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인 다이닝
최은영 황시운 윤이형 이은선 김이환 노희준 서유미
은행나무
2018
선택
최은영
요즘은 새벽잠이 줄었어요. 새벽 3시면 눈이 떠지고, 다시 잠을 이루려고 노력해도 잘되지 않습니다.
꼭 한 번은 다시 만날 거예요.
당신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지만 부드러웠습니다. 그 말은 먼 곳으로 파견을 나가거나 임종이 가까워 병원으로 향하는 수녀님들의 것이었지요. 세상에서 다시 못 보더라도 하느님 나라에서는 만날 수 있다는 말, 이제 우린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이별의 말이었습니다.
이 새벽, 잠에서 깨어 저는 당신을 생각합니다.
새벽의 부엌은 어둡고 조용합니다. 형광등을 켜고 저는 국을 끓일 준비를 합니다.
처음 성소자 피정을 갔을 때, 우연히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된 당신을 기억합니다. 수녀 하나에 성소자 셋씩 조를 이뤄 묻고 답하는 시간을 보냈었지요. 그곳에서 당신은 자기에게 맞는 집 을 찾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작은 집, 큰 집, 봉쇄된 집, 가까이 또는 멀리로 파견하는 집. 같은 수녀원이라고 하더라도 본인에게 잘 맞는 집을 찾아가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또 수녀가 되지 않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고,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도 기억납니다.
발에 잘 맞는 신발을 신고 걸어야 돼요. 발이 아프면 안 되니까…….
수녀가 되면 하고 싶은 공부를 지원해줄 수 있다는 다른 수녀의 제안보다도 저는 당신의 말이 더 와닿았습니다. 발에 잘 맞는 신발, 발이 아프면 안 되니까…… 그로부터 11년이 지났는데도 저는 당신의 그 말을 기억하곤 합니다.
제가 입회했던 스물네 살에 당신은 마흔여섯의 종신 수녀였습니다. 입회를 하고, 당신은 저의 담당 수녀가 되었지요. 한번 묶이면 둘 중 하나가 죽기까지 짝이라는 말을 듣고 저는 웃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에게 입회의 마음을 심어준 당신이 저의 담당 수녀라는 사실이 하느님께서 제게 주신 선물처럼 느껴져서였습니다.
그런 시기였습니다. 작은 행운 하나에도 하느님의 뜻을 감지하고, 하늘이 푸르면 푸른 대로, 비가 내리면 내리는 대로 그 안에 깃든 하느님의 선의를 알아채려고 노력했던 때가요. 그 순진했던 마음을 이제 와서 비웃으려는 건 아닙니다.
저는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당신과의 면담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휴가 기간을 제외하고 우리는 매주 한 시간씩 만나 이야기를 했지요. 시간이 지날수록 당신과의 만남을 절박하게 기다리는 저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당신은 당신 할머니의 할머니까지도 천주교를 믿었던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조상들은 산에 숨어 옹기를 굽고 그것을 팔아 생활을 했습니다. 자유롭게 천주교를 믿을 수 있게 되었지만 계속 옹기를 구우며 살아간 조상들도 있었고, 일부는 평양 시내로 내려와 살았다고 했죠. 당신의 삼촌들은 둘은 사제가 되었지만 한국전쟁 당시 처형되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당신이 갓 스물이 되자마자 수녀가 되었던 것은 꽤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저희 할아버지가 전쟁을 어떻게 겪었는지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도 수녀님의 식구들처럼 평양 사람이었습니다. 평범한 소작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왜정을 겪고, 전쟁을 겪으면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을 경멸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는 자신이 고생한 이야기를 손녀에게 구구절절 말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살며 겪어온 일들을 알지 못하지만, 그 경험을 통한 결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다치게 한다.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된다. 무엇도 믿어서는 안 된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 도와달라고 내민 손을 밀쳐버리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다. 그런 인간이 사랑과 선함을 말하는 모습을 봐야 하는 일이 고통이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저희 아버지는 심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밥상머리에 앉아 본인 아버지의 비관적인 세계관을 듣고 자란 사람에게 세상은 얼마나 공포였을까요.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하여 97년까지 직장 생활을 했습니다. 자기 막내딸이 고작 중학교 2학년일 때, 그는 직장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근면한 사람이었습니다. 직장을 잃은 뒤에도 이런저런 일을 하며 일 자체를 쉬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스물두 살에 결혼한 이후로 전업주부로 살아왔던 엄마가 돈을 벌기 시작한 것도 그해였습니다.
저희 부모는 저희 자매에게 경제적인 위기를 최대한 숨기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직장을 옮겼다고 했고, 엄마도 집에서 심심하던 차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했지요. 이런 허술한 거짓말을 믿을 바보는 아니었지만 저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모두가 바빴던 시기였습니다.
저희 식구는 모두 가까운 사람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직장 동료 말고는 가까운 지인이 없었고, 엄마도 친구가 거의 없었습니다. 친지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아 집안 왕래 또한 드물었습니다. 둘의 딸인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재주가 없었어요. 사람과 잘 어울리고 활달했던 언니는 저희 식구와는 영 딴판이었지요.
그런 우리 가족이 상을 펴놓고 다 같이 저녁을 먹었던 기억은 아직도 따뜻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제 와서야 저는 그렇게 말할 수 있네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기에 그렇게 미화해서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요. 다시 한 순간으로 돌아가 잠시라도 머무를 수 있다면…… 저는 그 평범하던 저녁의 하루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제가 하느님을 알기 전의 그때로요.
저에게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믿음도, 삶을 관통하는 커다랗고 강한 하느님 체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천주교도로 세례를 받고, 수녀원의 문을 두드릴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그 끝에는 언제나 호스피스 수녀님들이 보입니다.
수녀가 무엇인지, 사제가 무엇인지, 천주교가 무엇인지도 몰랐을 때 호스피스 수녀님들을 만났습니다. 그분들은 둘씩 짝을 지어 병실을 방문했습니다. 저희가 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따로 천주교식 기도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혹시나 귀찮게 할까 봐 저희의 표정을 살피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분들은 매일 찾아와 저희 부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희 부모가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저는 그전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봐서는 안 될 장면을 본 사람처럼 당황스러워 복도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제가 복도 창가에 서 있거나 휴게실에 앉아 있을 때 수녀님들은 저를 보면서도 가벼운 눈인사만 하고 지나갔습니다. 제가 당신들을 불편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조심스러움이 담긴 인사였습니다. 언니는 두 수녀님을 따라다니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저는 아빠의 상황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으로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겠지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하루가 다르게 사위어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바라봐야 하는 일은, 제가 만들어낸 환상과 거짓 없이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빠는 곧 나아질 거야. 언젠가 시간이 흘러 그땐 그런 일이 있었지, 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거야. 그렇게 저는 꿈꿨고, 그 꿈을 그대로 믿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세 달의 시간 동안 저는 고입 연합고사를 봤고, 텔레비전을 켜놓고 혼자 저녁을 먹었고, 품이 작아진 겨울 코트를 버린 후 새로운 코트를 샀고, 버스 회수권 두 장을 교복 주머니에 넣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틈이 날 때마다 버스를 타고 서울의 병원으로 아빠를 보러 갔어요. 아빠는 살이 빠져 더 깊고 커다래진 눈으로 저희를 반겨주셨지요. 도무지 반가움을 숨길 수 없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 그런 얼굴은 더 이상 볼 수 없었습니다.
아빠는 돌아가시기 사흘 전, 의식을 잃기 직전에 천주교에 입교하고 병자성사를 받았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본 세례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제대로 앉아 있을 수도 없어 누워 있는 사람의 이마 위로 물을 쏟고, 손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는 것. 사제를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사제가 아버지의 병자성자를 해야 하니 자리를 비워야 한다고 말했지요. 그때, 엄마와 언니와 함께 복도로 나오면서 저는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엄마는 저를 달랬지만 저는 슬픔 때문에 울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그때 느꼈던 감정은 굴욕뿐이었어요.
평생 자기 약한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던 사람이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누워 누군가에 의해 수동적으로 다뤄지는 모습을 본 충격. 아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가족인 우리를 자리에서 쫓아내고 아빠의 삶을 정리 하겠다고 하는 모습이 저에게 굴욕감을 줬던 것입니다.
너희 아빤 외로운 사람이었다. 누구 하나 따뜻하게 감싸준 사람이 없었어.
엄마는 이미 아빠에 대해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도 못하고 자랐대. 아프면 괜찮냐고 물어야할 부모들이 오히려 화를 냈으니……. 너무 가여워. 너무 가여워서…….
엄마는 쭈그리고 앉아 복도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수녀들에게는 아프면 아프다고, 괴로우면 괴롭다고 말하더구나. 아이처럼…… 정작 아이 때는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하는 거야. 그러니 네가 이해해, 아빠 선택을.
아빠가 의식을 잃은 후에도 수녀님들은 보호자 대기실에 앉아 있는 저희 가족 곁에 머물렀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막상 일이 닥치기 직전이 되자 발을 구르고 눈물을 흘리는 엄마 곁에 앉아 있었어요. 그것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저희 곁에 앉아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
장례 기간은 짧았습니다. 돌아가신 날 아침을 포함한 하루를 장례식장에서 보내고, 바로 그다음 날 발인을 했어요. 아빠의 직장 동료들, 몇몇 친척들만 오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생전 처음 본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차례대로 도착했습니다. 한번 시작하면 20분씩 이어지는 만가, 연도(煉禱)라는 것을 하더군요. 모르는 사람의 죽음을 위해 시간을 내어 기도를 하러 왔다는 것에 저희는 놀랐습니다. 호스피스 수녀님들도 장례식장에 오셨습니다. 한 분은 엄마의 손을 붙잡고 같이 울어주었어요. 저도, 엄마도 언니도, 그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안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에 들어가던 봄에 언니와 저는 예비자 교리를 등록했습니다. 신약성경을 처음 읽었던 것도 그때, 시험을 보기 위해 천주교의 여러 기도문을 외웠던 것도 그때였습니다. 언젠가 당신은 하느님을 자기 의지로 받아들인 경험이 부럽다고 하셨어요. 당신께 하느님은 선택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던 일이라고 하시면서요.
저는 위안 받고 싶었습니다. 제가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고 싶었습니다. 하느님의 선의로 빚은 사람이라는 존재를 믿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저를 결코 떠나지 않을 존재를 소유하고 싶었습니다. 버려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홀로 남더라도 결코 홀로이지 않고 싶었습니다. 보이지 않더라도 세상 어딘가에는 저의 편이 존재한다는 감각을 느끼고 싶었어요.
그런 제 초라한 마음이 당신께서 부럽다고 하셨던, 하느님을 받아들이게 된 심정이었습니다. 제게 하느님은 아빠의 죽음에 함께 울어줬던 수녀님들의 눈물 안에서 만날 수 있었던 존재였습니다.
복음서에서 만난 그리스도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친구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고,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사람의 편에 서고, 아픈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러 하느님,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 소리치는…….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하고, 자신이 선택한 민족과 사람을 위해서라면 다른 것들을 다 파괴해버릴 수 있는 구약의 하느님과는 전혀 다른 존재. 저의 하느님, 그분은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분이라면 저에 대해 잘 알고 계시리라고, 저를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으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나아질 가망이 없는 사랑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사랑도 하느님의 사랑을 대신 해줄 수 없으리라 확신했습니다. 본당 수녀님은 저와 언니를 한 달에 한 번 있는 수녀원 모임에 초대하셨고 저희는 그곳에서 다른 여자 고등학생들과 함께 수녀님들과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당신을 처음 만난 곳도 그 자리였지요.
대학에 가서 본격적으로 성소자 모임에 참여하면서 언니도 저도 성소 분별에 들어갔습니다. 언제나 수녀가 될 사람은 언니라고 생각했지만 언니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직장에 취직했습니다. 제가 대학 4학년 때의 일이었어요. 투피스로 된 유니폼에 모자를 쓰고, 검은 구두를 신고, 전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체크하던 언니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 모습이 부자연스럽다고 놀려댔지만 속으로는 그런 언니가 자랑스러웠습니다. 워낙 여행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적성에 잘 맞는 직업을 찾았다고 생각했어요. 언니는 저와 엄마를 위해 곳곳의 지역 특산물을 사 오기도 했습니다.
저는 4학년 졸업 학기가 끝날 무렵 지원기 수녀로 입회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의 일은 당신께서도 잘 아시지요.
수녀님은 잘 계셔? 건강하셔?
수녀가 되고 나서 언니와 전화를 할 때면 그녀는 늘 당신의 안부를 묻곤 했습니다. 성소자 모임에서 언니는 유난히 당신을 따랐어요. 성소 분별을 위한 피정에 가서도 당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면서, 당신이 자기에게 준 마음을 잊을 수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넌 참 유난스러워.
전 자주 그렇게 언니를 나무랐습니다. 제 눈에 언니는 쓸데없이 잔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만 나타나면 겁도 없이 꼬리치며 달려오는 강아지 같아 괜히 걱정이 되기도 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언니와 통화를 할 때면 하도 웃어서 다른 수녀님들에게 눈총을 받기도 했습니다. 직장에서 실수한 일, 소개팅 이야기, 웃긴 이야기 들을 언니는 재미있게 풀어놓았습니다. 제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지역에 대해서도 얘기해줬어요.
제가 처음으로 휴가를 나갔을 때, 언니는 엄마와 저를 데리고 부산에 갔습니다. 그때 저도 처음으로 고속 열차라는 것을 타봤어요. 열차의 속도감에 어리둥절한 저와 엄마에게 언니는 열차의 길이, 탑승객 숫자, 이 속도의 대단함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앞으로는 이 열차를 타고 여러 지역에 빠르게 갈 수 있다면서 들뜬 목소리로 말하던 얼굴이 기억납니다.
윤주 씨!
언니는 우리 칸에 들어온 승무원과 반가운 인사를 했습니다. 윤주 씨는 말이야, 윤주 씨는 그렇거든……. 전화 통화를 할 때 하도 많이 들어본 이름이어서 아는 사람을 본 것 같았어요. 큰 키에, 웃는 모습이 환한 사람.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요.
별건 아닌데…… 이거라도 드시면서 가세요.
그 얘길 하면서 그분은 비닐봉지 하나를 건네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비닐봉지에는 생수, 마른오징어, 캔 맥주, 아몬드초콜릿, 귤, 땅콩이 들어 있었어요. 그것들을 나눠 먹으며 부산으로 가던 길에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고 편안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도 언니도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잘 살아가고 있다는 안심이었습니다.
언젠가 언니는 그때가 자신의 어린 시절보다도 더 먼 과거처럼 기억된다고 말했습니다.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세 모녀가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을 보면서 언니는 그렇게 말했어요.
이건 내가 아니네.
그렇게 말하면 언니는 작게 웃어 보였습니다.
내 눈에는 똑같은데 뭘.
제 말에 언니는 얼굴에 어린 웃음을 지우고 저를 가만히 바라봤습니다. 언니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던 건 아니었지만 저는 애써 태연한 얼굴로 너 그렇게 안 늙었어, 라고 얼버무렸습니다.
처음에는 언니가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아직도 저는 언니가 그때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어요. 언니가 수녀가 되고 제가 사회에 나갔다면 어땠을까. 사람을 잘 믿지 않고, 웬만해선 마음을 열지도 않고, 정을 잘 주지도 않으며, 피해를 볼 일이라면 피해가고, 인정에 연연하지 않는, 꽤나 계산적이고 냉정한 제가 언니의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어째서 언니가, 그토록 의심 없이 사람을 믿고 좋아하던 언니가 그 자리에 있었을까.
수녀가 된 지 꼭 1년이 되던 3월이었습니다. 그런대로 수녀원 생활에 적응을 하고 나름의 재미를 찾아가던 시기였습니다. 당신께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하느님이 가까이 느껴졌어요. 제가 수녀원의 포근한 침대에서 눈을 뜨고 따뜻한 음식을 먹고 기도 시간에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하고 있을 때 언니는 3월의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있었던 겁니다.
문제는 그 전해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언니가 저를 잘 속인건지, 제가 무감했던 것인지 저희 자매의 통화는 예전처럼 유쾌했습니다. 텔레비전도 신문도 없고, 인터넷도 한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기에 저는 바깥소식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엄마에게도 언니는 입단속을 해놓은 모양이었어요. 그러나 그해 3월이 되면서, 둔감한 저도 언니의 목소리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정말 몰랐어요?
휴가를 다녀온 룸메이트 수녀님이 제게 이야기해줄 때에야 저는 언니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대충이나마 알아차리게 됐습니다. 저와는 달리 사회생활을 경험하고 수녀원에 들어오신 그분은 너무 염려하지 말라며, 잘잘못이 분명한 사안이므로 파업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건 일종의 취업 사기 같은 거예요.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이제 와서 딴말을 하니까…….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지 모르겠어. 이렇게 어린 사람들 마음에 상처를 주고. 내가 젬마를 생각하니 속이 상해서……
몇 번이나 언니에게 전화를 했지만 언니는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다시 기회가 생겨 전화했을 때 언니는 평소의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어요.
어디야?
어디긴. 여기 종로야. 놀고 있어.
언니, 넌 내가 바보로 보이지.
언니가 침묵하는 동안, 수화기 너머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밥은 잘 먹고 다니니.
나 굶는 거 봤어? 다 먹고 다니지.
언니.
응?
고생하지 말고 그냥 관둬, 제발. 뭐 하러 안 해도 될 고생을 해.
수영아.
한동안 언니의 숨소리만 들렸습니다.
사람은…… 사람은…… 그렇게 살면 안 돼. 나중에 전화할게. 지금 바빠.
전화가 끊어지고 저는 한참 동안 전화기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저녁기도를 하면서 입으로는 기도를 했지만 마음은 언니가 있을 농성장에 가 있었습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저는 생각했어요. 더러운 건 그냥 피하는 거지. 마음 약한 사람이 뭘 어쩌겠다는 거야.
언니는 그 후로도 제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언니가 처한 사정에 대해 저는 룸메이트 수녀님에게 그리고 엄마에게 물어 알아갈 수 있었습니다. 회사는 여승무원 전원을 비정규직으로 계약했습니다. 언니가 비정규직이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회사는 채용 공고에서 2년 뒤 정규직 전환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입사한 지 2년의 시간이 지나자 회사는 앞으로도 직접 고용은 없을 것이며, 다른 위탁 업체를 통해 비정규직으로 재계약을 해야 한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회사는 승무원들의 실제 사용자였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습니다. 회사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해고라는 말은 협박이었어요.
룸메이트 수녀님은 모든 일이 다 잘될 거라고 저를 격려했습니다. 회사가 처음부터 약속한 사실이 명백히 있고, 위탁 고용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업무 지시를 내리고 사원들을 관리한 것도 회사였다는 말이었습니다.
걱정 마요, 젬마.
그렇게 이야기하는 수녀님 앞에서 저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우리는 옳다고 해서 이기고, 옳지 않다고 해서 지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강함과 약함이 있을 뿐이겠지요. 강한 쪽은 어떤 경우에도 모든 것을 잃지 않습니다. 그러나 약한 쪽은 최소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전부를 걸어야 해요. 룸메이트 수녀님이나 엄마가 언젠가는 언니의 정당한 요구가 관철되리라고 이야기했지만 저에게는 그런 확신이 없었어요.
지원기가 끝나고 청원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언니가 파업을 하는 동안에도 수녀원의 목련 나무에는 꽃이 피고 마당 잔디도 푸르게 돋아났습니다. 목련꽃이 질 무렵, 새로운 지원자들이 수녀원에 들어왔어요. 언니는 계속해서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당신께 언니가 처한 상황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당신은 별다른 말 없이 가만히 제 이야기를 듣고 계셨지요. 이틀 뒤, 저는 뜻밖의 하루 휴가를 받았습니다. 휴가를 나가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 저는 눈빛으로 당신께 고마운 마음을 전했지요. 당신도 눈빛으로 제 마음에 답했습니다.
저는 버스를 갈아타고 서울역으로 갔습니다. 사복을 입은 승무원들이 한쪽에 모여 앉아 있었고, 몇몇이 역사에서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어요. 언니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언니는 경부선 출입구 쪽에서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어요. 운동화에 청바지, 티셔츠를 입고 밝게 웃고 있더군요. 저와 눈이 마주치자 언니는 눈을 크게 뜨고 장난스럽게 웃다가 제가 언니 쪽으로 다가가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서서 울었습니다. 저는 전단지를 담은 언니의 가방을 제 어깨에 메고 언니를 안았습니다.
우리는 벤치로 가서 언니의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한참을 앉아 있었어요. 그곳에서 저는 역사에 모여 있는, 전단지를 나눠주는 승무원들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봤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차가운 표정이었어요. 울음이 잦아든 언니가 말했습니다.
네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아. 나라도 그랬을 거야. 나라도 이해하지 못했을 거야. 그래도 너는 내 동생이니까…… 우리가 지치지 않을 수 있게 기도해줄 수 있겠지.
그럴게.
그렇게 해줘.
그럴게. 그럴게, 언니.
막상 언니의 모습을 직접 보니 지치면 관두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전단지를 읽고, 편의점에서 시사 잡지를 구해 읽으면서 제가 어떤 충격을 받았는지 언니에게 전하지는 않았습니다. 평화로운 대화를 원했던 자리에 전투경찰이 투입되었고, 5월 초에는 80명의 승무원들이 강제 연행되어 48시간 동안 구금된 일 같은 것들을 저는 그날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수녀원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지만 가슴이 뛰어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몸은 수녀원에 있지만 온 마음이 수녀원 담장 밖을 향하고 있었어요.
6월에 저는 언니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오늘에야 너에게 편지할 시간이 생겼어. 넌 그새 몇 번 전화를 했더라. 괜히 나랑 전화했다가 네가 영향받을까 봐 당분간은 통화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어. 넌 이해할 수 있겠지.
성소 분별에 들어갔을 때 수녀님이 그러셨잖아. 세상에는 수도 성소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각자 받은 성소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고. 그 말이 나를 자유롭게 했던 것 같아. 평생 남자도 못 만나고, 단체 생활을 해야 하고…… 그렇게 살 자신이 없었거든. 하느님만 보고 살기에 나는 세상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친구들이랑 웃고 떠들고, 필름 끊길 때까지 술 마시고, 심심하면 담배나 피우면서 그렇게 사는 행복.
그날 내가 하도 울어서 네가 놀랐을까 봐 걱정이 됐어. 나도 놀랐어. 그 눈물이 다 어디서 왔을까 싶어서. 그냥 네 얼굴을 봐서, 마음이 놓이고 또 놓여서 그랬던 것 같아. 그러니 걱정하지 마. 이젠 너에게 가리고 숨기고 할 것도 없지. 기왕 너도 다 알게 된 일, 내 마음에 대해서 너에게 전하고 싶어 이렇게 써.
5월 31일에 회사와 맺은 나의 계약은 해지되었어. 회사가 원하는 방식으로 재계약하지 않았으니까. 회사는 선착순 5명에게는 정규직과 승진을 약속하겠다고 했어. 그렇게 5명이 갔지만 나는 그 동료들의 선택을 이해해. 나쁜 건 그런 식으로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회사의 비열함이겠지. 그래, 비열함.
경찰에게 강제 연행될 때 무서워서 몸에 오한이 들었어.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게…… 끌려가는 게 너무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도 정신은 어느 때보다도 또렷해지더라. 아, 이런 거구나. 아, 이런 거였어? 울고 소리 지르는 동료들에 둘러싸여서 난 눈을 똑바로 뜨려고 했어. 하느님…… 하느님도 지금 이걸 보고 계시냐고 묻고 싶었지. 우린 짐짝처럼 실려 영창에 가둬졌어. 그때 우리가 어떤 말들을 들었는지 너에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 우리가 젊은 여자들이 아니었더라도 그들이 그런 말과 행동을 했을까, 그렇게 대우했을까. 48시간을 다 채우고 우리는 풀려났지만…….
수영아.
난 그날 이전의 나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아. 그 일을 겪은 많은 동료들이 우리를 떠났고, 떠나고 있어. 네가 나보고 그냥 떠나버리라고 말했을 때 내가 너에게 했던 말 기억해? 사람은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말.
아니야, 사람은 그렇게 살아도 돼. 떠나도 돼. 피해도 돼.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 폭언을 듣고 조롱을 당하고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입지 않아도 돼. 너에게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우리 투쟁이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어. 몸은 고되고 피곤할지는 몰라도 정신만은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아니었어. 나는 겨우겨우 견뎌내고 있는 것 같아.
전단지를 나눠줄 때 화를 내는 사람도 있어. 회사와 관계된 사람도 아니고, 본인 이해관계가 걸린 일도 아닌데 얼굴을 보면서 쌍욕을 하는 거야. 너희가 공부를 잘했으면 여기서 이러고 있겠느냐, 정규직으로 취직하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아느냐. 그런 사람들은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우릴 빤히 바라보는 시선, 그것만은 절대 익숙해지지가 않아. 짜증난다는 표정을 짓고 내 손을 치고 가는 사람들은 견딜 수 있어. 그런데 내 앞에 서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모습을 뜯어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힘이 드네.
네가 가고 며칠 지나지 않아 대학 은사님을 뵀어. 선생님은 내 동료가 나눠준 전단지를 읽고 계셨지. 반가운 마음에 선생님께 걸어갔어. 선생님, 내가 그분을 부르려고 하니 그분이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보더라. 무표정한 얼굴이었어. 반가운 마음에 눈물을 참는 내 앞에서 그분은 전단지를 신경질적으로 동그랗게 말아서 내 손에 쥐어줬어.
젊은 사람들이 거저먹으려고…….
그분은 혀를 차며 나를 지나쳐 갔어. 동그랗게 만 전단지를 손에 쥐고 난 한동안 굳은 채로 거리에 서 있었지. 순간의 일이어서 난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어. 구겨진 전단지를 가방에 넣고 최대한 밝은 표정을 지으려고 애쓰면서 남은 전단지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눠줬어.
나는 그저 사람일 뿐이야. 난 생각했어.
한때는 하느님이 너무 멀리 계시다는 생각을 했지. 그런데 수영아, 이제는 사람들이 하느님보다도 더 멀리 있는 것 같아. 우리의 뜻이 단 한 사람의 마음에라도 온전히 닿을 수 있을까…….
나의 이 나약함을 위해 기도해줄 수 있니. 나는 내가 겪는 이 고통을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는 않아. 그것뿐이야.
저는 언니의 편지를 들고 서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언니가 부산으로, 대전으로 농성을 다니고 있을 때 저도 청원기를 지나 수련기 수녀의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한 번 주어진 당신과의 만남에서 언니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어요. 당신께 이야기하고 나면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져서 그랬던 겁니다. 그날도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저는 언니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별다른 말도 아니었는데 당신의 눈가는 붉어졌습니다.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던 당신이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스무 살에 수녀가 됐습니다. 27년을 수녀로 살았어요. 봉쇄 수녀원이 아닌 이상 세상과 맞닿을 수밖에 없지만……. 젬마, 저는 바깥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 사실이 저를 괴롭게 했어요.
당신은 종신서원까지 하고서도 수녀를 그만뒀던 후배 수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군인들이 동생을 죽였다고 하더군요. 동생뿐 아니라 친구의 언니를, 이웃 아저씨를……. 동생의 시신을 찾을 수 있어 기뻤다고 말하는데 그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1980년 그해 봄을 어린 수녀로 행복하게 보냈습니다. 하느님과 더 가까워졌다고 믿었어요. 제가 이 아늑한 수녀원 안에서 내적 만족을 느끼고 있을 때 같은 시간 바깥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때 하느님은 어디에 계셨던 거지? 죄 없는 사람들이 살육당하는 순간에도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시라고 찬미하는 수녀들의 기도를 듣고 계셨나? 기도 시간에 저는 입으로 기도를 했지만 마음으로는 그럴 수가 없었어요.
당신은 이렇게 말하고 쓸쓸하게 웃었습니다.
제가 발에 맞는 신발을 이야기했었나요. 그렇게 눈을 뜨고 나니 수녀로서의 삶이라는 건 조금만 걸어도 물집이 잡히는 아픈 신발 같았어요. 아물면 다시 터지고 아물면 다시 터지는 거죠…….
거기까지 말하고 당신은 다시 침묵했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깍지 낀 손을 바라보고 있었지요. 그때 당신은 명랑한 교육 담당 수녀도, 사려 깊은 저의 담당 수녀도 아니었습니다. 그 이후에 어떤 마음으로 계속 수녀로 살게 되었는지 당신은 설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우리 둘은 그렇게 앉아 있었어요. 저는 언니에게 당신이 언니 이야기를 듣고 보인 반응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제야 언니는 말하더군요. 당신이 농성장에 따뜻한 국과 밥을 들고 찾아왔던 날의 이야기를. 그것이 언니에게 어떤 힘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파업이 시작된 지 2년이 지난 봄, 언니는 투쟁을 포기했습니다. 몇 달간 지속되어온 감기가 폐렴으로 진행되었고, 퇴원 후에도 농성에 참여했지만 힘들어했어요. 남자 친구와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간 것도 그 무렵이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건 고작 그것뿐이었어요. 언니의 마음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저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포기라는 말이 적당한 것인지조차 저는 모릅니다.
겉으로 봤을 때 모든 것은 다시 제자리를 찾은 것만 같습니다. 언니는 결혼을 했고 딸아이를 하나 낳았지요. 저는 5년간의 유기 서원 기간을 거쳐 종신 수녀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평온한 이때, 왜 저는 10년 전의 시간을 당신께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저는 제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시울이 붉어지던 당신의 모습을 잊을 수 없는 걸까요. 우리 언니가 끝까지 가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인간적인 마음 뒤로…… 어째서 마지막까지 간 사람들이 오로지 마지막까지 갔다는 그 이유로 아픈 시간을 짊어져야 하는 것인지 저는 알고 싶었습니다.
대법원의 판결에 절망한, 마지막까지 갔던 승무원 중 한 분이 자살한 소식을 들은 날, 언니는 저에게 전화를 걸어 알 수 없는 말들을 했습니다. 한 마디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부서지고 찢어진 말들이었어요. 넌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거잖아. 언니는 말했습니다. 저는 귀를 막고 싶었습니다. 아무 말도 알아들을 수 없었어요.
그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밤의 한가운데에서 깨어나 다시는 잠들지 못하게 된 건. 홀로 눈을 뜬 채로 기도하지 못하는 마음을 바라보게 된 건.
언니는 2주 전에 두 번째 딸을 낳았습니다. 저는 새벽 내내 푹 끓인 미역국의 맛을 봅니다. 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더합니다. 커다란 보온병에 언니에게 줄 미역국을, 작은 보온병에는 영명축일을 맞은 당신이 맛볼 미역국을 담습니다. 해가 뜰 무렵, 당신을 찾아가 국의 맛을 보여드리고 싶네요. 그리고 곧장 언니를 찾아가 잘 지은 밥과 함께 이 국을 주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 바라는 건 그것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