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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독립신문 다시 보기 (최두환 글 정리)
(가) 조선 땅의 크기
독립신문에서 알고 있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 많다.
첫째 문법상 글자를 적는 요령을 볼 수 있다.
신문의 발행호수를 말하는 숫자에서 ‘ㄹ’자가 들어가는 ‘六’을 보면,
‘뉵호, 십뉵호, 이십뉵호’로 ‘뉵’이라고 했다.
‘ㄹ’자가 맨 처음에 나오든, 뒤에 나오든 상관없이 ‘ㄴ’이 맞다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날짜를 말할 때에는 1896년 ‘6월 2일’을 ‘뉵월 이일’로 적었을 뿐,
그 밖의 다른 날들은 한결같이 ‘륙월’이라고 하여 ‘ㄹ’자를 썼다.
이것은 요즘 문법으로 두음법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두음법칙은 1932년에 일제가 만들었지만 시행한 것은 해방된 뒤이다.
1949년에 ‘李’씨를 거의 ‘리’라고 적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 스스로가 두음법칙을 실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論說’의 소리에는 한결같이 ‘논셜’이다.
‘ㄹ’를 쓰지 않고 ‘ㄴ’을 썼다는 것이 특징이다.
어쨌든 ‘ㄹ’의 경우 두음법칙은 불필요한 규정일 수밖에 없다.
둘째 조선을 개화시킨다면서 교육적인 ‘논설’을 많이 썼는데 ‘조선의 강역의 규모와
특징’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보자.
‘죠션 토디에셔 생기는 돈과 외국 토디에셔 생기는 돈을 비교해보면 갓흔 디면을 가지고 죠션 사람은 백분지 이십이분 밧긔는 돈을 못만드니 이거슨 다름이 아니라 따흘 가지고 쓸줄을 모로는 거시라 따에 호불호를 가지고 비교해볼진대 죠션 따 만콤 기름진 따히 업는대 거기셔 생기는 쇼츌을 보거드면 외국보다 오분지 일밧긔는 못되니 이거슬 곳 죠흔 따흫 뭇키는 것과 갓흠이라 죠션 사람 생각에 죠타는 따흔 따히 낫고 물이 만히 잇서 벼를 심어야 죠흔 줄노 알거니와.... 각국에셔 나무 파다 생기는 돈이 대강 미국셔는 일년에 삼억 팔쳔 칠백만원이요 아라샤에셔는 이억 팔쳔 일백 오십만원이요 덕국에셔는 일억 이쳔 이백 오십만원이요 오지리셔는 일억 오쳔 오십만원이요 죠션 반도 못되는 셔젼 갓흔 나라도 이쳔 삼백 오십만원 생재를 하니... 죠션 토디와 긔후가 동양 각국 즁에 뎨일 죠흔 고로 실과가 매우 잘 될 터이니...’
여기에 소개된 내용들을 보자.
첫째 조선의 토지가 동양에서 가장 기름지고 좋다는 것이다.
둘째 조선의 토지가 낮으며 물이 많은 저지대라는 것이다.
셋째 조선의 땅에서 생산되는 것이 외국에 비하여 22/100(1/5)이라는 것이다.
넷째 외국과의 땅의 크기를 비교한 것에서 조선의 반도 못되는
셔젼(瑞典: Sweden)이라고 했으니, 조선은 그보다 2배나 크다는 것이다.
여기서 조선의 토지가 기름지다는 것에서부터 저지대 등등의 모든 문제는
한반도의 설명이라고 할 수 없는 별개의 기사이다.
국명부터 하나씩 비교해보자. (면적과 인구수는 1992년 기준)
아라샤 :俄羅斯 Russia 러시아
덕국 :德國 Deutchland 독일 35만6885 평방키로미터, 8056만9000명
오지리 :奧地利 Austria 오스트리아 8만3853 평방키로미터, 788만4000명
셔젼 :瑞典 Sweden 스웨덴 44만9964 평방키로미터, 866만8000명
국명의 발음을 보자.
독립신문에서 ‘오지리’가 현대 중국어로는 ‘aotili’(아오띠리)이며, ‘
셔젼’은 ‘셔뎐’으로 조선발음인데 현대중국어로는 ‘juitien’(뤼뗸/위뗸)이지만,
일본어로 ‘수이덴’으로 ‘Sweden’과 비슷하다.
특히 현대중국어 소리와는 근처도 가지 않는 발음으로 현대중국에서 사용한
국명이란 것은 잘못이다. 중국의 발음은 조선의 발음 ‘셔뎐/서전’이었던 것이
정확, 가장 비슷한 발음이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스트리아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지만, 이미
‘조선의 반도 되지 못하는 스웨덴’이라고 했으니,
여기서 ‘조선=A’, ‘스웨덴=B’라고 하면, [A=2B]이다.
여기에 숫자를 대입하면, A=2B=2(44만9964)=88만9928㎢]이다.
그런데 이미 [A=22만0277㎢]가 조선의 강역의 규묘라고 대한민국 지도
(1992년의 기준)에 나와 있으니, 이 수치로서는 [A=B]의 등식은 틀렸다.
여기서 [88만9928]=[A]가 되기 위해서는 [A]의 지리적, 공간적 위치가
한반도로써는 설명이 불가능하므로 이를 본래대로 옮겨놓아야 한다.
조선의 크기는 대체로 동서 1000리, 남북 3000리라고 나온다.
물론 축소된 조선의 크기일 수밖에 없지만,
이 배로 보아야 그런대로 라도 조작된 조선의 크기가 될 것이다.
그래서 독립신문에 나온 당시 조선의 규모를 중국대륙에서 보면 상해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뻗은 지역이 될 수 있다.
하북성 19만, 하남성 16만, 산동성 15만, 안휘성 13만, 강소성 10만, 절강성
10만㎢를 합하면 6개성에 83만㎢이다. 산서성 15만의 반을 합한다면 90.5만이다.
면적만으로는 매우 비슷한 규모가 된다. 바로 이 지역이 중국대륙의 동부에 있고,
황하와 양자강의 하류에 있으며, 저지대일 뿐 아니라,
강이 많은 지역이고 쌀이 많이 나는 지역이다.
한반도에 기름진 땅이 많고, 동양 각국 가운데서 으뜸이라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다시 정리하면 산서성을 절반으로 계산하듯이 하남성을 정반으로 하여 8㎢로 하고,
강서성 16만㎢를 절반으로 한 8만㎢로 정하면, 같은 면적 90.5만㎢의 조선이 되며,
그 크기와 모양과 지리적 위치와 토질 등등을 보면 충분히 새로운 조선임을
대변해준다. 일단 스웨덴은 그 크기가 조선의 1/2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으니,
스웨덴의 2배가 되는 조선은 88만9928㎢나, 90.5㎢는 매우 근접한 규모이므로,
심사숙고하여 조선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와 조사가 필요하다.
독립신문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조선의 규모에 대하여 인구수에 있어서 중남미
5개국을 합한 것의 6갑절이라고 했으며, 남아메리카 각국을 다 합한 인구 보다고
2갑절이나 된다고 했을까? 그러면서도 영국보다는 조금 작고, 이탈리아보다는
조금 크다고 했을까? 그리고 이 신문에서는 스웨덴 면적의 2갑절이 된다고 했을까?
독립신문이 그토록 앞뒤가 맞지 않는 글을 쓰고 있음에도,
그 당시에 그렇게 하고도 사람들이 옳다고 여겼을까? 옳다고 여길만한 강역,
지리적 위치에 존재했었다는 것이 독립신문 발행당시 그 독자들의 상식을 벗어나지
않으려면 조선의 위치는 한반도가 아닌, 중국대륙 동부지역이라야 마땅하다.
(나) 조선의 인구
독립신문이 한반도에서 간행된 것이 아니고 중국대륙에서 간행된 것이며,
그 독립이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대륙이며, 그것도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조선의 중앙왕국인 중국과 그 변방의 조선을 분리하는 것이 독립이었다는 근거의
하나가 조선의 인구의 규모라고 본다.
조선의 인구는 일본이 식민지배할 때에 2000만 명이라고 했다.
독립 선언할 때에 많은 문헌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어떤 것에는 1600만
명이라고 했다. 이 후자는 바로 독립신문에 기록되어있다.
독립신문(이십사호: 1896년 5월 13일)의 논셜의 일부분이다.
‘조선의 인구 수효는 1600만 명인데, 남자는 900만 명, 여자는 700만 명이며, 호수(戶數)는 348만911호 가량이다. 지면은 영국 리수(里數)로 12만 방리(方里)요, 조선 리수로는 60만 방리 가량이다. 이 수효로써 세계 각국과 비교하면, 조선이 영국보다는 크고, 벨기에(비리시:比利時; Br ssel)보다 9갑절이 크고, 네덜란드(화란:和蘭; Netherland)보다 8갑절이 크고, 덴마크(졍말:丁抹; Denmark)와 스위스(셔샤:瑞士;Swiss)보다 6갑절이 크고, 그리스(희랍:希臘;Greece)보다 5갑절이 크고, 포르투갈(포도아:葡萄牙;Portugal)보다 3갑절이 크고, 이탈리아(이리아:伊太利;Italy)와 거의 같고, 서양으로 가면, 엘살바도아(섈베도-:薩爾瓦多;El Salvador)보다 13갑절이 크고, 코스타리카(코스다카:Costa Rica)와 도미니카(산도밍고:Santo Domingo)와 아이티(해타이:海地;Haiti)보다 4갑절이 크고, 니카라과(늬코록가:尼加拉瓜;Nicaragua)와 온두라스(한두라스:Honduras)보다 갑절이다. 인구 수효로는 덴마크와 그리이스보다 8갑절이고,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와 벨기에보다 3갑절이고, 스웨덴(셔젼:瑞典;Sweden)과 노르웨이(나위:那威; Norway)와 터어키(토이긔:土耳其;Turkey)보다 갑절이고, 스페인(셔반아:西班牙;Spain)과 거의 같고, 아메리카 합중국 외에는 조선같이 인구 많은 나라는 없는데, 그 가운데 비슷한 나라를 보면, 브라질(부라실:巴西;Brazil)과 멕시코(묵셔가:墨西哥;Mexico)이다. 브라질은 1233만3000명이고, 멕시코는 1040만 명가량이다. 중앙아메리카 속에는 5나라를 아울러서 6갑절이며, 남아메리카 속에 있는 각국을 아울러도 갑절이다. 이것을 보면, 조선이 세계 가운데서 큰 나라요, 토지는 동양에서 제일이다.’
인구로 보면 1992년의 브라질은 1억9000만 명 정도이므로,
독립신문에서 말한 것과는 판이하다. 무려 15배나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단순 산술로써, 역으로 조선의 인구를 15배로 조정하면,
1600만 명의 15배가 되는 1992년의 조선의 인구는 2억4000만 명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6000만 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 1992년의 6000만 명의
한반도 인구를 1/15로 하면 독립신문(제20호)이 나온 1896년의 기준인 1600만
명이 되어야 하지만, 겨우 400만 명으로 계산된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더구나 남아메리카 속에 있는
각국을 어울러도 조선의 인구가 그 갑절이 된다고 했다.
이 엄청난 큰 수효의 인구를 가진 나라가 조선이었다.
그렇다면 이 조선이 1896년의 당시에 지금의 중국대륙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전혀 될 수 없다.
(다) 조선인의 지식수준
독닙신문 제1호 ‘1896년 4월 7일 금요일’에 실린 글을 보자.
‘우리 신문이 한문은 아니 쓰고 다만 국문으로만 쓰는 거슨 샹하귀쳔이 다 보게홈이라. ...죠션셔는 죠션국문은 아니 배오드래도 한문만 공부하는 까닭에 국문을 잘 아는 사람이 드물미아. ...한문만 늘 써 버릇하고 국문은 폐한 까닭에 국문만 쓴 글을 조선인민이 도로혀 잘 아러보지 못하고 한문을 잘 알아보니 그게 엇지 한심치 아니리요. ...남녀노소 샹하귀쳔간에 우리신문을 하로 걸너 몃달만 보면 새지각과 새학문이 생길걸 미리 아노라.’
여기서 원문의 철자대로 쓰지는 못했지만, ‘아래ㅏ’니, 된소리 ‘ㅅㄱ’의 글을
바꾸면 옛글 원문 그대로이다. 이 독닙신문의 논설에서 말하는 취지는
국문(한글-훈민정음)을 쓰면 모두 다 현명한 지식인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는
취지를 밝혔다. 이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문제로 요약된다.
첫째 상하귀천의 문자언어가 달랐다. 상류층, 귀족층의 사람들은 한문을 썼다.
둘째 그 동안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두 한문만 알고 썼다.
셋째 독닙신문이 발행되는 시기까지 국문(한글)을 아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넷째 1896년 4월 이후에야 한글을 대대적으로 보급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식층들만의 문자언어라면, 보통, 일반 사람들은 말만 할 줄 알았지,
글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겠는가?
옛날 사람들이 한자, 한문을 잘 알고 썼다는 것에 대해 지금의 대학교
한문교재를 보자. 그런 책을 읽고 배워서 말 한마디 할 수 있는지, 단 몇 줄의
한문이라도 번역을 해낼 수 있을까? 전혀 아니다.
그렇다면 그 한문을 잘 쓰고 익혀온 사람들은 지금의 중국 사람들이며
그곳이 바로 조선임을 추정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고 그 독닙신문 속에 ‘사민필지’라는 광고문이 있다.
‘셰게지리셔를 한문으로 번역한거신대 사람마다 볼만한 책이니 한문샹에 유의하는
이는 이책을 죵노책젼에셔 사시옵 갑슨 여덜냥’이라고 했다.
여기서 표기된 "세계지리서"는 영어로 기록된 듯 하며, 이때 번역을 쉬운 한글이
아니라, 독닙신문에서도 어렵다고 인정한 한문이었다. 이것은 한문으로도
모든 것이 편리하게 통했다는 말이다. 조선인이 한문을 잘 쓰고 있었다는 곳은
결코 한반도라고 할 수 없는 것이며, 한문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란 조선
사람임에는 분명하지만 한반도 사람은 아닌 것이다.
(라) 조선의 인종
독립신문 십 이호(1896년 5월 2일 토요일)는 지금까지 나왔던 11호까지의
독닙신문과는 다른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독닙’에서 ‘독립’으로 글자가 소리 나는 대로의 표기에서 본디 글자의
표기로 되었다. 구개음화니 두음법칙이니 하는 현상은 발음의 문제이지,
글로 표기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특히 ‘ㄹ’의 발음과 표기는 3가지가 있다.
먼저 보기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더 쉽겠다.
‘李’의 경우 독립신문에 보면 ‘리, 니, 이’로 적혀있다. 거의 ‘니’가 많다.
그런데 대한민국 사람들은 거의 ‘이’로 발음하고 적기도 한다. 이것은 본디
글자가 ‘李’이니 ‘리’로 써야 하고, 읽기로는 지방마다,
사람의 발성구조의 특성에 따라, ‘리, 니, 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독립신문’으로 글자를 고친 것은 매우 잘 한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지금 당장이라도 ‘두음법칙’을 없애야 한다.
일본식민지 시대에 일본인이 만든 법칙을 그토록 지키려고 하는 것은 애착인지,
어리석음인지, 무식인지.
둘째는 지금까지 태극기가 새겨져있지 않았는데, 이날부터는 줄곧 태극기가
‘독립’과 ‘신문’사이에 새겨져 있다. 물론 요즘의 태극기 문양과는 다르다.
특히 그 가운데 음양의 모양이 지금의 上下가 아니라, 左右로 그려져 있다.
다시 ‘논셜’의 내용을 보자.
이 논셜의 내용에는 일부를 이미 소개한 바가 있다.
즉 ‘지금 셔울 쇽에 잇난 우물물을 분셕하여보거드면 그 물이 물이 아니라 거름을 걸은 거싀니 이런 물을 먹난 까닭에 여름이면 셜사로 하여곰 죽난 사람이 만히 잇고 열병과 학질이 만히 다니니...’
여기서 ‘서울 우물물이 거름 걸은 것과 같다.’는 말이 가장 특이한데,
이 말은 황톳물, 황하물이란 뜻이지 대한민국 청계천의 물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신문에도 기사화되어있지만 조선일보(2004. 6. 15. 화요일 A22)에
‘240년전 청계천공사 국역본 나와’라는 장면에 그림사진이 1장이 소개되었다.
이것이 정말 한반도의 청계천인지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소개 글에는 ‘준천계첩’(濬川契帖)이라면서 준설공사로서 군병, 일반백성 등
총 21만5382명이 동원되어 57일간(영조36년 2월 18일부터 4월 15일까지)
대역사가 이루어졌다고 했다. 그 오른쪽 귀퉁이에
‘수문에서 영조임금이 직접 살펴보았다[水門上親臨觀役圖]’라는 글이 새겨져있다.
그 아래에 5칸수문다리가 있고, 그 아래에 많은 도포자락 입은 사람들이
강 가운데를 바라보고 있으며, 그 강 가운데는 깃발을 중간 중간 꽂아놓았고,
한쪽에 소 2마리씩에 쟁기와 쓰레를 끌고 있고, 여러 사람들이 함께 끌어당기는
삽질을 하고 있다. 이것은 모래바닥이며 강바닥[河床]에 모래가 많이 쌓인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준설이란 말이 필요하다.
지금도 양자강은 강바닥이 농토 내지 주거지 높이보다 높다.
그래서 장마엔 마을이 온통 홍수천지다. 황하라고해서 다르지 않다.
결코 ‘준천계첩’의 ‘준천’이 한반도 ‘청계천’이 아니다.
청계천은 ‘마르내’라고도 하면서 ‘건천’(乾川)이라고도 하는데,
가물면 물이 말라버려서 붙이는 이름이 아니라, 이것은 중심에서,
즉 서울의 중앙에서 "서북쪽"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한반도엔 경주의 서북쪽 지역에 ‘건천읍’(乾川邑)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며, 서울에는 ‘건천동’이라 하여 ‘중구 인현동’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틀린 말이다. 경복궁의 서북쪽에 있어야 한다.
중국대륙에는 하남성 낙양의 서북쪽에는 준천(濬川)이 있으며,
섬서성 장안 경복궁 서북쪽에는 건현(乾縣,乾州)이 있다.
그리고 그 논설의 첫머리에
‘조선사람들을 동양 각국 사람들과 비교하여보면 청국사람보다는 더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정하고 일본사람보다는 크고 체골이 더 튼튼히 생겼으니...’라고 했다.
이 말은 마치 몇 달 전에 외국학자들이 세계 각국의 두뇌 IQ를 측정한
결과 107(홍콩), 106(한국), 105(대만), 100(영국)... 하는 것과 비슷하며,
한국 사람들이 세계에서 IQ가 두 번째로 높다고 했던 것과 같은 의미다.
이 독립신문의 기록은 1894년에 조선을 다녀가서 1897년에 간행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란 책에 실린 내용과 흡사하다.
이 글이 한반도의 사람을 가리키는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그럴 수 없는 까닭은 독립신문 뒤에 적힌 ‘서울의 우물물’이 한반도의 사정과
다른 바로 중국대륙 황하줄기의 것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서울물, 특히 우물물은 1960년대 개발전만 해도 파는 곳마다 약수였다.
중국대륙은 예나 지금이나 거름물에 가깝다.
그래서 중국대륙에는 물을 끓여서 먹는 차(茶)가 발달된 것이다.
(마) 독립신문과 독립문
독립신문의 구성이 처음으로 만든 것이라 오류와 변형이 있었다고 보지만,
서구 국가에서는 보편화된 것임을 생각하면 좀 의아한 부분이 많이 발견된다.
신문의 1면에는 1단에 광고와 물가를 소개했고,
2단에 논설의 형태가 28호(1896년 6월 9일)까지였다.
29호(6월 11일)부터는 상당한 기간 동안 1면 전체가 ‘논설’로 쓰였다.
그런데 33호(6월 20일)에는 거의 모든 면이 논설이고 맨 하단에 끝에서
7째 줄까지만 ‘관보’를 실었고, 뒷면까지 연속된다. 게다가 이 33호는 1단의 칸이
다른 날엔 34줄에 비하여 32줄로서 2줄이 모자란다.
그만큼 줄 사이가 넓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의 독립신문의 형태라고 보기에는
석연찮은 부분이다. 왜냐 하면 다음과 같은 논설의 글이 있기 때문이다.
‘죠션인민이 독립하난거슬 모로난 까닭에 외국 사람들이 죠션을 업수히 녁여도 분한 줄을 모로고 죠션 대군쥬 폐하끠셔 청국 님군의게 해마다 사신을 보내셔 책력을 타오시며 공문에 쳥국 년호를 쓰고 죠션 인민은 쳥국에 쇽한 사람들노 알면셔도 몃 백년을 원슈 갑흘 생각은 아니하고 쇽국인쳬하고 잇서스니 그약한 마음을 생각하면 엇지 불샹한 인생들이 아니리요...
죠션 대군쥬 폐하를 쳥국과 타국 님군과 동등이 되시게 한 번을 못하여 보고 삼년젼 까지 끄어러 오다가 하나님이 죠션을 불샹히 넉이셔셔 일본과 쳥국이 싸홈이 된 까닭에 죠션이 독립국이 되야 지금은 죠션 대균쥬 폐하끠셔 세계 각국 뎨왕들과 동동이 되시고 그런 까닭에 죠션 인민도셰계 각국 인민들과 동등이 되얏난지라....
근일에 들으니 모화관에 이왕 연츄문 잇든 자리에다가 새로 문을 세우되 그 문 일홈은 독립문이라 하고 새로 문을 그 자리에 세우는 뜻슨 세계 만국에 죠션이 아죠 독립국이란 표를 보이자는 뜻시요 이왕에 거긔 셧든 연츄문은 죠션 사긔에 뎨일 수치되는 일인즉 그 수치를 씨스라면 다만 그 문만 허러바릴뿐이 아니라 그 문 셧던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난 거시 다만 이왕 수치를 씨슬 뿐이 아니라 새로 독립하난 쥬츄를 세우는 거시니 우리가 듯기에 이렇게 깃부고 경사로운 마암이 잇슬 때에야 홈을며 죠션 신민들이야 오직 즐거올거시오...
만일 그 독립문이 필력이 되거드면 그 날 죠션 신민들이 외국 인민을 쳥하야 독립문 압희셔 크게 연셜을 하고 세계에 죠션이 독립국이요 죠션 인민들도 자긔들의 나라를 사랑하고 대군쥬 폐하를 위하야 죽을 일이 잇스면 죽기를 두려워 아니 하난 거슬 세계에 광고함이 죠흘 듯하더라...’
이 독립신문에서는 지난날 종주권이나 종속국에 대해 언급한 바와는 매우
모순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
청나라에서는 조선을 거의 간섭을 하지 않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신문에서는 오히려 그 청국을 적개심을 유발케 하는 말만을 늘어놓았다.
게다가 쳥국이 상국인 것처럼 꾸며져 있다.
그리고 독립문은 연츄문 자리에 세워야 한다고 했으니, 지금의 독립문이 그런
자리였을 것이다. 국사사전에 보면 영은문(迎恩門)이다.
그렇다면 [연츄문]=[영은문]으로 바뀐 것일 수 있다.
영은문은 모화관과의 관계도 알아야 한다.
모화관은 서대문 밖에 있고 1407년에 모화루(慕華樓)라고 했는데 그 모화루 앞에
영은문을 세웠으며 1429년에 모화곤으로 고쳐 불렀다.
이것은 청일전쟁으로 폐지했으며 1896년에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고서
모화관을 독립관이라고 했으며 여기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회관으로 썼다는 것이다.
그런데 독립문의 위치를 보면, 사적 32호라면서 서대문구 교북동(橋北洞)에 있고
성에서 8리에 있다고 했다. 지금의 경복궁 서쪽에 인왕산(338.2m)의 성 남쪽
연장선상에 있고 현저동(峴底洞)과 무악동(毋岳洞)과의 중간에 있다.
교북동이 전부터 있었는지는 찾을 수 없다.
모화관의 위치에 대해서는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곤방산록(坤方産麓)에 있다고
했다. 곤방이란 ‘서남쪽’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경복궁에서 서남쪽에 있어야 하는데,
현재는 서대문구 독립문역 바로 서쪽일 뿐 아니라 경복궁에서도 서쪽에 있다.
방향이 서쪽과 서남쪽이라는 차이가 있고 성에서 8리에 있다는 말과 현재는
인왕산 남쪽 성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지리적으로 다르다.
또 눈여겨 볼 사료는 ‘동국여지비고’이다.
이것은 조선말 대한제국 고종 때에 만들어졌다. 거기에 ‘모화관’은
돈의문(서대문) 서북쪽에 있다고 했다. 이는 잘못된 설명이다.
이 설명은 돈의문 서북쪽이라고 했음에도 사실은 경복궁 서쪽이다.
그러므로 ‘곤방산록’이라는 말과는 틀린다.
독립신문은 조선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면서 조선의 중앙왕국(중국)과 조선을
분리시키는 작업을 한 것이다. 일본이 청국과 전쟁을 할 수밖에 없도록 부추겨서
서구 열강세력에 의해 전쟁을 일으켰고, 일본과 청국 사이에 있는 조선을 전혀
거리감이 없는 전쟁터로 변하게 되었는데 그 조선이 한반도라면 청일전쟁 자체가
불가능하다.
조선의 북쪽에 작은 청국이 있었고 조선(중국대륙)의 동쪽에 일본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연결시켜 볼 수 있는 사료를 보자.
조선왕조실록에서 ‘선조수정실록’ 권26 선조25년 9월 1일의 내용이다.
‘200년 동안 복건성과 절강성이 항상 왜적의 화를 당하면서도 료양(遼陽)과 천진(天津)에까지 이르지 않았던 것은 어찌 보면 조선이 울타리처럼 막아주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압록강에 길이 셋이 있습니다만, 서쪽에 가까운 두 곳의 길은 물이 얕고 강이 좁아서 말이 뛰어 건널만하고 또 한 길은 동서의 거리가 얼마 되지 않으니 어떻게 그곳을 거점으로 하여 방수(防守)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왜노들이 조선을 점거한다면 료양의 주민들은 하루도 편안하게 잠을 잘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조선이 울타리가 된다는 말, 보건성, 절강성과 료양, 천지와의 관계 및
그 중간에 있는 것이 조선이라 했다.
이 조선은 조선의 서울인 조선중앙왕국(중국)을 제외한 나라들을 통칭한 것이다.
한반도의 압록강 서쪽의 형세를 보자. 물이 얕은가? 폭이 좁은가?
이 설명은 압록강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고 한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흐른다.
이 사료는 선조 25년(1592년) 9월이니 임진왜란이 일어 난지 6개월이 지나는
시점이다. 거기다가 선조가 압록강을 건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절박한
시점이다. 그 압록강이 한반도 북쪽에 있는 강인가?
(바) 조선의 토지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백성들을 교화시킬 목적으로 간행하여 강소성 최남부
동쪽 끝의 상해에 독립신문사의 지점을 두었던 열의에 조선 사람들은
진정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
그리고 그 독립신문에서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한반도 사람들은
무엇을 느낄 수가 있는가?
일단 이 신문에서는 조선의 규모, 땅의 크기, 인구의 많기, 백성들의 질을 많이
언급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지리적 문제를 상호 비교하여 진실을 찾을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지명과 관련된 사항이다.
독립신문 48호(1986. 7.25. 토요일)의 논설을 간략히 찾아보자.
‘죠션은 토디가 별노히 죠코 긔후가 맛당하야 대개 즁한 곡식과 실과들이 동양에서 뎨일 잘 되는데라... 그러하나 죠션 농민이 셰계에 뎨일 가난한거슨 다름이 아니라 농사하는 법을 모로는 까닭이요... 이왕에 셔양 농사하던 사람들은 한 오백년젼에는 죠션 농사하넌 사람과 갓치 일을 하더니 새 의사가 졈졈 생겨 지금은 사람 하나히 오백년젼에 백명이 하던 일을 혼자하고 쇼츌은 이백 갑절이 더한지라 이거슨 다른 거시 아니라 집보하랴는 뜻 하나 가지고 밤낫 생각하고 의사를 내야... 죠션셔는 학문이 졈졈 줄어 나라히 진보해가기는 새로에 졈졈 뒤로 졸아 가는 거슨 다름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을 교휵할 대에 가라치기를 녯젹뜻만 본밧기를 힘쓰게 하난고로 사람마다 생각하기를 백년이나 오백년 젼 일만 생각하엿지 새 의사난 당초에 낼 경영을 아니하난고로 졈졈 졸아 심지어 농사짓난 것까지라도... 쳥국 사긔를 보드래도 요슌우탕문무쥬공 때에난 법률이 셔고...’
여기서 말하는 조선은 동양에서 제일이라고 했다. 동양은 어디부터인가?
동양은 아시아인데 중동은 너무 멀다고 보더라도 아무리 좁게 보아도
천산산맥의 서쪽부터 계산해 넣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중국, 몽고, 인도, 말레이반도, 일본열도까지의 모든 지역이다.
이런 나라들에서 제일가는 토지를 가진 나라가 조선이었다.
그런 나라가 한반도라고 한다는 것은 참으로 무지한 생각이다.
그 조선은 분명코 중국대륙이다.
단지 독립신문에서는 농사짓는 방법이 형편없다거나 수준 이하라는 지적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요순우탕문무주공’이 ‘청국역사’로 편재해놓았다는 것은
이미 ‘조선역사’에서 분리되었다는 의미다. 이때가 1896년이다.
요순우탕...은 중국, 즉 조선의 중앙왕국의 임금이었지 청국의 임금은 아니었다.
만약 그렇게 조선이 한반도였다면 ‘조선왕조실록’ 선조30년 10월 8일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於戱 恤民頒詔 山東之父老爭聽 罪已下書河北之將卒流涕 嗟爾鎖尾之人 寧無感動之心 故玆敎示想宜知悉. 以賊在門廷 朝夕何흔(허물/틈) 王師救我 項背繼至.’
(아! 백성을 불쌍하게 여겨서 조칙을 반포하니 산동(山東) 지방의 나이 많은 동네어른들이 서로 들으려 나왔고, 자기를 탓하여 편지를 주니 하북(河北) 지방의 장교와 사병들이 눈물을 흘렸다. 아! 너희 지치고 쇠약한 백성들아 어찌 감동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이 마음을 잘 알아주리라 생각한다. 왜적이 오래도록 뜰 문 앞에 있으면서 아침저녁으로 틈을 엿보고 있으므로 왕사(王師: 임금직할 군대)가 우리를 구원하려고 연이어 왔다.)
이 글의 제목은 선조실록에 보면 ‘敎兩湖人民哀痛書’(교량호인민애통서)이다.
여기 나온 ‘兩湖’는 ‘湖之西, 湖之南’, 즉 호서와 호남이다.
임금이 교서를 내렸는데, 산동지방의 사람, 하북지방의 사람들이 감동을 할 수
있다면, 그 임금이 한반도에서 중국대륙 동부지역에다 냈단 말인가?
산동은 산동성 지방 내지는 태행산성 이동지역이고 하북은 하북성 지방 내지는
황하의 이북지역을 말한다. 그런데 왜적이 오래 뜰 문 앞에서 아침저녁으로
엿보고 있다고 했으니, 대마도해협을 사이에 두고 하는 말일 수는 없다.
대문 앞에 있는 왜적이 파도치는 바다건너에서 할 수 있는 행위는 아닌 것이다.
이 왕사(王師)가 천병(天兵)이며 임금의 직할 군사다.
조선은 지방군대와 중앙군대가 있었다. 선조 30년이면 임진왜란이 6년째인
정유재란 때요, 충무공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했던 해요, 10월이면 왜적선 333척과
싸워 31척을 불태워버린 명량대첩을 거둔지 1달이 지나는 시점이다.
선조임금이 글을 보내어 격려하니 산동지방과 하북지방의 사람들이 감동을
했다고 했으니 참으로 그 전장의 지리적 위치, 조선의 강역의 전장중심이 확연히
드러나 보인다.
이런 이유가 독립신문에서 말하는 조선의 토지가 동양에서 제일이라느니,
인구가 남아메리카 모든 나라를 통틀어 그보다 2배가 된다는 말도 이해가 갈 수
있는 것이다. 한반도 조선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11. 파헤친 마오쩌둥(모택동)의 진실 (리원재 글 정리)
마오쩌둥의 사망 이후 ‘대륙의 딸’을 포함하여 마오쩌둥과 그의 시대에 관한
책들이 더러 출판되었지만, 마오쩌둥이 얼마나 잔혹하고 오만하며
자기중심적인 폭군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마오쩌둥이 사망한 직후 그의 개인적 위상은 더 높아졌고 그 진위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융과 존 핼리데이는 그에 대한
세심한 조사를 통해서 진실을 파헤치고 있다.
‘마오’(상, 하권)의 줄거리는 2005년 영국에서 출판된 이후 30여 개국에서
출간되어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호평을 받았고,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차지했다.
이 내용들은 우리를 어리둥절해지게 만들 정도의 크나큰 놀라움이다.
1991년 ‘대륙의 딸’이 출간된 이래 장융과 존 핼리데이는 10년 이상
마오쩌둥(毛澤東)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배경으로 하여 그들은 마오쩌둥 생전의
지인들 및 측근들과의 인터뷰, 지금까지 노출되지 않았던 자료들을 섭렵하여
가장 진실에 가깝고 권위 있는 획기적인 마오쩌둥의 전기를 집필했다.
저자들은 마오쩌둥이 이상주의자나 이데올로그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철저한 권력 지상주의자 이었을 뿐 이었다.
중국 공산당 창당의 주역이 아니었던 그의 권력 장악은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스탈린과의 비밀 거래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일본의 중국 침략마저도 그의 목적 달성에 훌륭하게 이용했다.
중국 통치 이후에도 그는 자신의 항구적인 권력 유지를 위해서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
문화혁명(文化革命) 등의 프로파간다를 앞세운 일련의 거대한 군중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했다. 결국 그는 대기근과 그가 주도한 운동의 결과로
‘평화 시’에 중국 인민 7,000만 명을 희생시키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의 아버지라고 하는 그의 권력은 적나라한 폭력과
테러에 의존한 것이었다.
마오쩌둥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취한 행동을 몇 가지 들자면,
주더와 펑더화이 부대를 탈취하고, 장궈타오와 샹잉을
고의로 죽음의 행군에 이르게 한 것, 왕밍에게 독살을 시도하고,
수천만 명의 인민들이 굶어죽을 때까지 식량을 수출해서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한 것, 추수봉기와 루딩교의 결사적인 도강 사건을 조작한 것 등이다.
원서에 첨부된 풍부한 주석과 참고문헌에는 기술(記述) 근거가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www.kachibooks.co.kr). 480명의 인터뷰 리스트를 보아도
저자들이 많은 새로운 사실을 발굴해서 ‘마오’를 썼음을 알 수 있다.
책을 통해서 마오쩌둥의 구중궁궐에 있는 밀실을 엿보고 그 밀실에서 새어나오는
드라마들의 대화들을 엿들을 수 있을 것이다. 아내들과 정부들 그리고
자식들에 대한 마오쩌둥의 성격과 태도, 행동들 또한 적나라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외국인들, 특히 중‧미 관계를 정상화시키는 과정에서
키신저와 닉슨을 마오쩌둥이 어떻게 요리하는지도 구경할 수 있다.
내용과 접근법에서도 역사가들은 물론이고 일반 독자들에게도 전혀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마오쩌둥이라는 한 마키아벨리스트를 통하여 새로 쓴
‘중국 근대사’ ‘중국 혁명사’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압도적인 역사
거편이다. 20세기 중국 역사의 진실과 대면하고 싶다면 이 책부터 읽어야 할 것이다.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 정부는 인민들에게 가장 잔인하게 살해하는 방법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범적인 살해 방법의 실연’까지 벌였으며, 몇몇 경우에는 경찰이 직접
나서서 살해를 감독하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잔인한 살해를 조장하는 분위기 속에서 광시 성의 여러 지방에서는
인육을 먹는 만행까지 발생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지역이 우쉬안 현이었으며 이곳은 모택동 사망 후 실시된
공식적인 조사(그러나 1993년에 즉각 중단되었으며,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것도
제지당했다) 결과 76명이 희생되었다고 발표되었다. 인육을 먹는 관행은
일반적으로 마오주의자들이 벌이는 ‘규탄대회’의 단골 행사로 시작되었다.
규탄대회가 끝나자마자 산채로 그들을 부위별로 심장, 간, 성기 등을 잘라냈다.
이렇게 잘라낸 부위를 현장에서 먹을 수 있도록 조리했으며,
이런 행사를 당시에는 ‘인육 잔치’라고 불렀다.
한 시도당 의원이었던 사람이 끌려나와 산채로 배가 갈린다.
그의 장기를 꺼낸 홍위병들은 그걸 물에 씻어서 숯불 핀 팬 위에 굽는다.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걸 하나씩 집어 들고 먹기 시작한다.
이 과정을 자신의 배가 갈린 사람은 아직 숨이 멈추지 않은 상태로 보면서
죽어간다. 수백 명이 그 자리에서 자신의 장기가 그렇게 짐승들에 의해
먹잇감이 되는 것을 보면서 죽어야 했다.
86세의 한 농부는 대낮에 어떤 소년의 가슴을 칼로 찔렀다.
소년의 유일한 죄목은 과거 지주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농부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모택동의 어록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훗날 부정 폭로 작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소, 내가 그 아이를 죽였소. 내가 죽인 사람은 적이란 말이오. 하, 하, 하!
나는 혁명을 수행한 것이고 내 가슴 속은 붉단 말이오!
마오쩌둥 주석이 이렇게 말했소. '이것은 우리가 그들을 죽이느냐, 아니면
그들이 우리를 죽이느냐 하는 문제이다.
당신이 죽으면 내가 사는 것이 바로 계급투쟁이다!”
최악의 살육이 벌어졌던 성들 중의 하나는 내몽골 자치구였다.
모택동은 이곳 주민들이 중국으로부터 분리하여 외몽골과 소련에 붙으려고
음모를 꾸민다는 의심을 품었다. 이곳의 새 성장인 텅하이칭 장군은 모택동의
이런 의심의 내막을 대대적인 고문 수법을 동원하여 열성적으로 수사했다.
모택동의 사망 후에 폭로된 내용에 따르면, 한 회교도 여인의 이빨들을
집게로 억지로 뽑아낸 다음, 도끼로 난도질해서 죽이기 전에 코와 귀를 비틀어
떼어내는 따위의 사건들이 흔했다. 다른 여인에 대해서는 막대기로 성기를
쑤시는 방법으로 성폭행했다. 그녀는 이런 일을 당한 후 자살했다.
한 남자의 두개골에 대못을 때려 박기도 했다. 다른 남자는 혀를 잘라내고
두 눈을 후벼 파내기도 했다. 또 다른 남자는 성기를 곤봉으로 뭇매질을 한 다음
그의 콧구멍에 화약을 넣고 불을 붙였다.
모택동 사후의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모택동의 의심을 파헤치기 위한 수사로
인해서 34만 6천 명의 사람들이 규탄을 받았고, 그 결과 1만 6천 222명이
사망했다. 내몽골 자치구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고통을 받은 사람의 수는 훗날
공식적으로 1백만이 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들 중 75%가 몽골족이었다.
씻을 수 없는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또 다른 성은 남서쪽의 운남성이었다.
이곳에서는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신임 성장으로 부임한 탄푸런 장군이 날조한
사건만으로도 거의 14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박해를 받았다.
그들 중 1만 7천 명의 사람들이 처형되거나 매를 맞아 죽거나 자살로 내몰렸다.
홍위병들은 자기네들끼리 세력 다툼한다면서 군부대에서 탱크를 끌고 나와
시가지에서 포격전을 하며 집단의 논리에 빠져 자기 어머니, 아버지를
공개처형했으며 몽둥이로 자신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봉건주의의 잔재라면서
두들겨 패 죽였다.
바티칸에서 파견된 신부와 수녀들을 공개석상에 데려와 비난을 퍼부었으며
결정적으로 역사유적지를 돌아다니면서 파괴했다.
이 남방몽골로이드 손문, 장개석, 모택동 등 신중국파의 거주지는 바로
절강성, 복건성 일대의 대륙 동남부였으며 이들이 바로 임란 이후 계속 반란을
획책했던 대륙일본세력과 연계된 세력이고 왜구들이 먼저 일본열도를 석권하여
영국, 미국의 자본을 받아들여 순식간에 근대국가로 들어서자 대륙일본의
숙원이었던 대륙조선정벌을 위해 손문, 장개석, 심지어 중국공산당 일부도
일제의 지원을 받은 적이 있었을 정도로 신중국파와 열도 일본세력은 같은
목표를 가진 세력이다. 이들이 남중국어를 쓰는 남방몽골로이드로서 사실
북중국사람들과 인종적으로 구분이 될 정도로 다른 사람들이다.
언어도 달랐는데 이들이 나중에 북벌을 통해 대륙을 통일하고 그 후
국공내전으로 다시 대륙의 주인이 바뀌면서 남방 몽골로이드계 언어가 대륙의
중심언어가 되었으며 현재의 북경관어라는 것도 사실 남방어를 토대로 새롭게
만든 신 중국어인 것이다.
이 문화대혁명은 수많은 기성세대들을 봉건주의 추종자라고 죽인 것도 이 때문이다.
언어는 생명력이 강하다 신중국파 대륙일본후손들이 대륙을 석권하기 위해
아니 자신들의 집권세력이 영구히 대륙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언어자체를 바꿔야 하는데 신세대들은 학교에서 가르치면 되지만 기존 언어를
쓰는 집단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기에 인민재판의 이름으로 대량학살을
자행하였고 노인은 인민의 쌀만 축낸다고 홍위병들이 둔기로 패 죽였던 것이다.
이런 집단 광기가 모택동이라는 단 한사람의 명령에 의해 가능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칠 뿐이다. 대륙에 남아 있던 조선인의 씨를 말리는 학살은 최근까지
그렇게 자행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