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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이 영 래
대만 선교 상황 고찰을
통한 선교 전략 연구
지도 고 무 송 교수
이 논문을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함.
1999 년 1 월 일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이 영 래
이영래의 석사학위 논문을 인준함
주심 : _________________(인)
부심 : _________________(인)
부심 : _________________(인)
1999 년 1 월 일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이 영 래
감사의 글
“이대로 죽을순 없다” 언젠가 외국땅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가운데 내 자신을 향해 부르짖었던 말이다. 단지 죽는다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을 다하지 못했다’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바울사도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냈던 편지를 보면 죽음을 맞이하는 그의 모습이 얼마나 통쾌한지 모른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6~8).”
무엇이든 끝을 맺는다는 것엔 뿌듯함과 함께 아쉬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7년간의 신학수업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또 다시 “이대로 죽을순 없다”고 외치고 있다. 이것이 결코 신학수업의 끝이 될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현실 목회를 통해서 그리고 더욱 넓은 세계에서의 신학함을 통해서 나는 계속하여 나의 달려갈 길을 열심히 달려갈 것이다.
그동안 나를 낳느라 산고를 겪으시고 홀로 삼남매를 키우시느라 온갖 어려움을 감당하신 어머니께 그 동안의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는 말씀과 함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그리고 부족하고 볼 품 없는 나를 당신들의 귀한 딸과 맺어 주시고 끊임 없이 기도해주시고 격려해주시는 장인․장모님께 감사를 드린다. 특히 아버지 없이 자란 나에게 친아버지 이상으로 관심을 가져주시고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장인어른께 깊은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또 내가 한 사람의 목회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항상 나를 격려해주고 세워 주며 지금도 여전히 내 곁에서 항상 위로와 힘을 주는 아내 진경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마지막으로 인격적인 목회자의 모습으로 나를 지도해 주시고 본받고 싶은 목회자 상을 보여주신 연신교회의 이순창 목사님과 이 논문을 끝까지 관심과 사랑 가운데 지도해 주신 참신학자이며 참목회자이신 고무송 목사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사람들을 통해 나를 다듬어 주시고 또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신실하신 하나님, 바로 그 분이 나로 하여금 이 일을 이루게 하셨고 또 내일의 일도 이루게 하실 것이다.
1999년 1월 일
이 영 래 올림
목 차
I.서 론 1
1.연구의 동기와 목적 1
2.연구방법 및 범위 4
II.대만의 일반적 상황 6
1.역사적 상황 6
2.정치적 상황 9
3.지리적 상황 12
4.문화적 상황 14
(1)인구와 인종 14
1)외성인(外省人, 國語系) 14
2)대만인(閩南語系,客家語系) 15
3)원주민(原住民語系) 16
(2)문화와 경제 17
5.종교적 상황 19
III.대만선교의 역사적 상황 21
1.선교의 시작 21
2.선교의 재시작 22
3.교회의 성장 23
4.교회의 침체와 자각 24
5.대만교회의 현황과 교세 26
IV.대만 선교의 문제 28
1.다양성의 문제 28
2.토착화의 문제 29
(1)토착화의 정의(定議) 29
(2)토착화의 방법 33
(3)대만에서의 토착화 38
1)C.S.Song의 토착화 이론 38
2)대만의 토착화 41
V.한국교회의 대만선교 46
VI.효과적 선교전략 48
1.다양한 토착화의 시도 48
2.대만만을 향한 선교정책 50
VII.결 론 52
참고문헌 54
I. 서 론
1. 연구의 동기와 목적
장신대 도서관 컴퓨터에서 ‘중국’이라는 단어로 도서를 조회하면 197권의 중국관련 도서가 검색되어진다. 그러나 ‘대만’이라는 단어로 도서를 조회하면 단지 7권의 도서만이 검색되어진다. 이중 단행본은 2권 뿐이고 5권은 미간행 학위 논문이다. 5권의 논문들도 대부분 8,9년 이전의 것이고 보면 최근 들어 대만에 관해 연구되어진 결과물이 별로 없다는 얘기다. 이는 국익 차원에서나 선교정책적 차원에서 중국이 더 중요하고 대만은 덜 중요하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국익 차원뿐 아니라 선교정책적 차원에서도 대만이 중요한 나라임을 알리고 싶다.
중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제 3위의 외환보유 국가(약 860억달러) 인 대만이 경제위기를 맞은 한국에 100억달러 규모의 지원 가능성을 이야기 한 것만 봐도 대만을 한낱 인구 2천만의 섬나라로 치부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일본과 미국은 지난 1972년과 1979년 각각 중국과 수교한 이후 대만문제에 대한 애매 모호한 입장 표명을 견지하면서, 중국의 계속되는 항의에도 불구하고 대만과의 ‘준공식 관계’를 통해 국가 이익을 극대화해 왔다. 한국이 대만을 저버린 것이 국익과 시대적 흐름을 따른 것이라 하더라도 이제는 대만과의 관계를 미국이나 일본,동남아의 중국수교국들 수준만으로라도 개선해야 바람직하다.1)
1992년 8월 23일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고 대만과 단교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대만은 우리에게 자유중국이라 불리우는 가장 절친한 국가 중 하나였다. 그런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가장 먼저 한국을 국가로 승인하고 명동에 대사관을 개설한지 44년 만에 대만은 가장 친했던 친구로 부터 일방적으로 절교통보를 받은채 분통을 삭여야 했다.2)
대만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한국인을 신뢰하지 않는다. 단교 이전과 이후의 한국인에 대한 그들의 감정은 많이 달라져 있다. 따라서 한국선교사가 비기독교인들에게 주는 이미지는 오히려 일본선교사만도 못할 수 있는 것이다. 잘 알고 가지 않으면 오히려 부작용이 클 수도 있는 것이 한국인의 대만선교이다.
이러한 정황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대만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현재 우리가 접할수 있는 대만에 대한 자료는 대부분이 단교 이전의 것들이고 이는 총체적으로 변해버린 현재의 상황을 바로 담고 있지 못하다. 이전에는 대만이 중국선교의 디딤돌(Spring board)이었지만, 누구나 자유롭게 중국을 드나들수 있는 지금은 더이상 대만을 중국선교의 요충지라고 말할 수는 없게 되었다. 대만과의 단교 이전에 연구되어졌던 내용들과는 대만의 일반적 상황이나 선교적 상황이 너무나 많이 달라져 버렸다. 따라서, 변화된 대만의 상황과 대만사람들의 마음밭을 새롭게 연구해서 여러사람들을 위한 선교자료로 내어놓는 것은 꼭 필요한 작업이 되었다.
필자는 1994년 10월 부터 1995년 8월까지 견습선교사의 신분으로 대만의 타이뻬이(台北)를 다녀왔다. 이 기간동안은 타이뻬이 한국교회에서 김달훈선교사님의 지도 아래 선교훈련과 언어(중국어)훈련을 받았고, 마지막 한달간은 푸리(埔理) 근처의 메이웬(眉園) 원주민교회에서 원주민들과 함께 지내며 타문화권 적응 훈련을 받았다. 필자는 이 첫번째의 대만생활을 통해 타이뻬이의 중국인들과 푸리의 원주민들을 경험할수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에 대해 공히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으며, 타이뻬이의 대학생이나 젊은 계층들은 그들 자신이 중국인인 동시에 대만인이라고 말하곤 했다. 또 그들은 대체적으로 국민당정부에 대해 협조적이었고 모두 중국어(北京語)를 사용했다.
또, 필자는 1996년 9월 부터 1997년 6월까지는 대만장로교와 C.W.M(Council for World Mission)의 공동초청장학생이 되어 대만의 타이난(台南)에 위치한 타이난신학원(台南神學院)에서 공부하고 왔다. 이곳에서는 다른 5명의 외국인들과 영어로 수업을 받았는데, C.S.Song의 제자인 천난조우(陣南州)교수를 통해 C.S.Song의 신학과 상황신학을 깊이 있게 접할수 있었다. 본 논문에서 소개할 C.S.Song은 대만의 대표적 신학자인데, 필자는 이곳에 있는 동안 그와 만남을 몇번 가질수 있었고 이 만남은 필자의 닫혀 있던 사고의 세계가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수업 후에는 늘 대만인 학생들과 교제하며 대화를 나누었는데 타이뻬이의 중국인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그들을 보며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해 중국인이 아닌 대만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소개했고, 대륙의 중국인들에게 선교해야겠다는 마음은 눈꼽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곤 했다. 그들은 국민당정부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고 하나의 중국이 아닌 대만의 독립을 너무나도 강력히 주장했다. 더욱이 그들은 필자와 중국어로 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어 사용을 싫어했고 자기들끼리는 대만어(민란어)로 이야기했는데, 이 점이 타이뻬이와는 크게 다른 부분이었다.
약 2년여의 대만생활을 통해 그동안 몰랐던 많은 사실들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러한 경험은 대만에 대한 한국인들과 한국교회의 잘못된 이해를 조금이나마 바로잡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했다. 실제로 한국은 대만을 모르고 있다. 그들과 대화해 보면 그들을 알수 있을텐데도 우리는 그들과의 대화채널을 별로 갖고 있지 못하다. 어느 한 사람이 말하는 것이 대만을 대표하는 발언이 될수 없다. 정부의 발표가 대만인 전체의 생각을 담고 있다고 말할수도 없다. 때문에 정부와 관계가 좋지 않은 대만장로교는 자기들의 생각과 존재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장학금을 주어가며 외국학생들을 초청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 연구를 통해 대만과 대만인에 대한 또 다른 이해를 시도하여 대만을 알고자 하는 이들과 대만선교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 연구방법 및 범위
대만선교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먼저 II장과 III장에서 대만의 일반적 상황과 대만선교의 역사적 상황을 다루고 IV장에서는 대만선교의 문제점을 다양성과 토착화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V장에서는 한국교회의 대만선교 역사를 살펴보고 VI장에서는 새로운 선교 패러다임 수립을 위한 효과적인 선교전략을 제안해 보고자 한다.
II장과 III장, 그리고 IV장의 전반부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만에서 발행한 대만역사서적과 대만 주재 선교사들의 보고서와 인터넷의 대만 관련 싸이트, 그리고 몇몇 논문 등을 참고했고, IV장의 토착화 문제는 타이난신학원에서 수업하며 생겨난 상황신학의 눈과 C.S.Song의 선교신학을 바탕으로 정리 분석하였다. 이중 가장 최근의 자료가 필요할 때는 인터넷의 자료를 참고했고, 몇몇 중국어 서적들은 직접 번역하거나 재인용의 형식을 빌어 인용하였다.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참고하려 했지만 한국어로 된 대만관련 서적이 많지 않고 필자의 중국어 실력이 미숙하여 대만내의 다양한 시각을 모두 담을 수는 없었다. 또한 대만 선교에 대한 각 교단마다의 이해가 다르고 대만 내에서까지도 대만의 역사와 선교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이 있는 터라 그 모든 것들을 나름대로의 공정한 기준을 가지고 정리하기는 쉽지 않았다. 따라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긴 했지만, 이 논문도 역시 ‘필자 나름대로의 눈으로 대만이라는 선교지를 보았다’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한계에 대해서는 계속 이어질 대만에 대한 또 다른 연구들에 기대해본다.
II. 대만의 일반적 상황
1. 역사적 상황
중국인에게 대만이 알려지기는 한무제가 재위하던 기원전 135년 경이다. 한무제가 중국 남부 민란(閩南),꽝똥(廣東) 지구를 개척했을 때,‘해안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신비한 섬이 있다’는 보고를 받지만 대륙통치에 골몰하여 어부들이 발견한 이 섬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3)
서기 607년 수양제가 그 섬에 대해 보고를 받고 사람을 보내어 탐색케 하고 섬 이름을 리어우치우(流求)라고 하였다. 그 후 민란(閩南)과 이 섬(臺灣) 간의 해상통로가 열렸고 소수의 중국이민들이 바다를 건너 대만에 이주하였다.4)
13세기에 이르러서는 원조(元朝)가 중국 대륙을 통일한 후, 대만 해협의 펑후군도를 복건성으로 귀속시키고 관리 하였다.5)
1367년에 원나라는 펑후에 군사근거지를 세워 산지족의 노략으로부터 중국이민들을 보호하게 되었고 그 후에 많은 중국 이민들이 대만에 이주하게 되었다. 그중 커지아족은 대만의 개간사업 기간에 이주하여 많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6)
대만이 유럽에 알려지게 된 것은 1511년 해양을 탐색하던 포루투갈 상인에 의해서이다. 그들은 포루투갈 국왕의 사신이 되어 중국에 파견되었다가 회리바람에 밀려 우연히 대만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를 아름다운 섬이라는 의미로 ‘포모사(Formosa)라고 부른 것이 유럽에 그대로 전해지게 되었다. 포루투갈 사람들이 후에 대만과 무역관계를 발생시켰다는 설이 있지만 이를 확인할 고증자료는 별로 없다.7)
17세기에 들어서자 대만은 유럽열강의 각축무대가 되어 네덜란드가 1622년에 펑후섬을 점령했고, 1624년에는 대만의 남서안에 상륙하여 안핑(安平)에 젤란디아성(Zeelandia城)을 쌓고, 1660년에는 츠칸러우(赤崁樓)를 세우고 프로비덴시아성(城)울 쌓았다. 또한 1626년에는 스페인이 북위의 찌롱(基隆)과 딴수에이(淡水)를 점거했으나, 1641년에 네덜란드의 공격을 받고 철퇴하여 대만은 완전히 네덜란드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대만을 장악한 후 전 섬을 7성으로하여 300여개의 성과 진을 포괄하였다. 이 때의 인구는 대략 20만으로 추정되어지고 토지 소유권은 완전히 네덜란드의 동인도공사(東印度公司)의 것이 되었다. 네덜란드는 대만을 일본과 중국, 남양군도 무역의 근거지로 삼았다. 이 때, 대만거민은 동인도공사에 고용되어 혹사 당했고 이익은 모두 동인도공사의 소유가 되었기에 자연히 원망이 쌓여갔다. 그러던 중, 청나라 군사들과의 싸움에서 패한 명나라의 유신 정청꽁(鄭成功)이 항청복명(抗淸復明)의 근거지로 대만을 선택하여 네덜란드와의 전쟁을 감행하게 되었다. 1661년,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정청꽁은 군대를 해체하여 농사를 짓게 했고 해외무역을 발전시키며 명조를 다시 일으킬 꿈을 진행하던 중 1662년 병에 걸려 36세의 나이로 죽게 되었다. 대만인들에게는 정청꽁이라는 인물이 대만을 건국한 영웅으로 여겨지고 있고 타이난(台南)에는 그를 기념하는 사당과 대학교8)가 있을 정도이다.9)
정청꽁의 죽음 이후 정씨 일가에 의한 대만 경영은 3대 22년에 걸쳐 계속되었지만, 청나라의 강희제(康熙帝)에 의해 정복당하고, 청나라는 이곳에 대만부(府)를 두고 복건성의 관하에 넣어(1683) 그후 약 200년간을 지배하였다.10) 이후 잠시동안 대륙으로부터의 도항을 엄격히 제한했으나, 18세기 후반부터 이주민 도항자가 격증하여 개척이 급속히 진행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대만의 황금기라고 말한다.11)
아편전쟁 후 1858년의 톈진조약으로 북부의 딴수에이가 개항되어 1860년대 이후 차,설탕,장뇌등 농산물의 수출이 증가함에 따라, 다시 유럽 열강의 표적이 되었다. 일본도 대만 남동부에 표착한 일본인을 원주민이 살해한 것을 이유로, 1874년 대만에 출병하였다. 이에 청나라는 대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887년 대만을 독립된 성(省)으로 승격시켰고 산업을 개발하고 방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894년~1895년의 청일전쟁의 결과, 대만은 일본에 할양되고 이후 51년간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일본은 대만 총독부를 두고 대만 근대화의 개혁들을 실시했으나, 실제 목적은 대만을 쌀,설탕 등 일본의 식량 공급지로 만드는 동시에 공업제품시장으로서 확보하는 데 있었다. 또한 제 2차 세계대전중에는 언어,관습의 일본화를 추진하는 등 가혹한 식민지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대한 섬주민들의 저항은 완강하였고, 1895년의 타인완 민주국 건설운동, 1921년의 대만 의회 설치운동 등 몇 번에 걸친 항일 운동이 되풀이되었다. 1945년 일본의 패전 결과 대만은 다시 중국의 판도로 복귀되어, 대만성으로서 재출발하였다. 가혹한 식민지 생활로 인해 고통을 받던 대만인들은 본토와의 통합을 기뻐했고 중국군대를 해방자로 환영했다. 그리고 대만성장에는 장개석총통의 오랜 측근인 천이(陳儀) 대장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비상한 솜씨로 대만인을 수탈하였고 대만인들은 일체의 중요 공직에서 배척된 채 본토인의 통치하에서 또다른 식민생활을 하게 되었다. 경제와 행정은 삽시간에 극악 상태에 달하게 되었고 분노로 가득찬 대중감정은 1947년 2월 28일 대규모의 반란으로 폭발하게 되었다(2.28사건). 천이는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하여 수천명을 사살하여 질서를 회복하였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본토인들에 대한 대만인들의 증오심은 그만큼 격렬해졌고 그 감정의 골은 아직까지도 남아있게 되었다.12)
그러던 중, 중국에서는 국공내전이 재연되었고 장개석의 국민정부는 1949년 12월 7일 공산당에 패배하여 대만으로 쫓겨오게 되었고 이에 따라 대만은 세번째로 중국 본토와의 관계가 단절되게 되었다. 장개석의 국민정부와 함께 대만으로 건너온 사람들은 150만 내지 200만 정도의 공무원,군인,상공업자와 그 가족들인데 이들이 중화민국을 건설하여 정치,경제,사회의 요직을 차지하였다13). 그후 장개석의 철권통치 하에서 오늘날 까지 대만은 꾸준한 경제적 성장과 안정을 이루어오고 있다.
2. 정치적 상황
흔히 자유중국이라고 부르는 대만의 정식 명칭은 중화민국(中華民國,Republic of China)이며 입헌민주공화국이다. 현재 그들은 서기(西紀)를 사용하지 않고 중화민국 건국 연도를 공식적 연도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관공서 및 은행에서 1998년을 중화민국 87년으로 표기하여 사용하기에 대다수 국민들은 현재가 1998년이라는 것에 관심이 없고 심지어는 현재가 서기 몇 년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이다. 중화민국 87년이라는 그들의 연도가 시사하듯 그들은 1911년 장제스의 국민당 창당 시기를 중화민국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국가체제는 1946년 대륙시대에 제정된 중화민국 헌법을 변칙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이 헌법에 의하면 중화민국은 삼민주의(三民主義)에 입각한 민주공화국이며 국가기구는 국민대회,총통,5원,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등으로 구성된다. 국민대회는 각 지역, 단체에서 선출된 국민대표로 구성되며 헌법을 심의하고 총통을 선출하지만 입법기관은 아니다. 총통은 원수로서 국가를 대표하며, 국가의 중요사항을 결정하고 그 밑에 행정,입법,사법,고시,감찰의 5원을 둔다. 지방정부는 성과 현의 2급으로 나누며 각각 성(시)의회, 현의회가 있으며, 원칙적으로 지방자치제도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거의 동일지역에 중앙으로서의 중화민국정부와 지방으로서의 대만성 정부의 이중정부가 있다. 타이뻬이와 까오슝은 중앙정부의 직할시이며, 성(省)정부 밑에 16개의 현, 타이쫑(台中),타이난(台南)등 5개의 성할시가 있다.14)
그동안 외견상으로는 민주적인 공화국 체제를 유지하였으나 실재적으로는 국공내전 체제를 취하였고 반공과 대륙복귀를 국시로 삼아 본토의 중국과 냉엄하게 대립해 왔었다. 국민당에 의한 1당지배가 정치구조의 기본이었고, 상층수뇌의 중요지위는 소수의 당 지배집단이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정치의 요직과 대부분을 본토출신의 국어계가 잡고 있기에 대만인들의 정치참여가 어려워 그들의 불만이 커져가던 중 1979년 12월 까오숑시(高雄市)에서 반정부 유혈폭동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15)
50년간 국민당을 주도해 온 장제스 총통이 1975년 4월 사망함으로써 부총통 옌자포가 총통직을 계승하였다가 1978년 2월 제 6기 국민대회에서 장제스의 아들인 장찡궈가 제 6대 총통에 선출되어 5월에는 행정원을 대폭 개각하였다. 그후 1980년 12월에는 보충선거를 통해 대만인들에게 정치에 참여하는 기회를 주었고,1987년 7월 15일에 38년 만에 계엄령을 해제하였고, 복수정당의 용인과 새로운 일간지의 발행금지 해제 등 위로부터의 민주화를 단행하여 정당정치로 이행하였다. 1988년 1월 장찡궈 총통이 사망하여, 장제스-장찡궈 2대에 걸친 장정권이 종언을 고하고 대만인인 리덩훼이총통을 중심으로 하는 신지도체제가 출범하였다. 1998년 현재 대만에는 80여개의 정당이 있고 그중 유력한 3개의 정당은 국민당(國民黨),민진당(民進黨),신당(新黨)이 있고 현 총통은 국민당의 리덩훼이이며, 타이뻬이시장은 차기 총통으로 유력시 되고 있는 민진당의 천수이삔이다.16)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철저히 대립하고 삼불(三不)정책17)을 고수해 나갔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현저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1987년에 계엄령을 철폐하고 출판물의 상호교류를 허용했고 1987년 11월 2일에는 대만 주민의 대륙친척방문을 허용하는 등 경제교류의 활발화와 더불어 중국과의 관계를 「개방된 경쟁과 공존」의 단계로 이끌어갔다. 현재는 세계적 무역대국으로 성장한 중화민국의 일부 재벌들이 대륙에 대한 투자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1995년에 들어와서는 중국의 침략 위협으로 인해 한동안 긴장상태를 보였는데, 이때, 리덩훼이 총통이 미국을 방문하여 모교인 코넬대학에 대학발전기금을 헌납하고 여러 미국정치인들을 만나는 등 미국을 등에 업고 중국을 견제하려는 외교적 시도도 하였다.
UN에서 중공과 비교되는 국가로 인정받던 중화민국은 1971년 10월 중국의 UN가입으로 인해 UN에서 탈퇴함으로 국제사회에서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고, 1979년 1월 1일 미국의 일방적인 단교로 인해 그 입지가 더욱 좁아지게 되었다. 그후 외교 관계가 없는 국가일지라도 일체의 외교 역량을 동원하여 경제, 문화, 기술협력 등의 접촉을 확대함으로써 실질관계를 계속 증진해 나가는 등 총력외교에 힘쓰고 있지만 계속하여 강대해지는 중국의 힘에 밀려 국제사회 속에서 국가로서의 지위가 약해지고 있는 추세이다.18) 1992년 8월 23일에는 한국과 중국의 수교로 인해 한국과의 외교관계가 단절되게 되었는데 이는 대만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가장 먼저 한국을 승인, 명동에 대사관을 개설한 지 44년 만의 일이었다.19)
3. 지리적 상황
대만은 푸젠성(福建省)의 동쪽 150km, 리우치우제도의 남서쪽 600km, 필리핀의 북쪽 350km 해상에 위치하며, 대만섬, 펑우열도 등 79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북이 380km 동서 140km의 타원형을 이루고 있는 대만은 우리나라의 경상남북도를 합한 정도의 크기이며 남북으로 산맥이 가로 놓여 있어 동서간의 교통이 상당히 불편하고 3000m를 넘는 산봉우리가 121개나 되는 고산지역이다. 좁은 땅덩어리인지라 한국의 남산만한 높이의 산악지형은 모두 공장이 있을 정도로 토지의 활용도가 높다.
대만의 기후는 아열대에서 열대기후까지를 걸쳐 있으므로 고온다습 하며, 연평균기온은 섭씨 22도 정도이다. 강수량은 북부와 남부가 다르고, 북부는 사계를 통해서 상당한 강우가 있으나 남부는 여름이 많고 겨울은 극히 건조하여 우계와 건계로 나뉜다. 전지역 연평균 강우량은 256cm이며 여름에는 자주 태평양으로 부터 불어오는 태풍을 맞기도 한다.20)
고온다습하기에 중부지역까지는 벼농사를 이모작하며, 남부지역은 일년에 삼모작까지도 가능하다. 12월에서 3월까지는 비가 많이 오며 6월에서 9월은 30도씨가 넘는 매우 더운 날씨로 생활하기에 불편함이 많으나 호텔이나 일반 가게는 모두 에어콘 설비가 잘 되어 있어서 지내기에는 어려움이 없다. 아무리 허름한 집이라도 거의 냉방시설이 되어있고 그 반면 어지간히 좋은 집이 아니면 난방설비는 되어 있지 않은 것이 가옥의 특징이다. 어떤 사람은 ‘대만의 겨울이 한국의 늦가을 날씨 정도’라고 생각하여 무시해 버리지만, 비가 올 때면 체감온도가 상당히 떨어진다. 대만이 따뜻하다고 생각하여 아무 준비 없이 입국하여 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비가 올 때면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버스와 건물 안에서는 에어컨이 작동되어 한국인들을 더욱 당혹케 한다. 건물들은 대부분 난방시설이 되어있지 않고 난로 등을 사용하는데 대만사람들에겐 이미 익숙한 환경이지만 한국사람들은 전기장판이라도 있어야 포근한 겨울을 보낼 수 있다.21)
4. 문화적 상황
(1) 인구와 인종
인구는 1995년 현재 21,507,000명이다. 주민은 98%의 한족과 2%정도의 산지족이 있다. 한족 중 전쟁 전부터 정착한 이곳 사람이 82%, 전쟁후에 건너온 외성인이 16%(250만명)이다. 외성인(와이성런;外省人)은 대륙의 각 성에서 온 사람들인데 비하여 이곳 사람은 푸젠성에서 온 민란계가 85%(1420만명), 꽝똥성에서 온 커지아계가 15%(210만명)이다.22) 산지 소수민족인 원주민은 9종족으로 나누어지나, 주로 말레이족,폴리네시아족이다. 역사적으로는 이민의 과정에서 원주민과 한족과의 투쟁, 만란계와 커지아계의 대립이 있었고, 전후에는 정치적으로 외성인과 대만인의 감정적 대립이 뿌리 깊게 존재하고 있다. 공용어로는 뻬이찡어가 국어로서 사용되며 상당히 보급되어 있다. 그와 병행하여 타이위(민난어)가 주요한 통용어를 이루고 있다. 산지민족의 언어는 그 종족간에만 사용되고 있고 일본 식민지시대의 잔제가 있어서 나이든 산지족들에게는 일본어가 잘 통하고 있다.
1) 외성인(外省人, 國語系)
본래 중국 대륙에 거주하다 비교적 늦게 대만에 이주하여 온 중국인이다. 1945년 대만이 일본 점령에서 광복을 한 후에 처음 대만에 왔으며 1948 - 1949년 사이에 정부를 따라 대량의 이주민이 대만에 이주하였고, 각 지역에 흩어지게 되었다. 대다수가 5대 도시에 집중하여 살고 있고, 5대도시는 타이뻬이시(臺北市), 찌롱시(基隆市), 타이쫑시(臺中市), 타이난시(臺南市), 까오숑시(高雄市)이다. 그중 타이뻬이시(台北市)에 제일 많이 살고 있고 언어는 국어를 사용한다.23) 이들을 대개 다른 성(省)에서 왔다는 의미에서 외성인(外省人)이라 불리워지며,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와 함께 온 200여 만명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대부분의 정치, 경제의 중요한 요직과 요소를 장악하고 있고, 교육적 혜택도 많이 받은 편이다.
2) 대만인(閩南語系,客家語系)
가. 민란어계(閩南語系, 평지인)
민란인은 대만의 여러 족속 중 가장 많은 인구를 갖고 있다. 평지에 많이 분포한다고 하여 평지인이라고도 불리우는 이들은 약 300년 전에 복건성 남부로부터 이주하여왔다. 그중에 제일 많이 이주하여 온 때가 1661년 정청꽁(鄭成功)장군의 인솔로 네덜란드인(荷蘭人)을 몰아 내고 대만을 점령하여 이주하였을 때부터이다. 그들은 대개가 민란인으로 ‘閩’자의 어원은 복건성의 민강(閩河)에서 부터 유래되었다. 이 강의 남부에 사는 사람들을 통틀어 민란인(閩南)이라 칭한다. 현재의 민란어계의 74%~75%가 민강의 남부에서 이주하여 온 사람들이다. 모어를 민란어로하는 사람은 커지아(客家)어계와 구분하며 이 두 언어군을 타이완인(臺灣人)이라 칭한다.24)
나.커지아어계(客家語系)
조상은 중국 북부에서 왔으며 일찌기 중국 남부인 廣東省의 산악과 대만지역으로 이주하여 일찍 타오위엔(桃園), 신쭈(新竹), 미아오리(苗栗)와 핑똥(屛東) 등지에 거주하였다.25) 오호난화 이후 당의 황소의 난까지의 시기에는 커지아(客家)라는 명칭이 없었지만, 황챠오(黃巢)의 난 이후에 커지아(客家)의 조상이 난을 피하여 민란지역까지 내려와서 宋 태조가 중국을 통일한 후에 다른 종족과 비교되는 자기의 일족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므로 客家라는 명칭은 이 시기에 형성 되었다고 볼수 있다. 이들은 대게 다섯 번에 걸친 대 남하 장정을 거친 후에 지금과 같은 꽝시(廣西), 후난(湖南), 윈난(雲南), 타이완(臺灣), 난양(南洋)및 세계 각지역에 살게 되었다.26) 客家人이 본격적으로 대만에 이주한 것은 제 네번째 기간(1645 ~1867년) 중 으로 판단된다.27)
3) 원주민(原住民語系)
원주민어계는 다시 9개의 부족으로 나뉘어진다. 사실상 대만에는 12부족의 원주민이 존재하지만 3개의 부족은 인구가 몇 백여명밖에 되지 않아 대만의 학자들은 이들을 종족으로 분류하지 않고 있다. 9개 원주민 부족은 泰雅族,賽夏族,布農族,鄒族,魯凱族,排灣族,卑南族,阿美族,雅美族인데, 각 부족은 언어가 다르며 심지어는 같은 부족일지라도 거주지역에 따라 언어의 차이가 심한 경우도 있다. 원주민들이 언제부터 대만에 거주하게 되었는지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살펴보면 그들이 폴리네시아 계통의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일반적인 언어의 분류에 따르면, 南島語族(Austronesian), 혹은 말라시아에서 온 폴리네시아언어군(Malayo Poly nesian)으로 부르며, 阿美語,排灣語,魯凱語,泰雅語, 혹은 기타의 원주민언어도 남도어의 한 갈래라고 여겨진다. 이미 소멸된 平匍族 각족의 언어도 모두 남도어군에 속한다. 남도어족은 세계에서 제일 중요하며 제일 넓게 분포되어 있는 언어족 중 하나이며 전 세계의 언어 중에 1/10을 차지하고 있다. 남도언어는 태평양에 고루 분포 되어 있으며 언어도 300종에서 500종에 다다라고 있다.대만언어만 보더라도 방언을 합처 40여종에 이르고있다. 미국 예일대학교 언어학자 Isidore Dyen교수에 의하면 대만은 남도언어족이 태평양으로 진출하며 처음으로 거류한 곳으로 본다. 대만은 아마도 남도언어족의 근원지가 아닌가한다.28)
(2) 문화와 경제
인구밀도가 높으면서도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고용이 증가하고 여성의 취업비율도 높아서 거의 완전고용을 이루어 실업자는 적다. 1인당 국민총생산이 12,800달러(1998년)이며, 외환보유고가 860억달러이고 세계 14위의 무역대국으로 우리나라 보다 경제적으로 약 6년 정도 앞선다는 통계도 나와 있다. 인구가 조밀하고, 도시화가 진전되어 땅값이 비싸서 주택사정은 상당히 심각하다. 학력을 중시하며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은 사회로 전쟁 전부터 기초교육이 보급되었고 전후에는 교육의 양적,질적 발전이 현저하다. 교육제도는 6.3.3제를 취하며 9월을 학년의 신학기로 하고, 1969년부터 의무교육의 연한을 중학까지 연장해서 9년으로 하였다. 대학은 국공립 우위의 경향이 강하며, 국공사립의 연합입시제도가 취해져 입시경쟁은 아주 심하나 학비는 우리나라에 비해 무척 저렴한 편이다. 우수한 인재들 중 상당수가 국외로 유학을 하는데 문제는 이들중 귀국자는 15%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대만정부는 인재영입을 목적으로 박사학위 소지자들에게는 따로 직업을 갖고 있지 않아도 매달 얼마씩의 생활비를 제공하는 등, 엘리트 우선의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문화는 기본적으로 중국본토의 화남 문화권에 속하나, 근대사의 과정에서 외국과의 접촉이 많아 일본이나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제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중국본토의 사회주의화에 대항해 의도적으로 전통적 유교문화의 계승선양이 강화되고 문자에서도 복잡한 한자 사용을 고집하고 있다. 사회생활에서는 유교윤리와 전통적 가족주의를 기본으로 가정에서는 효행의 덕목을 중시하며 사회에서는 혈연적 종교주의가 뿌리 깊으나 종교의 계율에 의한 생활규범은 엄하지 않다. 국민은 노동의욕이 높고 근면하며, 여가를 이용한 행락, 스포츠도 최근에 점차 활발해졌다. 병원로비에서 음악회를 할만큼 음악에 대한 서민적 관심이 높아가고 있으며 타이뻬이에 있는 고궁박물관은 대륙에서 가지고 온 국보급의 보물, 서화미술품 62만 점이 소장되어 있어 국제적으로는 정평이 나있다. 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은 원래 뻬이찡에 있던 것을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올 때 옮긴 것으로 우스개 소리로 ‘왠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들은 만리장성 빼고는 다 가져왔다’고 한다.
계엄이 사라진 이후 서구와 일본의 난잡한 문화가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고 마약이 중고생들에게 까지 퍼져 있어서 정부는 이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간혹 총기를 사용한 폭력사건들이 일어나는 등 치안에도 많은 구멍이 뚫려 있다.
5. 종교적 상황
대만에는 신앙의 자유가 있으며, 신도수가 가장 많은 것이 도교, 다음에 불교, 천주교, 기독교의 순인데, 어디서나 종묘,사원,교회를 볼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다신교가 압도적이며,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어서 종교간의 갈등은 거의 없다.
중국인의 종교사상은 범령주의와 관계가 있다. 초기의 기록을 보더라도 중국인은 자연의 기이한 현상이나 기이한 수목, 산, 거석등을 숭배하였다. 대만의 종교도 역시 민간종교 위주이다. 비록 정부에서는 불교나 도교라고 하지만 실상은 이 두 종교의 혼합적 상태이며 범령주의적 관점을 갖고 있다. 즉, 자연계의 영을 숭배하는 것을 그 기초로 삼는 범령교인 것이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 온 후에는 유가와 도가에서 불교의 영향을 받아 三敎祭祖, 佛道同堂, 年節祭拜 등의 혼합종교 예식을 만들어 냈었다.29)
대만인들은 흔히들 태어나서는 四柱八字를 보고, 글은 四書五經을 읽고, 죽어서는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른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儒, 佛, 仙이 합하여도 아무런 어색함이 없다. 유교성이 짙은 것은 가정에 家堂이 있으며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冠婚喪祭에 조상에게 절한다. 불교성이 짙은 것은 ~寺라고 불리우는데 사실상 대만의 불자들은 불경 연구는 거의 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절을 건축하고 불상을 조각하며 재난과 고난으로부터 구원해 주기를 기원한다. 도교는 주술과 부적을 위주로 병을 고치거나 악귀를 쫓는 행위를 하며 대개 ~ 宮으로 도교의 진리를 연구하는 사람은 적고 미신적인 행위를 통하여 많은 신도들을 빠이빠이(拜拜)의 형식으로 도교 예식에 참가 시킨다.30)
대만을 방문해본 사람은 누구나 대만이 "민간신앙의 나라"라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대만 어느 지역을 가든지 민간 신앙의 사찰인 미아오(廟)를 쉽게 볼 수 있는데 많은 수의 상점, 가정, 직장에서 가장 중앙에 민간신앙의 신을 모셔 놓은 神位31)가 아침, 저녁 및 특정한 시간대에 祈求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민간 신앙의 사찰이 대만 전 지역에 1만개 이상이 되며, 그와 더불어 수 만 명의 민간신앙 종사자가 활동하고 있다. 민간신앙을 신봉하는 것은 개인의 욕구와 실리주의에서 나왔다. 신들과의 관계 맺음도 현세의 친구 사귐과 같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된다. 만약 그 섬기던 신이 신통치 않으면 얼마든지 버릴 수도 있다. 이런 심리를 이용하여 민간신앙 종사자들은 대량으로 신을 만들어 내고 있고 그 때문 대만 민간신앙의 신의 숫자는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렵다. 1960년 台灣省 文獻委員會의 조사 보고에는 243명의 신을 말하고 있지만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신이 생겨났는지는 알수 없고 단지 수많은 민간 신앙의 신 가운데 대만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고 많은 숭배자를 가지고 있는 신은 王爺, 馬祖, 觀音, 關聖帝君, 城隍, 保生大帝, 玄天上帝, 孚佑帝君, 土地公, 有應公 등이다.
대만에는 대부분의 가정과 상가에 빠이빠이(拜拜)당32)이 있고 동네마다 공동화장실 규모의 산당이 있다. 심지어는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이러한 빠이빠이당을 집안에 놓아두는 이들이 있을 만큼 그들의 신앙은 혼합주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III. 대만선교의 역사적 상황
1. 선교의 시작
대만의 복음선교의 시작은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네덜란드의 喬治.甘治士牧師(Rev.Georgeius.Candidius)의 대만 도착으로 복음전파가 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1624년 네덜란드가 대만 남부를 점령하고, 이를 거점으로 삼아 대만을 다스리려 했다. 2년후 스페인이 북부 찌룽(基隆)을 점거하여 네덜란드와 경쟁하게 되었다. 스페인은 네덜란드를 쫓아내려고 1627년에 함대를 남하시켰지만 기후의 불리함으로 인해 실패하고 북부에 민정기구를 설립하였다. 이들 스페인군대를 따라 천주교 선교사들이 들어오기는 했으나 이들의 활동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나 문헌은 남아 있지 않다. 거기에 비해 네덜란드의 Candidius 목사의 활동은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는 까오슝(高雄)에서부터 선교를 시작했고 계속 확장해 나갔다. 1661년 네덜란드의 대만 점령이 끝날 때까지 36년 동안 36명의 선교사가 파송되었고, 그들은 중요한 곳곳에 교회와 학교를 건립했다. 그러나 정청꽁과의 싸움에서 패한 네덜란드가 대만을 철수하게 되자 Candidius 목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귀국하게 되었고, 선교를 위해 남아있던 선교사들은 ‘그들을 첩자라고 생각’한 정청꽁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래서 간신히 시작된 선교의 불씨는 정청꽁의 박해로 인해 꺼지고, 1865년 까지 약 204년여간 동면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33)
2. 선교의 재시작
1865년 6월 16일, 영국 선교사 馬雅各(Dr.James L.Maxwell)의사는 그의 세명의 중국 동역자 陳子路,黃嘉智,吳文水, 그리고 杜社嘉德牧師(Carstairs Douglas),懷理牧師(Alexander Wylie)와 같이 대만의 타이난(台南)에 거점을 두고 의료 선교 사업을 시작했는데 바로 이 날이 대만 장로교의 기념일이 된다.34)
Dr.Maxwell과 1867년 12월 13일에 도착한 HUgh Ritchie목사는 주민들의 핍박으로 인해 사역지를 까오숑(高雄) 옮기게 되지만 관의 보호 아래 병원을 확장하고 선교사역을 계속했다. 또한 Dr.Maxwell은 산지 출신 처녀를 고용하여 산지족 선교를 시도하여 큰 수확을 얻게 되었는데, 개인이 아닌 한 마을 전체가 기독교에 입교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1871년 캐나다 선교사 馬皆牧師(George Leslie Mackay)가 까오숑(高雄)을 경유하여 1872년 3월 9일 북부인 딴수에이(담수)에 도착하였다. 그는 주로 漢人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였고 치과의사로서 의료와 더불어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건립하여 간부를 훈련 시키는 등 1901년 6월2일 58세로 소천 하기까지 29년의 선교기간을 통해 60개의 교회를 건립하였다(선교초반기 10년 동안에는 20여개의 교회를 세우고 300명이 세례를 받았다). 또 Mackay목사는 의료사역으로 4만여개의 치아를 뽑았고 말라리아 치료용 과일 쥬스를 만드는 등 당시에 많은 민중들로 부터 지지를 받았으며 아직까지도 대만의 기독교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35)
기록에 의하면, 1859년의 기독교인 숫자는 1,300명이었고 1938년에는 9,000명에 달했다.36) 1885년, 대만이 일본에 할양되고 2차 세계대전 기간인 1940년에는 일본에 의해 외국인 선교사들이 추방을 당하기 시작했다. 이는 기독교가 일본 당국과 교육방면에서 충돌이 심했기 때문인데, 일본정부가 국민학교 이상의 교육을 금지시켰지만 기독교는 중등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그들과 맞선 것이다. 일본의 이같은 압력 속에서도 교세는 점차적으로 증가되어 1948년에 대만장로교 교인의 수는 30,429명에 달했고, 1826년에 창설된 참세례 교인수는 5,050명에 이르렀다.37)
3. 교회의 성장
2차 세계대전 후 10년간은 복음전도가 매우 활발했었다. 그러나, 전후(戰後) 대만성장(台灣省長)으로 온 천이(陳儀)의 폭정으로 인해 1947년 2월 28일에 일어난 2․28혁명은 대만 역사에 한국의 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은 끔찍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대만인들이 외성인들에 의해 살해되고 고통을 당하였는데, 이 사건은 아직까지도 대만인들과 외성인들 사이에 껄끄러운 감정의 잔재를 남기고 있다.
이렇게 각 사람들의 마음이 상처를 입고 가정이 파괴되자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1948과 1949년 사이에 100만명이 넘는 대륙피난민이 들어왔고 대륙에서 선교거점을 잃은 많은 선교사들이 국부군을 따라 들어옴으로 인해 기독교는 급속한 성장을 이루기 시작했는데, 이는 공포와 좌절을 맛본 사람들의 정서가 복음을 수용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38)
전후 15년간 기독교인의 수는 10배나 증가하여 대만 내의 어떤 종교보다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쟁 전 4개에 불과하던 교파가 1955년에는 36개로 증가하였고, 전쟁 직후 8,000명이던 천주교 교인이 1960년에는 180,000명에 달했고, 개신교는 37,000여명에서 200,000명으로 늘어났다. 이 기간동안은 대륙에서 온 선교사들의 산지 원주민과 대륙 피난민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가 큰 성과를 거둔 반면, 대만인(민란계와 커지아계)에 대한 선교실적은 부진하였다.39)
4. 교회의 침체와 자각
1960년대부터는 교회성장이 멈칫해지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은 많은 선교사와 단체들의 선교전략에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그들은 대만에서도 여전히 대륙에서의 선교방식을 따랐을 뿐 대만과 대만인들에 대한 새롭고 적합한 선교전략을 수행하는 데는 소홀했다.40) 또한 경제적 안정과 위험요소의 제거, 교역자의 불충분한 훈련 등도 원인이 되었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예배당이 비어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자극받은 교회들은 학생들에게 방송 매체를 통한 전도를 시도하는 등의 노력을 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41)
1970년대에 들어 오면서 대만의 기독교는 각성을 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에 초교파인 중화복음 신학원이 설립되었고, 1975년 빌리 그레함목사 부흥회가 있었고,이 후에 각 성, 각 지역에 부흥회가 일어났다. C.C.C 의 주체로 '나는 찾았네'운동이 큰 반응을 일으켰고, 1979년에는 한국교회의 성령 운동에 큰 관심을 갖게 되어 그해 6월에 250여명의 교회 지도자와 선교사가 한국을 찾았다. 이 후에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많은 목회자와 신자들이 한국교회를 방문하고 있다.
1979년은 대륙의 교회에 대한 개방 정책이 대만의 많은 외성인(外省人)들에게는 고향에 두고온 친지 방문과 아울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고 싶은 새로운 도전감이 생기게 된 시기이다. 대만의 많은 교회가 중국 본토 선교로 인해 다시금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각 교단마다 대륙을 목표로 하는 선교 단체가 생기게 되었고, 이전에 묵묵히 선교하던 홍콩과 대만의 선교 기구들은 대륙을 위한 전문 기구를 두고 전문인을 양성하게 되었으며 따오성신학교(道生神學院)42)는 아예 대륙선교를 목적으로 신학생을 모집하게 되었다.
80년대 말에 불기 시작한 열풍은 2000년대를 표적으로 새로운 약진의 시기를 맞게 되었으며 2000년 복음화 운동 본부를 탄생 시키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한편으로는 대륙에 대한 강한 도전과 대만 자체에 대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대만에는 처음으로 교파를 초월하여 각 교회가 연합하는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2000년 복음화 운동 본부는 2000년대까지 200만의 신도, 1만개의 교회, 200명의 선교사를 목표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43)
5. 대만교회의 현황과 교세
대만의 교회는 30년 동안 침체되어 있었다. 1940년부터 1960년 사이에 산지족 가운데 부흥과 성장이 있었고 북경어를 사용하는 많은 본토인들이 개종했다. 기독교인의 비율은 정지한 상태이며 카톨릭도 쇠퇴하고 있다. 복음을 향한 획기적인 돌파구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카톨릭을 포함해서 기독교인구를 대략 5% 정도로 추산하고 있고 개신교는 약 3.1%정도로 추산된다(그러나 책임있는 개신교 목회자들의 말에 의하면 카톨릭과 기독교를 모두 합쳐서 3%남짓 된다고 한다). 목사와 전임사역자들이 부족하고 교회 안에서 장로의 힘이 강한 편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2000년 복음화 운동이 1988년에 시작되었는데 이 운동의 비젼과 역동성은 교파를 초월하여 사역자들이 함께 힘을 모아 잃어버린 영혼의 필요를 보며 개인전도, 대중전도집회, 대중매체등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데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거의 전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교회의 전도에 대한 관심도 상당히 약한 편이다.
600여개의 산지교회가 부족과 몇몇 도시에 있는데 다른교파나 참예수교,몰몬교 같은 종파도 증가하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장로교가 강세이다. 대부분의 시골교회에는 목사가 없으며 교회에서 주는 사례비도 낮은 수준이다. 전국적으로 20개의 신학교와 성경학교가 있으며 학생들 사이에 복음을 전하는 일은 활발한 편이다. Campus Evangelical Fellowship(IEFS)은 중등학교에서 40명의 간사를 두고 전도활동을 하고 있으며 C.C.C도 주요 사역을 하고 있다. 현재 중고등학교에서는 기독교 단체활동이 허용되고 있다.
성경번역을 살펴보면 성경전체가 4개 언어로,신약은 5개 언어로, 쪽복음은 1개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중국과 달리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기에 다양한 종교가 함께 존재하는데 통계적으로 살펴보면, 무종교/무신론자 20-30%, 전래종교 60-70%, 회교 0.5% 종족 종교들 0.5%, 기독교 5%(복음화율/전인구의 2.5%,카톨릭 1.4% 이단종파 0.26%,개신교 3.5%)이고, 주재 외국인 선교사가 80단체에서 863명이고, 자국 파송선교사는 10명에 이르고 있다.
대만의 인구는 21,792,541명이고, 당회(교회)의 수는 3519개, 교파수는 52종, 교인수 435,904명(1998년 현재) 이다. 연평균 교인성장률은 2.45%이고, 연평균 교회성장률은 4.00%이며, 연평균 출석인원 성장률은 2.69%이다.
IV. 대만 선교의 문제
복음을 씨앗이라 하고 현지의 상황을 밭이라고 했을 때, 한국이라는 밭과 대만이라는 밭은 유사한 점이 많다. 비슷한 문화권과 작은 영토, 일제 식민지 경험과 공산당과의 대립, 그리고 서양선교사로 인한 선교와 의료선교의 성공 등 여러 요건이 비슷하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성장한 반면 대만교회는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외형적인 성장만이 성공적인 선교 결과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선교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한 단면이 될수는 있을 것이다. 어쨌든 가시적 결과로 보건대 현재까지의 대만선교는 성공적이지 못한 것이 확실하다. 필자는 그 원인이 대만의 다양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선교정책의 실패와 그 땅에 복음을 뿌리내리려는 시도보다는 오히려 자국(自國)의 문화를 이식하려는 선교의 토착화 실패라고 생각한다.
1. 다양성의 문제
단일민족, 하나의 언어, 하나의 글, 하나의 문화를 가진 한국인들이 다양한 종족과 언어와 문화를 가진 대만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나라보다도 작은 땅덩어리에 적은 인구를 가진 대만이 그토록 복잡하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다.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외성인과 대만인(민란계, 커지아계)과 9개 원주민이 함께 살아가고 있고 그 문화와 성정과 의식이 각기 다르다.
2. 토착화의 문제
기독교 복음의 씨앗이 어떤 특정지역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 꽃이 피고 마침내 열매를 맺기까지는 나름대로 과정을 통해서 되어지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든 대만의 기독교든 서양문화의 옷을 입고 동양이라는 문화권에 이식된 것이다. 복음이 이식되는 과정에서 서로 상이한 문화의 만남으로 인한 대립투쟁의 단계가 초기에 필연적으로 있었고 다음으로 조화 절충의 단계를 거치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토착화의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44)
토착화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토착화에 대한 바른 정의를 해야 하는데 문제는 토착화에 대한 정의들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이다. 토착화 신학이 동일한 본문(Text)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상황(Context)에서 시작되기에 그 정의나 방법론이 다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우선적으로 대전신학교의 정행업 교수가 정리한 토착화 정의(定議)를 중심으로 다른 정의들을 보충해서 최종적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토착화의 정의(定議)
토착화(indigenous, indigenus, indigena)란 어원적인 뜻은 웹스터 사전에 “한 지역이나 환경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고 성장하여 산출된 어김 없는 그 고장의 것”(produced, growring, on living naturally in a country on climate; native)이란 뜻이다. 라틴어 ‘indigenous’의 의미는 ‘토착적인, 자연적으로 (흙에) 속하는’이다. 그러므로 ‘indigenization'은 본래는 그렇지 않은 것을 토착적으로만들거나 그렇게 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특히 이 말이 교회에 대해 적용될 때는, 각 나라에 있는 교회가 이국적인 조직체나 어색한 침투 혹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유 독립국이나 사회에서는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어떤 배후 목적을 지닌 기구로 여겨지지 않도록 적절한 방식으로 그 지방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45)
목덕박사(John R. Mott)는 1922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개최된 한 대회에서 토착교회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토착교회는 향토민들이 교회 안에서 마음 편하게 느끼도록 하며, 비기독교 친구들도 와서 보면 자연스럽고 제 집 같고 자기나라에 속한 것 같이 느낄만큰 깊은 인상을 주도록 하는 교회이다. 이러한 토착교회는 자기들의 토양에 가장 깊이 뿌리를 내리도록 하여야 하며 또한 오랜 세월 동안에 형성되고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훌륭한 풍습과 이상들을 무시하지 않는 교회들이다.46)
여기서 토착화가 외형적인 문화나 풍습이나 고유한 것으로 화하여 이질적이거나 낮설지 않은 것으로 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좀더 내적이고 근본적인 토착화는 영적인 것이다. 토착교회는 토착화 교회자체와 그리스도와의 직접적인 관계와 그를 위한 책임에 대하여 자각하고 있어야 하며, 토착교회를 활력화하고 인도하는 성령의 힘만을 믿는 전적인 신뢰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내릴수 있는 것이다.47)
1918년 신앙과 직제의 예루살렘회의는 토착화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서 세계교회의 불가결한 일원으로 될 때 아마도 살아있고 토착화된 교회라고 할 수 있는데, 1) 그 지교회가 모든 땅과 모든 시대에 있어서 교회의 유산을 보존하는 한편 그리스도 해석과 그 표현이 그 백성에 가치있는 특지을 융합하여 예배와 관습과 예술과 건축에서 나타날 때, 2) 그 지교회를 통하여 예수의 정신이 모든 생활부면을 감화시키며 모든 사람이 전능력을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바치게 할 때, 3) 그 지교회가 적극적으로 서 있는 땅의 백성과 생활을 같이 할 때, 4) 지교회가 그 지역사회의 정신적 힘이 되어 그 때, 그 때 당면하는 문제에 동정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그 해결을 위하여 용감히 공헌할 때, 5) 그 지교회가 선교적 정열과 개척적 정신에 불탈 때 등이다.48)
또, 1938년 마드라스 선교대회에서는 토착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49)
토착교회란 동양이나 서양의 교회가 그 땅에 뿌리를 박고, 그리스도에 복종하며 그 환경에 자연스럽고 친숙한 사상과 행동양상을 사용한다.... 선교교회가 그들의 신앙고백과 의식에 기록한 경험과 교훈을 염두에 두면서도 피선교 교회가 새 언어로 같은 복음을 전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즉, 그 나라의 종교적, 문화적인 유산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전하는 것이다.
선교에 있어서 토착화는 일반적으로 타문화권 복음 전도에 관련된 것으로 전도 방법, 성경번역, 교회 정치, 교회당 건축 양식, 예배형태,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관습의 수용 문제, 다른 종교들과의 관계, 토착적 신학의 형성, 신학교육과 지도자 육성 방법,교회와 선교회와의 관계정립 등 문제들과 관계된다.50)
전호진 박사는 상황화가 복음을 전통문화와 현문화에 동시에 상관시키는 것으로 말하나 사실은 해방신학에 기초한 이데올로기적인 특징이 더 강하다고 말하면서 토착화와 상황화를 분리해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만의 신학자 쇼키 코(Shoki Coe)도 토착화(Indigenization)란 용어가 전통문화에 복음을 적용시키는 것에만 치중하는 과거 지향적이요, 현실의 정치, 경제, 사회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토착화보다는 더 폭넓은 상황화(Contextualization)로 대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1)
실제로, 토착화란 의미는 어떤 면에서 과거적 문화에 치중하는 느낌을 주는 반면 상황화는 과거의 문화나 풍습이 아닌 현시대의 정치,경제,문화적 측면을 다루는 듯한 느낌을 주고있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토착화와 상황화를 구분하지 않고 토착화에 상황화의 개념을 포괄적으로 적용하여 토착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이는 용어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토착화 작업이 ‘항상 변화하는 상황에 계속해서 복음을 토착화 시키는 것’이기에 이 용어가 현재는 물론 미래의 상황까지도 포괄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인용하다 보면 상황화라는 용어도 함께 사용하게 될 텐데 독자는 이를 토착화와 동일한 선 상에서 이해해 주면 좋겠다.
(2) 토착화의 방법
선교에서 봉착되는 문제는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이다. 목표문화(Target Culture)에 대해 기독교 문화는 채용된 문화(Adopted Culture)이지 결코 토착문화(Native Culture)는 아니기 때문에 그 문화에 접근하기 위한 기독교적 접근은 언제나 긴장 관계를 가지게 된다.
선교사의 메시지는 성경의 메시지이지만, 그것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 당시의 언어와 문화적인 상황 가운데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문화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또, 선교사는 자기의 독특한 문화 상황 가운데에서 의사 소통된 기독교 메시지를 받는데, 이것을 선교사 문화라고 한다. 선교사는 이것을 피선교지 즉, 목표문화에 그들의 언어와 그들의 문화를 이용하여 전하게 되는 데, 선교사 문화가 피선교지에서 채용되어 가는 과정을 토착화라고 부른다.52)
전호진 박사는 목표문화에 대한 토착화를 4가지로 분류하고 있다.53)
첫째, 순응설(accomodation)인데, 대표적인 인물로 맛테오리치를 들고 있다. 즉 피선교지의 모든 문화와 풍속에 거부 반응을 가지지 아니하고 자연스럽게 순응한다.
둘째, 소유설(possession)인데, 이는 바빙크의 이론으로 그는 목표문화를 완전히 바꾸어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셋째, 변형설(transformation)인데, 이는 점진적인 방법으로 목표문화를 바꾸어나가자는 주장이다. 이것은 전통문화를 크게 붕괴시키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가치관에 입각하여 풍습과 습관 등의 문화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넷째로, 적응설(adjustment)인데, 순응설과 비슷하지만 이 이론이 순응설과 구분되는 점은 비성경적인 풍습에 대한 적응은 거부하면서 문화에 적응하는 것이다.
H.R. 니버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기독교와 문화 사이의 관계를 다섯가지로 분류하였는데,
첫째, 문화에 반대되는 그리스도(Christ against Culture)
둘째, 문화의 그리스도(Christ of culture)
셋째,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above Culture)
넷째, 역설적인 관계를 가진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 in paradox)
다섯째,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Christ transformer of Culture)이다.54)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에 대한 니버의 분류처럼 복음의 토착화를 유형별로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이 몇가지 정도로 정리해 볼수도 있다.55)
첫째로 토착화에 대해 처음부터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복음의 본질과 이에 따른 신앙고백은 철저하게 고수되어져야 한다는 태도로 그들은 피선교지의 문화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갖는다.56)
비기독교적 종교전통을 대하는 과거의 배타주의 혹은 포괄주의 신학자들은 대개 기독교는 완전하고 비기독교적 종교전통은 불완전하거나 거짓 종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양자간의 만남에 있어서 기독교는 항상 비기독교적 종교전통을 변화시키는 주체였고, 비기독교적 종교전통은 항상 기독교에 의해 변화되어야만 하는 객체였다.57)
둘째로, 혼합주의적 경향의 태도가 있다. 서양 선교사들이 복음을 이식할 때 두가지 방법을 사용하는 데, 자기들의 모국어를 현지에 가르쳐서 새 말을 창조해 넣는 방법이과 현지어 가운데 가장 서방적인 기독교의 관념에 가까운 것을 골라서 이것을 기독교화 시키는 방법이다. 여기서 이른바 현지어의 의미변화와 풍부화가 이루어지고 선교사들 자신에게도 두 개의 문화 혼합현상이 형성된다. 외래종교인 기독교를 수용하는 현지인들은 그것을 자기들의 기성종교관념에 적응한 연후에라야 비로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때문에 현지의 기독교 이해는 불가피하게 종교혼합현상을 통하여 겨우 성립되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혼합현상은 기독교를 상대주의적인 종교로 하락시킬 우려가 있다. 사이비 신앙운동이나 기독교적 이단이 많이 일어나는 것이 바로 이 혼합적 신앙에서 발생한다고 볼수 있다.58)
셋째로, 대치주의 경향의 태도가 있다. 이것은 선교지의 고유한 종교나 사상에서 기독인의 어떤 모형을 찾아서 그것을 가지고 기독교의 신학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윤성범이 단군신화에서 신론의 감을, 정감록에서 기독론의 감을, 율곡사상에서 성령론의 감을 찾았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같은 방법은 토착적 신학을 형성하는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시도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위험스러운 측면과 함께 공허한 신학이 되어버릴 염려도 있다. 기독교를 타종교에 대해 상대적인 위치에 놓기 때문 기독교의 본질인 특수성이 흐려질 우려가 있는 것이다. 59)
넷째로, 변혁주의(개종주의) 경향의 태도가 있다. 박봉배는 “혼합주의가 저지르기 쉬운 기독교의 독특성을 보전하기 위해서 그리고 대치주의가 저지르기 쉬운 배타주의와 그 속에서 묵살되기 쉬운 전통적인 문화나 종교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변혁주의가 요청된다”고 주장했다. 한철하도 “기독교 자신을 변질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토착문화를 순화하여야 한다. 인간주체의 개종없이 기독교의 토착화란 기대하기 곤란하다”고 주장했다. 여기서는 분명히 기독교의 복음이 인간주체를 개종시키고 그 개종된 인간주체가 자기가 처해있는 상황을 또한 개변하고 순화해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보수적 입장은 적극적인 토착화 새도에 대해서 언제나 방어적인 입장에 선다고 할수 있다.60)
이상에서 열거된 방법들은 토착화의 방법론에 있어서 그 타당성의 일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보다 바람직한 토착화 방법을 찾아내는데 있어서는 이 모든 것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해서 정리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61)
먼저 우리가 유의해야 할 과제는 기독교 복음의 진수를 가려내는 일이다. 복음 곧 진리는 절대적이고 자기동일성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 다만 복음이 서구의 문화라고 하는 형식이나 용기에 담겨 이 따에 이식된 것이고 또 이땅에 들어와 한국 전통문화나 종교라는 토야에 뿌리 내리는 과정에서 혹시나 왜곡된 것이나 잘못 토착화한 것이 있으면 그것부터 검토학 분석해서 정리하는 작업부터 해야 할 것이다. 이종성은 “우리가 할 일은 복음을 토착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릇되게 채색되고 토착화된 보음을 언제든지 비토착화해야 한다. 그러므로 토착화를 생각할 때 2단계, 즉 외국에서 온 복음을 우리 땅에 뿌리를 내리게 한다는 사고방식이 아니라 3단계로, 즉 예수의 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한국적으로 채색된 것에서 다시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는 3단계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토착화된 오늘의 신학에서 참된 기독교 신학형성을 위해 나아가는 것이 한국적 신학의 방향이요 토착화론의 과제인 것이다.62) 과거로 돌아가는 토착화 작업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토착화 작업은 오늘의 상황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끝날까지 새롭게 진행되어져야 할 멈출수 없는 작업이다. 이미 청바지를 입고 햅버거를 먹으며 랩송을 불러대는 세대에게 전통문화로의 토착화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토착화에 역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에게 광주민주화 항쟁이나 2.28의 시대적 의식을 요구하며 그 시대로의 토착화를 시도한다는 것도 역시 시대착오적 행동일 것이다. 바람직한 토착화는 바로 오늘부터 오늘을 사는 세대를 목표로 이루어져야 한다. 또 내일은 내일의 세대를 대상으로 새롭게 연구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의 내용이 되는 본질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다. 복음의 빛 아래 한국의 토양(전통문화나 종교등)을 해석하고 변혁시키며 순화시키는 일은 지속되어야 한다. 토착화의 문제는 본질(복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형식이나 복음을 수용하는 용기와 관련하에 논의되어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토착화 논의는 더욱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과제로 남게 된다.63)
기독교 복음은 선교지에 토착화되어 그 땅에 기독교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그러므로 토착화의 영역은 넓고 다양할 수밖에 없다. 이규호는 토착화 운동이란 신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성숙하여 교회 전체가 다른 본야의 학문, 이를테면 철학, 역사, 문화, 예술 등의 학문들과 협력하여 되어지는 종합적 ‘창조행위’라고 말했다. 따라서 기독교의 복음이 한국인의 정신과 모든 생활과 문화, 예절, 관혼상제 등을 지배할 때 이땅에 복음이 명실 상부하게 토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64)
(3) 대만에서의 토착화
1) C.S.Song의 토착화 이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만을 비롯한 제 3세계 교회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심오한 신비를 자기 자신의 사회,문화,정치적 상황(context) 속에서 증명해야 한다는 요청에 직면해 있다. 대부분의 피선교 국가가 그렇듯이 우리나라나 대만도 역시 서구신학을 그대로 답습하는 경향이 있는데, 서양인의 눈으로 서양인의 상황에서 발견한 하나님을 전혀 다른 동양인의 상황 속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신학은 복음과 상황을 상호 관련시키는 작업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모든 신학은 지역적이고 토착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만의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신학은 그 내용을 무론하고 형식에 있어서는 대만적인 신학이어야 한다.65)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토착화 신학 내지는 상황신학 등이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반면 대만에서는 한 탁월한 신학자의 노력으로 대만의 토착화 신학이 생겨났고 뿌리를 내렸다. 그가 바로 송취엔셩(宋泉盛, C.S.Song)이다.
그는 민란계에 속하는 대만출신의 신학자로서 국립대만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대학에서 신학사(B.D) 학위를 받았고, 미국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Ph.D.학위를 받았다. 그는 타이난신학원(台南神學院)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고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실참여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으로 인해 국민당 정부로부터 추방을 당하여 국외를 떠돌던 중, 1976년부터 1977년에는 프린스턴신학교의 객원교수를 역임하였고, W.C.C의 신앙과 직제위원회 부총무를 역임한 후 현재는 W.C.C의 회장으로 있다.
필자는 1996년 9월부터 1997년 6월 사이에 대만의 타이난신학원에서 C.W.M과 대만장로교의 공동초청 장학생으로 공부한 적이 있는데, 이때 그로부터 두 번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크리스챤으로서의 확실한 자기 정체성을 갖고 있으면서 모든 신학에 대해 개방성을 갖고 연구하는 탁월한 신학자임이 분명했다.66)
그는 자신의 토양 안에서 복음의 씨를 발견하여 그 씨를 꽃피워 열매맺고자 하는 삶의 신학으로 선교신학을 발전시킨다. 그의 신학은 서구신학의 틀에서 벗어나 아시아의 종교적 심성, 아시아 민족의 고난과 삶을 통해 복음을 새롭게 이해하고 있다.
C.S.Song의 신학의 기본입장은 자신이 그리스도인 공동체 속의 일원임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의 입장은 자신의 그리스도인의 신앙, 중국의 전통문화와 근대의 전통 속에서의 아시아인으로서의 실존, 성서연구를통한 신학적 사고가 바람직하다고 본다. 하나님의 선교를 논함에 있어 더구나 기독교 선교에 있어 이러한 주체성의 고백은 토착화 신학에 중요한 요소이다. 개인적 체험없이 타종교를 논함은 객관적일 수는 있으나 사변적인 언어로 끝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C.S.송은 서구신학의 텍스트를 기계적으로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 민족들의 살아있는 경험과 삶의 정황으로서 성서를 읽고 신학적인 비젼을 추구하는 것은 그의 삶의 신학을 어디에서 출발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신학의 자료를 상상력과 열정, 3차원적 직관과 통찰력, 즉 제 3의 눈으로서의 영성이라고 보는데, 이는 토착화 신학자들과 동일한 것이다.67)
그는 창조와 구속을 동전의 양면으로 보고 일찍부터 여성해방과 생태계 문제 등을 다루어 왔다. 토착화 선교의 목적인 인간의 통전적 해방에 있어서도 같은 입장이며, 하나님나라관에 있어서도 십자가와 연꽃의 비유와 같이 통전적이다. 그의 선교신학에는 복음주의적 성서관, 상황주의적 현실성, 토착화 유형의 문화신학이 포괄적으로 포함되기에 그의 입장이 통전적이고 상생공존의 선교신학적 틀이 됨을 알 수 있다.68)
오늘날 까지도 기독교선교는 외국선교로 간주되어 오고 있는데 C.S.Song은 “이러한 시대가 이미 끝났다”고 선포한다. 그는 계속해서 “외국선교라는 말이 사용되어질 때 그 이면에는 ‘서양본국’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 속에 들어 있고, 미개인이 거주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의 이국에는 그들의 선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숨어있다”고 말한다. 이 사실은 서구 기독교인들이 ‘미개’(uncivilized)라는 말과 ‘비복음화’(unevangelized)라는 말을 거의 동의어로 간주한다는 것에서 나타난다. 기본적으로 서양선교사들의 선교는 발전되지 않은 국민들을 위한 선교였지, 발전된 국가의 국민들 못지 않게 제 나름대로 정신적으로 성숙한 이들과 함께하는 선교가 아니었다.69)
그는 기독교 선교의 본질을 고난의 선교라고 말한다. 고난의 선교인 만큼 기독교 선교는 치유와 화해의 선교도 된다. 선택받은 그리스도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의 값을 치룬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선교이다. 기독교 선교란 이교도를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일만이 아니다. 그런데 서구의 외국선교는 기독교 선교가 물리적 확장과 숫적 팽창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가정 아래 운영되어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이 기독교 선교의 으뜸가는 목적으로 여겨지면 영토 확장주의가 선교활동의 지침 원리가 될 공산이 크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교파주의와 관련된 수많은 악을 낳게 된다. 신성로마제국의 등장으로 고난의 교회 시대는 끝츨 맺고 영광의 교회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영광의 교회는 변절의 교회나 다름이 없었다. 교회사의 모든 시대에 있어서 개혁자들의 투쟁은 영광의 교회의 변절에 대항하는 투쟁인 것이다. 영광의 교회는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렸고 개종을 강요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고난의 그리스도가 그들과 함께 하실수 있었겠는가?70)
C.S.Song의 선교신학적 관심은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아픔,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중심적 선교, 희망을 향한 부활의 하나님 나라 등이다. 이를 위해 인간 삶을 신학의 자료로 삼고 서구 신학을 탈피하여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교회의 선교가 아닌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아시아의 교회가 사도적 사명을 띠고 세상과 관계하며 살 때, 그 임무를 충실히 이행할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문화와 이데올로기를 넘지 않는 교회는 남자와 여자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마음을 훼손하고, 교회의 품에서 그리스도를 몰아내는 절망의 선교(mission of despair)일 뿐이다.71)
2) 대만의 토착화
앞장의 선교역사에서 살펴보았듯이 대만선교역사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교의 역사를 토착화의 역사라고 생각해 볼 때, ‘당시의 네덜란드 선교사들은 대만에 복음을 토착화 시키는데 성공했는지’를 질문해보아야 한다. 성공했더라면 오늘의 대만교회가 그들을 높이 평가하고 존경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것을 보면 그들은 복음을 토착화 시키는데 실패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초기의 네덜란드 선교사들이 대만에 끼친 공로도 많이 있다. 발달된 농경기술을 전해 주었고 산지 원주민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으며 그들의 말을 배우려고 노력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네덜란드 정부와 밀착된 관계에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선교사역을 했다는 것이다. 교회는 악랄한 식민정책의 앞잡이 역할을 했고 대만거민들을 고용할 때에도 기독교로의 개종을 강요하는 등 교회에 대한 좋지 못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동인도회사에 의해 수탈을 당하며 고통을 당하던 당시의 거민들에게 기독교로의 개종은 곧 매국행위로 여겨졌던 것이다.72) 때문에 네덜란드의 철수를 광복을 맞이한 것처럼 기뻐하는 대만인들에게 교회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존재였던 것이다.
더욱이 네덜란드 선교사들은 선교를 하면서도 현지 지도자를 양성하지 않는 실수를 범했다. 모든 것을 선교사들이 주관했고 현지인들은 무조건 순종하고 따라오는 수밖에 없었다. 네덜란드의 철수 이후 200여년 간의 교회 공백기는 어쩌면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20세기의 영국 및 카나다 선교사들의 선교는 토착화에 나름대로 성공한 점이 인정된다. 1865년 6월 16일, 영국 선교사 Dr.James L.Maxwell은 세명의 중국인 동역자와 Carstairs Douglas목사, 그리고 Alexander Wylie목사와 같이 대만의 타이난(台南)에 거점을 두고 의료 선교 사업을 시작했고, Dr.Maxwell과 Hugh Ritchie목사는 까오숑(高雄)을 거점으로 관의 보호 아래 병원을 확장하고 선교사역을 했다. 그들의 의료선교는 당시의 민중들의 삶 속에 깊이 들어갈수 있는 방법이었고 그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선교방법이었다. 특히, Dr.Maxwell은 산지 출신 처녀를 고용하여 산지족 선교를 시도하여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73)
1871년 입국한 캐나다 선교사 馬皆牧師(George Leslie Mackay)는 주목할만한 인물인데, 그는 주로 漢人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였고 치과의사로서 의료와 더불어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건립하여 간부를 훈련 시키는 등 1901년 6월2일 58세로 소천 하기까지 29년의 선교기간을 통해 60개의 교회를 건립하였고, 철저히 대만인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중국어가 아닌 대만어를 배웠고 대만인 처녀와 결혼했으며 대만인들과 같은 옷을 입고 지냈다. 그의 겸손한 삶과 헌신은 많은 민중들로 부터 지지를 받았고 그의 선교는 한 사람의 선교사가 이룬 결과치고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된다. 무엇보다도 그가 심어준 훌륭한 선교사의 이미지는 현재까지도 대만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데, 타이뻬이에는 그를 기념하는 병원(Mackay Hospital)이 있을 정도이다.74)
1885년, 대만이 일본에 할양되고 2차 세계대전 기간인 1940년에는 일본에 의해 외국인 선교사들이 추방을 당하기 시작했다. 이는 기독교가 일본 당국과 교육방면에서 충돌이 심했기 때문인데, 일본정부가 초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금지시켰지만 기독교는 중등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그들과 맞선 것이다.75) 그러나 일본의 계속되는 탄압으로 인해 선교사들은 하나 둘 그들과 야합하기 시작했고 고난을 회피한 그들의 처신으로 인해 대만인들에게는 선교사에 대한 좋지 않은 이미지가 남게 되었다. 이는 C.S.Song의 말처럼 기독교 선교의 본질이 고난의 선교라고 생각해 볼 때 너무나 부끄러운 모습이고 교회가 지배자에게 아부하는 존재로 오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때문에 일제시대에는 교회가 일제의 편으로 돌아섬으로 인해 교회와 교인 수의 증가는 가져왔지만 대만인들의 가슴 속에 기독교 정서가 아름답게 토착화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필자는 기독교 선교가 단지 이교도를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교회를 성장시키는 일만이 아니라, 약자인 토착민들 편에 서서 고난과 순교의 삶을 실천함으로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랑이 그들의 가슴 속에 잔잔히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일제시대의 기독교 토착화는 실패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일제로부터 해방된 대만은 10년간 복음전도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만성장(台灣省長) 천이(陳儀)의 폭정으로 인해 1947년 2월 28일에 일어난 2․28혁명은 또다시 대만교회의 토착화에 대한 시험거리로 작용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대만인들이 외성인들에 의해 살해되고 고통을 당하였는데, 문제는 이 때에도 대부분의 교회가 대만인들의 편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1948과 1949년 사이에는 100만명이 넘는 대륙피난민이 들어왔고 대륙에서 선교거점을 잃은 많은 선교사들이 국부군을 따라 들어옴으로 인해 기독교는 급속한 성장을 이루기 시작했지만 이는 말 그대로 피난민의 교회였지 대만인의 교회는 아니었다. 대륙에서 온 선교사들은 산지 원주민과 대륙 피난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선교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대만인(민란계,커지아계)들에 대하여는 그 실적이 형편없었다. 대만인들의 마음밭에는 여전히 기독교 복음이 토착화되기 어렵게 가시떨기가 자라났고 자갈돌이 쌓여갔던 것이다.76)
왜 대만에서는 장로교의 교세가 가장 강한 것인가? 이는 장로교가 나름대로 대만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심성에 복음을 토착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교파의 교회들이 대부분 중국본토에서 후퇴해 온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었기에 그 방향이 다분히 중국적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대륙에서 되어지던 토착화 작업을 대만에서도 같은 중국이라는 개념으로 계속하여 진행했기 때문에 대만의 교회를 세우기보다는 여전히 대륙의 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중 대표적 문제가 언어의 문제인데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사용하던 만다린(북경어)을 사용했고, 이는 국민당 정부로부터 북경어 사용을 강요받던 대만인들에겐 효과적 선교 언어가 아니었다고 판단되어진다. 한국인들이 일제시대 때, 일본어 사용을 강요 당하면서도 교회에서는 한국어로 예배드리며 그 마음밭에 복음이 자라가던 것과는 달리 대만인들은 학교에서 매맞으며 배우는 중국어를 교회에서도 사용해야 했던 것이다.
대륙의 선교사들은 다시금 중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대만을 단지 디딤돌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은 오늘날까지 계속되어져서 여전히 대륙편향적인 선교와 목회를 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또 그들로부터 훈련받은 현지의 목회자들도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데 이를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문제는 그들의 이런 방향설정이 대다수의 대만인들에겐 교회의 존재가 그들을 억누르는 또다른 존재, 즉 국민당의 허수아비로 여겨졌을 가능성 때문에 생겨난다. 이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의 선교방향이 다양하지 않았기에 오는 문제이다. 대륙편향적인 선교정책과 원주민들을 위한 선교정책이 있다면 대만인들을 위한 선교정책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대만교회는 아직까지 그 교세가 약하고 성장률이 지지부진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대만인들의 마음밭에 자라난 가시떨기와 돌들이다. 그것들을 제거하고 그 마음밭을 갈아서 복음의 씨를 뿌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토착화가 필요한 이유이다. 토착화의 시도는 변화의 요청 앞에 직면한 기독교의 자기 한계에 대한 인식이 그 기초이다.
V. 한국교회의 대만선교
한국교회의 대만 선교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던 정성원선교사가 공산군을 피해 국부군을 따라 대만으로 피난감으로써 그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1951년 2월부터 본격적으로 선교를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주로 교포들을 대상으로 하였다.77)
1957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서울여전도회연합회의 생활비 부담을 통해 그녀를 정식으로 파송하였고, 정선교사는 1951년 1월 찌롱(基隆)에, 1955년 9월 까오숑(高雄)에, 1957년 5월 타이뻬이(台北)에 한인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녀는 1967년 경에는 산지 원주민 선교를 시작하여 그들에게 취업을 알선해주고 전도하여 중국교회에 소개하는 일을 하였다.78) 같은 해 4월 정선교사는 안수받은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해 주기를 요청해 김응삼목사(現 총회세계선교부 총무)를 비롯해 박성태, 김영건, 계화삼, 홍동겸, 손중철, 김남수, 김달훈, 한덕성, 김동렬선교사등이 파송되어 왔고 이들 중 김달훈(타이뻬이한국교회), 한덕성(까오숑한국교회), 김동렬(찌롱한국교회)선교사등은 현재까지 현지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다.79) 현재 대만 내에는 예장 통합측 외에도 각 교단과 선교단체에서 파송한 60여 가정의 한국선교사가 상호 긴밀한 협조 가운데 활동하고 있다.
온누리교회의 두란노 경배와 찬양이 대만 청년들 사이에 큰 영적 각성을 일으키고 있고 매년 여름과 겨울에 청년 및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경배와 찬양 학교’가 커다란 규모(2-3천명 정도가 참여)로 열리고 있다. 1995년에는 매달 하용인선교사가 대만을 방문하여 타이뻬이의 이린수팡이라는 서점의 예배실에서 경배찬양집회를 하기도 했다. 대만 내 「경배와 찬양」 사역의 성공은 대만청년들의 한국으로의 유학으로 이어졌고 지금까지 해마다 수십명의 대만청년들이 온누리교회의 「경배와 찬양」학교에서 몇년 간씩 선교훈련을 받고 대만이나 중국으로 재파송 받고 있다.
VI. 효과적 선교전략
처음 선교지에 복음을 심을 때와 지금은 많은 차이가 있다. 세계는 급변하고 보편적인 문화가 각 나라에 존재하는 이 시점에서 과거의 문화로 돌아가서 그 문화에 복음을 토착화 하겠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과거의 상황에 토착화 하는데 실패했다고 한다면 이제는 현재의 상황(Context) 속에서 상처받고 깨진 심령들과 그 삶의 자리에 다시금 토착화를 시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여기서 원론적일지는 모르지만 효과적인 선교전략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다양한 토착화의 시도
다양한 토착화의 시도가 있어야 한다. 대만은 우리가 보는 일면으로 평가할수 없는 나라이기에 그 다양성 만큼이나 다양한 방법으로 토착화를 시도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토착화 작업을 해야 할 땅은 현재의 대만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대만이라는 나라이며 동시에 그 나라에서 살아가는 그 사람들의 마음밭이다. 그들이 원주민이면 원주민의 마음밭을 연구하여 토착화해야 할 것이고, 그들이 외성인이라면 외성인의 마음밭, 민란인과 커지아인이라면 민란인과 커지아인의 마음밭에 복음을 토착화시켜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토착화 시도는 각기 다른 그들을 위해 다양해질 수 밖에 없다. 대만 내의 한인교회들도 2천여명 밖에 되지 않는 한국인들만을 위해 존재하기 보다는 각자 가능한 대로 대만의 한 부분에 토착화하여 대만의 일부가 될 필요가 있다.
한인교회는 교회당의 일부 혹은 전부를 유치원, 경로당 등 사회복지 시설로 활용하고 한글학교 등을 통해 대만과 한국 사이의 문화교류를 도모할수도 있다. 또한 한국어 예배와 더불어 현지 대만인 목회자를 통해 대만어나 중국어 예배를 실시함으로 교회가 부족한 대만에서 한국인만의 교회가 아닌 한국인과 대만인 공동의 교회로 변화될수 있는 것이다.
찌롱(吉隆)한국교회의 김동렬선교사는 이미 이런 사역의 일부를 시작하여 찌롱국군병원의 군인예배를 인도하며 대만군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열정적인 선교사역을 하고 있고 찌롱교회에는 이미 한국인교포와 중국인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김선교사는 또한 사회복지센타를 건립하여 대만인들의 삶속에 깊이 들어가고자 하는 장기적 계획을 갖고 준비하며 기도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기반이 약하고 소외당한 원주민들을 위해서는 또 다른 방식의 선교전략이 필요하다. 타이뻬이한국교회의 김달훈선교사는 특히 원주민선교에 관심을 갖고 여러 원주민교
회를 개척하였고 선교비를 지원하여 산지족 목회자를 파송하여 왔는데 이러한 사역과 더불어 단기 의료선교와 이미용선교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의 선교사들은 서양선교사들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들과 동역의 차원에서 섬기는 자세로 선교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이 대만인이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중국인의 자존심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그들을 세워주지 않으면 그들은 결코 한국선교사와 함께 하려고 하지 않는다. 장학생을 초청한다고 해도 ‘오고 싶으면 오라’는 식으로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어렵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와 달라’고 요청해야 가능해진다.
한국교회의 성령의 열기를 그들의 자존심을 건들지 않는 방법으로 부드럽게 전해야 한다. 한국교회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문을 열어야 하고, 이를 위해 양국을 연결할수 있는 인물들을 많이 양성해나가야 한다.
2. 대만만을 향한 선교정책
중국을 향한 디딤돌이 아닌 대만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선교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해야 한다. 중국은 이미 개방되었고 중국선교를 위해서는 직접 중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중국에 가기 위해 대만을 이용하는 선교사 보다는 대만을 목적으로 대만의 한 종족만을 가슴에 품고 그들을 향해 나아가는 선교사가 필요하다. 특히 아직 그 복음화율이 미약한 대만인(민란계와 커지아계)들에게 지혜롭게 선교할 사람들이 필요하다. 대만어와 중국어를 익히고 대만인들의 삶 속에 깊이 들어가서 선교할수 있는 선교사를 양성하고 현지의 교포 2세를 훈련시켜서 활용하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대만 신학생을 한국으로 초청하여 성령의 열기를 체험케 하고 뜨거운 열정을 품게 하여 다시금 대만으로 재파송하는 방법이 있다. 이는 한국인이 현지에 가서 선교하는 것보다 훨씬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더욱이 대만은 경제적으로 한국을 앞서 있는 선진국이기에 한국의 선교사가 그들의 신학교에서 강의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따라서 이미 교류가 있는 대만장로교의 신학교인 타이완신학원, 타이난신학원, 옥산신학원의 신학생들을 단기 혹은 장기로 초청하여 교육함으로 대만교회 내에 친(親)한국 목회자를 심고 그들을 통해 한국의 목회자들이 부흥회나 대형선교집회등을 인도하여 부흥의 불길을 일으킬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 온누리교회의 「경배와 찬양학교」가 대만과 홍콩의 청년들을 한국으로 불러들여 1~2년간의 교육을 통해 중국으로 파송하거나 그들의 나라로 재파송하고 있는데, 문제는 그들의 대부분이 평신도 여성이어서 대만교회의 지도층을 공략할수 없고 온누리교회 이외의 한국교회와의 연계성을 갖지 못하여 한국교회의 선교에 있어서 중계 역할을 감당하기에는 미흡한 형편이다.
필자가 대만에서 만난 한 원주민 목사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에서 1년간 공부하고 왔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는 친한국적 성향을 갖고 있어서 그를 통한 한국교회의 선교 가능성을 엿볼수 있었다.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세계선교대학원에는 아직까지 대만의 신학생이나 목회자가 다녀간 적이 없는데, 이는 우리 교단이 아직까지 대만내의 선교채널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만일 우리가 대만 내에 이러한 선교채널을 갖게 된다면 한국교회의 성령의 열기를 부흥회나 경배찬양 등을 통해서 전파할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대형집회는 침체된 대만교회를 일으킬수 있다.
VII.결 론
선교에 있어서 토착화 과업은 그 필요성과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성육신 사건을 토착화의 모델로 삼아 효과적인 타문화권 선교를 위해 바람직한 토착화가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토착화 과업에서 유의해야할 사항은 토착화된 그것이 성경적이어야 하고, 문화상황에 적절한 것이어야 하며, 효과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적인 동화와 효율성만 생각하고 성경적 진리로부터 이탈할 때 그것은 선교에 적절한 것이 아니고, 기독교가 아닌 이단이 되어진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또한 문화상황에는 적절한 것이지만 효과적이지 못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오히려 상황에는 적절하지 못하나 성경적 진리를 그대로 전했을 때 효과가 나타난 경우도 선교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실이다. 선교에 임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언제나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선교에 있어서 바람직한 토착화는 성경적으로 참되어야 하며, 선교에도 효과적이어야 한다. 아무리 문화 상황에 적절한 것으로 보여지고 효과적이라 할지라도 복음의 본질을 상실했으면 그것은 토착화가 아닌 토양화이다.80)
한국교회는 결코 대만교회보다 우월하지 않다. 하나님이 한국교회를 먼저 부흥시켜 주신 것은 한국교회를 통해 대만을 부흥시키시기 위함이다. 물론 한국교회는 대만 외에도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에 선교해야 할 책임을 갖고 있다. 대만이 다른 나라에 비해 선교전략적으로 훨씬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필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단지 똑같은 물자와 인력을 투자하더라도 현재와 같은 과거 지향적 선교방식은 효과적일수 없다는 것이다.
서양선교사들의 대만선교는 토착화에 실패했다고 말할수 있다. 현재까지 한국교회의 대만선교도 이렇다 할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물론 선교사역이 단시간 내에 어떤 결과를 이루어 내는 것만은 아니지만 우리는 지금까지의 문제점을 지적해보고 뒤바뀐 상황에 민감하게 대처하여 보다 효과적인 선교사역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만 내의 다양성을 인식하고 각 족속과 지역의 특색에 맞는 선교방식을 채택하여 복음을 그들 각자의 마음밭에 토착화 시켜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대만 내에 다양한 친한국 세력을 키워서 심어놔야 하며 그들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대만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대만의 심령들을 효과적인 방법으로 공략해야 한다.
중국선교와 대만선교는 이제 더이상 같은 선상에서 이루어질수 없다. 중국은 중국, 대만은 대만이다. 중국도 역시 각 지역과 종족마다 나름대로의 선교전략이 수립되고 있듯이 이제 대만도 중국선교를 위한 선교전략지가 아닌 대만 그 자체로서의 선교지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선교정책은 이제 더 이상 과거나 현재를 목표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가까운 미래나 먼 미래를 목표로 수립되어지고 진행되어져야 한다. 만일 우리가 현재를 목표로 하여 계획을 수립하고 선교활동을 시작한다면 선교사들은 빠르게 변해버리는 선교지의 상황에 민감하게 대처할수 없어서 그 사역이 실패로 끝나게 될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미래를 볼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일해야 할 상황(Context)은 항상 미래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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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만남부한국선교사연합회 원문보기▶ 글쓴이 : 나와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