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의 명문가 탐방기(探訪記)
최 창 근(崔昌根)
포천시 군내면 명산리에는 1621년(광해13년 4월 26일)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금교역(金郊驛-지금의 황해도 금천(金川)에 있는 역참(驛站)에서 60세에 순직한 창주공의 묘소가 있다. 공의 자손들이 시신을 지금의 명산리에 안장을 하고 묘전에 마을을 이루고 살아 온지가 400여년이 되었다.
창주공은 고려조 공민왕때에 어사대부 태학사를 지낸 도촌공(挑村公) 이교(李嶠)의 십세손으로 1562년 명종 17년 (임술년) 8월 15일 조부(祖父) 사촌공(沙村公) 운손(雲孫)의 4자(四子) 정려(精瓈, 자(字) 계온(季溫))과 문화 유씨(文化 柳氏) 사이의 2자(二子)로 삭녕(朔寧)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덕재(德哉), 호(號는) 창주(滄洲)이시다.
어려서부터 소학(小學)을 섭렵하고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생(門下生)으로 사부학당(四部學堂)과 성균관(成均館)에서 수학(修學)하면서 지(智) 인(仁) 용(勇)의 덕목(德目)을 쌓으셨다.
1589년 선조 22년에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한 것이 천재성을 나타낸 첫 번째이다. 이어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1592년 임진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滄州公은 이양원 장군의 종사관으로 재임중 서울이 적의 수중으로 넘어가자 부친과 함께 관북 경성으로 가서 북평사(함경도에만 있는 병사의 보좌관)로 있는 정문부(鄭文孚1565 명종20년출생 호 農圃 - 1624 인조 2년 옥사 -박흥구역모와 초회왕 영사시(詠史詩 )관련 추국청(推鞫廳)에서 모진 고문에 생명을 잃어가며 절개를 지킴. 시호(諡號-忠毅公)의 종사관이 되어 관군이 방어도 제대로 못하고 무너지자 정문부 장군과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의 정예군과 여섯 차례의 전투에서 전승하는 기록을 세워 임진왜란 4대첩의 하나가 되는 길주대첩의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이 때 격문에 의한 의병 모집 시에는 100여명에 불과하였으나 의병의 체제가 갖추어지고, 관아가 일본군에 점령되자 산속으로 피신해 있던 경성부사 정현룡(鄭見龍), 경원부사 오응태(吳應台), 경흥부사 나정언(羅廷彦), 고령첨사(僉使-조선시대 각 진영에 속한 종 3품의 무관으로 첨절제사의 약칭) 유경천(柳擎天), 군관 오대남(吳大男), 서북만호(萬戶-고려 조선조에 외침 방어를 목적으로 설치된 만호부의 관직. 백호 천호로도 불리었으나 鎭將의 품계와 직책등으로 변함) 고경민(高敬民), 전 만호 강문우(姜文佑) 등이 휘하의 잔류 병사들과 함께 의병에 합류하여 병력이 3천여명에 이르렀다.
정문부 의병장은 정 2품 종 3품의 현직관리와 전현직 만호가 의병에 합류함으로 의병장을 다시 선출하고자 하니, 정현룡 부사 등 모든 관리와 만호 등과 이성길 종사관께서 투철한 애국심과 통솔력과 지혜와 무술을 겸비하신 정문부 장군을 추천함으로 명실 상부한 의병장이 되었다.
지달원(池達源), 이붕수, 최배천 등 수백명의 관북 유림들이 동참하였다.
의병 대원 모두는 관직 본위가 아닌 애국충절(愛國忠節)로 무장하여 철저한 능력 위주로 조직을 정비하였다. 경성부사 정현룡, 경원부사 오응태를 좌우 부장(副將)으로 임명하고 선봉장에 유경천, 척후장에 만호 강문우, 창의별장에 이붕수로 진용이 갖추어 졌으며, 종사관인 이성길 공은 부관이나 작전참모역을 하였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에서 평소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봉기한, 반란 세력인 명천의 사노(寺奴) 정말수와 회령의 토관진무(土官鎭撫-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평안도. 함경도. 제주도 등지의 토착인들에게 주었던 특수 관직) 국경인(鞠 景 仁 ), 경성의 관노(官奴) 국세필 등이 반란을 일으켜 왜적과 내통을 하였다. 특히 국경인은 7월 23일 마침 회령에 머물고 있던 임해군(臨海君), 순화군(順化君) 두 왕자와 배종제신(陪從諸臣) 함경도 영중추부사 김귀영(金貴榮)과 윤탁연(尹卓然), 강원도 동지중추부사 이기(李旣)와 장계군 황정욱(黃廷彧)과 그의 아들 황혁(黃赫) 및 그의 가속(家屬)들과 남병사(南兵史), 회령부사 등을 포박하여 왜적에게 넘겨준 반란이 있었다. 이리하여 별 저항을 받지 않고 함경도를 점령하고, 두 왕자와 고관 대신을 사로잡게 된 가등청정(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의 기세는 날로 등등 하였다.
지휘 체제가 갖추어진 의병들은 1592년 9월 16일부터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갔다. 곧바로 경성부를 들이쳐 국세필 일당 13명을 처단하였고, 명천의 정말수를 잡아 참수형에 처하였다. 이전투를 창의진 의거(의병이 거둔 위대한 전공)라고 한다. 여세를 몰아 회령에 억류되어 있던 두 왕자와 배종제신(陪從諸臣)들은 회령의 유생 신세준(申世俊), 오윤적(吳允迪 )등과 연락이 되어 정문부 장군과 합세하여 국경인등의 목을 베어 두 왕자와 배종제신을 구출하게 된다.
경흥, 경성, 회령, 명천 등지의 전투에서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은 3,000여명이 사살되었으나 우리 의병의 피해는 경미한 상태였다.
함경도의 북병영(北兵營)과 북수영(北水營)이 있는 북방지역의 요새인 경성을 수복한 정문부 장군은 그동안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각 고을의 수령들이 거의 장군 휘하에 모여들고, 각 고을 전투에서 연전연승한 지대장 들과 의병들이 사기가 충천하여 결집하니 그 규모는 당초 모집한 시기의 의병 수(數) 3,000명 보다 훨씬 더 많았으며, 정예군이 되어 있었다.
음력 10월로 접어들자 함경도 지방에서는 한겨울이 된다. 추위에 익숙치 못하고 군량 준비가 부족한 왜군은 수시로 성을 나와 주변 마을을 돌아다니며 노무자 부녀자와, 식량 의류 가축 등을 약탈하여 월동준비를 한다.
10월 30일 길주성의 왜군 1,000여명이 성을 나와 해정(海汀) 가파리 쪽으로 가서 민가를 약탈하러 간다는 원충노의 보고를 받은 정문부 장군은 각 군에 통보하여 귀로(歸路)에 급습하기로 하고 좁은 길목을 택하여 매복을 시키었다. 오후 4시경에 약탈한 물건을 말과 소등에 가득 싣고, 경계도 허술한 상태로 길주성을 향해 장평석현(長坪石峴)을 넘으려 했다. 이들이 매복 지점에 이르자 원충노 한인제의 병력이 일제히 공격을 하였고 후미에 매복을 담당하였던 강문우 황사원 등이 뒤따라 무찌르니 포위망을 빠져나간 적군은 길주성 동편에 있는 장덕산으로 도망을 가자 이곳에는 고경민의 매복군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날의 전투에서 왜군 800여명의 목을 베었고 군마 118필과 조총 등 수많은 군수품을 전리품으로 획득하였다. 왜군이 약탈한 식량과 의류 가축 등은 모두 민가에 돌려주어 조종과 관에서 못하는 백성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일을 하였다.
정문부 장군의 의병 활동으로 길주성 북쪽의 함경도는 대부분 정상을 되찾았고 장군의 휘하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현직 부사 현감 첨사 만호 등은 현직에 복귀하여 임진왜란중 최초로 치안이 확보되게 되었다.
12월에 들어 함경도의 겨울 추위는 극에 달해 있었다. 정문부 장군은 길주성을 공략하여 탈환하려는 작전계획을 이성길 종사관과 함께 세우고 12월 10일에 3,000여명의 의병군으로 길주성을 외워 싸고, 길주성의 30리 남쪽 마천령 기슭의 영동관 책성을 지키는 왜군 400명의 지원 출동을 차단하기 위하여 정현룡, 유경천, 오응태가 인솔하는 3위군을 접근로에 배치해 두고 복병장 김국신(金國信)의 병력을 입구에 매복시켰다. 책성의 왜군 400명 전원이 의병군에게 포위된 길주성을 지원하기 위해 출발하다가 정문부 장군의 포위망 안으로 들어와 10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책성안으로 도망쳐 들어 갔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함흥에 주둔하고 있었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평양성에 주둔하고 있는 동안 조선 관군과 명나라 지원군의 합동 작전으로 1593년 초 평양성이 회복되고 왜군이 퇴각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전공 1등 공신이 되려고 혈안이 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길주성의 주력부대가 조선 의병군에 의하여 포위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직접 2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마천령을 넘어 영동의 왜군과 합세하여 의병군대를 섬멸하고 길주성의 왜군을 구출하려고 도착해 있었다.
이러한 첩보를 받은 정문부 장군은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길주 임영(臨溟-지금은 함경북도 김책시 임명동)에 거점을 삼고 매복하였다. 얼마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정예부대가 임명에 이르자 정문부 장군은 복병을 움직여 그 후미를 부장(副將) 정현룡과 오응태의 돌격대에 공격 명령을 내려 필사적으로 공격하였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또한 필사적으로 응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전멸할 위기를 깨닫고 60여리를 퇴각하면서 길주성 안으로 들어가, 수 천구의 왜병 시신을 불태우고 밤을 이용해 도주하였다. 이 전투가 바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왜군을 함경도에서 완전히 패주시킨 백탑교전투(白塔郊戰鬪)이다.
병력 규모가 3,000명 정도였고 정규 군사훈련을 받은 바도 없는 의병군사들이 조총(鳥銃)으로 무장한 당시 세계 최강의 정예군단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23,000여 병력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섬나라 오랑캐 군사에게 아름다운 강토와 조국을 넘겨줄 수 없다는 애국 충절심에 불타 있었고, 지휘력이 탁월한 장군 밑에 지혜와 재능과 전략 전술에 능한 이성길 창주공 같은 종사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되어 머리가 숙여진다.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10월 30일자 기록에는 그 전술을 추측할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의병들은 함경도의 추운 날씨와 험난한 지형을 이용했고, 상대적으로 앞선 화력을 지니고 있는 일본군을 차단하기 위해 병력을 분산시킨다거나 한데 집결하여 적재적소에 활용한 작전을 구사한 것이 정문부 장군과 이성길 종사관의 의병이 이상 6회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이와 같이 임진년 당년으로 함경도의 주권과 영토를 되찾았고, 고려시대 윤관 장군의 9성설치와 조선조 초기 김종서 장군의 6진 개척을 통하여 넓혀진 영토이며 조선 정부의 발상지이면서 변방 취급을 당하고 각종 불이익을 감내하며 살아온 함경도에 행정권이 미치게 하였고,(각종 세제 교육기관설치 자체방위 -土官鎭撫 등시행) 여진족의 빈번한 침입을 막는 등의 큰 공을 세웠으면서도 역사의 조명을 받지 못한 것은 임진왜란 7년의 전쟁이 끝난 당시 함경도 관찰사였던 윤탁연(尹卓然)에게 정문부 의병장이 거슬려 미움을 샀고, 그에 의하여 전공이 삭감되고 날조되어 보고되었으며, 그후 정문부 장군은 진주부윤, 전주 부윤 등 관직에나아갔으며, 박홍구 역모사건과 진주 부윤시 지은 초회왕 영사시(詠史詩)가 문제가 되어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獄死 1624년 11월 60세)하는 연유로, 정문부 장군과 이성길 창주공의 임진란 전쟁 공로는 감추어 지게된 것이다.
선조실록(1604년6월 25일)에 의하면 호성공신(扈聖功臣) 중에는 말을 끄는 말구종도 6명이나 포함되어 있는데 선무공신(宣武功臣)은 단 18명뿐이며 이 중에는 칠백의사 의병장 조헌(趙憲), 진주성 전투의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의병 승군장(僧軍將) 사명대사 등 진정한 충의열사 또는 의병장(義兵將)은 포함되지 않았다. 과연 백성들의 믿음과 신뢰가 있었겠는가? 백성을 버리고 도망치듯 의주로 떠난 무책임에 대한 자기 방어였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임진왜란은 망국(亡國) 일보전(一步前)에서 벗어난 천우신조(天佑神助)의 역사의 기록이다. 당시 왕의 뜻을 명(明)나라가 받아들여 내부(內附)하였다던가 함경도 평안도와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왜군에 동조하는 순왜(順倭)자와 부역(附逆)행위를, 애국 호국 정신으로 돌리지 못하였다면 나라의 운명이 어찌 되었을지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구국 정신으로 심신을 다 받친 창주공은 임진 전공에 아무러한 불만도 없이 1594년(선조27) 병조좌랑에 임명되었고, 1596년(선조29) 북청판관(北靑判官)에 전임되었다가 함흥판관(咸興判官)이 되었다.
1597년(선조30) 병으로 관직(官職)을 사임하였다. 1601년(선조34) 여산군수가 되고 1606년(선조39)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가 이듬해 형조정랑이 되어 암행어사로 함경도에 파견되었다.
1608년(선조41) 4월 왕명으로 문무관을 모아 놓고 친시(親試)를 보았는데 수석을 하여 말 한필을 하사 받았다. 이것이 창주공께서 두 번째로 동국의 천재임을 나타내신 것이다. 동년 6월에 양산군수로 나갔다. 1611년(광해3) 판결사(判決事)가 되고 1616년(광해8) 동지사로 중국에 다녀와서 훈련도정(訓練都正)이 되었으며, 이어서 호조참의가 되었다가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1621년(광해13년 4월 26일)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오다가 금교역(金郊驛)에서 순직(殉職)하니 향년 60세였다.
후손들이 공의 시신을 포천 鳴山里에 안장을 하고 이곳에 정착을 하니 고성 이씨(固城李氏)의 입향조가 되신다. 「그 이전에도 부분적으로 산재하여 거주하였음이 경주이씨. 경주최씨, 달성서씨, 청주양씨, 한양조씨, 문화유씨, 충주최씨, 등 등 등의 문중 족보에 고성이씨 할머니들이 등재하여 있는 것으로도 증명이 된다. 이후로 명문대가로 발전하여 충신열사가 대를 이어 배출되고, 현세에도 이한동(李漢東) 전국무총리, 이진호(李進鎬) 민선 1.2기 군수, 이진모 장군, 이한진경찰서장, 이한융 교수, 이한준작가(이괄장군의 잘못 된 역사적 평가를 바로잡기 위한 역사소설 3부작“반정의 칼” 저자), 이수호, 이한중, 이성모, 이정모 등 수없는 의료계의 양.한방 의사로 세계에 명성을 날리고 있는 분도 계시고 사업가 이각모(李角謨 주>동방 회장. 겸 포천미래포럼회장 고성이씨 현종친회장), 이한칠(李漢七 현 정우식품 회장, 전 포천상공회의소 회장), 등 정치계, 법조계, 학계, 의료계, 실업계, 교육계 등에 골고루 분포되어 국가 발전에 헌신하며 명문가의 명성을 지켜 오고 있다.
삼년을 더 살다가 억울한 누명으로 옥중 참형으로 돌아가신 농포 정문부 공(1924년 11월 19일)은 자손에 의하여 흩어진 시신을 수습하여 의정부 송산동에 안장을 한 것도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생사를 넘나들며 함경도 지역 의병 활동으로 창의진 의거, 반란군에 의해 강제로 잡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인계하여 억류 되었던 임해군(臨海君), 순화군(順化君) 두 왕자와 배종제신(陪從諸臣)을 구출한 전과와, 백탑교전투(白塔郊戰鬪 - 일명 관북대첩, 길주대첩)로 평정을 회복한 전우애와 각 도의 목 부 군 현 벼슬 살이를 하시면서 수 십수의 시문을 주고 받은 정의(情意)를, 구천에서라도 술잔을 기우려 가며 무공담 정담을 나누기 위하여 묘가 인근 거리에 쓰이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挽章 鄭同知制
少年文字爭名目 - 소년 시절은 글과 글자로 이름을 다투던 날
壯歲干戈倡義時 - 장년 시절은 방패와 창으로 의병 일으킨 때
萬死一生君與我 - 만 번 죽을 고비서 한 번 살아난 그대와 나
交情別意酒兼詩 - 사귐의 정 특별한 뜻은 술과 시에 있었는데
箕城迹絆魂先往 - 기성에 자취 얽혀 있어 혼백 먼저 돌아가고
灣館興漢恨獨遺 - 용만관에 흥취 식자 한스러움만 그저 남았네
忍把金郊停使節 - 어찌 차마 금교 길에서 사절들 멈추게 하여
三呼聲斷鄭同志 - 정동지를 세 번 부르는 소리 끊어지게 했나!
【위의 만장(挽章)은 창주공 유고집과 농포문집(農圃文集)에 실려 있으며 부군현(道의 府郡縣)의 환로(宦路)생활에 주고 받으신 수 십수의 시문이 실려 있고, 40여 다른 문중에도 창주공의 시문이 실려 있다고 전한다.】
창주공과 충의공 정문부 장군과의 인연은 후손에게 까지 이어진다. 창주공의 14대 후손 이각모 종친회(宗親會)회장이 경영하는 (주)동방(동물약품 제조사로 국내외에서 유명)에 재직하시는 정연근 상무님께서도 충의공 정문부 장군의 12세손으로 밝혀져 선대의 인연은 누대를 내려오며 끈끈한 관계를 맺어오고 있다. 창주공 충의공 두 선생 모두 탁월한 천재이시며 시문에 능하시고 장군의 기개와 용맹을 겸하신 분으로 시작품도 500여편에서 1,000여편에 달하도록 방대한 분량이라 합동으로 한글화 작업하여 공동으로 출간하자는 협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 사업은 상당히 중점을 두어야 할 사업으로 생각이 된다. 시문집이 방대하다면 축약본이라도 만들어 관계 요로에 배포하고 문중에서 중앙단위 학술 발표회 예술제 등을 개최하여 국민적 여론이 형성되면 국정교과서에도 실릴 것으로 생각된다.
창주공의 후손들은 명문가의 후손답게 나눔에도 인색하지 않은 것은 주변에 다 알려져 있고 지역신문에도 수차 보도된 바 있다. 인근에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없도록 보살피며, 지극히 어려운 처지의 가정은 가족원 중 근로 능력이 있는 가족을 자영하는 회사에 채용(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못쓰고 버릴 사람은 없다는 신념으로 근로직, 사무직, 외근직, 기술직 등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쓰는 것은 조상님께서, 임진왜란 시 의병장으로 활동하시며 쓰시던 작전계획을 회사 경영에 적용하는 것일 것으로 추정)하여, 돕는 등 선조들께서 하시던 향약(鄕約) 정신을 실행하고 있다.
후학 양성을 위한 장학 사업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이시어 이한동 전 총리께서는 포천장학회(재경 포천시민의 협조와 본인 출연 장학금)를 40년이 넘게 운영하여 매년 포천관내의 8개 고등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대학생 2-3명을 해당 고등학교장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입학이 끝나는 3월 중순에 매년 1인당 1백만원씩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장학금을 지급하는 날 포천시내는 경축분위기이다. 포천시내 장학금 수혜자의 명단이 실린 현수막이 걸리고, 유림회관 행사장에는 장학생을 추천하신 교장 선생님과 담임선생님, 학부모님들, 국회의원과, 포천시장, 시의회 의장 의원, 교육지원청장, 경찰서장, 등 기관장 전원이 부득이한 사정이 없는 한 대부분 참석하고, 각급 유명 단체장 유지 등 100명에서 150명이 넘게 모여 축제분위기에서 장학금을 지급하고 만찬과 여흥으로 까지 이어진다. 또한 이각모 (주)동방 회장은 포천일고등학교 총동문 회장시 유명무실한 장학회를 살리기 위해 1억원이 넘는 장학기금을 쾌척하였으며, 모친 이(李 본관 경주)여사님의 명의로도 많은 액수를 기부하여 2014년말 결산에 장학기금이 3억원(장학법인 등록필 -초대법인장학회 이사장)을 돌파하게 하는 등 후학 양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미래 인재 양성을 위한 사업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포천 관내의 8개 고등학교의 장학회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장학회 결성을 촉진하도록 권유하고 있으며, 2010년도 활발하게 운영 중인 동남고등학교 장학회에 1천만원을 기탁하기도 하는 등 우리 고장의 인재 육성에 열정을 다하고 있다. 또한 모교인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동문회장과 동문회장학회장을 역임하면서 1억원의 학교 발전기금을 찬조 한 바 있다.
이각모 현 종친회장은 1969년 서울대학교 수의학과 출신 수의사로 동물약품 업계에 종사하여 오다 1977년 30대 초반의 나이에 동물약품 제조회사인 주)동방 회사를 설립하여 지금은 해외 24개국에 동물약품을 수출하는 국내 굴지의 회사로 성장하였다. 현재도 외국에 수출의 길을 개척하는 데 전력하고 있으며, 북한에 인도적 지원 차원에서 2005년도에 1억원에 달하는 동물약품을 지원하여 민족의 하나 됨과 통일의 기반조성에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경영의 수익금은 오불리스 노불리제 정신에 입각하여 장학기금과 자선 사업에 기탁하고 있다. 2012년 전국을 휩쓸고 특히 포천에도 엄청난 손실을 끼친 구제역이 발생하자 숙소를 군내면에 마련하고 회사의 중요한 부분만 처리하고는 포천에 내려와서 포천의 수의사들과 방역 현장에 뛰어 들었다. 자신의 회사에서 생산하는 동물약품을 공급하면서 소석회 4톤 트럭 수십대분을 공급토록 관계 당국에 협조를 구했으며, 48개소의 통제초소를 방문하여 위문 격려를 하는 등 포천시민과 아픔을 함께 하였다. 이각모 회장은 포천시청에 1억원 상당의 소독동물약품을 지원하고 수십일을 현장에서 동료 수의사와 현장 방역은 물론 방역초소 근무자도 위문을 하였으며 수해가 발생 시에 연천 철원 파주에도 1억원이 넘는 동물 방역약품을 제공한 바 있다. 그 밖에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는 크고 작은 많은 도움을 이웃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입향조이신 창주공은 문무를 겸비하시었으면서도 그림에도 특출하신 재능이 있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무이구곡을 관람하시고 돌아오시는 귀국의 장도(일설에는 진중)에서 그리셨다고 하는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가 전한다.
다음은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해설이다.
【무이구곡이란 중국 복건성 강서성 경계에 해발 1300m가 되는 무이산이 있는데 이 산을 중심으로 북동에서 남서로 뻗쳐 무이산맥을 형성하고 있다. 이 산중에는 명승지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아홉구비가 특출하여 무이구곡이라 불리운다. 성리학의 원조 송나라 주자(朱子)도 천하 절경 이곳에 강학을 위해 문곡서원을 세우시고 학문을 강론하였다. 창주공께서 그리신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도는 정교하고 섬세함과 활력이 넘치는 운필은 선경(仙境)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은 국보이며 그림의 서시(序詩)는 율곡 선생의 고산구곡시(高山九曲詩)가 실려 있다. 이 그림은 문화재 2216호로 지정되어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네이버인 지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다. [또한 십칠(十七)세손 창주공(滄洲公) 휘(諱) 성길(成吉)은 임진왜란 때 창의기병(倡義起兵)하였으며 병조참판(兵曹參判)과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을 역임했으며 그림솜씨가 뛰어나 무이구곡도(武吏九曲圖)를 그리셨으며 그 그림은 현재 국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창주사 사우(祠宇)좌측에 게첨한 것은 건립당시 복제 첨부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