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클린 박물관 소장 이집트 보물전
2016. 12. 20~ 2017. 4. 9
1822년 9월 14일, 프랑스의 천재 언어학자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은 그날도 로제타석에 적힌 히에로글리프(고대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 하고 있었다. 갑자기 노크소리가 났다.
‘이 장대비에 누가 왔을까?!’
한창 연구에 매진하던 터라 친구의 방문이 반갑지 않았고 오히려 짜증이 났다.
그의 불쾌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 좋은 벗은 싱글벙글 웃으며 그에게 그림 한 장을 건넸다. 누비아의 아부심벨이 그려진 세밀화였다.
“여기, 신전 위에 카르투슈(파라오의 이름이 적힌 타원형의 윤곽) 보이지?! 뭐라고 적혀 있나?”
“해는 콥트어로 레이, 이집트 태양신이 라(Ra), 그 다음 두 상형문자는 프톨레마이오스(BC 332년~ 30년)카르투슈에도 나오니까 추론하면.......람스???........라메세스??.......람세스?!”
고대 이집트 제19왕조의 제 3대 왕(재위 BC1279년~BC1213년)의 위대한 이름이 19세기 샹폴리옹의 입을 통해 되살아나는 순간 이었다!
-EBS 이집트 발굴 비사 2부 중에서-
1922년 11월 26일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는 몇 개의 돌을 제거한 후 뚫린 구멍으로 양초를 들이밀었다. 수천 년 전의 더운 공기가 느껴지는 순간 그의 코는 파르르 떨렸다. 그의 손 역시 떨리기는 매한가지였다. 왕가의 계곡, 무려 20년간,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이 오늘부로 종식될 예정이다! 완벽하게 보존된 현실(玄室)! 다수의 조상(彫像)과 금빛 찬란한 골동품들! 마치 바로 어제 그 자리에 둔 것처럼 모든 것이 그대로 있었다!
“카터, 어떤가? 무엇이 보이는가?!”
오랜 세월 듬직한 후원자 캐너번 경이 조급한 듯 재촉했다.
놀라움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카터는 간단히 말했다.
“네 엄청나요. 멋있습니다!!!!!”
-제 18왕조 12대 왕 투탕카멘의 왕릉, 고고학자의 회고록 중에서-
그날은 겨울비바람으로 스산했고 나의 고고학적 상상력 또한 을씨년스러웠다. 박물관에 가기만 하면 온갖 기괴한 현상들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나는 고대의 마법이 현대의 과학을 집어삼키길 바랐다. 어쩌면 미라가 깊은 잠에서 돌연 깨어나 유리관을 부수고 나올 지도 모른다.
관 위로 이 예식이 수행되는 고귀한 망자에게는 하늘로부터 4개의 문이 열릴지니
하나는 북풍의 문 오시리스, 또 하나는 남풍의 문 레, 다른 하나는 서풍의 문 이시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동풍의 문 네프티스이니라. 문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 하나하나가 그의 콧속으로 들어갈지니 바깥의 다른 자는 아무도 모르리라
-사자의 서(The Book of the Dead) 제 156장-
그렇다. “이집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언제나 그리고 식상하게도 “미라”다. 헤아리기 어려운 엄청난 부와 권력도 찬란한 고도의 문명도 그 다음이다. 내가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건 어찌 보면 전적으로 고대 이집트인들 탓이다. 그들에게 내세만큼 중요한 건 없었다.
축복 받으시라 아버지 신 오시리스여! 나는 영원히 내 육체를 소유하게 되었나이다. 나는 썩지 않을 것이며 붕괴하지 않을 것이며 벌레의 밥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존재하며 살아 있으며 강합니다. 나는 깨어 있으며 그리고 평화스럽습니다.
-사자의 서(The Book of the Dead)중에서-
그들은 죽음 이후에도 불멸하는 인성에 해당되는 “바”와 생명력을 의미하는 “카”를 중요시 여겼고, 이러한 비물질적인 요소가 머물 장소인 육체의 보존에 대해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미라”는 그들의 독특한 내세관을 충족시키기에 최적이었다.
수천 년 전 아마포에 쌓인 그대로, 중키의 미라는 여전히 안식 중이었다. 그는 생전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것은 전적으로 상상력의 영역일 수밖에 없었다. 난 물끄러미 내려다 볼 뿐이었다.
옆에는 옛 이집트의 영광이 담긴 화려하기 그지없는 관이 놓여 있었다. 관도 관의 주인도 자고 일어날수록 그 가치는 곱절이 될 것이다.
나는 특히 죽은 이의 영혼이 깃들었다는 새, “바”에 주목했다. 대담하고 동적인 절제미, 생동감 있는 원색의 나열.......하지만 “바”가 아름다운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순 없었다.
“이집트 고미술의 위대함이 뭔지 아십니까? 내세에 대한 강한 믿음이죠. 그들은 정말로 사후세계를 믿었어요. 그건 결코 못 베끼죠. 그래서 모조품들은 천박한 거구요.”
이것이 고고학자이기 이전에 화가였던 하워드 카터가 내린 고대 이집트 미술에 대한 정확한 평가이다.
흔히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고들 하지만, 고대 이집트인들만큼 말이 많기도 어려울 것이다. 가령 저승의 서를 보면 그들이 어떠한 심판을 받았고 어떻게 “무사히” 내세로 들어갔는지 알 수 있다. 지하의 신 오시리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자칼 머리의 아누비스가 최후의 심판을 집행한다. 그는 심판 저울 한쪽엔 망인의 심장을 다른 쪽엔 깃털을 올려놓는다. 만일 저울이 심장 쪽으로 기울어진다면 망자는 생전에 죄를 많이 지은 것이므로 아미트 여신에게 잡아먹히게 된다. 다행히 고인(故人)은 쇠똥구리 모양의 부적 스카라브를 지녔기 때문에 그의 심장이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았고, 깃털처럼 가벼운 심장을 가진 결과 온전히 내세에 이르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일체의 노동에서 영원히 해방되는데, 365개(1년은 365일)의 샤부티 인형들이 차례차례 돌아가며 모든 노역을 도맡아 해 주기 때문이다.
그대의 행복이 내세보다 훨씬 귀중하나니.......
-신왕국시대(BC1539년~BC1075년, 제18왕조~ 제20왕조)에 전해지는 명문(銘文) 글귀-
그렇다고 그들이 현세를 무시한건 아니다. 단지 내세가 압도적으로 중요했을 뿐이다.
그들은 수많은 장신구로 치장했고, 집안을 금 세공품으로 아름답게 장식했으며, 세네트 놀이(우리나라의 윷놀이와 유사한 오락)로 무료함을 달랬다. 특히 세네트는 무려 3000여 년 동안 인기 있었는데, 그 이유인 즉 게임의 승자는 저승에서 다시금 환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들은 삶을 즐길 줄 알았고, 살아있을 당시 누렸던 행복이 사후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길 바랐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동물은 식량과 가축 이상의 존재였다. 그들은 동물과 인간을 엄격하게 구분 짓지 않았고 오히려 서로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여겼다. 그들에게 동물은 신의 대리자이자 신에게 나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전달자였다. 이집트 왕권의 상징인 호루스가(오시리스와 이시스 사이에 태어난 지상의 신이다. 오시리스가 세트에 의해 피살당하자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는 그를 부활시켰고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아들 호루스를 낳았다.) 매의 모습으로 표현되다가도 때로는 매의 머리를 한 사람의 모습으로 표상되기도 했다. 또한 아문신(이집트신의 우두머리)은 때로는 숫양의 얼굴로 묘사되었는데, 이러한 숫양 숭배사상은 양을 재물로 바치는 유대의 종교적 제례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한다.
뱀을 물리친다는 땃쥐의 자그마한 미라 그리고 달, 지혜, 글의 신 토드를 상징하는 따오기 미라도 있었다. 그런가하면 고양이 여신 바스테트에게 봉헌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고양이 미라도 보였다. 새끼 악어 미라도 즐비했는데, 아마포로 촘촘히 감긴 긴 몸뚱이가 흡사 말린 북어 혹은 건어물 같았다. 하긴 약탈 금지법이 존재하지 않았던 무법의 시대, 19세기에는 이집트 미라들은 건어물로 분류되어 유럽으로 수출되곤 했다.
동물 미라들이 전시된 방을 통과하면 왼쪽엔 스크린 속 스핑크스가 내는 유치찬란한 퀴즈가 있고 오른쪽엔 윷놀이의 고대버전 세네트 게임이 관람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출구가 보인다.
오늘의 포스팅은 좀 따분할 수도 있겠다. 그도 그럴 것이 어찌어찌 전개하다 보니 무미건조한 보고서가 되어 버렸다. 원래 의도는 이게 아녔는데.......영화<미이라>나 <인디에나 존스>스러운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되길 원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난 판타지 소설이 아닌 박물관 후기를 쓰고 있었다. 환상과 고고학적 사실, 이 양자를 적절히 조화시키기 얼마나 힘들던지!!
이전에 고백했듯이, 한때 나의 꿈은 이집트 고고학자였다. 카르나크에서 혹은 아부심벨에서 이집트의 옛 정신을 되새기고 왕가의 계곡 어딘가에 아직도 잠들어 있을 파라오, 그를 깨우고 싶었다. 나는 밀폐된 현실(玄室)의 고대 공기를 맡아보고 싶었고, 하루에도 수만 번 파라오의 저주(모래 바람)를 들이마실 각오가 되어 있었으며, 기꺼이 전 생애를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고학자가 되기에는 나는 너무 나약했다. 그 원대한 계획은 어디까지나 머릿속에만 있을 뿐 실행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아 물론 이집트학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다. 관련 신간 서적이 출시되면 어김없이 구입해서 읽는다. 또한 네셔널지오그라피에서 해당 다큐를 방영할 때마다 본방사수를 한다. 그럼에도 이집트에 가보지 못했고, 대영제국 박물관과 루브르 박물관의 이집트관을 둘러보지 못했다. 따라서 나의 지식은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 와중에 브루클린 박물관에 소장된 고대 이집트 보물들 몇 점이 한국에 온 것이다. 전시 물품이 충분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오길 잘했다. 수천 년의 역사가 바로 앞에 있었다. 오직 유리관 하나 사이에 둔 채, 우리는 마주보고 있었다. 그 절대적 고요 속에서도 역사는 유유히 흐른다.
첫댓글 역시,
피숑의 글솜씨가
더욱 빛을 발하네요~^^
개막식에 초대되어
유물들을 보고 왔지만,
피숑의 해박한 지식과
남다른 관심에 기대어
깊이 있게 통찰하게 되네요.
멋진 글,잘 읽었어요~^^
고고학자에 가까운 관심
계속 취미로 갖고 살면
삶이 더욱 풍요로워지겠죠~^^
죽음이 있어,삶이 더욱
소중했던 그들처럼
감사합니다. 고고학은 선진국 미국 유럽 등지에선 정말 각광 받는 학문이고 네셔널지오그라피 채널과 국가 문화 수입에 막대한 자본(돈)을 벌어다주는데 우리나라에선 관심이 거의 없는게 넘 안타까워요...꼬맹이 연령대를 넘기면 무관심이니까요...
ㅠㅠ
고고학은 초등학문이 아니고 엄연히 고등학문인데 말입니다.
좋은 정보감사합니다~~다음주에 보러갑니다~
ㅋㅋㅋ팁 하나 우리카드 20% 할인요★
직접 보는 것 보다도 더 확실하게 관람했습니다.
고맙습니다.
ㅋㅋㅋ낼 합창 공연 보고 후기 쓴 후 고대 이집트에 대해 한번쯤 더 쓰려 합니다. 그 후에 남미 잉카 아즈텍 마야 순으로 앞으로 써 보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