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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6대화가와 계보
1911년 3월에 한국 최초의 근대적 미술교육기관에 해당하는 경성서화미술원이 창립되었다.
윤영기 등에 의해 종로구 중학동 근처에서 개원하여 창덕궁 왕실의 재정 지원을 받으며
1919년까지 지속되었다. 이곳의 강사진으로 조석진·안중식·김응원·정대유·이도영·강진희·강필주
등이 담임하였으며, 서과와 화과로 나누어 3년 과정이었다. 1914년부터 4회에 걸쳐 오일영·이용우·
김은호·박승무·이상범·노수현·최우석 등을 배출하여 1920년대 이후 근대 한국화단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경성서화미술원의 심전 안중식, 소림 조석진에게 근대 6대작가들 대부분(의재 허백련제외) 사사를 받았다.
(당시 경성서화미술원 교수진:심전 안중식, 소림 조석진, 위사 강필주, 관재 이도영, 소호 김응원등)
그리고 6대작가에게
현초 이유태, 청재 장철야, 심정 박세원, 혜촌 김학수, 석성 김형수, 창석 이억영, 춘정 유명렬, 등이 수학을 하였다
1)심산 노수현: 제자들;심정 박세원, 석성 김형수, 지목 이영찬, 이석 임송희,
심산(心汕).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에게서 컸다. 보성소학교를 거쳐 1914년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그해 최초의 민영 화가양성소인 서화미술회 강습소 화과(畵科)로 옮겼다. 동급생인 이상범·최우석과 함께 안중식·조석진으로부터 관념산수 중심의 그림수업을 받았고 1918년 졸업 후에도 안중식의 경묵당에서 계속 공부했다. 1920년 이상범과 함께 창덕궁 대조전 벽화를 제작했고 1921년 동아일보사에 들어가 삽화와 만화 등을 그렸다. 그해부터 열린 서화협회전람회에 해마다 참여했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도 1922년 1회부터 1932년 11회까지 출품했다.
1922년 이상범·변관식·이용우 등과 함께 전통회화를 근대적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동연사(同硏社)를 만들었고, 1924년 이상범과 함께 100여 점의 작품으로 2인전을 열었다. 조선일보사로 직장을 옮겨 삽화와 만화를 계속 그렸으며, 1940년 10대가전에 참여했고, 심산화숙을 세워 1948년까지 제자를 길러냈다. 일제가 전시체제를 강화해가던 1942년 화필보국(畵筆保國)이라는 취지로 결성된 조선남화연맹전람회에 출품하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조선미술건설본부 동양화 부위원장을 지냈고 1948~61년 서울대학교 예술학부 미술학과 교수로 일했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이래 1960년 9회까지 계속 관여했으며, 1961년 국전 기구가 개편되자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71년 김은호·박승무·이상범·변관식·허백련과 함께 서울신문사 주최 6대가전에 참여했다. 서화미술회에서 수업을 받을 때와 1920년대초까지는 정형화된 관념산수를 그렸으나 동연사 활동에 참여한 1923년 이후 근대적인 창작방법을 보였다. 실재하는 산수를 합리적인 원근법에 바탕하여 묘사하는 근대적 조형관을 보임으로써 근대 동양화단에 실경산수의 전통을 확립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이는 그뒤 심산화숙과 서울대 미술대학에서 양성된 후진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1950년대 이후에는 산수형태를 이상화해 조형적인 효과를 드러내는 데 치중, 웅장한 바위산의 형태미를 묘사한 것이 많다. 만년에는 산과 바위의 윤곽선에 황갈색 태점(苔点)을 사용해 화면의 장식성을 높였다. 주요작품으로는 〈성재수간 聲在樹間〉(1920)·〈귀초 歸樵〉(1923)·〈산촌귀목 山村歸牧〉(1924)·〈일난 日暖〉(1925)·〈우후 雨後〉(1930)·〈대흥사추경 大興寺秋景〉(1940)·〈송청 送靑〉(1957)·〈춘경 春景〉(1960)·〈추경 秋景〉(1968) 등이 있다.
2)이당 김은호: 제자들(후소회중심); 현초 이유태, 혜촌 김학수, 소강 김정무, 백윤문,
한유동 장운봉, 김기창, 장우성(서울미대교수), 조중현, 정홍거
김화경, 정완섭, 안동숙, 이규옥, 이남호, 배정례 김학수
1912년 서화미술회 강습소에 입학하여 조석진·안중식 등의 지도 아래 전통적인 관념 산수, 중국 미인도, 화보를 모사하거나 사생을 통해 그림공부를 했다. 그 해 송병준의 초상화를 그려 기량을 인정받았다.
어용화사(御用畵師)로 명성을 얻어 윤덕영·윤택영·이희원 등 당시의 세도가와 최제우·김인국(시천교 교주) 등의 초상화를 그렸고, 1913년 덕수궁 어전 휘호회(御殿揮毫會)에 참여하기도 했다. 채색인물화와 화조화에 뛰어났다. 초기작인 〈민영휘 초상〉(1912)·〈고종 초상〉(1912)·〈순종 초상〉(1912)에서는 섬세한 필치로 얼굴의 곡면과 입체감을 살려 사진과 같은 사실성을 보여주었다.
서화협회 전람회뿐만 아니라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 출품하여 1회 4등상, 2회 입선, 3회 3등상, 4회 입선을 했다.
1925년 이용문의 후원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유키 소메이[結城素明]의 문하생이 되었으며 도쿄미술학교 수업도 청강했다. 일본에 머문 3년 동안에도 계속 선전에 출품하여 상을 받았다. 성덕태자 봉찬미술전(1926), 제국미술전(1926, 1927)에 출품하여 입선했으며 일본 귀족의 주문에 따라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해방이 되자 친일화가로 배척당했으나 일제잔재가 청산되지 않은 채 1948년 남한정부가 수립되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열리면서 추천작가 자격으로 출품했다.
그 뒤 심사위원과 추천작가를 지내면서 국전출품작의 화풍과 내용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전체 화단에도 영향력을 키워갔다. 해방 후에는 역사인물의 초상화 제작에도 한몫했다. 〈신사임당〉·〈이이〉·〈이순신〉·〈논개〉등의 공인 영정과 인도 간디 수상의 초상, 윌슨 미국 대통령,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친일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3)소정 변관식 :제자들; 남강 김원, 충정 유명렬, 윤재 노영준
1910년 11세 되던 해 서울로 올라와 1917년 외할어버지인 조석진이 교수로 있는 서화미술원(書畵美術院)에 입학하면서부터 그림 수업이 본격화되었다.
1923년 서화미술원 출신의 이용우(李用雨)·노수현(盧壽鉉)·이상범(李象範) 등과 동연사(同硏社)를 조직하고 전통 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활동을 하지 못한 채 해체되고 말았다.
1925년 김은호(金殷鎬)와 함께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 1929년까지 신남화풍(新南畵風)을 접하면서 화풍의 폭넓은 발전을 꾀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에는 서화협회(書畵協會)의 간사일을 맡아보았다. 1937년부터는 서울을 떠나 전국을 돌아다니며 실경(實景)을 사생하는 등 새로운 화풍의 형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國展)]에 관여하고 심사 위원을 역임한 적도 있다. 그러나 강직한 성격 탓으로 1957년 이를 떠나 여생의 대부분을 재야 화가로서 화업에만 몰두하며 보냈다
4) 청전 이상범(홍익대 교수); 제자들; 남정 박노수, 남곡 정연대, 배렴(구창서,이인실)
박원수, 정용희, 이현옥. 심은택, 이건영, 정종녀, 심형필등
1933년 청전화숙 설립
향토색 짙은 작품들을 주로 그렸다. 1914년 18세 때 서화미술원에 입학, 본격적인 그림 수업을 받았다. 안중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초기 작품은 남북종의 화법과 안중식의 영향을 많이 드러냈다. 그러다 점차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1926년 <조선일보>에 삽화가로 입사, 1928년 <동아일보> 학예부로 자리를 옮겨 삽화를 그렸다.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에서 일장기를 지운 역할로서 직접 연루되어 일본경찰에 붙잡혀 40여 일 만에 풀려났다. 이후 동아일보사를 그만두고 금강산 등을 여행하며 실경 스케치를 했으며 후진양성기관 ‘청전화숙’ 운영에 전념했다. 다수의 수상경력이 있으며 미술계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한 그는 정선 장승업 이후 최고의 작가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5)심향 박승무: 소현 박건서(심향의 동생 박승기씨의 아들이자 심향의 양자로 유일한 제자)
심향은 1893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최초의 근대 동양화 학교인 ‘서화미술회 강습소’에서 수학했으며
한국전쟁 이후 1980년 삶을 마칠 때까지 대전에서 작품활동을 했다. 그는 국전 출품이나
제자 육성을 거부하는 등 당시 미술계와 어떤 관계도 맺지 않은 채 고독한 야인 화가로 지냈다.
1971년 서울신문사 주최"한국동양화 6대가전"은 야인생활을 하던 심향을 중앙화단으로 불러낸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76년 동아일보 주최 박승무회고전으로 화단에 재조명 받기 시작함
그때 84세로 6대화가 반열에 오름.
6)의재 허백련: 제자들; 옥산 김옥진, 희재 문장호, 매정 이창주,이범재, 허구, 박소영
이상재, 금봉 박행보, 양계남, 오우선, 장찬홍, 허달재, 허대득, 허의득 등
본관은 양천(陽川). 호는 의재(毅齋). 전라남도 진도 출생.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다닌 후, 신학문에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와 기호학교(畿湖學校)에 입학하였다가 1913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동경의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서 법정학을 전공하려다가 그림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일본 화단의 활발한 움직임에 자극을 받았고, 고향에서 종고조(從高祖)뻘 되는 19세기의 대화가 허련(許鍊)의 아들인 허형(許瀅)에게 묵화의 기초를 익혔던 재질이 전문적인 그림 수업을 결심하게 한 것이었다.
동경에 약 6년간 머무르며 당시 일본의 대표적 남종화가(南宗畫家)였던 고무로(小室翠雲)의 영향을 받아 정통 남종 산수화를 지향하게 되었다.
1918년 고향으로 일단 돌아갔다가 1922년서울에 올라와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전통적인 산수화를 출품하여 입상하면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1927년까지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고, 그 뒤 전라남도 광주에 정착하여 독자적 화필 생활과 문하생 지도에 전념하였다.
그는 같은 세대의 신예들이 모두 서울을 중심으로 근대적 작풍을 추구한 것과는 달리, 오로지 옛법〔古法〕에 충실한 화격(畫格)을 자신의 세계로 심화시키는 방향을 고수하였다. 그의 산수화와 문인화는 전통 남종화 정신과 그 기법의 철저한 계승이었다.
1938년에는 광주에서 연진회(鍊眞會)를 발족시켜 회관까지 마련하고 호남 지역의 서화 전통을 더욱 떨치게 하려는 노력을 주도하였다.
문인화가 이범재(李範載)와 구철우(具哲祐)는 그때의 제자이다. 그 뒤에도 문하에서 김옥진(金玉振)을 비롯한 많은 전통적 산수화가가 배출되었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무등산 다원(無等山茶園)을 인수하여 축산 농장을 경영하면서 화필 생활을 병행하였다. 그리고 1947년에는 농업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하고 가난한 집안의 청소년들에게 농사 기술을 익히며 학업도 닦게 하는 등 사회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9년에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國展)]가 시작되자 추천 작가·초대 작가로 추대되고, 심사 위원을 역임하였다. 1960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62년문화훈장 문화포장(文化褒章)을 받았다. 또 1966년에는 예술원상 미술 부문을 수상하였다.
*특히 월전 장우성(서울대교수)과 청전 이상범(홍익대교수)은 양대 산맥으로 쌍벽을 이뤘다.
*해강 김규진(해강서화 연구회)-> 고암 이응로
10대 화가를 인터넷에 질문을 하였으나 답변을 얻지 못하여 여러 곳을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1940년 조선미술관 창립10주년 기념으로 꾸민 (10대가 산수풍경화전)에서 처음으로 "대가"라는
말이 전시명칭에 등장.
이 전시는 우경 오봉빈이 꾸민 것으로 오봉빈은 광화문 네거리 당주동 입구에 개인화랑 조선미술관을
열고 서화를 취급했던 화상이었음.
전시회에 초대된 10대가 화가들 명단(일제 강점기에 10대가라는 일컫는 화가)
1,춘곡 고희동, 2,무호 이한복, 3,정재 최우석, 4,묵로 이용우, 5,의재 허백련,
6,이당 김은호, 7.심향 박승무, 8,천전 이상범, 9,심산 노수현, 10,소정 변관식
오봉빈은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 10대가를 엄선하였는데 그 기준은
1.화업 30년이상 경력 2,소림 조석진과 심전 안중식의 문화생으로 선정하였는데, 경성서화미술원 출신이
아닌 의재 허백련만 예외적이었음.
10대가전은 1회로 끝나고, 그후 30년이 지난 1971,12.1~7일간 6대가전이 서울신문사 창간26주년
기념전으로 (동양화 여섯분의 전람회)가 열렸는데 이 전시의 명칭에 전 신문기자이며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던 이구열(1932~ )이 "대가(大家)"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6대가로 통용되기 시작하였다.
*정재 최우석: 1915년 서화미술강습소에 입학하여 안중식, 조석진에게 배움, 조선선전 입,특선)
국전 추천 초대작가 심사위원 역임
전혁림: 1949년 제1회 국전 입선하면서 알려짐, 50년 제2회 국전 문교부장관상 수상

첫댓글 자료조사를 더해서 차차 보충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남송선생님!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근대 6대화가와 10대화가에 대한 기본적인 자료를 몇차례 보충하였습니다.
선생님 정보 고맙게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