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예술 기행을 시작하기 전 일찍 도착해서 찾아간 곳. 통의동 백송이 있는 지역이 추사 김정희 선생이 사셨던 곳이다.
필운대는 조선 시대 봄철 꽃구경을 할 수 있는 뛰어난 곳으로 현재 배화여자대학(배화여고) 학내에 있다. 권율 장군의 사위인 백사 이항복(1556~1618)이 이곳에서 처가살이를 하였다. 석벽에 새긴 필운대 세 글자는 이항복의 글씨이다. 필운은 이항복의 또 다른 호이기도 하다. 필운은 상서로운 구름이란 뜻
필운대 앞에서 박수호 시인과 함께 인증 샷
장진엽 성신여대 교수가 열심히 해설하고 있다
이항복의 9대손 이유원(1814~1888)이 1873년(고종 10년)이 이곳에 찾아와 석벽에 7언 절구시를 새겼다. 아조구거후예심(조상님이 예전에 사셨던 곳에 후손이 찾아오니) 창송석벽백운심(푸른 소나무와 바위벽에 흰구름만 깊구나) 유풍부진백년구(백 년이 흘렀어도 유풍은 가시지 않아) 부로의관고역금(옛어른들 차림새가 예나 지금이나 같네) 계유월성이유원제백사선생필운대(계유년(1873년, 고종10년) 월성이씨 이유원이 제하다. 백사이항복 선생이 사시던 곳 필운대에서)
위항시인 천수경(1758~1818)이 지금의 옥인동 47번지에 초가집 한 채를 지어 송석원( 소나무와 바위의 집)이라 이름지었다. 이곳에서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옥계시사(송석원시사)' 라는 시동인을 조직 창작 활동을 하였다. 위항이란 '구불구불한 마을의 골목길'이란 뜻으로 이런 곳은 주로 중인(양반과 평민의 중간 계층인 역관, 의관, 화원, 율관 등 기술관)들이 모여 살았다. 그러니까 위항(=여항)문학의 중심은 중인들이었다. 지금의 서촌은 위항문학의 중심지였다. 위항 시인 중에는 노비도 있었는데 노비일지라도 한시를 잘 지을 경우 신분을 초월하여 그를 존중해 주었고 양반집의 가정교사로 초빙되기도 했다. 화가 이인문은 천수경과 절친으로서 산수화의 대가였다.
시인 천수경이 죽고 난 후 송석원은 해체되었고 이 자리에 윤덕영(1873~1940)이 벽수산장을 지어 송석원이라 하였다. 윤덕영은 순종 황제의 비인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로 1910년 한일합방 당시 순정효황후(해풍부원군 윤필영의 딸)가 치마폭에 옥새를 숨기고 내어주지 않으려 하자 강제적으로 빼앗아 내각총리대신인 이완용에게 넘겨주었다. 윤덕영은 1910년 2만 여평의 땅을 매입 '한양의 아방궁'이라 할 정도의 호화로운 집인 벽수산장을 지었다. 벽수산장은 1966년 화재로 전소되었고 위 기둥은 벽수산장의 정문 기둥으로 100년이 된 것이다
벽수산장 아치문의 잔해
세종아파트 주차장 내 오홍교의 난간 중 2개만 남아 있음
100여 년이 된 윤덕영의 소실댁으로 올라가는 계단
윤덕영의 소실 이성녀가 살았던 집의 일부. 지금은 관리가 안 되어 퇴락한 상태이다
2019년 2월 옥류동이라는 바위글자가 발견됐다. 이 글씨는 우암 송시열의 필치라고 한다
서울예술기행에 참여한 사람들
청풍계엔 장동 김씨(안동 김씨가 서울 장동에서 살았다고 해서 그렇게 부름)가 모여 살았는데 그중 김수항의 넷째 아들 노가재 김창업이 살았던 집. 사람들이 들여다 보고 있는 곳은 우물터인데 1950년 대까지 식수로 이용했던 가재 우물이다. 가재 우물 바로 밑에 청휘각이란 정자가 있었고 또 그 아래에 육청헌(김수항의 아들이 6명)이라는 집이 었었다고 한다
1937년 윤덕영이 딸 부부를 위해 지어준 양옥과 한옥의 절충식 건물. 화가 남정 박노수(1927~2013)가 1973년에 매입하여 타계할 때까지 거주하였다. 그는 2011년 이 집과 자신의 작품을 종로구에 기증히였고 2013년부터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박노수 미술관 자리 또는 그 주변이 천수경의 송석원이 있던 곳이 아닌가 추정된다.
윤동주가 하숙했던 곳을 찾았다
인왕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 물소리가 우렁차다고 해서 수성동 계곡이라 했다. 이곳에 안평대군의 '수성궁'이 있었다고도 한다. 수성궁은 안평대군의 궁녀를 주인공으로 삼은 비극적 사랑 이야기인 '운영전'의 배경이기도 하다. 위 그림은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이란 그림인데 가운데 있는 다리는 기린교라 한다.
첫댓글 다시 본 곳도 있었지만
경복궁에서 수문장 교대식은 계획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본 인상깊었던 장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