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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14일 신년 제 3 강(아산UBF) 메시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말씀 / 디모데후서 4:1~22
요절 /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바울은 강력한 권고를 합니다.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민족으로 제자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증인되는 것과 제자 삼는 것은 모두 말씀을 전하여 이루어집니다. 디모데후서 말씀을 통하여 말씀 전파 사명을 굳게 영접하고 이를 실천하는 한해 보내시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권고에 앞서서 권고 명령의 근거와 권위를 제시합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이름으로 주는 권고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그의 나라를 두고 주는 명령입니다. 처음 오신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주로 오셨습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심판하시는 주님으로 오십니다.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이 존재하는 마지막 날, 만물에 대한 심판을 행하십니다. 그 날 모든 피조물은 심판 주 앞에 나가 행한 대로 심판 받아야 합니다. 마지막 날 심판대에 서면 정죄를 피할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심판주 앞에 낱낱이 그 죄와 허물이 드러나고 행한 대로 철저한 심판을 받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그날 영광의 주, 심판의 주로 오셔서 마귀에 속한 자들과 자기 유익과 자기 마음대로 행하며 산 인생들을 심판하십니다. 이 심판대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은 심판을 면합니다. 심판대에 서지 않습니다. 대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과 주의 이름으로 많은 고난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그들이 충성한대로, 충성한 만큼 상급 받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먼저 하나님과 재림의 주 예수님과 그의 나라 권위를 먼저 분명하게 언급하는 것은 말씀 전파 명령이 그만큼 중대한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말씀 전파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말씀 전파를 하지 않으면 재림의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엄중한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말씀 전파를 하지 않으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그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말씀 전파는 할 수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중대 사명인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엄하게 명하는 것은 “말씀 전파”입니다. 말씀 전파를 때를 얻어도 전하여야 하고 때를 얻지 못하여도 전하여야 합니다. 말씀을 잘 전할 수 있다면 지체하지 말고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 전하기 어려운 때라면, 말씀 전할 만한 때를 만들어서라도 기어이 말씀을 전하여야 합니다. 말씀 전하는 일은 쉬지 않고 해야 합니다. 말씀 전하는 일을 환경, 조건에 따라 지속하기도 하고 중단하기도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 중단할 수 없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 예수님의 말씀은 전하여야 듣는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10:13,14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생명의 예수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전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말씀 전하는 자가 없으면 세상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21절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죄에 거하는 세상이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는 없습니다. 먼저 주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생명의 말씀을 전해주어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어야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당장 우리는 서울역에서 스피커 설치하고 마이크로 하루 종일 외치는 사람과 함께 하여야 합니까? 하루 종일 소리쳐도 목이 따갑지 않는 약을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말씀 전하는 자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범사’란 단어 뜻으로는 ‘모든 일’을 의미하지만, ‘여러 가지 다양한 상황’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전하는 일을 다양한 상황에서 감당하여야 합니다. ‘오래 참음’과 ‘가르침’: 우리는 말을 해서 예수님을 전할 수 있다면 말을 하여 가르치면 됩니다. 그렇지만, 말씀 전하는 목자에게 있어서 인내심을 갖고 오래 참아주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가 문서 작성할 때, 글 쓰는 것만 문서가 아니라 글과 글 사이, 줄과 줄 사이의 적절한 여백도 문서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적절한 여백이 없으면 글자들이 시각적으로 부담됩니다. 말씀 맡은 사람은 말 하는 것만큼 인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말 많이 해서 가르치는 것에 열정 내는 것만큼 오래 참고 인내할 때, 감동과 힘을 하나님께서 더하여 주십니다. 말씀 전하는 목자는 오래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상황에서 인내할 줄 알아야 하는데, 특히 중요한 것은 사람 자체를 오래 참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 하는 말도 있지만, 사람만큼 인내가 필요한 존재가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경책”은 잘못된 행동이나 태도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인간관계에서 다른 사람의 죄 와 허물을 알았을 때, 모른 척 하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굳이 풍파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합니다. 상대방과 관계가 나빠지는 것을 피하고 좋게 지내려는 마음에서 모른 척 지나갑니다. 일부 특이한 사람들은 인터넷에 올리는 일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법적 책임까지 져야 합니다. 인터넷에 올리면 조회할 수 있는 범위가 엄청나게 커지기 때문에 정보통신과 관련한 개인정보나 사생활 보호를 법으로 정해두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누군가의 허물과 실수를 모른 척하는 것도 문제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모두 듣는 데서 ‘당신 큰 문제를 저질렀다’ 공개적으로 지적하면 그는 큰 상처가 될 것입니다. 말씀 전하는 목자는 개인의 죄와 허물을 깨닫게 해주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얼굴 붉히기 싫다고 다투기 싫다고 그냥 묻어두거나 좋게 지나가려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다만, 허물을 지적할 때, 기도해보고 생각해보고 많이 고민한 다음 개인적이고 인격적으로 알려주어야 합니다.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야 그 사람이 생명의 말씀 예수님 말씀을 마음에 잘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죄와 허물을 전혀 깨닫지 못하여 계속 죄와 허물 속에 있으면 말씀이 들어갈 자리도 없으며, 그는 말씀 안에서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없기 때문 입니다. 말씀 전하는 목자는 죄와 싸울 줄 알아야 하며, 이 때 매우 세심하고 인격적으로 경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경계”는 주의를 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집단으로 모여 죄를 합리화하고 죄를 일반화시켜 습관화된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경계”하여야 합니다. 일반화된 죄로 인하여 초래되는 당면한 위험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잘못된 행동들을 중단하라고 사람들에게 경고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경계”입니다. 디모데가 책임을 맡고 있는 에베소 교회가 처한 환경은 도시 전체가 우상숭배에 과도하게 열광하며 빠져있었습니다. 아르테미스 여신 숭배 축일이 되면 도시 전체가 더러운 우상숭배의식에 몰입되어 전 도시가 미친 듯 죄 지으며 광란에 빠져들었습니다. 디모데는 사도바울의 권고대로 이런 죄악의 도시에서 죄에 대하여 분명하게 경고하는 목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말씀 전하는 목자는 죄와 타협하며 적당히 숨죽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죄악에 대하여 분노하고 열정을 다하여 경고하는 일도 하여야 합니다.
우리 UBF목자는 기본적으로 권고를 많이 합니다. 온유하게,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옳은 길을 제안하며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는 다음세대 지도자들이 자라나는 대학에서 선교하고 제자양성 합니다. 인격적으로 권하고 조언하면서 말씀 전하는 사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여러 자세가 있음을 배웁니다. 개인적일 수도 있고 공개적일 수도 있습니다. 인내할 수 있고, 분명하게 회개를 촉구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활이 말씀 전파를 중심에 두는 것입니다. 이를 실천하려면 기도와 연구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말씀을 전파할 때 구원의 역사가 있습니다. 말씀을 전파할 때, 목자도 생명의 열매를 맺습니다. 목자가 생명의 열매를 맺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보장받는 일입니다. 다니엘12:3절에는 기록하였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우리는 끊임없이 말씀을 전파하여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빛나는 상급 받는 주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예로부터 인간의 본질을 육체와 영혼으로 보는 철학자들이 있어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육체와 혼과 영으로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런 칼로 자르는 듯한 구분이 아니더라도 우리 인생은 실제로 대부분 몸이 원하는 바를 따릅니다. 어떤 사람은 감정에 충실하기도 합니다. 대학에 들어와 지성적인 청년들은 논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져 타당성 있는 결정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몸의 욕구를 따르든지, 감성에 지배당하든지, 합리적인 결정을 좋아하든지 이것들은 모두 영의 소원, 하나님과 연결되는 영적인 덕목과 거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영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을 가진 존재이면서도 영적인 추구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 뜻을 이루는 것이 영적인 삶입니다. 이런 영적인 목표를 세우고 영적인 목표를 이루고자 하면 약간 고난과 연단은 있지만 우리 몸과 마음과 영혼이 전체로 평안하고 건강합니다. 이런 삶을 스스로 알아서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음의 원하는 대로 살고 시대의 풍조를 따라 사는 세상은 진리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원하는 대로 살고 시대 풍조를 따르는 세상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자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수월한 일일 수는 없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마음의 원하는 대로 살고 시대 풍조를 따르는 세상 사람들 속에서 말씀을 전하는 일은 반드시 고난을 동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대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12제자들은 영광의 주가 되리라 기대했지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고난의 주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을 전하는 전도자들도 고난 받아야 합니다. 고난은 잘 감당하면 예수님과 함께 영광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는 영광을 보장하는 이 고난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환영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못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여전한 죄를 지어서 내 죄로 인한 괴로움을 겪기도 하기 때문에 말씀 전파 위한 고난을 실수로 인한 괴로움과 구별하지 못하고 무조건 거부하는 일도 많습니다.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모든 일에 신중하다는 것은 정신을 차리고 분별력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죄 많은 세상에서 분별력을 가짐으로써 고난을 감당할 수 있고 전도자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전제’는 제물의 피를 받아 두었다가 이것을 붓는 제사입니다. 제사의 끝 순서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완전하게 다 부어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감할 때가 되었습니다. 순교의 시간이 다가 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만 하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 전파 위하여 자기의 모든 삶을 쏟아 부어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사도 바울의 삶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삶이었습니다. 그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세는 최종 지점까지 끝까지 완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죽기까지, 인생의 종점에 이르기까지 믿음을 지키고 믿음을 따라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은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성 아래로 던져졌었습니다. 추위에 떨기도 하였고 여행하다가 고단하고 위험하고 막막한 상황을 많이 겪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 전파를 위하여 이런 많은 고난 받은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의의 면류관을 주시려고 준비해두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면류관은 그냥 왕관과 다릅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신들이나 중요 인물들이 착용하는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왕관은 금과 보석으로 장식하고 왕권을 상징하지만, 면류관은 빛나는 광선, 빛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다니엘서 말씀과 부합하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마지막으로 디모데에게 로마로 오라고 권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올 때 겉옷과 성경도 같이 가져오라고 합니다. 바울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성경 말씀을 사랑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직접 만나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자기의 모든 것을 디모데에게 계승해주고자 합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말씀 전파하며 살겠다고 하였지만, 고난을 끝까지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누가와 같이 끝까지 함께 하는 신실한 동역자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가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마가는 선교여행 하다가 어려울 때, 함께 하지 않았던 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14~16절을 보십시오. 알렉산더는 배교하였을 뿐 아니라 사도 바울의 재판에 불리한 증언을 거짓으로 하였습니다. 알렉산더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교회에 지대한 피해를 입힌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알렉산더와 같은 사람들에 대하여 원한 맺힌 저주를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 대한 심판을 주의 손에 맡깁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의 주위에는 충성하는 사람도 있고 실족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배교하여 피해와 상처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곁에 오셔서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 바울 곁에 오셔서 그를 도와주셨습니다. 2차 선교여행 때 바울이 예루살렘에 갔다가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할 때 급히 로마 천부장이 로마군 진지로 데리고 들어갔는데, 이 때 역시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찾아 오셔서 말씀으로 힘주셨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던 중 배가 파선하기 전에도 예수님께서는 바울 곁에 오셔서 그를 보호하셨으며, 외롭게 로마에서 재판 받고 누가 외에는 사람이 다 떠났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바울에게 오셔서 힘주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면 다른 사람들이 실족하든 상처주고 괴로움을 주든 개의치 않습니다. 줄기차게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말씀 전파자는 예수님의 도우심과 예수님의 보호하심을 많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19~22절을 보십시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가장 모범적인 목자 가정입니다. 오네시보로는 에베소에서도 바울을 동역하고 로마에 와서 바울을 도운 충성스러운 동역자입니다. 에라스도는 고린도 출신인데 디모데와 합심하여 사도 바울의 선교역사를 동역하였습니다. 드로비모는 에베소 출신으로써 에베소 형제들의 헌금을 예루살렘까지 전달하고 사도 바울을 잘 동역한 사람입니다. 으블로는 헬라인이고 부데, 리노, 글라우디아는 로마인입니다. 그중 글라우디아는 자매님입니다. 네로의 핍박이 강력한 때, 로마에 있는 교회는 핍박을 견디며 점점 자라나 결국은 로마의 모든 세계가 주의 말씀을 듣기까지 성장하였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사람들은 핍박받는 소수였으나 결국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생명역사의 선구자들입니다. 말씀 전파는 하나님 나라 전파입니다. 말씀 전파는 생명 전파입니다.
실제적으로 보면, 말씀 전파할 때 전하는 사람이 더 큰 은혜 받습니다. 우유배달 받아먹는 사람보다 우유배달 하는 사람이 더 건강해 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씀 전파할 때, 본인이 말씀의 은혜를 갑절로 받고 말씀의 능력이 어떻게 역사하는지 체험합니다. 말씀 전파할 때, 예수님을 모르던 사람들은 빛을 봅니다. 말씀 전파할 때 세상이 예수님을 압니다. 말씀 전파할 때, 삶의 존재 이유를 모르던 사람이 삶의 가치를 깨닫습니다. 말씀을 전할 때,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떠난 죄인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전하여야 죄에 대하여 알고, 구원에 대하여 알고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 무엇인지 영접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살아나는 것이 말씀에 있고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그래서 생명의 사도라 칭함 받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같은 죄의 상처를 심각하게 받은 두 사람 후배가 우리 학교에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말씀을 받았고 한 사람을 말씀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말씀을 받지 못한 후배는 죄의 상처 준 사람을 친구와 함께 살인하는 결말을 맞았습니다. 같은 죄의 상처를 받았지만, 예수님 말씀을 받은 후배는 모든 죄의 상처를 씻음 받고 영혼이 나음 받았습니다. 예수 안에서 믿음의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고 올 3월에는 그의 딸이 결혼한다고 합니다. 예수님 말씀이 전해지느냐 마느냐에 따라 인생이 이렇게 큰 변화와 차이를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해처럼 복음이 들어가기만 하고 흘러 내보내지 않아서 짠물 인생이 되지 말고 푸른 갈릴리 호수처럼 들은 복음을 부지런히 흘러 내보내서 생명력이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 요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아산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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