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시(三時) 세 끼 내 주식(主食)이 소위 ‘꿀꿀이죽(일명 잡탕)’으로 된 것이 언제부터 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꽤나 오래된 것만은 분명하다. 별것이 아니다. 그냥 식탁 위에 올라 있는 반찬들을 주섬주섬 냄비에 적당히 넣고 덥건 차건 밥 두어 숟갈 넣어 부글부글 끓인 것이다. 그날그날 넣은 것들의 종류에 따라 짠맛, 시거나 단 맛 등등 온갖 맛이 나지만 간만 적당히 맞추면 일미(一味)가 아닐 수 없다. 내게는…. 그래도 반찬 가짓수를 헤아리면 열 서너 가지는 되고 가끔은 국수나 라면가락이 보일 때도 있다. 그 유래를 더듬어 본다.
1969년 실습생의 딱지를 떼고 처음 취업을 했을 때다. 800톤급 최신식 트롤선(Trawler)으로 일본에서 막 신조한, 선명(船名)은 No.11 한일호의 2등항해사로 승선했었다. 당시 최신식 장비와 설비를 갖추고 신조(新造)한 선박으로 웬만한 가정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던 수세식 양변기가 설치돼 있었다. 사업자는 ㈜한일수산으로 경영자는 서울농대 출신의 유능한 젠틀맨이라 들었지만 만나 보지는 못했다.
당시 우리나라 수산기업으로선 획기적인 시도였지만 어려운 시절이기도 했다. 5·16 혁명 이후 한참 어지러웠던 기업들의 정리와 새로운 국가 산업을 위한 새로운 기획들이 뒤엉킨 때였다.
* 트롤선(Trawler) : 전개판(展開板)이 달린 자루 모양의 그물을 끌어서 고기를 잡는 어업선.
그런데 이 선박을 발주, 구입하여 부산 남항(지금의 부산공동어판장 자리)의 방파제 앞에 정박해 두고 통관(通關)절차를 밟고 있는 중 회사가 부도를 내고 말았다. 선주(船主)가 없는 배가 되고 만 것이다. 다행히 담보은행이었던 조흥은행이 임시로 관리자가 된 셈이었다.
불실기업 정리 차원에서 기업들을 단속하던 때였으니 용코로 걸린 셈이다. 당시 청와대를 비롯하여 불실기업정리반, 재무부, 수산청 등등 관계기관에 내 손으로 수십 통의 진정서를 직접 작성, 우송하기도 했는데 그 답신들이 물 위에 떠 있는 선박에도 전달이 되었다. 그 덕분에 은행에서 현재 선박관리를 위해 승선 중인 일부 선원들에게는 일정한 급료와 유류대 등 최소한의 관리경비를 받게 되었지만, 당시 막 개척된 소련 캄차카반도 옆 소위 ‘북양어장(北洋漁場)’의 경기(景氣)를 고스란히 놓친, 참으로 안타까운 1여 년 가까운 세월이기도 했다.
바로 이 시기였다. 원래는 잠시도 쉴 참 없이 어구 제작, 수선 등 작업에 메달려야 하지만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통관조차 못했으니 어구와 장비는 물론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저 바람이나 조류(潮流)에 선박이 떠밀려 손상되지 않도록, 도둑이라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경비역할이 전부였다.
사관(士官)들과 선원들은 나누어 조(組)를 짜고 조별로 출퇴근했었다. 배에서 당직 선원이 ‘땜마’(거룻배의 일본어)로 노를 저어 육상을 왕복하였다. 아침 일과 점검이 끝나고 별일이 없는 사관들은 거룻배를 타고 주위의 바다에서 낚시를 했다. 출근할 때 갈치에 많았던 낚시점에서 새우 50원어치를 사 들고 오면 그걸 미끼로 걸리는 대로 낚아 올렸다. 별의별 것들이 올라왔다. 점심때쯤 마치면 많건 적건 횟감으로 혹은 찌게 재료로 쓰인다. 그리곤 당시에 유행했던 ‘독소주’에서 따뤄 낸 댓병 소주였다. 안주의 다수에 관계없이 ‘한 병’ 이었다.
본선과 육상을 잇는 거룻배가 닿고 내리는 곳이 마침 지금의 부산공동어판장 넓은 자리는 텅빈 공터였고, 거기에는 넝마주이들의 집단 생활터였다. 그 넓은 터에 군데군데 땅바닥에 붙듯이 나즈막한 움막 같은 걸 치고는 애들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그 속에서 살았다.
아침 일찍이 애들은 깡통을 들고 밥을 빌러 나간다. 마침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당시 부산에서는 속칭 ‘도둑넘촌(부자촌)’이라 불리던 서대신동이 있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성 싶었다.
청년 몇몇은 큰 냄비 솥 두 개에 마른넝마를 태워 물을 끓이고 있다가 애들이 가져오는 깡통에 든 것을 보지도 않고 무조건 들입다 붓고는 긴 자루의 주걱으로 휘휘졌기만 했었다. 흰쌀밥은 물론 당시로선 보기 힘든 소고기 · 돼지고기, 닭고기에다 속살이 하얀 고급 생선토막들이 뼈를 문 채로 섞여 있었다. 마치 성난 내 뭣 같이 둥그스럼하면서 길죽한 것이 처음 보는 것이라 “이게 뭐꼬?” 하면 “그거 소세지요, 항해사님은 그것도 모르요?” 하는 떠꺼머리 꼬마 넝마들의 핀잔을 듣고 속으로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저들이야 늘 보고 먹으니까 알지 처음 보는 내가 알 턱이 있나. 아닌 말로 ‘없는 것이 없다’ 할 정도로 다종다양(多種多樣)한 재료들이 펄펄 끓는 물과 함께 냄비 속에서 곤두박질을 친다. 이렇게 푹 끓인 걸죽한 잡탕죽이 그네들의 주식으로 하는 속칭 ‘꿀꿀이죽’이었다. 반찬은 소금 접시나 간장 종지 둘 중 하나면 됐다. 주걱으로 젓던 젊은이들이 대강 물과 불로 간은 맞추었으니 그 이상은 각자의 입맛에 맞추라는 뜻이다. 익을 대로 익어 김치나 콩나물이 물렁하도록 고인데다 들건 다 들었으니 영양이나 소화는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세월따라 차츰 면이 생기고 교류가 익어감에 따라 수시로 그릇만 들고, 아니면 몸만 때맞춰 가면 한 그릇 얻어먹을 수가 있었다. 특히 전날 밤의 숙취(宿醉)라도 있은 날은 집 나설 때 아침밥을 제대로 못 먹고 나온 터에 여길 찾아 바로 국물을 넉넉히 하여 한 그릇 얻어 주위의 쓰레기 더미를 쓱 밀치고 그들 속에 끼어 바닥에 앉아 훌훌 불며 마시면 속히 확 풀리며 시원하게 불어오는 아침 바닷바람과 더불어 눈이 번쩍 뜨이게 해준다. 그날 하루의 에너지가 충전되는 셈이다. 그러고는 배에 출근했다.
이 맛은 그 후 한참 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승선 중에도 가끔 멀미 끝에 식욕이 어중간 할 때, 그때를 그리며 손수 이것저것 둘둘말아 냄비에 넣고 끓여 먹거나, 싸롱보이에게 작은 냄비 하나 갖고 오라고 하고는 식탁 위에 가지런히 정성드려 차려둔 밥과 반찬을 털어 붓고는 부글부글 끓여 선교(Bridge)나 침실로 가져오라곤 했다. 못 마땅한 듯 둥그란 눈을 하고 쳐다보던 싸롱보이의 눈길이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 싸롱보이 : 고급(高級) 사관들의 식사 시중을 드는 직책.
반 백년의 세월 따라 오랫동안 잊혀졌었다. 그런데 나이가 듦에 따라 심신 변화가 오기 시작하자 맨 먼저 느낀 것이 이빨이었다. 요즘 너 나 없이 이 나이에 개수는 다를망정 임플란트로 몇 개씩 교체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빨은 멀쩡한데도 씹기가 불편하고 힘이 들었다. 나이탓이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총각무 김치에 갑자기 신경이 쓰이기도 했고, 이것저것 젓가락질 하기도 귀찮스럽게 여겨진다. 마음이야 ‘이거 쯤이야…’ 하면서도 그렇다.
문득 생각난 게 바로 이 ‘꿀꿀이죽’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굵은 침 한덩이가 목줄기를 넘어갔다. 그래서 일상(日常)에서 시작한 것이 기억에도 없을 만큼 한참 된 느낌이다. 우선은 씹는데 신경 쓸 필요없이 물렁해서 그냥 입 속에서 오래 우물럭거리기만 하면 되고 반찬투정 할 필요도 없다. 처음에는 마누라도 마치 ‘싸롱보이’와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차츰 잔소리가 없어져 좋다. 부엌은 오래전부터 내 사무실 다음가는 일자리였으니까 해달라고 할 필요도 없다. 아마도 80 중반으로 접어드는 지금까지 '입맛'이나 '밥맛'이 없지 않고 잘 견디는 것도 이 덕분이 아닌가 짐작도 한다.
요즘은 각가지 전동(電動)기기들이 많아 믹스다 뭐다 해서 썰고 갈고 익히는데 손가락만 까딱하면 되는 시절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서는 음식의 맛이 나질 않는 것이 우리 세대다. 소위 손맛이라는 것 때문이다. 비슷한 연배의 분들에게 추천, 권장해 드리고자 한다.(계속)
첫댓글 출발 부터 힘든 시절이였네요.30살 청년실업자? 우리의 인생이 누구에게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고 합니다.시작부터 겨울이였나? 그래도 곧 꽃피는 봄이 왔을꺼지요*^*
가슴 먹먹.
눈물 찔끔.
사서 고생한다고 했던가. 바로 늑점이님처럼.
항해일지를 곁에 두고 때때로 읽고 있음은 친구 서완수님이 난해하기 때문.^^
덕분에 동경의 바다 생활이 얼마나 힘겨운 것인가 정이 뚝 떨어졌습니다.ㅎ
장암 따라 바다 속에서 노닐고 있는 것이 아니더라구요.
배멀미에 꿀꿀이 죽이라니.....상상불허.
앞으로 전개 될 고난도 생활이 '이상한 나라의 늑점이'가 될 것 같습니다.ㅋ
힘겨운 일상을 해학적으로 표현해 주셔서 마음 푸근해졌습니다.
지금처럼 늘 강건하소서. 늑점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