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여류명창 진채선(陳彩仙)
(1847 ~ ?)
판소리는 조선후기에 산출된 민중 예술의 하나로, 민중의 삶을 구체적으로 반영시켜 노래한 서민 예술이다.
조선후기의 민중회화가 사실주의적 기풍을 지녔던 것과 마찬가지로,
판소리 역시 사설과 창곡뿐만 아니라 지향적 정신까지 사실적이었다.
“판소리”는 ‘판’과 ‘소리’ 두 단어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합성어 이다.
‘판’은 장면이나 무대 또는 여러 사람이 모인 공간을 뜻한다.
유흥을 위하여 마련된 이 공간을 우리는 ‘놀이판’이라고 부른다.
‘판’에는 물건을 일정한 규격으로 찍어내는 틀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판을짜다’라는 말에서 보이듯이, 판소리는 긴 노래의 사설과 악조(樂調)를 배합하여 하나의 완결된 형태,
즉 판으로 짜서 부르는 노래라는 의미의 이해가 필요하지 않을까?
판소리라는 문학은 우선 지리적으로 고창 이라는 배경 속에서만이 가능 했을게다.
그곳에는 고전과 현대문학의 경계에 있는 걸출한 인물 신재효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지방 군단위에서 유일하게 국악당이 있는 곳. 고창은 판소리와 인연이 아주 깊다.
근세 판소리 명창 만정(晩丁) 김소희(金素姬)와 조선말의 세도가 흥선 대원군의 한 때 나마
애첩노릇을 한 여류명창 진채선(陳彩仙)의 고향이기도하다.
폄~`
잠들어 꿈속에나 그리움 그 임 볼 수 있을까요?
그러나 잠들려 해도 잠못 드는 이 내 신세
..............................
바람에 지는 낙엽, 풀 속에 우는 벌레
무심히 들으면 관계할 일 없건마는
구곡에 맺힌 설음 어찌하며 풀어낼꼬.
- ‘추풍감별곡’ 중에서 -
註 ; 진채선의 스승이자 연인 신재효(申在孝 1812-1884)는 경복궁 낙성연에 진채선을 남장(男裝)까지 시켜
보내놓고는 눈이 빠질 뻔 한다. 채선이 함흥차사가 되었으니~· 그리하야~·
신재효는 [도리화가]라는 노래를 짓는데?
[도리화가]는 신재효가 자신의 제자이자 연인인 그녀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편지글 형식의 가사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진채선, 허금파(許錦波)와 같은 여자소리꾼을 키워냈는데, 특히 뛰어난 미모를 가진
진채선은 신재효의 특별한 관심을 받으며 명창 김세종(金世宗)에게 판소리를 배우게 하였다.
경복궁 낙성연에 참가한 진채선은 [명당축원가]와 [방아타령]등을 불러 장안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고는, 스승까지도 명성을 얻게 한다.
그러나, (이거이 중요~) 당대 최고의 실력자 흥선 대원군의 눈에 뻔쩍~!
해서~· 채선은 운현궁에 신방을 차리고 기냥(?) 상주(常駐). (오매불망~내님은 어디에~?재효생각)
사랑하는 제자이자 연인을 빼앗긴 마음과 그리움의 마음을 이 [도리화가]에 담았다.
그는 여기서 “외로운 손의 회포 이전 병이 더하구나.
다른 이는 병이 낫고 나는 어찌 아니 낫뇨?” 라고 하며 자신의 외로움을 노래하였다.
이 가사는 외면적으론 당대 지식인의 필수적 교양인 가사문학의 한 전형적 모습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상사(相思)의 마음을 담고 있는 것이다.
* 부연(附椽).
진채선. 그녀는 전라북도 고창 땅에서 무당의 딸로 태어난다.
그녀는 소리를 배우러 다니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노래를 곧 잘 불렀는데,
본래 무당 딸은 무당이 되는 것이 보통인지라~·
그녀는 달랐다. 타고난 끼와 미모, 노래, 몸매, 춤 솜씨 등이 뛰어나다보니 애당초 무당을 하고 싶은
맘은 애초부터 없고 화려해 보이는 기생되기를 원한다.
해서~·
고창관아 기생이 되었지만 기생으로 이름을 날리려면 시와 문장을 지을 줄 알아야 하는데,
그녀는 글을 모르는 까막눈? 에라~·차라리 소리나 배우자하고 마음먹는다.
그런 와중에 고창의 걸출한 인재? 중인으로 벼슬을 하는 신재효를 만나니,
이것이 진채선의 운명을 바꾼다.
신재효가 채선을 처음 보는 순간 청초하고 아리따움에 넋을 잃고 말았으니~· 요새말로 뻑~ 갔다 아이요~·
폄~`
해서~·
신재효는 그녀를 관아의 기생신분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무진애과 돈을 바쳤어(?)
관기족보에서 삭제되는 행운을 얻는다. 그리고는 제자로 삼아 신재효의 집에서 기거했으니~?
(아래 위가 쪼매 바빠겠제?)
이때부터 본격적은 소리공부에 매진, 특별과외선생으로 명창 김세종(金世宗) 까지 붙여 지도 받는다.
그녀는 스승을 따라 판소리 여러 마당 중에[춘향가]를 자기 장기로 삼았다.
그녀는 자기만의 독특한 ‘더늠’을 개발하여 장기로 삼았는데, 이 더늠은 ‘더 넣는다’ 는 뜻으로,
본래 내용을 조금 바꾸거나 그때그때 만들어 부르는 것을 말하며,
똑 같은 [춘향가]도 소리꾼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다.
경복궁 낙성연이 끝난 후에 진채선은 운현궁 대원이 대감의 첩실이 되어 지냈으니~~ (아이고 원통혀라~·)
그러던 어느 날 채선은 신재효의[도리화가]를 전해 듣고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녀는 신재효에 대한 사랑과 측은함 그리고 그리움에 몸부림친다.
한밤중에 대원이 몰래 나와 [추풍감별곡]을 구성지게 불렀다.
이 [추풍감별곡]은 사랑하던 두 남여가 약혼했다 헤어져 밤마다 불렀다는 노래다.
이런 채선의 애달픈 마음이 전해졌던지,
대원군의 허락을 받고 고향으로 채선은 내려와 신재효와 한동안 숨죽이며, 못 다한 불꽃을 태운다.
얼매나 태웠을까?
1884년 신재효는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나간다. (야속한 임아~·)
그녀는 삼년상을 지낸 후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으니~~. 아무도 몰러~?·
사랑하는 임을 따라 갔을까? 아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