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士禍]란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정치적인 반대파에게 몰리어 조신[朝臣] 및 선비들이 참혹하게 화[禍]를 입은 사건을 말한다. 조선은 개국한 이래 유교[儒敎]를 국교[國敎]로 삼아 문[文]을 숭상하고 유학[儒學]을 장려 하므로 우수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선비사회 즉 유림[儒林]은 매우 활기에 차 있었다.그러나 이들은 주의[主義].사상[思想].감정[感情].향사[鄕士].의 관계등으로 인해 여러 파[派]를 형성 하였는데 그 뿌리는 고려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조 때에 싹이 트기 시작하여 성종대에 이르러 이들의 반목은 더욱 심해졌는데 그 중에는 서로 상통하는 파도 있었으나 서로 대립 또는 반목하는 파도 많았다. 대표적인 파당[派黨]은 세조[世祖]의 찬탈에 가담하여 높은 지휘와 부귀를 누린 훈구파[勳舊派] 내지는 기호파[畿湖派].여기에 반데하여 불사이군[불사이군]의 명분에 따라 절의[節義]를 지킨 절의파[節義派] 세조의 찬탈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도 기회를 잡아 조정으로 진출하여 자신들에 사상과 포부를 펴보려던 사림[士林]파 내지는 영남파[嶺南派].그리고 중국에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따라 서울 동대문 밖 죽림에 모여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세월을 보낸 청담파[淸談派]등이 있다. 이들 각 파는 서로 논쟁이 따르는 대립과 투쟁에서 패자는 반역으로 몰려 지위를 빼앗기거나 목숨을 잃었고 한 파[派]가 승리하면 이 에 따른 또다른 새로운 반대파가 생겨 사화[士禍]를 야기시켰다. 이러는 동안 정치의 기강은 더욱 물란해지고 뜻있는 선비들이 관직을 버리거나 아예 단념하고 서당[書堂] 서원[書院]을 세워 유생들을 교육시키면서 정치의 비판 의식[批判意識].복수관념[復수觀念]이 응집[凝集]되어 당파의 결합을 굳게 하면서 후기 당쟁을 격화시키는 큰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뜻있는 선비들의 향토복귀와 후진교육은 공리적이며 세속적인 관학[官學]에 대한 수양과 진리탐구의 참다운 학문연구인 사학[私學]의 대연원[大淵源]을 이루게 하였다.
[1]계유[癸酉].병자사화[丙子士禍] 1453년[단종1]에서 1456년 [세조2]에 걸처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이 단종[端宗]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절개있는 신하들에게 화[禍를 입힌 사건이다. 12세의 어린나이로 단종이 즉위 하였지만 숙부인 수양대군은 왕위 찬탈[王位纂奪]의 야심을 품고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등의 중신을 살해하는 한편 친동생인 안평대군[安平大君]마저 사사[賜死]하고 전권[全權]을 장악하며 재위 2년만에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야위[讓位]를 하게 되었다.이에 분개를 느끼고 "하나의 태양 아래서 두명의 왕을 섬길 수 없다." 는 절의파 [節義派]인 집현전[集賢殿]학자들에 의해 단종 복위 운동이 일어났다. 세조는 이를 사전에 알고 성삼문[成三問]등 사육신[死六臣]을 참형하고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시켜 강원도 영월[寧越]로 귀양보낸 후 뒤에 사사[賜死]시켰다.
[2]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년 [연산군4]에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하여 화[禍]를 입은 사건이다.당시 성종실록[成宗實錄]편찬이 시작되자 사관[史官]이었던 김일손이 훈구파인 비행과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의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올렸는데 이전부터 갈등을 느껴오던 훈구파에 유자광과 이극돈[李克墩]등이 이것을 문제삼아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방한 것이라고 연산군에 고해 바첬다. 이로 말미암아 김종직 문하[門下]에 수많은 사림파[士林派]선비들이 화[禍]를 당하게 되었는데 무오년에 일어났다 하여 戊午士禍라 한다.
[3]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연산군10]에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성종의 비]의 복위[復位] 문제로 연산군이 이르킨 사건이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는 평소의 질투가 많아 폐비[廢妃]가 되었다가 사사[賜死] 되었는데 여기에 많은 선비들이 관련되어 있었다 . 이에 야심만만했던 임사홍[任士洪]은 훈구파와 시림파의 잔재 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이 사건을 연산군에 고해 바첬다. 연산군은 평소 어머니인 윤씨 사건에 대해 으혹이 많았던 차에 이를 알고선 그 사건에 관련된 많은 선비들을 처형하는 한편 폐비 사건 당시의 대신들이 었던 한명회[韓明澮].정여창[鄭汝昌].남호온[南호溫] 등을 부관참시 하였다.
[4]병인사화[丙寅士禍] 1506년[연산군12]에 일어난 무오.갑자사화에 연장된 사화로서 무오.갑자사화 때 화[화]를 입지 않고 빠진 사람들에게 죄를 가하기 위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5]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중종14년]남 곤[南 袞] .심정[沈 貞] 등 훈구파의 재상[勳舊派의 宰相]들이 당시 새로운 혁신을 감행한 젊은 선비들에게 화[화]를 입힌 사건이다.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中宗]은 정치를 개혁하고 패기에 넘치는 조광조[趙光祖]등 신진사류 [新進士類]를 등용하여 성리학[性理學:주자학]을 크게 장려 하였다. 이에 조광조 등은 중종에 신임을 받아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행하고 자격이없는 공신들의 공신호[功臣號]를 박탈하는 등 과격한 혁신 정책을 썼다.여기에 불안을 느낀 심 정 .남 곤 .홍경주 [洪景舟]등이 갖은 모략과 음모로서 조광조 일파가 민중의지지를 받아 반역을 꾀한다고 주장하여 30대 젊은 선비들이 죽음을 당하고 이를 옹호한 대신들이 파면 되거나 죽음을 당하였다.
[6]신사사화[辛巳士禍] 1521년[중종16년]에 안처겸[安處謙]일파들이 심 정[沈 貞].남 곤[南 袞]등의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이다. 기묘사화로 인하여 세력을 잃은 안 당[安 塘]의 아들 안처겸은 남 곤. 심 정이 사림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하여 이들을 제거 할 것을 모의하였다.때마침 안처겸의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였는데 남 곤의 부하 송사련[宋祀連]은 여기에 방문한 사람들에 명단을 적어 이들이 대신들을 해치려 한다고 무고하여 관계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는 큰 옥사[獄死]가 일어 났다.
[7]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명종 원년]에 왕실의 외척[外戚]인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반목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세자[世子:인종]의 외숙인 윤 임[尹 任] 일파의 대윤과 경원대군[慶原大君:명종]의 외숙인 윤원형[尹元衡]일파의 소윤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암투가 벌어 젔는데 1544년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자 대윤이 득세했다.
[8]정미사화[丁未士禍] 1547년[명종2년]에 을사사화 의 여파로 일어난 것이며 일명 벽서[壁書]의 옥이라 한다. 전라도 양재역[良才驛] 벽에 여왕[女王]이 집정하고 간신 이 기[李 기] 등이 권세를 농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를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벽서가 발견 되어 정권을 잡고 있던 이 기[李 기]정명순[鄭明順]등이 을사사화때 제거하지 못한 반대 세력들을 고발하여 수백명에 연루자가 화를 입은 사건이다.
[9]을유사화[乙酉士禍] 1549년[명종4]에 이홍남[李洪男].이홍윤[李洪胤].형제의 난언[亂言]을 상주[上奏]하여 이홍남이 모역죄로 몰려 그의 아우 이홍윤 등이 능지 처참[凌遲處斬]되는 한편 이에 연루된 많은 사람들이 화[禍]를 입은 사건이다.
[10]을축사화[乙丑士禍] 1613년[광해5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몰아내기 위하여 대북파인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이 일으킨 사건이다. 경상도 문경새재[聞慶鳥嶺]에서 강도사건이 일어났는데 당시 권세를 잡고 있던 이이첨[李爾瞻]등은 이 사건이 김제남[金悌男:영창대군의 외숙부]등과 관계가 있다고 고발해 영창대군이 서인[西人]으로 폐봉[廢封]되어 강화[江華]에서 죽음을 당하였으며 김제남은 사사 당했다.
[11]기사사화[己巳士禍] 1689년[숙종 15]에 서인[西人]과 남인[南人]들 사이에서 정치적 야욕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정권을 장악한 서인의 송시열[宋時熱] 등은 소의장씨[昭儀張氏:장희빈]의 아들 [후에 경종]을 원자로 책봉하는 것은 시기가 빠를다고 반대했는데 이를 계기로 실각[失脚]중이던 남인들이 왕을 충동하여 서인들이 축출당하는 큰 옥사가 일어났다.
[12]신임사화[辛任士禍] 1721년[경종1]에서 1722년 경종2]사이에 일어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대립으로 신축[辛丑] 임인[壬寅]양년의 걸처 일어났다. 하여 신임사화라 하며 일명[一名]임인옥[壬寅獄]이라 하기도 한다. 심신[心身]이 허약한 경종 [경종:장희빈 아들]이 즉위하자 노론파[老論派] 김창집[金昌集]등의 건의로 왕세제 [王世弟]연잉군 [延잉君:영조]으로 하여금 대리청정[대리청정:왕 대신 정사를 봄]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에 불많을 품고 있던 소론파의 김일경[金一鏡]등은 노론측이 왕의 신병을 조작하여 발설하였다 하여 노론 4-대신 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이이명[李이命].조태채[趙泰采]를 탄핵하고 유배를 보내는등 옥사를 일으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