 신문 기사를 읽고 , 나는 그 신문기사를 가위로 오려 놓고는, 신문에 소개된 이영미술관과, 관장 김이환에 대해서 강한 호기심을 느끼게 되었다.
돼지 3000마리를 기르던 ‘돼지 돈사’를 개조하여 2001년 문을 연 것이 이영미술관이며, 이번 전시회에 앞서 김관장은 박생광 화백과 관련된 회고록 ‘민족혼의 화가 박생광이야기 -수유리 가는 길(이영미술관 刊)’까지 펴 내 놓았노라고 신문이 소개해 놓고 있으니 어찌 내가 이영미술관과 , 김이환 관장에 대해서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나는 전시회에 앞서 먼저 김 관장이 펴 낸 “수유리 가는 길‘이라는 회고록부터 읽어볼 요량으로 부산시내 대형서점 2곳에다 전화를 걸어 보았는데, 모두가 입고가 되지 않은 도서라는 대답이었고, 전국규모의 대형 인터넷 서점들을 몇 군데 뒤져 보았지만 검색조차 되지 않는 도서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다음날 출근과 동시 아침 9시경 이영미술관에다 직접 전화를 걸어 보았는데 , 신호만 갈뿐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다소 실망한 나머지 혼자 투덜거리면서 “그럼 그렇지 . 돼지 축사를 미술관으로 개조한 미술관이 무슨 체계가 서 있어 전화인들 제대로 받기나 하겠어.‘
나는 그 순간부터 박생광의 특별전과 이영미술관에 대한 호기심을 모두 지워 버리고 업무에 임하기 시작하였는데 약 1시간 뒤인 오전 10 시경 김이환 관장으로부터 직접 전화가 걸려 왔던 것이다. 내가 발신한 전화번호가 미술관의 수신 전화번호로 입력이 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김 관장한테 “왜 서점에서 책을 구입할 수가 없느냐.” “책을 구입하고 싶은데 어떻게 구입하면 되느냐” “이번 기회에 미술관을 한번 방문하고 싶은데 부산에서 가려면 교통편은 어떻게 되느냐” 몇 가지 질문을 한 후 곧바로 책값을 온라인으로 송금하였고, 그로부터 정확하게 3일 뒤 나는 책을 손에 질수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3 일 동안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파카 만년필로 밑줄까지 쳐 가며 읽어 가다가도 어떤 구절에 가서는 노란색깔의 형광펜까지 칠해 가면서 혼자 좋아서 낄낄거리며 읽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책은 73살의 박생광과 42살의 김이환의 운명적인 만남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1977년 6월 초순, 김이환은 수유리 소재 박생광의 집을 찾아간다.
“ 선생님의 흑모란이 갖고 싶어 왔습니다” 김이환의 질문에 박 화백은 씨익 웃으며 그리고 한마디 “기리(그려)주지” 그게 대화 전부였다는 것이다. 이 짧디 짧은 대화로 시작된 두 사람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 몇 년 뒤 우리 미술사에 하나의 커다란 획을 긋는 결실을 거둘 수 있는 가교(架橋)가 되리라고는 두 사람 모두 그때에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김이환은 맞배지붕 국민주택 박생광의 초라한 방과, 잔약해 보이기는 해도 형용키 어려운 위엄과 사람을 끌어당기는 박생광이라는 인력(引力)에 사로잡힌 몸이 되어 일요일 마다 수유리 박생광 집을 찾아가게 되는데, 그런데 어느 날 박생광으로 이런 제안을 받게 된다.
“ 김선생. 내가 인자(이제)부터 기리고 싶은 기림이 있소. 후학들이 그 기림을 좀 봐야해. 그랄라믄(그러려면) 전시회도 해야 하고, 날 좀 도와 주겠나?“
“제 형편껏 해 보겠습니다. 선생님 그리고 싶은 대로 한번 해 보시지요.”
이리하여 박생광은 1977년 73살의 늦은 나이에 김이환이라는 든든한 후원자를 만나 생활의 안정을 되찾게 되고, 81세로 작고할 때까지 약 8 년 동안 우리미술사에 길이 남을 명작들을 쏟아내게 되었던 것이다.
1980년부터 작고하던 해까지 6점의 무당그림과 열 여섯 점의 무속그림을 남겼고, 1981년에는 사바세계의 청담 대종사, 토함산의 해돋이, 열반의 청담대종사 1983년에는 청담대종사, 명성황후, 1984년에는 무위사의 관음, 범과 모란, 그리고 작고하던 1985년에 그린 전봉준 등은 모두가 하나같이 문제작과 명작들이었던 것이다.
박생광은 김이환을 만남으로 해서 생애 마지막 8년 동안 일생동안 꿈꾸어 오던 대작들을 쏟아 낼 수가 있었고, 김이환 역시 박생광을 만남으로 해서 박생광 사후 환갑의 나이에 일본 유학을 결행, 와세다 대학교 대학원에 연구생으로 입학 미술사 공부를 쳬계적으로 하는 한편 박생광의 일본생활의 발자취를 복원해 내었는가 하면, 자신이 직접 모은 박생광의 작품 100여점을 영구히 전시하기 위하여 자신의 이름 김이환 첫 자와 부인 신영숙 이름 첫 자를 따서 이영미술관이라 이름 지은 후 용인시 기흥읍 소재 자신이 운영하던 약 8천 여 평에 이르는 돼지 돈사를 미술관으로 개조하여 2001.11월 7일 미술관을 개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나는 전시회 종료를 약 1주일 정도 남겨놓은 어느 일요일을 택하여, 수원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박생광의 그림을 보는 일도 중요하지만, 박생광이란 화가에 취해 사는 김이환 관장은 도대체 어떤 분인지를 한번 만나 뵙는 일도 나에게는 박생광 그림을 감상하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무엇인가에 취해 사는 삶 보다 더 가치 있고, 아름다운 삶이 어디 또 있을 것인가. 나는 흔들리는 열차 안에서 김이환 원장을 생각하며 시인이자 비평가였던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1867)가 쓴 (취하라)라는 시 한편을 입속에다 넣고 우물우물 읊조리고 있었던 것이다.
항상 취하라 그것보다 우리에게 더 절실한 것은 없다. 시간의 끔찍한 중압이 네 어깨를 짓누르면서 너를 이 지상으로 궤멸시키는 것을 느끼지 않으려거든 끊임없이 취하라.
무엇으로 취할 것인가. 술로 , 시로 , 사랑으로, 구름으로, 덕으로 네가 원하는 어떤 것으로든 좋다. 다만 끊임없이 취하라.
그러다가 궁전의 게단에서나 도랑의 푸른 물 위에서나 당신만의 음침한 고독 속에서
당신이 깨어나 이미 취기가 덜하거나 가셨거든 물어보라 바람에게, 물결에게, 별에게, 새에게, 시계에게, 지나가는 모든 것에게, 굴러가는 모든 것에게 노래하는 모든 것에게, 말하는 모든 것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바람이, 물결이, 별이, 새가 시계가 대답해 줄 것이다.
취하라.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항상 취해 있으라. 술이건, 시이건, 미덕이건 당신 뜻대로 (보들레르의 시 취하라 전문)
보들레르는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거든 무엇이든 간에 항상 취해 있으라 했는데, 김이환 관장은 박생광이라는 화백에 취한 나머지 자신의 후반생을 보람차고 값어치 있는 새로운 삶으로 바꿔놓고 있었던 것이다.
김관장은 이번 특별전을 위해서 자신이 평생 수집해온 박생광의 그림 100여 점 외에 국립현대미술관, 개인 소장자들로부터 빌려온 작품까지 모두 합하여 약 200여점의 작품을 공개 전시하고 있다.
미술관 지붕위에는 전시기간동안 잠시 걸어놓았다가 떼어 버릴 수 있는 현수막 대신 아예 대문짝만한 붉은색으로 박생광 탄생 100주년이라 쓰고, 그 밑에는 푸른색으로 이영미술관이라 써 놓고 있는데, 지붕위에 써 놓은 글씨 하나만 보아도 김관장이 이번 특별전을 치루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 신경을 썼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박생광이 그린 불세출의 역작 명성황후(330x200) 앞에서 서면, 화면은 온통 붉은 피를 튀기는 아비규환 그 자체로, 인간의 비극을 더 이상은 어떻게 형상화 해 볼 수 조차 없는 극한상황까지 밀어 붙여놓고 있는데,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연상시킬 정도로 무섭기도 하고 어지럽기도 한 화면자체는 사람을 옴쭉달싹 조차 못하도록 붙들어 매 놓고 마는 것이다. 이날 나도 이 그림 앞에서 오랫동안 옴쭉달싹도 못한 채 혼까지 다 빼앗겨 버린 사람처럼 그렇게 서 있었던 것이다.
가로 330cm 세로 200cm 의 대형 화폭위에 그려진 명성황후는 온통 붉은 페인트를 엎질러 놓은 듯한 강렬한 선홍빛 칠갑인데, 그림 한가운데는 명성황후를 불태운 자리 옆에 있었다는 향원정이 거꾸로 쳐 박혀 있고, 그림아래쪽에는 고통을 호소하는 관군이, 그림 왼쪽에는 힌 옷 입은 민중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절규하는 모습을, 오른 쪽에는 번쩍이는 일본도가 보이는가 하면. 귀신 형용을 한 왜놈 몇 명이 숨어서 명성황후를 노려보고 있는 잔인무도한 모습을 보일락 말락 그려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시해를 당한 명성황후의 모습은 왼쪽 아래쪽에 머리를 두고서 편안한 자세로 누운 채 손에는 연꽃까지 들고 있도록 그려 놓음으로써 비극미를 극한상황까지 끌어 올려놓고 있는 것이다.
박생광은 80년대 초 1년 이상 명성황후의 그림을 붙들고 자신과 처절한 싸움질을 하였다고 한다.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조선후기 역사책을 탐독했는가 하면, 명성황후를 불태웠던 경복궁 향원정 옆에도 수십 번을 찾아갔었고, 명성황후의 복색과 머리장식들을 고증하기위해 단국대학교 민속박물관을 찾아가 관장 석주선(石宙善)을 만나는 등 취할 수 있는 방법들은 모두 시도해가며 노심초사 이 그림에 몰두 해 들어갔었다고 전해진다. 박생광은 이 그림에다 무려 여섯 번의 칠을 했었고, 그림이 완성되자 “저거 안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다 하였다고 한다.
서양화가 문미애(文美愛)는 이 그림을 두고 “박선생의 작품은 온몸과 혼을 걸고 그린 것이다. 명성황후를 두고는 할 말이 없다. 갈수 있는 예술의 한계점까지 갔다“
갈 수 있는 예술의 한계점까지 갔다는 명성황후.
문미애는 박생광의 말년 작품들을 두고 ,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 해 놓고 있다. “몸에 페인트를 칠하고 딩군 것 같다. 몸과 혼으로“
실제로 박생광의 말년 그림을 보고 있으면 문미애의 지적대로 몸에 페인트를 칠하고 그림위로 마구 딩군게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로 화면전체를 압도하며 살아 펄떡이고 있는 듯한 현란하면서도 강렬한 오방색(五方色: 청.백.황.적.묵)의 눈부심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말문조차 막아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날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또 하나의 그림은 (사바세계의 청담대종사- 일명, 고행기)라는 불리 우는 세로 140cm, 가로 267cm의 대형 그림이었다. 청담스님(속명: 이찬호(李贊浩)은 박생광 보다 두 살이 많았지만 진주에서 한 동네 친구였다고 한다. 진주보통학교와 진주 농업학교를 같이 다녔고, 스님이 되기 위해 청담과 박생광 두 사람은 함께 고성에 있는 옥천사를 찾아갔지만 청담만 남고 박생광은 다시 속세로 돌아와 버렸다고 한다.
이러한 속세의 인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박생광은 1981년에는 (사바세계의 청담대종사 140x267cm)와 (열반의 청담대종사 140X270cm)라는 대형 그림 2점을 , 그리고 1983년에는 (청담 대종사 80X120cm)라는 초상화 1점을 그려 청담을 불멸화 시켜놓고 있다.
세 점의 청담관련 그림 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사바세계의 청담대종사)라는 그림이 아닐까한다. 사바세계의 청담대종사라는 그림은 화폭 오른쪽에 서 있는 청담을, 왼쪽에는 앉아 고행중인 청담의 모습을 그려 놓고 있는데, 정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오른쪽 아래쪽에서부터 시작되어 왼쪽 아래쪽 끝부분까지 길게 잇대어 써 놓고 있는 청담에 관한 행장(行狀: 일생의 행적을 적은 글) 부분이었다.
나는 그림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붓글씨로 써 놓은 그림속의 행장 글씨 하나하나를 만년필로 필사하기 시작하였다. 필사를 한 후 행장을 다시 한번 읽어보니 글자의 숫자가 무려 1138자에 이르렀다. 세상에 이런 그림이 어디에 있는가. 그림 속에다 1138자에 이르는 대 장문의 글자를 써 놓았다는 사실 하나만 보아도 이 그림은 그림이전에 하나의 대 사건이 될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청담 쪽으로 기우러진 경도(傾倒)의 정이 얼마나 애틋하고 진하였기에 살점을 태워 글씨를 새겨 넣듯 저렇게 한자 한자 새기듯이 써 놓았던 것이었을까?
그림속의 행장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참회와 정진만이 자아완성의 길이다. 참회란 자기 스스로의 뉘우침을 통해 부처님의 대 참회에 접하고 부처님께 동참 하는 길이다. ---중략 청담 큰스님께서는 스스로의 참회를 통해 부처님께 접하고 부처님 품에 안겨짐으로써 깨칠 수 있다는 굳은 신념에서 한국불교사상 처음으로 삼각산 대 도선사에 호국 참회원을 세우셨다. 그러나 참회란 결코 부처님을 향해 오체투지의 예배로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라는 거울에 거짓 자기를 비추어 보고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으로 되돌아가려는 소원을 오로지하여 정진하는 기도인 까닭에 청담 큰스님은 설령 우리가 차디찬 석불전 돌바닥에 가서 수없이 절을 하고서라도 번뇌의 나무를 불태우고 깨달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 맑고 깨끗 한 마음>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참회하라고 말씀 하셨다. ----중략 어릴 때부터 애국정신에 투철했던 큰 스님은 수도행각을 계속하면서도 독립운동에 나섰는데 스물 아홉 살 때 속리산 복천암에서 왜경에 잡혀 상주경찰서에서 칠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옥에서 이질에 걸려 빈사상태가 되자 왜도는 행여 병사자 수용소에 출옥시켰다. 이리 사경을 헤맬 때 시집 온지 얼마 안돼 생이별한 속가 부인이 뜻밖에 찾아와 어린 딸을 보아서라도 집으로 돌아 갑시다 라고 간절히 권했지만 큰 스님은 죽은 송장이라도 돌아가지 않겠다고 완강히 거절하고 고달픈 몸을 이끌고 다시 피나는 행길을 떠났다. ---중략 정혜사 만공스님 회상에서 약 3 년 동안 두문불출하고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던 큰스님은 마침내 서흔 두 살 때 만공조사실로부터 견성했다는 인가를 받았다. 청담큰스님의 오도게송(悟道偈頌)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예부터 모든 불조는 어리석기 그지없으니 어찌 현학의 이치를 제대로 깨우쳤겠는가. 만약 나에게 능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길가 고탑(古塔)이 서쪽으로 기울어 졌다.
석가 이천이백이십오년 청담 팔십년 친구 박생광 그림.
박생광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제대로 된 사람대접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77살 되던 해 서울 백상기념관에서 열었던 개인전부터 1985년 81세의 나이로 작고할 때가지 겨우 5념 남짓한 세월동안 이었다.
백상기념관에서 열었던 개인전의 성공으로 미술계의 중심으로 진입하기 전까지 그는 77년 세월동안 왜색풍의 화가로 인식이 되어 국내 미술계에서는 철저히 소외를 당한 채 미술계의 아웃사이드로 밀려나 있었던 것이다.
사실 박생광의 이력만 놓고 보면 그는 국내보다는 일본에서 더 잘 알려져 있는 화가라 부를 수도 있겠다.
그는 1920년 16살의 나이로 진주농업학교 일본인 은사 쿠미니요네타로(國見米 太郞)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이후 1945년 41살의 나이로 25년간의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기 까지 주 활동무대는 일본 땅이었다. 그리고 1967년 63살의 나이로 서울로 이사하기 까지 22 년 동안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던 진주시절은 거의 무명에 가까운 생활이었으며, 1968년 64 살 때부터 1974년 70살 때까지 6년간 홍익대학 동양학과에 동양화 실기강사로 출강을 하였다하나 이때까지도 화가로서는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74년 70살 늦은 나이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미술원전에 출품할 작품을 준비하기 시작하여, 1975년 71살 되던 해에는 일본미술원 제 30회 춘의 원전에 뜰(苑)이 입선되었고, 제 60회 원전에 수춘(樹春)이 입선된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76년 72 살 때에는 제 61회 원전에 무리(群)기 입선되었고 1977년 73살의 나이에는 일본미술원의 제 32회 춘의 원전에 노수(老樹)가 입선 되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며 일본 미술계를 휘저어 놓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73살의 나이에 일본생활을 청산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때 그의 귀국은 축복과 환호에 쌓인 화려한 귀국이 아니라 왜색 풍의 화가라고 그를 질시하고 이단시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계로의 귀환이었기에 그의 발걸음은 무겁고 또 무거웠을 것이다.
73살, 지친 몸으로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이때 마흔 두 살의 아름다운 청년 김이환을 극적으로 만나게 되어 일생일대의 인생 역전을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박생광은 그의 생애 마지막 8년 동안 영과 육을 모두 불태우며 불꽃처럼 치열한 삶을 살았다. 박생광처럼 생애 마지막을 화려하게 불태우며 이토록 아름답게 패자부활전으로 재기에 성공한 주인공도 흔치 않을 것이다.
나는 미술관에서 김이환 원장을 만났다. 박생광과 만났을 때의 마흔 두 살이었던 아름다운 청년 김이환은 어느새 69세의 나이로 내 앞에 서 계셨던 것이다.
부산에서 왔다는 내 인사말에 “ 정 선생님같이 멀리서 와 주시는 분들이 계시기에 우리 미술관이 발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며 내 손을 잡으며 황송해 하시는 그 모습에서 나는 마흔 두 살 아름다웠던 청년 김이환의 얼굴 모습을 상상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고속전철시대라지만 고속 전철도 서지 않고 그대로 통과 해 버리고 마는 수원 땅. 그리고 수원 역에서 내려 물어물어 찾아갔던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영덕리 221 번지의 이영미술관. 나는 이날 , 밤 1시가 넘었어야 겨우 부산으로 돌아 올 수가 있었지만, 박생광의 그림으로 하루 종일 배불렀고, 김이환 관장을 만나는 기쁨이 있었기에 피곤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루 종일 행복하기만 했던 것이다.
이튿날 출근길 아침, 나는 메시앙(Olivier Messiaen 1908-1992) 작곡한 <미소-Un Sourire)라는 관현악곡을 듣고 있었다. 메시앙은 1989년 모차르트 사후 200주기를 추모하기 위하여 이곡을 작곡하면서 작곡동기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모차르트는 슬픔, 고통, 배고픔, 추위, 몰이해, 그리고 임박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의 음악 역시 언제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나는 모차르트에게 이곡을 바치면서 미소라고 이름 붙였던 것이다.>
메시앙은 하늘처럼 우러러 보아야할 작곡계의 대 선배 모차르트에게 음악 한곡 헌정하면서 <미소>라는 이름을 붙여드렸다. 참으로 아름답고도 향기로운 헌정이 아닐 수가 없다.
42세 아름다운 청년 김이환은 73세의 내고 박생광을 만나, 박생광으로 하여금 잃었던 미소를 되찾게 해 줌으로써 불후의 명작을 남길 수 있도록 경제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듣고 있는 메시앙의 이 <미소>라는 음악 또한 김이환 관장을 위해서 한번쯤은 연주되어도 좋을 그런 음악이 아니겠는가. 나는 하루 전에 뵌 이영미술관 김이환 관장을 머릿속에 떠 올리면서 메시앙의 음악 속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 음반소개 DG 3740(445 947-2) 바스티유 오페라 오케스트라 지휘 정명훈 (수록된 음악) 1-4: 메시앙- 4인을 위한 콘서트 5: 메시앙- 잊혀진 계절 6: 메시앙- 미소 7: 메시앙- 빛나는 무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