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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보풍수의 현장을 가다
한국산서회와 함께 하는 인문산행
제9차 호암산의 풍수와 비보
글/심산(한국산서회)
사진/서영우(한국산서회)
호암산(虎岩山, 393m)을 독립적인 산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예전에는 그저 삼성산(三聖山, 481m)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암봉들 중의 하나 정도로만 인식했었다. 삼성산 역시 관악산(冠岳山, 632m)과 떼어놓고 생각하기 힘들다. 삼성산을 관악산의 일부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그렇게 ‘범(汎)관악산’ 혹은 ‘관악산 자락’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호암산은 관악산의 서쪽 끝 봉우리에 해당한다.
2017년 11월 4일(토), 한국산서회가 9번째로 찾은 인문산행 대상지는 바로 이 자그마한 호암산이다. 딱히 산의 규모가 웅장하다거나 특별한 비경이 있어서가 아니다. 한국의 산을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풍수지리, 그 중에서도 비보풍수(裨補風水)의 현장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이다. 전철역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찾아와야 하는 까다로운 집합장소였는데도 참가자들이 모두 제 시간에 속속 도착하여 주최측을 감동시켰다.
벽산아파트 5단지 버스정류장에서 호암산으로 조금만 올라오면 호암산폭포 앞 나무데크 광장이 있다. 이곳을 통과하는 길들은 자못 복잡하게 얽혀있다. 관악산둘레길과 서울둘레길이 겹쳐지고 최근에 명명한 호암늘솔길까지 가세하니 이정표들이 중구난방이다. 관악산둘레길 이정표의 존재는 이곳 호암산을 관악산의 일부로 본다는 인식의 방증인 셈이다. 주최측과 참가자들은 간단한 자기소개를 마치고 이내 발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한다.
임진왜란 당시의 전설이 서린 칼바위
집합장소에서 호암산 능선으로 올라탈 때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칼바위이다. 매우 날카로운 바위 절단면이 허공을 찌르고 있는 형국의 이 바위는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모양이 바뀌어 쟁기바위 혹은 보습바위라고도 부른다. 임진왜란 때 이 지역의 무명장수가 왜군장수와 턱걸이 내기를 하였는데, 왜군장수가 99번을 마치고 100번째의 턱걸이를 하려는 순간, 바위 끝이 쪼개져 떨어져 죽었다는 재미있는 전설이 서려있다.
사실 칼바위의 매력은 그 내부에 숨겨져 있는 천연동굴에 있다. 완벽히 밀폐된 형태의 동굴은 아니고 몇 개의 거대한 바위들이 절묘하게 덧쌓여 생겨난 일종의 허공(虛空)인데, 그 안에 들어서면 풍수지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어떤 기(氣)의 응집을 느낄 수 있는 신묘한 장소이다. 아니나 다를까 동굴 내부의 여기저기에 최근까지도 기도터로 쓰였음을 알 수 있는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한국전쟁 때 이곳으로 피난 온 주민들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칼바위 동굴은 이번 산행에서 제외하였다. 그곳까지의 접근로가 다소 위험하고 내부도 협소하여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답사하기에는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칼바위 바로 위쪽의 정규등산로에 널찍한 전망용 나무데크가 설치되어 있다. 그곳에서 잠시 땀을 닦고 한숨을 돌리며 오늘 산행의 핵심개념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다. 문제는 하나다. 이 호암산은 한양도성을 넘보며 으르렁거리는 호랑이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 무서운 기운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넘치거나 모자란 것을 보완해주는 비보풍수의 원리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려 할 때 가장 크게 기댄 것도 풍수지리요, 가장 크게 두려워한 것도 풍수지리다. 그처럼 풍수지리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 확고부동한 상수(常數)였다. 개인의 살 집을 정할 때도, 마을이 들어설 자리를 정할 때도, 심지어 한 나라가 망하고 또 다른 나라가 일어설 때도 풍수지리는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성계가 한양천도를 감행할 때 내세운 중요한 명분들 중의 하나가 “고려의 개성은 이제 그 기운(地氣)이 다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백악을 주산으로 삼아 한양에 자리를 잡으려 하니 몇 가지의 산세(山勢)가 영 눈에 거슬리고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이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보다 현저하게 낮다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그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마주보이는 관악산의 산세다. 불의 기운(火氣)이 너무 강해 도성을 태워버릴 듯 했던 것이다. 게다가 관악산 자락의 오른쪽 끝(백악에서 볼 때)에 있는 한 봉우리는 그 모습이 으르렁거리는 호랑이와도 같아 두렵기 짝이 없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오르고 있는 호암산이다.
자연의 산수(山水)는 주어진 조건이다. 그 풍수지리를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포기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 조상들은 절묘한 해법들을 찾아냈다. 주어진 풍수에 인간의 의지와 노력을 더하여 그 기운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강한 것은 깎아내려 부드럽게 만들고, 약한 것은 북돋아 강하게 만든다. 심지어 없던 것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산이 필요한 곳에 흙과 돌을 쌓아 산이라 부른다. 그것이 가산(假山)이다. 물이 필요한 곳에는 연못이라도 파서 수기(水氣)를 보충한다.
절묘한 해법들의 리스트에는 끝이 없다. 음기(陰氣)가 지나치게 강한 곳에는 양기(陽氣)의 상징물을 세워 그를 위무한다. 보기 싫은 흉물 앞에는 숲을 만들어 시야를 가린다. 산이 아이를 업고 달아나는 형국을 하고 있으면 그 앞에 떡집들을 차리고 고개 이름을 떡재라고 붙인다. 이와 같이 넘치거나 모자란 풍수를 보충하여 인간에게 이롭게 만드는 것을 비보풍수라고 한다. 풍수지리의 원리를 꿰뚫어 공생을 꾀하는 인간의 놀라운 지혜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의 선조들은 관악산의 화기와 호암산의 호환 역시 그런 식으로 다스려 나갔다.
호암산 능선 위에는 거대한 인공우물이 있다
칼바위 전망대에서 조금만 더 능선을 오르면 이내 탁트인 개활지가 나타난다. 대략 해발 300미터 정도에 해당하는 지역인데 이곳에 길이 22미터 폭이 12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인공우물이 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명칭은 한우물이다. 보다 그윽한 옛이름으로는 천정(天井), 용복(龍伏), 용추(龍湫) 등이 있다. 용이 웅크리고 있거나 승천하는 하늘 우물이라니 참 멋진 이름이다. 그런데 왜 이 산꼭대기에 인공우물을 만들었을까?
이 우물의 최초 축성은 신라시대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보수 확대되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용도는 대략 세 가지이다. 첫째,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였고 그래서 호암산성이 있었다. 따라서 산성 내에 주둔하던 군인들을 위한 식수의 용도로 쓰였다. 둘째,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한 소방수의 용도로 쓰였다. 셋째, 나라에 가뭄이 지속될 때 기우제를 지내기 위한 용도로 쓰였다.
풍수지리에 능통한 사람들을 풍수사(風水師)라고 한다. 일부 풍수사들은 여기에 덧붙여 색다른 이론을 펼치기도 한다. “호랑이는 물을 좋아하는 동물이다. 그러므로 물을 풍부하게 주어 그를 달래려고 했다.” 관악산의 화기를 억누르기 위하여 거대한 우물을 조성하였다 정도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지나친 주장은 억지로 들린다. 한우물은 실제로 임진왜란 때 군용식수로 쓰여 단단히 제 몫을 다한 적이 있다.
이것은 해태인가 호랑이인가 사자인가 개인가
서울대학교 학술조사단이 이 한우물에서 본격적인 발굴작업을 한 것은 1990년의 일이다. 그때 발굴된 흥미로운 유적들 중의 하나가 ‘석구지(石拘池)’라고 새겨져 있는 석축이었다. 현재 이 돌은 복원된 한우물의 석축들 사이에 끼어 있다. 뒤집혀진 상태로 끼어 있는데 그것은 발굴될 당시에도 뒤집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자를 곧이곧대로 읽으면 ‘돌로 만든 개의 연못’이다. 한우물에서 약 5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현재의 석구상을 지칭하는 표현임에 틀림없다.
석구상은 미스터리한 조각품이다. 이번 인문산행을 계기로 하여 호암산과 석구상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모든 고문헌들을 샅샅히 살펴보았다. 최초의 기록은 [동문선](1478년)에 나오는 윤자(尹慈)의 호암설이다. 이후 [가람고],[범우고](18세기 말), [경수당전고] 시흥잡수(19세기 중반), [경기지] 시흥현도(1842년), [시흥군읍지](1899년), [삼성산삼막사사적](1910년), [경기시흥읍지] 형승조(1956년), [금천구 향토문화지](1996년), [석구상 안내문](1996년 이후) 등에 나름대로의 정의와 해석들이 난무하는데 모두가 제각각이다.
이것이 경복궁 앞의 해태상과 대를 이루는 해태상이라는 주장도 있고, 기운 빠진 호랑이라는 주장도 있고, 호랑이를 위협할 수 있는 사자라는 주장도 있고, 호랑이와 친하게 지내라고 붙여준 개라는 주장도 있고, 호랑이 잔등 위에 올라탄 개라는 주장도 있다. 나를 가장 크게 웃게 만든 것은 [한국의 성석](푸른숲, 1997)에 실려 있는 조자용과 윤열수의 주장이다. 그들은 이것이 분명한 호랑이이며, 그것도 기진맥진하여 성기가 축 늘어진 얼빠진 호랑이라고 확신했다. 그러고 보니 석구상의 뒷다리 부분의 모습이 조금 의심스럽기는 하다.
나는 비공식적(?)으로 몇몇 참가자들에게 은밀히 물어보았다. 저게 무엇처럼 보이시나요? 그들은 비로소 뒷다리 부분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이내 웃음부터 터뜨렸다. 이때의 웃음은 산행을 마무리할 때 다른 방식으로 변주된다. 서울대학교 호수공원에는 이 호암산 석구상의 복제본이 있다. 그들은 이런 논란(?)을 불식시키려는 듯 원본에는 없는 뒷다리의 발가락 모양을 선명하게 새겨넣은 것이다. 하지만 민중들은 석구상의 뒷다리 부분을 일종의 남근석으로 인식한 것이 분명하다. 석구상 바로 앞과 작은 능선 너머의 대칭되는 곳에 형성되어 있는 제법 큰 성혈(性穴)들의 존재가 그것을 증명한다.
호압사의 금강역사는 호랑이의 아가리를 찢고
호암산 정상 암릉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일행들은 이제 호압사로 내려간다. 현직 경찰공무원이며 한국산서회의 회원인 김태규는 풍수사이자 생활수맥상담사로 활동하고 있는 풍수지리 전문가이다. 그는 호암산 정상 부근의 호암(虎巖)에서 호압사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한다. “저곳은 본래 절이 들어설만한 자리(穴)가 아닙니다. 별개의 목적을 가지고 지은 비보사찰임에 틀림없습니다.”
호압사(虎壓寺)는 이름 그대로 호암산의 호랑이 기운을 제압하기 위하여 세운 절이다. 이성계의 꿈 속에 호랑이가 등장하여 자꾸만 경복궁을 때려 부수기에 그를 제압하기 위하여 산 아래 있던 절을 산 중턱으로 끌어올려 중창한 것이다. 호압사의 특이한 벽화는 이 절의 창건신화를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라한 혹은 금강역사가 호랑이를 제압한 채 타고 앉아 아가리를 찢고 있는 역동적인 모습이다. 어르고 달래고 막고 제압하고...호암산의 풍수를 비보하려는 선조들의 노력들이 참으로 눈물겹다 할만하다.
호압사 앞 산비탈 쉼터에서 짧은 강의가 이어진다. 이왕 풍수지리를 논하는 자리이니 우리 산수의 제대로 된 골격을 알아보자는 취지로 마련한 신경수 회원의 산경표 강의다.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강의를 경청해준 참가자들이 참으로 고맙다. 이제 다시 일어나 길을 떠나야 한다. 관악산 둘레길을 따라 성주암에 들렀다가 서울대학교 교정 안으로 들어서려면 발길을 서둘러야만 한다.
월간 [산] 201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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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한국산서회와 함께 하는 인문산행 안내
도봉산의 바위글씨들을 찾아서
일시> 2017년 12월 2일(토) 아침 10시
장소> 지하철 [도봉산역] 1번 출구에서 횡단보도 건너 우측 쉼터
코스> 도봉동천-산악박물관-도봉서원-문사동 계곡-용어천 계곡-천축사-도봉산장
신청> 다음카페 한국산서회 게시판(http://cafe.daum.net/peakbook)을 이용
첫댓글 후기 감사드립니다.
굿~~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제 후기 오늘 완성했는데 작성하기 전에 읽어보고 참고할 것을...ㅎㅎ
요즘 카페에 들어오질 못했네요.
하하하 산짱님 별말씀을요!
월간 [산]에서 제공하는 지면이 너무 작아
상세한 이야기를 쓰지 못합니다
산짱님의 블로그 글을 잘 읽고 있습니다...ㅎㅎ
역시 작가님의 깔끔한 정리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