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지금 마술 한 가지를 보여 드립죠!" (중략)
“자, 이런 겁니다. 한번 보시죠!” 2등 대위는 갑자기 째질 듯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줄곧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로 그 끄트머리를 쥐고 있던 두 장의 무기잿빛 지폐를 그에게 보여 준 뒤, 갑자기 무엇 때문인지 오른쪽 주먹으로 난폭하게 움켜쥐더니 마구 구기고 힘껏 뭉개 버렸다.
“보셨지요, 보셨냐굽쇼!” 그는 미친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려서는 째질 듯한 목소리로 알료샤에게 소리쳤고, 갑자기 주먹을 위로 치켜들더니 있는 힘껏 구겨진 지폐 두 장을 모래 위로 던졌다. “보셨습니까요?” 그는 지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다시 째질 듯한 목소리 외쳤다. “자, 바로 이것이올시다……!”
그리고서 그는 오른발을 들더니 갑자기 기이한 악의를 드러내며 그것을 발굽으로 짓밟기 시작했는데, 발길질을 할 때마다 소리를 지르고 숨을 헐떡였다.
“자, 이게 당신네들의 돈입니다요! 당신네들의 돈! 당신네들의 돈이라고요! 당신네들의 돈!” 갑자기 그는 껑충 뒤로 물러서더니 몸을 펴고 알료샤 앞에 버티고 섰다. 그의 모습에서는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오만함이 넘쳐났다.
“당신을 보낸 사람들에게 아뢰십시오. 수세미는 자신의 명예를 팔지 않는다굽쇼!”
(중략)
이번에는 얼굴이 일그러진 웃음 대신, 반대로 온통 눈물로 젖어 떨리고 있었다. 엉엉 울면서, 훌쩍거리면서 탁탁 끊기는 빠른 말투로 그는 소리쳤다.
p 442~443
마술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안다. 마술이 얼마나 재빠른 손놀림, 여러 가지 장치, 속임수 따위로 불가사의한 현상을 보여줘 우리를 경이롭게 만드는 지 말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중위가 마술을 보여준다며 추할 정도로 발광하며 돈을 찢어 버리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내가 기대했던 마술의 환상성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 차지한 2등 중위의 추악성. 그런 추악함을 보이고 갑자기 울면서 떠나는 그의 모습은 충격적이어서 한참 종이를 넘기지 못했다. 왜 도스토예프스키가 그의 행동이 ‘마술’이라고 칭했는지도 처음에는 잘 이해가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번 그 장면을 읽다보니 왜 그 장면이 마술인지, 이해가 갔다.
사실, 그가 한 행동을 엄밀히 따지면 마술이라고 할 수 없다. 그에게는 재빠른 손놀림도 여러 가지 장치도 속임수도 없었다. 오로지 돈을 구기고 버렸을 뿐이다. 하지만 그 돈이 그가 그토록 바라던 돈이기에 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자세하게 그렇게 돈이 필요하던 그가, 자존심이라고는 없어보이던 하층민인 그가, 부자가 거저 주는 돈을 ‘불가사의’하게 버린다. 자신의 명예,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아들의 명예를 위해서다. 고작 형체도 없는 명예를 위해 그런다는 것이 불가사의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최후의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그의 모습은 마술보다 더욱 경이롭고 의미 깊었다. 또한 그는 울면서 떠난다. 그렇게 우는 그의 모습이 어떤 영웅에 가깝다기보다는 비루한 하층민, 즉 우리 곁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람 같아서 더 숭고해보였다.
이렇게 추악한 현실을 미화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 그리고 형편없지만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2등 중위 같은 인물을 통해 인간의 숭고함을 보여주는 점은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배워야 할 소설가로서의 자세라고 생각했다.
첫댓글 저는 마술이 환상적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속임수에 불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다은 학우가 기대한 마술의 환상성은 어떤 것인가요?
저도 마술은 속임수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속임수가 환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지요. 그럼으로 환상적이라고 했습니다 ㅎㅎ
또 제가 기대한 마술의 환상성은 그 환상성으로 말미암아 현실을 잊게 해주는 걸 기대했습니다. 마술이라는 게 되게 보는 순간 그 신비함, 경이로움에만 집중하게 되서 현실을 잊게 해주잖아요. 그렇듯 2등 대위도 자신의 현실을 잊게 해주는 무언가의 마술을 하려나 싶었어요. 하지만 도리어 마술이라고 칭한, '발광'에 가까운 행동을 통해 현실을 드러내죠. 그런 면때문에 제가 기대한 마술의 환상성이 사라지고 2등 중위의 추악성이 보였다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추악성보다는 (이어서)
@이다은 추악성보다는.. 추한 모습이라 하는 게 더 맞는 것 같네요. 추한 모습으로 돈이라는 개념에 저항하기에 더 의미가 크고, 그 추한 모습으로 보통 소시민이라는 걸 느끼게 해주니까요.
@이다은 우선 본인이 기대한 환상성에 대해 잘 답변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그 부분을 읽으면서 2등 대위의 추악한? 추한 모습이 인상깊었어요.ㅎㅎ 그런데 그가 우는 모습에서 비루한 하층민이라고도 생각되었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이미지도 그려졌습니다.
@고민정 네, 저도 비루한 하층민이면서도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어요. 무엇보다 그가 돈을 찢는 행위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는 것 뿐만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명예를 사랑해주는 어린 아들 때문에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자신을 아버지로 사랑해주기에 아버지로 남으려고 한 거죠.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언급을 못 했네요. 지적 감사합니다
우와.....재밌게 잘 읽어어요! 뜬금없지만.. 돈이라는 단어를 보니.. 생각나서 적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돈과 관계가 깊데요. 돈을 위해 펜을 들었다는 글도 봤어요 ! 그래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도 돈의 단위가 정확하게 나오는 거라구 하더라구요. 돈은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절반이다. 라는 말도 있고.... 잘 읽었습니다!!!!
잘읽었어요~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것 ! 동감해요!!
공감합니다. 인간의 어두운 모습을 있는그대로 묘사하는게 도스토예프스키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이다은 학우께서 생각하시는
소설가의 자세는 어떤건지 궁금합니다.
며칠 전 독토 수업을 할 때에도 조금 언급했지만 타인의 비극(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걸 미화하거나 연민하지 않고 끝까지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게 소설가의 자세라고 생각해요.
@이다은 우와.,맞아요!!!! 정성스러운 답변 감사합니다!!!!!!!
돈은 드럽죠
더럽지 않고 드럽습니다 변기의 20배 정도로
말장난 같지만 실제로 그런듯.
맞아요..세균이가장 많다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