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점점 세분화되고 있다. 소비자의 니즈는 끊임없이 분화하고 마이크로화 되는 중이다. 그래서 과거 마케팅 교과서에서 중요하게 언급돼왔던 매스 세그멘테이션 이론은 이미 과거가 돼버렸다. 이제는 트라이브(Tribe)라고 부르는 마이크로 세그먼트가 점점 중요해지고 있는 세상이 됐다. 세상이 이렇게 빠르게 변해 가는데 자동차 메이커라고 이런 변화에 자유로울 수 있으랴. 물론 아니다. 그리고 럭셔리 SUV 카테고리도 이런 추세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 오로지 전통만을 앞세워 변화의 흐름에 뒤늦게 탑승했다가는 트렌드에 밀려 경쟁에서 뒤처지면서 시장에서 낙오되기 십상이다. 이제는 전통과 고집만으로 시장에서 큰소리치던 시대는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랜드로버 역시 예외는 아닌지라, 소비자들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따른 랜드로버의 응답을 기다렸다. 뒤바뀐 트렌드에 대한 랜드로버의 대답이 바로 레인지로버 이보크와 레인지로버 스포츠다. 콤팩트 SUV인 이보크는 판매 18개월 만에 이미 전 세계 판매량이 17만대를 넘기는 기록적인 히트를 기록했다. SUV 천국인 북미 시장은 물론 신흥 국가에서도 크게 성공을 거둔 것이다. 사실 도로 환경이 좋으면 별로 필요가 없는 클래스가 럭셔리 SUV인데, 생활의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자기 과시의 수단이 되기에 인기다. 럭셔리 SUV는 동경과 동시에 편견의 대상이긴 하지만, 그 인기는 여간해서 식을 줄 모른다.
레인지로버 스포츠모델은 지금까지 랜드로버와 큰 인연이 없었던 스포티한 방향성을 모색한 결과물이다. 사실 초대 모델은 레인지로버를 스타일만 스포티하게 다듬었을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레인지로버라는 이름이 붙어 있긴 했지만, 격이 다르게도 디스커버리의 플랫폼을 사용했다. 인테리어도 레인지로버의 퀄리티보다 상당히 떨어졌다. 하지만 레인지로버가 풀 모델 체인지를 하고 레인지로버 스포츠도 새롭게 등장했다. 신형 레인지로버와 동일하게 알루미늄 플랫폼을 사용했고 바디 패널을 비롯해서 부품의 75%를 새롭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존재감이 더욱 커진 새로운 레인지로버 스포츠의 등장을 기꺼이 환영했다.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디자인이다. 최근 SUV는 점점 스포티한 방향으로 스타일이 수렴되는 분위기인데, 레인지로버 스포츠는 랜드로버의 전통, 모던한 분위기 그리고 스포티한 이미지를 잘 조화시켰다. 바디 사이즈는 전장 4,850×전폭 1,985×전고 1,780mm로 형님인 레인지로버보다 150mm 짧고, 전고도 65mm 낮다. 하지만 이전 모델보다는 62mm 길고, 55mm 더 넓고, 10mm 낮아졌다. 특히 178mm 길어진 휠베이스는 레인지로버와 완전히 동일하다. 즉 이번에는 형님과 같은 수준이 돼버렸기에 이미지의 변화가 더 크게 느껴진다.
우선 프론트 그릴의 바가 세 개에서 두 개로 줄어 매우 스포티하게 보인다. 헤드라이트는 살짝 감은 듯 실눈이다. 눈매는 실눈이 되었지만 답답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날카로워 보인다. 두 개의 원에 불이 들어오면 눈매가 주는 느낌은 한층 강해지며 또 달라진다. 리어 라이트를 비롯해 번호판 위치 등 상징적인 부분이 전체적으로 위쪽에 올라가 있는데 덕분에 엉덩이가 탄력 있게 올라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전혀 껑충해 보인다거나 가벼워보이지는 않는다. 밸런스는 다소 올라갔지만 적당한 양감과 그에 어울리는 디자인이 묘하게 자리를 잡아 어색함이 없다. 옆에서 보면 레인지로버는 비교적 수평 기조이지만, 레인지로버 스포츠는 뒤쪽으로 살짝 기울어져서 살짝 눈이 올라간 것처럼 보인다. 직접 보면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인테리어는 기존의 분위기와 많이 바뀌었다. 심플하고 단정한 레이아웃의 계기판은 모던한 분위기도 있고, 사용되는 재료의 소재에서도 무척이나 고급스러움이 느껴진다. 이 정도라면 레인지로버와 동등한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디자인의 기본 테마는 스퀘어다. 부분적으로 둥근 곳들이 있지만 직선과 스퀘어의 느낌이 역시나 남성다운 느낌을 전한다. 레인지로버와 거의 동일한 디자인이지만 4스포크 스티어링 휠 등에서 느껴지는 디테일이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변속레버다. 형님인 레인지로버에는 재규어도 사용하는 세련된 다이얼 스타일을 적용했지만, 레인지로버 스포츠는 전통적인 레버 방식을 채택했다.
이런 부분의 선택은 참으로 마음에 든다. 레인지로버 스포츠 모델이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는 그런 유연한 느낌을 주는 요소다. 오디오는 메리디언이 장착돼 있는데 아직 새 차라 에이징이 부족했거나, 혹은 세팅의 문제였는지는 몰라도 메리디언 특유의 느긋하고 낭랑한 사운드의 잠재성능을 충분히 뽑아낸 것 같지는 않아 좀 아쉬웠다. 확실히 좋아진 것은 뒷좌석이다. 휠베이스가 늘어난 만큼 확실히 넓어져 여유로워졌다. 그렇다고 레인지로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무릎 앞쪽이 다소 여유가 생겨 마음이 넉넉해진다. 어찌 보면 작은 공간이지만 몸이 느끼는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국내에 출시되는 엔진은 디젤과 가솔린 각각 한 종류씩 출시된다. 3.0리터 SDV6 터보 디젤 엔진은 최고출력 292마력 (4,000rpm), 최대토크 61.2kg.m (2,000rpm)를 발휘하며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7.2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1월 초에 출시된 3.0리터 V6 슈퍼차저 가솔린 엔진은 최고출력 340마력 (6,500rpm), 최대토크 45.9 kg.m (3,500~5,000rpm)의 성능을 발휘한다. 시속 100km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역시 7.2초다. 하이브리드 시스템도 올해 추가될 예정이라고 한다. 3.0 리터라는 작지 않은 배기량이지만, 자동차의 사이즈를 생각하면 다운사이징이다.
1,000rpm 후반 영역 과급이 바뀌는 지점에서 다소 토크의 불연속감이 느껴진다. 30~50km/h 영역에서 속도를 미세하게 제어하기 어려운 경향도 있지만, 더 강하게 가속할 때 엔진이 밀어붙이는 느낌은 상당하다. 음질은 가벼운 편이지만, 가속페달을 깊게 밟으면 토크감은 충분하다. 사람마다 과거 어떤 모델을 경험해봤느냐가 영향을 미치긴 하겠지만 이렇게 달려 나가는 느낌에 만족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스포티한 형상의 시트에 앉아 운전해보면 기존에 비해 압도적으로 가볍게 느껴진다. 느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차량의 무게가 420kg 가벼운데, 초대 모델과는 압도적 차이다. 기본적으로 몸집이 크고, 무겁고, 무게중심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몸놀림은 가볍다. 무거움을 느끼지 않게 한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차고는 높지만 두려움은 없다. 실제로 레인지로버 스포츠를 경험해보고 싶어 하는 국산 SUV를 몰고 있는 운전자가 촬영을 돕는다는 핑계로 함께 시승했는데, 그가 운전석에 앉아서 말한 첫 마다가 바로 "우와 높다!"였다. 그리고 짧은 구간을 몰아보고 말한 느낌은 "이렇게 높은데 전혀 불안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신기했다."였다.
그런 느낌은 누가 타 봐도 마찬가지다. 덩치와 높이에 비해 쉽고 가볍게 컨트롤이 가능하다. 운전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 초보 운전자나 여성운전자도 부담스럽지 않게 주행이 가능할 정도다. 물론 그런 사람들은 크기에서 오는 심리적인 부담감을 이겨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역시 이번 레인지로버 스포츠가 가장 어필되는 부분은 주행감이다. 가장 빠른 레인지로버라고 말할 수 있다. 엔진과 바디를 가볍게 만드니 당연히 가속력이 좋아졌다. 그 부분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핸들링 성능이 뛰어나다. 지금까지도 온로드 주행 성능은 높은 수준으로 훌륭하게 유지했는데 이제는 더 진화했다. 실제로 달려 보면 무엇보다 민첩함과 샤프한 핸들링에 감탄하게 된다. 스티어링 휠을 조작하면 이 녀석은 아주 솔직하게 스티어링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전동 파워스티어링의 느낌은 가벼우면서도 조작하기 쉽다.
그래서 매우 짧은 시간에도 바디 사이즈를 의식하게 하지 않는 운전이 가능해진다. 기본적인 사이즈가 있으니 소형차처럼 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중후하면서도 탄력적이다. 이로써 왕년의 레인지로버 같은 느낌은 전혀 없어졌다. 과거의 느낌을 기대하고 시승하는 사람이라면 다소 실망할지도 모르겠지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이런 민첩한 움직임에 더 높은 점수를 줄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것이라 본다. 타면 탈수록 재미있고 더 멀리 가고 싶어진다.
신형 레인지로버가 채용한 알루미늄 서스펜션은 더 디테일하게 튜닝 되었다. 댐퍼와 전자제어 디퍼렌셜을 최적화했고, 토크 벡터링 기능도 있다. 코너링 할 때 바깥쪽 바퀴에 토크를 걸 수 있으니, 돌기가 한결 쉬워졌다. 차량의 움직임을 분석하여 최적으로 제어하는 어댑티브 다이내믹스와 액티브 스태빌라이저로 작동하는 다이내믹 리스폰스 등이 장착되었다. 그래서 코너에서 과격한 시도를 해보거나 극한으로 몰아붙여 봐도 여유 있게 응답한다. 마치 나는 관대하니 더! 더! 해봐도 된다는 식의 여유로운 반응이다. 코너를 비롯한 도로 곳곳에서 여유가 생기니 운전도 즐겁고 높은 시야에서 눈에 들어오는 먼 경치도 새로운 즐거움이 된다. 긴장하면서 운전해야하는 차와는 운전의 즐거움 자체가 달라진다.
오프로드 주파성을 나타내는 휠 아티큘레이션 스펙을 보면 포르쉐 카이엔이나 BMW X5 등의 라이벌을 앞선다. 휠 스트로크와 이탈각 등 근본적인 험로 주파성능은 탁월하며, 험로 주파를 위한 최신 기술도 충실하다. 전자동 지형반응시스템 2(Terrain Response 2)는 레인지로버 브랜드의 이름에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로 탄탄하다. 하천의 수심 정보를 제공하는 혁신적인 기술인 웨이드 감지 (Wade Sensing) 기능은 레인지로버 스포츠에도 탑재된다. 도하 수심한계는 기존보다 150mm 깊은 850mm로 레인지로버의 900mm에 육박하는 기세다. 랜드로버의 오리지널리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완벽한 오프로드라고 부를 수 있는 험로나 차체가 깊숙이 잠기는 하천의 주파까지 시도해보지는 않았지만, 일반 세단으로는 쉽게 엄두내지 못할 코스들을 코웃음 치듯 우습게 지나갔다. 물론 과거 랜드로버 오프로드 익스피리언스 같은 행사에서 익히 보고 듣고 직접 느꼈기 때문에 이런 코스의 통과가 그저 좀 더 보기 좋은 시승사진을 촬영하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승차를 가지고 나와서 차체를 격하게 기울이고 지면에서 두 타이어가 떨어지는 느낌은 분명 색다른 경험이다. 이런 시도를 맘 놓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레인지로버 스포츠인 것이다.
앞좌석보다는 뒷자리에서 딱딱함을 느끼는 경우가 있겠지만, 그 정도라면 레인지로버 스포츠와 레인지 로버와의 성격 차이로 보면 되겠다. 거주 공간은 상당히 넓으며 시원하게 열린 선루프의 개방감 때문에 뒷좌석에서 밖을 바라보는 느낌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그러나 뒷자리의 매력도 좋지만 기본은 드라이버즈 카라고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전통적인 디자인에 적당한 모던함을 입고 등장한 것이 레인지로버 스포츠다. 요즘 자주 보이기 시작하는 오일 코튼을 사용한 바버(Barbour) 브랜드나 장화로 유명한 헌터(Hunter) 브랜드처럼, 레인지로버 스포츠는 기능보다 전통적인 양식과 아웃도어 사용 씬을 잘 매칭 시킨 것 같은 분위기다. 영국 브랜드는 이렇게 항상 일정한 존재감을 유지하고 파워를 발휘한다. 세계 어디서나 영화 007 시리즈가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전 세계가 영국 문화를 사랑하는 것 같기도 하다.
특히 와일드한 남성적인 세계에서 이 공식은 잘 통용되는 것 같다. 이렇게 적당히 현대화되는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영국 문화는 지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형 레인지로버 스포츠도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우리나라에서는 조금 높고, 커서 폭발적으로 팔릴 것 같지는 않지만, 다이내믹한 대형 시장인 북미, 중국, 러시아, 브라질에서 아주 잘 팔린다. 영국 문화에 별로 익숙할 것 같지 않은 중국에서도 이제는 스타일리시 한 이보크뿐 아니라, 고풍스러운 레인지로버도 보이고 레인지로버 스포츠도 많이 보인다. 영국적인 미의식은 신흥국에서도 놀랄 만큼 잘 통하는 것 같다.
유서 깊은 혈통과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내•외장 디자인, 혁신적인 기술, 지나칠 정도의 실용성, 그리고 온오프로드를 가리지 않는 구동력 등 모두를 확실히 갖추었으면서 그 하나하나가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아주 드문 존재가 레인지로버 스포츠다. 이런 복합적인 매력을 가진 차는, 뭐든지 풍족하고 흔해진 이 시대에도 따져보면 그리 흔하지 않다. 무엇인가를 지키면서 또 무언가를 버리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을 레인지로버 스포츠란 결과물을 통해 랜드로버가 우리에게 보여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