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미궁의 수수께끼
"반장님, 이것 좀 보세요."
강형사가 이마의 땀을 찌든 손수건으로 훔치며 봉투에 든 것을 내놓았다.
"이 사람아, 무엇을 하고 다녔기에 한여름도 아닌데 땀을 그렇게 흘려."
추경감은 강형사가 내놓은 봉투를 집어들었다.
"몸이 허해서 그렇습니다. 밤낮 그놈의 고물차 타고 이곳
저곳 헤매다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하니까 그렇잖습니까?"
"왜 밥을 제대로 못 먹나?"
"경감님도 참, 제 봉급이 얼만지나 아십니까?
호텔 같은데가서 밥 한 끼 먹자면 6만원 한답니다."
"쯧쯧."
추경감은 더 상대 않고 봉투에서 열쇠 하나를 털어냈다.
"아니, 이게 뭐야?"
"그게 보시다시피 열쇱니다."
"근데 왜 이렇게 조잡해. 가짜 열쇠 같은데?"
"헤헤헤, 열쇠가 가짜 진짜가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반
장님 말씀이 틀린 건 아닙니다. 그 열쇠는 본을 떠서 만든 모조품입니다."
강형사가 열쇠를 집어 모서리의 거친 부분 등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은 고회장집에서 나왔습니다.
그 골동품 로마 병정칼이 있던 방의 열쇱니다."
"뭐야? 그게 어디 있다가 이제 나왔단 말이야?"
추경감이 다시 열쇠를 뺏다시피 쥐고는 살펴보았다.
"그것은 회장과 최화정 여사가 쓰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본
떠 만든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미테이션이라는 거죠.
누군 가가 필요할 때 그 골동품 보관소로 들어가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지요.
그 열식를 만든 사람이 로마 병정 칼을 홈쳐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죠."
강형사는 왼팔을 허리에 짚고 서서 아주 자신 있는 말투로 설명했다.
"그래 이게 어디 있었단 말인가?"
"그게 어디 있었느냐 하면 놀라지 마십시오. 고정혜와 정정필의 방에서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미심쩍은 데가 있어서 그 집을 다시 찾아가 그들이 거처하는 방에 들어가
보았지요.
이것이 그들의 침실에 있는 스탠드 밑에 있었습니다. 감쪽같이 숨겨두었다고 생각했겠죠."
"뭐야? 아니, 그럼 강형사가 영장도 없이 그 집 침실을 뒤졌단말야?"
"예."
"이거 큰일 났군. 또 국장님에게 야단맞게 생겼네.
어쩌자고 그래 쯧쯧. 또 인권 침해니 어쩌니,
이게 몽둥이 경찰이냐 민주 경찰이냐 하고 시끄럽게 생겼어. 아니 강군, 그 집이 뉘집인가?"
"뉘 집은요, 돈으로 도배를 한 명왕성 그룹 회장님 댁이 지요."
강형사가 능글능글하게 대답했다.
"지금 농담하는 것 아니야!"
"반장님, 염려 마십시오. 국장님 전화는 안 올 겁니다.
내가 고정혜 여사, 즉 방주인한테 양해를 얻고 수색을 한 것이니까요."
"정말이야?"
그제야 추경감도 얼굴을 펴면서 누그러졌다.
"그래, 이게 그 침실 스탠드 밑에서 나왔단 말이지?"
"내 처음부터 그 부부가 수상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들이 골동품방 열쇠 모조품을 만들어 놓고 기회를 본 거죠.
마침내 D데이. 집으로 돌아온 정혜, 아니면 정정필이 골동품 방에서 로마 칼을 꺼내다
설희주를 살해하고,
마치 자기 오빠가 한 것처럼 하기 위해 와이셔츠에 피를 묻혀 침대 밑에 처박아두었지요."
"근데 왜 하필 로마 칼을 꺼내다 그랬을까?"
추경감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강형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하는 버릇이었다.
"그야 뻔하지 않습니까? 골동품방 열쇠를 마음대로 쓸 수있는 사람은 고회장과
최화정 여사 밖에 더 있습니까? 아버지를 범인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을 것이고,
최화정이 범인인 것처럼 하기 위한 수작 아니겠습니까?"
"그럴까?"
추경감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똑 떨어진 장이야 아닙니까? 고정혜와 정정필은 그게 외통수라고 생각했겠죠."
"그렇다면 그 열쇠는 다시는 못 찾는 곳에 버리지 왜 자기방 스탠드 밑에 감추어 두었을까?
강형사가 찾아내라고 그런거야?"
추경감이 아픈 곳을 찔렀다.
"반장님, 그야 그럴 수 있지요. 늘 그곳에 숨겨 두었으니까 사람을 죽인 뒤도 당황해서
원래 있던 곳에 가져다 두게 되죠. 습관적으로 말입니다."
"습관치고는 고약하군. 후후후."
추경감은 혼자 웃었다. 그러나 강형사는 사뭇 진지한 얼굴이었다.
"아무튼 그 열쇠를 찾아낸 것은 중요한 일이야.
강형사 말이 맞는지 어썬지 좀 조사를 해 보자구."
추경감은 열쇠를 다시 비밀 봉투에 넣은 뒤 그것을 호주
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갔다. 강형사도 뒤따라 나갔다.
그들은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고정혜와 정정필이 63빌딩 스카이 라운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다.
고정혜와 정정필은 양주 칵테일을 한 잔씩 놓고 창가에 앉아있었다.
부부가 나란히 앉아 술을 마시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없는 정경이지만 그리 보기 싫지는 않았다.
무슨 이야기인지 고정혜가 열심히 말을 하고 있고, 정정필은 몸을
느긋하게 뒤로 젖힌 채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가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기도 했다.
"이거 오붓하게 한잔 기울이는데 미안합니다. 방해꾼이 나타나서."
추경감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며 그들 옆의 빈 자리에 앉았다.
강형사도 꾸벅 인사를 한 뒤 엉거주춤 따라 앉았다.
뜻밖의 두 기습자를 본 두 사람은 놀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곧 표정을 감추고 아주 불쾌하게 고정혜가 쏘아붙였다.
"왜들 이러는 거예요? 무엇 때문에 선량한 사람을 괴롭히는 거에요?"
"이거 미안합니다."
추경감이 다시 일어나 고개를 숙여 보이며 사과를 하고 앉았다.
"당신들 이거 못쓰겠구먼. 우리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요? 오라,
우리를 미행하고 다녔군. 여보슈,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수?"
정정필이 칵테일잔을 든 손으로 삿대질을 했기 때문에 술이 찔끔찔금 흘렀다.
"아,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냥 여기 들렀다가 마침 두 분이 계시기에 인사나 하고 가려고."
추경감이 변명했다.
"그건 오햅니다. 우리는 정실장님을 미행한 것이 아닙니다."
강형사도 거들었다.
그들이 미행하지 않았다고 딱 잡아떼자 고정혜와 정정필의 얼굴이 약간 풀어졌다.
"그러시다면 뭐 한잔 하시지요."
정정필의 태도가 변했다. 추경감은 진토닉을, 강형사는 싱가폴슬링을 각각 주문했다.
"범인은 잡았어요?"
고정혜가 물었다.
"아직. 좀 도와주십시오."
추경감이 재빨리 말꼬리를 잡았다.
"우리가 뭘 도와줍니까?"
고정혜의 말을 강형사가 되받았다.
"그 열쇠 말입니다. 골동품방을 열 수 있는."
"이봐요, 그건 몇번이나 말해야 곧이 들어요. 그게 우리 방에서 나온 건 인정해요.
하지만 우린 그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그랬잖아요. 우린 아녜요."
갑자기 그녀가 신경질을 냈다.
"이 사람들 고약하군. 선량한 사람들이 한잔 즐기는데 나타나 협박하는 거야 뭐야!"
정정필도 다시 펄쩍 뛰었다.
"아아, 흥분 가라앉히세요, 우린 다만."
"다만 뭡니까? 우리는 그런 열쇠가 있는지조차 몰랐어요."
"그래요! 누군지 우리에게 혐의를 씌우려고 함정을 판 거예요. 전혀 당치도 않아요!"
부부는 번갈아 펄펄 뛰었다.
"이 열쇠에 대해 모르신다니 더 묻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한가지만 더 물어봅시다.
그날, 사건이 있던 날 두 분은 대관령 호텔에 있었다고 하셨죠?"
추경감이 딴 문제를 꺼냈다.
그들이 너무나 펄쩍 뛰면서 떠들었기 때문에 방향을 바꾸려고 한 것이었다.
"그래요. 거기 있었어요. 그것은 조사해 보세요.
우린 대관령 콘도에 가라고 아버지가 말씀했지만 설희주 보기 싫어 호텔에 있었어요.
설희주는 뒤늦게 우리가 그곳에 간것도 몰랐을 거예요. 거짓말인지 조사해 보세요.
대관령 호텔에 하루 종일 있은 사람이 서울 와 있는 설희주를 어떻게 찔렀는지."
고정혜는 입을 삐죽거리며 이야기했다.
"이미 조사해 보았습니다. 당신 부부는 그날 새벽에 그곳을 나왔더군요.
그것도 프런트에 열쇠를 맡기지 않고 말입니다. 뒷문은 널찍하던가요?"
강형사가 비꼬아 주었다.
"프런트 직원이 졸고 있어서 깨우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리가 현금 계산 하면서 그런 곳에 드나들지 않는다는 것은 아시겠죠?"
고정혜의 말이었다. 고회장네 가족쯤 되면 그들이 드나드는 곳에서는 월말 단위로
청구서가 가지 일일이 지불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로열 패밀리에 대한 예우였다.
"그리고 어디로 가셨습니까, 곧장 서울로 오시지 않았다면?"
"아, 뭐 이왕 놀러 간 것 이곳저곳 좀 돌아다니며 놀았지요."
정정필이 머리 뒤통수를 슬슬 긁으며 말했다.
말을 마치자 입을 꽉 다물어 보였다. 두툼한 턱 한가운데 깊은 보조개가 패였다.
추경감은 그의 턱이 유명한 미국 배우 커크 더글러스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알리바이 만들려고 그렇게 하신 건 아니겠지만, 송어횟집, 오골계탕집 등을 들르셨더군요."
강형사가 두 사람의 표정을 날가롭게 관찰하며 말했다.
"보신탕, 아니 사철탕 잘 하는 집도 있었는데 이 사람이 싫다고 해서 그만두었지요."
정정필은 강형사의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급히 나갔더군요.
송어횟집에선 회만 먹고 매운탕을 끓이는 시간에 계산을 치르고 나갔더군요. 맞습니까?"
"이 양반 별 시비를 다 거네. 남이야 매운탕을 먹건 말건 그게 무슨 문젭니까?
솔직이 송어 뼈다귀 매운탕 그거 뭐 맛이 있습니까?"
"비린내나는 기름이나 둥둥 뜨고."
고정혜도 콧잔등을 찡그려 보였다.
"하기야 출출할 때는 한번쯤 먹을 만하기도 하지요."
정정필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앞이야기를 뒤집는 말을 계속 했다.
"먹을 만은 한데. 아, 매운탕이야 소주가 있어야 하는것 아닙니까?
그런데 소주 대작할 상대가 있어야 말이 죠."
"왜, 부인께선 술을 못 하시나요?"
추경감이 물었다.
"마누라랑 무슨 재미로 대작을 합니까? 대낮부터."
정정필이 추경감을 향해 귀엣말처럼 했다.
"이 이가."
그러나 귀밝은 고정혜가 가만 있지 않고 핸드백으로 정정필의 등을 툭 건드렸다.
"우리집 사람은 실은 양주 체질이 되어서 소주는 잘 못마십니다."
"횟집에 양주는 없었나요?"
추경감이 부부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술 논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소주면 어떻고 양주면 어떻단 말입니까."
강형사가 불평했다.
그 불평은 두 부부가 노닥거리고 있는데 추경감이 왜 거들고 있느냐는 항의의 뜻이 담겨 있었다.
"사실은 집사람이 가끔 운전을 하거든요.
요즘 음주 운전 했다간 큰일 나지 않습니까? 저는 10년 전에 운전면허를
땄습니다만 지갑에는 주민등록증밖에 없습니다. 집사람한테 압수당했거든요."
"운전수는 어떻게 되었나요?"
"요즘 부부끼리 놀러 가는 데까지 기사 달고 갔다간 노조한테 얻어맞기 꼭 알맞죠.
운전은 집사람이 했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무슨 자동찹니까?"
"그랜졉니다."
"노클러치입니까?"
추경감이 입을 헤 벌리고 물었다. 선망의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반장님, 이제 또 자동차 논쟁 하시려는 겁니까? 그런 건
우리 수사하고 아무 상관 없는 일입니다."
강형사가 울화통을 터뜨리며 정면으로 추경감을 비난했다.
"노클러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클러치차는 운전할 때 손이 심심해서 재미 없다고."
정정필이 강형사의 핀잔은 아랑곳하지 않고 추경감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러나 중간에 고정혜가 그 이야기의 허리를 끊어버렸다.
"모르는 소리 마세요. 노클러치가 얼마나 편한지 아세요?"
"나 참!"
강형사가 더 못 참겠다는 듯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그는 추경감을 흘깃 보고는 도로 앉았다.
"나도 빨리 운전을 배워야겠는데."
추경감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당신들은 그 횟집을 나와서 그 담에 어딜 갔어요?"
강형사가 나서서 다그치기 시작했다.
"다 조사했다면 말해 보세요. 틀리면 고쳐 드릴께요."
"좋아요. 내가말하죠. 당신들은 그 길로 고속도로로 나와 서울에."
"틀렸어요."
정정필이 말을 받았다.
"거기서 고속도로로 곧장 가지는 않았어요. 집사람이 요
전번에 우리가 사다 드린 무공해 조선 상추를 회장님이 잘 드신다고해서 우리는
용계리로 갔지요. 거긴 비닐 하우스 재배 단지가 있거든요."
"상춘지 뭔지는 모르지만,
당신들은 하여간 서울로 온 뒤에 우선 설희주가 집에 와 있는지를 전화로 확인한 후
곧장 집으로 갔지요. 식구들마다 가지고 있는 비상 키로 대문을 열고 들어갔지.
현관 문은 버튼식 키니까 문제 없이 암호 숫자를 눌러 들어갈 수 있어요.
가수는 노래하느라 바쁘고, 가는 귀 먹은 가정부 수원댁은 세탁기 돌리느라
바빴고 말이죠."
"말도 안 돼요!"
"개도 밤낮 드나드는 식구니까 짖을 턱이 없고,
전자 감응장치도 가족에겐 삑삑거리지 않지요. 두 사람은 간단히
설희주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지요.
아니, 침실로 가서 스탠드 밑에있는 로마 병정 칼을 가지고."
"재미있군요. 강형사님, 혹시 학생 시절에 연극반 하시거나 소설 공부 안 하셨어요?"
고정혜가 조금도 질리는 기색 없이 말했다.
"그냥 해본 이야깁니다. 설마 그렇게야 했겠습니까?"
강형사가 슬그머니 발뺌을 했다. 자기도 너무 심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더 계속해 봐요. 그래 가지고 우리가 이 사람 올케,
아니 처남댁을 찔렀다 이겁니까? 각본은."
"아니지요. 내가 그 연극 대본을 쓴다면 대뜸 찌르게 하지는 않죠.
그러면 비명 소리가 나고 식구들이 달려오면 곤란해진다는 것을 누군들 모르겠습니까.
일단 설희주에게 적의를 감추고 무언가 부드러운 구실을 붙여 안심시킨 뒤에
수건같은 것으로 한 사람이 입을 틀어막고 또 한 사람이 가슴을 찔렀지요.
칼잡이 출신이 아니니까 몇번 연거푸 찌르는 중에 어느 한번이 치명상을 입힌 겁니다.
그리고 큰처남 고봉식의 와이셔츠에 피를 묻혀 침대 밑에 넣은 뒤
로마 병정 칼의 지문을 닦아내고."
"호호호, 재미있군요."
고정혜가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약간 공포에 질린 듯했다.
"그런데 작은 처남이 들었다는 비명은 무슨 비명입니까?
그리고 그 비명 소리를 듣고 뛰어 내려왔다는데 우리는 그때 아라딘의 램프로라도
들어갔단 말입니까?"
정정필이 의문을 제기했다.
"도망갈 수도 있지요."
강형사가 자신 없이 말했다.
"여보슈, 소설 쓰시려면 좀 똑똑하게 쓰시요.
방금 와이 셔츠에 피를 묻히고 어쩌구 했지 않습니까? 처남댁이 비명을 지른 것은 죽기
전일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뒤에 피를 묻히고어쩌구 할 텐데 언제 도망을 갑니까?
봉길이가 2층에서 뛰어 내려오는 데 몇분이나 걸렸답디까?"
"그 비명이 문제입니다. 설희주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는지도모릅니다.
아니면 범인들이 고봉길씨와 짜고 한 일이 거나?"
강형사는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정실장님 부부가 의심스럽다는 것은 아닙니다. 강형사가
답답하니까 한번 헤본 소리에 불과한 겁니다. 뭐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추경감이 수습을 하느라 온갖 말을 다 했다.
"조용히 즐기시려는 데 죄송합니다. 자, 강형사, 우리는 그만가지."
추경감이 강형사의 등을 떠밀다시피 하고 다른 좌석으로 옮겨갔다.
"왜 자신도 없는 말을 함부로 하는 거야?"
정정필 부부와 멀리 떨어진 좌석에 자리를 잡은 추경감이 은근히 나무랐다.
"틀림없어요. 저 남녀가 죽인 것이 틀림없단 말입니다.
아니,그 열쇠가 확증 아닙니까? 다만 비명 소리가 좀 ."
"확증은 무슨 확증이야. 사람 찔러 죽이는 데 쓴 열쇠를
자기 방에 가져다 감추어 둔단 말인가?"
"얼마는지 그럴 수 있지요."
그때였다. 웨이터가 다가와 주문을 요청했다.
"여기 뭘 팔지요?"
추경감이 미소진 얼굴로 웨이터를 쳐다보았다. 웨이터는
별 촌스런 사람도 다 보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뭐든지 있습니다. 위스키, 스카치, 꼬냑."
"칵테일 있나요?"
강형사가 물었다.
"얘, 거기 메뉴를 보시죠."
웨이터는 테이블 위에 있는 두툼한 메뉴 책을 가리켰다.
"난 레이디 핑크!"
강형사가 자신 있게 말했다.
"예?"
웨이터는 다소 의외란 듯이 쳐다보았다.
"난 진토닉 한 잔 주게."
추경감이 점잖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안주는 말야, 비프 스테이크를 잘게 썬 것 있지?
아니, 그것 말고 야채 사라다 한 접시."
"알겠습니다."
웨이터는 더 상대를 않고 가버렸다.
"이봐 강형사, 핑크 뭔가 하는 것은 여자가 마시는 술이야."
추경감이 나직하게 말했다.
"뭐, 칵테일 이름이라고는 그것밖에 모르는데 그럼 어쩝니까?"
"그 어려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추경감이 다시 속삭이듯 말했다.
작년 반포 사건 수사할 때 그 집 사모님과 스카이 라운지로갔죠. 수사하려고요.
근데 맥주 한 병을 청했더니 그녀는 못마땅한 얼굴로 레이디 핑크 하지 않겠어요."
"후후후."
추경감이 목소리를 죽이고 웃었다.
"경감님, 웃지 마세요. 지금 우리가 시킨 술값이 얼마나 비싼지나 아세요?"
강형사가 추경감의 기를 죽일 셈으로 술값을 꺼냈다.
"걱정 마. 나 어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 냈단 말야."
"아이구, 그까짓 보통 카드요? 골드 아니면 여기선 챙피 당하기십상이죠."
"골드야 골드. 걱정 마!"
"아니, 경감님 봉급이 얼마라고 걔들이 골드를 준단 말입니까? 허허, 그것 참.
나나 경감님이나 쥐꼬리는 마찬가진데. 나만 골드 안 준 건가."
강형사의 말 끝은 불평으로 흐려졌다.
추경감은 진전 없는 수사를 계속하는 동안 고봉길이 들었 다는 그 비명이 아무래도
걸린다고 생각했다. 고봉길이 거짓말을 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이리저리 맞추어 보
았으나 영 알 길이 없었다.
고심하던 추경감은 수사의 교훈을 다시 되뇌어 보았다.
막힐 때는 '현장으로 돌아가라.' 그러나 지금은 현장이 보존되어 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남의 집 안방을 함부로 드나들 수도 없었다.
추경감은 몇번 벼르다가 마침내 고봉식의 허가를 얻고 그 침실을 다시 방문했다.
뾰족한 수가 없을 것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방안은 그때와 별다른 것이 없었다. 화려한 조각 장식이 달린 더블 베드,
추상화가 그려진 나지막한 고급 전기 스탠드, 나무무늬가 제대로 살아 있어서 우아하게
보이는 화 장대, 그리고 그 화장대 위에 얹힌 수많은 크고 작은 화장품들은 그대로였다.
침대 위 벽에는 르노와르의 무희 그림이 걸려 있었다.
"저건 진짭니까?"
추경감이 물끄러미 마주앉아 있는 고봉식을 보고 물었다.
"잘 모르겠는데요. 옛날부터 집에 있던 그림인데."
고봉식은 정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저 오디오 세트는 비싼 겁니까?"
침대 발치께에 있는 검은색 스피커와 턴 테이블 등을 보
고 물었다. 앰프와 녹음 테이프, 플레이어 등이 연결되어 있었다.
"아마 싸구려일 겁니다. 마란츤가 뭔가라고 하던데."
고봉식은 그것도 별로 흥미 없어하는 표정이었다.
"스피커는 제이 비 엘이군요."
추경감이 유심히 살폈다.
"그게 좋은 겁니까?"
"그날, 사건이 나던 날말입니다, 여기서 노래가 나오고 있었던가요?"
추경감이 눈을 반짝였다.
"글쎄요. 그날 이후로 나는 이 방에 한번도 들어와 보지
않았어요. 어쩐지 그 여자 혼이 아직 여기 남아 있는 것 같은 섬찝한 생각이 들어서."
고봉식은 정말 겁이 난 듯 몸을 약간 움츠려 보였다.
추경감은 오디오 세트에서 녹음 테이프 하나를 꺼냈다.
다 돌아간 뒤 자동으로 작동이 중지되어 있는 것 같았다.
초동수사를 할 때 누군가한테서 오디오가 켜져 있었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렇지. 가야금 소리가 들렸다고 했지."
추경감이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얘? 가야금이라구요? 그래요. 그놈의 청승맞은 가야금이
뭐 좋은지 맨날 그걸 틀었거든요."
고봉식이 신물난다는 듯이 말했다. 테이프에는 '황병기
제 3 작품집, 가야금 황병기, 목소리 홍신자. 미궁'이라고 쓰여져있었다.
"이것 좀 빌려가도 되겠습니까? 아니, 여기서 틀어봐도 되겠습니까?"
추경감이 그렇게 말하며 다시 테이프를 집어넣었다.
"이것 어떻게 작동합니까?"
추경감이 이것저것 단추를 눌러 보다가 잘 안 되니까 고봉식을 쳐다보았다.
"글쎄요. 나도 잘 모르는데."
고봉식이 마지못해 다가와 파워 스위치를 넣었다. 그러나
빨간불만 켜졌다 꺼질 뿐이었다.
"걔를 불러야지."
고봉식이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봉길아. 일루 와봐."
조금 있다가 고봉길이 들어왔다. 진달래빛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티셔츠에는 검은 글씨로 '민주전공'이라고 쓰여 있었다.
진달래빛은 북쪽의 나라 색깔이라 하여 운동권 학생 중에 통일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더러 입던 옷이었다는 것을 추경감은 알고 있었다.
"아, 경감님, 안녕하세요?"
고봉길이 꾸벅 절을 했다.
"그 티이 봉길씨 거요?"
추경감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요. 학교 다닐 때 입딘 꽈티이예요."
"꽈티이?"
추경감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학과에서 공통으로 입는."
"음, 알겠어. 그러니까 그 '민주전공'이라는 것은 '민주
전자공학과'란 뜻이겠구먼."
추경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얘, 이 오디오 좀 틀어봐라."
고봉식이 얼른 일을 끝내고 이 귀찮은 불청객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인 모양이었다.
"이거 테이프가 다 돌아갔잖아."
고봉길이 테이프를 다시 되감은 뒤 오디오를 작동시켰다.
생음악 같은 생생한 가야금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그건 황병기씨가 75년에 처음 발표해 우리 음악계에 큰 충격을 준 작품
'미궁(迷宮)'이란 겁니다.
가야금의 최저 현을 활로 때려서 진동하는 신비로운 소리를 내지요. 그뿐
아니라 그 신의 목소리는 무용가 홍신자의 목소리와 잘 어울려요.
여기선 가장 인간다운 인간 한 여류 무용가와 신
이 대화하는 듯한 그런 착각을 일으키게 하지요."
고봉길의 해설을 듣고 있는 동안 가야금 소리는 점점 숨이 가빠지다가 마침내 빠른
걸음으로 절정의 음계를 치닫고 있었다. 처음부터 들리던 웃는 소리 같은 것은 마침내
우는 소리로 바뀌고 있었다.
"으악!"
바로 그때였다. 문득 여인의 비명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아니, 바로 저 소리다!"
고봉길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비명은 곧 그치고 가야금의 정적인 톤이 흘러나왔다.
여인의 비명은 연주의 톤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이고 고음
이었다. 누군가가 노래 속에 비명을 녹음해 넣어둔 것이분명했다.
"저거에요. 저건 형수의 비명입니다. 내가 그날 들은 것이 저 비명입니다."
고봉길이 미친 듯이 소리쳤다.
"아니 정말입니까?"
추경감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틀림없어요. 저 처절하고 가슴을 찢는 듯한 목소리 저겁니다! 형수의 비명이 저기 녹음된 거예요."
고봉길이 미친 듯이 떠들었다.
"플레이 중에 어떻게 녹음이 됩니까?"
추경감이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저 가슴을 찢는 소리."
고봉길은 양 귀를 움켜싸고 나가 버렸다.
"저 테이프를 내가 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추경감이 고봉식에게 청했다.
"뭐가 뭔지 모르지만 필요하시면 가지고 가십시오. 아니,
다시는 듣기 싫으니 경감님이 가지시죠."
추경감은 그것을 가지고 시경으로 돌아와 이 궁리 저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반장님, 다시 한번 틀어봅시다."
강형사가 포터블 카세트 플레이어를 가지고 왔다.
"아무리 틀어봐야 그게 그걸세."
"그러나 혹시 압니까?"
강형사는 부득부득 카세트 테이프를 집어넣고 스위치를 눌렀다.
귀에 익은 가야금 소리, 홍신자의 육성, 그리고 문제의
비명소리.
"아, 꼭 6분 걸리는군요."
"뭐가 6분이야?"
"이 테이프가 스타트한 지 6분만에 비명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죽이고 나서 이 스위치를 넣고 도망갈 시간이 충분히 있지요.
6분이면 달아나고도 남고 말고요."
강형사는 위대한 것을 발견한 듯 오른손을 허공에 대고 흔들며 떠들었다.
"살인은 이 테이프에서 비명이 나오기 훨씬 전에 이루어 졌다고 봐야 돼.
6분은 아무 의미가 없단 말야.
법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6분의 오차는 가려낼 수 없는 거야."
"그거 영 안 풀리네요. 2시간 전에 죽었는데, 발견되기 6분전 카세트가 작동하고,
6분 뒤 비명이 들리고."
"그보다 누가 그런 장치를 해두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야."
"그거야 범인이 한 거죠. 그걸 알면 벌써 범인 잡았게요."
"그 테이프 지문부터 조사해 보라고 해. 지문 채취 끝나
면 과학수사연구로에 보내 음성 등을 분석해 보라고 해."
"이 노래 끝나면 하죠."
"어때, 출출한데 쐬주 한잔."
추경감이 빙그레 웃으며 오른손으로 술잔 기울이는 시늉을 했다.
"좋죠. 저 길모퉁이에 포장마차 근사한 것 생겼습니다."
"포장마차는 지난 주에 다 철거하지 않았나?"
"헤헤헤, 실내 포장마차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들은 퇴근길의 한잔을 위해 가벼운 발걸음으로 시경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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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소설
[이상우]모두가 죽이고 싶던 여자 8. 미궁의 수수께끼
희 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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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18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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