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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60
창세기 22:1-14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신 내용이다. 흔히 이 본문을 인용하여 우리도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이 되자는 식으로 모범적으로 교훈을 취하는 쉬운 해석을 한다. 그러나 막상 우리 자신을 냉정하게 본다면 그렇게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수준으로 살 수 없음을 발견하며 그것은 금방 좌절로 바뀐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본문의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가정의 자녀들을 불러놓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들을 신학교에 보내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로 만들겠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본문도 아니다.
또한 우리는 이 본문을 가지고 아브라함이 진정으로 순종하는가 아닌가를 하나님께서 알아보시기 위하여 믿음을 시험한 것으로도 생각할 수 없다. 본문을 언뜻 보면 하나님께서 그것 때문에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시는 분이 아니며 또 하나님께서는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약 1:13). 그렇다면 우리는 본문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계시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자신이 하신 일과 또 하실 일이 어떤 것인지를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를 바라셨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언약의 땅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브엘세바”로 나타내심으로 자기 언약을 확고히 하셨다. 하나님은 끝까지 이렇게 아브라함을 언약으로 이끌고 계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22장은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으로 아브라함을 어디까지 이끌고 계신가를 보여주는 그 믿음의 절정을 보여주는 장이다.
성경의 진술이 창세기 23장, 24장, 25장에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죽음, 이삭과 리브가에 대한 내용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세대교체를 보여주는 것을 보면,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생애를 마감하는 대단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더더욱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언약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브라함의 불순종과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한 때에도 인내하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끄신 하나님의 열심을 우리는 먼저 생각하여야 한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1-2절). “그 일 후에”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로는 ‘다바르’이다. 물론 ‘다바르’가 ‘일, 사건’의 뜻이 있긴 하지만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아비멜렉과의 언약은 단순히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언약의 말씀을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시험”(히, ‘나사’)이란 흔히들 ‘유혹’이냐 ‘테스트’냐 하는 것으로 구분해서 설명하려고 하는데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을 ‘증명한다, 입증한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아들을 사랑하는지 대결 구도로 놓고 하나님께서 시험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본문의 문맥과 맞지 않다.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의 수준을 증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신다(출 15:25, 신 8:16).
“독자”의 히브리어 ‘야히드’는 ‘단 하나의, 유일한, 외로운’이라는 뜻인데 ‘유일하고 대체할 수 없는 존재’를 의미한다. 신약에서 ‘모노게네스’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요 1:14)를 지칭한다. 이런 점에서 이삭은 언약의 아들로 유일한 씨(후손)를 보여주기 위해 선택된 자이다. 주어질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언약으로 주어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언약의 성취자이시다.
“번제”에 대한 의미는 후에 제사 제도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전체를 태워서 드리는 ‘화제’임을 알 수 있지만 본문에서는 그런 구체적인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가 앞에서 이미 생각했던 것에서 이해해야 한다. 8:20에 보면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라고 하였다. 히브리어 ‘올라’는 ‘오르막길, 계단, 올라가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삭을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3-4절). “아침”이라는 말씀의 히브리어 ‘보케르’는 밤이 낮으로 바뀌는 시점이나 밤이 끝나는 시각을 가리키는 것으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1:5)라는 말씀을 암시한다. 즉 아브라함은 밤을 거쳐 아침으로 나오게 되었다는 뜻이다.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까지의 거리는 직선 거리로 약 90Km 정도가 되니 삼일이 걸린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성경은 “제삼일에”라고 표현하여 삼일은 죽음에서 벗어나는 의미로 제시한다(42:17, 출 10:22, 19:11 등).
그래서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5절)라고 말씀한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하나님의 언약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실 때 “내 언약”(17:2, 4, 7, 9, 10, 14 등)이라고 분명히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반응하게 되었다. 이삭은 하나님 언약의 아들로 주셨다는 사실을 알았다.
죽이면 살려 주실 것이고 죽이지 않는다면 그 죽음을 다른 의미로 제시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에 아브라함은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라고 복수로 분명히 표현하였다. 아브라함이 알게 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분이었다(롬 4:17, 히 11:17-19). 그것이 아브라함이 이제까지 자신을 이끄신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였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는 아브라함과 이삭과의 대화 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6-7절).
이 말은 이삭의 물음에 대한 단순한 핑계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이 제사가 자신의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제사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제사에 참여하는 입장일 뿐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제사에 제물을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나온 것은 그 어떤 것도 제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갖다 바치기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8절). 오늘날 교회들은 우리가 무엇이든 갖다 바치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것이라고 가르친다. 헌금이라는 제물을 준비하고 예배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대가로 자신에게는 복이 내려질 것으로 여긴다. 결국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의 복을 위해서 자신이 제물을 준비하고 자신이 주도하는 제사가 된다. 하지만 제물은 우리가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제물의 희생으로만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의 구원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셨다.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9-12절).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고 칼을 들어 올렸을 때 이미 시험은 완전히 끝났다. 이 말씀을 통해 볼 때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이삭을 아끼지 않고 번제로 드리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하나님은 언약 안의 것만 받으시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언약만 드러난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13-14절). 하나님께서 마련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에 그대로 응답하셔서 이삭을 죽이지 말라 하시고 숫양을 마련하셨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폈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아브라함은 그 땅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하였다. “이레”의 히브리어 ‘라아’는 ‘주목하다, 준비하다, 느끼다, 이해하다, 보이다, 자신을 나타내다’라는 뜻이다. 즉 ‘여호와께서 나타나신다, 준비하신다’라는 의미다. 여호와의 산에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내신다.
그래서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라고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모리아 산’이라는 곳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드러내심으로 하나님께 올라가야 할 특별한 의미를 가진 곳이다. 그래서 본문에서 반복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3절),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9절)라고 강조하였다. 하나님께서 이 산을 지정하셨다는 것은 이 산을 통해 주실 계시를 염두에 두고 계셨다. 이런 점에서 이 산은 다윗 때에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삼하 24:18)으로 솔로몬의 성전이 서게 되는 예루살렘이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대하 3:1)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게 된 이 장소도 하나님께서 이미 출애굽 때에 정하신 곳이었다(왕상 8:16 / 참고 신 12:5, 11, 14, 18, 21, 26, 14:23, 24, 25, 16:2, 6, 7, 11, 15, 16 등).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아끼지 않고 희생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죄를 위해 희생케 하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과 연결되고 있다. 결국 성전이 세워진다는 것은 그 성전에서 양들이 계속적으로 희생되고 그 양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말씀하신 것으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삭을 제물로 하는 번제는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 드려져야 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런데 이삭 대신 양이 바쳐졌다는 것의 의미는 언약의 성취자는 이삭이 될 수 없고 오히려 대신 죽는 양을 통해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이삭이 언약의 완전한 실체가 되시는 분은 숫양이 희생되듯이 희생으로 오시는 분이며 동시에 부활의 능력까지 함유된 자손을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이삭 자신은 죄인으로 죽어야 할 자라면 양이 대신 죽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 나타나심이 성전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나타내셨고 성령을 보내심으로 진리 안에 거처가 되게 하셨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2023111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