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곰샘 수업후기 박지희
불교의 초기 경전 잉해 → 다른 책 이해가능
19~20세초 동서양의 사상 교류가 무르익었다.
동양(오리엔탈리즘) 신비스럽지만 열등, 서양 문명은 이성적, 이분법을 갖고 있다.
문명안에 온갖 잔혹함과 파괴가 같이 있다.
문명이 불러온 전쟁, 이성과 문명 이전엔 세계 전쟁이 없었다.
이 전쟁 중 온갖 사유가 등장하고 6.8혁명등에 영향을 미친다.
지금은 동서양을 나누기가 어렵다.
서양인이 오히려 동양적이고, 동양은? IT강국에 화려하고 첨단화 되어있다.
미국은 짧은 역사를 지키려 속을 바꾼다. 하여 겉은 촌스럽다.
우리는 역사에 콤플렉스가 없다. 경복궁만 남겨두고 10년이면 빌딩을 무너뜨리고 새로 올린다.(미국 200년, 서울 600년)
1. 자유인 조르바
조르바는 산다는게 말썽이라고 말한다. 국가, 사회, 문명이 말썽이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정신의 여정 속에서 조르바를 만들었다. 두목이 진리를 밟고 있어 조르바가 조르바답게 보이는 것이다. 자기 정신의 여정이 없으면 조르바를 형성할 수 없다.(불교) 그렇지 않으면 노망난 할아비일뿐, 조르바를 알아본 두목이 있어 더 조르바다움.
정신과 육체의 여정이 크로스 되는 지점, 이것이 위대하다.
교차되는 것, 공감하는 지점이 있다. 이 지점이 곧 불교이고 자유이다.
문자와 몸이 하나되는, 조르바는 살면서 몸으로 터득하고, 두목은 문자로서 터득한다.
인간은 곧 자유라는 것을.
조르바는 죽고, 언어가 되었다.
조르바의 몸이 문자를 통해 자유를 얻게되었다. 몸에 갇혀있을 필요가 없다.
두목도 해탈을 얻었다.(글을 쓰는 행위도 몸이다.)
정신과 몸이 하나를 이루면서 각자 해탈을 얻게 된다.
2. 우리는 불임??
concept(개념) 은 라틴어 conceptio에서 유래됐는데 원래 (잉태)라는 뜻이고, verb(말)은 라틴어로 그리스도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즉 개념이란 말을 낳는 것, 세계를 낳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념이 없는 우리를 불임이라고 곰샘 말하신다.
공자도 내가 진리를 담고 있는데 죽일 수 없다.
진리는 사람과 사람이 전달. 우파니샤드.
제도는 절대 진리를 전할 수 없다.
말이 곧 도이며 진리이다. 삶이 곧 문자이다.
늘 하시는 해숙샘 왈, 말 잘하고 싶으면 똑바로 살면 된다. 나 사는 만큼 표현된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고생한다고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다. 경험과 추상으로 나누는 것도 이분법이다.
육체를 통해 진리로 도약할 때 개념 출산 가능하다. 육체는 추상을 통해, 추상은 육체를 통해. 이 둘이 크로스되는 지점이 창조이다.
상처받은 사람일 수록 어린아이다. 자의식으로 훼손되는 것이다. 임꺽정왈, 누가 나를 훼손시켜~
3. 조르바의 되기 능력
조르바- 65살 늙은이, 경험과 말 많고, 깨달음이 있다.
두목 - 35살 젋은이, 추상적이며 지식의 화신이다.
조르바가 깨달음 뒤 실천
① 제일먼저 국가를 벗어남
- 자유가 막연한 것이 아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탐구, 성찰
(전쟁 참여 후에는 보통은 국가에 더 예속)
②결혼을 벗어남
추워서 결혼했다. 얼마나 솔직한가?
이렇게 관계가 나에게 행복을 주고 안주고의 문제이다.
사람에 꽂히는 것은 비극이다.
사랑은 신체가 움직이는 것이다.
관계나 배치는 몸에 있다. 육화.
조르바는 말만하면 선문답이며 화답이다.
두목은 머리를 쥐어짜야 되지만.
자기언어에 육체를 부과한 것이 조르바의 언어이다.
조르바는 왜 호색한이라고 하지 않는가?
미래를 약속하지 않으면서, 순간에 최선을 다한다.
일을 할 때는 일에, 과부와는 과부와.
갈탄과 호흡하는 놀라운 자기 변신, 이것이 들뢰즈의 되기 능력이다.
하여 대승불교식으로 조르바는 보살이다.
과거, 미래에도 휘둘지지 않는 지금에 충실 - 불교진리, 나튬이다.
4.식상작렬 조르바
조르바는 이념과 제도에 포획되지 않는 서사가 나온다.
식상작렬!
식상이 성욕, 식욕, 이야기를 말한다. 전세계 인간사의 파노라마가 이것이다.
기본적, 자연스런 욕망이다.
조르바는 삶의 일상과 연동되어 있어서 변태로 보이지 않는다.
포르노그라피는 성욕만 고집하여 변태, 신경증, 강박증을 유발한다.
전혀 삶의 연결고리가 없다. 영화 감각의 제국같은, 막힌 곳의 마지막은 죽고 절단.
오픈되어 있는 변강쇠 타령에는 이상하게 적응이 된다.
성에대한 묘사가 없어도 질펀한 느낌이 든다.
삶과 연동되면 성이 낯설지 않다.
서사를 구성한다는 것은 시간성에 힘을 얻는다.
공간축은 입자식 사고를 하여 이야기는 재미 없으나 정확한 배열을 말한다.
시간축은 정확하진 않지만 재미 있다.
조르바는 귀, 듣는 힘이 발달하며, 목소리가 좋다.
떠돌이 하면서도 일에 몰두하며 리더쉽도 뛰어나다. 자유의 여정에서 터득된 신체성이다.
5.자유를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자유란 욕망을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①먼저 자기 욕망과 맞서는 것이 필요하다.
(조르바 버찌 이야기) 조르바는 자기 욕망 성찰능력이 탁월했다.
②자기를 성찰하는 능력을 늘 깨닫는다.
-자기도 모르게 하는 충동을 늘 보는 것.
③욕망을 보는 순간 단칼에 잘라버리는 힘
고르디오스의 매듭을 풀어내듯 단숨에 자신 실체를 조절할 수 있다.(진짜원하면)
④어렵지만 죽을 때까지 해 보는 것
두목을 토할 때까지 읽어보겠다.
조르바를 만나고 영향을 받았지만, 자신의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왜 그런 생각이 안들까?
6.언어 치매
말의 솜씨는 관찰에서 나온다.
지루한 반복, 같은 패턴, 기준점이 같아서다.
여기서 치매가 많은 것 같다.
치매는 언어능력이 떨어진다.
언어로서만 세상은 창조되고, 관계를 명명한다.
언어를 벗어나는 것, 언어 바깥을 사유하는 것이 생명의 세계이며 그 너머이다.
불교의 언어도단, 불립문자.
이루 말할 수 없어 어떻게 나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목소리는 피부보다도 숨기기 어렵다.
인터네이션이 힘든 것이다. 피부, 오장육부다.
몽골인이 한국어 배울 때 6개월걸린다. 인터네이션이 같기 때문이다.
벙어리는 장애, 서로 통한다.
치매는 언어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오장육부가 교란 될 때에도 헛소리가 나온다. 정신병만이 아니다.
언어는 사회적 도구만이 아니라 존재의 직접적인 신체를 보여준다.
의역학적으로 언어는 신체이고 삶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상을 열고, 언어만큼 체험하면서 산다.
이세상 살아 있는 것은 무언가 다 만든다.(언어를 통해 무엇을 만들 수 있다.)
여성은 수태하여 낳고 기른다.
남성은 창조하지 않는 대신, 철학을 창조하여 개념을 낳는다.
마리아는 진리를 낳았다.
창조한다는 것은 말을 낳는 것이다.
무엇을 낳을 것인가가 삶의 기본 토대이고 시작이다.
이것이 말이 갖고 있는 힘이다.
문자 지식인이 가지고 있는 경계를 깬 것이 조르바이다.
불경의 얘기를 유머와 함께 서사로 표현한다.
유마경, 욕망을 가지고도 자유로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이 적어 더 쉽다.
7. 여성은 왜 진리에 대한 철학적 욕망이 없을까?
남자는 존재 자체가 말썽이다. 양기덩어리.
양기의 역설 - 진흙탕에서 연꽃 피듯이,
현실의 지옥을 천당으로 바꿀 수 있는 것, 이것이 진리다. 브리꼴라쥬.
음기로도 가능하다. 음기는 심히 타락하지 않지만 도약하는데 거부가 있다.
지금의 현실은 만들어진 성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시기이다.
여성은 왜 진리에 대한 철학적 욕망은 없는가?
자기 해방, 자유의 여정, 이 영역엔 왜 도전하지 않는가?
정계 재계등 물질적인 곳에서 창조성을 발휘하고 있다.
왜 끊임없이 여성은 사랑 받고자 하는가?
애를 낳지 않아서 지금은 남자와 비슷한 조건에 있다.
그런데 왜 개념은 낳지 않는가?
인문학도 과도기라 여자가 많다. 하지만 10년뒤 거리강사로 남자가 많을 것이다.
여성은 만들기 전까지 잘하고, 다음 창조는 안한다.
양기는 뻗어나가는 힘이 있다.
산만과 말썽에서 집중하면 힘이 되는 것이다.
음기는 맑고 청정한데 이것저것에 걸리는 것이 많다. (시기, 자의식)
요즘은 여성 콤플렉스가 없어져서 이런 이야기가 소화가능하다. 그런데 왜?
원초적 생명의 장에서 다른 뭔가가 있다.
조르바는 삶에 대한 엄청난 자각을 가지고 있다. 하여 부처의 말을 한다.
두목과 조르바의 애정, 우정
둘은 완벽히 신체가 열리며 도를 전수, 이렇듯 도는 직접적으로 사람을 통해 전수된다.
여자는 가족과 연인에게 갖다 바친다.
순례할 때는 헌신적인 여성을 끊는다.
혁명의 적은 바로 엄마다.
8. 조르바처럼 살 것인가? 과부처럼 살 것인가?
수도원, 진리를 잃어버린 껍데기를 리얼하게 보여준다.
하여 불교에서 진리를 찾는다.
미미코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 미미코는 결코 구경하지 않으며 무언가 역할을 한다.
근대 이전 이런 바보 한명쯤 있었다. 근대에 이런 동네바보는 없어졌지만 대신에 이기적인 정신병자가 늘어났다.
요즘 현대인은 구경에 일가견이 나 있다. 티비나 영화 스토리를 보고 서사를 복제하기만 한다.
주거니 받거니, 뭔가 하겠다, 이런 관계가 없다.
서사능력은 수련에서 나온다. 바로 관찰과 성찰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언어에 대한 기본량을 가지고 있다.
서사와 유머를 재구성하는 것은 특별한 재능을 필요치 않는다.
언어를 도구적으로 사용하면 인복, 식복 다 달아난다.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것, 말하기 듣기 쓰기는 같이 간다. 피부같은 것이다.
중간에 조르바와 두목은 서로 정보가 끊겼다. 하지만 알고 있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 있다.
공자, 노자는 말과 글과 행동 모두 같은 시기였다.
언어성이 아니고는 어떻게 세계를 구성할 수 있겠는가?
자기 세계가 좁음을 모르고 있다.
글쓰기의 현장은 창조와 생성, 어제와 다른것을 내놓아야 한다.
물건은 죽을 때까지 창조, 생성을 할 수 없다. 언어는 할 수 있다. 이것이 진짜 진리다.
이것이 언어의 힘이다.
글쓰기, 보통사람도 다 할 수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 곰샘 수업후기 박지희.hwp
첫댓글 애공,,,, 준비하느라 고생했네...
수업 재미있게 잘 들었어...
재미있게 들었다니 다행이네요^^
샘이랑 같이 스터디한 덕분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