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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름: 지리산 1915m
위 치: 전남 전북 경남
일 시:2013년 8월 9~11일
날 씨: 흐림
출발시간 :8월 9일 4시 구례역 출발
접근방법:구례역에서 성삼재 택시로 이동
접근소요시간:구례역에서 약30분
산행코스:성삼재~반야봉~연하천대피소~벽소령~영신봉~세석~장터목대피소~천왕봉~중산리
소요시간:2박3일
동 행:김재삼 이방원 이준열 이기원 이준선 오금례 박덕희 이계선 이상8인
개요
높이 1,915m, 동서길이 50㎞, 남북길이 32㎞, 둘레 약 320㎞. 방장산(方丈山)·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며, 지리산(智異山)이라고도 한다.
남한에서 2번째로 높은 산이다. 행정구역상 전라남도 구례군, 전라북도 남원군, 경상남도 산청군·함양군·하동군 등 3개도 5개군에 걸쳐 있다.
1967년 12월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공원 총면적은 440.485㎢로 설악산국립공원의 1.2배, 한라산국립공원의 3배, 속리산국립공원의
1.5배, 가야산국립공원의 7.5배로 규모가 가장 크다.
방장산은 봉래산(蓬萊山:금강산)·영주산(瀛洲山:한라산)과 함께 신선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이 있어, 이들 3산을 삼신산(三神山)·
삼선산(三仙山)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묘향산을 더하여 4대신산, 다시 구월산을 더하면,5대신산 또는 5악이라 하여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지리산은 또한 정감록 신앙에 연유된십승지(十勝地)의 하나로, 대한제국 말기에는 농민운동에 실패한 동학교도들이 피난하여
살았으며, 이들 일부가 신흥종교를 개창하여 오늘날 각종 민족종교의 집산지를 이루고 있다. 특히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의 도인촌은 갱정유도(更正儒道)의 신자들로 구성되어 지금도
댕기머리와 상투에 바지 저고리를 입으며, 전통문화관습을 유지하고 있다. 1948년에는
여순반란사건으로 패주한 좌익세력의 일부가 이곳에 들어왔으며, 1950년 6·25전쟁 때는
북한군의 패잔병 일부가 노고단과 반야봉 일대를 거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최고봉인 천왕봉(天王峰:1,915m)을 주봉으로 반야봉(盤若峰:1,732m)·노고단(老姑壇:1,507m)이 대표적인 3대고봉이다. 주능선은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하봉(下峰:1,781m)·중봉(中峰:1,875m)·제석봉(1,806m)·촛대봉(1,704m)·칠선봉(七仙峰:1,576m)·형제봉(兄弟峰:1,433m)·명선봉(明善峰:1,586m)·토끼봉(1,534m) 등이 있고, 주능선과 거의 수직을 이루면서 남북방향으로 가지능선인 종석대(鐘石臺:1,356m)·고리봉(1,248m)·만복대(萬福臺:1,433m) 등이 연봉을 이루고 있다.1,500m 이상의 큰 봉우리가 10여 개, 1,000m가 넘는 봉우리가 20여 개, 그밖에 85개 정도의 대·소봉이 있는 한국 최대의 산악군이다. 또한 천왕봉과 덕평봉(德坪峰: 1,522m) 사이에는 10여 대의 헬리콥터가 앉을 수 있는넓은 세석평전(細石平田)이 있으며, 고산준봉이 많아 계곡 또한 20여 개나 된다. 그 가운데에서 피아골·뱀사골·칠선계곡·한신계곡 등이 지리산의 4대계곡이다. 피아골은 활엽수의 원시림이 광활하게 덮여 있으며, 칠선계곡은 험악하기로 유명하다. 그밖에 청학동과 불일폭포로 유명한 화개골짜기, 맑은 물과 작설차로 알려진 천은사골짜기 등이 있다. 기반암은 대부분 고생대의 화강편마암·화강암 등으로 이루어진 편마암복합체로 여러 종류의 변성암으로 구성되었다. 그 연대는 대체로 7~12억 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동 부근의 고령토 광산은 대부분 이런 편마암 중에 다량 함유된 장석(長石)이 풍화작용을 받아 생긴 것이다. 또한 오랜 세월 풍화와 침식작용으로 깊은 협곡과 둥근 산정을 이루며, 여러 차례의 융기로 고위·중위·저위 등의 3단계 평탄면이 나타난다. 평탄면은 높이 1,000~1,100m에서는 산간분지와 더불어 나타나고, 600m 높이에서는각 사면을 따라 분포하며, 200m 정도에서는 선상지와 복합된 형태로 나타난다.낙동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으로 동쪽과 북쪽 사면에서는 덕천강·주천·남천 등이 발원하여 낙동강 상류로 흘러들며, 서쪽과 남쪽 사면에서는 화개천·서시천 등이 발원하여 섬진강으로 흘러든다. 기후는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산세가 높아 대륙성 기후가 나타난다. 연평균기온은 12~14℃ 내외이며, 한여름인 7월 중순에는 산록지방이 약 36~37℃ 내외인 반면, 산정은 19~20℃ 내외로 기온차가 고도에 따라 15~20℃ 정도 나타난다. 산지 곳곳에 산곡풍 등 국지풍이 탁월하다. 특히 산의 남동쪽은 저기압의 통과가 빈번하여 여름철 고온다습한 바람이 남동사면에 부딪칠 때 비가 많이 내리는 지형성 강우지역이다. 겨울에는 산지의 북서쪽에 한랭건조한 북서계절풍이 불어 기온이 더욱 낮아지는 반면, 남동쪽은 산지에 의해 계절풍이 막히고 남해를 흐르는 동한난류의 영향을 받아 겨울에도 비교적 온난하다. 연평균강수량은 1,200~1,600㎜이며, 6~8월에 강수의 50~60%가 집중적으로 내린다. 겨울에는 강설량이 많다. 지형이 복잡하고 구름과 안개가 많아 일조시간이 짧다. 첫서리는 보통 10월 하순경에 내리는데, 높이 600~700m에서는 10월 1일경에 내려 평지보다 13일 정도 빠르고, 1,500m의 높이에서는 6월초까지도 얼음을 볼 수 있다.삼림은 온대남부형에 속하나 고산지대에는 한대식물이, 산록지대에는 온대식물이 무성하다(→ 한국의 식물). 낙엽수의 경우 높이 500~600m 이하에는 졸참나무·떡갈나무, 500~1,000m에는 굴참나무, 900~1,400m에는 신갈나무, 1,350~1,860m에는 자작나무가 숲을 이룬다. 식생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여 목본식물이 245종, 초본식물이 579종으로 총 800여 종이 분포한다. 그 가운데 약용 174종, 식용 285종이 포함되어 있다. 8·15해방 후의 남벌과 도벌 및 6·25전쟁으로 삼림에 큰 피해를 입었으나, 비교적 원시상태의 자연림이 그대로 남아 있어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소나무를 비롯하여 자작나무과에 속하는 서어나무가 많고 그밖에 졸참나무·굴참나무·신갈나무·가문비나무·분비나무·물푸레나무·고채목·참나무 등이대표적인 목본식물이다. 천왕봉 근처에는 사스래나무·털진달래·철쭉·부게꽃나무 등이 가문비나무와 분비나무 사이에 섞여 있고, 그밖에 붉은병꽃나무·물앵두나무·좀고채목 등이 군생한다. 대표적인 초본식물로는 김의털·개쑥부장이·꽃며느리밥풀·남분취·네귀쓴풀·다북고추나물·두메사초·도라지꽃·산구절초·산오이풀·산괭이사초·참시호 등이 자란다. 특히 금강산에서만 자라는 것으로 알려졌던 여우꼬리풀이 천왕봉에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곳 자작나무 줄기에서 나오는 수액(樹液)은 위장병에 좋은 약수로 알려져 늦봄 곡우(穀雨) 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일대에서 자라고 있는 약초는 국내 수요를 충당하고도 생산량의 반 이상을 일본·홍콩 등지로 수출한다. 산수유를 비롯하여 오미자·익모초·작약·천궁·도라지·구절초·능소화·화살나무·천남성·연령초·지황·만병초·석장포·자금우·개비자·탱자·현삼·구기자 등이 많다. 약초 외에도 식용식물로 고비나물·고사리·왕머루·보리수·잣·다래·상수리나무·고광나무·산딸기 등과 차풀·생강나무 등의 차(茶) 대용품도 있다. 일대에 서식하는 동물은 학술조사 결과에 의하면 포유류 41종, 조류 165종, 곤충류 215종으로 총 400여 종에 이른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사향노루·수달을 비롯해 멧돼지·오소리·살쾡이·족제비·고슴도치 등이 서식한다(→ 한국의 동물). 조류로는 물까마귀·딱새지빠귀·딱다구리·백로·황새·독수리·도요새·두루미·꿩·꾀꼬리·파랑새·여새·박새 등이 있다.지리산은 불교문화의 요람지로서 곳곳에 국보급·보물급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구례군 마산면 화엄사계곡 입구에 있는 화엄사는 544년(신라 진흥왕 5) 연기(緣起)에 의해 창건되었으며,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불탄 것을 인조 때 벽암(碧巖)이 재건한 것이다. 입구에는 수령 300년, 밑둘레 5m가 넘는 화엄사의 올벚나무(천연기념물 제38호)가 있고, 경내에는 화엄사각황전(華嚴寺覺皇殿:국보 제67호)을 비롯해 화엄사각황전앞석등(국보 제12호)·화엄사4사자3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국보 제35호)·화엄사동5층석탑(보물 제132호)·화엄사서5층석탑(보물 제133호)·화엄사대웅전(보물 제299호) 등이 있다.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피아골 입구에 있는 연곡사(鷰谷寺)는 화엄사와 같은 해에 연기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중건했으나, 6·25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었고 현재는일부만 중건되어 남아 있다. 경내에는 고려 초기의 석조예술을 대표하는연곡사동부도(鷰谷寺東浮屠:국보 제53호)·연곡사북부도(鷰谷寺北浮屠:국보 제54호)·연곡사서부도(鷰谷寺西浮屠:보물 제154호)·연곡사현각선사탑비(鷰谷寺玄覺禪師塔碑:보물 제152호)·연곡사3층석탑(鷰谷寺三層石塔:보물 제151호) 등이 있다. 또한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에 있는 천은사(泉隱寺)는 828년(신라 흥덕왕 3) 덕운(德雲)이 창건했고, 경내에 극락보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0호)·나옹화상원불(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9호) 등이 있다.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의 쌍계사(雙磎寺)는 723년(신라 성덕왕 22) 진감국사 삼법이 창건했고,경내에 최치원의 친필 비문으로 된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국보 제47호)와 쌍계사부도(雙磎寺浮屠:보물 제380호)·쌍계사대웅전(雙磎寺大雄殿:보물 제500호) 등이 있다. 그밖에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의 실상사(實相寺)를 비롯해 영원사·벽송사 등 사찰과 유물·유적이 많다.계곡마다 많은 폭포와 소(沼)·담(潭)들이 산재해 있고, 암괴석 사이를 흘러내리는 계곡의 경관들은 지리10경(智異十景)을 이룬다. 지리10경은 노고단의 구름바다, 피아골 단풍, 반야봉의 해지는 경관, 세석 철쭉, 불일폭포, 벽소령의 밝은 달, 연하봉 선경(仙景), 천왕봉 일출, 섬진강 청류(淸流), 칠선계곡이다. 제1경인 노고단은 구례 화엄사에서 올라가며, 10㎞의 산길은 중간 정도에서 가파르기 시작하여 정상부에서는 경사가 60~70°나 된다. 산저에는 광활한 초원대지가 펼쳐져 있고, 여기에 흐르는 물은 몹시 차가워 입 안에 넣으면 얼음을 먹는 듯하다. 특히 구름과 안개가 파도처럼 밀려올 때 발 아래 펼쳐진 대지는 산허리를 휘감은 구름바다로 변하여 산 정상부에 서 있는 이로 하여금 구름 위의 하늘에 올라와 있는 환상에 빠져들게 한다. 제2경인 피아골은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에 있는 골짜기로, 밭을 일구어 농산물로 피를 많이 가꾸었다는 피밭골'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직전계곡(稷田溪谷)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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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산행은 실로 오랫만에 지리산 을 종주하게 되었다.. 여름 휴가를 이용하여 기획한 산행이다..상록초등학교 총 동문들과 함께하려 생각하였는데, 재경당진 한마음산악회 여성 회원님들 께서 동참하실뜻을 보임에,연합산행을 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참석인원이 정해지고, 준비하는과정에 이방원 후배님이 전화를 하여 대피소를 예약하지 않으면 낭패를 당할거라고, 얼마전 다녀온 직원분이 말하더란다..설마하는 마음으로 인터넷 조회를 해보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전에는 그나마 대피소 주위에서 난잠을 자든 야영을 할수가 있었는데, 이를 제지한다는것이다.. 막무가내로 쫓아내려보낸다는것이다.. 이무슨 해괴 한일인가.. 산행에 지친이들을 보호는 못해줄망정 쫓아내려보낸다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작금의 행태를 어찌 받아들여야 한단말인가...물론 작금의 일부 산악인들행태가 문제인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사람들은 단속을 하면되는것이지,어째서 선량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가하는지 모르겠다.. 지리산 종주라고 하면,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작은 로망인데,그것도 특히나 여름 휴가철이 아니면 몇일씩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 이시기에 맟추어 계획을 하는것이 보통인데,이런 황당한 일을 다보겠나.. 충분한 의견수렴과 준비 홍보를 거치고,인원을 수용할 장소도 확장을 한다음 실행을 하여도, 말썽이 많을텐데. 그저 탁상행정으로,관리공단측의 편의만 생각하여 실행하는 졸속행정을 개탄하지 않을수가없다..도대체가 누구를 위한 관리공단인가.이나라에서 나이먹고 돈없는 사람들이 즐길수있는 곳이 얼마나 되는가..산 마저 마음대로 못간다면,정말 기막힌 나라다..이참에 몰지각한 산꾼들에게 몇마디 해야겠다..이모든것이 당신들 때문에 발생한 일이니 책임지고 산에 오지마시라.. 산행인구 일천만 시대에 너도나도 할것없이 마구잡이로 뜯고, 캐고, 따고, 잡고 하면 무엇이 남겠는가? 일부 변명하는사람들을 보면 뜯어야 잘 퍼지고 늘어난다는데, 그말이 진실인가..씨가 달릴새도 없이 뜯어가버리고, 짐승들이 먹을것도없게 주워가버리고,산에 의지해 살아가는이들이 캘것도없이 캐가버리고,씨를 말리고 있으니 , 요즈음 멧돼지가 민가로 내려오는데,이는 먹을것이 없어서 내려오는것이다..짐승들이 무얼먹고살겠나..싹쓸이 해가버리는데,정말 한심한일이다..몸에 좋다고 씨를 말려도 되는가...제발 산에 가려면 이런행동 하지마시길 바란다.. 다음 세대는 산삼이 무언지 산양이 무언지 곰취가무언지 드릅이무언지 모르고 살아도 되는가..제발 자중합시다...그만해야지..... 암튼 사전 미팅에서 각자준비 해야할 부분을 분담하고 ,최선을 다해 대피소 예약을 해보기로 한다, 계선씨가 열차 예약을 마쳤단다.. 15일 전만 되기를 기다려 도전 해보았으나 모두가 헛탕을 치고, 다행스럽게 도 계선씨와준열 회장이 예약이 되었단다.. 다음날은 좀더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는데,준선씨 아드님과 기원씨가 행운을 잡았다.. 1인 4명씩이니 도합8명으로 간신히 예약을 마쳤다..산행보다 더 어려운 관문을 통과 했다..그런데 웬지 뒤가 개운치를 않다..예약못한 이들을 생각하니 그리 즐겁지가 않다.. 돈 많고 시간많고 여유로운 이들이야 별것 아니겠지만, 우리 서민들로서는 애써 계획한 것이 한순간 물거품이 되버렸을테니 이얼마나 애석한일인가... 관리공단측도 다시한번 생각해주길 바란다.. 외국에서 그렇게 한다고 덩달아 하지말고,우리 현실에 맞게 행동해주길 바란다..에이 그만하자...
내가 가장 최근에 지리산 종주를 한것이 1980년 여름인것같다.. 그때는 화엄사에서 출발하여 중산리로 하산하는것이 종주산행이었다.. 보통 2박3일 이고,3박4일 하는경우도 흔한일이었다..안내 산악회도 비슷한 형대였다..당시는 교통편도 그다지 좋치가않아,야간열차로 구례역에 도착하여,아침이되길 기다려 버스시간에 맟추어 화엄사에서 하차하여 ,산행을 시작하면,임걸령 또는 화개재나 뱀사골 대피소에서 막영을 하는것이 대부분이었다..반야봉을 들르지 않으면 연하천에서 막영을 하는경우도 있었다..다음날 세석에서 야영을 하고, 중산리로 내려가면, 진주에서 열차를 타는 것이 보통이었다..화대종주는 그리 흔치않았다..화대종주시 치밭목이 가끔이용되었다..대원사로 들어와 치밭목에서 1박하는 경우 세석에서 2박을 하게 되는것이다..벽소령에는 대피소가 없던시절이다..3박4일 하는경우는 벽소령에서 야영을 하는경우가 많았다.. 당시 벽소령에는 딸기밭이 많았는데, 이 딸기밭에 새들이 날아들면 새들을 노리는 뱀들이 많아 어느 해였던가 함양사는 후배와 야영을 하며 뺌을 잡아 탕을 끓여먹던 기억도 아련하다..
기다리던 8월 8일이 되었다..아침부터 설레이는 마음으로 출근을 한다.. 퇴근시간에 서울에 연락을 하니, 모든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는 중이란다.. 서울에서 10시 40분에 출발하는 여수행 열차다.. 천안에는 11시 50분에 도착할것이란다..11시에 집을 나선다..택시를 타고 천안역에 도착하니,11시15분이다..안내하시는분과 한동안 산행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풀랫홈으로 내려간다.. 5호칸 38~39번석이다..반갑게 상봉인사 를 나눈다. 늦은 시간이라 잠을 자는 분들이 많아 조용조용 얘기를 한다.. 잠시후 잠을 청해보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를 않는다.. 이것도 나이탓일것이다.. 젊은시절에는 아무리 시끄러운 곳에서도 자겠다고 맘먹으면 장소 불문하고 잘잦는데, 이즈음은 좀처럼 쉽지가않다..뒤척이다보니 어느새 구례역에 도착했다.. 역사 밖으로 나오니, 온통 택시 호객하는이들로 법석이다..택시 2대에 나눠타고 성삼재로 출발한다..1인당 만원씩이란다.. 버스도 성삼재까지 5천원이란다..무서운 속도로 달린다.. 날마다 하는 당사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처음 타는 우리는 불안하다..화엄사 입구를 지난다 싶더니 어느새 천은사 입구를 지난다.. 상선암 입구를 보려고 이리저리 살피는데,확이하기 쉽지가않다.. 오랫만이라 그렇겠지만, 거기가 거기 같다.. 어이하다보니 시암재를 지난다.. 잠시후 성삼재에 도착하니 벌써 수많은 택시들이 다녀가고,버스도몇대와있고,한켠에선 식사를 하느라 정신이없다.. 우리는 주차장을 지나 화장실옆 데크에서 간단하게 라면에 햇반을 겯드려 이른 아침을 먹는다.. 성삼재에서 종주를 하는것은 처음이다.. 성삼재에서 피아골행이나,왕시리,반야,반선길은 여러번 했지만, 종주 출발지로는 이번이 처음이다..식사마치고,짐챙겨 출발이다.. 지금시간 4:40분이다..해드랜턴 불빛에 의지하며 산행을 시작한다..잠시후 구조번호 지남24-01이라 적힌 팻말앞을 지난다. 내카메가가 노후하여 후랫쉬가 터지지를 않아, 그냥 지나며 지피에스 로 위치 확인만 하고, 지나친다,,지금시간 4:58분이다..조금더 진행하니 두번째 구조목을 지난다.. 지남24-02번이다.. 지금시간5:05분이다..
▲ 성삼재~중산리 종주궤적(지도를 크릭하면 큰지도로 볼수있음)
▲첫째날 진행궤적(지도를 크릭하면 큰지도로 볼수있음)
▲ 둘째날 진행궤적(지도를 크릭하면 큰지도로 볼수있음)
▲ 세째날 진행궤적(지도를 크릭하면 큰지도로 볼수있음)
◇성삼재 姓三峙
성삼재 지명유래는 삼한시대에 진한군에 밀리던 마한왕이 피난할 때, 이능선은 가장 중요한 곳이므로 성이 다른 3명의 장군을 배치 방어케 하였으므로 성삼재라 부르게 되었다
성삼재_마한의 한 부족국가의 성 밭이 세 명이 지키던 수비 성터 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삼한시대에 마한군에 밀리던 진한 왕이 전란을 피하여 지리산 심산유곡으로 찾아 들어 달궁 계곡에 왕궁을 세우고 피난 할 때 북쪽능선에 8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으므로 팔랑재(八郞재)서쪽 능선은 정 장군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으므로 정령재 동쪽은 황장군으로 맡아 지키게 하였으므로
되었단다.
**사진을 크릭하면 원본으로 볼수있음**
▲ 탐방로별 입산통제및시간표
*무넹기의유래
1929년 구례군 마산면 소재에 마산지란 큰 저수지를 준공하였으나,유수량이적어 만수를 하지못하여 가뭄에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한다.. 마을 주민들은 이듬해인 1930년 해발 1300m고지 노고단에서 전북으로 내려가는 물줄기의 일부를, 전남 구례 화엄사 계곡으로 내려올수있도록 유도수로를 개설하여 저수량을 확보하여 지금까지 매년 풍년을 이루고 있다고한다..하여 물줄기를 돌려 넘겼다 하여 무넹기라 칭한다..
*종석대(鐘石臺)
성삼재 뒤쪽의 바위봉우리이다. 백두대간상에 있으며 노고단에서 보면 종 모양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바위에 부딪치는 바람소리가 돌종을 울리는 소리와 같다 해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으며 혹자는 관음대라고도 한다.
우번암을 찾아가는 길은 정상에서 성삼재 방향으로 2~3분 나아가면 조그만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 남쪽방향으로 길이 있다. 그 길로 조금 내려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우번암의 붉은색 지붕이 보인다. 그곳에서 좌측길로 내려서면 된다. 우번대사가 득도했다는 곳이다.
우번대(牛飜臺) : 종석대 서쪽 아래에는 지리산 10대 기도처의 하나인 우번대(牛飜臺)가 있는데, 이 곳에 우번암이 위치해 있다. 우번암을 쉽게 찾아가는 길은 성삼재 부근의 코재에서 종석대 방향으로 올라가다가 남쪽 방향으로 가면 파란색 지붕이 보이는 곳이다. 861번 도로의 상선교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거나 상선암에서 속세로 떠나듯 어렴풋한 숲길을 따라 종석대 방향으로 가도 된다.
*우번암과 종석대의 전설
차일봉남쪽 천은사 계곡상류 깊은곳에 상선암이란 이름난 선원이 있었다. 신라의 고승 우번도사가 젊은시절 상선암을 찾아 10년 수도를 결심하고 혼자 수도정진하기를 9년째 되던어느날, 절세미인 한사람이 암자에나타나 요염한자태로 우번을유혹하였다. 여인에게 홀린우번은 수도승이란 자신의위치를 망각하고, 여인의 뒤를따라나섰다. 그 여인은 온갖 기화요초가만발한 아름다운 수림속을지나쳐 자꾸만 높은곳으로 올라갔다. 우번은 여인을놓칠까봐 산속을 정신없이 올라가다보니 어느덧 차일봉 정상에까지 오르게됐다.그런데 우번을 유혹하던여인은 간데없고 난데없이 관음보살이나타나 우번을바라보고 있는것이아닌가. 깜짝놀란 우번이 정신을가다듬고 생각해보니 이는필시 관음보살이 자기를 시험한것이라 깨닫고, 그 자리에 엎드려 자기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참회하니 관음보살은 간데없고 대신 큰 바위만 우뚝서있었다. 자신의 수도가 크게 부족함을깨달은 우번은 그 바위밑에 토굴을파고 토굴속에서수도하여 후일 도승이 되었다한다. 우번도사가 도통한 그 토굴자리를 우번대라 부르게됐으며, 우번도사가 도통한 그 순간에 신비롭고 아름다운 석종소리가 들려왔다하여 그 곳을 종석대라 부르고, 관음보살이 현신하여 서있던 자리를 관음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포장길을 조금더오르니 우측으로 화엄사가는 갈림길이다..이정표에 화엄사5.9km라고 적혀있다..이곳에서 우측 무넹기 방면으로 가면,코재 종석대 를 거쳐 우번대 우번암 상선암으로 진행을 하여 천은사나, 차일봉쪽으로 진행할수있고,화엄사 계곡으로 내려서면,집선대,국수등,참샘터,연기암 화엄사로 내려갈수있다..무넹기에서 대간능선을따라 진행을 하면 kbs 중계소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문수대로 이어지는 길이 있고, 전에는 화엄사에서 올라오면 노고단을 거쳐 돼지령으로 직접내려섰던때가 있었다..이곳에서 노고단재까지 임도를 따라가려면 3.2km를 가야한단다.. 참고 "코재"란 이름을 가지게된것은,코가 땅에 닿을 만큼 경사가 심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지름길인 계단길로 진행하기로하고 조금더 진행을하여 나무계단을 오르며 숲길을 걷는다..잠시후 또다시 이정표를 만난다..노고단재1km성삼재1.6km지점이다..지금시간 5:19분이다..돌이깔린 산길을 좀 걷다보니 다시 임도가나타나고, 이정표가 서있다..노고단 대피소의 불빛도 보인다..노고단0.7km 성삼재1.9km지점이다..어둠이 서서히 걷히고있는 여명의 시간이다..이제 해드랜턴이 필요없을 정도로 어둠도 사라진 상태다..잠시후 대피소 앞을 지난다.. 준열 회장과 기원씨가 식수를 받으러 대피소 음수대로 가고, 우리는 노고단 고개에서 일출을 보려고, 쉬지않고 계속 진행을 한다..50년대까지만 해도, 노고단 대피소 부근에 "선도샘"이라는 샘터가 있었다고 한다..지금시간5:27분이다..노고단고개까지 0.6km남았다..약간 가파른 오름길을 빠른걸음으로 오른다..노고단고개에 도착하여보니, 안개가 자욱하여 반야봉조차 보이질 않는다.. 꿈을 접고 뒤따라 올라온 일행들의 돌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몇컷한다..그동안 물뜨러 갔던 준열회장과 기원씨도 도착했다..한동안 시간을 보내며,노고단까지 가느니 마느니 하다가 걍 진행하기로 한다..천왕봉 까지 22.5km,반야봉까지5.5km다..잠시후 작은대판골 능선초입을 지난다..계곡은 안개로 인해 분간키 어렵다..노고단 고개에서 500m 진행한 지점에 이정표가서있다..피아골 삼거리2.5km.반야봉5km라고 적혀있다..지금시간 6:12분이다.. 노고단 고개에서 꽤 오랜시간을 지체했다..조금더 진행하니 쉼터다..이곳에서 능선따라 내려서면,방아골이다..현재시간6:21분이다..잠을 제대로 자지못해,컨디션이 최악일것이라 생각했는데,그런대로 나쁘지않다..잠시후 지남01-02라고 적힌 구조목과 이정표가서있는 지점을 통과한다.. 피아골 삼거리1.8km,노고단고개1km 지점이다..지금시간6:25분이다..
문수대(文殊臺) : 불교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은 반야경을 편찬하신 분으로 지혜의 완성을 뜻하는 화신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혜를 구할 수있는 자리라함은 예사롭지 않을 수 없다. 문수대는 길상봉(노고단) 남사면 가까이 있는데, 노고단에서 KBS 중계소 앞을 지나, 피아골로 가는 등산로를 30분쯤 가면 나타난다. 6,25이후, 폐허가 된 칠불사터에, 천막을 치고 수행하던 평전스님(전 수도암 주지)가, 묘향대에서 지내다, 문수대를 복원하여 거쳐하던 곳이다. 1950년대 후반에 지리산악회에서 개척한 등반로인 이곳은, 중산리에서 천왕봉 코스와 함께, 지리산에서 가장 많은 등산인 이 찾던 길이었으나, 지금은 등산로가 폐쇄되어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적막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노고단 정상부근에 있는 군사시설에서 우측 철조망을 따라 피아골 방향으로 나아가면 나오는 삼거리에서 좌측 바로 위에 단아하고 정갈한 건물로 서있다. 직진하는 길은 왕시루봉과 돼지평전 가는 길이다. 노고단KBS : 정문에서 우측 울타리를 쳐다보면 문수대 스님이 출입하는 출입문이 보임..
▲ 노고단 고개에 위치한 이정표
▲ 노고단 고개의 돌탑에서
▲ 돌탑앞에서 노고단을 향하여
▲ 노고단 고개에서 종석대를 향하여
"차일봉 종석대의 유래"
차일봉은 지리산의 3대 주봉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노고단의 자매봉으로서 그 서쪽에 우뚝 솟아있다. 마치 차일을 펼쳐 놓은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 부르게 된 이름이며, 더욱 전망이 좋아 경관이 웅장하고 아름답기로 이름난 봉우리다. 또, 차일봉은 우번대, 관음대, 종석대 등 여러 이름을 갖고 있으니, 그 유래와 전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려한 차일봉의 남쪽아래 계곡 즉 수석이 아름다운 천은사 계곡의 상류 깊은 산중의 비경엔, 오랜 옛날부터 상선암이란 이름난 선원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옛날 신라의 도승 우번조사께서는 젊은 시절에 조용한 상선암을 찾아 이곳에서 10년 동안 좌선수도하기로 결심하고, 혼자서 열심히 불도를 닦은 지 어언간 9년째 나는 따뜻한 어느 봄날. 하루는 선녀처럼 아름다운 절세미인이 암자 창문 앞에 홀연히 나타나, 요염한 자태로 우번에게 추파를 던지며, 자기를 따라 오라고 정답게 손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유혹에 마음이 홀린 우번은, 황홀감에 도취되어 수도승이란 자기 자신의 위치를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허둥지둥 그 여인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런데 그 미모의 여인은 보일 듯, 말 듯 앞서가며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산새들이 즐겁게 노래하는 아름다운 수림 속을, 나는 듯 가볍게 지나쳐 산봉을 향해 높은 곳으로 올라만 간다. 우번도 놓칠세라 그 여인의 발자취를 따라 숲속을 헤치며 정신없이 올라가다 보니, 어느덧 차일봉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손짓하며 앞서가든 그 여인은 갑자기 간 곳 없고, 난데없이 관세음보살이 눈앞에 나타나서 앞을 가로막고 위엄스레 서 있지 않은가? 우번이 감짝놀라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하여 보니, 이것은 필시 관세음보살이 자기의 도심을 시험하기 위하여 미녀로 변신한 것이라는것을, 비로소 깨닫고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려 자기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참회하다, 다시 살펴보니 관세음보살은 간 곳이 없고 그 자리에 큰 바위만 우뚝 서 있었다. 자신의 수도가 부족함을 크게 깨달은 우번은 이로부터 더욱 발분하여 수도하기로 결심하고 ,즉시 그 바위 밑에 토굴을 파고 토굴속에서 다시 열심히 수도정진하기 수년 뒤에, 크게 도를 닦아 드디어 도통 성불하여 이름난 도승이 되셨다 한다. 그래서 우번조사가 도통한 그 토굴지리를 우번대라 부르게 되었으며 또, 우번조사께서 도통하는 순간에 신비롭고 아름다운 석종소리가 홀연히 들렸다 하여, 이곳을 종석대라 부르며 그리고, 관세음보살께서 현신하여 서 있던 자리를 관음대라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그 후에도 이곳에서 수도하여 도통한 고승이 많이 나왔으며, 특히 근세의 고명한 진응도사를 비롯하여 용화스님, 호은선사등 많은 도승을 배출하였음으로 이곳은 불도의 영지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수도하여 도통성불하게 될 때는 누구나 그 신비롭고 은은한 석종소리가 들려왔다는 전설 때문에 지금도 도통성불의 꿈을 안은 도사의 후예들이 이곳을 찾아 종석대, 관음천 샘터에 세워진 조용한 암자 불당에서 춘풍추우에 귀를 기울이며 수도하는 승도들의 발자취가 끊이지 않는다.
▲ 노고단을 배경으로 ▲ 노고단의 지명유래 노고단이라는 지명은 할미당에서 유래한 것으로 ‘할미’는 도교(道敎)의 국모신(國母神)인 서술성모(西述聖母) 또는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일컫는다. 통일 신라 시대까지 지리산의 최고봉 천왕봉 기슭에 ‘할미’에게 산제를 드렸던 할미당이 있었는데, 고려 시대에 이곳으로 옮겨져 지명이 한자어인 노고단으로 된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현재의 노고단 위치에서 서쪽으로 2㎞ 지점에 있는 종석대(鍾石臺, 1,361m) 기슭으로 할미당을 옮겨 산제를 드렸다한다.참고로 선배 산악인들은,이전에는 노고단을 길상봉이라 칭했었다..
이전의 종주길을 생각해보니 격세지감이 든다..이것은 마치 신작로라 해도 무방할듯하다.. 길을 잃을 염려는 없을듯하다..잠시후 노고단 등로와 합류하는 지점에 도착했다.. 전에는 이길이 더 확실했던것 같은데,지금은 희미하게 흔적만 알아볼수있다..조금더 진행을 하니 ,문수대 왕시리봉 들머리인데, 무성한 잡풀로, 길을 분간키 어렵다..이곳부터 햇살이 비치기 시작한다.. 위치만 확인하고 ,계속진행을 하여,첫번째 헬기장에 도착했다..지금시간6:30분이다..뒤돌아서서 노고단쪽을 바라보니, 모습이 뚜렷이보인다.. 사진몇장 찍어본다..모두가 잠을 못자 얼굴은 부시시해도, 기분들은 모두 좋은것같다..3분여후 공터를 지난다..곧이어 지남01-03이라 적힌 구조목과 이정표가 서있는 지점을 통과한다..반야봉4km,피아골삼거리1.3km,노고단고개1.5km 지점이다..현재시간6:35분이다..약간 오름길을 진행하여 돼지평전 헬기장에 도착했다..이곳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면 서산대 피아골산장으로 가는 길인데, 무성한 잡풀로 인해, 등로를 분간키 어려울 정도다,, 게다가 등로 없음이란 안내판이 떡하니 버티고 섰다,, 등로 있음이란 표시와 무에 다를게 있나..현재시간6:44분이다..아침먹은것이 이제야 소화가 된듯하다.. 1분여를 더진행하니, 우측으로 능선따라 문수대, 피아골 대피소로 내려서는 길이 보인다..이곳은 비교적 등로 를 확인하기가 수월하다..선명하진 않아도 질매재 질등 문바우등 느진목재 왕시리로 이어지는 능선이 쫘악 시야에 들어온다.. 우측으로 불부장등이 떡하니 버티고 섰다..전망바위에서 사진몇장찍고 진행을 이어간다..전나무 숲에 서있는 이정표를 지난다..피아골삼거리0.8km,노고단고개2km라고 적혀있다..지금시간6:50분이다..1분여를 진행하여 돼지령 이정표가서있는 지점에 도착했다..피아골 삼거리0.7km,노고단고개2.1km 지점이다..반야봉은 3.4km남았다.. 위치확인하고 진행을 이어간다..약간의 오름길을 조금진행하니 긴장등능선 갈림길에 당도했다.. 대판이봉 이다..이곳에서 좌측 능선길로 내려서면 한숨약수를 거쳐 대소골로 내려서게 된다..긴장등 능선 나들목이다..풀이 우거져 등로 확인이 어렵다..헬기장이 훨씬 나을듯싶다..대판이봉은 우측으로 진행을 하여야한다.. 우리는 좌측길로 진행을 한다..잠시후 헬기장에 도착했다..지금시간 6:55분이다..이곳에서도 진입로 확인이 쉽지가않다.. 위치 확인하고 내림길로 진행을 한다..우측으로 피아골 갈림길이다.이곳에서 등로는 좌측으로 진행하도록 되있는데, 전에는 우측 길로 다녔던것같다..허나 우측등로는 페쇄된것같다..우측으로 내려서는길은 확실하게 보인다..지금시간7:05분이다..우리는 좌측길로 진행을 한다..피아골삼거리 300m전방의 이정표를 지난다..지금시간 7:07분이다..반야봉3km,노고단고개2.5km라 적혀있고,위치표지목에 지남01-05지점이라 적혀있다..작은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진행을 하니 갈림길이 나타났다.아무생각없이 우측으로 진행하려는데, 기원씨가 좌측으로 진행을 해야한단다.. 아뿔사 우측으로 가면 피아골골 내려서는 길이다..고개들어 자세히보니, 이곳이 피아골 삼거리다..우측으로 내려서면 해탈교를 지나 용수암골과합류하여 피아골 대피소로 가는 길이었다.. 길이 너무 좋아 방심했던것이다..방심은 금물이다..지금시간7:15분이다.. 좌측으로 진행하려는데, 이정표가 보인다..이정표를 잘 보이는곳에 설치를 해야지 어째서 이곳에 설치했는지 모르겠다.. 쉽사리 눈에 들어오질 않는곳이다..천왕봉22.7km,노고단고개2.8km,피아골대피소2km,직전마을6km라고 적혀있다.. 나이탓도 있는듯하다..모든 기능이 예전만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특히나 집중력과인지능력이 많이 떨어진것같다..지남 01-06지점을 지난다..피아골 삼거리에서 200m 진행한지점이다..반야봉이 2.5km남았으니,삼도봉도 2.5km남은것이다..평이한길을 200여m 진행하니 임걸령이다..넓직한 공터에 돌을 깔아놓았다.. 샘터로 향한다..잘 정비해 놓았다..한켠에 이통 안테나도 서있다..대소골로내려서는 길이기도 하다..이곳에서 물을 마시고,사진한컷하고, 공터로 돌아와 한동안 휴식을 취하는데, 씩씩한 아줌마 일행이 도착했다.. 전의에서 온 팀 이란다..샘터에 다녀오자마자 곧바로 출발들을 한다. ..지금시간7:25분이다..임걸년이란 산적이 진을 치고 근거지로 삼을 만한 곳이 분명하다.. 반야봉과 노고단 불무장봉이 설한풍을 막아주는 아늑한 지역인데다, 청정수마저 갖추고 있으니, 천혜의 요새로 손색이 없었겠다.. ▲돼지령직전 전망바위에서
서산대(瑞山臺) : 피아골산장 뒤편 지능선상에 있다. 산장 뒤 비탈길을 1시간가량 올라가면 너덜겅 지대 같은 바위길이 있는 지점에서 좌측으로 비스듬히 5분여 나아가면 바위절벽이 있는 서산대가 나온다. 주능선상에서는 돼지평전 첫 번째 헬기장에서 내려가는 길이 있으나 인적이 희미하여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며 내려서야 한다. 돼지령 헬기장에서 출입금지 표지판을 따라 계속하산 (약 40분~1시간)이면 다다른다...서산대사는 지리산 덕평봉 남록에 위치한 원통암에서 입산출가 하였는데 이 서산대는 대사가 수도한 곳이 아닌가 생각한다. 원통암은 오랜세월 폐사(廢寺)되어 있던 곳을, 칠불사를 중창하신 통광(通光)스님께서 터를 다시 닦았고, 약 15년 전 쯤 스님의 맏 상좌인 동림스님이 도량을 복원하여, 수행도량이 되었다. [서산대사께서 입적하기 직전 읊은 解脫詩] 근심 걱정 없는 사람 누군고.출세하기 싫은 사람 누군고.시기 질투 없는 사람 누군고.흉허물 없는 사람 어디 있겠소. 가난하다 서러워 말고,장애를 가졌다 기죽지 말고,못 배웠다 주눅들지 마소.세상살이 다 거기서 거기외다.가진 것 많다 유세 떨지 말고,건강하다 큰소리 치지 말고,명예 얻었다 목에 힘주지 마소.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더이다.잠시 잠간 다니러 온 이 세상,있고 없음을 편 가르지 말고,잘나고 못남을 평가하지 말고,얼기설기 어우러져 살다나 가세..다 바람같은 거라오, 뭘 그렇게 고민하오.만남의 기쁨이건, 이별의 슬픔이건,다 한 순간이오.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산들바람이고, 외로움이 아무리 지독해도 눈보라일 뿐이오.폭풍이 아무리 세도 지난 뒤엔 고요하듯,아무리 지극한 사연도 지난 뒤엔 쓸쓸한 바람만 맴돈다오.다 바람이라오..버릴 것은 버려야지.내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하리요.줄게 있으면 줘야지. 가지고 있으면 뭐하겠소.내 것도 아닌데..삶도 내 것이라고 하지 마소.잠시 머물다 가는 것일 뿐인데. 묶어 둔다고 그냥 있겠오.흐르는 세월 붙잡는다고 아니 가겠소.그저 부질없는 욕심일 뿐..삶에 억눌려 허리 한번 못피고,인생 계급장 이마에 붙이고, 뭐 그리 잘났다고,남의 것 탐내시요.훤한 대낮이 있으면, 까만 밤하늘도 있지 않소.낮과 밤이 바뀐다고 뭐 다른게 있소.살다보면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있다만은,
*돼지령 노고단 능선 안부에 진달래와 철쭉산행지로 유명한 돼지령은 멧돼지가 원추리 뿌리를 종종 파 먹던 곳에서 유래되었다하는데, 무언가 좀 황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 임걸령~돼지평전 부근에 돼지를 제물로 던져넣고 기우제를 지내던 못(沼)이 있었고, 그 못 이름을 돝소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금의 돼지평전, 돼지령, 대판 등도 그와 연관된 지명이 아닌가 한다. 해서 대소골은 돝소골에서 유래한 말이 아닌가 하는 추정이 가능한데, 사전을 보니 돝은 돼지의 고어다.
▲ 임걸령
임걸령 (林傑嶺) 옛날 지리산 기슭 마천면 삼정리 하정부락에는 인걸이라는 사내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냥을 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사냥 길목에서는 하루에 꼭 3차례씩 무지개가 섰다가 꺼지곤 하였는데 자세히 보니 무지개 아래 소(沼)에서 어여쁜 3선녀가 정성껏 밥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옥황상제의 시녀들이 날마다 내려와 밥을 짓는데 그러던 어느날 더위를 못 참았는지 선녀들이 소에서 멱을 감게 되었다. 이때 인걸은 선녀들의 날개 옷만 입으면 자기도 옥황상제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날개 옷을 훔쳐 오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날개 옷이 돌부리에 걸려 찢어져 버렸다. 옷 찢기는 소리에 깜짝 놀란 선녀들은 놀란 나머지 각자 자기의 옷을 찾아 입었는데 아미(阿美)라는 선녀만은 옷이 없어 인걸이 갖다 준 어머니의 옷을 입고 결국 하늘나라에 오르지 못하고 인걸의 집으로 와서 몇 날을 지냈다. 하늘나라에서는 아미 선녀를 인걸과 같이 살도록 허락하고 비단옷과 쌀이 나오는 바위를 하사해 주었다. (이 쌀 바위는 작전도로 공사 때 묻혀 버렸다고 한다) 인걸과 아미는 그로부터 1남 2녀를 낳아 하늘아래 첫 동네에서 정자(지금 하정부락 앞 솔밭 근처에 있는 선유정이 그것이라고 한다)를 짓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인걸이 장난삼아 옛날 찢어진 아미의 날개 옷을 기워서 입혔는 데 그만 아미가 하늘나라로 날아가 버렸다. *조선선조때의 산적 임걸년(林傑年)은 지금의 시천에서 태어난 인물로 그의활동무대는 반야봉일대였다고 한다. 그는 화계장터에서 넘어오는 보부상을 털거나 인근 사찰을 털었는데 '연려실기술'이전하는말에 의하면 한참 강성했을때의 임걸년은 지리산의 모든사찰을 털었다고 한다. 이고개는 그가 활동한장소라해서 임걸령(林傑嶺)이란 이름이 붙었는데,숲이 울창해서 고갯마루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高嶺임에도 불구하고 우뚝 솟은 반야봉이 북풍을 막아주고 노고단 능선이 동남풍을 막아주니 녹림 속에서 천혜의 요지이며 샘터에서는 언제나 차가운 물이 솟고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
이제부터 서서히 고도를 높이게 된다.좀 가파른 오름길이다..반야봉이2km,노고단고개3.5km라고 적힌 이정표앞을 지난다..지금시간7:45분이다..노루목 삼거리 까지는 1km가 남은셈이다.오름길인데 잘들 걷고있다..우리의 계획은 반야봉을 경유하여,중봉 을 거쳐 묘향암까지 갔다가,소금장수 무덤쪽으로 나오는 길로 진행할 예정이다..한동안 걷다보니 이정표가 나타났다..지남01-08지점이다..반야봉1.5km전방이다..지금시간7:57분이다..500m진행하는데 12분 걸렸다..전망바위에 도착하니 8시정각이다..그런데 구름이 점점 몰려온다..반야봉에서는 시야좀 트였으면 좋을텐데,쉽지가 안을 모양이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위치번호 지남01-09지역을 지난다..잠시후 폭포수골(대소골) 갈림길이다..좌측으로 내려서면 폭포수골로 가는 길이다. 이제 노루목삼거리도 얼마안남았다..잠시후 이정표가 보인다.노루목 삼거리다..전망바위에 올라 불무장등 능선을 향해 사진 몇장찍고, 용수암골을 굽어본다..왕시리 능선이 어렴풋이 보인다..아쉽다.날씨가 조금만 좋아도,광양의 백운산까지 멋드러진 광경이 펼쳐질텐데, 허나 내복이 이것밖에 안되니 하는수 없다.. 뒤이어 속속 도착이다.. 전의 아지매 팀도 도착했다.. 반야봉을 다녀가자는 이와 그냥가자는 이들간에 설왕성레 하기에, 오늘 숙박지가 어디냐고 물으니, 연하천대피소란다..반야봉을 들리지 않고, 이대로 그냥 진행을 한다면, 한낮에 도착할텐데,무얼그리 서두르느냐며, 다녀들가시는것이 어떻겠냐고 권하니, 전에 다녀갔다며, 그냥들 가자고 고집하는 사람이 있어 쉽지가않으것같다.. 조금만 올라가면, 삼거리가있으니,가기싫은분은 그곳에서 기다리고, 다녀올 사람들만 다녀오면 어떻겠냐고 절충안을 제시하니, 그렇게 하는것도 괜찮겠다며, 모두들 반야봉으로 향한다..집사람과 건너편 전망바위로 자리를 옮겨 삼도봉쪽을 바라보니, 구름으로 인해 잘 보이질 않는다.. 아쉬운 마음으로 반야봉을 향해 출발이다..8:09에 도착하였는데.이곳에서 20여분을 지체한것같다.. 좀 가파른 오름길을 힘겹게 오르니,삼거리다..전에없던 웬 삼거리인가? 자세히보니 삼도봉가는길이다..예전에는 좀윗쪽 능선에 사거리 비슷한 갈림길이 있었던것 같은데,아리송하다.. 위치확인하고 다시 진행을 한다..조금더 진행을 하니 ,좌측으로 조망처가 보인다..자세히살펴보니 이곳 윗쪽 능선이 노루목이 분명하다... 가볼까 하다가 그냥 진행을 한다..지금시간 8:41분이다..오름길을 진행하다보니 지남25-01이란 위치표지목에 반야봉0.5km라 적혀있는 지점이다..조금더 진행을 하니 전에없던 철계단이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우측길은 페쇄된지 오래고 좌측으로 새로운 길이 형성되있다.. 이렇게 진행하는편이 훨씬 수월할것같다.. 잠시 기다리니 방원씨가 뒤따라온다..사진 한장찍고 계속 진행한다.폭포수골 갈림길을 지난다. 좌측으로 희미한 등로가 보인다..이곳으로 내려서면 폭포수골(대소골) 로 가게 된다..이때 새한마리가 시선을 사로 잡는다..지빠귀같은데,호랑지빠귀같기도하고,중국지빠귀같기도하다.. 후자에 더 근사한것같다..그렇다면 태풍에 떠밀려왔나, 겁도없다..몇장찍어본다..지남02-02지점을 통과한다..새를따라가며 사진을 찍는데,어느 산우님은 꽃을 찍느라 여념이없다..새를 쫓아가다보니 부지불식간에 반야봉에 도착했다.. 새가 풀벌레를 잡아먹는 모습에 정신이 빠져있는사이 여러명의 산님들이 속속 도착한다..방원 후배님과 둘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우리 팀도 도착했다..우리는 이곳에서 한동안 휴식을 취하며 간단한 요기를 한다..지금시간 9:23분이다..구름이 이제는 완전히 반야봉을 휘감아 노고단 조차 보이질 않는다..애석하다..휴식을 마치고,묘향대로 향하려는데,우리님들께서 그냥 삼도봉으로 가자고들 한다..당초 계획을 변경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어떻게 할까 잠시 생각을 정리해본다..묘향대까지의 거리와 시간과 체력을 감안해보건대 다녀와도 괜찮을듯한데,그냥 삼도봉으로 가자고들 하니,아쉬움을 접고 동의하는것이 옳을것같아 함께 삼도봉으로 향한다..내림길을 한동안 진행하여, 삼거리를 지나,반야 우회등로와 합류를 한다..지금시간10:44분이다..삼도봉0.5km,반야봉1km지점이다..1분여 내려서니,묘향대 나들목이 보인다..곰 출현 조심 표지판옆으로 난 묘향대 나들목이다.. 등로없음 표지판도 서있다..이곳으로 진행하면 묘향암 화장실 앞으로 가게 된다..잠시후 소금장수 무덤앞을지난다. 10:47분이다..여기서부터 삼도봉 까지는 다시 오름길이다..능선을 비켜난 길로 진행을 한다..지남 01-11지점을 지난다..10:51분이다..10:59분 삼도봉에 도착했다..삼도봉 주철삼각점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한컷한다.. 그리고 우리는 한켠에서 아점을 한다..묘향대를 들르지 않았으니, 시간이 넉넉하다..유유자적한다..
잠시 대역 연기하는 것일 뿐..슬픈 표정 짓는다 하여 뭐 달라지는게 있소.기쁜 표정 짓는다 하여 모든게 기쁜 것만은 아니요.내 인생 네 인생 뭐 별거랍니까..바람처럼 구름처럼 흐르고 불다 보면,멈추기도 하지 않소.그렇게 사는 겁니다.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오,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다.구름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
▲ 노루목의 이정표
▲반야봉 삼거리 이정표
▲ 암릉을 오르는 방원 후배님
▲ 반야봉 오름길 철계단
▲ 반야봉의 유래
반야봉(般若峰)은 해발 1,732m의 봉우리로 높이로 따지자면 지리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중봉(해발 1,875m)보다 낮지만 반야봉은 높이에 구애받지 않고 지리산 제 2봉으로 불리우며 천왕봉, 노고단과 함께 지리산을 상징하는 대표적 봉우리이다. 반야(般若)란 불교의 반야심경에 나오는 말로 "지혜 또는 밝음"을 뜻하는 말이다. 반야봉은 지리산의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여인네의 엉덩이와 비슷하다고 하는데 모두 공감한다. 지리산의 산신은 여신(女神)으로 반야봉에는 이와 관련된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지리산신(智異山神))을 마고(麻古)할미, 선도성모(仙桃聖母) 또는 노고(老姑)라고도 부르며 마고할미는 원래 천신(天神)의 딸 이였다고 한다. 마고할미가 지리산에 하강하여 산을 둘러보던중 산에서 불도를 닦고 있던, 도사 반야(般若)를 만나게 되었는데 마고할미는 반야의 늠름한 모습에 반하여 반야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후 마고할미는 반야와 결혼을 하여 지리산 천왕봉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으며 그 동안에 자식을 두었는데 딸만 8명을 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반야는 자신의 도가 부족함을 느끼고 아직 자기가 깨치지 못한 도(道)를 얻기 위하여 반야봉으로 떠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반야는 마고할미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도를 깨치면 바로 돌아오겠노라며 반야봉을 향하여 집을 떠났다. 그러나 한번 집을 떠난 반야는 해가 바뀌어도 돌아올 줄을 몰랐고 그 동안에 수많은 세월이 흐르고 흘러 마고할미의 머리가 백발이 되어 갔지만 반야의 소식은 감감했다. 마고할미는 반야봉에서 수도하고 있는 반야를 당장이라도 달려가 만나고 싶었지만 참고 또 참으면서 반야가 도를 빨리 깨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산에 있는 나무껍질을 벗겨 남편이 돌아오면 입힐 옷을 만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마고할미가 늙어 딸들을 부양할 수 없게 되자 마고할미는 딸들을 전국 8도에 한 명씩 내려보내 무당이 되게 하였고 혼자 남아서 반야를 기다렸다. 그러나 반야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기다림에 지친 마고할미는 끝내 남편 반야를 보지 못하고 반야를 원망하며 반야를 위해 만들었던 옷을 갈기갈기 찢어 버린 뒤 숨을 거두고 만다. 마고할미가 갈기갈기 찢은 옷들은 바람에 날리어 반야봉으로 날아가 반야봉의 풍란이 되었다고 하며, 이 때부터 반야봉 주변에는 안개와 구름이 자주 끼게 되었는데 이것은 천신이 하늘에서나마 마고할미와 반야가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 준 것이라고 한다. 이후 후세 사람들은 반야가 불도를 닦던 봉우리를 반야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8도로 내려간 마고할미의 딸들은 무당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딸들의 후손인 무당의 후예들은 해마다 지리산 천왕봉에 찾아와 마고할미에게 제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천왕봉에는 해마다 전국에서 수많은 무속인 들이 마고할미(천왕할매라고도 함)의 제를 지내기 위하여 몰려들고 있다. 반야는 산스크리트어의 프라냐(prajna)를 음역한것으로 불교경전의 반야경(般若經)에 의해 알려진 명칭이다. 반야의뜻은 '절대변하지않는 완전한 지혜'를 의미하므로,지리산에서 지혜를얻는다"라는 말은 반야봉에서 유래된 것이라 추정할수있다.마고는 인류최초의 인간을 탄생시킨 여신으로 그가사는곳은 마고성이라고 한다. 원래마고는 젊은여성이었으나 오랜전설속의 여신이므로 마고할매라고 불린다.
**묘향대(卯向臺)
반야봉 정수리에서 묘시방향에 있다는 뜻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암자이다. 예전엔 토굴이었으나 화엄사 불사를 완성한 도광스님이 절집의 모습을 갖춘 한국 불교의 마지막 전설로 불리는 곳이다. 주능선에서는 삼도봉 옆 소금장수무덤 부근에서 반야봉 올라가기전 표지판 뒤쪽으로 하나가 있고, 반야봉에서는 중봉 헬리포트 무덤 옆에 구상나무가 있는데 자세히 보면 내려가는 길이 보인다. 길이 완전하지 않으니 조심스럽게 내려가야 한다. 전설에 의하면 금강대가 제일의 수행지였다 전해지나 찾을 길이 없는 지금은 이곳을 으뜸으로 치고 있다.
▲지빠귀류이긴한데 호랑지빠귀인지 중국지빠귀인지 잘모르겠다..중국지빠귀라면 아주 희귀한데????
▲ 반야봉에서 어느산님의 도움으로 나도 한컷
▲ 반야봉 우회등로 합류
▲ 묘향대 화장실앞길 합류점
▲ 소금장수 무덤앞
삼도봉의유래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경상남도의 경계면이 만나는 곳이라 해서 삼도봉이라 불린다. 원래 삼도봉은 이곳 모양이 '낫의날' 같다하여 낫날봉 이라 불리다가 "날라리봉"으로 바뀌었는데,지금은 삼도의경계면에있다하여 '삼도봉으로 명명되었다. 이삼도봉 정상에는 석재가아닌 주철제질의 구조물로 세워져있다.
**불무장등
삼도봉은 ,주릉상의 요충지면서 그 산세는 섬진강으로 뻗어내리는 불무장등 능선의 시발점이다. 섬진강까지 이어지는 삼도봉과 불무장등 능선은 삼도봉에서 해발 1,446m의 불무장대, 해발 942m의 황장산을 지나 촛대봉에서 잠시 솟았다가 화개장터 부근의 산자락을 끝으로 섬진강으로 잠긴다. 이능선이 경남과 전남을 구분지으며 경남쪽으로는 연동골과 화개골을 빚어내고 있으며 전남쪽으로는 피아골을 만들어내 모두 섬진강에서 하나가 된다. "불무장등"의 한자표기는 "不無長嶝"이나 "佛母長嶝"으로 표기하고 있다 "不無長嶝"이라 표기한 경우는 불무장등의 산세가 대장간의 화로인 불무와 같은 형상으로 생겼다하여 생긴 지명이다..올바른 표기는 불교에서 최고의 지혜를 뜻하는 단어인 반야(般若) 반야봉에서 시작한 반야장등에 있는 가장 높은 봉으로 불모장등(佛母長嶝)의 이름이 "佛母"는 불무로도 읽어 현재 의 "불무장등"이됬다.
**무착대(無着臺)
집착이 없다는 뜻이니 번뇌를 털기 위한 수행의 기본 조건이다. 지리산의 봉우리중 유일하게 장등이라는 이름을 하고 있는 불무장등 아래에 있다. 삼도봉에서 불무장등으로 30분 정도 나아가면 불무장등을 오르는 바로 앞에 갈림길이 있다. 여기서 우측길로 2~30분 정도 나아가다 우측의 희미한 족적을 따라 10분 정도 올라서야 한다. 입구 삼거리에서 직전(稷田)마을로 내려오는 길이 있다.
▲삼도봉에서(이곳에서 불무장등,무착대로 진행할수있다)
▲ 이암벽 때문에 삼도봉을 우회한다..
▲ 삼도봉에서 바라본 가야할 능선길(맨앞의 큰봉이 토끼봉이다)
기념촬영을 마친우리는, 삼도봉 한켠에 자리를 펴고,아침겸 점심을 먹는다.. 묘향대를 들르지 않았으니, 연하천까지 만 가는데는, 시간이 넉넉하다.. 오늘의 숙박지는 연하천대피소다..잠시 다리뻣고 누워 이런저런생각을 하며,잠을 청해보지만, 잠은 오지않는다. 얼마나 쉬었을까? 연하천을 향해 출발이다..암벽을 우회하니 지북1-12라적힌 표지목을 지난다..지금시간12:18분이다..삼도봉에서 100m진행한지점이다..삼도봉에서 식사후 1시간정도 지체한것같다..지리산 남북의 경계점이 삼도봉인가보다..이곳부터 지북이란 호칭이 적용되는것을 보면 알것같다..잠시후 구불구불한 급경사 계단내림길을 한동안 진행하니 계단끝지점에,지북1-13지점 이정표다 화개재가200m남았다.. 진행을 이어가니 화개재에 도착했다..너무 많이 변하여 옛모습은 찿아 볼수가 없다.. 80년도에 이곳에서 야영을 했었는데,그때모습과는 너무도 판이하다..뱀사골 대피소에서 물을 길어다,이곳에서 밥을 해먹던 그때와 말이다..넓은 헬기장에 데크쉼터가 마련되있고,뱀사골쪽은 길이 아주 잘 되있는데,목통골(연동골)쪽은 잡풀이 무성하고,통행도 금지된듯하다.. 우리는 이곳에서 한동안 망중한을 즐긴다..구름은 아직도 온누리를 덮고있는것같다..이정표에 반선9.2km,연하천4.2km,노고단고개6.3km라고 적혀있다..여기서부터 토끼봉까지 한동안 오름길이다..한참만에 토끼봉을 향해 진행을 한다..작은 봉우리 하나를 넘으니 지북1-14지점에 도착했다. 지금시간12:49분이다..연하천4km,화개재0.2km지점이다..조금더 진행을 하니 이전 뱀사골대피소 질러가는 길이나타나고 이정표가 서있다..연하천 3.4km,화개재0.8km 지점이다..지금시간 12:59분이다..조금 가파른 언덕을 올라서니 지북1-15지점에 도착했다.지금시간13:09분이다.종주 산행치고는 너무나 여유로운 산행이다..종주하면서 이렇게 여유롭긴 처음인듯하다.늘 무었에 쫒기듯 허둥대며 다녔던것 같다..오름길을 한동안 진행하여 토끼봉에 도착했다..넓은 헬기장에 안내판 이통안테나 등등이 시야에 들어온다..이곳에서 남쪽으로 내리뻣은 능선이 범왕능선이다..칠불암 가는 길이라고 하는것이 알기쉽겠다..연하천 3km,화개재1.2km 지북1-16지점이다..
**뱀사골과 반선의유래
1,300여 년 전, 송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1년에 한 번씩 스님 한 명을 뽑아 칠월백중날 신선바위에서 기도드리게 하면 신선이 되어 승천한다 하여 매년 행사를 하였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고승이 독약이 묻은 옷을 스님에게 입히고 신선바위에서 기도드리게 했다. 그날 새벽 괴성과 함께 기도드린 스님은 사라지고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용소에 죽어 있었다. 이후 뱀이 죽은 골짜기라 하여 뱀사골이라 부르게 되었고 억울하게 죽은 스님의 넋을 기리기 위해 ‘절반의 신선’의 준말로 마을을 ‘반선(伴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한다.
**목통골의 유래
목통골이란 지명은 이곳에 으름덩굴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목통 마을 장군대왕상 비문에 “ 이 마을은 약1500년부터 생긴 것으로 추정되며. 마을 이름은 얼음밭으로 불러오다가 지금의 목통마을 이라 불려지고 있다”고 적고있다.으름의 이곳 방언이 먹통이었고,먹통덩굴의 줄기와 뿌리의껍질을 벗겨 말린것을 목통(木通)이라 하고, 한약재로 쓰인다. 임신 신장염으로 인한 부종이나 급성 신장염에 효염이있다.이뇨 배변작용을 촉진해 전신의 기순환을 원활하게 한다. 특히 출산후 부기가 있으면서, 살이찐 사람에게 좋다.으름맛은 맵고 달며 방광질환에 효과가있다.원래 으름덩굴이 지천이던 목통골은 목통이란 한방 약재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목통(木通)은> 으름의 한자 이름 으름덩굴과(科)에 속하며 으름덩굴 꽃은 예쁘기만 한게 아니라 꽃의 향기도 좋아서, 예로부터 얼굴이 예쁜 여인을 '으름 꽃' 같다고 했다. 으름은 가을에 자갈색으로 익는데, 갈쭉한 열매는 과육에서 단맛이 난다. 그리고 씨앗이 씹힐 때 얼음처럼 차가운 느낌이 든다고 해서 으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열매가 익기 전에는 남성의 모습이요, 다 익어 갈라지면 여성의 모습이라, 남녀의 교합을 뜻하는 얼움(어우름)으로 불리어지다가, 으름으로 변했다고도 한다. 특히 완전히 익으면 세로로 갈라지는데, 그 모양새가 여성의 음부를 닮아서 임하부인(林下夫人)이란 별칭으로도 불린다. 시골에서는 허리나 관절이 아프고 쑤시면 등나무처럼 다른 나무를 칭칭 감고 올라가는 으름덩굴로, 감주(甘酒)나 술을 만들어 먹던 민간요법이 있었다. 옛말에 사약을 받아먹고도 으름의 줄기인 목통(木通)을 달여 마시면, 목숨만은 구할 수 있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효능이 높던 한약재이다. 으름덩굴 열매는 머루, 다래 등과 함께 선조들이 즐겨먹던 산 속의 귀한 열매 중 하나이다.
▲ 화개재
하동군 화개사람들과 전북 남원시 산내사람들이 이곳까지 짐을 메고 올라와 장터를 열고 물물교환을 하였다는 유래 깊은 고개다... 화개재에는, 먼옛날 산내장터애서 올라온 70대의 소금장수가 이 고개를넘다 너무힘들어 죽었다는 가슴아픈 전설이서려있다. 그때 죽은 소금장수무덤이 반야봉 오름길(묘향대 입구) 에있는 소금장수무덤이라고도 하고, 일각에서는 운봉무덤이 소금장수 무덤이라는 설도 있다..
▲화개재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님들
토끼봉 헬기장은 그야말로 대단하다,,피뢰침과 안내판이 서있고 방형으로,목책까지 설치했고,바닥에 돌까지깔아 잘정돈된 모습이다..덕분에 지보초는 구경하기 힘들어졌다..어느해였던가 칠불암을 거쳐 토끼봉까지 올랐던적이 있는데,당시만해도 이곳이 이렇치는 않안던것같다..세월이 변하니 시세따라 변하는것도 당연한 일이건만,내게는 익숙치가않다..한참동안 일행을 기다려도 오지를않아,홀로 진행을 이어간다..잠시후 산태골 갈림길을 지난다..이길로내려서면 왼골과 합류하고,절골과합류하여,빗점골 대성동으로 내려서게된다..대성동에서 바라보면 합죽선 모양으로 보인다..천천히 진행을 해도 일행들은 합류할 생각이 없는건지,덕분에 이리저리 돌아보며 진행을이어가는데,이준열 회장님이 보인다..이제부터 좀 가파른 오름길이다..오랫만에 종주를 하니 새삼스럽다는 느낌마져든다.. 잠시후 연하천2km 토끼봉1km라고 적혀있는 이정표앞을 지난다..조금더 오르니 안테나도 서있다..얼마지나지않아 지북1-16지점에 도착했다.. 운봉무덤가는길이 보인다..구조목엔 연하천2km화개재2.3km라고 적혀있다..이봉우리 정상부는 암봉으로 되었는데,고도계를 보니1481m로찍힌다..우리는 조금더 진행을 하여 넓고 평평하고 바람이 잘부는 쉼터에서 잠시 일행을 기다리는데,중년 남성 두분이 올라오며,걸죽한 말로 여성분들은 성토한다..들어보니 더욱 황당하다.. 동기들이 함께 하는모양인데, 처음 산행을 하는 여성동기들이 있는모양이다..첫산행에 지리산 종주라, 상상도 못할일을 꾸며놓고,못걷는다고 푸념하다니,이게 말이요 당나귀요...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건지...내보기엔 대한하다고 밖에 할말이 없는데,거친투정.. 한마디로 황당 그차체다..이어 우리일행이 도착하고,연이어 그네들 일행도 도착했다.. 우리일행이 나이가 좀 있기는하지만 그들일행도,결코젊지만은 않다..우리일행과 비교하며 하는말일것이라는 생각은 들지만,나이가 들었다해도, 다년간 산행에서 다져진 사람들과, 젊다고 해도 처음산행을 하는사람과는 비교할수없는것인데,이런점을 고려하지않고,무모하게 이런계획을세워,친구들을 어렵게 만들어놓고도,본인들의 실수는 생각지도않고,못걷는다고 질타를 하다니,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다싶어, 한마디 했다..내가보기엔 정말 잘걷고있다고,대단하다고..이팀은 벽소령에서 머무를 예정이란다..벽소령은 아직도 한참을 가야하는데,사고나 나지않을까 걱정이된다.. 아뭏든 이들이 우리보다 먼저 자리를떳다..지금시간14시40분이다..잠시후 우리도 연하천을 향해 진행을 이어간다...
▲ 토끼봉의유래
이봉우리는 반야봉에서볼때 24방위 가운데 정동(正東)에 해당하는 묘방(卯方)에 해당하고, 묘(卯)는 토끼를 상징하기 때문에,토끼봉이라는 이름이붙었다. 그러므로 토끼가 많이살기때문에 토끼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는 순전히 와전된 이야기다.좌, 우로 각각 왼골과 산태골이다. 또한 지보등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는데,지보등은 지보초(비비추의 다른 이름)가많았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한다.참고로 24방위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해 보겠다..
**24 방위.
우리나라 민족은 동남향 또는 남향을 선호. 집터 방향에 따라 길흉이 좌우된다고 여긴다. 농작물 품종 선택을 할때에도 방위는 중요하다. 야생동물은 먹이사슬을 따라 서식하게 된다. 나무의 열매는 야생동물에게 중요한 식량이다. 하여, 방위에 따라 달라지는 식물의 서식 분포도. 식물의 서식 분포도는 야생동물의 서식처를 좌우 식물의 서식지를 보고 수렵을 했을 유목민 조상들. 방위는 수렵과 농사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을듯 싶다. '하여, 우리 민족은 방위에 민감한 편.' 24방위란 주역의 8괘와 10간, 십이지를 사용해 각 방위의 간격을 15°씩 나누어 이름 붙인 것. 남동에 손(巽), 남서에 곤(坤), 북서에 건(乾), 북동에 간(艮)을 배치해 8괘 중 4괘를 사용하고, 12지는 자(子)를 정(正)북에 두고 왼쪽으로 돌며 30° 간격으로 순서대로 배치하며, 10간은 중앙을 나타내는 무기(戊己)를 제외하고 8개를 각각 오행으로 나누어 오행에 배정되는 방향에 배치하여 괘 4, 12지 12, 10간 8, 모두 24개의 방위명이 이루어지게 된다. 일단 특정장소의 좌향이 24방위 중의 방위명으로서 결정되면 그 다음은 주역과 음양오행의 원리로서 시설이나 기능의 성격에 비추어 장소의 조화와 부조화의 여부를 판정한다. 복잡한 자연과 인문현상이 뒤얽힌 실타래를 방위에 음양·오행과 역(易)의 이치를 부여함으로써 그 실마리를 찾아내는 것이 풍수지리의 좌향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친 술법이나 과장, 해석의 어려움이 개입될 수도 있지만 기후현상, 지형현상, 인문적 조건을 음양오행론과 주역의 논리 속에서 검토해 하늘·땅·사람의 조화를 추구하려 하는 사상적 토대로서의 좌향론이 중요시되는 것 일상생활에서 동서남북의 4방위를 가장 기본적으로 사용한다. 4방위에 각각 북동, 남동, 남서, 북서를 포함하면 8방위이다. 이조 시대에는 12방위와 24방위를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온다.
<12 방위.>
띠를 나타내기도 하는 12마리의 동물을 방위로 사용. 자(子, 쥐), 축(丑, 소), 인(寅, 호랑이), 묘(卯, 토끼), 진(辰, 용), 사(巳, 뱀), 오(午, 말), 미(未, 양), 신(申, 원숭이), 유(酉, 닭), 술(戌, 개), 해(亥, 돼지)
농본사회 전 유목민은 사냥한 동물 고기가 주식. 동물의 생태적인 습관을 12방위로 분류한듯 하다. 하여, 야생동물을 사냥하기위해 12방위를 만든듯. 음지를 선호하는 자(子, 쥐)는 정북. 해뜨는 동쪽을 선호하는 묘(卯, 토끼) 남향 목초지를 선호하는 가축 소는 오(午) 해뜨는 반대쪽 정서로 나르는 조류 유(酉, 닭), 여기서 자(子) 방위는 정북, 묘(卯) 방위는 정동, 오(午) 방위는 정남, 유(酉) 방위는 정서를 뜻함. 자 - 축 - 인 - 묘 - 진 - 사 - 오 - 미 - 신 - 유 - 술 - 해
북 동 남 서
24방위는 12방위 사이에 방위를 하나씩 더 넣은 것. 여기에 동원된 것은 10간(干)과 태극 8괘(卦)이다. 10간은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계(癸)를 말함. 12지와 10간을 합쳐 12간지라고 하고 이 두 가지를 조합하면 60갑자(甲子). 태극 8괘란 우리 태극기에 있어 알려진 건(乾), 곤(坤), 감(坎), 리(離)의 4괘와 태(兌), 진(震), 손(巽), 간(艮)을 더한 것. 24방위에는 10간 중 8간(무, 기가 빠짐)과 8괘 중 4괘(건, 곤, 간, 손)가 더해진 것 12지를 외우면 24방위도 외우기 쉽다. 먼저 12지를 한 칸씩 띄어서 써보자. 자 - - 축 - - 인 - - 묘 - - 진 - - 사 - - 오 - - 미 - - 신 - - 유 - - 술 - - 해 - - 여기에 10간 중 8간을 넣은 방법은 다음과 같다.
정동인 묘를 사이에 두고 갑과 을을 넣어 갑(甲) - 묘(卯) - 을(乙) 정남인 오를 사이에 두고 병과 정을 넣어서 병(丙) - 오(午) - 정(丁) 정서인 유를 사이에 두고 경과 신을 넣어서 경(庚) - 유(酉) - 신(辛) 정북인 자를 사이에 두고 임과 계를 넣어서 임(壬) - 자(子) - 계(癸) 이렇게 8간을 넣은 후의 모습을 보면 자 - 계 - 축 - - 인 - 갑 - 묘 - 을 - 진 - - 사 - 병 - 오 - 정 - 미 - - 신 - 경 - 유 - 신 - 술 - - 해 - 임 .
이번엔 4괘를 넣은 방법을 알아보자.
위와 같이 8간을 넣은 후 12지 중 빈칸이 4칸 있는데 바로 축과 인, 진과 사, 미와 신, 술과 해의 사이이다. 여기에 각각 간(艮), 손(巽), 곤(坤), 건(乾)을 넣는다. 동지 입춘 춘분 입하 자 - 계 - 축 - 간 - 인 - 갑 - 묘 - 을 - 진 - 손 - 사 - 병 - 북 북동 동 남동 하지 입추 추분 입동 오 - 정 - 미 - 곤 - 신 - 경 - 유 - 신 - 술 - 건 - 해 - 임 남 남서 서 북서 이제 24방위가 모두 완성되었다. 참고로 24절후를 적용 한다면 자에서 동지, 소한, 대한, 입춘, 우수, 경칩, 묘에서 춘분, 청명, 곡우, 입하, 소만, 망종, 오에서 하지, 소서, 대서, 입추, 처서, 백로, 유에서 추분, 한로, 상강, 입동, 소설, 대설 나열된 순서대로 시계방향으로 돌아간다.
지금 내가 뭐하는거지!!!!!
▲총각샘 입구 이정표
"총각샘의유래"
“연하반이 지리산종주등반을 할때 무척 더운 날 삼도봉을 지나 연하천을 향하여 가고 있는데, 어린학생들이 넓은 바위위에 누워 있더란다. 학생들은 갈증을 해결못하고 퍼져있다가,연하반일행들에게, 물좀달라고 했었더란다. 연하천에서 노고단으로 가려면 임걸령샘까지 가야 물을 먹을 수 있어, 충분히 물을 가지고 가지 않으면 고생을 할 수 밖에 없었기때문이다. 이후 이문제로 고심하던,연하반산악회(현 지리산악회) 우종수님이, 임걸령과 연하천 중간 지점에 샘이 있는지 탐문을 하던중, 경남 하동군 화개면 의신마을에 사는, 약초를 캐러 지리산을 자주 다니는 사람을 소개받아, 물었더니 등산로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는 샘을 자세히 설명해 주더란다. 이분은 당시에 환갑이 넘은 분인데 장가도 못가고 혼자 살더란다. 지리산악회는 1970년 지리산종주코스 제 3차 이정표 설치를 할때, 약초꾼이 알려준 샘을 찾아 이름을 지었는데. 이곳에 샘이 있다고 알려준 그분을 기념하기 위해 총각샘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명선봉갈림길 이정표
평이한길을 진행하다가.능선우회길이시작되며,돌과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지북1-19지점에 도착했다.연하천1.4km 화개재2.8km 가고 적혀있다..지금시간 14시58분이다..이제 총각샘 갈림길도 얼마남지않았다..빗점골 갈림길을 지난다..로프로 진입을 통제하고있다..너덜과 바위길을 오르니,총각샘입구다..이정표에 연하천1km 토끼봉2km 지북1-20이라 적혀있는 지점이다..위치확인하고 계속진행을 이어간다..잠시후 철계단을 지난다..큰 얼음쇄기능선이다..바위길을 진행하니 연하천0.5km 화개재3.8km 지점에 도착했다..지금시간15시28분이다..이어 지북1-21지점을 통과한다.잠시후 좌측으로 큰얼음쇄기골로 내려서는 등로가 보인다..평이한길을 조금더진행하니,명선봉갈림길이다..우리는 좌측 우회로로 진행을 한다..비탈진 바윗길을 진행하다보니 어느새 명선봉 갈림길에 도착했다..지금시간15시45분이다..조금더진행하니, 헬기장으로 가는길은 진입금지다.. 우리는 우측으로내려서니 계단길이 이어진다..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연하천 대피소가 모습을 드러냈다..드디어 오늘 우리가 묵고갈 연하천 대피소다..이 얼마만인가.. 이곳에서 묵어 본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전의 아지매팀은 벌써 자리를펴고, 푸짐하게 한상 잘 차려 식도락을 즐기고 있다..더운 한여름 날씨에 계곡에서 흐르는 물에 얼굴을 씻으니 날아갈것같다.. 역시 이곳 물은 변함없이 차고 맛이좋다..우리도 한켠에 자리를 펴고 저녁식사 준비를 한다..워낙 시간이 넉넉하니 일행들은 피곤해보이지가 않는다..기원씨가 힘들게 지고온 김치로 맛난 찌개를 끓여,반주를 겯들인 저녁식사를 끝내고,입실수속을 밟은후,간단하게 씻고 취침에 들었는데,한밤중 일행몇이 전나무숲 계곡수에 사워를 하고 왔단다..알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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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 ***
단잠에서 깨어 서둘러 식사 준비를한다..아침은 간단하게 라면과 누룽지로,하기로 하고 라면고 누룽지를 끓이는데,여기서 문제가 생겼다..술냄새가 난다..누룽지에 고량주를 부은것이다..세상에나 그 귀한 고량주를 누룽지에 부었으니, 남은 술이라곤 그것이 전부인데,우쨔면 조아..누룽지는 그렇다쳐도, 술은 .. 애고고고..지리산 산신령님께선, 음주 산행을 철저히 통제히시는가봐...준선씨는 누룽지가 아까워 물로 헹구고 또헹구기를 거듭하고,먹었는데도 술냄새가 났단다..암튼 이른아침을 마치고,서둘러 짐챙기고,기념촬영후 대피소를 출발하여,이동을 시작한다.. 지금시간 5시 30분이다..대피소를 출발하여 작은 계곡수가있는지역을 통과하며 어제밤 알탕갔다 잃어버린 슬리퍼를 끈을 찿아본다고, 두리번 거리는 일행을 뒤로하고 진행을 하여,명선봉 능선길과 합류하는지점을 지난다..곧바로 지북1-22지점을 통과한다..어떤이들은 이곳이 삼각고지라고 하는이도 있다..순탄한 숲길을 한동안 진행하니, 좌측으로 와운골로 내려서는 갈림길이보인다..좀더 진행하니,음정 갈림길에 이정표가서있다..지리1-23지점이다.. 이곳부터는 표지목에 지북이 아니고 지리라고 적혀있다, 구역 경계점인것같다..이곳에서 능선을 따라 진행을 하면, 영원령을 거쳐1292m봉에서,좌측은 반선 방향이고, 우측능선은 삼정산을 지나 실상사로 내려설수 있다.. 이정표에 음정7.5km 천왕봉14.5km 벽소령2.9km 연하천0.7km 노고단11km라고 적혀있다.. 지금시간 5시 47분이다..서서히 해가 떠오르는 모양이다..우리는 삼각고지를 사알짝 우회한다..
▲연하천대피소를 배경으로 둘째날 출발전 한컷
연하천
연하천은 명선봉의 북쪽 가슴턱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은 고산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숲속을 누비며 흐르는 물줄기가 언제나 수림속의 맑은 공기와 싱그러운 풀향기, 꽃향기가 그윽한 지대다..
***연하천(烟霞泉)이란 이름은 옛부터 전래된 것이아니라, 구례의 연하반 산악회(현 지리산 산악회)에서 지리 개척종주 산행때 명명한 이름이란다.'구름속에 물줄기가 흐르고있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처럼 연하천의 샘물은 사계절마르지 않는다.이지역자체가 늪지대를 연상시킬 정도로 항상물에 흥건하게 젖어있다.“烟霞”는 '연기연' '놀하' 元來 山水 卽 自然을 뜻하는 말이고 보니, 自古로 世俗的 富貴와 功名을 浮雲처럼 여기고 俗塵을 떠나서 閑雲野鶴 을 벗 삼아 樂山樂水 鴉遊養氣 하는 賢人達士를 烟霞人이라 불렀다. 烟霞人들의 모임이 있으니 “烟霞伴”이라 부른다***
▲ 음정갈림길 이정표
***삼각고지***
삼각고지는 해발 1,470m의 돌출봉으로서 좌우로 탁트인 백무동과 화개골을 시원스럽게 볼 수 있어 저절로 발걸음을 멈추게 되는 곳이며, 이곳에서 좌측으로 북쪽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영원재와 삼정산을 거쳐 실상사로 내려갈 수 있다.
▲ 석문앞 목교에서 방원씨
▲석문을 배경으로 세여인
▲ 전망바위에서 건너다본 부자바위
잠시후 삼각고지에 도착했다..지리1-24지점이다..5시53분이다..7분여를 걸으니 벽소령2.4km 연하천1.2km 라고 적힌 이정표를 지난다..잠시 내림길을 내려서니,다리가 놓여있고,뒤로는 석문이 보인다..때마침 방원씨가 도착하여,사진한컷한다..뒤이어 님들이 도착하여, 문바위를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한다..얼마가지안하 지리1-25지점이다. 천왕봉03.5km 노고단12km라고 되있다..잠시 더진행을 하니 전망바위에 도착했다..절골과 명선 남릉이 아주 잘보이는 지점이다.. 가야할 길에는 부자(父子) 바위도 건너다 보이는,멋드러진 조망처다.. 경치에 취해 사진 촬영을 하다가 그만 지팡이를 놓쳐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하는수없이 덤불을 헤집고 내려가 힘들게 회수를 해왔다. 우리는 이곳에서 담소를 나누며, 장난도 치고 한동안 사진 촬영과 주위 경관을 즐긴다.. 오늘의 산행도 초장부터 유유자적한다..
▲ 절골 상단 전망 바위에서의 님들
▲ 전망바위에서 당겨본 부자바위
▲부자바위를 배경으로
부자바위앞공터에서
▲ 형제봉에서
▲ 형제봉에서 바라본 가야할능선길
▲형제봉에서 당겨본 형제바위
▲형제봉에서 바라본 지나온능선
▲ 형제봉에서 가야할 능선을 배경으로 준선 계선 자매
▲ 형제봉 의 위치표지목
▲ 형제바위
***형제바위유래***
옛날 지리산에서 두 형제가 수도하고 있을 때 산의 요정 지리산녀(地異山女)의 간곡한 유혹을 받았으나 형제가 다 같이 이를 물리치고 도통성불하고,성불한 후에도 집요한 산녀의 유혹을 경계하여 도신(道身)을 지키려고 형제가 서로 등을 맞대고 너무 오랫동안 부동자세로 서 있었기 때문에 그만 몸이 굳어서 그대로 두 개의 석불이 되었다고 한다
▲형제바위앞 이정표
▲ 나홀로 오른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가야할 능선
▲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형제바위
▲ 위치표지목이 있는 전망바위에서 형제바위를 배경으로 준열씨와 계선씨
▲ 전망바위에서 당겨본 벽소령 대피소
▲내임의로 명명한 벽소문
*벽소령(뱁실령)*
지리산 허리춤에 위치한 벽소령은 화개재나 장터목과 함께 지리산의 남북을 넘나드는 고개중의 한 곳이다. 벽소령의 달밤은 여러 문장가들에 의해 시와 소설이 되었고, 동란 중 빨치산도 벽소령을 넘을 때 달빛 때문에 고향을 그리며 울었다고 한다. 밝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지리산 달밤의 운치를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푸른밤'이란 뜻의 벽소령은 언제부터 '벽소령'이라 불렸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전해오는 고서 및 고지도에 표기되어진 것을 보면 대개 1750년경이 아닌가 추정한다. '벽소(碧푸를벽 宵밤소)'라는 단어는 1751년에 쓰여진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나온 듯하다. "지리산의 북쪽은 함양 땅이다. 영원동, 군자사, 유점촌이 있는데 남사고는 이곳이 모두 복지라고 했다. 또 벽소운동과 추성동은 모두 경치가 뛰어난 곳이다." 이중환이 말한 '벽소운동'이 지금의 백무동이 아닌가 추정이 가지만 정확히 규명할 수는 없다. 다만 마천 쪽의 벽소령 자락에 있었던 마을임은 분명하다. 태초에 길이 생겼을 때부터 주로 이 고개를 이용했었던 사람들은 고개의 이쪽저쪽에 사는 민초들은 물론, 등짐 진 보부상들, 혹은 지리산에서 항전의 의지를 불태웠던 의병들과 수 많은 절집의 스님들이었겠지만 조선시대에 지리산을 찾은 유산객들도 이 고개를 넘나든 흔적이 많아 보인다.조선시대의 '유산기'에서 벽소령을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진주선비 하익범이다. 1807년 중산리 - 천왕봉 - 벽소령 - 칠불암 코스로 산행을 한 그는 "망암(칠선봉으로 추정됨)을 따라 벽소령 냉천(선비샘으로 추정됨) 역참까지 70리였는데 여기서부터 비로소 길이 아래로 꺾였다"고 <유두류록>에 기록했다. 당시 양쪽 산자락의 고개 길이 시작되는 지점인 의신쪽의 삼정리와 마천쪽의 양정마을에는 주막까지 있어 지나는 길손들이 요기와 함께 숙박까지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군사정권시절(1972년) 작전도로가 생기면서 그 옛날 오솔길들은 사라지다시피 했지만 아직도 흔적은 있어 최근에는 등산객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대표적인 오솔길이 빗점골 상부의 천내골, 오리정골, 광대골 상부의 소금쟁이길 등이다. 벽소령의 원래 이름은 '초료조(鷦鷯鳥)재'였다. 추강 남효온이 쓴 지리산기행문인 <지리산일과>(1487년)에 '초료조재'가 등장한다. 초료조는 우리가 흔히 촉새 또는 때까치라고 부르는 뱁새의 학명이며, 한국의 텃새이다.한편 고개 밑의 의신마을 사람들은 벽소령을 '뱁실령'이라 부르고, 벽소령 샘을 '뱁실샘'이라 부른다. 500년 전의 기록물에 보이는 벽소령의 옛이름 '초료조재', 즉 '뱁새재'가, 어원의 근거지인 옛날 의신사가 있었던 의신쪽 사람들이 부르는 '뱁실령'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벽소령 대피소에서의 님들모습
▲ 벽소령대피소 600m 지난지점의 이정표
▲ 구 벽소령에 설치된 이정표에서
▲ 구 벽소령에 설치된 지형도
▲ 전망쉼터에서 지나온 능선을 배경으로(보이는 계곡이 덕평골)
평덕평봉
정상부가 '각지지 않고 평평한 것이 덕스러워 보인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덕평 마을이 자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덕평마을의 원래 이름은 영신마을이었다. 덕평마을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부의 주장은 선비샘 아래편의 상덕평 분지라고 하고, 또다른 주장은 영신사에서 가까운 음양수 샘 부근이라고도 한다.화개동천의 의신 마을에서 덕평봉(德坪峰 1,651m) 선비샘으로 곧장 오르는 산길이 있다. 선비샘 직등 루트인 이 산길을 편의상 덕평봉 코스라고 부른다.이 등산로는 가파른 부분과 평탄한 길이 번갈아 이어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부드러운 흙길로 이어져 있어 딱딱한 바위를 찾아보기 어렵다. 산행하는데 이상적이며 시종 서정적인 오솔길이 나타난다. 키 큰 나무들의 터널을 통과하는가 하면, 사람의 허리 정도의 산죽(山竹)밭을 지나기도 하고, 억새풀밭을 거쳐 가기도 한다.
▲선비샘 직전의 이정표
▲ 선비샘에서
**선비샘의유래**
덕평봉을 등지고 남쪽 상덕평 능선에 샘터가 있으니 이 샘을 선비샘이라 부르는데 수량은 비록 적으나 마르는 일이 없고 그 주위가 평탄하고 넓어서 야영하기에 적합하다. 그 샘터 위에 초라한 고분이 하나 외로이 자리잡고 있으니 이 무덤과 샘에 얽힌 한 화전민의 서글픈 사연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연민의 정과 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지리산의 한 기슭인 덕평마을에 이씨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씨 노인은 불우한 시골촌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제대로 배우지 못하여 무식한데다가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얼굴마저 추하게 생겨 사람들은 모두 이씨를 모두 멀리하며 홀대(忽待)하였다. 이씨 노인은 못생긴데다가 항상 가난에 찌든 생활을 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서러웠으며 단 한번만이라도 사람 대접을 받으며 선비처럼 고결하게 살고 싶은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식하고 외모가 추하게 생긴 이씨 노인을 아무도 반겨주지 않았으며 자기를 찾아오는 것조차 꺼렸다. 그러던 중 이씨 노인은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여인네를 만나 두 아들을 두게 되였다. 결혼을 한 이후에도 이씨 노인은 겨우 목구멍에 풀칠이나 할 정도로 가난을 면치 못했으며 사람들로부터 항상 냉소와 천대 속에 살았다. 이씨 노인은 이렇듯 뜻 한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고생으로만 연명하다가 어느 날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 때 자식들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죽으면 상덕평 샘터 위에 묻어 달라"고 했다. 사람들이 산에서 샘물을 마시면서 항상 샘터에 합장을 하는 것을 보아왔던 이씨 노인은 죽어서나마 공경을 받고자하는 생각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이씨 노인의 자식들은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아버지의 유언대로 상덕평 샘터 위에 아버지의 묘를 쓰고 장사 지냈다. 이씨 노인을 장사지낸 후 상덕평 샘터를 찾은 지리산 등산객들은 샘터에서 물을 마신 후 항상 샘을 향하여 합장을 하니 이씨 노인은 평생에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받고 싶었던 대접을 무덤 속에서나마 받게 된 것이다. 후일 이러한 내막을 안 마을사람들은 불우했던 이씨 노인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기 위하여 이 샘을 선비샘이라고 부르자고 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칠선봉(七仙峰:1,576m)
칠선봉은 작은 7개의 암봉이 높은 능선 위에 자리잡고 아름다운 선경을 이루니 마치 일곱 선녀가 한자리에 모여서 노는 형상 같다 하여 부르게 된 이름이며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비경의 암봉들을 구름이 스쳐 지나갈 때면 더욱 아름답고 고요한 운치를 돋구어 준다.
북쪽으로 백무동계곡과 남쪽으로 대성골이 관찰되는 위치다. 봉우리 자체가 암장으로 형성되어 있다. 천왕봉과 중봉 제석봉이 가까운 거리로 보이고,연하봉과의 사이에 있는 장터목산장까지 보인다. .일출봉,촛대봉,영신봉과 남부능선이 멋드러지게 조망된다..
▲ 영신봉 이정표
**영신대(靈神臺)
신령스런 산신이 계신 곳이란 뜻으로 예로부터 지리산에서 기운이 가장 왕성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들머리는 벽소령방향에서는 영신대를 오르는 나무계단을 오르기전 우측으로 길이 있다.(등산로아님표지) 그곳으로 10여미터 들어가면 철조망이 쳐져있다. 바위비탈을 지나 내려가면 영신대 좌측방향으로 나온다. 세석방향에서는 영신대 헬기장 정중앙에서 우측방향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경사가 완만하며 10여분후면 영신대에 도착할 수 있다.
**창불대(唱佛臺) 예불에서 오분향례를 염송하거나, 부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뜻하니 곧 구도에 정진함을 이르는 말이다. 김종직은 영신대부근 바위를, 김일손은 영신사 앞에 있다고 적었다.
**좌고대
가섭전 북쪽 봉우리에 두 개의 바위가 우뚝하게 서 있는데, 그중 한 바위는 삼단으로 되어있어 아래는 반반하고 위는 뽀쪽하며 머리에 네모난 돌을 이고 있다. (김종직, 남효온, 김일손, 양대박, 유몽인의 기록)
**가섭대(嘉燮臺)
영신사 북쪽 절벽에 있다.(이륙, 유몽인의 기록)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坐高臺)라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방석(方石)이 얹혀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尺] 정도였는데, 중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증과(證果)를 얻는다고 한다. 이 때 종자(從者)인 옥곤(玉崑)과 염정(廉丁)은 능란히 올라가 예배를 하므로, 내가 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급히 사람을 보내서 꾸짖어 중지하게 하였다. 이 무리들은 매우 어리석어서 거의 숙맥(菽麥)도 구분하지 못하는데도 능히 스스로 이와 같이 목숨을 내거니, 부도(浮屠)가 백성을 잘 속일 수 있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겠다.
출처 :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중
**옛 문헌속의 영신사
영신사(靈神寺)에서 자는데 여기는 중이 한 사람뿐이었고, 절의 북쪽 비탈에는 석가섭(石迦葉) 일구(一軀)가 있었다. 세조 대왕(世祖大王) 때에 매양 중사(中使)를 보내서 향(香)을 내렸다.
출처 :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중
14일 임자에 영신사(靈神寺)에서 유숙하였다. 이 절의 앞에는 창불대(唱佛臺)가 있고, 뒤에는 좌고대(座高臺)가 있어 천 길이 솟아 올라가면 먼데를 바라 볼 수 있고,
동쪽에는 영계(靈溪)가 있어 쪼개 놓은 흠대 안으로 쏟고, 서쪽에는 옥청수(玉淸水)가 있는데 중의 말이 매[鷹]가 마시는 물이라고 한다.
출처 : 1489년 김일손의 속유두류록 중
산의 절정에 있는 향적사(香積寺) 등 두어 절은 다 목판으로 덮고 거처하는 중도 없는데, 오직 영신사는 기와를 덮었다. 그러나, 거처하는 중은 역시 한두 명에 불과하다. 산세가 동떨어지게 높아서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접촉할 기회가 없으니, 자연 고승(高僧)이 아니고서는 안착할 수 없게 되었다.
출처 : 1463년 이륙의 지리산기 중
**영신사의 영계와 옥천
그 동쪽 섬돌 아래에는 영계(靈溪)가 있고, 서쪽 섬돌 아래에는 옥천(玉泉)이 있는데, 물맛이 매우 좋아서 이것으로 차를 달인다면 중령(中泠), 혜산(惠山)10)도 아마 이보다 낫지는 못할 듯하였다.
출처 :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중
**청학연못
청학연못은 세석고원의 촛대봉 조금 아래에 있다. 대략 고도는 1500m정도 된다. 연못의 모양은 타원형인데 지름이 10~15m정도이며, 연못가운데 깊이는 약 두 자가 된다. 북쪽 바위벽 아래서 샘물이 솟아나 연못을 이룬다. 연못주변은 북쪽으로 바위벽이 막았고 전면은 둑을 쌓아 물을 가두어서 연못을 인공으로 만든 흔적이 보인다.
**창불대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를 올라가 보니, 깎아지른 절벽이 하도 높아서 그 아래로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고 다만 철쭉[??] 두어 떨기와 영양(羚羊)의 똥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두원곶(荳原串), 여수곶(麗水串)·섬진강(蟾津江)의 굽이굽이를 내려다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더 기관(奇觀)이었다.
출처 ::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중
▲ 영신봉에서 촛대봉 장군봉(시루봉)를 배경으로
▲ 영신봉 에서 바라본 정상부
▲영신봉에서 당겨본 촛대봉
▲영신봉에서 당겨본 장군봉(시루봉)
▲ 영신봉에서 바라본 남부능선
▲ 영신봉에서 바라본 세석대피소 뒷편의삼신봉과 연하봉 일출봉 제석봉 천왕봉
▲ 영신봉에서 바라본 세석평전
▲ 영신봉에서 바라본 세석평전과 촛대봉 삼신봉
▲ 영신봉에서 당겨본 촛대봉
▲ 영신봉에서 당겨본 삼신봉
▲헬기장에서 뒤돌아본 영신봉
▲거림가는길 이정표
▲ 세석 샘터
대(臺)란 무엇인가
대(臺)자가 붙은 곳들이 신령하고 영험한 기도처
산의 높이에 관계없이 산의 높은 봉우리를 봉(峰)이나 대(臺)자를 붙여서 쓴다. 봉(峰)자는 주로 산의 정상에 붙여지는 것이고, 대(臺)자는 봉(峰)보다는 높이가 낮은 곳에 붙여서 쓰인다. 물건을 얹는다는 의미의 돈대의 대(臺)자가 붙은 산(山)과 지명들이 대체적으로 신령한 기운들을 머금고 있어 영험한 곳들이다. 그래서 유명한 기도처들에는 대부분 대(臺)자가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산의 가장 높은 곳이 정상이다. 산의 정상부근에 대(臺)자가 붙은 지명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대(臺)자를 붙여서 쓰는 곳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산의 정상과 정상부근이 아닌 곳들도 있다.
신령하고 영험한 기도처로서 대(臺)자가 붙은 곳들을 몇 가지 찾아보자. 서울의 삼각산에는 백운대(臺)와 만경대(臺)가 있고, 관악산에는 은진전(應眞殿)이 세워진 불꽃바위와 함께 연주대(臺)가 있다. 강원도의 설악산에는 비선대(臺)와 유선대(遊仙臺)가 있고, 원주의 치악산에는 입석대(立石臺)가 있다. 충청도의 속리산에는 문장대(文藏臺), 신선대(神仙臺), 입석대(立石臺), 경업대(慶業臺)가 있다. 전라광주에는 무등산의 입석대(立石臺)와 서석대(瑞石臺)가 있다.
지리산(智異山)에도 문창대, 금강대, 가섭대, 영랑대, 소년대 등이 있다. 최고의 수도처로서 영험한 기도처로서 전해 내려오는 지리산의 금강대는 어디에 소재함인지 확실치는 않다. 현재 알려진 지리산의 대(臺)들 중에서 수도처로서 가장 좋은 최적지가 문수대이거나 상무주암이라고들 한다. 한편 지리산의 묘봉치 아래에 있는 묘봉대도 석축이 남아 존재함이니 한번 찾아볼 일이다.
**대(臺)자는 큰 바위가 있고 바위주변에 샘(泉)이 있어야
대(臺)의 일반적인 의미는 웅장하고 거대한 바위다. 그런데 이러한 대(臺)자의 의미가 중요함은 명산들에 소재한 수도처의 이름들에는 대부분 옛날부터 대(臺)자가 붙어 전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도처나 암자의 뒤쪽에는 반드시 집 한 채만한 바위나 그보다 훨씬 큰 암봉(巖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대(臺)자는 큰 바위가 있고 바위주변에 샘(泉)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의미가 부여되기도 했다.
옛날에 수도승들은 땅굴을 파고 기거하면서 수양을 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땅굴 대신에 깊은 산중에 한 칸짜리 암자를 지어 수행을 하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수행자가 거주하는 곳을 낮추어 일컫는 말로 토굴(土窟)이라 했다. 즉 토굴이란 혼자서 수행할 공간만 있는 조그만 암자라는 뜻이다. 이렇게 낮추어 일컫는 수행처 토굴을 불가(佛家)에서는 암자(庵子)와 구분해서 대(臺)라 칭하기도 했었다. 이렇게 수도처로서의 대(臺)는 토굴의 다른 이름이며 토굴의 배경이 되는 바위를 가리키는 것만은 아닌 셈이다.
바위는 기(氣)를 모이게 하고 끌어당기는 힘이 대단하여 바위주변에서 수행하거나 기도를 행하면 영험하고 효험이 많다. 그래서 수도처와 기도처로서 큰 바위 주변에 대(臺)자가 붙은 지명이 많다는 것이지 반드시 큰 바위만이 대(臺)의 필수조건만은 아닌 셈이다.
**청학연못에 대하여
청학연못은 세석고원의 촛대봉 조금 아래에 있다. 대략 고도는 1500m정도 된다. 연못의 모양은 타원형인데 지름이 10~15m정도이며, 연못가운데 깊이는 약 두 자가 된다. 북쪽 바위벽 아래서 샘물이 솟아나 연못을 이룬다. 연못주변은 북쪽으로 바위벽이 막았고 전면은 둑을 쌓아 물을 가두어서 연못을 인공으로 만든 흔적이 보인다.
1879년 송병선이
지리산을 다녀와서「두류산기」를 남긴 기록에 의하면, “...와암(臥巖) 벼랑에 학동임(鶴洞壬) 3자가 새겨져 있다... 바위아래는 작은 못이 축조되어 있고, 못 아래로는 샘이 있어 연수대(延壽臺)라 한다” 이처럼 옛 기록에도 나와있는 것처럼 청학연못은 저절로 생긴 물웅덩이가 아니라, 한쪽 바위면을 닿게하여 나머지 3면을 돌과 흙으로 뚝을 쌓아 만든 인공 연못입니다. 못의 크기는 대략 폭 5m, 길이 20m, 깊이는 1m남짓.. "학동임(鶴洞壬)”의 정확한 뜻은 알수 없지만, 학동(鶴洞)은 청학동을 일컫는 것이고, 임(壬)은 각자를 새긴 년도를 표기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라고 한다.
**세석평전 음양수 전설
옛날에 대성동 계곡에서 남자의 이름은 호야(乎也)요, 여자의 이름은 연진(蓮眞)이라고 하는 젊은 부부가 살고있었다. 이 둘은 지리산의 비경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자녀를 두지 못함이 한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인 호야가 산과(山果)를 따기 위하여 산골 깊이 들어가고 없는 사이에 근처에 살고 있던 검정 곰이 찾아와서, 연진을 위로하며, 하는 말이 “이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세석평원에는, 소원대로 아들, 딸을 낳을 수 있는 음양수라는 신비의 샘이 있다”는 것을 자랑삼아 알려주었다. 이 말을 들은 연진은 기뻐 어쩔줄을 몰라 하면서 남편과 상의할 겨를도 없이 혼자서 단숨에 음양수 샘터로 달려가서 기적의 샘물을 실컷 마셨다. 그런데 평소에 곰과 사이가 좋지 못한 호랑이가, 곰과 여진이 주고받은 대화 내용을 엿듣고는, 이것을 그대로 지리산 산신령에게 고해바치니, 산신이 대노하여 음양수의 신비를 인간에게 발설한 곰을 토굴속에 잡아 가두었다. 그러나 호랑이는 그 공으로 백수(百獸)의 왕이 되었고, 음양수의 샘물을 훔쳐먹은 연진 여인에게도 무거운 벌을 주어 잔돌평전의 돌밭에서, 평생토록 혼자서 외로이 철쭉꽃을 가꾸게 되었다. 그날부터 연진 여인은 뜻하지 않았던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저주하며, 세석평원에서 날이면 날마다 손발이 닳도록 꽃밭을 가꾸니 철쭉꽃나무는 무럭무럭 자라서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그러나 연진여인은 닳아 터진 다섯 손가락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꽃밭에 뿌리며 애처롭게 언제까지나 꽃밭을 가꾸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석의 철쭉꽃은 절세가인 연진 여인의 애처로운 모습을 닮아 그처럼 청초하게 아름답고 또 연진 여인의 슬픈 넋이 꽃잎마다 서려있어 그처럼 애련하게 해마다 피고 진다는 것이다. 그후 연진 여인은 촛대봉 정상에 촛불을 켜놓고 천왕봉 산신령을 향하여 속죄를 빌다가 그대로 망부석이 되었으며, 촛대봉의 앉은 바위는 가련한 연진 여인의 굳어진 모습 ,그것이란다. 천왕봉 산신령도 연진 여인의 가련한 희생을 보고서는 인간에 대한 노여움을 풀고 기적의 샘 음양수를 인간에게개방하였으며, 그 혜택을 받게 하니 그 후부터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고 한다. 한편 연진 여인의 남편인 호야는 산과를 따러 나간 사이에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 부인 연진을 찾으려 날마다 계곡과 , 산령을 넘어 지리산 일대를 헤매다가 칠성봉 중턱에서, 까마귀로부터 연진의 소식을 전해 듣고 단숨에 세석평원으로 달려갔으나, 산신령의 저지로 접근할 수 없게 되자 세석평원 중턱 능선의 높은 봉우리에서 발돋움을 하고 세석평원을 향하여 연진을 불러도 ,대답이 없어도, 날마다 목청껏 불렀던 것이다. 그래서 칠선봉에서 세석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절벽 위에 우뚝 솟아있는 호야봉(乎也峰)은, 그때 그가 애태우며 섰던 자리라 하여 그런 이름을 부르게 되었으며, 하염없이 부르다가 지쳐서 그대로 망부석이 되어버린, 호야의 굳어진 그대로라 한다.
노산 이은상 선생은 지리산 탐험중에 만난 음양수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산공(山公)도 이 못난이의 호소를 가엾다 함인지 얼마 아니하여 수림을 드뭇드뭇 틔우면서 이 높은 산 위에 어디에서인지 물소리를 마중보냄은 분명히 어디 무슨 영천(靈泉)의 성구(聖區)가 있음이겠다. 어리둥절한 채로 눈을 귀 따라 급히 힘두르매 길 왼편에 큰 바위가 솟고 암극(岩隙) 사이로서 새어 떨어져나오는 석천(石泉)이 대번에 지금까지의 모든 난고를 돈망(頓忘)케 한다. 이것이 소위 ‘음양수(陰陽水)’ 이다. 두 갈래의 천류(泉流)가 있기 때문이어니와, 때때로 자식을 원하는 남녀들이 여기에 분집(?集)하여 이 물을 먹고 하늘에 빌어 득자(得子)의 기쁨을 얻는다 한다.
▲ 세석샘터에서 바라본 대피소
▲ 세석평전 습지에서
▲ 촛대봉 오르다 뒤돌아본 영신봉
▲촛대재에서 바라본 촛대봉
▲ 촛대재에서 삼신봉을 배경으로
▲ 백무동갈림길에서
▲ 백무동 갈림길 지나며 촛대봉을 배경으로
▲ 삼신봉 정상부
▲ 지리산 성삼재~중산리 종주중 유일한 삼신봉의 주목에서
▲ 주목과 삼신봉을 배경으로
▲ 삼신봉 전망바위에서 연하봉 을 배경으로
▲ 삼신봉 전망바위에서 당겨봉 일출봉
▲ 삼신봉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천왕봉 쪽
▲ 삼신봉 전망바위에서 당겨본 연하봉과 천왕봉
▲ 연하봉의 구상나무와 천왕봉
▲ 연하봉에서 바라봉 일출봉
▲ 일출봉갈림길에서
장터목대피소
제석봉
원래
제석단
주변에는 민간신앙으로 제석천(帝釋天)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제석단(帝釋壇) 흔적이 남아 있다.... 옛날에는 제석당이라는 사당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제석단 길은 과거에는 백무동에서 장터목으로 가는 길이였다고 한다. 제석단은 해발 1천7백미터의 고지인데도 제석봉이 북풍을 막아주고 야영지로 손색이 없는 양지바른 명당이다.
이동항(방장유록) - 1790년에 쓴 옛산행기를 보면 제석당 판잣집이었다. 그곳에는 얼굴을 희게 칠하고 화려한 옷을 입은 돌부인을 모셔 놓고 있었다. 제석당 옆에 있는 샘물에서는 찬 물이 돌 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으나,물 성질이 매우 셌다. 그것을 그냥 마시면 금방 배가 아팠다. 그래서 솥을 걸고 물을 끓여서 각자 마른 목을 축였다.
1610/ 박여량
제석당 뒤에는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샘이 있었다. 돌을 쌓아 물을 막아놓았는데 물맛이 매우 시원했다.
호구당터
1807/하익범
“향적사 옛터에 이르러 조금 쉬어 숨을 가다듬고 있자니 여섯명의 남녀가 돌위에 모여앉아 있었다. 뭐하냐고 묻자 복을 구하는 행동이라고 한다. 능선을 따라 호구당(虎口堂) 역참에 이르는 길은 순탄한 길이었다. 고개를 넘어 5리쯤 가니 석문과 승운(昇雲) 사다리가 있었다. 벽을 기어올라 또 5리쯤 가니 바로 천왕봉이었다“ 하익범이 말한 호구당은 현 제석봉과 통천문 사이의 안부에 있었던 당집으로 당시 지나던 길손들의 숙소 역할도 했던 것으로 추정하는 지명이다.
**향적대(香積臺)
향기가 쌓여있다는 뜻이니 그 산의 기운이 모여있는 곳이다. 장터목 산회샘에서 좌측으로 10여분 들어간 곳에 있다는 설과 제석봉을 지나 통천문을 지나기전 오른쪽 아래에 있다는 설이 있다. 고서에 가장 많이 나오는 장소로 이륙의 지리산기, 김종직의 유두류록, 남효온의 지리산일과, 김일손의 두류기행록, 양대박의 두류산기행록,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김선신의 두류전지 등에 보이며 천왕봉을 오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장소로 활용되었다.
**지리산 마고성모상 이야기**
천황봉에는 수호신의 석상이 있는데,이 석상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태고 때에 옥황상제가 딸 마고를 명하여 지리산을 수호하라고 함에후토지신이 신라왕의 꿈에 나타나 왕으로 하여금 경주옥돌로 석상을 조각하여 상봉에 사당을 지어 봉안하고 가까이에 향적사를 지어서 향화를 받들게 하였다고 합니다이때 석상 앞에는 쇠로 만든 말 두 마리를 두어서 지리산일대의 신장과 잡귀, 맹수등을 제압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모셔서 봄 가을로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또한 신라 말기에 송도의 한 부인이 지리산 산신에게 빌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으로, 고려 태조가 되고 난 뒤에 어머니 위숙왕후의 석상을 만들어 지리산 천왕봉에 모시고 성모사 라고 하였다고 합니다그리고 이 석상을 석가여래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부인상 이라고도하는데 호호 막막한 세월 속에 어느 설이 옳은 것인지는 몰라도,분명한 것은 지리산을 수호하는 상징적인 석상이라는 것입니다.그로부터 성모상은 지리산을 상징하는 신으로서 천년을 소중히 지켜져 왔다.고려왕조는 성모사에 신관을 두었는데 신관이 말을 타고 군위를 거느리며 왕방울을 울리고 진주, 산청, 함양, 남원, 곡성, 구례, 하동을 순찰하면 수령들이 모두 나와서 영접하였다고 한다.역사의 모진 풍파 속에서 이 석상도 많은 수난과 역경을 겪었다. 천왕봉 양지쪽에 세워진 사당에 안치되어 만인의 숭상을 받던 석상이,고려말에 자주 침입한 왜구에 의해 박해를 받은 것이 첫 수난이었다.지리산을 휠쓸던 왜구 하나가 그 흉폭한 성질을 드러내어 칼을 뽑아서, 석상을 후려치니 석상의 귀와 코가 떨어져 나갔다. 이 왜구는 내려오다 저렴바위(홈바위)에서 피를 토하고 즉사했는데 그때부터 이 바위를 피바위라고도 부른단다. 결손된 석상을 그대로 유지하여 오다가 시멘트가 처음 생산되었을적에 시멘트로 보수한 다음 삼장면에 내원암을 짓고 불상으로,모시고져 운반하다가 석상의 중간부분을 부러뜨리고 말았다고한다.다시 시멘트로 보수하여 절에 모셨는데 그 뒤에 흉년이 계속들자 주민들이 다시 천왕봉 현위치로 환봉하였다. 그러던 1978년에 석상이 없어졌다.수소문 끝에 9년만인 1987년 1월에 진주시 상봉서동의 한 개인이,소유하고 있음을 알게되어 노력 끝에 성모상을 되돌려 받게 되었는데 이 석상을 천왕봉에 모시지 않고 중산리에다 천왕사 라는 절을 지어
절 뒤편에 보존하고 있습니다
지리산 성모상에 대하여
하나의 신비로운 석상이 온갖 풍상을 다 견디며 지리산 천왕봉 정상에
천 년 동안을 있어 왔다.
그러나 지난 1970년대에 이 석상을 우상이라 간주한 모 종교 신자들이
두 동강을 내 천왕봉 아래로 굴러 떨어뜨렸었다.
그후로 이 석상은 아직까지도 천왕봉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현재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천왕사에 만신창이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안치되어 있는 석상은 바로 천왕봉 성모상(聖母像)이다.
높이 1.2m 너비 50cm의 앚은 자세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이
성모상은 검은 돌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특이한 돌로 만들어졌다.
이승휴는 [제왕운기]에 성모상을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인 위숙왕후의
상이라고 적고 있다. 혹자는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상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민간의 무속적 치성과 경배의 대상물이었던 점에서 삼신할미상,
마고할미상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성모상의 실체를 둘러싼 설이 분분한데 이제는 대체로 '지리산신상'
이라는 데로 학자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1472년 8월 김종직이 천왕봉에 올랐을 때 이 성모상은 천왕봉 정상 성모사라
는 작은 사당에 안치되어 있었으며 다음날 일출이 좋기를 비는 김종직 일행의
고사 대상물이 되기도 했다. 1489년 4월 김일손도천왕봉에 올라 일출을 본
후 역시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모상에 밥과 물 한 그릇을 올리며 집에 있는
노모의 안녕과 무사한 산행을 위해 제문을 지어 기도를 올린다.
물론 김종직과 김일손의 이러한 행동은 모두 성모상을 위숙왕후상이라
여겼기 때문에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모상은 그동안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다.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고려 말 황산대첩에서 이성계에게 크게 패한
왜군이 지리산을 넘어 도망칠 때 분풀이로 성모상의 목을 내리쳤다고 한다.
성모상의 두번째 수난은 1558년(명종13)에 있었다. 키가 8척이고 담력이
뛰어난 천연이라는 중이 천왕봉에 올라 성모 사당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그곳에 안치된 성모상을 밖으로 집어던졌다. 유교는 국가가 아닌 민간에서
올리는 산신에 대한 제사를 음사로 규정하고 매우 배격한다. 그래서 천연의
이런 행동은 결국 성리학자들에게는 극구 칭송할 만한 일대 사건이었다.
남명 조식은 [용사천연전]을 지어 천연의 행동을 칭송하였고 송천 양응정도
역시 시를 지어 칭찬하였다. 특히 32세의 나이로 지리산을 유람 중이던
고봉 기대승은 칠불암으로 직접 천연을 찾아가 그의 행동을 칭송하는
장편의 시를 지어줄 정도로 감격해 한다.
그때 기대승이 남긴 시를 통해 천연의 성모상 파괴의 변을 들어보면 대략
"목이나귀, 겨드랑이에
달걀만한 딴딴한 멍울이 생기는 나력환자와 문둥이, 벙어리, 귀머거리가
몰려와 정성을 바치고 난잡하고 추잡하며 남녀의 외설도 많아서"라고 한다.
당시 성모상의 신통함과 영험함에 의탁하여 질병의 치유를 빌기 위해 여러
환자들이 천왕봉의 성모사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원래 천연은 바로 그전
해에 성모사를 파괴하려 했지만 완력의 무리에 막혀 한 해 늦추었다고 하는데
이는 성모상을 신봉하는 그룹이 적지않게 반발하고 저항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586년 9월 2일 천왕봉에 오른 양대박이 성모상을 마야부인상이라
우기는 성모사 승려와 가벼운 입씨름을 벌였다는기록으로 보아 천연에
의해 파괴된 송모사는 곧 복구된 것 같다.
이로부터 약200년후인 1751년에 이중환이 쓴[택리지]에도 영.호남 지방,
심지어 경기지방의 농부들이 한참 농번기인 늦봄부터 초가을까지 농사도
포기한 채 천왕봉 성모사에 모여 법석댔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1945년 해방되던 해에 성모상은 또 한 차례 수난을 당했지만 인근 삼장면
내원리에서 발견되어 천왕봉에 다시 모셔졌다.
이처럼 온갖 수난을 겪으며 천 년 동안, 기록상에 의하더라도 최소한
500년 이상 천왕봉을 지켜온 성모상은 천왕봉 제자리에 다시 모셔야 한다는
당위론에도 불구하고 여러 현실적 제약 때문에
1986년부터 중산리 785번지 천왕사(주지 혜범에 모셔져 일종의 피난살이와
연금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 1991년 12월 23일에는 비록 초라하지만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4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1988년부터 국립공원관리공단과 천왕사간에 성모상을 두고 공유물 부당
점유에 관한 법정 다툼이 있었지만 1996년 11월에 산청군과 천왕사 측이
천왕사에 보호각을 건립해 협의하에 관리한다는
일종의 중재안으로 대략 마무리된 듯 싶다.
모 종교단체에 의해 미신 또는 우상물이라는 이유로 해코지당할 가능성이
높아 천왕봉에 곧 오를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성모상은 그 누구도 부당하게
점유할 수 없으며 또 천왕봉이 아닌 그 어떤 곳에서도 참의미를 찾을 수
없기에, 어느 때인가는 반드시 천왕봉에 모셔야 할 것이다.
지리산 수호신 聖母像 (성모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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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영산 지리산의 수호신 < 성모상> (聖母像 )
산청군 중산리 ' 천왕사' 에 모셔져 있다.
**마고할미(麻姑할미)는 전설에 나오는 신선 할미로 새의 발톱같이 긴 손톱을 가지고 있으며, 마고할미가 긴 손톱으로 가려운 데를 긁는다는 뜻으로, 바라던 일이 뜻대로 잘됨을 이르는 말로 마고소양(麻姑搔癢)이라 하는데 이때 한자로 마고(麻姑)라고 적듯이 옛부터 전해오는 전설 속의 노파(老婆)를 의미하기도 한다. 세상을 만든 거대한 여신 마고할미의 이야기가 제주도를 비롯 전국에 산재해 있다. 엄청나게 거대한 마고할미가 움직이는 대로 산과 강, 바다, 섬, 성들이 만들어졌다는 전설이 내려온다.박제상이 저술하였다고 알려져 있는 부도지에는 마고성과 함께 탄생한 '한민족의 세상을 창조한 신'으로 설명되어 있기도 하다. 그래서 단군과는 달리 한민족 창세신화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할미이다.
마고할미 상은 높이 74㎝, 얼굴 너비 46㎝, 몸 너비 43㎝의 변성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원래 마고할미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지리산 천왕봉에 모시고 있었다고 한다. 역사의 모진 풍파 속에서 이 성모상도 많은 수난과 역경을 겪었다. 천왕봉 양지쪽에 세워진 사당에 안치되어 만인의 숭앙을 받던 석상이 고려말에 자주 침입한 왜구에 의해 박해를 입은 것이 첫 수난이었다. 지리산을 휩쓸던 왜구 하나가 그 흉폭한 성질을 드러내어 칼을 뽑아서 삭상을 후려치니 석상의 귀와 코가 떨어져 나갔고, 이 왜구는 그 길로 홈바위를 향하여 내려오다가 지렴바위에서 피를 토하고 즉사하였다고한다. 그때부터 그 바위를 피바위라고 부른고 있다고한다. 그렇게 훼손된 석상을 그대로 유지하여 오다가 시멘트가 처음 생산되었을 적에 진주사람 최씨가 시멘트로 결손부분을 보수한 다음 삼장면에 내원암을 짓고, 불상으로 모시고져 운반하다가 그만 석상의 중간 부분을 부러뜨리고 말았다고한다. 이에 다시 시멘트로 보수한 뒤에 절에 모셨는데 그 뒤에 흉년이 계속 들자, 산 아래에 있는 주민들이 최씨를 격렬히 성토하여 100여인이 석상을 다시 천왕봉 원위치로 환봉하였다. 그 뒤에 최씨는 비명횡사를 했다고 전하며, 1972년 어느 날 사라져 버렸다. 그러다 1987년 중산리에 살던 성기용씨가 계곡에서 몸 부분을, 진주시 비봉산 과수원에서 머리 부분을 찾아내 천왕사라는 암자를 짓고 그곳에 지금의 모습으로 모셔두고 있다. 고대 산신숭배의 대상으로 그 영험이 크다 하여 지리산을 수호하는 민간신앙의 여신으로 신라시대 때는 삼산오악신(三山五嶽神)의 하나였고, 고려시대 때는 남악(南嶽)으로 삼아 중사(中祀)에 올랐고, 조선시대 때는 사악신(四嶽神)의 하나로 국가에서 제사를 올렸다고한다. 그래서 이곳 천황사에서도 매년 음력 3월 7일에 천황제를 지낸다.
이 성모상은 신라시대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仙桃聖母)를 국가의 수호신인 지리산 산신으로 모신 것이라고도 하고,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威肅王后)라고도 전합니다
지리산 중산리 버스 정류소에서 두류동 쪽으로 가지 않고 왼쪽 사잇길로
꺾어 5백m 가량 가면 새로이 조성되고 있는 조그마한 절 천왕사가 있다.
이곳에는 지리산을 수호하는 주신으로 1천년동안 천왕봉 꼭대기에 모셔져
천왕봉에 오르던 많은 사람들의 경배를 받아 왔던 성모상이 있다.
이 성모상은 민족의 삼신사상에 기인된 조상숭배의 큰할머니의 상징으로서
지리산 천왕봉 성모에 모셔져 역사의 모진 풍파속에 시달려 온 역정을
유감없이 보여주면서 소박하고 독자적인 조각솜씨가 오랜 세월 민중의
염원을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문창대 (文昌臺)
예전에는 법계사 남쪽 2km지점의 암봉으로 알고 있었으나 1979년 진주산악회 학술조사반에서 법계사 서쪽 헬기장 옆으로 재정립하였다. 근거로 바위에 “고운최선생장리지소”(孤雲崔先生杖履之所), 즉 고운 최치원선생의 지팡이와 짚신을 놓아두었던 장소라는 바위암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문수보살의 지혜가 햇살처럼 찬란하다는 뜻이니 곧 지혜를 구함이다.고운 최치원의 유적지로 잘 알려져 있는 .문창대는,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 법계사에 자주 왕래를 하면서 이곳에 올라 저멀리 서편에 위치한 향적대의 바위에 과녁을 만들어놓고 활을 쏘기도 하였으므로 이곳을 처음에는 시궁대(矢弓臺) 또는 고운대(孤雲臺)라고 하였다가, 최치원이 사후에 받은 문창후(文昌侯)의 시호(諡號)를 따서 문창대로 개칭을 하였다고 전한다. 지리산 문창대를 세간에 처음 알린 사람은 조선중기 영남사림의 중심인물이었던 진주선비 부사 성여신(浮査 成汝信)이다. 그는 1617년 중산리 법계사 코스로 천왕봉을 등정한 후 칠언고시의 형식으로 기록한 ‘유두류산시(遊頭流山詩)’를 통하여 법계사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문창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다.
『황혼 무렵 겨우 법계사에 이르렀네.
(중략...)
동쪽에 걸터앉은 세존봉에는 우뚝한 바위가 사람이 서 있는 듯
서쪽에 문창대 솟아 있으니 고운이 옛 자취 남긴 곳이네.
바위에 고운의 필적 새겨 있다 하는데 험하고 가파른 절벽이라 가볼 길이 없네. (하략....)』
이렇게 성여신에 의해 문창대가 알려지면서 그 이후 칼바위- 법계사코스로 지리산을 등반하고 남긴 여러 선비들의 기행록에 문창대가 등장하면서 법계사 주변의 명소로 자리 잡혀져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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