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예화 1 : 나는 행복한 남자
출처 : 안 민 / 행복 콘서트 / 규장 2006년
사람들은 전부 1등을 해야 행복한 줄 안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특히 더 그런 편이다. 어떤 성악가를 만났는데 그는 함께 있는 동안 한 번도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자기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서야 마땅한 사람인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에서 부르지 않는다고 하며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이 노래를 무척 잘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노래를 한 번 들어 볼 기회가 있었는데, 들어 보니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는 절대로 메트로폴리탄에서 그를 오라고 할 일이 없겠다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은 분명히 마음속으로 자기가 세계적인 성악가라고 생각하는데 남들이 안 알아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와는 생각이 좀 다르다. 1등 무대에 서야만 행복한 것은 아니다. 세계 최고의 대우를 받는 성악가라고 해서 과연 언제나 행복할까? 파바로티가 노래를 잘할까, 내가 노래를 잘할까? 비교 자체가 우습게 보이는가?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파바로티보다 행복한 남자라는 사실이다. 나는 정말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행복을 나누며 산다. 하나님은 우리 부부가 마음과 삶과 고백을 담아 최선을 다해 노래할 때 놀랍고 위대한 일들을 보게 하셨다.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이 우리의 작은 노래를 통해 평안과 기쁨과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생명을 맛보게 하셨다.
◆ 예화 2 : 예수님이 여신 잔치
출처 : 김 길 / 충만 / 규장 2011년
한번은 뷔페 음식점에서 전도하기로 했다. 꼭 비싼 뷔페에서 전도를 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인간적인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삶에 지치고 힘든 이웃들에게 최고의 식사를 베풀고 싶어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 안에 주셨기에, 그 마음을 받았다. 삶이 힘든 사람들이 초청받아 예수님의 성품과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면, 위로부터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 마음과 분위기를 받은 것이다.
일을 진행하는 중에, 자매 리더 한 명이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김포에 사는 어려운 친구가 있는데 자기 생각에 불러도 오지 않을 것 같고, 온다 해도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오기에는 너무 먼 길이라 아예 초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사람은 데리고 와야 할 것 같아서 금방 올 수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 오게 했단다. 그런데 애초부터 마음에 두었던 김포에 사는 친구를 향한 부담감을 떨치지 못해 결국 전화를 했는데, 의외로 그 친구가 아주 쉽게 오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내가 데려오기 편한 사람만을 초대하려 했던 것을 회개하는 글이었다.
김포에 사는 그 친구는 교회에서 차를 대절해 데려오도록 했다. 그 비용이 꽤 들었지만, 재정의 주인도 예수님인데 우리가 무어라고 걱정하겠는가. 예수님이 위로하고 싶은 이들을 섬겼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6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식사를 하는데 은혜가 넘쳤다. 하나님이 기뻐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 주님이 주신 마음으로 초청했던 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이분들이 예수님을, 교회를 깊이 알게 해 주세요.’
[KTSM 최승호 묵상]
묵상 1 : 끝자리에 앉으라 (눅 14:1-11)
1) 잘못된 기준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5)
안식일이라도 아들이 우물에 빠졌으면 즉시 건져낼 것이다. 심지어 자기 집 소가 빠졌어도 즉시 건지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수종병(몸이 붓는 병)든 사람을 고치는 일에 대해서는 율법을 어긴 것으로 정죄했다. 심지어 이들은 이렇게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을 트집 잡아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했다(요 7:19-23).
이것이 인간들이 만든 종교의 무서움이다. 어떤 사람을 공격하고자 한다면, 그를 정죄할만한 일을 성경에서 찾아내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라고 우겨대니(요 16:2) 제법 공정해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트집 잡고 있다. 이들의 판단 기준은 무엇일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일까? 아니면 단지 내 편인지 아닌지일까?
과거에 한 자매가 자기와 경쟁 관계에 있는 자매를 공격하였다. 공격 내용은 그 자매가 찬양 책에 그려 넣은 삽화 중 하늘을 향해 찬양하는 여인의 손가락을 너무 길게 그렸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삽화를 그린 그 자매가 허영과 사치에 들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다. 너무나 확신을 갖고 말해서 듣는 사람들이 모두 미혹되었다. 하나님 말씀을 끄집어내고 거기에 자신의 과장된 해석을 곁들이면서 트집을 잡으니까, 제법 공정해 보이지만, 사실은 침소봉대이며, 털어서 먼지 내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미혹해도 안 되고, 이런 것에 미혹되어서도 안 된다.
오늘날 상당수의 판단 기준은 진리나 정의가 아니라, 내 편인지 아닌지가 기준이다. 나도 종종 그런 실수를 범한다. 이것이 참으로 부끄럽고, 삼가야 할 일이다. 주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경고하셨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요 7:24)
2) 말석에 앉아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10)
90년대 한참 나라와 민족의 회개 운동을 전개할 때였다. 당시 교계의 지도자들이 모이는 모임에 여러 목사들이 참석했다. 여기에 팔십 세가 넘은 교계의 원로 한경직 목사가 나타났다. 그런데 가장 상석에 한국의 아주 큰 교회 목사가 앉아있었는데, 그는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당시 모임을 주최했던 형제들은 몹시 불편했지만, 자리를 양보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한경직 목사는 전혀 개의치 않고 아무 자리에나 앉았다. 그런 것이 아예 불쾌하지 않으신 분이었다. 이전에 이분을 잠깐 곁에서 지켜본 적이 있었는데, 그의 몸에 밴 겸손은 참으로 감동이었다.
그런데 이런 예화를 들을 때, 겸손한 한경직 목사에게 감동하기보다는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그 목사에 대해 분노가 더 큰 사람들은 여전히 바리새인처럼 율법적인 종교인일 가능성이 크다. 하나님 말씀을 자기보다는 남에게 적용하고 비판에만 열을 올리는 사람일 수 있다.
성도라면 섬기는 것이 익숙하고, 말석이 불편하지 말아야 한다. 보여주기식이 아니라, 진심으로 말석이 편해야 한다. 우리 주님 같은 분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면, 나 같은 자가 마구간을 불쾌하게 여기면 되겠는가? "끝자리에 앉아라." 하나님 나라가 세상 나라와 다른 모습이 상석이 아닌 말석이 경쟁 자리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형제들의 따뜻함과 사랑이 느껴진다.
지금까지 신앙생활 하면서 별것도 아닌 것으로 자기를 무시했다고 길길이 뛰는 사람들을 무수히 보아왔다. 평소에는 겸손한 체하고 섬기는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주님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닌 율법적인 외식일 뿐이다. 우리는 겸손하라, 섬기라는 율법 때문에 겸손과 섬김을 애쓰는 자들이 아니라, 진정한 섬김과 겸손을 직접 보여주신 우리 주님으로부터 보고 배운 자들이다.
주 예수님, 기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참으로 섬김과 겸손을 주님으로부터 더욱 배우길 원합니다. 세속화된 마음을 고쳐주시고, 새롭게 해주십시오.
묵상 2 : 하나님 나라 시민의 세계관 (눅 14:12-14)
1) 두렵건대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12)
우리는 주고받는 문화에서 산다. 일방적으로 주는 문화는 생소하다. 그래서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과는 상종하기 싫어하고, 친구 관계에서도 내가 계속 사야 하는 친구와는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오히려 되갚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신다.
두려워하라고 번역된 '메포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려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가라지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할 때 사용한 단어이며(마 13:29).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하라고 할 때 사용한 단어다(히 3:12). 일어나도 괜찮은 하찮은 일이 아니라, 일어나면 큰일이 나는 염려다. 사람들이 되갚을 것을 기대하지 말라가 아니라 오히려 되갚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시다니! 세상에! 도대체 왜 되갚을까 봐 염려해야 하는가? 그들이 갚으면 모처럼 천국에 쌓아둔 것이 무효화 되기 때문이란다. 당신에게는 이게 염려 대상인가?
이런 말씀에서 충격을 받지 않으면, 둘 중의 하나다. 너무나 잘 실천하여 충격받을 일이 없는 훌륭한 사람이거나 어차피 주님 말씀을 대강 들으며 실천할 생각이 없는 자다.
이런 말씀 앞에서 하나님 나라에 갓 입문한 사람들은 천지가 뒤집히는 문화적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말석이 경쟁 자리가 되고, 우두머리가 섬기며, 되갚을까 봐 염려하는 세상. 과연 세속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별천지에 적응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이토록 다를 수 있음은 거기에 속한 성도들의 세계관이 세상 사람들과 확연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성도의 세계관 속에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계셔서 다 보고 계시며, 최종 평가는 오로지 하나님께서 하신다. 그리고 천국에 쌓아둔 보물만이 영원하다. 구태여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으며 세상 재물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다. 모름지기 문화란 가르침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보고 젖어 드는 것이다. 매일 남더러 똑바로 살라고 요구하지 말고, 나 자신이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 올바로 살자. 신앙이 있는 당신이 먼저 이런 하나님 나라 문화에 젖어 들고 익숙해져야 뒤에 들어온 하나님 나라 시민도 자연스럽게 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여전히 세속적 가치관이 내재하여 있는 저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새롭게 해주십시오. 주되 되갚을 것을 기대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오히려 되갚을까 봐 염려하겠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에 목말라하지 말고, 오로지 주님의 칭찬만을 기대하는 신앙인이 되게 해주십시오.
묵상 3 : 잔치 비유의 해석(눅 14:15-24)
1) 청함을 받았으나 사양한 자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18)
예수님의 유명한 잔치 비유다. 이 비유는 단순히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과 거절한 사람에 대한 비유가 아니다. 그러기에는 여기 등장인물들이 너무나 특이하다. 본래 잔치에 초청하면 누구는 받아들이고, 누구는 거절하건만, '다 일치하게' 사양한 이 사람들과 거기에 대비해서 결국 잔치에 참여한 자가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이고 강권해서 데려온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며 복음을 거절한 이스라엘과 덕택에 은혜를 받게 된 이방인과의 관계를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초청된 최초의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려고 오셨다고 하셨다(마 15:24). 구원 대상의 첫째는 유대인이었다(롬 1:16).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 나라의 본 자손으로 인정된 자들이다(마 8:12).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고, 복음을 대적하였다. 한마디로 모두 일치하게 사양했다(18).
초청한 사람들이 거절하자, 초청한 사람이 무안하게 되었다. 그들의 거절이 아무리 그럴싸하고 신사적으로 보일지라도 핑계에 불과하고, 초청한 사람에 대해 별 관심이 없음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결국 주인은 진노해서 종들을 보내어 시내 거리와 골목에 있는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 맹인,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했다. 이들은 누구일까? 바로 이방인들이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멸시하고, 차별했던 자들이다.
시내의 거리와 골목은 온 세상 구석구석을 상상하게 한다. 종들의 수고는 복음 전도자들의 수고와 땀을 생각하게 한다. 이렇게 사람들을 채웠음에도 아직 자리가 남아있다고 하자, 이번에는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데려오라고 했다. 복음 전도자들의 얼마나 열정적이고 강권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지를 암시하신다.
우리 선교회에서 함께 일하는 분 중에는 이렇게 강권적으로 예수님을 믿은 분이 있다. 이 여선생님이 어느 중학교에 처음 발령받아서 근무할 때다. 퇴근하려고 하는데,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선배 교사가 이 여선생님의 가방을 뺏어서 가길래 왜 그러냐고 가방 돌려달라고 쫓아가다가 졸지에 성경 공부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계속 참석했고, 결국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지금은 누구보다 충성스러운 주님의 일꾼이 되었다. 놀라운 일이다!
2) 잔치에 참여한 자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21)
이 잔치 비유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먼저 문맥상으로 볼 때 이 비유 바로 앞에서 주님께서는 잔치를 베풀려면 갚을 수 있는 자들을 초청하지 말고, 갚을 수 없는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고 하셨다. 그래야 복이 된다고 하셨다(눅 14:13). 그리고 바로 이어서 드신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바로 그러한 은혜의 삶을 실천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오늘, 이 비유에서 잔치에 참여한 자들은 전혀 갚을 능력이 없는 자들이다. 이 비유에서 '가난하고 몸 불편하고 저는 자들과 맹인'들로 표현된 자들이 바로 우리들임을 아는가? 자존심이 상하는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이 말씀이 너무나 감사하다. 나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런 초청이었기에 내가 지금, 이 잔치 자리에 앉아있을 수 있다. 주인의 뜻으로 참석했기에 오히려 당당할 수 있다. 우리의 구원이 나의 잘남에서 비롯되지 않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다시금 느낄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당신이 돌아볼 때 잔치석에 앉은 사람들의 면면이 아무리 봐도 시원치 않아 보일 것이다. 하긴, 모두가 거지, 장애인 출신인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으랴.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잔치 자리에 앉아있냐고 비판하면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용납하기 힘든 건방짐이다. 그들 눈에는 나도 별 볼 일 없다. 그저 화려한 장식과 음식에 원더풀을 연발하며, 감사하며 잔치를 즐기는 것이 주인의 기대하는 바다.
그리고 조금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면, 이렇게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잔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너무나 황송하여 눈치만 보고 감히 음식에 손도 못 대고 있는 자에게 나도 그런 자이니 두려워 말고 식사를 즐길 것을 권면하면 멋질 것이다.
종종 자신이 너무나 부족하여 구원받지 못한 것 같다고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주님의 은혜를 알게 해주는 것이 도리다. 서로 자격 운운하며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하고, 기쁨이 충만한 분위기에서 주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도리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