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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163.7]
특집 어린이날 제정 100주년
_어린이날 제정의 주역들(2)
소파 방정환 - 영원한 어린이의 벗
성강현_ 직접도훈, 대동교구.동의대학교 교수
어린이 운동의 아이콘, 소파 방정환
소파 방정환은 어린이운동의 아이콘이다. 방정환에 관한 이야기는 넘쳐 난다. 그만큼 어린이운동에서 방정환의 역할이 지대했음을 뜻한다. 따라 서 여기에서는 방정환이 어린이운동에 전념하게 된 과정을 중심으로 간략 하게 서술하고자 한다.
영원한 어린이의 벗 방정환은 1899년 11월 9일 서울 야주개(지금의 당 주동)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던 방경수方慶洙의 장남으로 태어났 다. 어려서 천자문을 익히고 7세에 미림보통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웠 다. 부친의 사업 실패로 힘겹게 미림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선린상업학 교로 진학하였지만 집안 사정으로 결국 1년 만에 중퇴하였다.
부친의 뜻 에 따라 상업학교에 진학하였지만 그는 신문화를 탐닉하였다. 당시 그는 최남선이 발간한 『소년』, 『붉은 저고리』, 『새별』 등을 읽었다. 그는 선린상 업학교를 중퇴 후 심부름꾼을 하며 독학에 뜻을 품었다고 당시를 회상하 기도 하였다. 장남이었던 소파는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17세였던 1915 년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의 사자생寫字生으로 취직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평생의 지인 유광열을 만나 독서를 즐기며 문학 이야기를 나누었다.
힘든 상황에서도 『청춘』, 『유심』 등에 습 작을 투고하며 재능과 꿈을 키워나 갔다. 소파 생애의 일대 전기는 결혼이 었다. 소파는 1917년 5월 28일 천 도교주 손병희의 셋째 딸 손용화와 결혼하였다. 손병희의 제자로 부친 과 친분이 있었던 권병덕의 소개였 다. 결혼 후 사자생에서 벗어난 그 는 1918년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 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해 중단했 던 학업을 이어나갔다. 1918년 7월 소파는 유광렬, 이중각, 이복원 등 과 ‘경성청년구락부’를 결성하였다.
‘경성청년구락부’는 방정환을 비롯해 천도교 청년과 일반인으로 만들어진 민족운동을 지향하는 청년운동의 색채를 띤 일종의 비밀결사였다가 1918 년 7월에 개방되었다. 이 모임의 자금을 방정환이 지원한 것으로 보면 그 는 결혼 이후 천도교의 지원으로 활발한 대외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소파는 1918년 12월 봉래동 소의소학교에서 열린 ‘경성청년구락부’ 망년 회에서 첫 자작 각본인 소인극 ‘○○령(동원령)’을 연출·주연하였다. 이 는 소파가 어린 시절부터 꿈꾸었던 일을 실행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역량 은 천도교소년회와 어린이운동을 통해 꽃피었다. 1919년 1월 ‘경성청년구 락부’는 기관지로 『신청년』(1919.1)을 창간하였다. 이 모임은 약 200명의 회원이 문예, 체육, 음악부를 두었는데 『신청년』은 문예물 중심으로 보아 문예부에서 만든 것을 보인다. 방정환은 천도교의 정신적, 물질적 지원 속 에서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다.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소파는 보성사에서 발행한 『조선독립신문』를 오일철吳一澈과 함께 집에서 등사판으로 박아 배부하고 독립선언서를 돌리 다가 3월말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가 일주일 만에 풀려났다. 3·1독립운 동으로 천도교단은 지도부가 체포되고 자금도 동결되어 어려움을 겪게 된 다. 그러자 청년들이 교회 재건을 위해 나섰다. 1919년 9월 2일 청년교리 강연부를 조직할 때 소파는 간의원幹議員으로 참여하였다. 이듬해인 1920 년 4월 25일 청년교리강연부는 ‘천도교청년회’로 개편되었다. 방정환은 3·1독립운동 이후 천도교 재건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그는 자 신의 장점을 살려 천도교청년회에서 만든 출판 기관인 개벽사에 김기전, 차상찬, 강인택 등과 함께 사원이 되었다. 특히 김기전은 이후 어린이운동 의 동반자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당시 방정환은 박래홍, 김기전과 함께 어 린이운동의 구체화를 논의하고 있었다.
개벽사의 사원으로 ‘잔물’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실던 소파는 이해 9월 돌연 일본으로 떠났다. 명분은 개벽사 동경특파원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급격한 사회활동 탓이었다. 소파는 1920년 『신여성」의 고문으로 참여하였 고, 다양한 강연 활동으로 일경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손병희의 사위로 요시찰 대상인 그가 전국을 다니며 진행했던 강의가 중단되거나 취소되었 던 점은 그의 강의가 당국을 긴장시켰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그의 뛰어 난 강연도 한몫했다. 방정환은 1920년 9월부터 1923년 9월까지 약 3년간 일본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천도교 소년회, 일본 유학생 강연대, 어린이 운동, 장인의 와병과 환원의 가정사 등으로 1/3의 기간은 국내에서 지냈 다. 일본에서 그는 개벽사 동경특파원,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장, 색동회 창립, 도요대학 청강생, 『어린이」 창간 등 1인 5역을 맡아 왕성하게 활동 하였다.
천도교소년회 창립 주도
천도교청년회는 김기전과 방정환 의 요구로 어린이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21년 4월 산하에 소년 부를 특설하였다. 그러나 김기전과 방정환 등 어린이운동의 독자성을 강조와 소년회원의 급증으로 한 달 만인 1921년 5월 1일 천도교소년회 라는 별도 조직을 만들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김기전이 총재로 어 린이운동을 총괄하였다. 출범 당시 소파의 이름이 빠져 있는 이유는 그 가 일본에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이 었다. 그렇다고해서 그의 역할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해 『어린이」 창간의 실무를 맡았던 이정호는 김기전과 방정환의 노력으로 천도교소년회가 창립되었다고 하였다. 소파가 어린이운동을 구상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협력 없이 이룰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린이운동의 정신이며, 방향을 잡는 일이다. 1921년에 발족한 천도교소년회로 시작하여 1923년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하려 할 때 저마다의 가슴에 독립의 간절한 염원이 있었음 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공공연하게 입 밖으로 부르짖지는 못해도 3·1운 동의 교훈을 간직하여 그 뜻을 계승하기를 다짐하였다. 어린이 운동과 독 립운동은 하나의 궤도를 달리는 양쪽 바퀴와 같았다. 이러한 이상과 민족 의지를 글로서 가장 잘 담아내며 어린이운동을 선도한 것이 『개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방정환에게 개벽사는 자신의 꿈을 담아내는 그릇과 같았다. 일본에 있으면서 소파는 어린이운동가로 완전히 자리잡았다.
그 이전 다양한 활동을 정리하고 어린이 운동에 매진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시기 는 대체로 1922년으로 보인다. 그는 일본에 있으면서 그곳의 아동문화로 부터 충격을 받았다. 책과 잡지가 넘쳐나고 신기한 장난감이 쌓여있는 가 게를 보면서 조선의 어린이들의 고충을 떠올렸고 어린이운동에 올인하기 로 마음을 작정하였다. 1921년 7월에 출간한 번안동화집 『사랑의 선물」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것도 소파가 어린이운동에 전념하는데 기여하였다. 이 책은 그를 동화작가로서 각인시켰다.
일본에서 아동문화의 발달을 확인한 소파는 어린이를 위한 잡지 『어린 이』 창간에 나섰다. 1922년 12월에 국내에 들어와 있으면서 그는 김기전, 조정호 등 개벽사 사원들과 함께 『어린이』 창간에 나섰다. 그러나 반대하 는 이가 많았지만 방정환과 김기전은 필요성을 주장하며 창간 작업에 박 차를 가했다. 그가 국내에 있으면서 『어린이』 창간 작업은 순조롭게 이루 어졌다. 1923년 1월 15일 동경으로 돌아온 소파는 『어린이』 의 창간과 ‘색 동회’ 조직을 결성하면서 5월 중순까지 머물렀다.
방정환은 일본에 오기 전에 국내에서 『어린이』 창간호의 편집을 마무리한 상태였다. 이는 조정 호와의 편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어린이』 창간은 무모한 일이었으나 방정환, 김기전, 조정호 등이 합심하여 준비하였고 1923년 3월 1일을 기 해 출판하려고 하였으나 일경의 트집으로 3월 20일 빛을 보았다. 창간 이 후 방정환은 일본에 있으면서 『어린이』의 편집을 주도하였고 9월 국내에 정착한 이후에는 『어린이』 발간에 심혈을 기울였다.
방정환이 주도한 『어린이』에는 1920년대 당시 “일본 아동 잡지들의 문 학적 성과가 집약적으로” 나타나 있는데, 방정환의 아동관과 교육 사상이 구체적인 형태를 확립하며 실천해 가는 과정에 좋은 참고 자료가 되었다. 소파는 일본의 다이쇼기에 발간되던 다양한 잡지를 섭렵한 후, 조선 어린 이들에게 알맞다고 생각하는 요소들을 뽑아서 『어린이』 편집 시 활용했던 것이다.
일본 유학 중 색동회 조직
1923년 1월 일본에서 소파는 ‘색동회’ 조직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가 이 일에 심혈을 기울인 이유도 『어린이』를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어린이운동을 위해 필요한 동요, 동 화 등 아동 전문가를 양성해야 했는 데 소파는 ‘색동회’를 통해 이를 해 결하려 하였다. 방정환의 노력으로 일본의 유학생들을 결집해 어린이 문화운동 단체인 ‘색동회’의 창립을 이끌어냈다. 소파가 주도한 몇 차례 의 준비모임을 가진 후 1923년 5월 1일 ‘색동회’ 발회식을 개최하였다.
이때 참석한 사람은 손진태·윤극영· 정순철·방정환·고한승·진장섭·조재호 8인이었다. ‘색동회’는 발회 직 후 하기夏期 사업으로 전선全鮮 소년지도자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소파 는 ‘색동회’를 조직하면서 국내와도 긴밀히 연락하여 5월 1일의 소년운동 협회의 전국적인 어린이날 행사를 위해 사전에 진장섭을 국내로 보냈다. 진장섭은 어린이날과 관련해 ‘색동회’가 준비한 내용을 전하고 전선 소년 지도자대회를 공동으로 개최하자는 의견을 어린이사에 전달하였다.
소파가 ‘색동회’ 활동을 중시한 이유는 어린이 문화운동을 위해서였다. 소파는 자신이 혼자의 능력으로 어린이 운동을 확산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어린이를 위한 동요의 작곡, 동화의 창작 등 어린이 문 화운동에 함께할 동지를 규합하려고 했다. ‘색동회’는 방정환의 의도대로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어린이운동의 주축이 되었다.
1923년 9월 국내에 정착한 이후 소파는 『어린이』의 발행인으로 어린이 운동가로 활약하였다. 1924년과 1925의 어린이날은 방정환의 역량이 발 휘된 행사였다. 1924년의 어린이날은 천도교에서 100원, 『조선일보』, 『동 아일보』 각 20원을 찬조하였다. 4일간에 걸친 대장정의 백미는 풍선 날리 기였다. 소파의 아이디어로 진행된 이 행사는 “어린이 만세” 삼창과 함께 풍선을 하늘 높이 띄웠다. 장관을 이룬 수천 개의 풍선을 보며 어린이들은 꿈과 희망을 싹틔웠다. 당시 소파는 어린이날을 준비하며 코피를 줄줄 흘 렸다고 한다. 그러나 어린이를 위한 마음으로 몸이 상하는 것도 개의치 않 았다.
소파는 강연과 동화구연의 명수였다. 소파의 강연을 들었던 평안북도 용천군 김중환 독자가 『어린이』에 보낸 소감을 통해 방정환의 열정을 확인 할 수 있다.
아아 사랑과 정성의 덩어리이신 방정환선생님 그 무서운 더위에 바쁘신 몸으로 이 깊은 압록강 끝까지 오셔서 낮과 밤으로 소년 문제를 강연해 주실 때 선생 님의 두루마기까지 흠빡 흠빡 젖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어린이를 위하여 겨울이나 여름이나 낮이나 밤이나 몸을 돌보지 아니하시고 애쓰시는 은혜를 어 떻게 보답하겠습니까. 오즉 오래도록 안녕하시기만 바랄 뿐이오며 그때 상경하 셔서 안녕하신지 궁금합니다.
소파는 혼신을 다해 강연과 구연동화에 임해 참석한 어린이들을 감동시 켰다. 한편으로 어린이들은 소파의 건강을 염려하였다. 소파는 『어린이』의 기사 작성과 편집 시간도 부족하였지만 어린이날 행사, 강연, 동화구연 등 으로 피곤이 누적되었다. 소파의 과로로 인해 이정호가 대신 편집일을 맡 아 보았다는 사정 이야기도 자주 등장한다. 당시 5종의 잡지를 간행하던 개벽사가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방정환은 이런 경제적 문 제로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파의 건강은 빨간불이 켜졌다.
1920년대 중반을 넘어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갈등은 소파 를 더욱 힘들게 했다. 어린이 운동마저도 이러한 상황은 여지없이 나타나 어린이날 행사의 주도권을 두고 양측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급기야 1926년 어린이날 행사는 소년운동협회와 오월회의 두 단체에서 실랑이를 벌이다 순종의 서거로 행사 자체가 무산되었다. 여기에다 『개벽』까지 폐간 되어 소파의 실의는 더 깊어갔다. 이런저런 어려움에 피로가 누적한 소파 는 결국 쓰러졌다. 건강했던 소파는 1926년 9월 한 달간 누워 있었다. 『어 린이』의 편집이 곤란할 정도로 두통이 심했다.
1931년 들어 소파는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일주일 간 코피를 흘리 는 날도 있었다. 그래도 병원을 찾지 않던 소파를 박진이 억지로 입원시켰 다. 입원 당시 소파는 회복할 수 없는 상태였다. 소파는 임종을 지켜보던 가족과 지인들에게 “우리 어린이를 어찌하오?”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겼 다. 눈을 감기 직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두 손을 세 번 들어 올렸다고 한다. 곁에서 지켜보던 차웅렬은 “천도교 만세. 어린이 만세, 개벽사 만세”였다고 들었다. 영원한 어린이의 벗 소파는 이렇게 흑마차를 타 고 떠났다.
참고문헌 :
유광렬, 「소파 방정환론」, 『새교육』, 1972.10; 염희경, 『소파 방정환 연구』, 인하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7; 방운용 엮음, 『소파선생 이야기』(방정환 문학전집 제10권), 문음사, 1981; 성강현, 「소파 방정환의 일본 유학 시절 활동」, 『방정환연구』 6, 2021; 이 상금, 『소파 방정환의 생애 사랑의 선물』, 한림출판사, 2005; 소파, 「소년의 지도에 관하 여 –잡지 『어린이』창간에 제하여 경성 조정호 형께」, 『천도교회월보』 150, 1923.3; 박종 진·최경희, 「1920년대 아동 자유화 운동과 아동 문예 잡지 -『어린이』와 『긴노후네』를 중심으로-」, 『한국아동문학연구』 33, 2017; 「독자담화설」, 『어린이』, 19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