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연쇄 살인의 7번째 사건이 발생합니다.
88서울 올림픽을 불과 열흘 앞둔 1988년 9월 7일
장남이 운영하는 수원시내의 분식집에서 일을 돕고 밤 8시 40분경 수원극장 맞은편에서 발안행 시내버스를 타고 가재리에서 내려 야산을 넘어가기 위해 양쪽으로 논이 있는 수로를 걸어 소하천을 건넌뒤 야산을 넘으려던 안기순씨...
그녀는 범인에게 납치되어 미루나무가 있는 위쪽으로 끌려 올라가 비참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안기순씨의 남편은 그녀가 버스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밤새도록 기다리다가 친척들에게 연락을 하고 날이 밝자마자 안기순씨를 찾아 나섭니다.
그들은 버스정류장 일대를 샅샅이 뒤지다가 남편의 사촌동생 백모씨에 의해 푹숲에 피가 흥건히 흘러내린 채로 반듯하게 눕혀져 있는 그녀의 시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고를 받고 수사본부에서 출동한 형사들의 육안검시로...
그녀의 양손이 블라우스로 묶여 있고 입에는 양말과 손수건으로 재갈이 물려 있었으며, 사인은 블라우스 끈으로 목이 졸려 살해된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드러났고 당시 입고 있던 쥐색 치마는 다시 입혀진것을 알아냅니다.
그녀의 시신은 너무나 처참하였습니다.
현장에서 국립과학수사 연구소의 감정전문가들과 치안본부의 감식 전문가들이 여러가지 유류품을 수거한 뒤에 시신을 국가수로 옮겨 부검하게 됩니다.
부검 결과 안기순씨의 국부에서 복숭아 먹던 것이 나오게 됩니다.
한마디로 범인은 범행 당시 안기순씨를 납치하여 추행한뒤에 목을 졸라 살해하고 그 옆에서 태연히 복숭아를 먹다가 이와 함께 양말을 국부에 집어 넣고 우산대로 낭행을 한것입니다.
이러한 범인의 천인공노할 범행에 당시 형사들은 범인이 악마라는 것을 깨달아 더욱 비장한 각오로 수사에 임하게 됩니다.
당시 시신이 발견되 현장에서 경찰의 통제로 안기순씨에게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고 가족들은 오열합니다.
목격자 탐문수사 끝에 수원시 세류동에 살고 있던 22세의 김모씨가 현장 주변에서 배회했다는 주민의 진술을 확보한 형사들은 사건 당일의 행적을 집중적으로 추궁하나 김모씨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인이 여럿 나타나면서 사건은 다시 범인의 윤곽조차 잡을 수 었던 원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어수선한 가운데 올림픽이 시작되고 신문과 방송등의 언론을 통해 연일 무능한 경찰이라는 질책과 집중포화가 계속되자 결국 화성 경찰서장이 문책을 당하고 교체됩니다
화성 연쇄 살인사건이 마지막으로 있었던 일곱번째 피해자 인기순씨 사건이후 14개월 동안 공식적인 화성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하지 안았습니다.
어느정도 안심을 하고 있던 주민들은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가고 있었으나 밤에 외출하는 것은 여전히 두려워 했고 여자들은 해가 지면 귀가를 서둘렀으며, 우범지역이나 인적이 없는 야산과 들판에 대한 셩찰의 순찰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 1990년 11월 15일 화성연쇄살인사건의 8번째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때대본에서 '범죄와의 전쟁' 구호가 , 그때 당시 노태후 전 대통령 범죄와의 전쟁 선포]
(10월 13일부터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헌법이 부여한 모든 권한을 동원해 폭력조직을 전면 소탕할 것을 선언하였다.)
화성군 태안읍 능리에 살고 있던 김미정양(당시 14세)이 집에 가족의 생일로 음식까지 차려놓았는데도 밤 9시가 넘어서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자 가족들은 공포에 휩싸이게 됩니다.
밤 8시가 넘자 학교 친구에게 연락하기도 하고 경찰에 가출신고를 하기도 한 가족들은 9시가 넘자 불안에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인천에 사는 동생들에게 빨리 와 달라고 부탁하게 되었고 그렇게 김미정양의 친척들이 자정이 넘어서 인천에서 능리의 집까지 도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직 완전히 실종이 아닐 수도 있으니 기다려보자고 말하며 밤중이라 전경들을 동원할 수 없었던 경찰 대신 김미정양의 가족들과 친척들은 능리에서 병점리 삼성석재가 있는 곳까지 오가며 그녀를 찾아나서게 됩니다.
그렇게 11월 16일 아침까지 수색은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삼촌인 김모씨에 의해 태안읍 병점5리의 야산에서 하얀 속바지와 상체에 교복이 덮인 채 죽어 있는 김미정양이 발견됩니다.
이 야산은 경찰이 초소에 배치되어 지나가는 여자들을 보호해주는 곳으로, 낮에는 철수하지만 밤에는 경찰이 항시 배치되기 때문에 충격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시체는 양손과 양발이 검은색 스타킹으로 뒤로 묶여 있었고 잎에는 브래지어로 재갈이 물려 있었으며 사인은 스타킹과 블라우스로 인한 교살로 밝혀집니다.
또 상체는 옷이 벗겨져 있는 상태였고 하체는 힌색 속바지가 입혀져 있었으며 스커트와 교복은 벗겨져 시체에 덥여 있었습니다.
김미정양 사건에는 국과수 요원들이 직접 투입되어 증거물들을 찾게 되었고 다행히도 모발을 40여개나 수거할 수 있었고 그중에 하나는 힌색이었으며 상의와 양말에서 정액이 검출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시행된 부검에서 시신의 가슴에 칼로 난자한 상처가 여러곳에 있었고 수저, 포크, 볼펜을 질 내에 삽입한 흔적도 찾을수 있었습니다.
또 위장안에는 소화되지 않은 잡채가 발견되었는데, 이 잡채는 완전히 소화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살해되기 두 시간 이내에 잡채를 먹었다고 볼수 있는데 당시 가족 중 11월 15일에 생일이 있었기 때문에 김미정양은 아침에도 잡채를 먹고 점심에도 잡채를 싸가서 학교에서 친구들과 먹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점심때 먹은 잡채는 이미 완전히 소화되기 때문에 적어도 저녁 7시경에 먹은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집요한 탐문수사에도 이와 관련한 것을 밝혀내지 못해 경찰은 국과수의 부검이 잘못된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하게 됩니다.
어떤 음식물이든지 일단 뱃속에 들어가면 강력한 위산이 분비되기 때무에 2시간 이내에 소화되므로 피해자는 어디선가 잡채를 먹은것이 확실하다라는 국과수의 단호한 반박을 받게 됩니다.
다만 범인이 김미정양을 납치한 후 그녀의 소지품을 뒤지던중 도시락을 발견하고 남아있던 잡채를 먹게하는 비정상적이고 사이코적인 짓을 했을수도 있다는 추리가 가능합니다.
피해자 주변에는 전에 없이 많은 유류품이 남아 있었고 시신이 일찍 발견되었기 때문에 유류품 수거도 쉬웠으며 여러가지 검사도 할수 있었습니다.
도시락에는 식별할 수 있는 지문도 채취되어 만약 범인이 검거되면 증거로 대조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부검결과 범인의 혈액형은 B형이라고 밝혀졌으며 수거한 모발등으로 유전자 조사까지 마쳤기 때문에 경찰은 조금만 수사하다 싶으면 유전자 대조로 범인을 검거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지만 광범위한 수사본부의 수사에도 끝내 범인은 잡히지 않게 됩니다.
당시 오솔길 앞에 세워져 있던 초소에는 경찰이 배치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곳은 김미정양이 오후 5시경 학교에서 나와 친구인 이모양과 함께 병점 초등학교 앞에서 헤어져 집으로 귀가하다 사고가 난 지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