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 속에 사는 삶
요즈음 사는 것이 마치 전쟁 중에 방공호를 들락날락하는 것 같습니다. 2월 27일 저녁 10시에 돌연 모두의 휴대폰에 긴급경보가 울리며 코로나로 인해 다시 3단계 봉쇄령(lockdown)으로 들어간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 순간 창밖의 밤하늘로부터 유독 짙은 어둠이 켜켜이 내려오는 것을 본 사람은 결코 저 혼자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새벽엔 연이은 지진 소식에 다시 한번 모두가 놀라야 했습니다. 긴급경보가 울리고 쓰나미에 대비하여 낮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시급히 높은 곳으로 대피하라는 방송이 나오자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이 이런 식으로 오는 것이 아닌가 하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몇 시간 뒤에 큰 피해 없이 쓰나미 경보가 해제되었고 또 봉쇄령도 2단계로 낮아졌지만 사람들의 얼굴에 남은 불안의 흔적은 이 시대가 정상적인 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모두는 믿음을 잃지 말고 살아있다는 것에, 병마에 휩쓸리지 않고 건강하다는 것에, 그리고 살아갈 내일이 앞에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영화 ‘금지된 사랑 (Un Coeur en Hiver)’
지난 번 마지막 화요음악회에서 감상했던 음악영화 ‘금지된 사랑’은 기대보다 좋았습니다. 미국 영화의 속도감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음악으로 치면 아다지오 아니면 빨라도 안단테와 같은 느린 흐름의 프랑스 영화가 자칫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했지만 그것은 기우였습니다. 우리 말 제목은 ‘금지된 사랑’이었지만 원제 ‘Un Coeur en Hiver’는 ‘겨울의 심장’이라는 뜻입니다. 주인공 스떼판은 ‘겨울의 심장’을 가진 차가운 사내지만 어느 날 그에게 다가온 미모의 바이올리니스트 까미유는 불꽃 같은 여인입니다. 이들이 밀고 당기는 사랑 이야기가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폭죽처럼 터지는 가운데 계속 흐르는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의 ‘피아노 삼중주’는 영화의 분위기와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음악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께 추천해 드리고 싶은 영화입니다. 안 보신 분은 꼭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지난번에 보았던 영화 ‘금지된 사랑’을 생각하며 첫 곡으로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의 피아노 삼중주를 들었습니다.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의 Piano Trio in a minor
모리스 라벨은 프랑스 바스크(Basque) 지방의 Ciboure에서 바스크계의 어머니와 스위스인인 아버지로부터 태어났습니다. 이 곡은 라벨이 제1차 세계대전 종군을 가까이 앞두고 완성한 작품으로 우울하고 어두운 정열을 숨기고 있습니다. 1914년 3월 프랑스 바스크 지역으로 내려간 라벨은 그해 여름 그곳에서 바스크의 색채가 가득한 피아노 3중주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가 바스크 族인 라벨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작곡 중에 조국 프랑스가 1차대전에 참전하자 라벨은 자원입대하기 위하여 이 서둘러 3주 만에 이 곡을 완성했습니다. 라벨의 독특한 인상파 적인 작품으로 풍부한 표현력과 깊이를 보여주며 작곡 당시 처해 있던 상황으로 인한 불안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모두 4악장으로 되어있는데 특히 1악장 Modere는 새로운 변화를 추구한 소나타 악장입니다. 라벨이 스스로 ‘채색된 바스크(Basque in colouring)’라고 불렀듯이 바스크적인 주제로 일관하는 아름다운 악장으로 이 곡의 백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금지된 사랑’도 시작과 더불어 이 1악장이 흘러나옵니다.
좋은 연주가 많지만 화요음악회에서는 소위 ‘제2기 백만 불 트리오’라고 불리는 Rubinstein/piano Heifetz/violin Piatigorsky/cello의 연주로 들었습니다.
계속해서 라벨의 작품을 들었습니다.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D 장조
스페인 혈통의 바스크계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라벨의 음악에는 프랑스다운 우아함에 어머니 나라의 정열과 감상이 섞여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작품 하나가 스페인 무용 선율이 되풀이되는 볼레로(Bolero)입니다. 하지만 그를 유명하게 만든 또 하나의 작품은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입니다. 이 곡이 나오게 된 데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유명한 언어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그 자신도 음악적으로 뛰어난 자질의 소유자였지만 그의 형 파울 비트겐슈타인(Paul Wittgenstein)은 뛰어난 피아니스트여서 모차르트가 다시 태어났다는 말을 들을 만큼 앞날이 촉망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1차대전에 참전했다가 오른팔을 절단해야 하는 부상을 당하고 돌아왔습니다. 한동안 절망 속에 방황하던 그는 굴복하지 않고 작곡가들을 찾아 왼손만으로 칠 수 있는 곡을 작곡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1차대전에 자원해서 참전했던 라벨은 전쟁의 참혹함을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런 그였기에 전쟁에서 부상당한 비트겐슈타인의 제안을 기꺼이 수락한 라벨은 그를 위해 ‘왼손을 위한 협주곡’을 작곡하였습니다. 그러나 작품을 받은 비트겐슈타인은 처음에는 왼손만으로 연주하기에는 너무 어렵고 취향에 안 맞는다고 수정을 요구하며 라벨과 논쟁까지 벌였습니다. 그는 라벨에게 “연주자는 작곡가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며 투덜거렸지만 라벨은 “연주자는 노예가 되어야 한다”라고 강하게 응수하며 한 음표의 수정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은 승복하였고 나중엔 ‘여러 달 동안 연습을 거듭하면서 비로소 나는 이 작품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라고 회상하였습니다.
1931년 빈에서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피아노와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관현악으로 연주된 이 곡의 초연은 대성공이었습니다. 2년 뒤 파리에서 역시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연주된 이 곡은 또다시 성공적이었고 그 뒤 오늘까지 이 곡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곡이 되었습니다.
제목을 보지 않고 이 곡을 들었다면 결코 이 곡이 왼손만을 위한 곡이라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건반을 위아래로 화려하게 오르내려야 하는 기교적인 성부(聲部)와 두텁고 치밀한 곡의 짜임새는 왼손 하나로 연주하는 곡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곡은 단악장으로 되어있지만 세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보통의 협주곡과 달리 느림 빠름 느림의 구성입니다.
여러분도 왼손을 위한 협주곡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이 곡을 감상해 보시기 권해드립니다.
Samson Francois의 피아노와 Andre Cluytens가 지휘하는 Orchestre de la Societe des Concerts du Conservatoire의 연주가 명연입니다.
하나님 말씀 보겠습니다. 디모데 후서 3장 1-5절입니다.
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혹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곰곰이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도 오늘날의 모습과 방불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