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철 신작 소시집 읽기】
타인과 세상, 그리고 자신에 대한 말 건네기
이동훈(시인)
소설을 두고 ‘그럴 듯한 이야기’ 라고 말하는 사람도 시에 대해서는 다르
게 말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고 해서 ‘시는 이런 것이다’라는 모범 답안이
따로 있지는 않을 것이기에 시도 소설처럼 이야기일 뿐이라고 우겨도 꿀릴
일은 아니다.
나는 시를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소설이 긴 이야기라면 시는 짤막한
이야기이다. 긴 이야기도 따지고 보면 현실의 의미 있는 부분을 줄인 것이
니 짧은 이야기는 그 정도가 더 현저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줄이고 줄이다
보니 함축이 생기고, 그 과정에 요긴하게 쓰일 법한 게 비유와 상징이다.
압축 과정에서 비유와 상징은 자연스레 따라오는 장치일 뿐이지만 가끔은
주객이 전도된 작품을 만나기도 한다. 화려한 수사에 눌려서 현실을 환기
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는 작품이 그런 경우라 할 것이다.
주사기에 든 액체가 현실이라면 주사기를 눌러 주사바늘을 통해 찔끔 나
온 진액 같은 것이 시라고 해도 좋겠다. 몸에 좋은 진액을 제대로 짜내는
것이 작가의 몫이라면 한 방울의 시를 통해 원액에 녹아 있을 자연이나 현
실의 한 단면을 떠올려보는 건 독자의 몫이다.
장수철 시인의 시는 현실과 현실에서 비롯된 내면의식을 아주 정성스럽
게 짜낸 수작이다. 대개의 시들이 시적 화자를 내세워 자신의 이야기를 풀
어내기 마련이지만 장수철 시인의 경우는 시인과 시적 화자의 거리가 좀
더 가깝게 느껴진다. 수하물이나 수챗구멍, 공테이프나 치약 앞에서 자신
의 삶을 돌아보는 시구를 통해 시인의 모습을 오롯하게 대면할 수 있다.
‘순대’나 ‘나무’ 등의 객관적 상관물을 동원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자신과
이웃의 처지를 은근히 빗댄 것으로 보인다.
낯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건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장수철 시인의
이야기는 ‘순대’에서부터 시작된다. 난해한 이야기도 아니지만 처음부터
술술 풀리는 이야기도 아니다. 이야기의 재미도 잠깐 멈추어 갔을 때 더하
듯이 시의 행간에 잠깐 멈추어 서는 게 필요한지 모른다. 이제부터 이야기
의 건더기를 깜냥껏 건져보기는 하겠으나 똘똘한 시에 비해 너무 어설픈
해설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어쨌든 감상은 독자의 권리이니 널리 혜
량해 주리라 믿는다.
장수철 시인의 이번 시엔 ‘어둠’의 이미지가 유난히 많이 나타난다. “근
원도 지엽말단도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같이 하나인 어둠”(순대), “ 바
깥 내다볼 차창 하나, 기댈 불빛 한 자락도 없었답니다”(화물번호 무안-
3432066), “수챗구멍으로 소용돌이치며 빠져나가는 개숫물처럼”(수챗구
멍 앞에서 소용돌이치다가), “빈 밥통 속 오래도록 쟁여둔 깊고 야무진 어
둠이,/ 엎드려 울고 있던 그릇들마다 겹으로 포개놓은 어둠이”(공테이프가
재생하는 고요와 어둠에 대한 기록) 등에 보이는 것처럼 ‘어둠’은 시적 화
자가 놓여 있는 배경이면서 시적 화자의 마음속 깊이 드리워져 이미 화자
의 일부가 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둠’은 기피하고 싶거나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그려지거나, ‘어둠이
깊을수록 밝음이 가깝다’든지 해서 희망을 이야기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
기 십상이다. 하지만 시적 화자가 어둠을 대하는 태도는 이전의 방식과는
구별된다. 어둠을 애써 피하거나 밀치려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 어둠을 어
둠인 대로 놓아두고 그 어둠을 어쩔 수 없는 부분으로 인정하려는 태도도
엿보인다. 시인이 말하려는 어둠은 사는 데 적당하게(적당하다는 게 어느
정도인지 그 기준이 항상 문제이기는 하다) 요구되는 욕망이나 이기심, 또
그로부터 파생되는 내적·외적 갈등의 얼굴을 하고 있다.
「순대」는 순대를 비스듬히 썰어 놓은 것에서 느낀 일종의 비애감이 시의
모티브가 된 것이다. 순대는 “식욕과 성욕이 시꺼멓게 버무려진/ 한껏 발기
한 욕망”을 가졌으면서도 그 욕망을 조절하거나 실현하는 데 실패하고 “토
막 난” 채 “기울어가는” 존재의 이름이다. 이는 생래적이고 원초적인 욕망
이 현실에 수용되지 못한 채 “칼날” 같은 규범이나 자의식에 의해 억압되었
기 때문이다. 이 억눌린 욕망은 일탈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자아에게
어두운 그늘을 드리기도 할 것이다.
어두운 자아가 시의 곳곳에 자리 잡고 있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는 다소
불분명한 데가 있다. 시인의 또 다른 시에서 “한 때 내가 섣불리 가담했으
나/ 이제는 낯설기만 한”(「수챗구멍 앞에서 소용돌이치다가」중) 단체나 이
름, 혹은 “멋모르고 지껄였던/ 고백과/ 기약 없는 약속들과/ 습관적인 기대
와/ 이루어지지 않을 희망과/ 침묵이 두려워 건넸던 이야기들”(「사랑, 치사
량의」중 ) 등에서 넘겨짚어 볼 뿐이다. 수챗구멍에 참혹하게 고인 것은 시
간이라고 했지만, 그 시간을 견뎌야 하는 화자는 이미 어둠 쪽으로 한참 기
울어져 있는 상태이다. 어둠 속에서 상처 입고 괴로워하는 자아는 있어도
그 어둠을 부정하는 모습은 좀처럼 찾을 수 없다는 점도 이번 시의 특기할
만한 점이다. 아마도 자신의 삶에 드리운 어둠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감지하고 있는 까닭이 아닐까 싶다.
어둠의 일면이 상대적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난 작품은 <나무도 때로는 그
늘에 앉고 싶다>이다. “누군가의 그늘이 되는 일이나/ 가지 사이에 새들의
둥지를 거느리는 일들만이” 나무의 임무인 양 당연시되는 집단 무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자신은 없고 오직 남을 위한 희생만 강요당한 삶을 아름답
다고 미화하는 세태가 곧 어둠인 것이다. 희생해야 할 대상이 가족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의 일방적 희생을 대가로 겨우 유지되는 가정을
이상적으로 위장하는 것은 몰염치한 일이다. 진정한 가족애는 가족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하여, 가끔은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마냥 홀로 그늘에 앉아 있고 싶”은 자유를 누리
는 데까지 가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자신을 위해서 시간을 쓰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게 뭐 어려울까 싶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도 않고 간단하지
도 않다. 타의든 자의든 간에, 싫든 좋든 간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땅 밑 만 갈래 뿌리 내린 제 지친 발목을 꺼내어/ 오래도록 씻
기며 어루만지고 싶기도 한” 나무는 깊은 연민과 공감의 대상으로 다가온다.
어둠과 어둠 속의 자아를 그렸으되 이를 극구 부정하지도 않던 시인의
참모습은「화물번호 무안-3432066」에서 감동적으로 드러난다. “양파 한
자루 되어 상경”한 어머니의 마음을 읽는 단순한 내용임에도 어떤 수사로
도 미치지 못할 진정성이 담겨 있다. “ 어린 조카의 글씨만큼 삐뚤빼뚤 살아
온 나날들이/ 이렇게 철마다 어머니 앞에 곡진하게 혼쭐이 나고서야/ 또박
또박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에서 알 수 있듯이 자아는 어둠에서 비켜서서
이전의 자아를 반성적으로 돌아보고 있다. 자칫 교훈적이거나 도덕적인 경
구로 돌아서기 쉬울 법한 내용이지만 이는 장수철 시인의 체질에 맞지 않
는 일임에 틀림없다. “마지막 떠나는 무안행 버스의 전조등 불빛 앞으로”
몰려드는 “진눈깨비” 처럼 저마다 분분하고 저마다 젖게끔 만드는 건 시인
이 갖고 있는 힘이라 할 것이다.
앞에서 시는 짧은 이야기라고 했다. 그 중에서도 좋은 이야기가 뭐냐고
물으면 나와 타인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도움을 주는 이야기라
고 대답하겠다. 타인을 이해해야 타인을 사랑할 수 있고, 세상을 이해해야
세상을 사랑할 수 있다. 모순덩어리인 나 자신은 더 많은 이해와 사랑이 필
요한 존재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장수철 시인의 신작시는 좋은 이야기로서 부족함이 없다. 장수철 시인의
시는 어두운 자아와 반성적 자아가 한데 어울려 있는 가운데 타인과 세상
에 대한 그리고 자신에 대한 말 건네기이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면 나와
타인의 삶이 어떠한 것이고, 어떠해야 하는 것인가를 돌아보게 된다. 나와
타인과 세상의 소통을 막고 있는 닫힌 문이 있다고 하자. 그 문을 열게 할
열쇠가 여기 있다. 장수철 시인은 이걸 뭐라고 부를 것인가?
이미 이야기했는지 모른다. -사랑이라고.
설령 그것이 “맵고 독한 치사량의 사랑”이라 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