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 자락에 위치한
이산헌( 以山軒)
이산(以山)이라는 호는 문학작품에서는 어떻게
사용되었을까 궁금해서 찾아보았습니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93)이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84)에게
보낸 한시 한 수가 있었는데 "산과 같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대 뜻이 산 같아 굳게 움직이지 않고 (君意如山堅不動)
내 마음 물 같아 가서 돌아오기 어려워 (我心如水去難回)
물 같고 산 같음이 모두 이 운명이려니 (如水以山俱是命)
서쪽 바람에 머리 돌려 홀로 서성일 뿐 (西風回首獨徘徊)
덕유산 자락에 위치한 이산헌(以山軒)
심지(心地)를 한 곳에 굳히고 쉽게 움직이지 않는
산과 같은(以山) 우직함으로 삶을 새겨나가는 곳
위의 시는 송강 정철과 율곡 이이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양에서 친구를 상징할 때는 관중(管仲)과 포숙(鮑叔)를 연상한다. 조선조에서는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과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을 절친한 친구로 떠올린다. 반면에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송강(松江) 정철(鄭澈)과의 남다른 우정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다.이이(李珥1536~1584)와 정철(鄭澈1536~1593)은 동갑이지만 율곡 이이 선생이 10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은 끼리끼리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린다는 말이다. 그러나 율곡과 송강은 같은 서인(西人)이지만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율곡은 차분하고 이성적(理性的)인 반면 송강 정철은 직선적(直線的)이며 다혈질(多血質)의 성품이었다. 이렇듯 율곡과 송강은 다른 성격이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진심의 우정은 같았다.
송강은 술에 취하면 옆 사람의 수염을 잡아당기는 등 실수가 많았다. 이럴 때마다 율곡은 항상 송강을 변명하여 위기를 모면하여 주고 정철에게는 친구로서의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성격이 직선적인 송강은 서인(西人)으로서 기축옥사(己丑獄事 정여립 모반옥사)를 맡으면서 동인(東人)에게 가혹하게 하여 “동인백정(東人 白丁)”이라는 악명을 얻기까지 했다.
서인(西人)인 정여립(鄭汝立)이 동인 쪽에 가담해 모반을 일으키려 할 때 송강이 먼저알고 선조에게 보고하여 난을 평정한 것이다. 정여립(鄭汝立)은 율곡의 제자였기 때문에 송강과 율곡은 사이가 나빠질 수도 있었다. 율곡은 이런 송강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이해하는 친구였다. 율곡과 송강의 인연을 역어준 사람은 당시 시문학에 이름이 높던 노재(魯齋) 이희참(李希參)이라는 사람인데 관직에 나가지 않아서 노재집(魯齋集)만 전하고 다른 프로필은 알 수가 없다.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했던 율곡은 송강보다 10년을 먼저 저세상으로 갔다. 송강은 율곡을 잃은 슬픔 앞에서 거의 절망하다 싶이 했다. 송강의 슬픔은 친구 율곡의 충고를 실천하지는 못한 것이 더욱 가슴 아파 했다. 같은 서인(西人)이면서도 대사헌 정철(鄭澈)은 이이(李珥)와 동서(東西) 의견 충돌로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그것은 온유한 율곡에게 송강의 충동적인 사고가 수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송강은 율곡과의 의견차이의 안타까움을 위의 시로 표현했다고 한다.
<출처 http://cafe.daum.net/PoemRiver>
첫댓글 이산헌.
주로 집의 당호는 재 또는 당. 옥을 쓰던데 헌은 어떨때 쓰나요? 우공이산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다보면...
깃발도사님! 잘지내시죠 ^^ 아침저녁으로 일교차가 심하니 건강 유의하세요~ 깃발도사님의 질문으로 저도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堂은 관리의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齋는 학문을 돈독히 하고 종교적인 성향이 짙은 집안에서 사랑채의 당호로 齋를 넣어 이름 짓기를 즐겨 하였다고 합니다. 軒은 자연을 즐기는 이들이 자신의 집 사랑채 당호에 사용하기를 즐겼다고 합니다.당호를 부치는 주인의 심성이 어떠냐에 따라 자유스럽게 선택하거나, 더러는 다른 사람이 지어주는 경우도 있어서 일률하여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외에 書室, 山房, 書房등을 채택하기도 하였습니다. (출처: 한옥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