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 사 봉 등 산 기
강 홍 근
2001 .01 .23
(전 동부농협 봉수면소장)
정든 고향 품을 떠난 후 17년이란 세월이 흘렀어도 국사 봉 정상에 한 번 올라 가보지 못해 이번 신사년 설날 명절에는 그 뜻을 꼭 이루려 다짐하며 경남 의령군 봉수면 서암리로 달려갔다.
옛날,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을 때 수국보가 (守國
保家) 구국정신으로 의병 창의하신 희보(希輔)선조님께서는 사헌부 집의로 관직에 계셨던 막내인 희철(希喆)선조님께로 가문을 이어가기로 형제간에 혈
약하시고 진주 성 싸움에서 북문대장으로 선두에서 용감하게 지휘하시다 왜군이 집중적으로 북문을 공격해 와 장렬히 전사하셨고 이때 이 북문으로 진주 성이 함락되었다.
희철(希喆) 선조님께서는 왜군이 침입 치 않을 오지인 골짜기로 이주하시면
서 학문지향(學問志向) 인재양성(人才養成) 숭조번손(崇祖繁孫) 명가창달(名家暢達) 이념을 실현키 위해 풍수지리가 빼어난 국사 봉 밑을 자리 잡았으리라는 가족사를 생각하다 동네 삼거리에 도착했다.
눈 속에 묻힌 뒷산의 정상을 바라보면 차가운 눈 비 바람 속에서도 우뚝 솟
은 바위봉우리는 끝까지 나라를 지키려 했던 포은 정몽주 선생님 울분의 노래
가 금방이라도 더 높게 울려 퍼질 듯한 장엄한 침묵의 산, 죽음으로도 걲이지
않는 사육신들의 의기충절인 듯 늠름하게 오늘도 자리하고 있었다
삼족멸문 부관참시 보다. 그릇된 일에 침묵하고 있음은 인격에 대한 모욕으
로 알았던 우리의 선비들, 이를 몸소 실천하고 가르쳤던 점필제 김 종직 선생
님의 험난했던 사도(師道) 였던가. 그 제자들 가슴 속에 새겨둔 천존상(天尊
像)인 듯한 국사 봉이 내일을 밝히고자 굳굳히 더 높게 서 있었다.
바위를 머리 삼아 양팔을 벌린 듯 양쪽으로 뻗은 산등 선은 언제나 그러 하
시듯 칭찬의 한 마디 말씀마저도 인색하시고 준엄하셨던 아버님의 품인 듯 하 여 만삭 골 골짜기를 올라가고 있었다.
출발할 때. 요즘 소 먹이로 안 다니고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치 않아 산길이
없을 듯하여 완전무장으로 혼자 출발하니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안았다
고향 사람들이 잘 관리한 국사 봉 등산로 따라 발목까지 잠기는 눈을 밟으며
올라 가면서 바라본 정상의 국사 봉은 울룩불룩 하늘을 향하여 장대하게 솟은 바위들, 그 기백의 광경이 가슴속을 고동쳐 와 힘이 용솟음치게 만들었던 초
등 학교 4학년 가을소풍 때, 국사 봉 가까이 가면 갈수록 매혹에 빠져들게 만들었음을 회상 하게 하였다
처음 맞이하는 마당 덤이란 웅장한 큰 바위가 하얀 옷을 갈아입고 방랑자를 위로 한다. 가까이 가 밑에서부터 위쪽을 눈 걸음으로 서른 보 정도로 정상 가까운 곳을 다 닿았을 때 바위 틈 새 사각으로 잘 다듬어 진 다듬이 돌이 떨
어질 듯 걸려있는 걸 보니 이 산은 범상스러운 산이 아니라는 것이 짐작되니
숙연 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눈 밭에서 걸음을 재촉하여 사투 끝에 찾아간 정상은 까마귀만 물을 먹는다
는 까막 샘 바위가 있고, 그 바위 위에 우뚝 선 천상봉이 눈 속에서 눈 이불
을 덮어 쓴 채, 내다보며 반가움에 눈인사를 하였다.
이십 대 젊은 시절 공직에 있을 때, 자연보호 캠페인에 참가하여 지옥과 극
락을 오가며 그 바위 위에 올랐으니 하늘 천장에까지 다 닿은 듯한 느낌을 받
어면서 하늘을 쳐다보고 세 번 돌 때마다 침 한 번 뱉으면 수명이 3년 연장
되고 침10번을 뱉으면 모든 액운은 없어지고 소원 성취할 수 있다는 전설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걱정과 시샘을 받아가며 몇 번 쉬었는지 알 수 없지만 침 10 번을 뱉었던 젊은 날의 추억들이 그림으로 떠올랐다.
뚱뚱한 사람이 지나가면서 좁다고 불평하면 더 좁아진다는 손 굴을 지나며 떡갈잎 따다 컵을 만들어 바위 밑 약수 물 한 모금 받아 목을 적시고, 합천군 초계 읍을 한 눈으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초계 봉창 굴, 초등학교 시절 가을소
풍 때 친구들이 앉아있는 흔들바위를 흔들어 혼비백산 도망가던 그 친구들.
바위와 바위 사이 조금은 넓은 평지, 소풍 때마다 손수건 돌리기, 장기자랑,보
물 찿기 발표와 마지막 인원 파악 장소였든 곳 옆에, 한 뿌리로 몇 대를 이어
온지도 알 수가 없는 돌배나무 한 그루가 서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 유명한 절
의 암자 터였으리라는 느낌을 받게 되니 돌배 한 두 개로 연명하며 수도정진
(修道 精進)하는 집념에 찬, 초치한 스님모습이 활동 사진처럼 머리 속에 떠
올랐다.
8,900여 년을 넘나들며 정좌득도 (正座得道)로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
있는 자세에 심취된 듯 자신의 모습도 그 자세로 하고 있음을 겨우 알 수가 있었다.
이 고을 대왕 도깨비 생일 잔치 날 밤, 모든 도깨비들이 찾아와 즐겁게 춤
을 추다 술 취한 도깨비가 잘 못 밟은 큰 바위가 넘어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갖고 놀던 금은 보화와 부작 방망이들을 급히 숨겨놓은 12번째 동굴을 아직 못 찾았단 말인가?
국사 봉 오른쪽 비탈진 깊은 계곡. 국사 봉에서 떨어진 도깨비 바위가 미끌
어 질 듯 누워 있는 주위를 동네 연세가 많은 형님께서 비 오는 날 짚으로 역
은 우장과 삿갓을 쓰고 소 치려 지나가다 딸 나무 세 그루에서 탐스럽게 익은 딸을 발견 삿갓을 뒤집혀 놓고 정신없이 따개 되니 소복이 한 삿갓을 딸 수는 있었지만 어두운 밤길에 집으로 운반하며 많은 고생했다는 도깨비에 홀린 것 같은 구수한 애기도 생각났다.
이 모두들 눈 속에 묻혀 도저히 찾아 볼 수 없어 그리운 마음은 서운한 마
음으로 변해 발길을 돌리려니 이제 새 봄으로 차가운 눈을 녹여 새싹이 나고
예쁜 열 아홉 살 젊은 청춘의 사랑이 한층 더 무르익어 삼사십 대 울긋불긋 성숙한 여인으로 변해 반길 때 소주 한 병 들고 와 그리움의 회포를 풀겠다고
다짐하고서야 발길을 돌릴 수가 있었다.
60년대 초 결혼과 함께 잘 살아 보겠다며 타향을 방황하던 당 숙부님께서 염소 5마리로 국사 봉 정상에서 불 무재 쪽 9부 능선에다 축사를 짓고 낮에
는 기름진 땅을 개간하여 옥수수, 감자, 고랭지 채소를 생산하고 해질녘 이면 당숙모 님께서 축사 쪽에서 부르는 호루라기 소리를 따라 염소들을 몰아 길들
여 500마리 이상을 방목 사육하여 국사 봉에서 부농의 꿈 이룰 수가 있었다.
진한 땀이 뭍은 감자, 옥수수의 구수한 냄새에 취해 칠월 칠석 칠월백중이 면 어머님을 보채어 쌀 반 되로 국사 봉까지 올라 가 바꿔먹던 친구들과 추억
들이 가을 밤 하늘 별처럼 반짝반짝 생각이 났다.
옛날 농지가 부족한 시절. 이 비탈진 골자기도 인간의 힘으로 층층계단 논
을 만들어 큰 덤 부근 골짜기의 겨울 물까지 논으로 가두어 땅속에 스며 흘러
내리면서 대장 골 깊은 계곡은 항상 1급수 물이 출출 흘러내려 사라 고등과 보리피리가 살았으며 무더운 여름철 물 봉숭아가 핀 계곡은 비단 개구리들의 지상 낙원에 심술궂은 우리들은 비단개구리를 잡아 다리를 잘라 조리 채에 묶
어 가재 집 먹이로 넣어 유인 해내며 잡아 한 여름 뜨거운 햇살 피신처 인 움
막 옆에서 구워다 간혹 소나기도 피해가며 나누어 먹던 어릴 때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가고 무너진 논두렁과 메마른 골짜기는 물 때 자국만 남아 있었다.
어릴 적 소 먹이러 다닐 때. 산딸기, 머루, 다래, 어름 등 먹거리를 선사하던 그 골짜기가 반가운 듯 손짓하여 길도 아닌 양지바른 쪽으로만 발길을 옮겨
가며 국사 봉 닮은 돌 하나 있으면 주어다 베란다에 갖다 놓고 싶었지만 많이 쌓인 겨울 낙엽 밟으니 넘어지며 자빠지며 미끄러지며 한지의 지혜가 서러저
있는 대장골짜기를 통해 빈손으로도 겨우 내려와 뒤돌아보니 이 늠름한 산세 밑 깊은 골짜기에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대동사 - 지금은 흔적조차도 찾아
볼 수 없는 - 절이 있었다 한다.
이 대동사 주지이신 설 씨라는 분이 동네를 오러 내리면서 딱 나무를 지팡
이로 삼아 가지고 다니다가 절 앞 반석 위에서 지팡이로 물놀이를 하다 놓아
두고 돌아갔다. 다음날 돌아와 보니 딱 나무 껍질에서 얇은 막처럼 되어있는 것을 발견 이튿날 다시 와 주위의 딱 나무 껍질을 벗겨 돌로 짓이겨 반석 위
에 늘어놓고 다음 날 와봤더니 엉겨 붙어 있는 것을 발견 연구해서 한지 뜨는 방법을 창안하였다는 유래가 머리 속에 떠올랐다. 우리 선인들이 꾸준히 개량 발전시켜 농한기에는 한지와 장판지를 생산하여
좁은 땅에서도 넉넉히 살아왔고 의령 한지는 오랜 세월 동안 전국에 유명
했으며 왕실에 진상하고 이를 통해 중국 황실까지 그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소실된 대동사는 그 화려했던 시절의 역사들을 몰래 감춘 듯 표백 처리된 물 굽지 인양 하얀 눈이 대장 골 골짜기를 말 없이 덮고 있었다.
정신 없이 돌아다녀 피곤한 몸으로 발길을 돌리려니 어디선가 종이 뜨는 물
발질 소리, 젊은 남녀가 딱 매질과 물 팔개로 장단 맞춰 부르는 귀에 익은 노
래 소리가 들리는 듯 하여 눈 귀를 기울려 그 친구들을 두리 번 두리 번 찾아
보았지만 찾을 길 없어 인생무상을 새삼 깨우치며 고향 본가로 돌아오는데 그 소리는 온 대동사 골짜기로 울려 퍼졌다.
(본글은 제30회 의병제전을 즈음하여 2002년3웥25일 새의령신문에 특별기고되었으며 또 의령문화원이 발행한 의령문화2002년11호에도게재되었음.)
의령 아줌마
강 홍 근
(의령 향토 가사 모집 우수상 수상)
오다가다 만난 것 도 아닌 내 고향 한 마을에
앞집 뒷집 속닥속닥 사랑을 맺은 사람
고향을 떠나야 잘 사느냐
객지로 가야만 성공하느냐
오늘도 낭군님 따라 딱 매질 하면서도
고향 싫다 떠나는 친구 돌아오는 형제들도
막걸리로 반겨주는 한지 뜨는 의령 아줌마
부모끼리 맺은 것도 아닌 내 고향 사랑방에
친구하고 알송 달송 행복을 만든 사람
고향에 오려면 어서 오너라
형제들 그리면 고향 오너라
오늘도 땀방울 흠-뻑 물팔개 치면서도
타향가신 늙으신 부모 만수무강 빌고 빌고
웃으면서 맞아주는 한지 뜨는 의령 아줌마
(노래 말에 대한 설명)
※ 끼니 조차 어려웠던 시절 다른 곳으로 시집 보내 고생시키느니 한지 뜨는 기술 있는 부지런한 사람에게 시집 보내면 끼니 걱정은 없으니 이 고을 사람끼리 혼인이 많았고 한 동네로 시집 온 본동 댁도 많았다. 외부에서 의령한지라고 부르니 부지런한 의령 사람 인정 많은 의령사람들이 고향사랑하며 굳세게 살아가는 아줌마로 재미있게 표현. 의령사람들의 자부심을 갖도록 함.
[출처] 국사봉 등산기 (봉암정) |작성자 bml58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