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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여관에는 일련의 시나리오처럼 연결되는 인물이 슬픈 추억처럼 남아있는 곳이다. 일엽스님 그리고 나혜석, 박귀희(이응로 화백의 전처)와 이응로화백, 일엽스님과 일본인 사이에 난 김태신(일당스님).
간략 소개
일엽 스님(1896.4.28 - 1971.1.28)
일당 스님(일엽스님의 외아들 86세 생존)
나혜석 화가 (1896 -1948 일엽스님과 동갑)
이응노 화백 (1904 -1989)
박귀희 여사(~2001.2.23 별세. 이응노화백 전처)
박인경 여사 (이응노화백 現부인. 현재 대전 이응노미술관 명예관장)
덕숭산 (495.2m)
백두대간이 지나는 속리산에서 시작한 능선이 서편으로 가지를 쳐 달리는 한남금북정맥은 안성 칠장산에서 한강 남쪽 산줄기인 한남정맥과 금강 북쪽 줄기인 금북정맥으로 분가시킨다.
그 중 금북정맥은 칠장산에서 시작하여 덕성산 - 서운산 - 성거산 - 태조산 - 국사봉 - 봉수산 - 백월산 - 일월산 - 덕숭산 - 가야산 - 성왕산 - 백화산 - 지령산을 거친 뒤 태안반도의 끝인 안흥진에서 그 맥을 서해바다로 조용히 담근다. 금북정맥(錦北正脈) 약 266km의 긴 줄기로 되어 있다. 덕숭산의 그 낮고 너른 산자락에 자리한 수덕사가 자리하며 수덕사 일주문 바로 옆에 수덕여관이 있다.
질곡의 세월을 간직한 수덕여관
수덕여관을 지키던 이응노 화백의 전처인 박귀희(朴貴嬉) 여사는 2001년 2월 24일 밤 10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장조카 집에서 한많은 세상을 떠나셨다. 수덕여관은 많은 우여곡절 끝에 수덕사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초가집의 그윽한 운치나 객수(客愁)가 아니더라도, 수덕여관에 녹아 있는 애절한 사연을 알고난 뒤라면 누구나 잠 못 이루고 뒤척거리는 밤을 보내게 된다.
▲ 많은 애환과 한이 깃든 새로 단장된 수덕여관
수덕여관
가요 '수덕사의 여승'으로 널리 알려진 덕숭총림 수덕사 앞 일주문 왼쪽 작은 개울 건너에는 초가집으로 된 수덕여관이 있다. 자칫 나무숲에 가려 지나치기 쉽상이다. 이곳이 한국미술계의 거장 고암 이응로(1904~1989) 화백이 나이 마흔살에 이 곳 수덕사에 터를 잡아 둥지를 틀고 작품구상을 하며 머물렀던 곳이다.
이 화백은 1944년 수덕여관을 열고 머물면서 수덕사 일대 자연과 풍광을 화폭에 담았다. 수덕여관 이름처럼 여관 구실도 하며 수학여행온 학생들이 단체로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현대문화예술의 산실이자 숱한 사람들의 인연이 깃든곳 수덕여관이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인 2007년 10월 5일 '수덕사 선(禪)미술관'과 수덕여관이라는 이라는 새 문패를 달고 다시 단장되었다.
▲ 새로 단장된 수덕여관
수덕여관에는 슬픈 전설같은 실제 이야기가 지금도 고이 간직되어있는곳이다.
신여성이자 여류화가 나혜석은 1937년부터 1943년까지 말년을 이곳에서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나혜석은 작품활동을 하며 스님이 되지는 못했지만 선승처럼 수행자처럼 단촐하고 조용하게 살았다. 출가를 못했지만 승복을 입으며 무소유,무애행을 실천했다고 전한다.
충남 홍성이 고향이고, 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그림에 대한 열정에 불타고 있던 청년 이응노에게는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온 나혜석은 둘도 없는 선배이자 스승을 만나려 자주 수덕여관을 들른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함께 이 산속 외진 곳에서 아예 같이 기숙한다. 그러그 선배이며 누나 같은 나혜석은 이응로에게 파리의 환상을 심어 준다.
누나처럼 선생님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던 선배 화가 나혜석과의 인연으로 수덕여관에 정이 들어 버린 이응노는, 1944년 나혜석이 이곳을 떠나자 아예 수덕여관을 사들인 다음 부인인 박귀희에게 운영을 맡기고, 6.25때에는 피난처로 사용하는 등. 6년간 살면서 수덕사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화폭에 옮긴다.
나혜석으로부터 꿈에 그리던 파리 생활과 그림 이야기를 들은 이응노는 1958년 드디어 21세 연하의 연인 박인경(이후 박귀희 여사와 이혼을 하고 박인경씨와 결혼: 현재 대전 이응노 미술관 관장)과 함께 파리로 떠나 버린다. 홀로 남은 그의 본부인 박귀희여사가 여관을 운영하나 글자 그대로 소박떼기 청상과부가 되어 버리고 만다. 머물다 미련 없이 떠나 버린 두 사람과는 달리, 박귀희여사는 변치 않는 애정과 절개로 이국 땅의 남편을 그리며 수덕여관을 지킨다.
▲ 일엽스님 속명은 김원주(元周). (1896.4.28 - 1971.1.28)
평안남도 용강 출생으로 승려, 시인, 수필가로서 진남포의 삼숭여학교(三崇女學校)와 이화학당에서 수학하고 일본에 유학하였다.
1920년에 잡지 '신여자(新女子)'를 창간하여 여성해방을 부르짖으며 자유연애를 구가하는 한편, '단장(斷腸)',' 애욕(愛慾)을 피하여' 등의 단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찍이 결혼에 실패하고, 자유연애에 환멸을 느껴 중년에 수덕사(修德寺)에 입산, 여승으로서 생애를 마쳤다.만년에 수필집 '청춘을 불사르고'를 간행하고 '어느 수도인의 회상','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등의 작품을 남겼다.
▲ 일당스님 김태신( 일엽스님의 외아들)
일본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아사히상을 수상하고, 현재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있는 김일성주석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한 일당스님 (속명 김태신). 그가 바로 일제시대 한국 최초의 여자유학생이자 당대 최고의 비구니로 칭송 받던 일엽스님의 외아들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공개돼 화제다.
67세에 불가에 귀의하여 85세 노인이 된 노스님이 털어 놓는 그리운 나의 어머니, 그리고 파란만장 했던 삶의 이야기.....
“어머니란 존재는 각박하고 외로운 이승에 내 던져진 영혼의 안식처 입니다. 나의 고독, 나의 절망, 나의 기쁨, 나의 소망은 모두 어머니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로 인해서 갈증을 느꼈으며, 또한 어머니로 인하여 제 삶은 충만 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뿌리치는 옷자락에 엉겨 붙은 눈물 같은 존재였습니다.”
일본에서 화가로 더욱 유명한 일당스님은 외국 출타이외에는 국내에서는 김천 직지사 중암에 머물고 있는데, 자전소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를 출간하면서, 그가 한국 비구니계의 거두 일엽스님(1896~1971)의 아들이라는 것을 세상에 드러냈다.
일엽 스님이 입적한지 31년 만의 일이다.
비구니계 거목 '일엽스님'의 외아들 일당스님의 파란만장한 삶 [ 글·박윤희 사진·박해윤 기자]
“나의 지나온 삶은 어머니에 대한 애증의 시간이었다”
일본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아사히상을 수상하고, 현재 김일성종합대학에 걸려있는 김일성 주석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한 일당스님(김태신). 그가 바로 일제시대 한국 최초의 여자유학생이자 당대 최고의 비구니로 칭송받던 일엽스님의 외아들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공개돼 화제다. 67세에 불가에 귀의한 80세 노스님이 털어놓은 그리운 나의 어머니, 그리고 파란만장했던 삶.
“어머니란 존재는 각박하고 외로운 이승에 내던져진 영혼의 안식처입니다. 나의 고독, 나의 절망, 나의 기쁨, 나의 소망은 모두 어머니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로 인해서 갈증을 느꼈으며 또한 어머니로 인해 제 삶은 충만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뿌리치는 옷자락에 엉겨붙은 눈물 같은 존재였습니다.”
회한이 서린 말로 어머니를 추억하는 팔십세의 노스님. 우주적인 혜안을 지닌 부처님의 제자라고 할지라도 생모의 부재에서 오는 근원적인 허기는 메울 수 없는 것일까. 지난 7월17일 조계사 대웅전 앞에서 합장하고 있는 일당스님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투명하나 날카롭지 않은 눈빛, 미소를 담고있는 부드러운 눈매와는 또다른, 어떤 표정이 스님의 뒷모습에 서려있었다.
일본에서 화가로 더욱 유명한 일당스님은 김천 직지사 중암에 머물고 있는데, 최근 자전소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를 출간하면서 그가 한국 비구니계의 거두 일엽스님(1896∼1971)의 아들이라는 것을 세상에 드러냈다. 일엽스님이 입적한 지 31년 만의 일이다.
“김일엽은 춘원 이광수의 애인이었다, 그래서 숨겨놓은 아들이 있다, 혹은 김일엽은 연애대장이다 등등 어머니를 둘러싼 안 좋은 소문이 많았어요. 한때는 어머니와 저를 두고 세간에 오르내리는 이야기에 신경을 쓰기도 했지만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어머니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고 싶어 책을 냈어요.”
그렇다면 김일엽은 누구인가. 목사의 딸로 태어나 조실부모한 그의 본래 이름은 김원주. 일엽(一葉)이라는 필명은 춘원 이광수가 그의 아름다운 문체에 반해 ‘한국 문단의 일엽(나뭇잎 하나)이 되라’는 뜻에서 지어준 필명이다.
출가하기 전 그는 한국 최초의 여성잡지 <신여자>를 창간해 여성해방을 부르짖고, 동인지 <폐허>의 문학동인으로도 활동한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자 여성운동가다. 이화학당을 거쳐 도쿄 영화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한국 최초의 여자유학생이기도 한데 윤심덕, 나혜석 등과 동시대의 ‘신여성’으로서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주장했다. 특히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신정조론’이라는 글까지 발표해 논란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남녀가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이 문제될 것은 없다. 정신적으로, 남성이라는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여인이라면 언제나 처녀로 재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여인을 인정할 수 있는 남자라야 새 생활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여인, 그것이 바로 나다.”
‘신정조론’을 통해 낡은 관습을 비웃고 자유연애를 외친 김일엽. 그도 알고보면 잘못된 인습의 피해자였기 때문에 ‘신정조론’을 주장할 수 있었다. 당시의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그역시 부모의 중매로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남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남편은 자신이 의족을 한 장애인이란 사실을 숨겼고, 결혼 후에야 이 사실을 안 그는 신뢰에 기반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일찌감치 청산했다.
‘어머니’라 부르지 못하게 했던 일엽스님
이후 ‘신정조론’을 주장한 이력에 한번의 이혼경력이 보태어져 김일엽은 마치 ‘스캔들 메이커’인 것처럼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스캔들로는 ‘이광수의 애인설’을 꼽을 수 있다.
“춘원과 연인사이라는 소문이 왜 났냐 하면 어머니가 의사 허영숙씨(춘원의 두번째 부인)의 부탁으로 춘원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를 대필했었어요.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춘원도 어머니의 뛰어난 글솜씨에 무척 놀라셨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정말 사랑했던 사람은 춘원이 아니라 일본인인 제 아버지였어요.”
김일엽이 관습의 굴레를 벗어던진 후 마지막으로 찾아온 ‘오다 세이조’와의 운명적 사랑. 그러나 정작 그의 운명적 사랑은 관습에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역사적 조건에 의해 거부당했다.
“1921년 도쿄행 특급열차에서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가 처음 마주쳤어요. 당시 규슈제국대학 법학과 학생이었던 부친은 어머니를 보고 첫눈에 반했죠. 그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접니다.”
은행총재를 아버지로 둔 일본 명문가 출신 오다 세이조는 “그녀의 뱃속에는 오다 가문의 핏줄이 자라고 있다”며 결혼 승낙을 받아내려 했지만, 부모님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낙태’ 시키라는 고함뿐이었다.
이에 오다 세이조는 부모님과 절연을 선언했고, 70년 독일에서 홀로 숨을 거둘 때까지 ‘오다’ 가문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22년 9월, 결국 김일엽은 오다 세이조의 친구집에서 귀여운 사내아이 ‘오다 마사오’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일당스님이다.
“어머니는 저를 낳자마자 아버지께 ‘당신하고 살면 내 일신은 편안하겠지만 평생 조국을 배신한 괴로움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당신도 나로 인해 천륜을 끊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니 다른 여자와 가정을 꾸려 마사오와 행복하게 사세요’라는 내용의 편지 한장만 남기고 한국으로 가버리셨답니다.”
일엽스님은 ‘그처럼 꽃답던 사랑도 단지 하루의 먼지처럼’ 털어버리고 28년 충남 수덕사 견성암에서 탄옹스님으로부터 수계를 받고 불자의 길을 걷게된다.
“아버지는 한국에라도 와서 어머니와 가까운 곳에 계시려고 총독부에 지원하셨어요. 해방 후에는 일본 외교관으로 일하셨고요. 평생 어머니를 못 잊고 독신으로 사신 분이죠. 저는 아버지 친구 분의 양자로 들어가 살았기 때문에 우리 세 가족은 단 한번도 같이 살아보지 못했어요.”
일엽스님을 시봉했던 경희스님의 증언에 따르면 일엽스님이 병으로 앓아누워 있을 때 한 노신사가 찾아왔었다고 하는데, 일당스님은 이들 두고 혹시 아버지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런 추측을 내놓는다.
“70대 노신사가 이름도 밝히지 않고 병든 어머니 뵙길 청했답니다. 노신사는 방문 앞에서 누워계신 어머니께 큰절을 올리고서야 방으로 들어가 일본식으로 무릎을 꿇고 앉으셨대요. 그리고 아픈 어머니를 보고 한참 눈물을 흘리시더니 하얀 손수건을 어머니 손등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 다시 자신의 손을 얹으면서 어머니 손을 꼭 잡더랍니다.”
일엽스님의 유일한 혈육인 일당스님도 어머니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 때문에 가슴에 ‘바람구멍’이 난 사람이다. 그래서 일당 스님은 “내가 지나온 삶은 어머니에 대한 애증과 ‘사투’를 벌여온 세월이었다”고 회고한다.
“14세가 되어서야 어머니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어요. 황해도 신천에서 양아버지가 집을 비운 틈을 타 몰래 수덕사로 내려갔죠. 그런데 저를 처음 본 어머니가 그렇게 냉정하실 수가 없었어요. 저는 평생 동안 어머니 품에 단 한번도 안겨보지 못했으니까요.”
어머니를 처음 본 일당스님은 “그동안 눈덩이처럼 불어난 그리움이 눈물로 변해서 콸콸 쏟아졌다”고 하는데 대뜸 어머니로부터 예기치 않은 호령이 날아왔다.
“울음을 그쳐라! 여기는 산중의 절이다. 너는 절에 왔으니 절 풍속과 예절을 지켜야 한다. 우선 나에게 다시는 ‘어머니’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스님’이라고 해야 한다. 알겠느냐?”
어머니 품에서 하룻밤 자겠다는 일당스님의 달콤한 기대는 보기 좋게 허물어졌다. 그날 밤 일당스님은 인근 초당에서 잠을 자려고 하는데 계속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한다.
‘라훌라.’ 부처님도 출가하시기 전에 속세에서 얻은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 이름이 바로 라훌라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수행에 방해되는 존재를 ‘라훌라’라고 일컫는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모자의 연을 잘라낸 어머니에게서 일당스님은 당연히 라훌라이자 애물단지였던 것이다.
“방학 때마다 어머니를 찾아가도 매서운 눈으로 대하셨어요. 절에서 재워주지도 않고 근처에 있는 ‘수덕여관’으로 내쫓으셨죠. 만일 그곳에서 나혜석씨를 만나지 않았다면 저는 분노와 설움을 이기지 못해 아주 많이 비뚤어져버렸을 겁니다.”
어머니 가신 길 따라 늦은 나이에 출가
일엽스님의 친구인 화가 나혜석은 이혼 후 집에서 나와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며 수덕사를 찾아왔지만 그곳 만공스님은 ‘스님 될 사람이 아니다’라며 한사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덕분에 나혜석과 일당스님은 수덕여관에서 모자처럼 각별한 정을 쌓아가게 되었다.
“그림 그려보라고 그림도구를 빌려주시는가 하면 엄마젖을 못 만져 봤으니 내젖을 만져보라며 그분 젖가슴에 내손을 올려 주시고는 했었어요.”
나혜석은 수덕여관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면서 일당스님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끼쳤는데, 나혜석과 특별한 교분이 있었던 고암 이응로 화백이 자주 찾아와 일당스님은 이들과 함께 그림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훗날 고암은 많은 추억이 서린 수덕여관 뒤뜰 너럭바위에 ‘문자추상화’를 새겨넣은 암각화를 남겨놓기도 했다.
태생적으로 ‘라훌라’가 되어버린 일당스님의 운명이다 보니 어려서부터 ‘운수납자’가 따로 없었다.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구름과 물처럼 흘러간다’는 의미의 운수납자는 보통 스님들을 일컫는 말이지만, 그의 젊은 시절도 구름이나 물처럼 떠돌이 인생이었다. 그를 키워준 양아버지만 해도 신도 아라키, 송기수, 이당 김은호, 김봉률 스님 등 여러 명이었다. 불려진 이름만 해도 오다 마사오, 송영업, 김설촌 그리고 현재 일본 화단에서 한국 화가로 널리 알려진 그의 이름 김태신이 있다.
하나를 잃으면 또 다른 하나를 얻는다고 했던가. 어머니를 늘 가까이할 수 없었지만 운수납자처럼 떠돌며 한국의 유명 사찰과 명산을 다 돌아다녀보고 한국의 산을 화폭에 담는 것은 물론, 한국 불교계를 이끌어가는 고승들을 만나 정신세계를 넓혀가는, 그리 흔치 않은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한용운, 최영환, 임환경 등 독립운동가를 만나 ‘나는 한국인이다’라는 정체성을 굳혀갔고, 알게 모르게 독립운동 자금 운반책 노릇도 했다. 이렇게 그는 일본인의 피와 한국인의 피를 한몸에 받은 죄 아닌 죄로 ‘맷돌 하나를 가슴에 얹어놓고 사는 듯한 기분’으로 일제 식민통치기간을 견뎌냈다.
그렇다고 일본 오다 가문에서 장손인 일당스님의 위치가 확고한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가 한국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장손 대접을 전혀 받지 못했다. 더구나 오다 가문에서 일당스님을 장손으로 인정하면 ‘재산 상속인’으로 인정하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친척들은 그를 배척해내기 바빴다.
“연말이 되면 일본은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풍습이 있어요. 어느 해 사촌형님으로부터 정종 한병이 선물로 들어와서 밤에 그 술을 한잔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지요. 그런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안개가 자욱해요. 그래서 ‘프랑스에만 안개가 많은 줄 알았더니 일본도 안개가 많네’하니까 ‘오늘 날씨가 얼마나 화창한데요’ 하면서 가족들이 깜짝 놀라요.”
부랴부랴 도쿄대학병원에 달려간 일당스님은 ‘독극물에 의한 실명이 우려된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김일성종합대학에 걸린 김일성 초상화 그리기도
“사촌형이 재산을 독차지하려고 술에 독극물을 넣었던 겁니다. 만일 술을 한병 다 마셨으면 죽었겠죠. 그일로 1년6개월 정도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그 뒤에도 여덟번이나 수술을 했어요.” 이 사건 이후 일당스님은 생명에 대한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다 가문에 ‘모든 재산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써서 도장까지 찍어준 상태다.
그런데 의외로 스님의 출가는 속세의 시간으로 따져보면 ‘늦깎이’ 출가라고 할 수밖에 없다. 뉴욕 원각사에서 관응스님으로부터 수계를 받았을 무렵이 67세였으니 말이다.
“어머니 일엽스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고 싶었고, 어머니와 좀더 가까이 있고 싶은 마음에 출가를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일까. 희한하게도 일당스님이 출가한 후 그에게는 믿지 못할 일이 종종 일어난다. 암자에서 밤 늦게 그림을 그리다가 붓을 든 채 잠이 들면, “태신아, 일어나” 하고 외치는 어머니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린다는 것. 장소를 옮겨도 마찬가지로 매일 새벽 일당스님은 일엽스님의 목소리를 듣고 잠자리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의문의 일이기는 하지만 일당스님은 그렇게라도 어머니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 좋다고 한다.
한편, 일당 스님은 불가의 연을 맺기 전 일본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일하다가 같은 학교에서 만난 음악교사 김청인 여사(77)와 결혼해 슬하에 아들 삼형제를 두었다. 김청인 여사 외에도 일당스님의 따뜻한 성품과 미술적인 재능에 반한 여성은 많았다. 이 가운데 2명의 여성은 일당스님과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일당스님은 해방 직후 김일성 주석 초상화를 그린 이력 때문에 한동안 조총련계 간첩으로 의심받아 작품활동에 제약이 있었지만, 그것말고는 출가한 이후에도 줄곧 붓을 놓지 않았다. 현재 일당스님은 직지사 중암에 자그마한 화실을 마련해놓고 주로 ‘고태법’을 이용한 신비로운 느낌의 ‘석채화’를 그린다. 고구려 벽화에서나 볼 수 있는 신비한 천연색을 뽑아내기 위해 직접 돌가루를 빻아 그림을 그려서일까. 일당스님의 그림에서는 고풍스럽고 예스러운 느낌이 은근히 배어난다.
“어렸을 때부터 한국의 산을 그리기로 결심했었어요. 나에게 산은 어머니가 계신 곳이고, 어머니를 생각하며 산을 그리고, 산을 그리면서 어머니를 잊고 싶었거든요. 산을 그린다는 것은 곧 어머니와의 대화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고 어머니의 품에 안기듯 위로와 휴식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일당스님의 어머니 일엽스님은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 된다’며 출가와 동시에 절필했지만, 붓으로 표현하는 일당스님의 ‘사모곡’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 글·박윤희 자유기고가. 사진·박해윤 기자]
▲ 나혜석 (羅蕙錫 1896 -1948 본관 나주羅州. 호 정월晶月, 여류 서양화가)
2000년 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된 나혜석
문화관광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서양화가이며 여권운동의 선구자인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 : 1896∼1948) 선생을 2000년 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나혜석선생은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한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다. 1921년 서울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시회를 열었으며, '자화상','페인풍경','파리풍경'등의 작품을 남겼다.
나혜석은 단지 화가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시대감각으로 소설,시 등의 문필활동까지 하여 1918년 뚜렷한 여성의식을 보여주는 소설 '경희'를 발표한 근대최초의 여성작가이며, 3·1운동때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중국 안동현(현재의 중국 단동시)에서는 외교관 부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독립운동가들의 편의를 돌본 민족주의자기도 하였다.
나혜석은 소위 '나혜석과 최린의 연애사건'으로 인해 이혼을 하였고, 현모양처가 여성의 모범상으로 굳어버린 시대에 봉건적인 사회관습에 도전한 여성운동가였다.
여자도 사람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으며 조선여성의 진보에 대한 자의식을 뚜렷하게 가지고 봉건적이고 인습적인 관념의 억압성을 비판하며 시대를 앞서 살아갔던 나혜석은 이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여성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던지고 있다.
나혜석
한말에 사법관을 거쳐 군수를 지낸 기정(基貞)의 5남매 중 둘째딸로 수원에서 태어났으며 서울의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에 신미술인 양화를 전공하기 위하여 동경의 여자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나 유부남이었던 시인 최승구와 공개 연애를 하고 1918년에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와 잠시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를 지냈고,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5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7년에는 만주 안동현(安東縣) 부영사로 일본정부 외교관신분이던 남편 김우영(金雨英 쿄토제대출신 변호사)과 함께 세계일주여행에 올라 파리에서 약 8개월간 머무르면서 야수파계열의 화가가 지도하던 미술연구소에서 수업하였다. 이어 유럽 각국의 미술관순례를 통해서 미술시야를 넓히고, 미국을 거쳐 1929년에 귀국하였다.
제1~11회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 9번 출품하여 제3회 때 '가을의 정원'으로 4등상, 제4회 때 '낭랑묘 娘娘廟'로 3등상, 제5회 때 '천후궁 天後宮'으로 특선을 받았다.
작품경향 주로 사실적인 수법으로 인물과 풍경을 그렸으며, 그뒤로는 야수파와 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아들인 한결 참신한 수법을 보였다.
그밖에 문재(文才)도 뛰어나 많은 문필업적을 남겼으며 대표작으로 파리에서 그린 '무희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와 '스페인해수욕장' 등이 있다.
유럽 여행중 사귄 민족대표 33인중의 한명인 최린과의 만남이 문제가 되어 귀국한 뒤인 1931년 이혼했다. 그 후 최린을 상대로 ‘정조 유린죄’라며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해 당시 도하 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던 나혜석. 사회의 인습적인 도덕관에 저항하는 '우애결혼, 실험결혼', '이혼고백서' 등 자신의 입장을 강변하는 글을 발표했으나 사회의 냉대로 점점 소외되었다. 1935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시회를 열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그뒤 수덕사, 해인사 등을 전전하며 유랑생활에 들어가 정확한 행적을 알 수 없다. 화가로서의 정상적 활동은 1935년 서울에서 가졌던 소품전을 마지막으로 중단하고,정신장애 반신불수등으로 고생을 하다가 1948년 서울 자혜병원에서 행려자로 쓸쓸히 인생을 마감했다.
▲ 고암 이응노 화백(李應魯) 1904∼1989. [충청남도 홍성출생, 호는 죽사(竹史), 고암(顧菴)]
우리 미술계의 거장이며 우리 미술의 우수성을 세계 속에 드높인 고암 이응노(1904~1989) 화백
고암은 1926년 22세 때 19세인 박귀희(朴貴姬)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고암이 전주에 정착한 때는 1928년이었으니 24세의 새파란 청년이었다. 그는 19세 때인 1923년 해강(海崗) 김규진(金圭鎭 : 1868-1933)에 사사하여 같은 해 제3회 선전(鮮展 :조선미술전람회) 四君子부에서 청죽(晴竹)으로 입선하고, 이듬해 전주시 중앙동에서 개척사(開拓社)라는 점방을 열고 간판을 그리는 한편 건물을 도장(塗裝)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에 신사구락부라는 모임도 조직했었다. 보통정도의 체구를 벗어나지 못한 그는 늘 헌팅캡을 쓰고 무릅까지 닿는 스타킹을 신는 경쾌한 차림새의 멋장이 였다고 전한다.
수덕여관에 올올이 세겨진 이야기
수덕사 일주문 옆에 있는 초가집 한채는, 너무나도 유명한 당대에 쌍벽을 이룬 두 폐미니스트 김일엽스님과 나혜석의 전설같은 이야기가 서린 곳이다. 한국 최초의 신시 여류시인 김일엽은 '그처럼 꽃답던 사랑도 단지 하루의 먼지처럼' 털어 버리고 1928년 그의 나이 33살에 속세를 접고 수덕사 견성암에서 탄옹스님으로 부터 수계를 받고 불가에 귀의하자,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다'는 스승 만공선사의 질타를 받아들여 붓마저 꺾어버린다.
1934년 이혼 후 극도로 쇠약한데다, 어린 딸과 아들이 보고 싶어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혜석은 수덕사로 직행하지 않고 수덕사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일엽스님이 암자에서 내려와 두 사람은 반갑게 회포를 풀었지만, 한 사람은 여성을 옥죄는 사회제도가 한없이 원망스러운 이혼녀이고, 또 한사람은 그것을 초월한 여승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너처럼 중이 되겠다'는 나혜석의 부탁에 '너는 안 돼'라고 일엽이 만류했지만 '조실스님(만공)을 뵙도록 도와줘'라는 나혜석의 간청에 못 이겨 마지 못해 김일엽은 만공스님 면담을 주선한다.
몇 년 전 경성에서 속세를 접고 여승이 되겠다고 속내를 털어 놓는 김일엽에게 '현실 도피의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해서는 안된다'라고 면박을 주던 나혜석이 이제는 처지가 바뀌어 같이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그만큼 이 땅에서 신여성으로 살아가기 힘들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만공선사로부터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는 일언지하의 거절을 당한 나혜석은 포기하지 않고 수덕여관에 5년동안이나 머무르며 '중 시켜 달라'고 1인 시위 하면서 버티는 한편 붓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며 찾아 오는 예술인과 소일한다.
어느 날. '엄마가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 왔다'는 열네 살 앳된 소년(현재 직지사에 계시는 일당스님) 이 수덕사로 일엽스님을 찾아온다. 그 소년은 김일엽이 일본인 오다 세이죠와의 사이에 낳은 김일엽의 아들인 김태신이다.
모정에 목말라 있는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 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김일엽을 보고, “어쩜 저렇게도 천륜을 거역할 수 있을까?”라고 느낀 혜석은 모정에 굶주린 그 소년이 잠자리에 들 때 팔베개를 해주고 젖 무덤을 만지게 해준다.
나혜석 역시 모성애에 주려 있는 세 아이의 엄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본 김일엽은 속세의 연민을 끊지 못하는 나혜석이 중노릇은 못 할 거라고 생각한다.
김태신은 이 후에도 어머니 김일엽을 찾을 때마다 수덕여관에서 묵는데, 나혜석은 마치 자기자식을 대하듯 팔베개를 해주고 자신의 젖을 만지게 하는 등 모성에 굶주린 일엽의 아이를 보살핀다.
나혜석은 수덕여관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면서 김태신(후에 일당스님)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끼치는데, 나혜석과 특별한 교분이 있는 청년화가 이응로도 자주 찾아와 이들과 함께 그림에 대한 이야기와 실습으로 시간을 보내고……. 이러한 연유로 김태신도 후에 북한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 있는 김일성주석의 초상화를 그릴 정도로 유명화가가 된다.
나혜석은 이곳에서 34년부터 43년까지 작품활동을 하며, 자유연애, 이혼고백장 발표, 민족대표 33인중의 한명인 최린을 상대로한 정조 유린 위자료청구소송 등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충남 홍성이 고향이고, 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그림에 대한 열정에 불타고 있던 청년 이응노에게는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온 나혜석은 둘도 없는 선배이자 스승을 만나려 자주 수덕여관을 들른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함께 이 산속 외진 곳에서 아예 같이 기숙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누나 같은 스승이자 선배화가일 뿐 애정관계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이응로에게 파리의 환상을 심어 준다.
누나처럼 선생님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던 선배 화가 나혜석과의 인연으로 수덕여관에 정이 들어 버린 이응노는, 1944년 나혜석이 이곳을 떠나자 아예 수덕여관을 사들인 다음 부인인 박귀희여사에게 운영을 맡기고, 6.25때에는 피난처로 사용하는 등. 6년간 살면서 수덕사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화폭에 옮긴다.
나혜석으로부터 꿈에 그리던 파리 생활과 그림 이야기를 들은 이응노는 1958년 드디어 21세 연하의 연인 박인경과 함께 파리로 떠나 버린다. 홀로 남은 그의 본부인 박귀희 여사가 여관을 운영하나 글자 그대로 소박떼기 청상과부가 되어 버리고 만다. 머물다 미련 없이 떠나 버린 두 사람과는 달리, 박귀희여사는 변치않는 애정과 절개로 이국 땅의 남편을 그리며 수덕여관을 지킨다.
1967년 또 다시 김태신이 어머니 일엽스님을 찾아 견성암으로 찾아온다. 일엽스님은 쪽 물감 만드는 일과 선수도 하는 것과의 유사성을 설명하면서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정갈하게 가꾼 쪽풀을 응달에다 말려 단지에 발효시키는데, 동짓달부터 다음해 5월까지 7백번 손을 써야한다. 699번 정성을 드렸다가도 단 한번 소홀이 하거나 부정을 타면 쪽이 죽어버린다는 지극히 선적인 생맹체다.'라고 한다.
“발효하기 시작하면 목욕재계하고 조석으로 저어 줘어야 하는데, 젓는 동안 화엄경을 암송한다.”(김일엽이 입적하기 5년전이다.)
박귀희여사가 외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데, 뜻하지 않게 이른바 “동백림사건”으로 1968년 이화백이 대전 형무소에 수감된다. 박귀희여사는 한결같은 지극정성으로 이화백의 옥바라지를 한다. 출옥 후 이화백은 수덕여관에서 몸을 추수리면서 그녀 곁에 잠시 동안 머무른다.
21세나 연하인 젊은 여자와 떠나 버린 남편을 병구완하는 박귀희 여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런 부인의 뒷 모습을 바라보던 이 화백은 아마도 그 마음을 추스려 여관 뒤뜰에 있는 너럭바위에 추상문자 암각화를 새겼으리라.
▲ 1969 이응노 그림 글자가 선명한 암각화 / 박귀희 여사는 화장돼 한 줌의 재로 사라졌다. 남편의 유골이라도 돌려받아 함께 묻히고 싶다던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 파리에 살고 있는 박인경씨가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전처 박귀희 여사는 쓸쓸히 이승을 떠났다. 몸은 죽어 떠났으나 박귀희여사의 남편사랑은 수덕여관에 말없이 남아 있는 문자추상 암각화처럼 깊고 뚜렷하다.ⓒ 2008 한국의산천
그리고는 “이응로 그림,”이라는 사인까지 남겨 놓은 뒤 “이 그림 속에 삼라만상 우주의 모든 이치가 들어 있다.”파리로 또 훌쩍 떠나버린다. 박귀희 할머니는 이 암각화를 바라보며 어느덧 팔순을 앞둔 세월까지 남편을 기다려 온다.
그러나 죽기 전에는 꼭 다시 만나 볼 수 있으리라 실날 같은 희망으로 살아왔지만, 고암은 1992년 귀국전시를 앞두고 파리에서 눈을 감고 만다.
장례식에도 가볼 수 없는 박귀희여사는 마지막 소원으로 이응로 화백의 유골이라도 돌려 받아 자신이 죽으면 함께 묻히고 싶어한다. 그녀는 고암이 파리로 떠날 때 그의 출세 길에 지장이 될까봐 이혼수속을 허락해 준것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다.
이제 그녀는 고암에 대해 작품 한점 소유할 수없고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는 법적으로 남남의 처지였던 것이다. 2001초 수덕여관 주인 박귀희 여사가 92세를 일기로 돌아가신다 그리고 이 수덕여관도 폐허와 전설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이다. 이제 수덕여관과 수덕사에 얽힌 추억의 인물은 김태식 한 사람만 직지사에 생존해 계시다.
일엽 스님뿐일까? 수덕사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을 찾아왔던 가족들도 아마 이곳에서 머무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수덕여관은 세간과 출세간의 가운데 놓인 ‘인연의 가교’가 아니었겠는가.
고암 이응노 화백이 남긴 암각화.
고암 이응노 화백은 인근 홍성 출신이다. 이 화백의 생가와 수덕여관은 차로 10분 걸리는 가까운 거리이다. 이응노 화백은 선배였던 나혜석을 만나러 오면서 수덕여관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수덕여관에 드나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1944년 여관을 사들였다.
1958년 후배 화가인 박인경씨와 함께 프랑스로 떠나기 전까지 이곳에서 수덕사 부근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렸다. 이 화백은 수덕사를 드나들며 스님들과 인연을 맺었고 덕분에 수덕사는 의식 있는 문인 예술인들의 보림처로 많이 애용됐다.
▲ 고암 이응노 화백이 남긴 암각화.박귀희 할머니의 망부에 대한 恨처럼 깊게 새겨져있다.
전처 박귀희 할머니는 이 암각화를 바라보며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고암은 1992년 회고전이 열리고 있던 파리에서 끝내 다시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고암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박귀희 할머니는 그와 함께 보냈던 날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이 여관을 옛 모습대로 지켜왔다고 한다.
초가집의 그윽한 운치나 객수가 아니더라도, 수덕여관에 녹아 있는 이런 애절한 사연을 알고난 뒤라면 누구나 잠 못 이루고 뒤척거리는 밤을 보내게 된다.
이응노 화백이 프랑스로 떠난 후에 본부인 박귀희씨가 시어머니를 모시며 여관을 운영했다. 2001년 박씨가 사망할 때까지 이 화백의 흔적과 정갈한 음식맛 등에 반해 수덕여관을 찾는 이들이 많았다.
예술인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수덕여관은 여관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한 충청남도에 의해 1989년 도(道) 지정 문화재기념물 103호로 지정됐다.
수덕여관 암각화에 새겨진 박귀희 여사의 恨 [출처 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이응노 화백의 본부인 박귀희(朴貴嬉) 여사는 2001년 2월 24일 밤 10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장조카 집에서 한많은 세상을 떠나셨다. 수덕여관은 우여곡절끝에 수덕사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지난 23일(2001년 2월 23일) 고암 이응노 화백의 본부인 박귀희여사가 92세를 일기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박 여사의 타계는 언론에 제법 긴 부음기사로 보도되면서 그녀의 한많은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했다. 한 남자의 본부인 별세가 기사로 처리되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박 여사의 삶에는 전형적인 한국 여성의 희생과 기다림, 그리고 뼈에 사무친 한이 절절이 박혀 있다. 고등교육을 받은 신여성에게 남편을 빼앗기고 얻은 공허와 서글픔은 안타까움을 너머 형언하기 힘든 애절함을 자아낸다.
양반집에서 태어난 고암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17살 때 가출, 상엿집 칠장이로 전전하다가 해강 김규진 문하에 들어가 서예와 묵화를 배웠다. 그리고 일본에 건너가 마쓰바야시 게이게스(松林桂月)에게 사사하는 등 작가로서 대성의 길을 걸었다.
고암이 박 여사를 만나 혼인한 것은 1930년대 중반. 해방 직전 일본에서 아내와 함께 귀국한 고암은 그해에 충남 예산 수덕사 앞에 있는 수덕여관을 사들여 그림을그렸다. 수덕여관은 화가 나혜석이 장기 투숙하면서 고암과 그림 세계를 논하던 곳이기도 하다.
박 여사와 고암이 수덕여관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이 나던 해. 그러나 대학교수이자 화단의 중진으로 우뚝 선 고암은 21살 연하의 이화여대 제자 박인경과 1958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버렸다. 이후 박 여사의 한은 깊어만 갔으나 한번 떠난 남편의 마음은 좀처럼 돌아올 줄 몰랐다. 고암은 수덕여관을 지키고 있던 박 여사에게 수 차례에 걸쳐 편지로 이혼을요구했다. 마음이 약해진 박 여사는 남편의 앞날을 위해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 주고 말았다.
이런 박 여사에게 남겨진 것은 아물지 않는 상처뿐이었다. 위자료는 고사하고 작품 한 점 건네받지 못한 박 여사는 법적으로 남남이 돼 버린 남편을 그리며 여관을 떠나지 않았다. 수덕여관이 초가지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도 언젠가 돌아올지 모르고 남편을 기다리는 '조선 여인'의 마음을 상징하는지 모른다.
그렇게 기다리던 남편은 10년 뒤 죄수가 돼 귀국했다. 북한에 생존해 있는 것으로 확인된 양아들 문세씨를 만나려 독일 동베를린을 다녀온 이른바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돼 1967년부터 2년 반 동안 교도소 신세를 진 것이었다.
옥바라지는 온전히 박 여사의 몫. 출옥한 남편은 수덕여관에 잠시 머물며 뒤뜰마당의 넓적바위에 문자추상화를 남기고는 또다시 프랑스로 훌쩍 떠나 버렸다. 남겨진 것은 박 여사와 암각화뿐. 수덕여관에는 회한어린 덕숭산 바람만 속절없이 불었고 박 여사의 길고 긴 기다림의 세월은 다시금 시작됐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크면 클수록 법적 아내의 벽이 높고 두터움을 절감해야했다. 떠나간 남편은 그것으로 그만이었고, 두번째 부인 박인경씨는 오불관언 냉정했다. 박 여사는 이혼도장을 찍어 준 것이 두고두고 후회스럽다고 말할 정도였다.
박귀옥 할머니는 화장돼 한 줌의 재로 사라졌다. 남편의 유골이라도 돌려받아 함께 묻히고 싶다던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 파리에 살고 있는 박인경씨가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박 여사는 쓸쓸히 이승을 떠났다. 몸은 죽어 떠났으나 박 여사의 남편사랑은 수덕여관에 말없이 남아 있는 문자추상 암각화처럼 깊고 뚜렷하다. [출처 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노송군락사이에 포근하게 자리한 수덕여관에 하얀눈이 내린다 ⓒ 2008 한국의산천
지금도 지나간 슬픈 추억처럼 눈발이 날린다.
고암은 1992년 회고전이 열리고 있던 파리에서 끝내 다시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고암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전처인 박씨 할머니는 그와 함께 보냈던 날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이 여관을 옛 모습대로 지켜왔다고 한다. 하얀 눈이 쌓여 이곳에 서린 아픈 추억의 영혼들을 포근히 덮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