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선 화(숙희)
눈부시게 풋풋했던 청춘은 보내지 않아도 저 멀리 떠나버렸고 멋스럽고 중후한 또 다른 아름다운 몸짓을 연출하고 계신 동기님들 축하합니다. 원고지 첫 줄부터 “예, 감사합니다. 우리 부산교대 정말 사랑합니다.”로 도배를 하고 교2회 만세 삼창을 하고 싶습니다.
「돌아보면 아득한 먼 길 / 꿈을 꾸던 어린 날들이 / 연줄 따라 흔들려 오면 / 내 눈 가엔 눈물이 고여…」
파란만장했던 격동기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으며 우여곡절 심했던 날들. 때로는 모든 걸 접고 주저앉고 싶었던 순간들을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생을 이어오고 싶었던 힘, 강력한 그 힘의 원천이 무엇이었나?
어느덧 반성문을 쓰는 얌전한 학생이 되어 한 많고 설움 많은 내 인생을 노래 부른다. 나이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나.
그 옛날 석고 데생 제출물은 S양에게 부탁하고 슬그머니 피바디홀 뒷동산에 올라 무심히 흘러가는 저 구름에 한없는 분노와 원망을 실어 보내어도 반항심과 슬픔만 가득 찼었지. 오르간 연습하느라 줄지어 서서 기다리는 급우들을 흘깃 보며 광복동 음악실로 달려가 문 닫을 때까지 죽치고 앉아 음악 감상한 후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곤 했지.
그렇게 시간을 죽이고 있던 날의 점심시간 ○양이 내 팔을 걸며 음악과 교수실로 급히 가자기에 종종걸음으로 갔더니 그 당시 창단된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의 부산시립교향악단 특별기획 연주 ‘베토벤 9번 합창 교향곡’ 연주, 합창을 부산대학생 연합합창단이 하는데 교대 여학생은 너희 둘이라며. 내일부터 방과 후 가서 연습 열심히 하라고 하시며 격려해 주셨다. 나는 어리둥절하면서도 일단 매우 기뻤다. 우와~!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고 하지 않던가!’ 합창 교향곡을 우리가 부른단다. 시향과의 협연으로 최초 공연이라나. 너무나 벅찬 나머지 다음 날부터 지각 않고 등교하고 방과 후엔 어김없이 연습장으로 달려갔다. 남녀 학생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주눅들고 어둡던 마음은 사라지고 틀리지 않도록 애쓰며 부지휘자의 요구대로 수많은 연습곡을 부르며 목청을 틔웠다. 몇 개월 후 본 곡 연습이 거의 되고 시향과 몇 차례 맞춰본 후 드디어 공연 날.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무대에 올랐다.
지휘자가 오태균 교수였었지. ‘베토벤 9번 심포니 오케스트라’야 대단한 게 맞고 우리가 부르는 독일어 노래가 그렇게 멋지고 매끄럽고 유쾌하게 불러지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지금도 그 장면이 기억 저편에서 생생히 되살아난다.
‘다이엘자벨 다이엘자벨 비인데엔 비인덴…알레 맨센 알레 맨센…’ 짠!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지고 객석을 가득 메운 학생들, 가족들 흥분의 도가니. 상기된 얼굴로 서로 손을 맞잡고 성공을 자축하며 감격의 순간을 맛보았다. 교대 온 후 처음으로 괜찮았고 반분이나 풀렸다. 그 때 배운 ‘앱튼강’과 ‘홍하의 계곡’은 지금껏 흥얼거리는 친근한 곡이다. 그 대곡을 훌륭히 소화 했으니 스스로 대견스러워 칭찬받기 부끄럽지 않았다.
그 후 또 한 번 더 ‘쨍!’하고 해 뜰 날’이 찾아왔으니 바로 교생 지방 실습이다. 바다와 산이 있는 곳을 희망하여 통영군의 작은 학교로 가게 되어 비슷한 코드로 함께 일곱 명의 생기 발랄한 가시내들의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어 가족들의 전송을 받으며 출발 ‘부웅!’ 허스키한 뱃고동이 울릴 때 눈물이 나 친구의 핀잔을 들었다.
파도를 가르며 육지 도착 후 아담한 시골 학교에 당도. 심호흡을 몇 번 했다. 교대 공부 안 해도 가정교사로 일류 K여중, K여고에 합격시킨 전력이 있었으니까. 국민학생쯤이야 하는 자신감에 젖어 있던 나였다. 어둡고 구석진 곳 키 큰 나무들로 가려 낮에도 음산했지만 일곱 명이나 되는 대가족이라 통과였다. 큰 방 하나에서 방과 후엔 교재연구와 취사 등 모범생인 울산 S선생은 그 날 과학 공개수업 시의 어조로 냄비에 간장을 따르며 “그마-안”하는 바람에 ‘까르르’ 뒤집어지고 무슨 건수였는지 매일 자지러지게 웃고 떠들고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그야말로 낭만의 청춘 한때를 구가하고 있었다. 전깃불이 없어 밤 화장실 출입이 두통거리여서 참고 있다가 누구 한 사람이 “안 갈래?” 하면 우-따라 나섰다. 나무로 된 복도 바닥이 낡고 삐걱거려 다소 무서운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어쩌랴. 일곱이 나서면 쌍권총을 허리에 찬 듯 뵈는 게 없던 그런 시절이었으니. 비 내리는 어느 날 밤, B양이 “안 갈래”하여 우루루 나가고 나만 달랑 남았다. 그냥 지나칠 수 있나, 장난기 발동! 급히 긴 생머리를 얼굴 쪽으로 쓸어내리고 안경을 쓰고 깜부기 빨간 성냥개비를 입에 물고 삼베 홑이불로 몸을 감싸곤 방문 앞에 우뚝 서 있었다. 한참 만에 방으로 들어서던 친구들이 앗!’하고 모두 쓰러져버렸다. 아뿔사! 비명소리가 하도 커서 사실은 내가 더 놀랬는데….
‘얘들아 귀신 아니다, 내다, 내가 장난쳤다. 놀랬나?” 마구 흔들었다. 얼마 후 무수히 날아 온 주먹 세례 여섯 명의 총공격으로 “미안하다”를 연발해도 계속 때렸다. “웃기려고 귀신놀이를 했어.” 안경이 안 깨어진 걸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며 훗날 학교에서 이 분장을 해 보여 인기 짱이었지. 지금 이 순간에도 웃음이 낄낄낄 나서 배 가죽이 당긴다.
순박한 아이들 앞에서 열정을 쏟아 최고, 최선을 다한 한 달이었다.
그들과의 만남으로 교대 싫어하던 병이 완화되고 치유되었고 새롭게 배우고 얻은 게 아주 많은 값진 산 교육의 기회였다. 어쩌면 교사의 자질이 숨겨져 있었던 게 아닌가….
내 젊은 날은 이렇게 가치 있고 자양분 가득한 날들로 채워지면서 크게 변화되었다.
이후 급여받는 교사 입문.
많은 세월이 물같이 흐르고 내 우직한 정면 돌파의 승부욕 덕으로 부산교대생(고교 부산소재 졸업자) 부산 전입 몇 년 후, 운동장이 부잣집 마당만 한 동래구의 M학교에 근무하던 어느 날 오후, 똑똑똑 노크 소리에 이어 문이 열리면서 잘생긴 정장차림의 청년이 큰 케이크 상자를 끼고 아나운서 같은 목소리로 “선생님, 저 아시겠습니까. B학교 2학년 때 제자 누구입니다.” 하며 고개 숙여 인사하는데 옛 기억을 떠올려 봐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6학년 한번 안 맡았던 내게 2학년 때 제자가 찾아오다니(나는 경쟁을 싫어해 좋다던 때 6학년은 서슬 퍼른 남교사에게 양보했다) 불과 몇 분 정도의 짧은 만남, 종례 참석하러 나가면서 “기다려, 잠시면 돼” “아니오, 다음에는 암소 갈비 대접할게요.” 하고는 흰 봉투를 손에 쥐어주곤 말릴 새도 없이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꿈인가 생시인가? 홀현히 나타나신 문수보살의 화현인가? 제자의 몸을 빌어 혜성처럼 나투시어 구해주고 가신 님이 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나는 남편의 사업 실패로 빚에, 연이어 중병. 아들의 서울사립대학 입학 등으로 생활고에 시달렸으며, 밖으로는 K교감의 권력 남용에 교감과 동문이라는 이유로 왕따를 당해 학교에 가는 일이 도살장에 가 듯 힘든 날들에 쓰러지지 말라고 기적을 일으켜 주셨다.
말 나온 김에 교포(교감 포기) 얘기도 해야겠다.
그 직전 특A급 학교에 근무할 때 어느 날 교장실에 불려갔다. 내 월급은 어떻게 하고, 남편 월급으로 니살림 살면 하면서 교감 승진 운운 하는 그간 소문으로만 듣던 부조리한 승진 관련 말을 교장이 직접하는 것을 듣고 아연실색하고 교포 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M교의 교감은 나와 마주칠 때마다 게으르고 무능해서 교감이 못되었다고 비아냥거리고 무시하며 동학년(5년) 여교사를 괴롭히는 고약함 때문에 내가 항의 섞인 하소연을 그 여교사로부터 듣고 분통이 터졌다. ‘K교감, 잘 들어! 너처럼 더럽게 될까봐 무서워, 까불고 있어!’
93년도, 나는 거의 막차로 해외연수단에 합류하여 인도네시아, 뉴질랜드, 호주 3개국을 방문. 첫 나라인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공항에 도착 입국 절차가 끝났음에도 1시간 넘게 일행을 입국시켜 주지 않아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서 여권을 찬찬히 읽어 보던 중 왈칵 눈물이 솟았다. -「대한민국 국민인 이 여권 소지인이 아무 지장 없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필요한 모든 편의 및 보호를 베풀어 주실 것을 관계자 여러분께 요청합니다.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장관 인」
나는 돈을 벌면 세금을 많이 내어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다.(그 동안 세 번 많이 낸 적이 있음)
어린 시절부터 주욱 부모 사랑 듬뿍 받은 나였지만, 성장통이 특히 대학 시절 심했던 나를 포기하시지 않고 길러주신 부모님!
달님을 올려다보며, 달님! 나직이 불러 봅니다. 웃음을 보이네요. 철부지 시절 보았던 그 달님 맞습니까? 벌써 치매가 왔나…?
‘충신과 역적은 종이 한 장 차이.
세계적인 유명인이 한 말씀 중에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관 뚜껑에 탕탕 못을 박기 전까지는 어떤 평가도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한 글을 읽은 적이 있고, 어느 현자께서는 ‘노년에 배우고 닦지 않으면 늙은 개와 같다.’라고 하더이다.
모교 스승님, 역대 회장님, 동기님, 늘 부족한 제게 음양으로 도움주시는 고마움 잊지 않고 간직하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