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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 스크랩 화가 오지호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길(1)
hyung 추천 0 조회 233 11.12.24 16:0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 예술혼으로 타오르다> (1) 빛과 색채의 마술사 오지호

남도예술 뒷골목엔 술과 恨, 그리고 역사가 있었다
인상주의 화풍 남도화단에 정착
지역출신 박근호ㆍ김두제와 유학

 

입력시간 : 2007. 08.04. 00:00



 

김홍식 작 욕장 73.5 x 60.7 1958년.

남도 근대예술은 1930년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화단은 의재 허백련과 서양화가 오지호에 의해 움이 돋았다.

한국화의 토양은 소치의 진도 운림산방과 학포의 화순 능주에서 비롯됐고,

서양화는 이데올로기의 틈바구니에서 고초를 겪었던 오지호의 손끝에서 피어났다.

문학 역시 유배의 한이 바탕에 깔려있다. 해남, 목포, 강진, 담양 등지에서

한(恨)은 문학으로 꽃피워졌다.

가요사에는 '목포의 눈물'로 세기를 풍미한 목포의 이난영이 있으며 광산에서는

국악의 천재 임방울이 전국을 평정하며 발화했다. 남도땅에는 화려하게, 때로는

슬프게 피고 진 천재 예인들의 한과 사연이 숨어있다.

오늘, 남도 예술의 뒷골목에는 무슨 사연이 진행되고 있길래 이토록 고요한 것일까.

 술과 한(恨), 온갖 기행과 역사가 명멸하는 거리, 남도 예술의 뒷골목을 거닐어본다.

편집자 주

★ 호남 최초의 서양화가 김홍식

근대 남도 서양화단의 구상계열은 오지호에 의해 본격적으로 뿌리내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업하는 오지호 화백.


오지호에 앞서 호남 최초의 서양화가는 김홍식(1897-1966)이다. 여수 태생 김홍식은

 당시 미술학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유학(1924∼1928)해

서구식 정규미술수업을 받은 호남 최초의 인물이다. 김홍식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경성제일고보를 다니면서 일찍이 개화 문물에 눈을 떴다. 그러나 법조인이 되기를 바라는

부친의 뜻을 저버리고 화가의 길을 선택한 탓에 부친이 작고한 40대 중반에야 비로소

'여수 미평'에 화실을 갖고 작품에 전념할 수 있었다.

뒤늦게 작품에 전념했으며 화단활동에도 소극적이었던 탓에 그는 남도화단에 특별한

자취를 남겨 놓지는 못했다. 생전에 전람회를 가진 적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 주변인이나

친인척들 사이에 일부 그림이 소장돼 있다. 다행히 동경예대 자료관에 그의 대학졸업작품인

'자화상'(1928)이 보관돼 있어 그나마 초기 작풍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 오지호ㆍ박근호ㆍ김두제 동경미술학교 유학

오지호가 본격적으로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전주고보에서 1921년 서울 휘문고보로

전학하면서부터다. 당시 휘문고보에는 일본 유학 1세대인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있었다. 오지호의 최초 스승인 셈이다.

오지호는 1925년 휘문고보를 졸업한 후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가와바타미술학교(川端畵學校)에 들어가 일 년 동안 노력한 끝에

이듬해인 1926년에야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재수 끝에 합격한 것이다.

 

고희동 작 부채를 든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61 x 45Cm 1915년.


오지호는 가와바타시절 후지시마의 교실에서 공부했는데, 후지시마는 외광파의 선구적

화가 구로다 세이키의 영향을 받은 화가였다. 처음에는 낭만주의적인 문학성, 도는

장식성이 강한 그림을 그렸다. 이후에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수학한 후 직관과

데생력을 토대로 대상을 단순화시키고 거친 붓질로 순도 높은 원색을 즐겨 사용했다.

오지호가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한 해인 1926년에 그린 '잔설(殘雪)'은 습작이지만

활달한 붓질과 대담한 묘사에서 후지사마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동경미술학교에는 국내 첫 서양화가인 고희동이 졸업하던 1915년부터 해방직전인

1944년까지, 서양화과 46명을 포함해 총 63명의 한국인이 이곳을 졸업했다.

광주ㆍ전남에서는 서양화과에만 김홍식을 비롯 오지호 박근호, 김두제 등 4명이

이 학교 출신이다. 오지호는 이곳에서 수학해 ‘빛과 색채의 회화’로 불리는 한국적

인상주의 화풍을 남도화단에 정착시켰던 것이다.

글=김현석


◇ 김현석씨 약력

△ 목포 출생
△ 조선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졸업
△ KBS 방송작가교육원 1기 수료
△ 1989-1998 문경 봉암사 등지의 선원에서 선(禪)수행
△ 문예춘추 신인상 수상
△ 시집 ‘바람의 노래’출간
△ 요가코리아, 행복채널 편집장 역임



■ 한국 서양화가 1호 고희동
화가 오지호 최초 스승
'자매' 作品 서양화 효시

 춘곡(春谷) 고희동은 1886년 3월 11일 서울 종로구 원서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열 세살 때 프랑스 말을 배우는 한성법어학교에 입학했다.

그 곳에서 어느날 프랑스 도자기 전문가인 레미옹이 그의 은사 마르텔의 초

상화를 스케치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 때의 감동을 그의 아내 조혜임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마르텔 선생님이 마치 종이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 했소."
 그는 당시 동양화가로서 유명한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의

문하에 들어가 그림을 배웠다.

 이 무렵의 한국화단은 전통의 답습과 중국 화풍의 모방 일색이었다.

고희동은 개탄하며 레미옹이 그리던 마르텔의 초상을 머리에 떠올리다가

마침내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그는 마침내 1908년 4월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 입학해 서양화에 대한

이론에서부터 실기에 이르기까지 근 5년 동안 공부한 뒤 1914년 3월 한국에 돌아왔다.

 고희동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자 매일신보 사회면은 ‘서양화가의 효시’ 란

제목으로 그의 졸업작품 ‘자매’를 사진화 해 톱기사로 게재했다.

 그의 작품 ‘자매’는 한국인이 국내에 발표한 최초의 서양화가 되는 셈이다.

 그는 이때부터 도화선생이라는 이름으로 교단에 섰다.

   서양화의 씨를 심어보겠다는 열의에서였다.

 1915년부터 휘문·보성·중동 등의 학교에서 서양화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해(1915) 9월 조선물산공진회에 미인화를 출품했다가 친일작가로 낙인 찍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서양화를 전시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는 1920년대 중반기에 이르러 유화 작품 '습작'을 끝으로 다시 동양화로 전향을 하고 만다.

 전통적인 남화 산수화법에 서양화의 색채ㆍ명암법을 써서 감각적인 새로운 회화를

시도했다. 1949년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으며, 그의 장례는 예총장으로 치러졌다

 

자료출처 - 전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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