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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물역사관(한민족역사탐방) 원문보기 글쓴이: 별미르
0.해동역사(海東繹史)
.지리고(地理考)
.삼한(三韓)
강역총론(疆域總論)
○ 옛날에는 한수(漢水) 남쪽을 한국(韓國)이라고 일렀고, 또한 진국(辰國)이라고 일렀다. 중간에 세 종족으로 나뉘었는데, 서쪽을 마한(馬韓)이라 하고, 마한의 동쪽을 진한(辰韓)이라 하고, 진한의 남쪽을 변진(弁辰)이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한열전(韓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韓)에는 세 종족이 있다. 첫 번째는 마한이고, 두 번째는 진한이고, 세 번째는 변진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國)이며, 북쪽은 낙랑(樂浪)과 연접하였고 남쪽은 왜(倭)와 연접하였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이며, 북쪽은 예(濊), 맥(貊)과 연접하였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며, 남쪽 역시 왜와 연접하였다. 한은 모두 78국이며, 백제(伯濟)는 그 가운데 하나이다. 큰 나라는 1만여 호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이며, 각각 산과 바다 사이에 자리 잡았다. 사방의 지역을 합하면 4000여 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삼았는바,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다. 그 가운데서 마한이 가장 크므로 여러 한이 함께 그 종족을 진왕(辰王)으로 세웠는데, 목지국(目支國)에 도읍하여 삼한의 땅을 모두 다스렸다. 여러 나라 왕들의 선대(先代)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삼국지(三國志)》 삼한전(三韓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방군의 남쪽은 한수(漢水)를 경계로 삼는다.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우리 동방은 옛날에 스스로 나뉘어서 남북으로 되었는데, 북쪽은 본디 세 조선(朝鮮)의 지역으로, 단군(檀君)이 요(堯) 임금과 나란히 섰으며, 기자(箕子) 및 위만(衛滿)을 거쳐서 사군(四郡)으로 나뉘었다가 2부(府)로 합해져 고주몽(高朱蒙)과 번갈아 가면서 성쇠(盛衰)를 반복하였다. 동진(東晉) 시대 이후로는 고씨(高氏)가 드디어 그 지역을 병합하였는바, 이것이 고구려(高句麗)이다.
남쪽은 바로 삼한(三韓)의 지역이다. 한(漢)나라 초기에 기준(箕準)이 위만에게 축출되어서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와 한(韓) 지역에 이르러 금마군(金馬郡)에 도읍하고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으니, 이것이 마한(馬韓)이다. 진(秦)나라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부역을 피하여 한 지역으로 들어왔는데, 한에서는 동쪽 경계 지역을 떼어서 그들에게 주었으니, 이것이 진한(辰韓)이다. 또 그 남쪽에는 변한(弁韓)이 있어서 진한에 복속하였는데, 각각 우두머리[渠帥]가 있었다. 《한서(漢書)》에 이르기를 “변한은 남쪽에 있고 진한은 동쪽에 있고 마한은 서쪽에 있다.” 하였는바, 삼한 지방을 가리킨 것도 이미 상세하다.
신망(新莽) 1년(9)에 온조(溫祚)가 마한을 멸망시키고 백제(百濟)를 일으켰다. 한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 1년(기원전 57)에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진한의 6부(部) 백성들에 의해 추대되어 신라가 비로소 건국되었다. 변한에 대해서는 전사(前史)에서 비록 전해 온 바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신라 유리왕(儒理王) 18년(41)에 수로왕(首露王)이 가락(駕洛)에 나라를 처음 열고 진한의 남쪽 경계 지역을 차지하였다. 그 뒤에 신라로 편입되었는데, 아마도 이곳이 바로 변한 지역일 것이다. 그렇다면 남쪽은 남쪽대로 북쪽은 북쪽대로 있어서 본디 서로 간에 침범해 들어가지 않았는바, 비록 그 계한(界限)은 어느 곳이었는지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한강(漢江) 일대를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치원(崔致遠)이 비로소 마한을 여(麗)라고 하고 변한을 제(濟)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첫 번째 잘못이다. 권근(權近)은 비록 마한이 백제라는 것을 알기는 하였으나, 역시 고구려가 변한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서 뒤섞어서 말하였는데, 이것이 두 번째 잘못이다. 《한서》에 이르기를, “변진(弁辰)은 진한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왜(倭)와 접경하고 있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변진은 진한과 더불어 뒤섞여 살아 의복과 거처가 같다.” 하면서 변한을 칭하면서는 반드시 변진이라고 하였다. 그런즉 변한이 진한에 대하여 반드시 부용국(附庸國)이었을 것이며, 서로 간에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다. 또 이르기를, “마한은 54국(國)을 통할하고,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국을 통할한다.” 하였는데, 이른바 국(國)이라는 것은 지금의 군현(郡縣)으로, 진한과 변한 두 한을 합하더라도 겨우 24국으로, 마한의 반도 못 된다. 이것으로써 본다면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이 합하여 마한이 되고, 영남(嶺南) 한 도가 나뉘어서 진한과 변한 두 한이 됨을 어찌 의심하겠는가.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예로부터 한수(漢水)의 남쪽을 통틀어서 한국이라고 하였으며, 그곳을 총괄하는 왕을 진왕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역시 진국이라고도 이른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을 마한이라고 한다. 마한의 동쪽 경계에 별도로 거주하는 것을 진한이라고 하는데, 진한 가운데서 또 나뉘어서 변진이 되었다. 대개 삼한의 지계(地界)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변설(辨說)은 잘못된 것을 답습하여 일정한 설이 없이 분분한데, 오직 구암 한백겸이 논한 것만이 명확하여 바뀌지 않았는바, 세상에서는 정론(定論)이라고 여긴다.
○ 마한이 가장 크며 진한과 변한이 모두 마한에 복속하였다.
《진서(晉書)》 진한열전(辰韓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변진 12국은 모두 진한에 예속되었으며, 진한에서는 항상 마한 사람을 왕으로 삼아 대대로 세습하였고, 그 나라 사람이 스스로 왕이 될 수는 없었는바, 흘러 들어온 사람들이었으므로 마한에게 제압당한 것이 분명하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후한서》에 “여러 한이 함께 마한의 종족을 진왕(辰王)으로 세웠는데, 진왕이 삼한의 땅을 모두 다스렸다.” 하였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는 이르기를, “혁거세 38년(기원전 20) -한나라 성제(成帝) 때이다.- 에 호공(瓠公)을 마한에 보내어 조빙(朝聘)하니, 마한의 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하기를, ‘진한과 변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들어서는 직공(職貢)을 보내지 아니하는바, 대국을 섬기는 예가 이와 같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그러니 마한이 당시에 삼한의 패권을 잡고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 그 뒤에 마한의 여러 나라들은 백제에 병탄되었고, 진한과 변한은 신라에 병합되었다.
《통전(通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삼한의 땅은 해도(海島) 가에 있으며, 조선의 동남쪽에 있다. 삼한은 대부분 백제와 신라에 병탄되었으며, 백제는 마한의 옛 땅을 차지하였다.
○ 중국의 서적에서 삼한의 지계(地界)를 말한 것은 동유(東儒)의 잘못된 설을 답습하였는바, 몹시 그르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삼한의 지역은, 지금의 조선의 황해도와 충청도가 본디 옛 마한의 옛 지역이며, 전라도는 본디 변한의 지역이며, 경상도는 본디 진한의 지역이다. 삼한은 얼마 뒤에 백제와 신라에 병탄되었다. -《잠확유서(潛確類書)》 및 《무비지(武備志)》에도 이와 같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최치원(崔致遠)의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에 이르기를, “동해의 바깥쪽에 세 나라가 있는데, 그 이름은 마한, 변한, 진한으로, 마한은 고구려이고, 변한은 백제이고, 진한은 신라입니다.” 하였으며,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이르기를, “경기와 황해도는 옛 조선과 마한의 지역이며, 전라도는 본디 변한의 지역이며, 경상도는 본디 진한의 지역이다.” 하였다. 대개 《여지승람》은 최치원의 잘못된 설을 따른 것이고, 《대청일통지》 등 여러 서책은 또 《여지승람》의 잘못된 설을 따른 것이다.
○ 또 혹자는 요동(遼東)을 삼한의 옛 지역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요사(遼史)》의 설을 견강부회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주(辰州)는 본디 고구려 개모성(蓋牟城)으로, 발해(渤海)에서 개주(蓋州)로 고쳤다가 또 진주로 고쳤는데, 진한(辰韓)으로 인해서 이런 명칭을 붙인 것이다.
《성경통지(盛京通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평현(蓋平縣)은 주(周)나라 때 조선에 속하였으며, 본디 진한의 지역이다. 요(遼)나라에서 이 길을 통하여 진한에 통하였으므로 진주를 설치하였다. ○ 복주(復州)는 주나라 때 조선의 경계이며, 진한의 지역이다. ○ 영해현(寧海縣)은 주나라 때 조선의 경계이며, 진한의 지역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성경통지》에서는 《요사》의 설을 부회하였는바, 그 설이 망녕되다.
《일지록(日知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금 사람들이 요동을 일러 삼한이라고 하는 것은, 《요사》 지리지에 “고주(高州)의 삼한현(三韓縣)은, 진한은 부여(扶餘)가 되고, 변한은 신라가 되고, 마한은 고구려가 되었다. 개태(開泰) 연간에 성종(聖宗)이 고려를 정벌하여 삼국의 유민(遺民)들을 포로로 잡고 현을 설치하였다.”는 글이 있어서이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보면, 삼국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다가 내지(內地)에 현을 두면서 삼한이라는 이름을 취한 것일 뿐인데, 지금 사람들이 이에 요동을 삼한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내지를 가지고 외국(外國)이라고 지목한 것이다. 그렇게 된 까닭을 따져 보면, 명(明)나라 천계(天啓) 초에 요양(遼陽)을 잃은 뒤로 장주(章奏)의 글에서 드디어 요동 사람을 일러 삼한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어서인데, 이는 외국으로 여긴 것이다. 지금 요동 사람들이 이것으로 자칭하는데, 이 역시 스스로 외국으로 여긴 것이다.
○ 혹자는 한(韓)이라는 칭호가 이미 삼대(三代) 시대부터 있었다고 하고, 혹자는 기씨(箕氏) 역시 일찍이 한이라고 칭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모두 분명치 않은 말이다.
《산해경(山海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안(韓雁)은 바다 가운데 도주(都州)의 남쪽에 있다. ○ 학의행(郝懿行)의 전소(箋疏)에 이르기를, “대개 삼한은 옛 나라의 이름이다. 한에는 세 종족이 있다.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나온다.” 하였다.
《상서전(尙書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해동의 여러 이(夷)에는 고구려, 부여(扶餘), 한(馯), 맥(貊)의 족속이 있는데,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이들 모두와 길을 통하였다. ○ 공씨(公氏)의 소(疏)에는 이르기를, “한(馯)은 바로 한(韓)으로, 음이 같으면서 글자 모양이 다른 것이다.” 하였다.
《일지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모시(毛詩)》에 이르기를, “커다란 저 한성(韓城)은, 연의 백성들이 쌓은 것이로다. 왕께서 한나라 제후에게, 퇴와 맥을 다스리게 하시매, 북쪽 나라를 모두 맡았도다.[溥彼韓城 燕師所完 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하였으며,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는 이르기를, “옛날에 주(周)나라 선왕(宣王) 때에도 한후(韓侯)가 있었는데, 그 나라가 연(燕)과 가까웠다. 그 뒤에 위만(衛滿)에게 정벌되어 바닷가로 옮겨 갔다.” 하였다. 한(漢)나라 때에는 주나라와 시기상으로 머지않았으므로 당연히 전수함이 있었을 것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참으로 《산해경》이나 《상서전》 등의 설과 같다면, 한이라는 칭호는 이미 삼대 시대 때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왕부의 설에 근거하여 보면, 《모시》에서 이른 바 한후(韓侯)는 바로 기씨(箕氏)이다. 그렇다면 한이라는 칭호는 기씨에게서 말미암은 것인 듯한데, 기씨가 한이라고 칭한 것은 또 남쪽으로 달아나 금마(金馬)로 오기 이전에 있었던 일인 듯하다. 그러나 《후한서》와 맞지 않고 또 다른 증거가 없으므로 상세히는 알 수가 없다.
마한(馬韓)
○ 마한(馬韓) 54국은 지금의 경기남도(京畿南道) 및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있었으며, 그 지역을 총괄하는 왕을 진왕(辰王)이라고 칭하였고, 지금의 익산군(益山郡)에 도읍하였다.
《삼국지》 삼한전(三韓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원양국(爰襄國), 모수국(牟水國), 상외국(桑外國), 소석색국(小石索國), 대석색국(大石索國), 우휴모탁국(優休牟國), 신분활국(臣濆活國), 백제국(伯濟國)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백제(百濟)이다.-,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일화국(日華國), 고탄자국(古誕者國), 고리국(古離國), 노람국(怒藍國), 월지국(月支國),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 소위건국(素謂乾國), 고원국(古爰國), 막로국(莫盧國), 비리국(卑離國), 점리비국(占離卑國), 신흔국(臣釁國), 지침국(支侵國), 구로국(狗盧國), 비미국(卑彌國),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고포국(古蒲國), 치리국국(致利鞠國), 염로국(冉路國), 아림국(兒林國), 사로국(駟盧國), 내비리국(內卑離國), 감해국(感奚國), 만로국(萬盧國), 벽비리국(辟卑離國), 구사오조국(臼斯烏朝國), 일리국(一離國), 불미국(不彌國), 지반국(支半國), 구소국(狗素國), 첩로국(捷盧國),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신소도국(臣蘇塗國), 고랍국(古臘國), 임소반국(臨素半國), 신운신국(臣雲新國),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일난국(一難國), 구해국(狗奚國), 불운국(不雲國), 불사분야국(不斯濆邪國), 해지국(奚池國), 건마국(乾馬國), 초리국(楚離國) 등 모두 50여 국 총 10여 만 호이며, 진왕이 월지국(月支國)을 다스린다. -삼가 살펴보건대, 본문에는 막로국(莫盧國)이 겹쳐 실려 있으므로 지금 그 가운데 하나를 삭제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월지국은 바로 범엽(范曄)의 《후한서》에서 이른 바 목지국(目支國)이다. 《고려사(高麗史)》 지지(地志)에 이르기를, “금마군(金馬郡)은 본디 마한국이다.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서 남쪽으로 한(韓)의 땅에 이르러서 나라를 열고 마한이라고 하였다.” 하였는데, 금마군은 지금의 익산군(益山郡)이다. 범엽의 《후한서》를 근거로 하여 보면, 마한은 본디 스스로 나라가 있었는데, 기준이 특별히 와서 습격해 탈취한 것이다. 그런즉 금마가 마한의 국도가 된 것은 기준이 오기 전에 있었던 듯한데, 이른바 월지국이 아마도 그것일 것이다. 소석색국은 바로 《후위서(後魏書)》의 백제 왕(百濟王)이 올린 표문(表文)에서 이른 바 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이 바로 그것으로 -소석산조(小石山條)에 나온다.-, 충청도 바닷가에 있는 곳이다.
또 살펴보건대, 범엽의 《후한서》를 보면,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북쪽은 낙랑과 접경하였고, 남쪽은 왜(倭)와 접경하였으며, 서쪽은 바다에 닿아 있다.” 하였으니, 그 지역의 서쪽과 남쪽은 모두 바다임이 분명하다. 북쪽은 낙랑과 한수(漢水)를 경계로 삼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이르기를, “마한의 왕이 온조왕(溫祚王)을 나무라기를, ‘왕이 처음 하수(河水)를 건너 발 디딜 만한 곳이 없었는데, 내가 동북쪽 100리의 땅을 떼어 주었다.’ 하였다.” 하였는데, 하수란 한수로, 온조왕이 도읍한 곳은 지금의 광주(廣州)이다. 한수 남쪽은 분명히 마한의 관할지였다. 그러므로 이를 떼어서 백제에게 준 것으로, 백제가 마한에 소속된 것이다. 그리고 변한과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었으며, 뒤에 신라가 되었는데, 신라는 서쪽으로 지리산(智異山)을 경계로 삼았다. 그런즉 마한의 동쪽 경계도 여기까지이다.
○ 한나라 초기에는 기준이 남쪽으로 옮겨 와서 마한을 멸망시키고 스스로 섰다가 곧바로 대가 끊어져서 멸망하였으며, 토추(土酋)가 다시 서서 진왕(辰王)이 되었다.
《후한서》 한열전(韓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초에 조선 왕 기준이 위만에게 격파당하고는 남은 무리 수천 명을 이끌고 바다로 달아나 마한을 공격하여 격파하고는 스스로 서서 한왕(韓王)이 되었다. 그 뒤에 기준의 후예는 끊어졌으며, 마한 사람들이 다시 서서 진왕이 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마한은 본디 스스로 나라가 있었는바, 기준이 처음으로 세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기준이 마한 왕이 된 것은 자기 한 대에 그쳤지, 일찍이 세대를 전하여 오래가지 않았다.
○ 한나라 무제(武帝) 때 마한의 진왕이 비로소 중국과 통하였다.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나라 효혜(孝惠)와 고후(高后) 때 위만과 약조를 맺어 외신(外臣)이 되게 하였는데, 만이(蠻夷)의 군장(君長)들이 중국 천자에게 알현하러 가는 것을 금지시키지 말게 하고자 하였다. 위만의 손자인 우거(右渠) 때에 이르러서 진번(眞番)과 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려고 하는 것을 중간에서 가로막고서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안사고(顔師古)가 이르기를, “진(辰)은 진한국(辰韓國)을 이른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마한이라고 하지 않고 진국이라고 하였으니, 이때에 마한 사람들이 다시 스스로 서서 진왕이 된 것이 분명하다. 안사고가 그것을 일러 진한(辰韓)이라 한 것은 맞지 않다.
○ 한나라 애제(哀帝) 때 지금의 공주(公州) 북쪽 지역의 마한 땅이 백제에 복속되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 강역조(百濟疆域條) 온조왕(溫祚王) 14년 조에 나온다.
○ 그로부터 10여 년 뒤에 마한이 백제에 의해 멸망되었으나, 마한에 소속되었던 여러 나라들이 다 통일되지는 않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온조왕 26년(8) -왕망(王莽) 거섭(居攝) 3년-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거짓으로 사냥한다고 하고는 몰래 마한을 쳐서 드디어 그 국읍(國邑)을 병합하였는데, 원산(圓山)과 금현(錦峴) 두 성만은 굳게 지키면서 항복하지 않았다. ○ 27년(9)에 두 성이 항복하였으므로 그 성의 백성들을 한산(漢山)의 북쪽으로 옮겼다. 이에 마한이 마침내 멸망하였다.
○ 서진(西晉) 때에도 마한의 여러 나라가 여전히 중국과 통하였는데, 그 뒤에 끝내 백제에 병합되었다.
《진서(晉書)》 장화열전(張華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화(張華)가 안북장군(安北將軍)이 되었다. 이에 산골짜기와 바닷가에 살면서 대대로 중국에 복속되지 않고 있던 마한(馬韓), 신미(新彌) 등 20여 국이 모두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을 바쳤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마한이 이미 온조왕이 살아 있을 적에 망하였다고 하였는데, 서진 시대에도 마한 등 20여 국이 능히 각자 조공을 바쳤다. 그런즉 온조가 멸한 바는 마한을 총괄하던 왕의 나라에 불과하며, 그 나머지 마한에 소속되었던 여러 나라는 미처 통일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후한서》와 《위서(魏書)》에서는 모두 마한은 54국이라고 하였는바, 백제는 그 가운데 한 나라이다. 범엽(范曄)과 진수(陳壽)가 역사서를 찬수할 때에도 백제는 오히려 통일시키지 못하였던 것이다.
진한(辰韓)
○ 진한은 진(秦)나라에서 도망해 온 사람들이 영남 지역에서 따로 살던 곳이다.
《후한서》 한열전(韓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한의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들은 진(秦)나라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로서, 고된 부역을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왔는데, 마한에서 동쪽 경계의 땅을 떼어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였다. 혹은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 한나라 초기에 조선(朝鮮)의 신하와 백성들이 난을 피하여 역시 영남에 이르게 되었으며, 비로소 육부(六部)의 칭호가 있게 되었다.
《위략》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처음에 우거(右渠)가 격파되지 않았을 때 조선의 재상인 역계경(歷谿卿)이 이를 간하였으나, 우거가 그 말을 듣지 않고 동쪽 진국(辰國)으로 갔다. 이때에 백성들 가운데서 우거를 따라가 산 자가 2000여 호였다. 역시 조선(朝鮮), 공번(貢藩)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보다 앞서 조선의 유민(遺民)이 이곳에 와서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여섯 촌(村)을 이루었는데, 첫째는 알천(閼川)의 양산촌(楊山村) -양부(梁部)로 개칭하였다-, 둘째는 돌산(突山)의 고허촌(高墟村) -사량부(沙梁部)로 개칭하였다-, 셋째는 취산(觜山)의 진지촌(珍支村) -본피부(本彼部)로 개칭하였다-, 넷째는 무산(茂山)의 대수촌(大樹村) -점량부(漸梁部)로 개칭하였다-, 다섯째는 금산(金山)의 가리촌(加利村) -한지부(漢祗部)로 개칭하였다-,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의 고야촌(高耶村) -습비부(習比部)로 개칭하였다.- 으로, 이것이 진한의 6부(部)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6부는 바로 위지에서 “진한에 비로소 6국이 있게 되었다.”고 한 것이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6부는 모두 경주(慶州)의 경계 안에 있었다.
○ 육부는 그 뒤에 나누어져서 12국이 되었으며, 진한이라고 통칭하는데, 지금의 경상좌도가 바로 그 지역이다.
《삼국지》 삼한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한은 처음에는 6개의 나라였다가 나뉘어서 12개의 나라로 되었다. 또 여러 개의 작은 별읍(別邑)이 있어서 각자 우두머리[渠帥]가 있었다. 이지국(已祗國), 불사국(不斯國), 늑기국(勒耆國),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 염해국(冉奚國), 군미국(軍彌國), 여담국(如湛國), 호로국(戶路國), 주선국(州鮮國), 마연국(馬延國), 사로국(斯盧國), 우중국(優中國)이 있다. 변한과 진한을 합하여 모두 24국이며, 호구 수는 총 4, 5만 호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위지에 실려 있는 진한과 변한의 나라는 뒤섞여서 실려 있으며, 오직 변진의 여러 나라에 대해서는 변진(弁辰)이라는 두 글자를 더 붙여서 표시하였다. 그러므로 지금은 나누어서 각자 수록하였다.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 사이술(四夷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예(穢)와 접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범엽의 《후한서》에 “진한은 동쪽에 있으며 북쪽으로는 예(穢), 맥(貊)과 접하고, 남쪽으로는 변진과 접하고, 동쪽으로는 바다를 한계로 한다.” 하였는바, 진한은 바로 신라(新羅)이다. 신라 초년에는 북쪽으로는 조령(鳥嶺)을 경계로 삼았는바, 진한의 북쪽 경계는 마땅히 조령까지이다. 그리고 조령 북쪽은 예와 맥이다. 신라의 서쪽과 남쪽은 변진의 경계이다. 대개 지금의 경상좌도가 이곳이다.
○ 한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 1년(기원전 57)에 양산촌(楊山村) 사람인 혁거세(赫居世)가 즉위하여 진한 사로국(斯盧國)의 왕이 되었는데, 이가 실로 진한을 총괄하는 왕이었다. 사로(斯盧)는 신라이다.
《양서(梁書)》 신라열전(新羅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이다. 진한은 처음에 여섯 나라가 있었는데, 점차 나뉘어서 12개의 나라가 되었으며, 신라는 그 가운데 한 나라였다. 위(魏)나라 때에는 신로(新盧)라고 하였고, 송(宋)나라 때에는 신라(新羅), 혹은 사라(斯羅)라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한나라 선제 오봉 1년에 진한의 육부(六部) 사람들이 혁거세를 추대하여 군장(君長)으로 삼고는 사로(斯盧)라고 칭하면서 금성(金城)에서 살았다.” 하였다. 대개 사로니, 사라니, 신라니, 신로니 하는 것은 모두 ‘새로 세운 나라[新國]’임을 말한 것이다. 우리나라 말에 신(新)을 ‘새[斯伊]’라 하고, 국(國)을 ‘나라[羅羅]’라고 한다. 그리고 로(盧)와 라(羅)는 음이 비슷하며, 사(斯)와 신(新)은 뜻이 같다. 지금의 경주(慶州)가 바로 그 지역이다.
또 살펴보건대, 진한의 6부는 바로 진한의 여러 나라이다. 혁거세가 6부 추장(酋長)들에 의해 추대되었으니, 그가 진한을 총괄하는 왕이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변진(弁辰)
○ 변진 12국은 지금의 경상우도 연해 지역이다.
《후한서》 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변진은 진한과 뒤섞여 살았는데, 성곽과 의복은 모두 같았으며, 언어와 풍속은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나라가 왜와 가까웠으므로 문신(文身)을 새긴 자들이 자못 있었다.
《삼국지》 삼한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변진은 12국인데,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 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고성군(固城郡)이다-, 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 변진반로국(弁辰半路國), 변낙노국(弁樂奴國) -삼가 살펴보건대, 진(辰) 자가 빠졌다-, 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고령현(高靈縣)이다-,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김해부(金海府)이다-, 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이 있다. ○ 변진독로국은 왜(倭)와 접경하였으며, 12국에는 역시 왕이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범엽의 《후한서》를 보면, “변진은 진한의 남쪽, 마한의 동쪽에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하였다.” 하였는바, 지금의 경상우도 연해 지역이 이곳이다.
○ 변진 12국은 모두 진한에 복속되었다.
《진서》 진한열전(辰韓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변진 12국은 각자 우두머리[渠帥]가 있으며, 모두 진한에 복속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혁거세 19년(기원전 39) -한나라 원제(元帝) 10년- 에 변한(卞韓)이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하였는바, 변진 12국이 응당 일시에 항복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12국이 여전히 《후한서》, 위지, 《진서》 등의 사서에 실려 있으니, 전한(前漢) 시대에는 신라에게 나라를 들어 바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곳에서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고 한 것은 와서 복속된 것이지, 온 나라를 들어서 바친 것은 아니다.
○ 후한 시대 초기에 김수로(金首露)가 가라국(加羅國)의 왕이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변진구야국으로, 지금의 김해부가 그 지역이다.
《후한서》 왜열전(倭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왜는 한(韓)의 동남쪽 대해(大海) 가운데에 있는데, 낙랑군(樂浪郡)의 변경 지역에서 왜의 서북쪽 경계 지역인 구야한국(狗邪韓國)까지의 거리는 7000여 리이다.
《삼국지》 왜인전(倭人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방군(帶方郡)에서 출발하여 왜에 이르고자 하면 해안을 따라서 물길로 가 한국(韓國)을 거쳐서 남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가면 왜의 북쪽 해안인 구야한국에 도착하는데, 여기까지가 7000여 리이다. 여기에서 다시 바다 하나를 건너 1000여 리를 가면 대마국(對馬國)에 이르고, 다시 남쪽으로 바다 하나를 건너 1000여 리를 가면 일지국(一支國)에 이른다. -《오학편(吾學編)》에 이르기를, “일본에는 100여 국의 부용국(附庸國)이 있는데, 구야한국이 가장 크다.” 하였다.
《남제서(南齊書)》 가라열전(加羅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가라국은 삼한의 종족이다. 건원(建元) 1년(479)에 국왕 하지(荷知)가 사신을 보내와서 공물을 바쳤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 유리왕(儒理王) 18년(41) -한나라 광무제 17년- 에 가락(駕洛)의 장(長) 9인이 수로왕(首露王)을 받들어서 임금으로 삼고는 국호를 가락이라고 칭하였으며, 또 가야(伽倻)라고 칭하였다. 그 뒤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삼국사기》 권44 사다함열전(斯多含列傳)의 자주(自註)에, “가라(加羅)는 일명 가야라고도 한다.” 하였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변한과 마한은 그 남쪽이 모두 왜와 접하였다. 그런즉 변한이 마한 남쪽 경계의 동쪽에 있고, 북쪽은 진한에 접하였는바, 사방의 경계가 바로 가락의 지역과 합치된다. 가락은 바로 가야 가운데 하나이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가야금(伽倻琴)을 변한금(弁韓琴)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그 증거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사기》 권4 진흥왕조에, “가야국의 가실왕(嘉悉王)이 십이현금(十二絃琴)을 만들었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가라(加羅), 가야(伽倻), 가락(駕洛)은 모두 같은 것이다. 그 나라의 도읍은 지금의 김해부(金海府)에 있었다. 위지에서 이른 바 변진구야국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나라 말에 구(狗)를 ‘가이(伽伊)’라고 하는바, 음은 바뀌었으나 뜻은 같은 것이다. 그러니 구야(狗邪)는 가라이다. 그리고 《삼국지》 왜인전을 상고해 보면, 대마국은 지금의 대마도(對馬島)이며, 구야국은 대마도에서 바다 건너편의 서북 해안에 있는데, 서로 간의 거리가 1000여 리이다. 그런즉 그곳이 김해부임을 더욱더 알 수가 있다. 이 당시에 임나(任那), 구야(狗邪) 등의 나라가 모두 왜에 복속되었으므로 왜의 서북쪽 경계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삼한의 종족이기 때문에 반드시 구야한국이라고 한 것이다.
○ 가라의 종족 중에 임나라고 하는 종족이 있는데, 이것 역시 변진의 족속이다.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가라와 임나는 모두 삼한의 지역에 있다. -《송서(宋書)》에 이르기를, “승명(昇明) 연간에 왜왕(倭王)이 스스로 도독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칠국제군사(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라고 칭하였다.” 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숭신(崇神) 65년(기원전 33) -한나라 원제(元帝) 16년- 에 임나국(任那國)에서 조공하였다. 임나국은 축자국(築紫國)에서 2000여 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북으로는 바다가 가로막고 있고, 계림(鷄林)의 서남쪽에 있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숭신 65년에 임나국 사람이 왔다. 임나의 본 이름은 가라이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의부가라국(意富加羅國)의 왕자로, 이름이 도노아아라사(都怒我阿羅斯 츠누카아라시)이다.” 하였다. ○ 수인(垂仁) 2년(기원전 28)에 임라국(任羅國) 사람 도노아아라사 등이 귀국하게 해 주기를 요청하니, 허락하고 또 말하기를, “너희 본국의 이름을 바꾸되, 어간성천황(御間城天皇 미마키)의 이름을 따라서 너희 나라의 이름으로 삼으라.” 하였다. 도노아아라사 등이 귀국하여 그 나라의 이름을 고쳐 미마나국(彌摩那國)이라고 하였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에서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의부가라국이 《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대가락국(大駕洛國)으로 되어 있으며, 시조의 이름은 김수로(金首露)이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임나는 또 임라(任羅)로 표기하기도 한다.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임나는 바로 대가락(大駕洛)이다.” 하였는데, 대가락이란 것은 대가야(大伽倻)이다. 《일본서기》를 보면, 흠명(欽明) 23년(562)에 신라가 임라를 멸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거하면, 이해에 대가야를 멸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가지고 상고해 보면, 임나가 대가야임이 분명하다. 대가야는 가라국 수로왕과 같은 종족으로, 지금의 고령현(高靈縣)이 바로 그 지역이다. 이제 《일본서기》를 상고해 보면, 숭신 때 임나가 일본과 통하였다. 그런즉 임나라는 칭호는 이미 전한(前漢) 시대에 있었던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임나는 바로 가라(加羅)의 우호국이다. 가라는 바로 변진의 속국이다. 이곳에서 임나가 미마나국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하였는데, 미마나는 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의 음이 변한 것인 듯하다.
부(附)
《일본서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공(神功) 49년(249) -위(魏)나라 정시(正始) 10년- 에 황전별(荒田別 아라타와케)을 장군(將軍)으로 삼고 백제 사람인 구저(久氐) 등을 향도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그러고는 인하여 비자발(比自㶱), 남가라(南加羅), 녹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등 7국 사람들을 평정하였다. 그러고는 군사를 돌려 고해진(古奚津)에 이르자, 백제 왕 고초(古肖) 등이 고해진으로 장군을 찾아와서 만났다. 이때 비리(比利), 벽중(辟中), 포미지(布彌支), 반고(半古) 네 고을이 스스로 항복해 왔다. 다음 해 봄에 삼한(三韓)의 궁창(宮倉)을 정하여 임나(任那)의 왕을 궁창수(宮倉首)로 삼은 다음, 비자발, 남가라, 녹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등 7국과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 등 네 고을을 임나에게 붙여서 궁장(宮藏)으로 삼게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비자발(比自㶱) 등 여러 나라는 분명히 가라의 족류(族類)로서 임나와 이웃해 있는 나라들이다. 생각건대 이들은 변진의 족속이므로 이곳에 붙여서 기록하여 참고하는 데 대비하였다.
○ 대개 우리나라 역사서에서 칭한 여섯 가야(伽倻)는 모두 변진의 여러 나라이다.
《문헌비고》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가야(大伽倻)는 지금의 고령현(高靈縣)이고, 소가야(小伽倻)는 지금의 고성현(固城縣)이고, 고령가야(古寧伽倻)는 지금의 함창(咸昌)이고, 아라가야(阿羅伽倻)는 지금의 함안군(咸安郡)이고, 성산가야(星山伽倻)는 지금의 경산(京山)이며 벽진(碧珍) -지금의 성주(星州)이다.- 이라고도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동사(東史)를 보면, “수로왕이 가락국의 왕이 되었는데, 그의 동생 다섯 사람이 각각 다섯 가야의 주인이 되었다.” 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여섯 가야이다.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이 가락국이 되고, 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이 대가야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명확한 증거가 있다. 그리고 위지를 보면, 변진고자국(弁辰古資國)이 있는데, 고자(古資)는 고성(固城)의 옛 이름이다. -동사(東史)에는 고자(古自)로 되어 있다.- 고성은 소가야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여섯 가야가 변진의 여러 나라임은 다시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동사에서 가야는 신라와 뒤섞여 살면서 후한 시대에 시작되어 제(齊)나라와 양(梁)나라 때 없어졌다고 한 것이나, 중국사(中國史)에서 변진은 진한과 뒤섞여 살면서 후한 시대에 일어나 위진(魏晉) 시대에 번성하였다고 한 것은, 피차간에 기록한 바가 연대의 차이가 없고 강역이 모두 합치된다. 신라가 이미 진한이니 가야는 저절로 변진인 것이다.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지》를 보면, 수로왕이 일어난 곳이 변진이라고 하였는데, 이 어찌 탁월한 견해가 아니겠는가.
또 살펴보건대, 일설에 의하면, “변(弁)은 가락(駕洛)이고, 가락은 가야(伽倻)이다. 우리나라의 풍속에 꼭대기 부분이 뾰족한 모자를 통틀어서 변(弁)이라고 하며, 또한 가나(駕那)라고도 한다. 지금도 의금부(義禁府)의 조례(皁隸)들이나 군현(郡縣)의 시노(侍奴)들이 꼭대기 부분이 뾰족한 모자를 쓰면서 그것을 가나(駕那)라고 부르며, 또한 금가나(金駕那)라고도 하는데, 방언(方言)이 흘러 전해 내려온 것이 반드시 그 근원이 있을 것이다. 신라 시대에 가락국이 지금의 김해부에 있었는데, 혹 가라(加羅)라고 칭하기도 하고 혹 가야(伽倻)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바로 변진(弁辰)을 총괄해 다스리는 왕으로, 반드시 모자의 끝 부분이 뾰족한 모양새의 모자를 만들어 썼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라국이라고 호칭하였던 것인데, 중국 사람들이 이를 글자로 표기하면서 변진이라고 한 것이다.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仇亥)가 신라에 투항한 뒤로는 그 나라를 이름하여 금관(金官)이라고 하였는데, 금관(金官)은 금관(金冠)이고, 금관(金冠)은 금가나(金駕那)이다. 그러니 가나가 변진으로 변한 것을 어찌 의심하겠는가.” 하였다. 이 일설은 전 시대의 사람들이 미처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치상 참으로 그럴듯하다. 대개 변진은 바로 가야이며, 가야는 바로 변진이다. 변진과 가야는 결단코 전후로 있었던 별개의 두 나라 호칭이 아니다.
○ 그 사방은, 동쪽으로는 낙동강(洛東江)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가야산(伽倻山)에 이르고, 서쪽은 지리산(智異山)까지이고, 남쪽은 바다에 닿아 있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가야의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는 황산강(黃山江)까지 이르고, 동북쪽으로는 가야산까지 이르고, 서남쪽은 바다에 닿아 있고, 서북쪽은 지리산을 경계로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황산강은 지금의 낙동강 하류 지역으로, 세속에서 삼차수(三叉水)라고 이르는 곳이다. 가야산은 성주(星州)에 있다. 지금 성주와 합천(陜川) 등지로부터 왼쪽으로는 낙동강까지, 오른쪽으로는 지리산까지, 남쪽으로는 김해, 고성 등의 연해 지역까지가 바로 변진의 강역이다.
○ 소량(蕭梁) 때에 이르러서 가라의 여러 나라들이 마침내 신라에 병탄되었다.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가 가라, 임나 등 여러 나라를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일본서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흠명(欽明) 23년(562) -진(陳)나라 문제(文帝) 3년- 에 신라가 임나를 멸망시켰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동사(東史)를 보면, 신라 지증왕(智證王) 6년(505) -양(梁)나라 무제(武帝) 4년- 에 소가야를 취하였고, 법흥왕(法興王) 19년(532) -양나라 무제 31년- 에 금관가야국(金官伽倻國)의 구해왕(仇亥王)이 항복하자, 그 지역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하였고, -수로왕부터 구해왕까지는 19대로, 모두 491년이다.- 진흥왕(眞興王) 23년(562) -진나라 문제 3년- 에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대가야를 탈취하였다. 이상이 신라가 변진을 병탄한 자취이다.
[주D-001]한국(韓國) : 국(國)의 성격과 규모에 대하여 이병도(李丙燾)는 하나의 부족 국가로서 그 영역과 인구가 한군현(漢郡縣)의 일개 현에 불과하다고 파악하였다. 김원룡(金元龍)은 철제(鐵製) 농구(農具)를 사용하는 사회 계층을 기반으로 하는 부족 국가로, 천관우(千寬宇)는 지역 단위로서의 성(城)의 병합을 거치면서 성립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김정배(金貞培)는 인구 10000명 정도의 군장사회(君長社會)로, 백남욱(白南郁)은 국읍(國邑)과 별읍(別邑)을 중심으로 하는 상호 보완적인 생활 공동권을 형성하는 지역 집단(地域集團)으로서 대략 50리 내외의 반경을 가진 지역 범위일 것으로 추산하였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66쪽 주》
[주D-002]진왕(辰王) : 삼한 전체, 특히 마한 제국(諸國)의 맹주로서 아마도 여러 소국(小國)과의 주종(主從) 관계를 통하여 중국 군현과의 접촉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병도는 “진국(辰國)은 진왕(辰王)의 나라란 뜻이고, 진왕은 제부족 사회(諸部族社會)의 맹주국(盟主國)인 목지국(目支國)의 군장(君長)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40쪽》
[주D-003]목지국(目支國) : 고대 삼한 시대 마한에 있던 소국(小國)이다. 아직 국가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부족 사회였으며, 위치는 지금의 직산(稷山)이다. 목지국의 군장은 진왕(辰王)이라 하며, 주위의 모든 소국을 지배하였고, 여러 소국들은 목지국의 진왕을 최고 맹주로 삼았다.
[주D-004]신망(新莽) :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을 말한다.
[주D-005]한안(韓雁) : 명(明)나라 왕숭경(王崇慶)은 지금의 요동 부근에 있던 나라의 이름으로 보았으며, 최남선(崔南善)은 한안이 한(韓), 한(寒) 등의 글자와 마찬가지 글자로, 동이(東夷)의 국가를 표현한 것으로 보았다.
[주D-006]한성(韓城) : 한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섬서성(陝西省) 서안시(西安市) 한성현(韓城縣)이라는 설과 두 번째는 하북성(河北省) 고안현(固安縣) 방성(方城)이라는 설이 있다. 김상기(金庠基)에 의하면 서주(西周) 시대에는 섬서성의 한성에 있다가 동주(東周) 시대에는 하북성 한성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64쪽 주》
[주D-007]溥 : 원문에는 ‘傳’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8]마한은 …… 50여 국 : 마한은 고대 한민족 부족 국가의 하나로, 진한(辰韓), 변한(弁韓)과 함께 삼한(三韓)이라고 한다. 마한 54국의 현재 위치에 대해서는 이병도(李丙燾)의 설과 천관우(千寬宇)의 설이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韓國古代史硏究 262~266쪽》 《천관우, 마한 제국의 위치시론, 동양학 9, 1979》소국명 현재의 지명
이병도 설 천관우 설
원양국 경기 수원 음덕면 일대 경기 파주, 연천 일대?
모수국 경기 수원 일대 경기 양주
상외국 경기 수원 장안, 우강면 일대 경기 파주, 연천?
소석색국 경기 서해의 섬 경기 강화 교동
대석색국 소석색국 부근 경기 강화
우휴모탁국 경기 부천 강원 춘천
신분활국 경기 양성 경기 가평?
백제국 경기 광주 서울 강남
속로불사국 경기 통진 지방 경기 김포 대곶, 월곶
일화국 미상 경기 양평, 지평?
고탄자국 미상 경기 양평, 지평?
고리국 경기 양주 풍양 경기 여주?
노람국 경기 이천군의 음죽면 일대 경기 이천군?
월(목)지국 충남 직산, 성환 평택 등지를 포함한 지역
자리모로국 경기 이천군의 일부(노람국과 인접) 충남 서산 지곡
소위건국 미상 충남 보령군
고원국 미상 충남 당진
막로국 미상 충남 예산, 덕산
비리국 전북 옥구군 회면 일대 충남 예산, 덕산
점리비국 전북 고부군? 충남 홍성군 결성
신흔국 충남 옛 진잠현? 충남 온양군?
지침국 충남 대흥 지방 충남 예산군 대흥
구로국 충남 청양군? 충남 청양군
비미국 옛 비인현(충남 서천의 일부) 충남 서천군 비인
감해비리국 충남 홍성군 충남 공주군
고포국 미상 충남 부여군
치리국국 충남 서산군 지곡면 일대 충남 서천군 한산
염로국 미상 전북 익산군 함열
아림국 충남 서천군? 충남 서천군
사로국 충남 홍성군 장곡면 충남 논산군 은진?
내비리국 미상 충남 대덕군 유성
감해국 전북 함열 전북 익산군
만로국 충남 보령군의 일부인 남포 전북 옥구군
벽비리국 전북 김제 전남 보성군 복내면 일대 전북 김제군
구사오조국 전남 장성군 진원면 일대 전북 김제군 금구
일리국 미상 전북 부안, 태인?
불리국 전남 나주군 전북 부안, 태인?
지반국 미상 전북 부안, 태인?
구소국 위명(僞名)으로 간주 전북 정읍군 고부
첩로국 미상 전북 정읍군
모로비리국 전북 고창군 전북 고창군
신소도국 충남 태안(서산) 전북 고창군 흥덕
막로국 중출(重出)로 간주 전남 영광군
고랍국 전북 남원군 전남 장성군
임소반국 전북 옥구군 전남 광산, 나주?
신운신국 충남 천안군? 전남 광산, 나주?
여래비리국 전북 여산 지방 전남 화순군 능주
초산도비리국 전북 정읍군 전남 진도군 군내면
일난국 미상 전남 영암군
구해국 전남 강진군 전남 해남군 마산
불운국 충남 공주의 서부? 전남 보성군 복내 이복성?
불사분야국 전북 전주군 전남 승주군 낙안
원지국 미상 전남 여수군
건마국 전북 익산군 전남 장흥군
초리국 미상 전남 고흥군 남양
[주D-009]한나라 …… 때 : 효혜(孝惠)는 한나라 혜제(惠帝)를 가리키고, 고후(高后)는 소제공(少帝恭)과 소제홍(少帝弘)을 가리킨다. 이 시대는 고조(高祖)가 죽고 여 태후(呂太后)가 섭정하던 시기이다.
[주D-010]공번(貢藩) : 진번(眞番)의 잘못된 표기이다. 이 부분에 대해 이병도는 공(貢) 자를 진(眞) 자의 오자로 보아 진번으로 해석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93쪽》
[주D-011]진한은 …… 24국이며 : 진한과 변진 24국의 현재 위치에 대하여는 이병도(李丙燾)의 설과 천관우(千寬宇)의 설이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韓國古代史硏究 274~276쪽》 《천관우, 진ㆍ변한 제국의 위치 시론, 백산학보 20, 1976》소국명 현재의 위치
이병도의 설 천관우의 설
이저국 경북 안동군 경북 영주군 풍기(기목)
불사국 경북 창녕군 경북 안동
변진미리미동국 경남 밀양군 경북 예천군 용궁, 상주군 함창 포함
변진접도국 경남 칠원 미상(경북 상주?)
근기국 경북 영일군 경북 청도
난미리미동국 경북 의성군 경남 창녕군 영산
변진고자미동국 경남 고성군 경남 고성
변진고순시국 미상 경남 사천, 삼천포
염해국 경남 울산군 미상(경북 대구?)
변진반로국 경북 성주군 미상(경남 합천?)
변릭노국 경남 하동군 악양면 일대 미상(경남 진주?)
군미국 미상 경북 칠곡군 인동
변군미국 경남 사천군 경북 칠곡군 약목, 성주
변진미오야마국 경북 고령 지방 경북 고령, 성산 포함
여담국 경북 군위군 경북 의성군 탑리, 군위
변진감로국 경북 금릉군 개령 일대 경북 금릉군 개령, 선산 포함
호로국 경북 상주군 함창면 일대 경북 영천
주선국 미상 미상(경북 경산군 자인, 경산?)
마연국 미상 경남 밀양
변진구야국 경남 김해 일대 경남 김해
변진주조마국 경북 금릉군 조마면 일대 경남 함안군 칠원, 마산
변진안야국 경남 함안군 경남 함안
변진독로국 경남 동래군 경남 동래
사로국 경북 경주 경북 경주
우유국 경북 청도군 경북 울진
[주D-012]혁거세(赫居世) : 이병도는, “혁거세는 실상 휘가 아니라 존호(尊號)이니, ‘혁(赫)’은 바로 광명(光明), 명철(明哲), 현명(賢明)이라는 말인 ‘’의 차훈(借訓)이요, ‘거세(居世)’는 왕호(王號) ‘거서간(居西干)’의 ‘거서(居西)’와 같은 음과 뜻인 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1쪽 주》
[주D-013]사로국(斯盧國) : 이병도는, “서나(徐那), 서라(徐羅), 서야(徐耶)는 사로(斯盧), 사라(斯羅), 신라(新羅)와 같은 음을 다르게 표기한 것으로서, 서(徐), 사(斯), 신(新)은 바로 ‘소벌(蘇伐)’의 소(蘇)와 같이 ‘솟[高, 上]’의 사음(寫音)인 것 같다. 나(那), 라(羅), 야(耶), 로(盧)는 ‘나라[國]’의 고어(古語)인즉, 바로 상국(上國)이라는 뜻이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1쪽 주》
[주D-014]금성(金城) : 이병도는, “금성은 금성탕지(金城湯池)에서 그 뜻을 취해온 것이 아니라 ‘검성(儉城)’, 즉 ‘임금의 성’이라는 뜻인 듯하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3쪽 주》
[주D-015]고령현(高靈縣) : 원문에는 ‘馬靈縣’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6]숭신(崇神) 65년 : 《일본서기》에 응신기(應神紀) 이전에 나오는 연대는 백제 측의 사료(史料)와 맞추어 볼 때 2주갑(周甲), 즉 120년을 올려 기년(紀年)을 세웠는바, 대개 120년을 내려서 보면 맞는다. 본서에서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연대를 그대로 표기하였다.
[주D-017]임나국(任那國) : 고대 변진(弁辰) 지방에 자리 잡고 있던 나라 이름으로, 금관가야(金官加耶)를 가리키기도 하고, 또는 가야연맹체를 총괄하여 지칭하기도 한다. 임나라는 명칭이 가장 먼저 나오는 곳은 우리나라의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으로, 여기서는 ‘임나가라(任那加羅)’라고 하였는데, 이 구절의 내용으로 보아 임나가라는 금관가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일본서기》에서는 여러 가야를 총칭해 임나라고 하였다. 후대의 학자 가운데에는 이곳에 나오는 ‘임나가 축자(築紫), 즉 오늘날의 복강현(福岡縣) 지방으로부터 2000여 리가 떨어져 있으며, 북으로는 험한 물이 가로막고 있고, 그리하여 계림 즉 오늘날의 경주(慶州)의 서남방에 있다.’라고 한 구절을 근거로 그 위치를 대마도(對馬島)로 비정하는 학자도 있다.《文定昌, 韓國古代史, 柏文堂, 1970》
[주D-018]의부가라국(意富加羅國) : 의부(意富)는 일어(日語)로 ‘대(大)’의 뜻으로, 대가라(大加羅), 즉 금관가야(金官伽倻)를 가리킨다.《古代韓日交流文化硏究, 한국정신문화원, 1990, 208쪽》
[주D-019]미마나국(彌摩那國) : 임나국(任那國)으로, 나라의 명칭이 어간성천황의 이름을 따라서 정해졌다고 하는 내용인데, 이는 허구로, 오히려 임나란 국호에서 어성간이란 이름이 정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古代韓日交流文化硏究, 한국정신문화원, 1990, 209쪽》
[주D-020]비자발(比自㶱) …… 가라(加羅) : 이들 7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국내에 비정(比定)하는 설과 대마도(對馬島), 일기도(一岐島), 구주(九州) 지방의 섬에 비정하는 설이 있는데, 각 학자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국명 \ 학자 말송보화(末松保和) 금서룡(今西龍) 김성호(金聖昊) 이병선(李炳銑)
비자발 창녕(昌寧) 창녕 창녕 비전승(比田勝)
남가라 김해(金海) 김해 김해 당주(唐洲)
탁국 경산(慶山) 대구(大邱) 창원(昌原) 하도(下島)
안라 함안(咸安) 함안 함안
다라 합천(陜川) 진주(晉州) 사천(泗川)
탁순 대구 창원 남해(南海)
가라 고령(高靈) 고령 광양(光陽)
탁순(卓淳)은 원문에는 ‘탁부(卓浮)’로 되어 있는데, 《일본서기》 권9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1]고해진(古奚津) : 주정개장(酒井改藏)은 섬진강(蟾津江)이 바다로 들어가는 하동군(河東郡)의 고포(高浦)로, 이병선(李炳銑)은 제주도의 어느 나루로 비정하였다.
[주D-022]비리(比利) …… 반고(半古) : 비리는 전주(全州), 벽중(辟中)은 김제(金堤)나 임실(任實), 포미지(布彌支)는 공주(公州)나 순창(淳昌), 반고는 나주(羅州)나 구례(求禮)로 비정한다. 포미지는 원문에 포미우(布彌友)로 되어 있는데, 《일본서기》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3]비자발(比自㶱) : 원문에는 ‘比自’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0.번역출처 : 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