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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근대예술은 1930년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화단은 의재 허백련과 서양화가 오지호에 의해 움이 돋았다. 서양화는 이데올로기의 틈바구니에서 고초를 겪었던 오지호의 손끝에서 피어났다. 한(恨)은 문학으로 꽃피워졌다. 국악의 천재 임방울이 전국을 평정하며 발화했다. 남도땅에는 화려하게, 때로는 슬프게 피고 진 천재 예인들의 한과 사연이 숨어있다. 술과 한(恨), 온갖 기행과 역사가 명멸하는 거리, 남도 예술의 뒷골목을 거닐어본다.
당시 미술학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유학(1924∼1928)해 서구식 정규미술수업을 받은 호남 최초의 인물이다. 김홍식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경성제일고보를 다니면서 일찍이 개화 문물에 눈을 떴다. 그러나 법조인이 되기를 바라는 부친의 뜻을 저버리고 화가의 길을 선택한 탓에 부친이 작고한 40대 중반에야 비로소 '여수 미평'에 화실을 갖고 작품에 전념할 수 있었다. 자취를 남겨 놓지는 못했다. 생전에 전람회를 가진 적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 주변인이나 친인척들 사이에 일부 그림이 소장돼 있다. 다행히 동경예대 자료관에 그의 대학졸업작품인 '자화상'(1928)이 보관돼 있어 그나마 초기 작풍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전학하면서부터다. 당시 휘문고보에는 일본 유학 1세대인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있었다. 오지호의 최초 스승인 셈이다.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가와바타미술학교(川端畵學校)에 들어가 일 년 동안 노력한 끝에 이듬해인 1926년에야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재수 끝에 합격한 것이다.
화가 구로다 세이키의 영향을 받은 화가였다. 처음에는 낭만주의적인 문학성, 도는 장식성이 강한 그림을 그렸다. 이후에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수학한 후 직관과 데생력을 토대로 대상을 단순화시키고 거친 붓질로 순도 높은 원색을 즐겨 사용했다. 활달한 붓질과 대담한 묘사에서 후지사마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1944년까지, 서양화과 46명을 포함해 총 63명의 한국인이 이곳을 졸업했다. 이 학교 출신이다. 오지호는 이곳에서 수학해 ‘빛과 색채의 회화’로 불리는 한국적 인상주의 화풍을 남도화단에 정착시켰던 것이다.
그 곳에서 어느날 프랑스 도자기 전문가인 레미옹이 그의 은사 마르텔의 초 상화를 스케치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다. "마르텔 선생님이 마치 종이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 했소." 문하에 들어가 그림을 배웠다. 고희동은 개탄하며 레미옹이 그리던 마르텔의 초상을 머리에 떠올리다가 마침내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이론에서부터 실기에 이르기까지 근 5년 동안 공부한 뒤 1914년 3월 한국에 돌아왔다. 제목으로 그의 졸업작품 ‘자매’를 사진화 해 톱기사로 게재했다. 서양화의 씨를 심어보겠다는 열의에서였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서양화를 전시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시도했다. 1949년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으며, 그의 장례는 예총장으로 치러졌다
자료출처 - 전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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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붓꽃의 작은 오솔길 원문보기 글쓴이: 붓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