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서 본 ‘상윳따니까야(Saṃyutta Nikāya)’ 22강
사밋디숫땅-2부
Samiddhisuttaṃ
사밋디경(S1:20)-2부
지난 시간에 다하지 못한 사밋디경 2부를 시작하겠습니다.
데와따(Devatā)
천신
10. 나코 빅쿠 수까로 소 바가와 아메히 우빠상까미뚱. 안냐히 마헤삭카히
Na kho bhikkhu sukaro so bhagavā amhehi upasaṅkamituṃ. aññāhi mahesakkhāhi
데와따히 빠리우또. 사쩨 코 뜨왕 빅쿠 땅 바가완땅 우빠상까미뜨와
devatāhi parivuto. Sace kho tvaṃ bhikkhu taṃ bhagavantaṃ upasaṅkamitvā
에따맛탕 뿟체이야시. 마얌삐 아갓체이야마 담맛사와나야띠.
etamatthaṃ puccheyyāsi. mayampi āgaccheyyāma dhammassavanāyāti.
10. “비구여, 우리가 그분 세존께 다가가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 분은 큰 위력을 가진 다른 천신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비구여, 그러므로 그대가 그분 세존께 가서 이 뜻을 여쭈어주십시오. 우리도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 가겠습니다,”
게송에서 나(na)는 ‘부정’, ‘없다’이고, 코(kho)는 ‘참으로’, ‘확실히’이고, 수카로(sukaro)는 ‘실행할 수 있는’, ‘쉬운’, ‘하기 쉬운’입니다. 소 바가와(so bhagavā)는 ‘그분 세존께’이고, 우빠상까미뚱(upasaṅkamituṃ)은 ‘접근’입니다. 그래서 ‘비구여, 우리가 그분 세존께 다가가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입니다. 다음에 마헤삭카히(mahesakkhāhi)는 ‘큰 위력을 가진’이고, 데와따히 빠리우또(devatāhi parivuto)는 ‘다른 천신들에 둘러싸여’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큰 힘을 가진 다른 천신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입니다.
다음은 사쩨(Sace)는 ‘혹시’, ‘만일’, ‘만약’이고, 뜨왕(tvaṃ)은 ‘그것은’이고, 우빠상카미뜨와(upasaṅkamitvā)는 ‘접근’인데 ‘가까이 가서’, ‘가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다음 뿟체이야시(puccheyyāsi)는 ‘묻다’, ‘질문하다’, ‘청하다’, ‘여쭙다’입니다. 그래서 ‘비구여, 그러므로 그대가 그분 세존께 가서 이 뜻을 여쭈어주십시오.’입니다. 다음에 아갓체이야마(āgaccheyyāma)는 ‘오다’, ‘접근하다’, ‘도착하다’입니다. 담맛사와나야띠(dhammassavanāyāti)는 ‘법을 듣다’, ‘가르침을 듣다’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가르침을 듣기 위해 가겠습니다.’입니다.
앞서 사밋디 존자가 천신과의 대화에서 천신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밋디 존자는 나는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는 새내기이기 때문에 천신이 부처님께 가서 직접 질문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천신이 이렇게 대답하고 또 사밋디 존자에게 요청을 한 것입니다. 이 내용이 바로 “비구여, 우리가 그분 세존께 다가가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 분은 큰 위력을 가진 다른 천신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비구여, 그러므로 그대가 그분 세존께 가서 이 뜻을 여쭈어주십시오. 우리도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 가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천신이라고 해서 아무나 부처님께 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천신들도 세존께 가고 싶어도 쉽게 가지 못합니다. 천신에게도 자기 능력이 있는데 욕계천상은 빛으로 나타나고 색계, 무색계는 선정의 힘으로 나타납니다. 욕계천신도 빛이 낮으면 여러 천신에게 둘러싸여있는 부처님께 접근하지 못합니다. 인간세계가 중요하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인간세상에서는 언제나 아무 차별 없이 불법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헤삭카히 데와따(Mahesakkhāhi devatā)는 ‘큰 위력을 가진 다른 천신들’입니다. 대신 알뻬삭카 데와따(Alpesakkhā devatā)는 ‘위력이 없는 천신들’입니다. 이러한 천신들의 차이는 빛의 차이, 천신이 모여 사는 대중 숫자의 차이인데 자기가 지은 공덕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신들은 빛이 매우 화려하고 어떤 신들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신들도 계급제도인 카스트처럼 빛과 대중의 차이로 천신들의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여자 천신이 말하는 ‘큰 위력을 가진 다른 천신들’이라는 말은 지금 여기서 나를 지칭하는 천신이 아니고 다른 힘이 있는 천신을 말합니다. 큰 위력을 가진 다른 천신들의 왕은 10억이나 100억의 일행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이때의 일행을 빠리와라(parivāra)라고 하는데 ‘수행원’, ‘일행’이라는 뜻입니다. 그 천신들은 힘이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높은 위치에서 세존을 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처럼 낮은 수준의 천신은 위력이 적은 여성천신으로 태어나고 더구나 사천왕천에 살지도 못하고 인간계의 숲에 살기 때문에 세존을 마음대로 뵈올 수 없는 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천상의 반대가 지옥인데 지옥은 빛이 없습니다. 무간지옥은 무간업을 가진 사람이 들어가는데 매우 어둡습니다. 한 겁이 자나 갈 때까지 거기 있어야 합니다. 경전에는 어둡고 바닥을 알 수 없는 컴컴한 심연의 감추어진 세계라고 말합니다. 빛이라고는 볼 수가 없는 곳입니다.
천신은 항상 빛이 나며 공덕이 좋을수록 빛이 더 납니다. 이때의 빛은 지혜의 빛이 아닙니다. 그래서 공덕은 물질세계와 관계가 있습니다. 이처럼 빛은 공덕세계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주석서에서 보면 각각의 신들의 왕은 10억이나 100억의 측근을 거느리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장 큰 자리에 서서 세존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와 같은 위력이 적은 여성으로 태어난 천신은 세존을 뵐 기회를 가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욕계천상은 욕망을 가진 세계라서 이렇게 모여서 삽니다. 그러나 선정수행을 해서 가는 범천인 색계와 무색계는 혼자서 삽니다.
숫도다나 왕의 스승 아시따(Asita) 선인이 태자가 태어난 지 3개월쯤 됐을 때 왕궁에 왔습니다. 숫도다나 왕이 스승께 참배를 하고 태자도 스승께 참배를 하게 했습니다. 태자가 참배를 하면서 아시따(Asita) 선인의 이마를 발로 찼습니다. 이에 스승께서 처음에는 웃다가 그 다음에는 우셨습니다. 왕이 아시따(Asita) 선인에게 왜 우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분(싯다르타)이 바로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기쁩니다. 그런데 그때는 내가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슬픕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시따(Asita) 선인은 무색계 선정 수행을 하신 분이기 때문에 무색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연결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무색계의 존재들은 지상에 내려와 부처님을 만나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색계가 좋을 수도 있고 안 좋을 수도 있습니다. 아시따(Asita) 선인은 무색계에 태어나기 때문에 부처님을 만나 뵐 수 없음을 알고 슬펐던 것입니다. 이처럼 천신의 빛이라는 것은 공덕세계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11. 에와마우소띠 코 아야스마 사밋디 땃사 에와따야 빠띳수뜨와 예나 바가와
Evamāvusoti kho āyasmā samiddhi tassā devatāya paṭissutvā yena bhagavā
떼누빠상까미. 우빠상까미뜨와 바가완땅 아비와데뜨와 에까만땅 니시디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
에까만땅 니신노 코 아야스마 사밋디 바가완땅 에따다오짜.
Ekamantaṃ nisinno kho āyasmā samiddhi bhagavantaṃ etadavoca.
11. 그렇게 하겠습니다. 벗이여, 라고 사밋디 존자는 그 천신에게 대답한 뒤에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사밋디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이처럼 천신이 부처님을 직접 뵙기 어렵다고 하자 결국은 사밋디 스님이 직접 부처님께 가서 법을 여쭤보는 것이 다음 게송입니다. 그리고 그간에 천신과 자신이 만나서 나누었던 대화를 그대로 말씀드렸습니다.
12. 이다항 반떼 랏띠야 빳쭈사사마양 빳쭛타야 예나 따뽀다 떼누빠상까미
Idhāhaṃ bhante rattiyā paccūsasamayaṃ paccuṭṭhāya yena tapodā tenupasaṅkamiṃ
갓따니 빠리신찌뚱. 따뽀데 갓따니 빠리신지뜨와 빳쭛따리뜨와 에까찌와로 앗타싱
gattāni parisiñcituṃ. Tapode gattāni parisiñcitvā paccuttaritvā ekacīvaro aṭṭhāsiṃ
갓따니 뿝바빠야마노. 아타 코 반떼 안냐따라 데와따 아빅깐따야 랏띠야
gattāni pubbāpayamāno. Atha kho bhante aññatarā devatā abhikkantāya rattiyā
아빅깐따완나 께와라깝빵 따뽀당 오바세뜨와 예나항 떼누빠상까미.
abhikkantavaṇṇā kevalakappaṃ tapodaṃ obhāsetvā yenāhaṃ tenupasaṅkami.
우빠상까미뜨와 웨하상 티따 이마야 가타야 앗자바시.
upasaṅkamitvā vehāsaṃ ṭhitā imāya gāthāya ajjhabhāsi.
12. 세존이시여, 저는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었을 때 일어나 온천으로 가서 상의를 벗고 목욕을 했습니다.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일어나서 가사 한 벌만을 입고 몸을 말리기 위해 서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천신이 밤이 깊었을 때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온천 숲을 두루 밝히며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가까이 다가와서는 허공에서 게송으로 말했다.
13. 아브뜨와 빅카시 빅쿠, 나 히 부뜨와나 빅카시,
“Abhutvā bhikkhasi bhikkhu, na hi bhutvāna bhikkhasi,
부뜨와나 빅쿠 빅캇수, 마 땅 까로 우빳짜가띠.
Bhutvāna bhikkhu bhikkhassu, mā taṃ kālo upaccagāti.
에왕 웃떼 아항 반떼 땅 데와땅 가타야 빳짜바싱.
Evaṃ vutte ahaṃ bhante taṃ devataṃ gāthāya paccabhāsiṃ.
까랑 오항 나 자나미, 찬노 까로 나 딧사띠,
Kālaṃ vohaṃ na jānāmi, channo kālo na dissati,
따스마 아부뜨와 빅카미 마 망 까로 우빳짜가띠.
Tasmā abhutvā bhikkhāmi mā maṃ kālo upaccagāti.
13. 비구여, 그대는 즐기지 못하고 걸식하고 있으니,
그대는 즐긴 뒤에 걸식할 줄 모르고 있습니다.
비구여, 그대는 즐긴 뒤에 걸식을 하십시오.
세월이 그대를 지나치게 하지 마십시오.
세존이시여, 이렇게 들었을 때 저는 그 천신에게 게송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대가 말하는 세월을 나는 모릅니다.
나의 세월이란 감춰져서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그 때문에 즐기지 않고 걸식합니다.
세월이 나를 지나치지 않게 합니다.
14. 아타 코 반떼 사 데와따 빠타위양 빠띳타히뜨와 망 에따다오짜, 다하로 뜨왕
Atha kho bhante sā devatā pathaviyaṃ patiṭṭhahitvā maṃ etadavoca, daharo tvaṃ
빅쿠 빱바지또 수수까라께소, 바드레나 욥바네나 사만나가또 빠타메나
bhikkhu pabbajito susukāḷakeso, bhadrena yobbanena samannāgato paṭhamena
와야사, 아닉끼리따위 까메수. 분자 빅쿠 마누사께 까메, 마 산딧티깡
vayasā, anikkīḷitāvī kāmesu. Bhuñja bhikkhu mānusake kāme, Mā sandiṭṭhikaṃ
히뜨와 까리깡 아누다위띠.
hitvā kālikaṃ anudhāvīti.
14. 세존이시여, 그때 천신이 땅으로 내려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 젊은 비구여, 그대는 젊고 머리카락이 검고 잘 갖추어진 처음인 청춘을 가지고 최상의 세월에 감각적 쾌락을 아직 즐기지 않고 출가를 했습니다. 비구여, 사람의 욕망을 즐기십시오. 현재를 버리고 다가오는 시간을 쫓지 마십시오.
15. 에왕 웃따 항, “반떼 땅 에와땅 에따다오짱” 나 끄와항 아우소
Evaṃ vuttā haṃ “bhante taṃ devataṃ etadavocaṃ” na khvāhaṃ āvuso
산딧티깡 히뜨와 까리깡 아누다와미. 깔리깐짜 끄와항, 아우소 히뜨와
sandiṭṭhikaṃ hitvā kālikaṃ anudhāvāmi. kālikañca khvāhaṃ āvuso hitvā
산딧티깡 아누다와미. “까리까 히 아우소 까마 웃따 바가와따 바후둑카
sandiṭṭhikaṃ anudhāvāmi. “Kālikā hi āvuso kāmā vuttā bhagavatā bahudukkhā
바후빠야사 아디나오 엣타 비이요.” 산딧티꼬 아양 담모 아까리꼬 에히빳시꼬
bahupāyāsā ādīnavo ettha bhiyyo.” Sandiṭṭhiko ayaṃ dhammo akāliko ehipassiko
오빠네이이꼬 빳짯땅 웨디땁보 윈누히띠.
opaneyyiko 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īti.
15. 세존이시여, 저는 이 말을 듣고 그 천신에게 말했습니다.
“벗이여, 나는 절대로 지금 여기 보이는 세계를 제쳐두고 시간이 걸리는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벗이여, 나야말로 시간을 걸리는 것을 제쳐두고 현세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이란 시간이 걸리는 것이고 괴로움과 절망이 가득하며 거기에는 많은 위험이 따른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법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고, 지금 이곳에서 경험할 수 있고,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와서 보라고 할 수 있고, 열반으로 이끌어 주고, 현명한 사람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들이다”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6. 에왕 웃떼 반떼 사 데와따 망 에따다오짜,
Evaṃ vutte bhante sā devatā maṃ etadavoca,
까탄짜 빅쿠 까리까 까마 웃따 바가와따 바후둑카 바후빠야사 아디나오
kathañca bhikkhu kālikā kāmā vuttā bhagavatā bahudukkhā bahupāyāsā ādīnavo
엣타 비이요. 까탕 산딧티꼬 아양 담모 아까리꼬 에히빳시꼬 오빠네이이꼬
ettha bhiyyo. Kathaṃ sandiṭṭhiko Ayaṃ dhammo akāliko ehipassiko opaneyyiko
빳짯땅 웨디땁보 윈누히띠.
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īti.
16. 세존이시여, 이 말을 듣고 저는 그 천신에게 이와 같이 물었습니다.
“비구여, 어떻게 해서 세존께서는 감각적 쾌락이 시간이 걸리며 괴로움이 많고 아픔이 많고 더 많은 위험이 따른다고 하셨습니까? 어떻게 해서 이 성스러운 법이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고, 지금 이곳에서 경험할 수 있고,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와서 보라고 할 수 있고, 열반으로 이끌어 주고, 현명한 사람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7. 에왕 웃따항 반떼 땅 에와땅 에따다오짱, 아항 코 아우소 나오
Evaṃ vuttāhaṃ bhante taṃ devataṃ etadavocaṃ, ahaṃ kho āvuso navo
아찌라빱바지또 아두나가또 이망 담마위나양. 나 끄와항 삭꼬미 윗타레나
acirapabbajito adhunāgato imaṃ dhammavinayaṃ. Na khvāhaṃ sakkomi vitthārena
아찍키뚱. 아양 소 바가와 아라항 삼마삼붓도 라자가헤 위하라띠
ācikkhituṃ. Ayaṃ so bhagavā arahaṃ sammāsambuddho rājagahe viharati
다뽀다라메. 땅 바가완땅 우빠상까미뜨와 에따맛탕 뿟체이야시. 야타 떼
tapodārāme. Taṃ bhagavantaṃ upasaṅkamitvā etamatthaṃ puccheyyāsi. Yathā te
바가와 브야까로띠 따타 낭 다레이야시띠.
bhagavā byākaroti tathā naṃ dhāreyyāsīti.
17. 세존이시여, 이 말을 듣고 저는 그 천신에게 이와 같이 대답했습니다.
“벗이여, 나는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근래에 이 법과 율에 들어온 신참입니다. 그래서 나는 법과 율을 자세하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그분 세존. 아라한. 정등각자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빠뽀다 원림에 머물고 계십니다. 그분 세존께 이 뜻을 여쭈어 보십시오. 그래서 세존께서 그대에게 설명해 주시는 대로 받아서 지니십시오.”
18. 에왕 웃떼 반떼 사 데와따 망 에따다오짜,
Evaṃ vutte bhante sā devatā maṃ etadavoca,
“나 코 빅쿠 수까로 소 바가와 아메히 우빠상까미뚱, 안냐히 마헤삭카히
“na kho bhikkhu sukaro so bhagavā amhehi upasaṅkamituṃ, aññāhi mahesakkhāhi
데와따히 바리우또. 사쩨 코 뜨왕 빅쿠, 땅 바가완땅 우빠상까미뜨와
devatāhi parivuto. Sace kho tvaṃ bhikkhu, taṃ bhagavantaṃ upasaṅkamitvā
에따맛탕 뿟체이야시. 마얌삐 아갓체이야마 담맛사와나야띠.
etamatthaṃ puccheyyāsi. Mayampi āgaccheyyāma dhammassavanāyā”ti.
사쩨 반떼 땃사 데와따야 삿짱 와짜낭, 이데와 사 에와따 아위두레띠.
Sace bhante tassā devatāya saccaṃ vacanaṃ, idheva sā devatā avidūreti.
18. 세존이시여, 이 말을 듣고 그 천신은 나에게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비구여, 우리가 그분 세존께 다가가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 분은 큰 위력을 가진 다른 천신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비구여, 그러므로 그대가 그분 세존께 가서 이 뜻을 여쭈어주십시오. 우리도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 가겠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천신의 말대로라면 바로 그 천신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입니다.
19. 에왕 웃떼 사 데와따 아야스만땅 사밋딩 에따다오짜, 뿟차 빅쿠, 뿟차
Evaṃ vutte sā devatā āyasmantaṃ samiddhiṃ etadavoca, puccha bhikkhu, puccha,
빅쿠, 야말 아눕빳따띠.
bhikkhu, yamahr anuppattāti.
19. 이와 같이 말하자 그 천신은 사밋디 존자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비구여, 질문하십시오. 비구여, 질문하십시오. 제가 이미 도착했습니다.
20. 아타 코 바가와 땅 데와땅 가타야 앗자바시,
Atha kho bhagavā taṃ devataṃ gāthāya ajjhabhāsi.
20. 그때 세존께서는 천신에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바가와(Bhagavā)
세존
20. 악케이야 산니노 삿따 악케이야스밍 빠띳티따,
Akkheyya saññino sattā akkheyyasmiṃ patiṭṭhitā,
악케이예 아빠린냐야 요가마얀띠 맛쭈노.
Akkheyye apariññāya yogamāyanti maccuno.
악케이예 짜 빠린냐야 악카따랑 나 만나띠,
Akkheyye ca pariññāya akkhātāraṃ na maññati,
따니 땃사 나 오띠띠 예나 낭 앗자 나 땃사 앗티,
Tañhi tassa na hotīti yena naṃ vajjā na tassa atthi,
사쩨 위자나시 와데히 약카띠.
Sace vijānāsi vadehi yakkhāti.
20.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인식하는 존재는
표현할 수 있는 것을 확립한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완전하게 알지 못하면
죽음의 속박에 매인다.
그러나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완전하게 알면
표현하는 자를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그런 것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를 표현할 어떤 것도 그에게는 잘못이 존재하지 않는다.
약카여, 만약 그대가 이해했다면 말해보시오.
이상이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 게송의 내용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내용이라서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게송의 처음 문장인 ‘악케이야 산니노 삿따 악케이야스밍 빠띳티따(Akkheyya saññino sattā akkheyyasmiṃ patiṭṭhitā)’에서 아케이야(akkheyya)는 ‘표현할 수 있는’, ‘이야기하는 사람’, ‘말하는 존재’입니다. 산니(saññi)는 ‘지각’, ‘표상’, ‘인식’, ‘상(想)’입니다. 삿따(sattā)는 ‘존재’, ‘유정’ ‘중생’입니다. 빠띳티따(patiṭṭhitā)는 ‘확립’입니다. 그래서 ‘표현할 수 있는 존재는 표현할 수 있는 것을 확립한다.’입니다. 여기서 확립한다는 뜻은 이렇게 알아서 머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오온을 가진 생명을 인식할 수 있는 존재는 내가 오온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아서 이런 견해에 머문다는 뜻입니다.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온을 가진 존재는 오랫동안 오온이 나의 것이고, 오온이 나고, 오온이 나의 자아라고 생각하고 삽니다. 그래서 오온을 가진 존재는 이렇게 만들어진 인식을 기억해서 이렇게 아는 마음을 분명하게 확립하고 산다는 뜻입니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을 확립한다’, 또는 ‘표현할 수 있는 것에 머물러있다’는 것은 중생은 오온에 대해 여덟 가지 모습으로 머물러 있다는 말입니다. 여덟 가지 모습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애욕에 물든 자는 애욕을 통해서 오온에 머물러 있습니다. 분노하는 자는 성냄을 통해서 오온에 머물러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을 통해서 오온에 머물러 있습니다. 전도된 자는 견해를 통해서 오온에 머물러 있습니다. 고질적인 자는 잠재성향을 통해서 오온에 머물러 있습니다. 속박된 자는 자만을 통해서 오온에 머물러 있습니다. 확고하지 못한 자는 의심을 통해서 오온에 머물러 있습니다. 흔들리는 자는 들뜸을 통해서 오온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상이 자신이 확립해서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문장의 첫 소절에 있는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인식하는 존재’인 ‘악케이야 산니노(Akkheyya saññino)’은 넓은 의미에서 천신, 인간, 재가자, 출가자, 중생, 개인 등등 모든 존재들의 오온을 말합니다. 중생들은 사람, 개인, 여자, 남자라는 인식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식하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이때의 인식이 바로 존재라는 뜻의 산니(saññi)입니다. 그래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인식하는 존재’, 또는 ‘표현하는 것을 인신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인식하는 자란 자기 몸과 마음인 오온에 대해 중생이나 개인 등으로 인식하는 자를 뜻합니다.
다음 문장 ‘악케이예 아빠린냐야 요가마얀띠 맛쭈노(Akkheyye apariññāya yogamāyanti maccuno)에서 악케이예(Akkheyye)는 ‘표현할 수 있는’입니다. 다음에 아빠린냐야(apariññāya)는 ‘완정하게 알려지지 않은’입니다. 다음 요가마얀띠(yogamāyanti)에서 요가(yoga)는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멍에’, ‘집착’, ‘속박’, ‘결합’, ‘관계’, ‘노력’, ‘집중’, ‘수행’, ‘치료’ 등등 입니다. 이처럼 인도에서 사용하고 있는 언어인 요가(yoga)는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중에 하나가 우리가 알고 있는 요가수행입니다. 다음에 맛쭈노(maccuno)는 ‘죽음’입니다. 그래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완전하게 알지 못하면 죽음의 속박에 매인다.“입니다. 이는 오온의 진실을 알아서 이것이 나의 것이 아니고, 단지 조건에 의해 결합된 존재일 뿐이라고 알면 윤회에서 벗어나지만, 그렇지 않고 오온이 나의 것이라고 알면 윤회를 계속해서 죽음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악케이예 아빠린냐야(Akkheyye apariññāya)‘는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완전하게 알지 못하면‘인데 이는 오온에 대해서 세 가지 통찰지를 완전하게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빠린냐야(apariññāya)는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데 세 가지가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알려진 것에 대한 완전한 통찰지입니다. 이것을 나따 빠린냐(ñāta pariññā)라고 하는데 지편지입니다. 무엇이 알려진 것의 통찰지인가 하면 오온에 대해서 철저하게 아는 것입니다. 둘째, 윤회의 바다에서 건넘에 대한 완전한 통찰지입니다. 이것을 띠라나 빠린냐(tīraṇa pariññā)라고 하는데 건너가는 지혜라는 뜻으로 도편지라고 합니다. 무엇이 조사의 통찰지인가 하면 오온이라고 안 뒤에 오온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병이라는 등등의 42가지 방법을 조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 번뇌의 끊음에 대한 완전한 통달지입니다. 이것을 빠하나 빠린냐(pahāna pariññā)라고 하는데 잘라버린 다는 뜻의 단편지입니다. 무엇이 버림의 통달지인가 하면 이렇게 조사한 뒤에 최상의 도에 대한 탐욕을 제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최상의 도를 아가 막가(agga magga)라고 하는데 빠라마타 담마(paramattha dhamma)라는 궁극의 법을 말합니다. 탐욕은 오직 최승의 법에 의해서만 제거될 수 있습니다.
게송의 다음 문장은 ‘악케이예 짜 빠린냐야 악카따랑 나 만나띠(Akkheyye ca pariññāya akkhātāraṃ na maññati)’입니다. 짜(ca)는 ‘와’, ‘과’, ‘그러니까’, ‘그러나’ 등입니다. 빠린냐야(pariññāya)는 ‘충분한 지식’, ‘정확한 앎’, ‘완전한 이해’입니다. 만나띠(maññati)는 ‘생각하다’, ‘상상하다’, ‘사량(思量)하다’, ‘여기다’입니다. 그래서 ‘그러나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완전하게 알면 표현하는 자를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입니다. 이 문장은 오온을 가지고 표현하고 사는 존재에 대해 통찰지혜가 나서 자아가 아니고 무아라고 알면 나라고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 뜻에서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앗따(atta)라고 하는 자아(自我)나, 뿍깔라(Puggala)라는 뜻의 존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를 말할 때 정신과 물질이라고 하거나 몸과 마음이라고 합니다. 존재라고 했을 때는 즉시 나의 몸과 마음이라는 견해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을 말할 때도 존재의 구성요소인 지, 수, 화, 풍으로 말합니다. 존재에는 자아가 붙을 수 있지만 구성요로로 보면 나라고 할 만한 자아가 붙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정신과 물질도 다섯 가지 무더기라는 뜻으로 오온이라고 합니다.
다시 요약하면 처음에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오온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인식하는 존재란’ 오온을 오온이라고 인식하는 수준을 가진 그래서 오온에 대해 지각할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을 가진 자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그러나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완전하게 알면’은 ‘오온을 가지고 사는 중생이 오온을 철저하고 완전하게 알아서 무상, 고, 무아라고 알면’입니다. 다음에 ‘표현하는 자를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존재의 무상, 고, 무아를 알면 나라고 할 것이 없어 나나, 너나, 우리를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고 단지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지배받고 사는 정신과 물질일 뿐이라고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오온이 무아이기 때문에 자아나 개아가 사라집니다. 이런 지혜가 날 때 비로소 집착이 끊어져 해탈의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표현하는 자를 더 이상 개념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이렇게 세 가지 통찰지로 오온을 완전하게 알아서 모든 번뇌가 소멸한 비구는 ‘표현하는 자’를 두고 존재나 인간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무상, 고, 무아를 알아서 번뇌가 다한 그에게는 바로 ‘그에게 그런 것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를 표현할 어떤 것도 그에게는 잘못이 존재하지 않는다.’입니다. 즉 그를 두고 애욕에 물들었다거나, 성냄에 휩싸였다거나, 어리석음에 빠졌다는 등으로 말할 수 있는 그런 근거가 번뇌가 소멸한 자에게는 없다는 뜻입니다.
다음 문장은 ‘따니 땃사 나 오띠띠 예나 낭 앗자 나 땃사 앗티(Tañhi tassa na hotīti yena naṃ vajjā na tassa atthi)입니다. 땃사(tassa)는 ‘그’, ‘그것’입니다. 호띠(hotī)는 ‘이다’, ‘있다’, ‘되다’입니다. 예나(yena)는 ‘그것을 가지고’, ‘그것으로부터’, ‘~인 곳으로’입니다. 왓자(vajjā)는 ‘피해야 할 것’, ‘죄’, ‘잘못’입니다. 앗티(atthi)는 ‘있다’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그런 것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를 표현할 어떤 것도 그에게는 잘못이 존재하지 않는다.’입니다. 이 문장의 의미는 오온이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그에게는 자아가 없기 때문에 그를 표현할 때 하나의 존재라고 말하는 잘못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아가 사라진 무아라서 존재라고 하지 않고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가진 아라한을 말합니다.
이 문장에서 마지막은 ‘사쩨 위자나시 와데히 약카띠(Sace vijānāsi vadehi yakkhāti)입니다. 사쩨(Sace)는 ’만약‘, ’만일‘, ’혹시‘입니다. 위자나시(vijānāsi)는 ’알다‘, ’이해하다‘입니다. 와데히(vadehi)는 ’말하다‘입니다. 약카(yakkhā)는 지금까지 천신으로 불렀는데 여기서는 약카(yakkhā)라는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약캬여, 만일 그대가 이해했다면 말해보시오.‘입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데와따(Devatā)라는 뜻으로 천신이라고 불렀지만 또 다른 호칭은 약카(yakkhā)입니다. 이 말을 한역(漢譯)에서는 소리 나는 대로 음사해서 야차(夜叉)라고도 부릅니다. 원래 약카(yakkhā)는 ’‘악귀’, ‘악마’, ‘야차’라고 합니다. 이 약카(yakkhā)는 사천왕천의 천신으로 태어났으나 공덕이 부족하여 욕계천상에 살지 못하고 인간세계의 숲이나 바위에 사는 천신을 말합니다. 이 약카(yakkhā)는 인간의 정신적 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구도자에게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 약카(yakkhā)는 힘이 있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제석천 왕이나 사천왕도 약카(yakkhā)라고 합니다. 다른 존재들이 부처님조차도 약카(yakkhā)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대체로 힘이 있는 자를 약카(yakkhā)로 부릅니다. 그러나 힘이 있다는 사실은 약간의 폭력도 행할 수 있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분야에서 뛰어난 자를 약카(yakkhā)라고 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악케이야 산니(akkheyya saññi)’는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인식하는 자’로 오온에 대한 집착을 말합니다. 금강경에도 아상(atman), 인상(puggala), 중생상(sattva), 수자상(jiva)이 나옵니다. 이런 말들은 아트만(Atman)과 비슷한 단어들입니다. 아트만(Atman)은 영혼, 자아(自我)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에 인도에는 많은 단어들이 있었습니다.
산니(saññi)는 산냐(saññā)와 같은 뜻으로 지각, 표상, 인식, 상(想), 개념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의 핵심은 오온이라는 것입니다. 오온에서 산냐(saññā)는 상온입니다. 오온을 집착하는 오취온(五取蘊)은 인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천신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번뇌가 다한 아라한은 단지 오온을 가지고 있고, 범부는 오온을 집착하는 오취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라한과 범부의 차이는 오온이냐 오취온이냐 하는 것이 다릅니다. 결국, 몸과 마음을 집착하지 않느냐 아니면 집착하느냐의 차이입니다.
그 당시 인도에는 여자를 불결하게 보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악행을 해서 여자로 태어났고 선행을 해서 남자로 태어났다는 힌두교 사상이 있습니다. 딧타경에 꼬살라 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는데 또 딸이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슬퍼서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왕비가 딸을 낳았다고 하니 표정이 확 바뀌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여자든 남자든 정신세계는 똑같다. 오직 산니(saññi)의 차이로 해서 여자로 태어나고 남자로 태어난다고 설명하십니다. 내가 여자라는 산니(saññi)가 있기에 여자로 태어나고 남자라는 산니(saññi)가 있기에 남자로 태어난다. 여자가 남자로 태어나기 쉽지 않고 남자가 여자로 태어나기 쉽지 않다고 합니다. 가지고 있는 산니(saññi)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남성 개념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남자가 여성 개념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성을 바꾸려면 반대성의 산니(saññi)를 가지고 생활해야 합니다. 물질적으로는 여성이지만 남성으로 태어날 산니(saññi)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신들의 세계도 산니(saññi)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아트만(Atman)이나 뿍갈라(Puggala)도 마찬가지 입니다. 테라와다에서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뿍갈라(puggala)로 말합니다. 뿍갈라(puggala)는 개인,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것이 금강경에서는 인상으로 나옵니다. 금강경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4가지만 나왔다는 것은 논쟁을 하는 상황에서 만들어 졌다고 봐야 합니다. 인도에 많은 산니(saññi)들이 있었는데 4개만 나왔다는 것은 이러한 견해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산니(saññi)는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자가 남자 산니(saññi)로 남자가 여자 산니(saññi)로 바꾸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여자로 태어나면 다음 생에도 여자는 태어나는 확률이 99%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자의 상을 가지고 살아서 여자의 성향에 적응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녀의 성별 차이는 이러한 축적된 성향의 차이로 달라집니다.
변할 수 있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자, 각주를 보면 천신, 인간, 재가자, 개인, 여자, 남자라는 인식들을 중생들이 갖고 있기 때문에 인식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을 인식하는 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인식하는 자란 오온에 대해 중생이나 개인 등으로 인식하는 자를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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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무아이지만 뿍깔라(Puggala)라는 존재는 있다는 설일체유부에서 의미를 두었는데 불교계 안에서도 이런 문제는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뿍깔라(Puggala)는 개인, 사람, 영혼, 존재입니다. 자이나교에서나 다른 종교에서도 뿍갈라(Puggala) 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트만(Atman)은 있고 뿍갈라(Puggala)는 없다고 했습니다. 존재라는 개념자체가 여자 남자에서 못 벗어나는 것처럼 개념에서 못 벗어나는 것입니다. 남자, 여자라는 것도 지금은 아니지만 인간수명이 10살이 되는 시기도 있고 만 살이 되는 시대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성차별의 하나도 없다는 점이 신기합니다. 악행을 해야 여자가 된다. 구원을 받으려면 남자한테 잘해야 한다, 등 남편이 죽으면 같이 죽어야한다는 인도 전통인데 어릴 때는 아버지, 젊으면 남편, 나이 들면 큰 아들한테 가고 독립은 절대 안 되는데 부처님은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다릅니다.
경전에서도 그런 말들이 나오는데 주석서에는 남성이라는 말이 남성주의 사회가 여왕벌 한 마리가 잡아먹히면 남자 벌 천 마리가 슬퍼서 죽는다고 합니다. 여성주의 같은데 이런 형태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석서에는 남성주의사회에서는 여자는 붓다가 될 수 없는 것이고 여성주의사회에서는 남성이 붓다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릿타경에서도 아라한의 차별이 없다고 나오는데 붓다, 아라한이라는 것도 지혜의 차이이지 성의 차이가 아닙니다. 신이라든지 부처님이 설법할 때 민족이나 인간을 초월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 성이란 것을 초월한 것입니다.
자이나교에서는 ‘바나(bana)’라고 합니다. 움직이는 것은 바나,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압바나’로 봅니다. 습생과 나무도 움직이니까 ‘바나’로 봅니다. 불교에서는 마음이 있는 것을 중생으로 보는데 자이나교에서는 움직이는 것으로 봅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수자상은 아트만입니다. 설일체유부는 다 부정하고 뿍갈라(Puggala)만 인정합니다. 3차 결집에서 뿍갈라(Puggala)를 부정해서 뿍갈라(Puggala)를 개인으로 봅니다. 무아라면 개인이 계를 받고 명상하는 자는 누구냐? 라고 하면서 뿍갈라(Puggala)가 있다는 의미를 둡니다. 자이나교는 움직이는 것은 생명이 있다고 해서 ‘지와’를 말합니다.
뿍갈라(Puggala)는 오온. 오취온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아를 얘기하는 사람인데, ‘기도하세요’ 하면 ‘내가 왜 기도해요 무아인데’ 그러면 당신은 뿍갈라(Puggala)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 나오는 4가지 상은 오온과 오취온을 얘기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중간 질문 1) 경전이나 주석서에 붓다는 오직 남성이라고 하는데요?
(중간 답변 1) 경전에는 없는데 주석서에는 오직 남성적이라고 나옵니다. 남성적이라고 하는 것을 현재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우리가 나이가 10살이 될 때도 있고 일만 살이 될 때도 있습니다. 미륵불은 우리 나이가 일만 살 될 때 출현하십니다. 지금의 물질적인 몸과 다를 수 있습니다. 출생과정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남성주의 사회였던 부처님시대에 인도에서 부처님이 성차별을 하시는 말씀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당시 인도의 전통은 여자는 남편을 잘 모셔야 한다는 사상이었습니다. 만약에 남편이 일찍 죽으면 같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 인도의 사회의 전통이었습니다. 어릴 때는 아버지한테 의존하고, 클 때는 큰아들한테 의존하고, 결혼해서는 남편한테 의존하고 살아야 했습니다. 요즘에 뉴스에 보니 여왕벌을 잡아먹는 벌이 생겼습니다. 여왕벌 한 마리가 죽으면 천 마리의 남자 벌이 죽는다고 합니다. 이걸 보면 이것은 분명히 여성주의입니다.
남성주의 사회에서는 붓다가 여자가 될 수 없고, 여성주의 사회에서는 남성이 붓다가 될 수 없습니다. 여자가 붓다가 될 수도 있습니다. 경전에는 무조건 남자만 된다든지 여자만 된다는 말은 없습니다. 이런 말이 있다면 주석서에서 한 말입니다.
(중간 질문 2) 처음에 부처님께서 비구니계를 허락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중간 답변 2) 처음에 비구니계를 달라고 한 사람은 어머니(마하 빠자빠띠)와 부인(야쇼다라)와 석가족의 공주들이었습니다. 친족들에게 비구니계를 주면 브라흐만 쪽 사람들의 반발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자이나교에서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사회의 여론형성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가족들한테도 비구니계를 안 준다는 것을 인도의 세상 사람들이 알게 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세상의 여론을 형성한 다음에 세 번째에 들어주신 것입니다. 이 세 번이 하루 이틀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몇 년 걸려서 된 것입니다. 비구니는 여자 혼자 생활을 해야 하는데 당시 인도의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일이 생기겠습니까. 그 당시 인도 사회는 여자를 낮게 보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탁발을 하면서 혼자서 생활해야 하는데 많은 위험이 뒤따를 것입니다. 성폭행도 있을 것이고 사나운 짐승들이며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비구니 상가가 생기고 실제로 비구니 스님들이 성폭행 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까삘라왓투(Kapilavathu)에서 제타와나(Jethavana)까지 마하빠자빠띠(Mahāpajāpatī)를 비롯한 500명의 석가 족 공주들이 3개월 동안 발에 피를 흘리면서 부처님 계신 곳으로 걸어서 왔습니다. 이런 의지를 보시고 부처님께서 비구니 제도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당시의 인도사회에서도 인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의지의 표현이 필요하고 승단을 이어받은 의지가 있어야 해서 최초로 비구니를 허락했습니다. 당시 어떤 종단도 여성출가자가 없었는데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한 것입니다. 자이나교는 여자는 소리도 못 듣게 했습니다.
악케이야스밍(akkheyyasmiṃ)은 ‘표현할 수 있는 것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중생은 오온에 여덟 가지 모습으로 머물러 있다는 말입니다. 즉 애욕에 물든 자는 애욕을 통해 머물러있고, 분노하는 자는 성냄을 통해서,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 통해서, 전도된 자는 견해를 통해서, 고질적인 자는 잠재성향을 통해서 속박된 자는 자만을 통해서, 확고하지 못한 자는 의심을 통해서, 흔들리는 자는 들뜸을 통해 머물러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인도에 있었던 것이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다음은 부처님께서 천신에게 만약 그대가 이해했다면 말해보라고 했을 때 천신이 대답한 내용입니다.
데와따(Devatā)
천신
21. 나 끄와항 반떼 이맛사 바가와따 상킷떼나 바시땃사 윗타레나 앗탕
Na khvāhaṃ bhante imassa bhagavatā saṅkhittena bhāsitassa vitthārena atthaṃ
아자나미. 사두 메 반떼 바가와 타따 바사뚜. 야타항 이맛사 바가와따
ājānāmi. Sādhu me bhante bhagavā thatā bhāsatu. Yathāhaṃ imassa bhagavatā
상킷떼나 바시땃사 윗타레나 앗탕 아자네이얀띠.
saṅkhittena bhāsitassa vitthārena atthaṃ ājāneyyanti.
21. 세존이시여, 참으로 저는 세존께서 간략하게 말씀하신 뜻을 자세하게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세존께서 제게 상세하게 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 세존께서 간략하게 말씀하신 뜻을 자세하게 이해할 것입니다.
바가와(Bhagavā)
세존
22. 사모 위세시 우다와 니히노 요 만나띠 소 위와데타 떼나,
Samo visesī udavā nihīno yo maññati so vivadethā tena,
띠수 위다수 아위깜빠마노 사모 위세시띠 나 호띠,
Tīsu vidhāsu avikampamāno samo visesīti na hoti,
사쩨 위자나시 와데히 약카.
Sace vijānāsi vadehi yakkha.
22. 동등하다거나 뛰어나다거나 못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그 때문에 사람들과 싸우고
이 세 가지 자만심에 흔들리지 않으면
동등하다거나 뛰어나다거나 못하다는 것이 없다.
약카여, 만약 그대가 이해했다면 말해보시오.
이 게송에서 내가 남과 동등하다거나, 내가 남보다 뛰어나다거나, 내가 남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것은 나와 남을 비교해서 생기는 견해로 이것을 바로 자만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느 것이나 양쪽을 동등하게 헤아리게 하는 분별을 지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나와 남을 이렇게 비교하는 것은 자만심을 가지고 차별하는 것입니다. 분별은 지혜가 나도록 하지만 차별은 어리석음이 생기도록 합니다. 이러한 자만을 마나(māna)라고 합니다. 마나(māna)는 교만, 거만, 아만, 오만 등의 뜻도 있지만 자부심이란 뜻도 있습니다. 이런 자만심은 3가지가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 내가 다른 사람보다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다른 사람과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3개의 자만을 3개씩 나누면 9개의 자만이 있습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바로 오취온입니다. 그래서 오취온은 자만의 덩어리입니다.
범부에게는 이런 자만이 있는데 이것을 3개씩 나눕니다. 그래서 모두 9가지 자만이 있습니다. 결국 자만을 정리해보면 오취온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9가지 자만심으로 인해서 항상 우울해진다는 것입니다. 너무 최고라고 해도 우울해지고, 낮다고 해도 우울해지고, 똑같다고 생각해도 우울해 집니다. 그래서 우울해지는 것이 자만의 핵심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와 남을 비교하지 말고 자기 내면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 괴로움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자만심이든 자만심으로 행동을 하고 나면 그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아도 죽는 순간에 왜 그때 그랬지, 라는 등의 생각들이 떠오르면서 우울해진다고 합니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우울한 마음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이 자만의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누구나 자아를 가지고 있는 한 괴로움은 피할 수 없습니다. 오직 무아를 알아서 집착이 끊어져야 비로소 괴로움이 없는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만은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집중력이 생겼을 때 감소합니다.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집중이 되면 몸과 마음의 긴장이 풀리고 이완되어서 차츰 들뜸이 사라지고 두려움도 소멸합니다. 이때 교만한 마음도 함께 소멸합니다. 이는 몸과 마음의 부드러움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이때의 부드러움이 집중이고 이런 집중이 지혜를 가져온 결과로 자만에 영향을 줍니다. 이처럼 자만이 나를 해롭게 하는 요소라면 이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대안이 바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다음은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천신이 대답합니다.
데와따(Devatā)
천신
23. 이맛사삐 끄와항 반떼 바가와따 상킷떼나 바시땃사 나 윗타레나 앗탕
Imassāpi khvāhaṃ bhante bhagavatā saṅkhittena bhāsitassa na vitthārena atthaṃ
아자나미 사두 메 반떼 바가와 따타 바사뚜. 야타항 이맛사 바가와따
ājānāmi. Sādhu me bhante bhagavā tathā bhāsatu. Yathāhaṃ imassa bhagavatā
상킷떼나 바시땃사 윗타레나 앗탕 아자네이얀띠.
saṅkhittena bhāsitassa vitthārena atthaṃ ājāneyyanti.
23.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간략하게 가르쳐주신 이 뜻을 자세하게 알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저에게 자세하게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세존께서 간략하게 말씀하신 가르침을 자세하게 알 것입니다.
바가와(Bhagavā)
세존
24. 빠하시 상캉 나 위마나 맛자가 앗쳇치 땅항 이다 나마 루뻬,
Pahāsi saṅkhaṃ na vimāna majjhagā acchecchi taṇhaṃ idha nāma rūpe,
땅 친나간탕 아니강 니라상 빠리예사마나 낫자가뭉
Taṃ chinnaganthaṃ anīghaṃ nirāsaṃ pariyesamānā nājjhagamuṃ
데와 마눗사 이다 와 후랑 와, 삭게수 와 삽바니웨사네수,
Devā manussā idha vā huraṃ vā, saggesu vā sabbanivesanesu,
사쩨 위자나시 와데히 약카띠.
Sace vijānāsi vadehi yakkhāti.
24. 헤아림도 버리고 경멸하지도 않고
이 세상의 정신과 물질에 대한 욕망을 자르고
속박을 끊고 혼란하지 않고 욕심이 없다면
천신이나 인간이나 혹은 이 세상이나 다른 세계에서
그를 모든 거처에서 찾아도 발견하지 못한다.
약카여, 만약 그대가 이해했다면 말해보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 게송은 아라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천신들이나 인간들이나 누구나 이 아라한은 찾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헤아림을 버리고 자만심을 버린 사람은 아라한이라는 것입니다. 아라한은 괴로움뿐인 윤회가 끝났기 때문입니다.
이 게송에서 중요한 말이 나오는데 상카(saṅkha)입니다. 상카(saṅkha)는 정해진, 헤아려진, 간주된, 이라는 뜻입니다. 이 헤아림이라는 상카(saṅkha)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통찰지혜를 뜻하고, 둘째는 산수나 계산을 뜻하고, 셋째는 개념을 뜻합니다.
첫 번째 통찰지혜를 빤냐(paññā)라고 하는데 꿰뚫어서 아는 지혜로 무상, 고, 무아를 말합니다. 두 번째는 숫자를 계산 하는 것입니다. 숮자를 계산한다는 것은 그만한 인지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 번째 개념을 빤냣띠(paññatti)라고 하는데 개념, 명칭, 시설(施設), 관념 등의 뜻이 있습니다. 시설(施設)은 무엇을 설비했다는 것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라한은 빤냣띠(paññatti)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관념을 버리고 실재인 빠라마타(paramattha)를 봅니다. 이때의 관념이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입니다. 그러나 범부는 계속 빤냣띠(paññatti)라는 관념을 받아들여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범부는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실재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지 못합니다.
결국, 빠하시 상캉(Pahāsi saṅkhaṃ)은 헤아림을 버렸다는 것으로 고정관념이 아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대상을 관념으로 보지 않고 실재를 보면 상으로 보지 않아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봅니다. 여기서 인식이 작용하지 않고 단지 알기만 하는 마음으로 보면 통찰지혜가 나서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합니다. 헤아림을 버리니 경멸하지도 않고 이 세상을 사는 정신과 물질에 대한 욕망도 사라져 마지막에는 열반에 이릅니다. 그래서 빠하시 상캉(Pahāsi saṅkhaṃ)은 헤아림을 버렸다는 것인데 이는 모든 경험적인 존재를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경험도 버리고 나라고 하는 존재도 버린 것입니다. 이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버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 오온에서 오온의 이름을 버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름은 관념이라서 실재를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무엇이라는 이름은 있지만 부르기 위한 명칭일 뿐이지 그것이 실재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있지만 부르기 위한 명칭이지 실재하는 나는 없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인 오온에서 식(識)을 윈냐나(viññāṇa)라고 하고, 상(想)을 산냐(saññā)라고 합니다. 어느 날 밀린다(Milinda) 왕이 나가세나 존자에게 윈냐나(viññāṇa)와 산냐(saññā)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나가세나 존자는 ‘윈냐나(viññāṇa)는 아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밀린다 왕은 이해를 못해서 나가세나 존자에게 자세하게 설명을 해 달라고 했습니다. 나가세나 존자가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기에 사거리가 있습니다. 사거리 선 사람이 서쪽에서 사람이 오면 서쪽에서 오는 구나, 남쪽에서 오면 남쪽에서 오는 구나, 하고 알듯이 윈냐나(viññāṇa)는 대상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냐(saññā)는 하얗다, 노랗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름을 붙여서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집착을 통해서 만들어진 오취온으로 인해서 결국 윤회를 합니다.
‘이 세상이나 다른 세계에서’는 이번 생에서나 다시 태어난 다음 생을 말합니다. 다음에 삽나니웨사네수(sabbanivesanesu)는 ‘모든 거처’입니다. 여기서 모든 거처란 세 가지의 존재계와, 네 가지의 태어남과, 다섯 가지의 태어날 곳과, 일곱 가지 아는 마음의 거주처와, 아홉 가지 중생의 거처를 말합니다. 세 가지 존재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의 존재를 말합니다. 네 가지 태어남이란 난생, 태생, 습생, 화생을 말합니다. 다섯 가지 태어날 곳은 지옥, 축생, 아귀, 인간, 천상을 말합니다.
데와따(Devatā)
천신
25. 이맛사 끄와항 반떼 바가와따 상킷떼나 바시땃사 에왕 윗타레나 앗탕
Imassā khvāhaṃ bhante bhagavatā saṅkhittena bhāsitassa evaṃ vitthārena atthaṃ
아자나미.
ājānāmi.
25.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간략하게 말씀해주신 뜻을 이제 자세하게 알겠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천신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말씀하셨습니다.
바가와(Bhagavā)
세존
26. 빠빵 나 까이라 와짜사 마나사 까예나 와 낀짜나 삽바로께,
Pāpaṃ na kayirā vacasa manasā kāyena vā kiñcana sabbaloke,
까메 빠하야 사띠마 삼빠자노 둑캉 나 세웨타 아낫타상히딴띠.
Kāme pahāya satimā sampajāno dukkhaṃ na sevetha anatthasaṃhitanti.
26. 이 세상 어디에서도 말이나 마음이나 몸으로 짓는 악행을 하지마라.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으로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 괴로움을 섬기지 말아야 한다.
이상이 천신에게 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게송에 있는 ‘사띠마 삼빠자노(Satima sampajano)’는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입니다. 알아차림은 수행을 시작하는 행위이고 분명한 앎은 지혜수행으로 위빠사나를 말합니다. 경전에서는 위빠사나(vipassanā)라고 하지 않고 분명한 앎이라고 합니다. 또 위빠사나(vipassanā)를 통찰지혜인 무상, 고, 무아라고도 합니다. 사띠(sati)는 알아차림으로 8정도에서 바른 정진을 말합니다. 그리고 삼빠잔냐(sampajaññā)는 분명한 앎으로 바른 견해, 바른 사유를 말합니다. 주석서에서 삼빠잔냐(sampajaññā)를 지혜에 속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존재의 성품인 무상, 고, 무아를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위빠사나의 뜻입니다.
다음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마지막 문장입니다. ‘둑캉 나 세웨타 아낫타상히딴띠(dukkhaṃ na sevetha anatthasaṃhitanti.)’에서 둑캉(dukkhaṃ)은 ‘괴로움’이고, 나(na)는 ‘없다’이고, 세웨타(sevetha)는 ‘자주가다’, ‘시중들다’, ‘섬기다’입니다. 아낫타상히딴(anatthasaṃhitan)는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입니다. 그래서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 괴로움을 섬기지 말아야 한다,’입니다. 사실 내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욕망이 생기고, 욕망은 집착을 하고, 집착의 결과로 윤회를 합니다. 이런 모든 과정이 괴로움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윤회하는 생명은 무명과 갈애로 인해 태어나고 죽는 괴로움을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이것이 바로 괴로움을 섬기를 것입니다. 괴로움을 섬기지 않으려면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통찰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둑캉 나 세웨타 아낫타상히딴띠(dkukkham na sevetha anatthasamhitanti)는 감각적 욕망 과 극단고행을 벗어나서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과 10가지 선업들을 행한다면 그가 바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10가지 선행은 10가지 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10가지 바라밀은 보시, 지계, 출가, 지혜, 정진, 인내, 진리, 발원, 자애, 평정입니다. 바라밀은 완전하다는 뜻으로 피안으로 건너가는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부처님께서는 중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취온을 집착하지 말고 양극단 갖지 말고 중도를 행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10가지 선업을 쌓아야한다는 것인데 천신도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공덕을 뜻하는 뿐냐(puñña)가 아니고 선행을 뜻하는 꾸살라(kusala)를 말합니다. 10가지 공덕도 있고 10가지 선업이 있습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밋디 존자와 부처님과 대화한 천신도 감사하다고 부처님께 꽃을 받치고 인사드리고 갔습니다.
이상으로 사밋디경이 이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난다나 품의 두 번째 품이 끝났습니다.
Nandanavaggo dutiyo.
Tatruddānaṃ,
Nandanā nandati ceva natthi puttasamena ca,
Khattyo sanamāno ca niddā tandi ca dukkaraṃ,
Hiri kuṭikā navamo vutto samiddhināti.
제 2장 난다나 품은 끝났습니다.
두 번째 품에 포함된 경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쁨경. 기뻐함경. 아들과 같은 것은 없다경. 왕족경. 바람소리경. 잠과 나태함경.
실천하기 어려운경. 양심경. 오두막경. 사밋디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