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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본간섭기에 대해 써볼 예정이다. 여러분들이 이 부분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알지만, 최대한 일본에 대한 것은 간략하게 쓸 예정이니 참아주면 고맙겠다. 보기 싫다면 어쩔 수 없고.
하지만 가끔 여러분이 일본간섭기에 극단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제국주의가 더 폭력이 아니었던가?
지난 글 마지막, 나는 모두가 공부하며 치를 떠는 '일본간섭기'라고 소개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후의 활동을 보면 꽤 기분이 묘한데, 당연하지만 이 시기는 여러분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제국주의'시대와 맞물린다. 그런데 제국주의와 일본의 간섭은 좀 다른데, 일본이 경제적으로 침탈하는 것에 그치고 조정에 대해서는 그다지 터치하는 부분이 없었다면, 조선의 제국주의는 남의 국가를 깔아뭉개는 수준까지 갔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폭력적인 것일까. 누가 더 남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을까. 물론 일본간섭기의 조선을 보면 화가 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동안 일본간섭기를 보면 화를 내다 제국주의시대만 오면 기쁨에 넘쳤다면 한번쯤 생각을 되돌아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잡설이 길었다. 본론으로 넘어가자.
사실대로 말하자면, 일본간섭기 초기만을 보면 조선에게 나쁜 일은 거의 없었다. 산업화 초기 조선은 모든 것이 부족했으며, 그만큼 모든 것이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점은 서구의 누군가에게 점령당할 여지를 줄여줬다는 사소한 장점도 주었다.
그런 방호는 간섭기 초기 산업화에 있어 장점으로 자리잡았는데, 예를 들면 1880년 11월 28일 조선 조정에서 본격적으로 제 3차 조선철도계획을 실시했다는 점은 당시의 일본 간섭이 그리 큰 동요를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철도계획에 대해 조금만 더 얘기해보자면, 조선에서는 이 3차 조선 철도도 전부 조선토목건설회사가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시기부터 권동열의 독주를 잡기 위한 김동환, 최익현 등의 노력으로 동아시아철도, 조선산악철도 등이 철도건설에 끼어들게 된다. 노하우가 많이 필요한 함경선, 평양선은 조선토목건설회사가 맡았으나, 이외 경인-영동선이나 호남-영남선은 조선산악철도가 맡는 식으로 전개됐으며, 이들은 좀더 싼 가격, 본인들이 가진 인맥등의 강점들로 철도건설 독점체제에 제동을 걸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들의 출신배경과 노동자들의 계급화이다. 권동열이야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철도로 당시 조선 제일의 거부가 된 인물이지만, 다른 두 명은 권동열과 다른 방면으로 당시 사회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최익현은 영남 사족 및 중소지주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우두머리였다. 만약 그가 근대화 이전 사회에 살았다면 그 시대 거유중 한명으로 대성하였을지도 모르나, 그는 한학을 배운 후 센츄리 리그를 졸업했으며, 철도건설의 현장을 눈으로 봐오면서 토목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된다. 유가의 엘리트 출신이라 할 수 있는 그가 조선산악철도를 설립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우고 영남선 확대를 위해 갖은노력을 다했다는 점에서 당시 사람들이 더이상 옛 통치이념에 목매이지 않았으며, 새로운 기회를 찾아 사방을 살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김동환은, 그렇다, 그 '안동 김씨'이다. 1836년 고종반정으로 권력이 날아간 그 가문. 김동환의 이전 경력을 보면 상당히 다채로움을 느낄 수 있는데, 우선 그의 아버지가 제2차 반동주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투옥당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은 꺼려했으나 대신 일본유학을 갔다왔으며, 그 곳에서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일본인 신여성-꽤나 부유한 집안으로 알려져있다.-와 결혼하고 외가의 도움을 받아 철도회사를 차리는 등, 시대의 단절을 상징하는 인물을 꼽을 때 첫손가락에 꼽을법한 인물이다.
이들의 활약은 여러가지 면으로 곱씹어볼만한데, 무엇보다 이전까지 개혁의 주체가 고종을 둘러싼 왕당파, 미국 유학을 다녀온 신지식인들에 집중되어있었다면, 이제 조선 사회운동의 주체가 각계각층까지는 아니어도 여러 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인데 이는 조선 사회의 활력이 점차 퍼져나간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시기 기록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이 '노형-브라더'이다. 노동자들이 서로를 부를 때 연상에게 노형, 연하에게는 브라더라 칭하는 말로, 어원을 보면 알겟지만, 서로를 끈끈한 사이라 자처하는 단어이다. 이 칭호는 대략 1차 철도 건설시절, 임금을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 감옥의 죄수들을 이용했을 때부터 통용되었으나, 3차 건설까지 오면서 전문 임노동자들이 급속히 늘자 기록에 확연히 많이 드러나게 되었다 할 수 있겠다.
이 호칭들은 전에 그가 머슴이거나 농부, 어부, 심지어는 몰락양반이었더라도 가리지 않고 쓰였으며, 이는 그들을 하나로 엮음과 동시에 이후 '대형' 등 더 높은 호칭이 만들어지며 그 안에서 계급이 체계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렇게 하나로 뭉치던 노동자 집단들을 중재하던 자들 중 일부는 점차 '형제'라는 조직을 이루며, 일본 야쿠자 등과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이후 이들을 소탕하기 위한 경찰들의 노력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 조선이 기존에 세웠던 사회제도, 신분제도는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조선의 내부는 끓는 물처럼 부글거렸으며, 그만큼 활력이 넘쳤다.
이런 상황이니 공장도 정부의 주도아래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 시기 슬슬 대량제작을 시작한 시멘트와 유리는 초기 조선의 든든한 산업기반 역할을 해주었다.
점차 노동력이 중요함을 알게된 조선은 1882년 2월 17일 머슴제도를 폐지하였다. 이에따라 먹을 쌀이 없을 때 자신을 머슴으로 팔던 조선의 관습도 사라져갔다...고 말하고 싶지만, 실제로 완전히 사라진 것은 반중국전쟁 때이며, 그 전까지는 농사가 주인 시골 몇군데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언제 사라졌느냐가 아니라 '그들을 거느리는 것이 불법'이 되었다는 점이며, 이는 조선이 신분제가 아닌 돈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자본주의 사회로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1882년, 조선은 노동자가 일할 곳이 필요하면 공장을 만들고, 만들면 수익을 내는 그런 호황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와 맞물린 시민의식의 성장으로, 1883년 3월 12일, 광종은 조선에 그동안 없었던 제도를 도입한다. 선거제도였다.
비록 대지주, 즉 조정이 인정하는 사족만이 선거를 할 수 있었으나, 이는 그동안 조선에 없었던 혁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광종이 선거를 도입한 이유는 크게 봐서 두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그의 정통성 불안이었다. 몇년간은 별 문제없이 정국을 다스려왔으나, 아직 고종의 동생이 살아있었으며, 그가 아직도 왕권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소문이 계속 돌고 있었다. 물론 핏줄이 같다면 왕으로 등극할 수 있으며 그가 고종의 양자로 되어있다지만, 사실상 날치기로 성립된 계승인만큼 언제 그의 삼촌이 이를 부정하고 쿠데타를 일으킬지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다.
또한, 이 시기 그의 지지세력들이 약화된 것도 컸다. 대원군 파벌이 잡을 뻔 했던 대권이 광종의 노련한, 혹은 비정한 정치적 술수로 인해 그의 손에 들어온 이후, 그의 지지세력은 왕당파였다. 고종의 기존세력이라고도 할 수 있었고 가장 많기도 했으나, 문제는 점차 대두하던 지일-지미파였다. 몇년간 지속된 호황과 일본,미국의 성장을 봐온 그들은 굳이 국가주도의 개혁이 아니더라도 근대화를 진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에 따라 왕당파에 불만을 품은 그들은 조정의 지분을 야금야금 먹어들어갔다. 이에 1883년이 되면 왕당파의 세력보다 지일-지미파의 세력이 더 정치권에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해 왕당파는 '자주적 근대화'라는 슬로건으로 동학-서학에 반대된다는 의미보다 동양의 정신도 살리고 양학을 익히겠다는 타협적 방안이다-을 내세웠지만, 그들이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없었다.
이에 광종은 선거권을 사족들에게 풀기로 결심했다. 이는 그의 권력을 제한할테지만, 그만큼 모두에게 안정적인 보위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관료제를 흔들던 시기는 지났다.
제한된 입헌군주제를 택하면서, 그는 절대권력과 정치적 생명을 맞바꿨다.
4월 24일이 지금도 국경일로 지정된 이유이다. 사실 진정으로 국민에게 선거권이 돌아간 것은 나중 일이지만, 그 큰 한 걸음은 무시할 수 없으니.
일본간섭기 초기가 조선에게 좋은 기회였던 이유중 하나는 미국이 아직 '조선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국은 억울한 입장이었는데, 까놓고 말해서 기껏 돈을 벌 구석을 다 만들었더니 옆에 있던 녀석이 홀랑 집어먹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미국의 동아시아에 대한 집착은 꽤나 강하여 이후에도 로비에 대한 기록이 조금씩 남아있는데, 19세기와 20세기를 통틀어 몇년에 한번씩은 미국이 일본을 앞지르지는 못해도 따라잡는 때가 나타났다. 그 순간들은 조선에게 천금같은 기회들이었으나, 그 것을 알기에는 아직 조선이 미성숙했다.
1883년 10월 24일, 첫번째 선거가 끝났다. 여기서 사람들을 경악하게 하는 결과가 나오는데, 하나는 지일-지미파의 예상외의 약세-다른 말로 하면 사회주의,공산주의의 강세-였으며, 다른 하나는 보수-동학파 연립정권이다.
사실상 더이상의 진보를 거부하고 자신의 적이었던 반동적인 사족들과 함께한 동학파는
이후 많은 인심을 잃고 다른 파벌에 인원을 내주었으며,
무정부 자유주의자들이
연달아 반란을 일으키는등 혼란이 가중되었다. 하지만 좋게 보자면 이 시기부터 조선의 사상이 다채로움을 가질 수 있었으며, 이후 지금까지도 우리들을 울리는 사상가들과 운동가들이 저마다의 빛을 보여주는 때가 바로 이 시기이다.
뭐, 아직도 남아있던 성리학자들도 지진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좋은 시절은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청이 의화단 혁명을 이겨내고,
마침내 서양식 제국체제를 받아들이기 시작했기에.
청이 서양식 제국임을 밝히자, 군벌은 그동안의 천명사상에 따라 반발-사실 본인들도 믿지 않았겠지만, 명분으로는 충분했다.-하며 청과 상관없는 사이임을 밝혔으나, 청은 그들을 놔줄 생각이 없었다. 가장 큰 잠재력을 가진 국가가 잠재력을 분출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며 정세는 급격히 변화되기 시작했다.
불행의 전조는 1890년 들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가 보통 아는 대전의 개념이 잡히기도 했던 이 때, 조선의 공장들은 이익을 내지 못하기 시작했다. 아니, 말이 잘못됐군. 이익은 이미 예전부터 나지 않았다. 적자가 날때까지 '세금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일본의 영향권에 있었기에 발생한 문제였다. 일본이 조선에 깊이 관여함에 따라 온갖 특혜를 얻은 것은 알 것이다. 이는 이전 미국이 일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두 시기가 다른 것은 당시 조선이 어떤 시장이었냐는 차이점 때문이었다.
미국이 조선 조정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을 당시, 조선은 농부와 광부가 대다수였으며, 그들이 파는 생산물에 수제작 장인들이 그 손으로 만드는 소수의 상품만이 조선의 공산품이라 칭할만했다. 그렇기에 미국은 원하는만큼 조선에 팔 수 있었으며, 조선도 생산물을 미국에 팔면서 나쁘지 않은 손익계산을 할 수 있었다. 이는 일본간섭기 초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들어설 무렵, 이런 손익계산이 확연히 틀어지게 된다. 아무리 일본이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과 조선의 근대화시기는 거의 차이가 없었기에, 파는 물건이 상당부분 겹쳤다. 그 결과 조선에서 만들어진 상품은 '우선 일본 것을 쓴 후' 사용되었으며, 이때 조선에서 미처 다 쓰지 못하면 '팔지도 못하고 재고만 쌓였기에' 말그대로 적자가 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공장이 증기선 제작공장으로, 근대조선의 증기선 건설량은 세계에서도 알아주었으나-대략 10% 안팎으로 계산된다.- 그 증기선들이 미처 쓰이는 곳이 없었기에 조선 어디에나 고철에 가까운 증기선들이 나돌았으며, 그들이 내는 손해는 다른 공장들이 달려들어도 막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전해진다.
그러나 이를 벗어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의식이 깨고, 더이상 농장, 광산에 많은 인원이 있을 필요가 없어짐에 따라 사람들은 도시로 일거리를 찾으러 왔다. 그들을 조정은 모른체 할 수 없었다.
사태는 막을 수 없었다. 직공 희망자는 늘었고, 적자는 커졌으며, 그럼에도 공장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조선은 점점 수렁에 빠져갔다.
1890년 9월 18일, 그런 조선에게 새로운 활로를 보여준 국가가 바로 우루과이였다.
당시 우루과이는 근대적인 시스템을 갖춘 국가이기는 했으나, 본토에 값어치 있는 물건이 없었다는 점으로 열강들에게 주목을 받지는 못하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자유로웠으나, 그만큼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우루과이가 조선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했다는 것은 조선에게 기회였다. 사람들의 관심을 외부로 돌릴 수 있으리라. 이 돈으로 지금의 상황을 타파할 수 있으리라.
1890년 9월 20일, 조선의 첫 해외원정이자 근대화 후 첫 전쟁이 일어난 배경이었다.
우루과이의 저항은 약했다.
우루과이에서의 전투는, 조선의 군대가 다른 국가에게도 소용이 있다는 확신을 갖춰주는 기념비적인 전투였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자 안좋았던 경제는 더욱 안좋아지며, 조선이 검약연맹에 가입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또한 조선의 첫 범선 함대였던 '제국함대'의 전멸은, 이후 우루과이로 원정간 군인들의 지원과 제국의 해전능력에 대한 과제를 여실히 느끼게 해줬다.
이쯤에서 지적해야 할 것은, 조선이 우루과이에게 선전포고한 이유는 아마 빚을 갚으라는 그런 이유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만약 오직 빚 수금이 목적이었다면, 조선은 2년동안 우루과이를 점령할 필요가 없었다. 우루과이는 빚을 갚겠다는 제안을 수차례 했으며, 조선은 이를 거절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원했을까.
그들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다른 방책이 있었을까.
하지만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지금 시점에 와서는 소용없을 것이다.
1892년, 그들은 빚 회수만 하기로 합의 했으며,
대신 조선 군인들을 우루과이에서 조선으로 호송해주기를 바랐을 뿐이니까.
그들이 우루과이를 상대로 대승한 것은 군사적인 면으로는 의의가 있었다. 이제 그들이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곳이라는 점을 알려주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무엇이 나아졌을까.
국가재정은 나날이 감소하였으며, 동학 파벌의 미지근한 움직임은 무정부자유주의자들을 분노케 했다.
공장은 돌아갈수록 돈을 먹었으나, 이제와서 그들이 공장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또한 빈부격차로 인한 사회갈등은 점점 서로를 불신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조선은 1894년, 제 4차 조선철도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3차때까지의 희망적인 분위기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상태를 만들려고 발악하는 것에 가까웠다.
1894년 중반에 있던 세제개혁도 그런 움직임의 일환으로 봐야할 것이다.
그리고 1896년이 되자, 조선 재정은 마침내 근대화 과정동안 이룬 재정을 송두리째 날리게 되었다.
사람들의 비난은 점차 거세졌으며, 조정에서도 광종에게 주던 신뢰의 빛이 다시금 사라지고 있었다.
광종은 조치를 취해야했다.
그리고, 그 사이 마침내 인민의 힘으로 청을 몰아낸 중국이 열강에 들자, 일본과 중국 사이에 낀 조선에게 더이상의 여유는 없었다.
그렇기에, 아마 그런 시기이기에, 그는 우루과이를 다시 생각하지 않았을까. 총칼로 다른 나라를 누를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게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이 아닐까. 비록 지금의 우리가-파시스트는 제외하자- 보기에는 잘못된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1897년 1월, 광종은 외무성 장관에게 만주에 대해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무엇인지 알아오라고 지시했다.
그의 시도는 곧 세계에 알려져 비난을 받았으나, 그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1898년 1월, 조선은 외만주에 대한 권리를 근거로 만주국에 선전포고 하였다.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제국주의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 것이 아니면 살아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아직 내부를 수습못한 중국이 울며 겨자먹기로 도와주기로 했다. 앞으로의 갈등이 내포된 응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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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400장 찍은 것중 추린건데 그래도 21년밖에 안되는군요. 음... 더 추려야 되나.
문재가 있으면 좋겠네요. ㅇ<-<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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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이럴수가 다시 읽기를 했음에도! ㄷㄷ
청나라 근대화가 이렇게 빨리!
최종보스 일본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둘다 넘사벽이라는것이 ㄷㄷㄷ
일본이 4위라니 ㄷㄷ
사실상 아시아 제패는 ㄷㄷㄷ
용이 완전히 승천하기 전에 원숭이를 소환해야..!
왠지 스포를 하고 싶군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사실 만주는 천년전에 우리 땅이었죠. po레콩키스타wer
결국 살아남기 위해 제국주의시대의 물결에 뛰어드는군요. 이렇게 보면 참 빅토리아라는 게임은 그 시대 상을 잘 표현했는데 말이죠.. 그러니 빅토3를 제발..!
별수 없이 확장하고 확장을 위해 민족을 외치고. 활발한 시대지만 좋은 시대라기엔 힘든것 같습니다..
만주는 역시 먹고봐야하죠
영고만주라는 생각만이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