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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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에 빨치산 이야기를 썼으니 이현상을 빼놓을 수 없다.
이현상은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해인 1905년 전북(현재는 충남)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에서 4남2녀 중 다섯째(4남)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전주 이씨 양반가로 부친은 부농이었던 진사 이면배였다. 그는 중앙고보 재학 중이던 1925년부터 박헌영 등과 함께 공산당운동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1926년에는 6,10만세사건의 핵심인물로 지목되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927년 휴학 중 상하이로 건너가 망명 청년들의 모임 '한인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온 그는 동맹휴학을 주도하여 1928년 8월 구속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일제 식민치하에서 총 12년간의 감옥 생활을 했다.
해방 이후에는 조선공산당 재건에 적극 가담하며, 남로당 연락부장, 간부부장을 맡아 활동하였으나 미군정에 의해 공산당 활동이 불가능해지면서 박헌영 등과 함께 월북한다. 1948년 다시 서울로 내려온 그는 빨치산투쟁을 위해 그해 11월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이후 그는 '조선 인민유격대 남부군 사령관'으로서 지리산 등지에서 치열한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며, 수 많은 전설을 만들어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경상도,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 전역에 인공이 수립되자 부대를 이끌고 지리산에서 하산하여 낙동강 전선 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으나 미군의 인천 상륙과 함께 다시 입산하여 빨치산 투쟁을 전개한다.
1951년 7월 그는 공식적으로 남한 빨치산 총사령관의 위치에 오른다. 그러나 1953년 북한에서는 휴전과 함께 남로당 계열이었던 박헌영, 이승엽 등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된다.
이현상은 평당원으로 강등됨과 동시에 빨치산 지도자로서의 모든 권한을 박탈 당한다.
그리고 1953년 9월 17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의문의 총탄에 맞아 숨진 시체로 발견되어 화개장터 앞의 섬진강변에서 화장되었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그는 평범한 키에 언제나 과묵하고 우수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대원들을 아끼고 매사에 솔선수범하는 지도자였으며, 남부군뿐 아니라 빨치산 모든 대원들로부터 지극한 존경을 받았다.
그는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아니었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혜택을 버리고 혁명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며, 춥고 배고픈 산속에서 죽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한국 현대사에서 그는 가장 고독하고 외로운 영웅이자, 자신의 삶을 불태운 비운의 혁명가였다. 안타갑게도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가 체 게바라는 알아도 조선의 혁명가 이현상은 모른다.
모교인 중앙고등학교 역사 방문관에 가면 이현상의 사진 한 장이 있을 뿐이다. 사실은 중앙고 출신 중에 한국역사에 가장 큰 의미가 있는 인물이지만 모교의 선배를 논할 때 이름 조차 등장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