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동백
바람에 목을 꺾은 뭇 생령이 나뒹군다
해마다 기억상실증 도지는 봄 앞에서
상기된 얼굴을 묻고
투신하는 붉은 꽃들
죽어서 할 참회라면 살아서 진혼하라
산과 들 다 태우던 불놀이를 멈춘 섬이
지노귀 축문을 외며
꽃상여를 메고 간다
고사리장마 . 2
육순 칠순 다 지나도록
긋지 않는 눈물이 있네
산밭뙈기 일구려다 산사람이 되어버린
울 아방 목쉰 울음이 피에 젖던 곡우 무렵
올레 안 울담마저 재가 된 그날 이후
화산섬 산과 들이 꽃밭 밀밭 일구어도
까맣게 타버린 돌엔 화색 다신 돌지 않고
이제 그만 잊으라고
관 뚜껑을 덮으라고
죽창같이 여문 햇살 중산간을 돌아올 때
고사리 어린 손들도 손사래를 치고 있다
그해 겨울의 눈
눈 덮인 한라산은
소복 입은 여인 같다
노루도 발이 빠져 오도 가도 못하는 길을
허기로 감발을 한 채 숨 가삐 뛰던 이들
허공 찢는 총성 앞에
메아리도 비명을 지르고
언 가슴을 후려치던 혹한의 바람 소리
점점이 붉은 피꽃이 눈꽃 속에 피어났다
산으로 간 사람들은
돌아올 줄 모르는데
먼 봄을 되새김하듯 겨울은 다시 와서
곱다시 뼛가루 같은 하얀 눈이 내린다
가시리*
그대 빈 들녘에도 사월의 산담이 있어
가시밭 한뎃길에 나를 두고 가시나이까
곶자왈, 곶자왈 같은
뙈기밭도 못 일군 채
조랑말 뒷발질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고
행기머체 찾아가는 갑마장길 오십 리에
따라비 따라비오름
바람만 우~ 따라오네
막으려고 쌓으셨나, 가두려고 두르셨나
긴 잣성 허물어도 해제 못한 옛 소개령
억세게 머린 센 억새
기다림은 끝이 없네
하늘빛이 깊을수록 그리움도 살찐다는
태우리 눈빛 뜨거운 가시리 가을 앞에
사려도 사리지 못해
타래치는 내 사랑아
*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불카분낭*
화산섬 산과 들이 국방색으로 타오를 때
동백꽃 빛 울음들이 돌담으로 막혀 있는
선흘리 초입에 서면 발바닥이 뜨거워진다
마을 안 올레에는 시곗바늘 멈춰 있다
온몸에 화상 입은 후박나무 늙은 둥치가
곰배팔 가지를 벌려 옛 상처를 보듬는 길
곶자왈 용암굴이 연기 속에 무너지고
별빛마저 소스라치던 그 새벽 그 총소리
나이테 헛바퀴에도 정낭을 걸어야 했다
기나긴 겨울 지나 새살 돋는 나목의 시간
숯등걸 덴 가슴에 봄을 새로 들이려는
뼈저린 나무의 생이 핏빛 놀을 털어낸다
*불에 타버린 나무'라는 뜻의 제주도 토박이말. 제주 4 ·3 당시 군
경 토벌대에 의해 불태워졌다 기적적으로 되살아난 제주시 조천
읍 선흘리에 있는 나무.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에서 고요아침 2024.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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