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건적의 고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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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적들은 두 차례에 걸쳐 고려에까지 침범하였다.
1359년(공민왕 8) 음력 12월, 모거경(毛居敬)이 이끄는 4만여 명의 홍건적이 얼어 붙은 압록강을 건너 의(義)·정(靜)·인(麟)·철(鐵)의 4주(州)를 함락시키고, 이어 서경을 점령하였다. 1360년 음력 1월 하순, 고려군은 2만명의 병력으로 서경 탈환을 시도했다. 비록 고려군 사상자가 1천여 명에 달했지만, 홍건적은 수천 명이 전사하면서 서경을 버리고 북쪽의 용강과 함종 방면으로 퇴각했다. 그 뒤 다시 추격을 당하여 압록강을 건너 도망한 적은 3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다.
그 뒤에는 수군으로써 황해·평안도의 해안지대를 산발적으로 노략질하다가, 1361년(공민왕 10) 음력 10월, 원나라의 대대적인 공세에 밀린 홍건적은 하북 지방으로 퇴로가 차단되자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2차 침공의 주역은 반성(潘誠), 사류(沙劉), 관선생(關先生), 주원수(朱元帥) 등이며, 병력은 20만 명이었다. 이때 홍건당에서 주원장이 두각을 나타냈다. 홍건적은 음력 11월 11일에 절령(岊嶺 : 자비령)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고 수도 개경(開京)에 육박하여 왔다. 이에 공민왕 및 왕실과 정신(廷臣)은 남쪽인 복주(현재의 경상북도 안동)로 파천하게 된다. 왕가(王駕)가 이천에 도착하던 날 홍건당은 개경을 함락하고 온갖 만행을 다하였다. 그러나 홍건당은 개경 입성 후 2달간 주둔하면서 더 이상 남진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홍건적이 개경에서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중에 고려는 전국적으로 20여만의 병력을 모병했다. 복주에 있던 공민왕은 그해 음력 12월경에 정세운을 총병관(총사령관)으로 삼았고, 정세운은 1362년 음력 1월, 동교 천수사(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소재)에서 안우, 이방실, 이여경, 최영, 이성계, 김득배(金得培) 등에게 20만의 병력으로 개경을 포위하도록 했다.
전의가 꺾인 홍건적은 이 두 갈래 길로 개경에서 도망쳐 그대로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후퇴했다. 고려군은 그들의 퇴로를 열어준 채 계속 추격하여 홍건적을 끊임없이 괴롭혔으며, 여름에 수장인 파두반을 사로잡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공민왕과 고려 조정이 개경을 떠난 이후 음력 11월 24일에 개경에 입성했다.
이성계는 휘하의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친병 조직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그는 선봉에서 적장들에게 직접 공격을 가하여, 마침내 홍건적의 괴수 사유(沙劉)와 관선생(關先生)을 죽이고, 수도에 제일 먼저 탈환해 입성하는 큰 전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냈다.
이로써 2차에 걸친 홍건적의 난은 끝나게 되었는데, 앞서 중국의 북서에서 만주 방면으로 진출한 홍건적의 무리들은 고려에서 전멸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난은 고려에도 막대한 타격을 주어 국운을 쇠퇴케 하여 고려 왕조의 멸망을 재촉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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