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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기암환자의 단식투쟁
어느 날 한 농부에게 하느님이 현현 하셨다.
소원을 한 가지 말하라 하신다.
평소 워낙이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보답을 하시겠단 것이다.
단, 당해 농부의 가장 가까운 이웃에게는 그 소원의 갑절을 베풀어 주시겠단 조건이다.
농부는 하느님의 제안을 듣고 무척 고민했다.
죄송하지만 생각할 시간을 좀 달라고 부탁한 농부는 몇날 며칠 간을 고민했다.
그리고 드디어 하느님을 콜 했다.
소원을 말했다.
나의 왼쪽 눈을 뽑아 주십시오!
소싯적 읽었던 러시아 민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평생을 두고 나는 심심하면 한 번씩 이 이야기의 중심 메시지에 대해서 생각해 왔다.
사실은 오늘도 약간 심심했던가 보다.
그동안 한 며칠간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던 1주기 버섯 수확 다 끝났으니
잠시 꿀맛 같은 휴식기가 돌아왔고
아내는 지난 번 산 트래킹화가 발이 편치 못하다고 투덜대기도 하는 통이니
바람도 쐴 겸 해서 겸사겸사 부여에 있는 명품 아울렛에 구경 갔던 참에
뜬금없이 상기 러시아 민화가 생각난 것은 역시 못 말리는 나의 심술 때문이었을 게다.
네가 입으면 나도 입는다.
네가 신으면 나도 신는다.
네가 들면 나도 든다.
이게 바로 명품 선호 심리, 떼거지 근성 아닌가.
그것도 아니면 위의 러시아 민화의 한국형 현상은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좀 죄송하지만 충남 부여는 변방에 위치한다.
백제 천년의 미소가 은은히 배어 있는 고도이긴 하지만 소비중심의 도시는 아니다.
진짜 최고급이라고 쳐 줄만한 내가 아는 어떤 명품 브랜드도 없었고
아르메니아, 내가 선물하기로 작정했던 넥타이 가게는 찾을 길이 없었다.
덕분에 아내와 나는 아주 오래간만에 팔짱을 끼고 늙수그레한 연인들의 흉내를 좀 냈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이 가게에 들쭉 저 가게에 날쭉
결국 아내는 국내 브랜드 중 반값 세일 하는 마음에 아주 쏙 드는 트레킹화 한 켤레
나는 진짜 총각 때 즐겨 입던 역시 반값 세일 리바이스 청바지 한 착 지름신을 질렀다.
그나저나 아르메니아는 없으니 꿩 대신 닭이라도 취할 수밖에 도리 없으니
자그마치 예상금액의 절반이 남게 되었다.
정작 선물을 수취할 사람에겐 약간 미안하게 되었지만
그 남는 금액으로 저어기 하늘채, 정통 이탈리안 뷔페식당이나 구경 한 번 해볼까?
그저께 토요일, 어제 일요일,
사실은 이틀간 단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았고
단 한 술의 곡기도 입에 대지 않은 채 오로지 일만 했다.
토요일엔 철수네 입상작업 때문에 하루 종일 뭘 먹고 자시고 할 틈이 없었다.
작업 중에 하필이면 기계가 고장 나서 동분서주 하다 보니 그리 되었다.
다음날 일요일은 어제 철수네 작업 때문에 우선순위가 밀려서 난리가 나버린 우리 농장 일 처리하느라
뭘 좀 마시고 자실 심리적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새벽 3시부터 일어나 작업개시 했다.
사실은 이 보다 좀 더 리얼한 이유가 따로 있긴 있었지만
아무튼 만 이틀간을 꼬박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하고 일만 했더니 어지간했다.
오후 느지막하게 급한 일을 모두 일단락 짓고 나서 승용차 세차를 시도 했는데
이 때 사실은 좀 심한 현기증과 함께 몸을 가누기가 약간 힘들긴 했다.
하지만 난 항상 내 체력의 臨界線上을 확인하고 싶다.
물론 아내는 졸졸 따라 다니면서 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따지고 들었지만
굳이 이유를 말하라면 내가 쓰러지는 시점을 좀 정확하게 알고 싶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난 일언반구 대꾸하지 않았다.
아내는 내가 침묵할수록 더욱 답답한 모양이다.
따라다니면서 애걸복걸 하는가 하면 나중엔 은근히 협박성 있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아들이나 며느리에게 전화해서 당장 내려오라고 하겠다는 거다.
얼마 후면 수술해야 할 암 환자가 말도 안 되는 단식투쟁을 하고 있다는 거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 나오긴 했다.
그도 그럴 테지. 당연히 그리 생각할 수도 있긴 있겠다.
그러고 보니 어떤 친절한 분이 나에게 일러주시길
내가 알고 있는 암에 대한 기초적 상식이 부족하던가, 혹은 오류에 빠져든 것이라 한다.
그 판단의 준거는 내가 그동안 블로그에 올린 두 편의 글에서 단박 알아냈다는 거다.
게다가 세월호 참사 관련 나의 생각조차 아주 잘 못 된 것으로서 수정해야 한다는 거다.
대체 얼마나 전지전능하시면 타인의 생각조차 수정해야 함을 명령하실 수 있는 것일까.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을 설득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갸륵한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차마 부끄럽고 좀 어리석은 일은 아닐까. 그건 대화가 아니라 명령이고 훈계다.
물론 인생을 아는 체 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긴 있다.
이럴 때 느닷없이 철수가 나타나서 나 더러 하는 말이
왜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수긍하지 않느냐는 거다.
다시 말 해서 왜 의사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듣지 않느냐는 거다.
내가 언제 그랬냐 하고 반문한다.
나는 다만 치료를 받아도 완치 되겠지만 치료를 받지 않아도 완치 된다고 말 했을 뿐이다.
치료를 받느냐 마느냐 하는 여부에 관계없이 완치 된다면 굳이 왜 치료를 받겠다고 결정한 것이냐 하면 나는 별로 원치 않지만 나를 무척 좋아하던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원하니까
내 의견 정도는 그냥 묵살해버리고 그들이 원하는 쪽으로 내가 가면 만사형통 아닌가.
이른바 과잉진료, 예의 러시아 민화 이야기 말고, 예의 친절하신 그 분 말씀에 따르면
현대의 의사들이 암이라고 진단하는 모든 암은 진짜 암이 아니라는 거다. 암도 아닌 것을 암이라고 판정해서 과잉진료 비슷한 것을 하고 있다는 말씀이신데, 덧붙여서 잊을 수 없는 말씀은 진짜 암에 걸리면 무조건 사망하신다. 사망하지 않으면 암이 아니다. 이런 논리. 그래서 이 논리를 거꾸로 한 번 걸어 보면 사망하면 암, 사망하지 않고 완치되면 암 아님, 뭐 이렇게 되는 건데, 이 중에 또 항간에 이슈가 되고 있는 연예인 모씨의 의료사고라는 실로 괴상한 변수가 발생하기도 하고... 쯧쯧...
나는 여기서 다시 정승 황희를 생각해 낸다.
이게 노랑 저고린가, 주황저고린가 하는 문제는 하녀들의 문제일 뿐이다.
파스칼의 팡세에 의하면 의사는 의사의 일을 생각하고, 왕은 왕의 문제를 생각하고,
구두수선공은 구두수선에 대해서 생각하는 인간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존재라고 했지.
문제는 학식이 얼마나 고고한가에 딸려 있는 것이 아니고
단 한 가지 알고 있는 지식이나 교양이라도 그것이 실생활에 얼마나 실현되고 있느냐는 문제다.
그야말로 프랜시스 베이컨처럼
“알고 있는 것만으론 힘이 될 수 없다.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였을 때 비로소 힘이 된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이른바 임마누엘 칸트를 열 천 번 학문적으로 정리해서 달달 외우고 다닌다 해도
그것이 아는 체 하는 데에는 매우 유용할는지 모르겠지만 별로 재미는 없을 것이다.
내가 수년전 이미 이야기했던 적 있지만 강단철학은 개똥철학을 강단으로 끌고 올라가서 완전히 관념화하고, 형이상학적으로 몽롱하게 만드는 작업을 수행하지만, 이에 반해 개똥철학은 강단철학을 데리고 내려와서 삶의 현장에서 몸소 근무하시기를 간곡히 권유하신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임마누엘 칸트를 개똥철학적으로 이해하느냐, 강단 철학적으로 이해하느냐는 문제는 지극히 개인적 취향의 문제일 수 있겠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언제나 한 마디로 귀결된다. 인간의 선량함 말고는 어떠한 인간의 우월성도 나는 인정할 수가 없다. 그러니 내 앞에선 얼마나 많이 지녔는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는 도토리 키 재기 같은 짓 좀 하지 말고, 얼마나 실천했는가. 자신의 영혼 혹은 정신을 얼마나 현실화 했느냐 하는 문제를 이야기 좀 해 주시면 안 될까 예?
철수는 역시 스트레이트로 치고 들어오신다.
웬만하면 단식투쟁 이쯤에서 끝내고 좀 먹고 일하라! 그러다 쓰러지면 여태까지 이루어 놓은 이 좋은 환경 제대로 한 번 향유해보지 못하고 골로 가시는 수도 있지 않겠느냐.
뭐 이렇게. 한 편으론 그럴 듯, 그렇게 생각할 법 하기도 하긴 하겠다. 으흐흐...
세차를 모두 마치고 나니 이미 날이 아주 어두워졌다.
만추와 초겨울의 경계선쯤에 걸려 있는 요즈음 기간을 간절기라고도 부르는 모양인데
해가 너무 짧아 여름철에 비해 작업 시간이 근 두 시간은 줄었다고 봐야 한다.
아무튼 약간 허청거리는 걸음걸이를 조심조심 하면서 돌계단을 밟고 오르는데
어째 몸이 으스스하고 좀 추운 게 아무래도 사람들은 이런 증상을 두고 허기가 진다고 하는 걸까.
멀쩡한 자신의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조차 때로는 이렇게 힘이 좀 드는 수도 있는가 보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최우선적으로 더운 물을 주문하고 샤워를 한다. 약간 희미해진 의식을 뚜렷이 회복하는 데에는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 ながさき엔 오늘도 あめ 이었다, 혹은 한 오백년 같은 구성진 한 곡조 뽑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항암방사선 치료 이후 최소 3개월 뜨거운 물 입욕금지 명령 수행 중인 이 몸 그냥 뜨거운 물 샤워만으로도 감지덕지 할 뿐 더 이상의 불만 전혀 없다. 기다려라! 석 달 후엔 그냥 온천탕에 통째로 풍덩 뛰어 들어 한 사나흘 원도 한도 없이 드러누워 주마. 으흐흐...
근데 이게 또 웬 사건?
난데없이 아내가 조신한 몸짓으로 다가와서 무조건 자기가 잘못했다고 비는 거다.
그러면서 준비해둔 흰죽 한 사발과 간장 종지, 구운 김 몇 조각을 차려놓으며 제발 좀 먹어달라는 거다. 이것만 먹어주면 뭐든지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단다. 그렇지 않아도 사실은 오늘 저녁은 흰죽이라도 한 그릇 주문할까 생각하기도 했었는데... 이게 오래 살다보니 마일리지로 축적되는 이심전심이란 건가 보다. 사실 지난 이틀 간 무지막지 쉬지 않고 일을 해치우다 보니 해야 할 시급한 일이 더 이상 없어져버렸고, 따라서 더 이상 단식할 이유도 없어져버린 상황이다. 일하지 않고 그냥 드러누워서 단식 한다면 몇 날 며칠을 계속해도 그 효과가 다 나타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마지막 어두워 질 때까지 세차까지 마무리 했던 거다.
오늘 밤 푹 쉬고, 내일은 드라이브라도 나가려고... 그러나 물론 이 말은 아내에겐 하지 않는다. 내가 단식하면서 중노동을 속개했던 여러 가지 이유 중 한 가지는 피하지방을 충분히 태워버림으로서 수술 할 때 의사들이 좀 용이하게 작업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의도도 있었다면, 즉 뱃가죽이 좀 얇아지기 위해서 그리했다면 이게 또 해학처럼 농담처럼 들릴 수도 있겠으므로 이 말 역시 묵비권 속으로 묻어 둔다. 하지만 나는 위의 친절하신 그 분처럼 뭔가를 좀 알기 위해서 노력하기 보다는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먼저 찾는다.
이를테면 내가 내 아내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 혹은 내 몸을 관리해주겠다는 의사들의 정지작업을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 하는 것이다. 사실 내 몸에 생긴 것이 병인지 암인지 나는 잘 모른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이나저나 난 현재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고, 적어도 사망하시는 그날까진 여전히 멀쩡하게 살아 있을 것이므로 팡세처럼 죽은 자는 죽은 자의 일을 생각하고 산자는 산자의 일을 생각할 뿐이다.
누구는 주어지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고뇌하겠지만, 나는 내 인생에 어떤 문제가 주어지던지 오로지 주어진 그 문제에 대해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가 더 큰 문제로 대두되기 때문이다. 그것뿐이다.
아까 둘이서 팔짱을 끼고 아울렛 거리를 천천히 둘러보고 다니면서 물론 아동복 파는 매장에도 들어갔었다. 다음 주에 작은 손자 녀석의 돌잔치를 해야 하는데 옷이라도 한 벌 사 줄까 해서였다. 그런데 막상 매장 안에 들어서고 보니 옷을 고를 엄두가 나질 않는다. 이것도 사 주고 싶고, 저것도 사 주고 싶은데. 문제는 사는 게 아니라 제 부모들 마음에 들겠느냐는 거다. 사실은 그 전에 젊은 사람들 옷 가게에도 들러서 아들 며느리 옷도 한 벌씩 골라 입혀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 역시 어쩌면 이게 좀 억지스러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냥 발걸음을 물리고 말았다.
누가 먼저라고 말 할 것도 없이 우리는 이제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서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옷을 골라서 사 입히겠다는 것은 넘치는 생각이다. 차라리 그걸 현금으로 주면서 너희들이 너희들 자식 옷 골라서 사 입히고, 너희들 옷 또한 너희들이 골라서 사 입어라고 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서 훨씬 더 편리할 것 같단 생각이 든 거다.
어찌 보면 이건 사실 자신감의 퇴패이며 초라한 자기방어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깊은 사랑의 감정은 언제나 더 깊은 곳을 찾아 자리 잡길 좋아한다.
내 뜻대로 상대방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 뜻대로 내가 움직여 주는 것이 사랑이다.
우리가 굳이 자식들 가슴속을 파고들어 자리 잡고 앉으려고 하기 보담
적당한 거리에서 그냥 녀석들 사는 모습이나 지켜보다가 때 되면 시나브로 소리 소문 나지 않게 떠나면 그만 아니겠는가.
돌아오는 길은 깊은 어둠 속이었다.
웬일인지 오늘은 음악 같은 것 듣고 싶지 않았다.
모처럼 단식투쟁? 도 끝나고, 휴지기가 찾아 왔고, 나름 재미난 나들이였지만
어딘지 모를 쓸쓸함이 누가 먼저라고 말 할 것도 없이
아내와 나의 가슴 밑절미를 감돌고 있는 거다.
하지만 오늘 보다 더 좋은 날이 우리들 인생에 다시 또 찾아 와 줄 수 있을까.
물론 내일의 태양은 내일 또 다시 두둥실 떠오를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그것을 알고 있다.
이 얼마나 찬란하고 아름다운가.
인생은 아뽈리네르의 미라보 다리 위엔 한 번도 가 본 적 없지만 여전히 센 강은 거기 흐르고 있을 것이다.
우리네 사랑도 흐르고 인생도 흐르고 있을 것이다.
흐르면 흐르는 대로 흘러야 한다. 애써 머물려고 하지 말 일이다.
각주구검이 대체 무슨 소용이겠는가. 흐르는 세월 속에서 어느 한 순간만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주어지는 모든 순간을 오로지 감사한 마음으로 받들어 산다면 그로 모든 게 다 족하다.
그게 암이면 어떠하고 병이면 또 어떠하겠는가.
진실로 자유로운 삶은 죽음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다.
죽으면 죽으리라, 그러나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은 가장 아름다운 길을 찾아 내 길을 가리라.
다음 주 월요일엔 한양 있는 병원 가기로 예약 날짜를 잡았다.
주치의를 만나서 그동안 받은 항암방사선 치료 효과를 측정하는 임무를 수행할 요량이다.
이게 또 암도 아닌 것을 암이라고 부풀려서 과잉진료를 하고 있는 거라고 말하진 마시라.
그게 과잉인지 최적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량화 되지 않고 수치화 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못 나가는 게 현대과학이고 의학이다.
물론 나는 수치의 뇌옥 속에 나를 가두어 놓을 만큼 비좁은 인생이 아니다.
하지만 가장 자유로운 영혼이 가장 넓은 하늘을 비상하는 거란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그동안 대체로 자유로운 삶을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리 살 것이다.
그게 노랑인가 주황인가는 내 앞에서 그닥 중요치 않다.
노랑도 노랑이고, 주황도 주황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말씀이다.
암이면 어떠하고 병이면 또 어떠하며 그게 단식투쟁이었으면 또 어떠하겠는가.
계곡의 좁은 물이 흘러서 大河를 이루고 바다로 흐른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바다는 하늘을 만나서 영원을 함께 한다.
암도 흐르고 병도 흐르고 단식투쟁도 흐르고 있는 거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신나고 재미나는 일인가. 나는 그저 이 세상이 고맙기만 하다. 아니면 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