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경환의 명시감상 ----이대흠의 [옥수수 곁으로]에 대하여
옥수수 알갱이는 종알거림을 참느라 앙다문 이빨 같다 젖비린내가 난다
아빠 빨리 집에 와 말해 놓고 일 년 넘게 아빠 얼굴을 보지 못한 딸아이의 어린 슬픔처럼
나는 옥수수처럼 그리움에 서걱거렸으나 옥수수에서 연한 살내만 떠올렸을 뿐
울컥울컥 돋는 설움이 도톨도톨 알맹이로 뭉쳐 굳어지도록 ----이대흠, [옥수수 곁으로]({애지}, 2007년 겨울호) 전문
북아메리카의 칩페와이 인디언 소년들은 열 여섯 살이 되면 성년식을 치루게 되어 있었고, 그 소년들은 그 소년들의 인내력과 능력에 따라서 3일이나 4일, 심지어는 일주일 정도씩 금식기간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부분의 소년들은 이 성년식을 맞이하여 숲속의 오두막집에서 살면서, 자기 자신의 사냥기술의 향상과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원했지만, 한 어린 소년은 사냥기술의 향상과 전쟁에서의 승리보다는 그의 부족을 위하여 진정으로 가장 고귀하고 거룩하며 소중한 선물을 줄 수 있기를 기도했다고 한다. 단식의 셋째날, 마침내, 마니투신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었고, 초록색의 옷과 황금깃털 장식을 한 젊은이가 마니투신의 사신使臣으로 그 소년을 찾아왔다고 한다. 인디언 소년은 그 젊은이와 네 번의 씨름 끝에 모두 다 이길 수가 있었고, 그 젊은이가 죽은 자리에서 초록색과 황금빛으로 빛나는 식물이 자라나 그 열매를 맺게 되었다고 한다. 한 인디언 소년과 초록색의 옷과 황금깃털 장식을 한 젊은이와의 네 번에 걸친 씨름은 그 소년이 진정으로 눈앞의 사소한 이익을 버리고 그가 속한 인디언 부족의 전체의 이익과 행복을 연출해낼 수 있는 것인지, 그의 분명한 의지와 용기를 시험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이었던 셈인 것이다. 고귀한 것, 거룩한 것, 소중한 것은 언제, 어느 때나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어느 누군가의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에 의해서만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옥수수는 한 인디언 소년의 희생정신의 산물이며, 마니투신이 내려주신 은총(선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옥수수란 무엇인가? 옥수수는 벼목 화본과의 한해살이 식물이며, 쌀과 밀과 함께, 세계 제3대 화곡류禾穀類라고 한다. 꽃은 단성화로 수꽃 이삭은 줄기 끝에 달리고 암꽃 이삭은 줄기 중앙의 잎겨드랑이에 달린다. 옥수수의 수꽃이 암꽃보다 이틀 정도 빨리 피며 풍매화로 타가수정을 한다. 옥수수알은 수분 후 젖익음때(유숙기), 풀익음때(호숙기), 굳음때(경화기), 누루익음때(황숙기)를 거쳐서 익음때(성숙기)에 이르며 품종과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나고, 그 성숙기까지는 45일에서 60일이 지나지 않으면 안 된다. 옥수수는 유럽에서는 주로 사료작물로 재배되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주로 식용작물로 재배된다. 대한민국에서는 대부분이 완숙(성숙)되기 이전에 수확하여 간식용으로 이용되지만, 강원도와 그 이북지방에서는 주요한 식량으로 재배되고 있다. 옥수수는 칼로리가 쌀과 보리에 결코 뒤지지 않지만, 단백질이 적으므로 주식으로 사용하려면 콩과 섞어 먹거나 유럽에서처럼 우유와 고기와 달걀 등과 함께 섞어 먹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옛날부터 강원도에서는 쌀이 귀했던 탓에 옥수수를 구황救荒식품으로 이용하여 옥수수범벅, 옥수수풀떼죽, 옥수수풀어죽 등, 다양한 옥수수죽을 쑤어서 먹었다고 한다. 이대흠 시인은 1967년 전남 장흥에서 출생했으며, 서울예술전문대학과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4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는 {물 속의 불}, {상처가 나를 살린다},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 등이 있고, ‘현대시동인상’과 ‘애지문학상’을 수상한 바가 있다. 이대흠 시인의 [옥수수 곁으로]는 ‘어린 딸아이를 볼 수 없다는 설움이 옥수수로 익었다’는 ‘부성애의 미학’의 걸작품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우선 “옥수수 알갱이는 종알거림을 참느라 앙다문 이빨 같다”라고 말하고, 그리고 그 옥수수 알갱이에서는 “젖비린내가 난다”라고 말한다. ‘종알거림’은 어린 딸아이가 혼자말로 불평하는 소리를 뜻하고, ‘앙다물다’는 입을 꽉 다문 채, 가타부타 말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어린 딸아이는 젖비린내가 날정도로의 어린 딸아이이고, 그러나 그 어린 딸아이는 그 불평과 불만의 소리를 ‘이빨을 앙다문 채 참고 견디는’ 어린 딸아이라고 할 수가 있다. 왜, 어린 딸아이는 젖비린내 나는 딸아이인 것이고, 또한 왜, 어린 딸아이는 그 천진난만함에 반하여 ‘이빨을 앙다문 채 그 불평과 불만을 잠재워야만 되었던 것일까? 젖비린내 나는 딸아이는 기껏해야 대 여섯 살 정도의 딸아이이며, “아빠 빨리 집에 와 말해 놓고 일 년 넘게/ 아빠 얼굴을 보지 못한 딸아이”이다. 어린 딸아이에게 있어서 아빠는 하나님과도 같은 존재이며, 너무나도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은 존재이다. 하지만, 그러나 그 아버지를 보고 싶다는 그리움이 슬픔으로 변모되고, 그 슬픔을 참고 견딘다는 아픔이 “종알거림을 참느라 앙다문 이빨”같이 변모된 것이다. 첫 연의 옥수수 알갱이는 어린 딸아이의 앙다문 이빨이 되고, 그 옥수수는 어린 딸아이의 상징이 되고 있는 것이다. 딸아이는 누구인가? 딸아이는 아빠의 한 점 혈육이며, 늘, 항상, 티없이 맑은 웃음으로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딸아이이다. “아빠, 술 많이 드시지 마세요”라고 엄마를 대신하여 염려를 해주는 것도 딸아이이고, 아빠가 사다가 준 예쁜 장난감과 인형을 받아들며 “우리 아빠가 최고야”라고 아빠의 품에 안겨서 뽀뽀를 해주는 것도 딸아이이다. 때때로 아빠가 일터에서 늦게 들어오면 “아빠, 빨리 들어오세요”라고 전화를 해대는 것도 딸아이이고, 또, 때때로, 아빠가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혀 있으면 “아빠, 내가 이 다음에 돈 많이 벌어서 아빠를 행복하게 해드릴께요”라고 제법 그럴듯하게 위로를 해주고 있는 것도 딸아이이다. 딸아이는 신데렐라처럼 예쁘고, 효녀 심청이처럼 그 마음이 착하고 다정다감한 딸아이이다. 그 딸아이의 티없이 맑고 예쁜 마음과 그 얼굴에는 인당수에 몸을 던진 효녀 심청이의 싹도 들어 있고, 이 세계의 미래의 지도자, 즉, 모든 인류의 문화적 영웅을 생산해낼 어머니의 싹도 들어 있다. 사악한 계모에게 온갖 학대를 받고도 그 아름답고 선량한 마음씨 때문에 한 국가의 왕비가 되었던 신데렐라, 앞 못 보는 아버지의 눈을 위해 공양미 삼백 석을 받고 인당수에 몸을 던졌던 효녀 심청이, 두 눈을 잃고 머나 먼 이역 나라로 추방되었던 외디프스 대왕을 위해 아버지의 두 눈이 되어주고, 그리하여, 마침내 아버지의 영혼을 하늘나라로 인도해 주었던 안티고네----. 딸아이는 효녀이며, 이 세상의 현모양처이다. 그 아름답고 예쁜 딸아이에 의해서 모든 사악한 죄들이 말갛게 씻어지고, ‘인간이라는 종’의 건강과 행복이 약속된다. 딸아이와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거나 옥수수밭가를 산책하는 일도 즐겁고 기쁜 일이고, 딸아이의 장난감을 만들거나 그 딸아이를 무등 태우고 놀아주는 일도 즐겁고 기쁜 일이다. 어린 딸아이는 아빠의 삶의 이유이며, 행복이고, 그 모든 것이다. 하지만 왜, 이대흠 시인은 사랑하는 딸아이 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으며, 그 무슨 일로 머나 먼 타향땅을 떠돌아 다니고 있는 것일까? 얼마나 그 딸아이가 보고 싶었으면 “옥수수 알갱이는 종알거림을 참느라 앙다문 이빨 같다/ 젖비린내가 난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얼마나 그 딸아이의 곁으로, 즉, “옥수수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슬퍼했으면 “아빠 빨리 집에 와 말해 놓고 일 년 넘게/ 아빠 얼굴을 보지 못한 딸아이의 어린 슬픔”을 떠올려 보고 있는 것일까? 이대흠 시인은 ‘시인이라는 허울뿐인 직업’ 이외에는 별다른 직업이 없는 시인이다. 밥은 모든 유기체들의 동체성을 보존하는 유일무이한 에너지이며, 그 밥벌이의 수단이 좋지 못하면 이 세상의 생존경쟁이라는 투쟁의 무대에서의 탈락을 의미하게 된다. 밥벌이의 수단이 좋으면 가볍고 산뜻한 옷과 산해진미의 음식을 즐길 수가 있지만, 밥벌이의 수단이 좋지 못하면 하루종일 뼈 빠지게 일을 하고도 더럽고 남루한 옷을 입고, 겨우 나물 한 가지와 밥 한 공기로 끼니를 때우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밥벌이의 수단이 좋으면 수많은 탈세와 수많은 탈법으로 더욱 더 돈을 벌고 수많은 여가의 시간과 취미생활을 즐길 수가 있지만, 밥벌이의 수단이 좋지 못하면 법치국가의 모범시민이면서도 사시사철 어렵고도 힘든 생활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풍부함의 사회이며, 날이면 날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체계 속에서 온갖 신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하지만,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인류가 먹고도 남을 만큼의 잉여생산물이 쌓여 있는데도 전세계의 수십억의 인구가 만성적인 빈곤과 만성적인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사회이며, 또한 모든 산업현장마다의 전산화로 인하여 ‘고용 없는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풍부함의 사회이며, 빈곤을 구조적으로 재생산하는 사회이다. 이 풍요와 빈곤 사이에서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양극화의 구조가 점점 더 심화되고, 만인평등과 부의 공정한 분배라는 사회주의 이상은 한낱 도로아미타불의 구호에 지나지 않게 된다. 모든 사회는 공산주의 체제이며, 공산주의가 우리 인간들의 미래의 이상 사회인 것이다. 인간은 홀로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며, 그 사회적 구조는 협업과 분업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고, 만인의 평등과 부의 공정한 분배가 그 기본적인 법칙인 것이다. 학생은 공부를 하고, 군인과 경찰은 국가의 안녕과 행복을 수호하고, 정치인은 국가의 살림을 떠맡아야 하고, 공무원은 국가의 정책과 공공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농부는 농사를 짓고, 상인은 장사를 하고, 판사는 상호간의 분쟁을 해결하고, 시인은 시를 짓고, 학자는 학문을 연구하고, 기술자는 그 기술을 통하여 그가 맡은 바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인간들은 사회 속의 인간이지, 탈 사회 속의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다. 따라서 모든 일은 협업과 분업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온갖 조세제도를 통하여 만인의 평등과 부의 공정한 분배를 실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서로 다른 점은 ‘개인의 자유와 사유재산제도’를 ‘인정하느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며, 공산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사유재산제도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개인의 자유와 사유재산제도를 옹호한다는점에서는 자본주의 사회를 옹호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 온갖 영업세와 소득세와 상속세와 증여세와 양도소득세 등의 조세제도를 통하여 부의 대물림 현상을 막고, 만인의 평등과 부의 공정한 분배를 옹호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산주의자이기도 한 것이다. 아니, 모든 사회는 공산사회일 수밖에 없으며, 우리 인간들이 무리를 짓고 있는 이상, 그 어느 누구도 공산주의자가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이대흠 시인은 밥벌이의 수단이 좋지 못한 시인이며, 후원자 없이는 홀로 설 수가 없는 순수예술가이다. 그 순수예술가라는 자긍심 하나로 사랑하는 딸아이 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머나 먼 타향땅을 일정한 수입없이 떠돌아 다녀야만 한다는 사실은 가장 비참하고 더러운 천역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앙 다물고 참아도 눈물이 나오고, 사랑하는 딸아이를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온다. 따라서 그는 “아빠 빨리 집에 와 말해 놓고 일 년 넘게/ 아빠 얼굴을 보지 못한 딸아이의 어린 슬픔처럼” 울게 되고, 또한 그 울음의 끝에서 “나는 옥수수처럼 그리움에 서걱거렸으나/ 옥수수에서 연한 살내만 떠올렸을 뿐”이라는 시구를 낳게 된다. 옥수수는 지리적으로는 고향집의 상징이며, 경제적으로는 초근목피 시절의 구원의 상징이다. 또한 옥수수는 정서적으로는 그림움과 슬픔의 상징이고, 인간적으로는 이대흠 시인과 그의 딸아이의 상징이다. 떠돌이--나그네의 삶이란 특수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또는 매우 불연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어렵고도 힘든 삶에 지나지 않으며, 공동체 사회 안에서, 또는 공동체 사회 바깥에서, 그 사회주의적인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는 뿌리뽑힌 자의 삶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옥수수처럼 그리움에 서걱거렸으나”라는 시구는 국어사전적 의미에서,
1, 싱싱한 사과나 배 따위의 과일을 씹을 때 나는 소리; 2, 눈 따위를 밟을 때 나는 소리; 3, 갈대나 풀을 먹인 천 따위가 바람에 마찰할 때 나는 소리;
중의 마지막 세 번째 뜻에 해당된다. 딸아이에 대한 그리움은 평지풍파의 바람이 되고, 이 평지풍파의 바람은 시인의 몸과 마음을 흔들어 댄다. 이대흠 시인은 그 흔들림의 한 가운데서 이를 악물고 두 눈에 흐르지 않는 속울음을 울면서, “옥수수의 연한 살내만”을 맡게 된다. 옥수수는 식량이 아니라 딸아이이며, 그는 딸아이의 그 사랑스럽고 정겨운 살냄새를 맡으며, “울컥울컥 돋는 설움이 도톨도톨 알맹이로 뭉쳐 굳어지도록”, 그 안간힘을 다 쓰고 있는 것이다. ‘울컥울컥’이라는 말은 먹은 것을 갑작스럽게 토하려는 생리적인 현상이지만, 그러나 ‘울컥울컥 돋는 설움’은 너무나도 분한 마음이 한꺼번에 치밀어 오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설움덩어리들이 구토가 되어 나오려는 심리적인 현상을 뜻하게 된다. 그리움이 분노가 되고, 그 분노는 슬픔이 된다. 왜냐하면 그리움의 감정이 해소되지 못하고, 또한 그 분노의 공격성이 제풀에 꺾여서 설움으로 주저앉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나, 이대흠 시인의 그리움이 분노가 되고, 그 분노가 슬픔(설움)으로 변모되는 그 좌절의 과정 속에서, 마치, 마니투신이 내린 하늘의 은총처럼 초록의 옷과 황금깃털 장식을 한 옥수수가 저절로 익어가게 된다. 옥수수는 영양 만점의 식물이며, 모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세계 제3대 화곡류 禾穀類 중의 하나이다. 떠돌이--나그네 시인으로서의 ‘딸아이를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는 설움이 옥수수의 알맹이로 익었다는 것----, 이것이 이대흠 시인의 [옥수수 곁으로]의 가장 핵심적인 전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초록의 옷과 황금깃털 장식을 한 옥수수, 이 옥수수의 맛과 영양가가 만인에게 평등하듯이, 나는 이대흠 시인의 [옥수수 곁으로]라는 시를 ‘부성애의 미학’의 극치로서 만인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명시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대흠 시인의 [옥수수 곁으로]는 외래어나 한자가 전혀 없는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모국어의 향연장이라고 할 수가 있다. 모국어는 살아 있는 언어이며, 외국어는 죽어 있는 언어이다. T.S. 엘리어트가 역설한 바가 있듯이, 시는 그 민족어의 가장 세련된 양식이며, 시는 모국어 속에서만이 참다운 시일 수가 있는 것이다. 외국어로 사유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외국어로 느끼고 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외국어의 삶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이며 타인의 삶에 불과하고, 모국어의 삶은 몸에 꼭 맞는 옷이며, 언제, 어느 때나 그 어느 누구보다도 떳떳하고 당당한 나의 삶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대흠 시인의 [옥수수 곁으로] 속의 순수한 우리말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도 같이 될 것이다.
1, 종알거리다: 1, 중얼거리다; 2, 혼자말로 자주 불평하는 소리, 또는 그 모양; 3, 여자나 어린 아이가 자꾸 재깔이는 소리, 또는 그 모양;
2, 앙다물다: 1, 입을 힘주어 꽉 다물다; 2, 입을 앙다문 채 가타부타 말이 없다; 3, 서걱거리다: 1, 싱싱한 사과나 배 따위의 과일을 씹을 때 나는 소리; 2, 눈 따위를 밟을 때 나는 소리; 3, 갈대나 풀을 먹인 천 따위가 바람에 마찰할 때 나는 소리; 4, 도톨도톨하다: 1, 물건의 거죽이 여러군데 조금씩 들어가거나 솟아나와서 매끈 하지 않은 모양:
5, 젖비린내: 1, 젖에서 나는 비린내; 2, 유치한 느낌; 3, 말이나 행동이 몹시 치기가 어리고 아직 애티가 나다; 오오, [옥수수 곁으로}여,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슬픔으로 씌어진 시여! 오오,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우리 한국인들의 모국어여!
반경환의 명시감상 ----정용화의 [즐거운 가위]에 대하여
낡고 오래된 가위가 있다
종이 하나 자르지 않고 이력서에 붙일 사진 한 장 오려내지 못한다 일용할 양식이 될 삼겹살도 못 자르는 투박한 가위 하나
야시장이 열리는 아파트 단지나 행사장 입구에서 걸죽한 막걸리 장단에 맞춰 하루 종일 신명나는 가위 세월에 밀리고 유행에 뒤처지지만 가위질만큼은 엿장수 맘대로다
찰그락 찰그락 소리에 강아지는 꼬리를 흔들고 검버섯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한다 이제 막 익어가는 열매는 단맛을 더해가고 저물어가던 노을이 벌써 얼큰하다
타고난 성품 탓일까 자르려는 속성도 잃어버리고 날카로움마저 다 버린 듯 세상을 살면서 잘라내고 오려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오늘도 거리에서 춤추는 가위가 있다 ----정용화, [즐거운 가위]({애지}, 2008년 봄호) 전문
시는 스스로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시는 비평가(독자)가 말을 걸 때만 말을 하고, 비평가가 역사 철학적, 또는 시문학적 문맥 속에서 그 의미를 부여해줄 때만이 완성되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의미는 비평가가 주관적으로 부여한 의미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의미가 만인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때는 객관적이며 보편적으로 승화될 수가 있는 것이다. 시인은 시의 창작자이며,비평가는 그의 사상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비평가도 시인의 사상을 받아 들일 때도 있고, 시인도 비평가의 사상을 받아 들일 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일반적인 관례상, 시인은 시의 창작자이며, 비평가는 시의 가치를 평가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시인도 자기 자신의 시에 의미를 부여하지만, 그러나 시인이 부여하는 의미와 비평가가 부여하는 의미는 때때로 상호 충돌할 때도 있고, 상호간에 서로 조화롭게 일치할 수도 있다. 시인과 비평가가 상호 충돌할 때는 좋고 나쁨, 선과 악, 취향과 취향, 사상과 사상 등이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고, 시인과 비평가가 상호간에 서로 조화롭게 일치할 때는 비평가가 부여한 시적 의미가 시인이 부여한 의미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때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한 편의 훌륭한 시는 시인이 부여한 의미를 넘어서서, 비평가로 하여금 말을 하고 싶게 만들고(되풀이 읽고 글을 쓰고 싶게 만들고),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게 만드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이때에 비평가는 철학예술가가 되며, 그 시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새로운 가치의 창조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양한 관점과 다양한 의미는 철학예술가의 사상의 산물이며, 그 철학예술가는 타인의 말과 타인의 사유를 지우고, 그 모든 것을 새롭게 명명하는 가치의 창조자이다. 고귀하고 위대하고 새로운 것은 기존의 역사와 전통, 또, 그리고, 기존의 인습과 문맥을 넘어서서, 가장 독특하고 독창적인 새로운 언어의 기원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철학예술가는 독창적인 명명자이며, 입법자이고, 수많은 언어의 기원의 창시자이기도 한 것이다. 외디프스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었을 때에도 스핑크스는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고, 오딧세우스가 사이렌의 노래 소리를 듣고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때에도 사이렌은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어떻게 수수께끼가 그 수수께끼로서의 존재의 근거를 잃어버고도 존재할 수가 있겠으며, 또한 어떻게 만인의 심금을 울릴 수 없는 사이렌의 노래 소리가 그 존재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가 있겠는가? 시인은 풀어도, 풀어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창시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고, 비평가는 그 수수께끼를 단 번에 무력화시키는 외디프스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인은 만인의 심금을 사로잡는 새로운 노래의 창시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고, 비평가는 그 어떠한 시인의 노래 소리에도 유혹당하지 않는 오딧세우스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인과 비평가의 이 숙명적인 싸움의 과정은 그들이 다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적인 수단이며, 시인과 비평가의 이 숙명적인 싸움에 의하여 그들이 소속한 국가의 문명과 문화는 건강하게 되고, 그리고 그 민족의 삶은 모든 인간들의 이상적인 전형으로서의 지상낙원의 삶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시는 행복한 꿈의 한 양식이며,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 철학예술(비평)도 행복한 꿈의 한 양식이며,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 정용화 시인은 2001년 월간 {시문학}으로 등단했고, 시집으로는 [흔들리는 것은 바람보다 약하다}를 출간한 바가 있다. 나는 정용화 시인의 출신성분과 성장과정, 그리고 그의 시세계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갖고 있지 않지만, 계간시전문지 {애지}에 발표된 이 [즐거운 가위]를 몇 번이고 되풀이 읽어보면서 이 시만큼은 나의 ‘명시감상’에서 꼭 다루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즐거운 가위]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고, 나는 이 [즐거운 가위]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니, 나는 철학예술가로서 [즐거운 가위]에게 내가 먼저 말을 걸었던 것이고, 이 [즐거운 가위]를 새롭게 해석해 하고 그 의미를 완성해 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가위’란 무엇이며, ‘즐거운 가위’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가위란 두 개의 날(刀)을 상호 교차시켜, 그 지렛대의 원리로 다양한 물건들을 자르는데 사용되는 도구를 말한다. 가위는 옷감과 종이를 자를 때에도 사용되고, 또한 가위는 가죽과 털을 자를 때에도 사용된다. 플락스틱 판이나 얇은 철판을 자를 때에도 사용되고, 나무를 전지하거나 바느질을 할 때에도 사용된다. 따라서 가위의 종류와 그 용도는 매우 다양해서 서양의 헬레니즘 시대와 중국의 전한前漢 시대에서부터 이 21세기에 이르기까지 그 가위의 수효는 결코 줄어들지 않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가위는 절단과 단절의 도구이며, 이 가위의 존재의 의미는 그 실용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다. 실용적인 목적은 고착미를 낳고, 비실용적인 목적은 순수미를 낳는다. 고착미는 더 많은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데 이용되고, 순수미는 그 잉여가치와는 무관하게, 다만, 순수하게 아름다운 미美만을 생산하게 된다. 가위는 노동의 도구이며, ‘즐거운 가위’는 유희의 도구이다. 순수미와 고착미에 대한 칸트의 미학은 지나치게 이분법적이고, 또한 그만큼의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정용화 시인의 ‘즐거운 가위’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즐거운 가위’는 엿장수의 가위이며, 이 가위의 쓰임새는 그것(가위)의 본래의 용도를 벗어나 있다. 왜냐하면 ‘즐거운 가위’는 절단과 단절의 도구가 아니라,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은 그 주체자에게 고통을 주지만, 음악(노래)은 그 주체자에게 즐거움을 선사해 준다. 노동은 모든 인간들을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떠나가게 만들지만, 음악(노래)은 그 이해관계를 떠나서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오늘날의 엿장수는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자기 자신의 엿가위질 소리에 따라서 노래를 부르고, 온몸으로 춤을 추며, 만인들의 시선과 발걸음을 사로잡는다. 그는 타악기의 연주자이며, 노래하는 가수이고, 그리고 그 축제를 주관하는 연출가이다. 따라서 그의 가위는 즐거운 가위가 되고, 그 즐거운 가위는 드디어, 마침내, 새로운 타악기로 탄생을 하게 된다. 정용화 시인은 순수예술의 주창자로서, 실용적인 목적에서 벗어난 이 엿장수의 가위를 주목하고, 그 엿장수의 가위를 ‘즐거운 가위’로 가장 아름답고 독특하게 명명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엿장수의 가위는 즐거운 가위이며, 만인들의 시선과 발걸음을 사로잡는 천하 제일의 ‘명품 악기’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다. “야시장이 열리는 아파트 단지”나 어떤 “행사장의 입구”에는 아주 “낡고 오래된 가위가 있다.” 낡고 오래된 가위는 “종이 하나 자르지”도 못하고, “이력서에 붙일 사진 한 장도 오려내지 못한다.” 낡고 오래된 가위는 “일용할 양식이 될 삼겹살도” 자르지 못하고, 낡고 오래된 가위는 이미 시대착오적인 “투박한 가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첫째 연의 “낡고 오래된 가위가 있다”라는 시구는 매우 도발적이면서도 또한, 그만큼 충격적인 시구이기도 한 데, 왜냐하면 그 시구 속에는 우리 인간들의 고정관념과 문화적 인습을 거부하는 반항의 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낡고 오래된 가위는 이미 쓸모가 없어진 가위에 지나지 않으며, 그 가위는 폐기처분해 버리면 그만인 어떤 가위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정용화 시인은 그 쓸모 없는 엿장수의 가위를 더욱 더 단호하고 강렬 한 목소리로 부각시키며, 그의 걸작품인 [즐거운 가위]의 첫 행을 시작하게 된다. 왜, 정용화 시인은 ‘낡고 오래된 가위’의 존재를 부각시키며, 그 도발적인 목소리를 내뱉게 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이미, 앞에서, 설명한 대로, 쓸모가 없어짐으로써 더욱 더 쓸모가 있어진 낡고 오래된 가위의 존재를 그 역설적인 어법을 통해서 더욱 더 압도적으로 증명해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엿장수의 가위는 골동품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가위도 아니며, 더욱 더 수많은 잉여가치를 창출해낼 수 있는 가위도 아니고, 오직, 쓸모가 없기 때문에, 새로운 악기로 탄생하고 있는 가위일 뿐인 것이다. 무목적의 합목적성, 즉, 쓸모 없음의 유용성----, 바로 이 기적 속에는 낡은 것의 새로운 탄생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낡은 가위는 엿장수의 가위이고, 엿장수의 가위는 즐거운 가위이다. 아니, 정용화 시인의 [즐거운 가위] 속에서는 ‘즐거운 가위’가 엿장수 자체가 되고, 그 엿장수가 새로운 악기가 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엿장수는 자기 자신이라는 타악기----왜냐하면 엿가위가 엿장수로 의인화되어 있기 때문이다----의 연주자이며, 노래하는 가수이고, 그리고, 그 축제를 주관하는 연출가이다. 정용화 시인의 “낡고 오래된 가위가 있다”라는 시구 속에는 낡고 오래된 가위의 중요성과 함께, 그 축제의 중심사상, 즉, ‘대화합의 사상’의 싹이 내재되어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엿이란 무엇인가? 엿이란 찹쌀과 멥쌀, 옥수수와 조와 고구마의 녹말 등에 엿기름을 섞어 졸인 식품이며, 대한민국의 전통적인 과자를 말한다. 엿의 종류로는 쌀엿, 호박엿, 고구마엿, 옥수수엿, 꿩엿, 닭엿 등이 있으며, 과자가 귀했던 그 옛날에는 전국 어디에서나 엿가위 소리를 ‘찰그락 찰그락’ 내며 다니는 엿장수----지게에 엿판을 짊어지고 다니는 엿장수----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가 있었다. 엿장수는 쌀도 받았고, 술병도 받았다. 또한, 엿장수는 헌책도 받았고, 고철도 받았다. 엿장수의 엿가위 소리가 동구 밖에서 들려오면 마을의 아이들은 십원 짜리 지전을 들고 나가거나 그 동안 모아 두었던 폐품들을 들고 나갔고, 다 큰 청년들이나 마을의 어른들은 엿치기라는 노름을 통해서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그 엿을 먹었던 것이다. 오늘날은 서양의 과자들과 함께, 온갖 신제품의 과자들이 넘쳐나고 있지만, 아직도 대한민국의 전통적 과자인 이 엿들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니다. 이 엿에 얽힌 민담 중의 하나는 딸이 시집을 가면 그 차반으로 엿을 보내는 것이고, 또다른 하나는 입학 시험 때가 되면 꼭 엿을 먹여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의 예는 시댁 식구들이 엿을 물고 있는 동안은 새 며느리의 흉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뜻하고, 후자의 예는 끈적끈적한 엿의 특성상, 반드시 그 시험에 붙게 된다는 민간신앙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밖에도 ‘엿 먹이다’라는 관용구는 남을 은근히 골탕먹이거나 속여 넘길 때 쓰는 말이 되고,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관용구는 엿장수가 엿을 제 마음대로 늘이듯이, 무슨 일이든지 제멋대로 처리할 때 쓰는 말이 된다. 막걸리란 무엇인가? 막걸리란 참쌀과 멥살과 보리와 밀가루 등을 쪄서 ‘지에밥’을 만들고, 그 지에밥과 함께, 누룩과 물을 섞고 일정한 온도에서 발효시킨 대한민국의고유의 술을 말한다. 막걸리는 탁주濁酒, 농주農酒, 재주滓酒, 회주灰酒라고도 부르며, 그 빛깔은 뜨물처럼 희고 탁하며, 알코올의 농도가 6~7도 정도에 불과한 술을 말한다. 지에밥에 누룩을 섞어 빚은 술을 체에 부어 거르면 텁텁한 탁주가 되고, 이 탁주에 용수를 박아서 떠내면 맑은 술의 청주淸酒가 된다. 이때에 찹쌀을 원료로 한 것은 찹쌀 막걸리가 되고, 그것을 체로 거르지 않고 밥풀이 담긴 채 뜨게 되면 동동주가 된다. 아무튼 좋은 막걸리는 단맛, 신맛, 쓴맛, 떫은맛이 아주 잘 어우러져 감칠맛을 내게 되고, 우리 한국인들은 이 시원하고 감칠맛이 나는 막걸리를 아주 옛날부터 대표적인 전통 술로서 애용愛用해 왔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이상, 두산백과사전 참조). 정용화 시인의 낡고 오래된 가위가 즐거운 가위가 되고, 그 즐거운 가위가 새로운 악기로 탄생하는 장소는 “야시장이 열리는 아파트 단지”나 어떤 “행사장의 입구”인데, 왜냐하면 그 장소들은 축제가 열리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축제는 어떤 뜻 깊은 날과 경사스러운 날을 맞이하여 그 구성원들의 미래의 소망과 행복을 기원하는 잔치날이며, 또한 그 구성원들의 대동단결과 대화합을 도모하는 잔치날이기도 한 것이다. 축제의 날에는 너와 내가 하나가 되고, 모두가 다같이 지난 날의 아픔과 회한들을 씻어버리고, 즐겁고 기쁘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수가 있는 잔치날이기도 한 것이다. 새해맞이 축제, 단오절 축제, 정월대보름 축제, 한가위 축제, 벚꽃 축제, 철쭉꽃 축제, 인삼 축제, 소싸움 축제, 제주도 특산물 축제, 신토불이身土不二 농산물 축제, 시민의 날 기념축제 등이 바로 그것이며, 이 축제의 날에는 온갖 산해진미의 음식들과 온갖 특산품들이 즐비하게 되고, 그리하여, 마침내, 수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게 된다. 바로 이 축제의 날에, 대한민국의 엿과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가 어떻게 빠질 수가 있겠으며, 또한, 한 잔 마시면 그 황홀함의 절정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게 되는 막걸리가 어떻게 빠질 수가 있겠는가? “야시장이 열리는 아파트 단지”나 어떤 “행사장의 입구에서”의 엿장수의 가위는, 비록, “세월에 밀리고 유행에 뒤처진” 가위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막걸리 장단에/ 맞춰 하루 종일 신명나는 가위”이며, 또한, 그 “가위질만큼은 엿장수 맘대로인” 가위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때에 엿장수 마음대로의 가위는 모든 것이 제멋대로인 가위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즐거운 가위이며, 너와 내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게 만드는 가위이다. 엿장수는 개성과 독창성이 제일급인 엿장수이며, 그 축제를 대화합의 축제로 이끌어 낼 수 있는 순수예술가이다. 따라서 엿장수의 자유 자재로운 가위질 소리에 “강아지는 꼬리를 흔들고”, 또한, 엿장수의 자유 자재로운 가위질 소리에 검버섯이 핀 늙은이들의 웃음꽃이 만발하게 된다. 이때에 강아지는 모든 동물들을 대표하는 동물이 되고, 검버섯이 핀 늙은이의 웃음꽃은 만인들의 웃음꽃이 된다. 너와 내가 하나가 되고, 사람과 동물들이 하나가 되고, 그리하여, 마침내, 남녀노소 할 것이 없이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하나가 된다. 웃음꽃은 ‘물아일체物我一體’, 또는 ‘동심일체同心一體’의 꽃이며, 대화합의 꽃이다. 계절은 모든 만물들의 열매가 “단맛을 더해가는” 가을이며, 때는 이제 마악 “저물어가던 노을”마저도 벌써 얼큰하게 취해버린 저녁이다. 축제의 시간은 황홀함의 시간이고, 가장 아름답고, 멋 있고, 꿀맛같은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타고난 성품 탓일까 자르려는 속성도 잃어버리고 날카로움마저 다 버린 듯 세상을 살면서 잘라내고 오려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오늘도 거리에서 춤추는 가위가 있다
엿장수는 시대착오적인 인물이며, 소외된 인물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엿장수는 소수의 예외자로서 엿가위를 새로운 타악기로 탄생시킨 창시자이며, 언제, 어느 때나 대쪽같은 장인 정신으로 만인들의 축제를 연출해낸 문화적 영웅이다. 왜냐하면 엿장수는 “타고난 성품 탓”으로 “자르려는 속성도 잃어버리고/ 날카로움마저 다 버린 듯/ 세상을 살면서/ 잘라내고 오려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오늘도 거리에서 춤추는” 엿장수이기 때문이다. 가위는 유용한 도구이며 그 이기적인 목적에 따라서 절단과 단절을 감행하고, 즐거운 가위는 무용한 가위이며 그 이타적인 목적에 따라서 축제를 연출해낸다. 가위는 모든 사람들을 사적인 개인으로 돌아가게 만들고, 즐거운 가위는 모든 사람들을 공동체 사회의 구성원으로 불러 모은다. 너도 노래를 부르고, 나도 노래를 부른다. 너도 춤을 추고, 나도 춤을 춘다. 모든 축제는 대화합의 축제이며, 마치, 엿장수처럼, 아니, 정용화 시인처럼, 생사를 초월한 순수예술가만이 그 축제를 연출해낼 수가 있는 것이다. 정용화 시인의 [즐거운 가위]는 아주 소박하고 단순한 사실성을 단어 하나, 토씨 하나 어긋나지 않게 드러내고 있으면서도, 아주 조용조용하면서도 구수한 목소리로 제일급의 멋진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오오, 순수예술가의 장인 정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세계적인 대축제를 단 한 번도 연출해 내지 못하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이여! 오오, 오직 논문의 표절과 조작과 모방으로만 일관하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이여! 오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사회를 전혀 돌보지 않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이여! 오오, 단군 이래, 그토록 고귀하고 훌륭한 노예의 민족으로만 일관하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이여!
반경환의 명시감상 ----조오현의 [염장이와 선사]에 대하여
어느 신도님 부음을 받고 문상을 가니 때마침 늙은 염장이가 염습殮襲을 하고 있었는데 그 염습하는 모양이 얼마나 지극한지 마치 어진 의원이 환자를 진맥하듯 시신屍身 어느 한 부분도 소홀함이 없었고, 염을 다 마치고는 마지막 포옹이라도 하고 싶다는 눈길을 주고도 모자라 시취屍臭까지 맡아 보고서야 관뚜껑을 덮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오늘 아침 한솥밥을 먹은 가족이라도 죽으면 시체라 하고 시체라는 말만 들어도 섬찍지근 소름이 끼쳐 곁에 가기를 싫어하는데 생전에 일면식도 없는 생면부지의 타인, 그것도 다 늙고 병들어 죽어 시충屍蟲까지 나오는 시신을 그렇게 정성을 다하는 염장이는 처음 보았기에 이제 상제와 복인들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염장이에게 한마디 말을 건네 보았습니다. “처사님 염을 하신 지 몇 해나 되셨는지요?” “서른 둘에 시작했으니 한 40년 되어 갑니더.” “그러시면 많은 사람의 염을 하신 것 같으신데 다른 사람의 염도 오늘처럼 정성을 다 하십니까?” “별 말씀을 다 하시니... 산 사람은 구별이 있지만 시신은 남녀노소 쇠붙이 다를 것이 없니더. 내 소시에는 돈 땜에 이 짓을 했지만 이 짓도 한 해에 몇백 명 하다 보니 남모를 정이 들었다 할까유. 정이...... 사람들은 시신을 무섭다고 하지만 나는 외려 산 사람이 무섭지 시신을 대하면 내 가족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내 자신의 시신을 보는 듯해서......” 이쯤에서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갈 길을 그만 가야겠다는 표정이더니 대뜸, “내 기왕 말씀이 나온 김이니 시님에게 한 말씀 물어 봅시더. 이 짓도 하다 보니 시님들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어떤 시님은 사람 육신을 피고름을 담은 가죽 푸대니, 가죽 주머니니, 욕망 덩어리라 이것을 버렸으니 물에 잠긴 달그림자처럼 영가 靈駕는 걸림이 없어 좋겠다고 하시기도 하고, 어떤 시님은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法身이라 했던가유? 그렇게 하고, 또 어떤 시님은 왕생극락을 기원하며 염불만 하시는 시님도 있고... 아무튼 시님들 법문도 각각인데 그것은 그만두시고요. 참말로 사람이 죽으면 극락지옥이 있습니꺼?” 흔히 듣는 질문이요 신도들 앞에서 곧잘 해왔던 질문을 받았지만 이 무구한 염장이 물음 앞에는 그만 은산철벽을 만난 듯 동서불명東西不明이 되고 말았는데, 염장이는 오히려 공연한 말을 했다는 듯, “염을 하다 보면 말씀인데유. 이 시신의 혼백은 극락을 갔겠다 저 혼백은 지옥에 갔겠다 이런 느낌이 들 때도 더러 있어 그냥 해본 소리니더. 이것도 넋빠진 소리입니더만 분명한 것은 처음 보는 시신이지만 그 시신을 대하면 이 사람은 청검하게 살다가 마 살았겠다 이 노인은 후덕하게 또는 남 못할 짓만 골라서 하다가 이 시신은 고생만 하다가 또는 누명 같은 것을 못 벗고... 그 머라하지유? 느낌이랄까유? 그, 그 사람이 살아온 흔적 같은 것이 시신에 남아 있거든요?” 하고는 더 말을 하지 않을 듯 딸막딸막하더니, 당신의 그 노기老氣로 상대가 더 듣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읽었음인지, “극락을 갔겠다는 느낌이 드는 시신은 대강대강해도 맘에 걸리지 않지만 그렇지않은 죄가 많아 보이는 시신을 대하면 자신이 죄를 지은 것처럼 눈시울이 뜨뜻해지니더. 정이니더, 옛사람 말씀에 사람은 죽을 때는 그 말이 선해지고 새도 죽을 때는 그 울음이 애처롭다 했다니더. 죽을 때는 누구나 다 선해지니더......이렇게 갈 것을 그렇게 살았나?하고 한 번 물어보면 영감님 억천 년이나 살 것 같아서, 가족들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한 번 잘 살아 보고 싶어서 그랬니더. 너무 사람 울리시면 내 화를 내고 울화통 터져 눈 못 감고 갑니더. 이런 대답을 들으니 아무리 인정머리 없는 염쟁이지만 정이 안 들겠니꺼? 그 돌쟁이도 먹 놓고 징 먹일 때는 자기의 혼을 넣고... 땜쟁이도 그렇다 하는데 오늘 아침 숨을 같이 쉬고 했던 사람이 마지막 가는데유...... 아무런들 이 짓도 정이 없으면 못해 먹을 것인데 그렇듯 시신과 정을 나누다가 보면 어느 사이 그 시신 언저리에 남아 있던 삶의 때라 할까유? 뭐 그런 것이 걷히고 비로소 내 마음도 편안해지거든요. 결국은 내 마음 편안할려고 하는 짓이면서도 남 눈에는 시신을 위하는 것이 풍기니 나는 아직...” 하고는 잠시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시님도 다 아시는 일을 말했니더. 나도 어릴 때 뒷절 노시님이 중될 팔자라 했는데 시님들 말씀과 같이 업業이라는 것이 남아 있어서... 이제 나도 갈 일만 남은 시신입니더.” 이렇게 말끝을 흐리는 것이었습니다. ----조오현의 [염장이와 선사]({아득한 성자}, 시학, 2007년) 전문
조오현 시인은 1932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했고, 1939년 소머슴으로 절간에 입산을 하여 큰스님이 된 시인이다. 필명은 조오현曺五鉉이고 법명은 무산霧山이다. 법호는 만악萬嶽이고 자호는 설악雪嶽이다. 그는 [아득한 성자]라는 시를 통해서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한 바가 있으며, ‘최고의 선서禪書’인 {벽암록}과 {무문관}을 ‘역해’로 펴낸 바가 있다. 조오현 시인이 연출해낸 ‘백담사 만해마을’은 대한민국 최고의 문학관이며, 이제는 ‘만해축전’이 ‘만해사상’을 선양하는 최고의 축제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말도 있고, ‘행동은 이미 하나의 지식의 형태이며, 또, 지식은 행동을 포함하고 있다’라는 말도 있다. 전자는 공자의 말이고, 후자는 하이데거의 말이다. 안다는 것은 행동한다는 것이며, 행동한다는 것은 앎을 실천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 앎이란 무엇이며, 도대체 그 앎을 어떻게 실천해야 된다는 말인가? 앎(지식)이란 사물에 대한 명료한 인식과 그것에 대한 판단을 말하지만, 그러나 그 앎의 종류와 그 범주는 머나 먼 밤하늘의 별들처럼, 아니, 사하라 사막의 모래알갱이들처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만큼 다종 다양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도덕에 대한 앎도 있고, 정치에 대한 앎도 있다. 사회에 대한 앎도 있고, 문화에 대한 앎도 있다. 역사에 대한 앎도 있고, 철학에 대한 앎도 있다. 사랑과 우정에 대한 앎도 있고, 온갖 자연과 사물들에 대한 앎도 있다. 우리 인간들의 앎은 그의 교육과정과 삶의 환경에 의한 매우 제한적인 앎에 지나지 않으며, 그리고 그 앎을 통해서 모든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복잡한 문제는 단순하게 정리하고, 단순한 문제는 더욱 더 정교하고 복잡하게 풀어나가야 하듯이, 나는 앎의 문제를 더욱 더 단순하게 정리해보고자 한다. 앎이란 이 세상의 삶의 이치와 그 삶의 이치를 통해서 우리 인간들의 행복한 삶을 연출해내기 위한 방법적인 수단일 뿐인 것이다. 앎이 우리 인간들의 행복에 기여해야 하는 것이지, 우리 인간들이 그 앎(지식)에 봉사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왜, 나의 행복이 아니고, 우리 인간들의 행복이란 말인가? 나의 행복은 이기적인 행복이고, 우리 인간들의 행복은 이타적인 행복이다. 이기적인 행복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이타적인 행복은 찬양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동물들은 무리를 짓는데서 최선의 삶의 수단을 발견하였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 모든 일들은 도덕과 법률에 의해서 규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이익과 전체의 이익이 충돌할 때는 개인의 이익을 버려야 하고, 충忠과 효孝의 다툼이 있을 때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효孝를 버려야만 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모든 공동체 사회의 도덕명령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앎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 인간들의 행복을 연출해내는 것이며, 그 앎의 실천은 철두철미하게 도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앎을 어떻게 습득할 수가 있는 것이며, 또한, 그 앎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 것일까? 부유한 자, 힘 있는 자, 지배하는 자는 착하고 선량하며 천당에 간다는 것이 지배계급의 종교, 즉, 힌두교와 유태교의 근본사상이라면, 가난한 자, 힘 없는 자, 지배당하는 자는 착하고 선량하며 천당에 간다는 것이 피지배계급의 종교, 즉, 불교와 기독교의 근본사상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부처와 예수는 불교와 기독교의 창시자로서 그 지배계급의 사상에 맞서서 피지배계급의 사상을 연출해냈고, 그 앎(민중사상)을 습득하고 실천하는 데, 그들의 생명과 그 모든 것을 다 걸었던 것이다. 봉건귀족들의 온갖 특전과 특권에 맞서서 자유로운 개인의 삶을 역설했던 초기의 자본가 계급들도 마찬가지였고, 또한 자본가 계급들의 수많은 착취와 억압에 맞서서 만인평등과 공정한 부의 분배를 역설했던 공산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앎은 기존의 앎을 짓밟아버리려고 하고, 기존의 앎은 새로운 앎의 씨앗마저도, 아예 발본색원해내려고 한다. 앎은 습득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고 그 앎을 실천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도덕, 자유, 민주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선과 악, 천동설, 지동설, 상대성 이론, 세계화 등은 그 투쟁의 산물들이며, 그 개념들에는 무서운 피비린내가 각인되어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앎은 절대로 가치중립적인 앎이 아니며, 도덕 역시도 절대로 가치중립적인 도덕이 아니다. 앎과 도덕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모하며, 모든 인간들의 사고와 취향과 출신성분과 그 이해관계에 따라서, 저마다의 해석과 그 실천이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 국가와 공동체 사회의 어려움이 있는 것이고, 또한, 그 구성원들의 삶의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면 전체의 이익이 훼손되고, 전체의 이익을 앞세우면 개인의 이익이 훼손된다. 아무튼 개인의 이익을 버리고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 철두철미하게 ‘나’를 버리고 공동체 사회의 행복을 위하여 봉사를 하는 인간----, 바로 이러한 인간들을 우리는 ‘성자’라고 부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오현 시인의 [염장이와 선사]는 앎의 실천의 정점에서 꽃 피어난 시이며, ‘성자의 미학’의 극치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염장이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고 선사는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염장이란 죽은 사람의 몸을 씻기고 수의를 입히는 사람을 말하고, 선사란 불도를 닦으며 그 불도를 실천하는 사람을 말한다. 염장이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우 싫어하는 더러운 시체를 만지는 사람을 말하고, 선사란 그 망인의 모든 때와 죄를 씻어주고 그의 영혼을 구제해주는 사람을 말한다. 염장이는 비천하고 하찮은 사람이고, 선사는 고귀하고 거룩한 성자이다. 때는 어느 신도님이 죽었을 때이고, 바로 그 장례식장에서 염장이와 선사가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때에, 염장이는 선사가 되고, 선사는 염장이가 되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염장이의 이타적인 행위가 바로 그 선사의 경지에까지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40여 년 동안이나 염장이 생활을 하고 제 아무리 시체를 만지는 행위가 그의 직업이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다 늙고 병들어 죽어 시충屍蟲까지 나오는 시신”을 그렇게도 정성스럽게 닦아주는 염장이가 어디 있을 수가 있겠으며, 또한, 어떻게 “어진 의원이 환자를 진맥하듯 시신屍身 어느 한 부분도 소홀함이 없었고, 염을 다 마치고는 마지막 포옹이라도 하고 싶다는” 듯이 “눈길을 주고도 모자라 시취屍臭까지 맡아 보고서야 관뚜껑을 덮는” 염장이가 어디에 있을 수가 있겠는가? 따라서 선사는 그런 염장이를 처음 보았기 때문에, “상제와 복인들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는 염장이를 붙들고, 선문답을 나누어 본 것이 이 [염장이와 선사]의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조오현 시인의 [염장이와 선사]는 가장 아름다운 ‘선문답’ 중의 하나이며, 누구나 다같이 부처가 되고 예수가 될 수 있다는 선불교의 사상이 가장 깊이 있고 중후하게 배어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왜, 염장이는 시충까지 나오는 시신을 그렇게 정성을 들여 닦았던 것이며, 왜, 또한 염장이는 마지막 포옹이라도 하고 싶다는 듯이 시취까지 맡아보고서야 관뚜껑을 덮었던 것일까?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산 사람은 구별이 있지만”, 죽은 사람은 남녀노소는 물론, 그 어떠한 구별도 없고,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극락의 세계로 가야 되기 때문이다. 극락의 세계는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세계이며, 모든 걱정과 근심이 다 사라진 세계이다. 극락의 세계가 머나 먼 내세에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착한 일을 하려고 하고, 극락의 세계를 이 지구상에다가 건설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더욱 더 나쁜 짓을 하려고 한다. 전자는 종교인이 되기가 십상이고, 후자는 세속인이 되기가 십상이다. 하지만 이 선과 악, 성과 속의 이분법은 종교상의 구별일 뿐, 대부분의 종교인들마저도 머나 먼 극락의 세계를 믿지 않고, 이 지구상에다가 극락의 세계를 건설하려고 한다. 조직폭력배를 동원하여 장인과 장모의 재산을 가로채 가려는 사위, 정부情夫와 짜고 남편을 살해하고 그 재산을 가로채 가려는 아내, 나이 어린 소녀를 유괴하고 돈을 요구하는 청년, 법률에 대한 지식을 악용하여 타인들의 재산을 가로채 가는 법조인, 인간의 나약함을 이용하여 내세의 천국을 약속하고 소위 합법적으로 그 재산을 가로채 가는 목사, 소위,
“내 기왕 말씀이 나온 김이니 시님에게 한 말씀 물어 봅시더. 이 짓도 하다 보니 시님들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어떤 시님은 사람 육신을 피고름을 담은 가죽 푸대니, 가죽 주머니니, 욕망 덩어리라 이것을 버렸으니 물에 잠긴 달그림자처럼 영가 靈駕는 걸림이 없어 좋겠다고 하시기도 하고, 어떤 시님은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法身이라 했던가유? 그렇게 하고, 또 어떤 시님은 왕생극락을 기원하며 염불만 하시는 시님도 있고... 아무튼 시님들 법문도 각각인데 그것은 그만두시고요. 참말로 사람이 죽으면 극락지옥이 있습니꺼?”
라고, 백가쟁명百家爭鳴식의 불법佛法을 역설하며, 극락과 지옥이라는 양날의 칼을 이용하여 신도들의 면종복배와 재산의 헌납을 강요하는 선사, 자기 자신이 업무상 알게된 기밀을 이용하여 부동산 투기를 일삼는 고위공직자들,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수많은 영세상인들을 파산상태로 몰아 넣는 악덕 재벌들----, 바로 이러한 인간들이야 말로 머나 먼 극락의 세계를 믿지 않고 이 지구상에다가 자기 자신들만의 극락의 세계를 건설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사나운 야수가 되고, 모든 앎(진리, 지혜)은 그 야수들의 그토록 사납고 잔인한 무기가 된다. 따라서 염장이는 ‘산 사람이 무섭지’, 죽은 사람이 무섭지는 않다고 말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토록 사납고 잔인했던 사람들마저도 이 세상의 임종을 맞이해서는 그 “울음이 애처롭고” 누구나가 다같이 선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선설性善說이란 무엇이며, 성악설性惡說이란 무엇인가? 성선설이란 인간의 본성은 선천적으로 착하다는 것을 말하고, 성악설이란 인간의 본성이 선천적으로 악하다는 것을 말한다. 전자는 순자의 말이고, 후자는 맹자의 말이다. 하지만, 그러나,인간의 본성은 선천적으로 착한 것도 아니고, 또한, 악한 것도 아니다. 인간의 본성은 선악 이전의 본성이며, 그 본성이 선과 악으로 갈라지는 것은 인간의 욕망 때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의 욕망은 선한 것이고, 타인의 욕망은 악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들은 모두가 다같이 똑같은 욕망을 두고 그토록 사납고 잔인하게 싸우고 있는 것이며, 그 욕망을 제어하는 도덕과 법률이 없으면 그 어떠한 사회도 자기 자신의 존재의 정당성을 잃어버리게 되고 만다. 왜, 그토록 사납고 잔인하게 악독을 떨었던 사람들마저도 죽음 앞에서는 선해지는 것이며, 또한 그들은 진정으로 내세의 지옥을 믿고 있었던 것일까? 왜, 어떤 사람은 근면 성실하게 살다가 가고, 왜, 어떤 사람은 한 평생 못할 짓만 하다가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 왜, 어떤 사람은 모든 재산을 아낌없이 다 사회에 환원하고 가고, 왜, 어떤 사람은 한 평생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 이 선과 악, 상과 벌은 그가 개인의 이익(욕망)을 버리고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살아 왔는가,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개인의 이익(욕망)을 위하여 전체의 이익을 훼손하여 왔는가에 달려 있다고 나는 믿고 있으면, 따라서 이 세상의 임종의 무대인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다같이 자기가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최후의 판관 노릇을 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의 후회는 그의 도덕적 양심이 낳은 괴로운 감정이며, 죽음 앞에서의 떳떳함은 그의 도덕적 양심이 낳은 즐겁고 기쁜 감정이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후회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죽음 앞에서 떳떳한 사람이 될 것인가? 여기에는 더 이상의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극락의 세계도 없고, 아귀지옥의 세계도 없다. 다만, 있다면, 모든 인간들이 다 함께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이 세상이라는 삶의 무대’를 아귀지옥으로 연출해낸 사람들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지극히 다행스럽게도 ‘이 세상이라는 삶의 무대’가 아귀지옥이 되지 않은 것은,
“극락을 갔겠다는 느낌이 드는 시신은 대강대강해도 맘에 걸리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죄가 많아 보이는 시신을 대하면 자신이 죄를 지은 것처럼 눈시울이 뜨뜻해지니더. 정이니더, 옛사람 말씀에 사람은 죽을 때는 그 말이 선해지고 새도 죽을 때는 그 울음이 애처롭다 했다니더. 죽을 때는 누구나 다 선해지니더......이렇게 갈 것을 그렇게 살았나?하고 한 번 물어보면 영감님 억천 년이나 살 것 같아서, 가족들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한 번 잘 살아 보고 싶어서 그랬니더. 너무 사람 울리시면 내 화를 내고 울화통 터져 눈 못 감고 갑니더. 이런 대답을 들으니 아무리 인정머리 없는 염쟁이지만 정이 안 들겠니꺼? 그 돌쟁이도 먹 놓고 징 먹일 때는 자기의 혼을 넣고... 땜쟁이도 그렇다 하는데 오늘 아침 숨을 같이 쉬고 했던 사람이 마지막 가는데유...... 아무런들 이 짓도 정이 없으면 못해 먹을 것인데 그렇듯 시신과 정을 나누다가 보면 어느 사이 그 시신 언저리에 남아 있던 삶의 때라 할까유? 뭐 그런 것이 걷히고 비로소 내 마음도 편안해지거든요. 결국은 내 마음 편안할려고 하는 짓이면서도 남 눈에는 시신을 위하는 것이 풍기니 나는 아직...”
이라고, 자기 자신의 사리사욕을 버리고, 만인들의 때를 씻어주고, 그들의 최후를 극락의 세계로 인도해주는 수많은 ‘염장이와 선사들’----비록, 아주, 적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지만----이 있었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맡은 일----그것이 염장이든, 선사이든, 상인이든, 예술가이든, 쓰레기 청소부이든, 정치인이든, 그 무엇이든지 간에----에 최선을 다할 때, 도덕과 윤리의 근본이 바로 서는 것이며, 그 근본이 바로 서야 진정한 장인 정신이 생겨난다. 인생은 예술이고, 우리 인간들은 누구나 다같이 자기 자신의 인생을 연주하는 예술가이기도 한 것이다. 돈과 명예는 같은 무대에 설 수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진정한 예술가는 자기 자신의 임무를 아는 자이고, 그 임무를 좋아하는 자이고, 또, 그 임무를 언제, 어느 때나 즐겁고 기쁘게 완수하는 자이다. 자기 자신의 임무가 제 아무리 좋고 훌륭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즐겁고 기쁘게 하지 않으면 그 일에 하자瑕疵가 생기거나 타인들과의 다툼이 생겨나게 되고, 이와는 정반대방향에서, 자기가 맡은 일이 제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일지라도 자기 자신의 이익과 손해, 또는 생과 사를 떠나서 진정으로 즐겁고 기쁘게 하게 되면, 제일급의 명시인 [염장이와 선사]가 탄생하게 되고, 우리 인간들은 모두가 다같이 지상낙원, 즉, 극락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돌쟁이도 먹 놓고 징 먹일 때는 자기의 혼을 넣고... 땜쟁이도” 그렇게 한다는 시구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 즉, 다종 다양한 시신들과도 정을 나누고, 그 시신들의 때를 닦아주며 극락의 세계로 인도해주는 염장이가 그것을 증명해준다.
그 돌쟁이도 먹 놓고 징 먹일 때는 자기의 혼을 넣고... 땜쟁이도 그렇다 하는데 오늘 아침 숨을 같이 쉬고 했던 사람이 마지막 가는데유...... 아무런들 이 짓도 정이 없으면 못해 먹을 것인데 그렇듯 시신과 정을 나누다가 보면 어느 사이 그 시신 언저리에 남아 있던 삶의 때라 할까유? 뭐 그런 것이 걷히고 비로소 내 마음도 편안해지거든요. 결국은 내 마음 편안할려고 하는 짓이면서도 남 눈에는 시신을 위하는 것이 풍기니 나는 아직...
참다운 사랑은 영혼이 육체를 감싸고, 또한, 참다운 사랑은 육체가 영혼을 꽃 피워낸다. 아름다움은 선의 상징이며, 선은 모든 미학의 최종심급이기도 한 것이다. 선만이 아름답고 선만이 고귀하고 위대하다. 아름다움은 인간의 건강과, 인간의 행복과, 극락의 세계를 연출해내지만, 추함은 인간의 쇠약과, 인간의 불행과, 아귀지옥을 연출해내게 된다. 성자는 아름다움의 화신化身이며, 또한 선한 인간의 화신이기도 한 것이다. 가능하면 어렵고, 힘들고, 더럽고, 그 어느 누구도 하지 않으려는 일을 하는 것, 그 무슨 일이든지 간에 즐겁고 기쁘게 하는 것----. 아름답고 멋진 삶과 아름답고 멋진 죽음을 완성하는 것----. 나는 예술적인 삶과 예술적인 죽음을 옹호하는 낙천주의 사상가이다. 예술적인 삶과 예술적인 죽음이란 언제, 어느 때나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는 삶과 죽음을 말하고, 또한, 언제, 어느 때나 무서운 집중력으로 그의 한 평생을 단 하루처럼 살아가는 삶과 죽음을 말한다. 새로운 지혜를 배우는 데에도 그의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 되고, 그 지혜를 실천하는 데에도 그의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 된다. 조오현 시인의 ‘염장이’와 ‘선사’는 그가 탄생시킨 인물들이며,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그들의 장인정신에 의하여, 그들의 예술적인 삶과 예술적인 죽음을 완성해낸 인물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염장이가 선사가 되고 선사가 염장이가 된다. 자기 자신의 삶과 죽음을 즐겁고 기쁘게 완성하는 데에는 어떠한 인간차별과 계급차별도 있을 수가 없고, 다만, 있다면, 오직, 그 그 주체자의 뜨겁디 뜨거운 열정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조오현 큰스님은 오늘도 새로운 염장이로 태어나면서, 그 염장이의 뜨거운 열정을 통하여, 내일도, 모레도, 천년을 하루같이 고귀하고 거룩한 성자(선사)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반경환의 명시감상 ----류인서의 「울음더위」에 대하여
사랑지상주의자 a는 휴가 첫날 가방을 싸들고 폭풍의 언덕으로 떠난다 고소공포증의 b는 바다로 떠난다 겁 없는 선남선녀들 맹수 아가리처럼 뜨거운 예식장 장미아치 안으로 걸어들어가는 동안 땅속에서는 혼인비행을 마친 여왕개미가 힘겹게 산란굴을 판다 강 건너 고립의 섬에서는 노회한 정객들이 망각의 의자에 엉덩이를 맡긴 채 오수에 빠진다
시궁쥐와 비둘기와 떠나지 못하는 이들만 도심에 남아 그림자에 남은 수분까지 앗아가는 필바라침의 악풍을 견뎌내고 있다 가로등 아래 귀화종 매미가 밤 없이 울어댄다
갈퀴덩굴처럼 우거져 귓전에 들러붙는 한 남자의 설레발과 오리발을 잘라내느라 계절 내내 당신도 잠을 설친다 두툼한 마스크를 안대 대신 눈에 쓰고 침대로 기어오르지만 당신 감정의 불안정한 기류가 뜻하지 않은 구름을 만들어 한줄금 격한 소나기를 부르기도 한다 ----류인서, [울음더위]({시향}, 2008년 여름호) 전문
지옥이란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이승에서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이 죽어서 간다고하는 세계를 말하고, 기독교에서는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못하고 악마와 함께, 영원히 벌을 받고 있는 세계를 말한다. 지옥의 종류로는 ‘등활지옥等活地獄samjiva’, ‘흑승지옥黑繩地獄kalasutra’, ‘중합지옥衆合地獄 samghat’, ‘호규지옥號叫地獄raurava’, ‘대규지옥大叫地獄maharaurava’, ‘염열지옥炎熱地獄 tapana’, ‘대열지옥大熱地獄pratapana’, ‘무간지옥無間地獄avici’ 등, 여덟 개의 지옥이 있고, 그 여덟 개의 지옥에는 ‘흑운사黑雲沙’, ‘분시니糞屎泥’, ‘오차五叉’, ‘기아飢’, ‘초갈’, ‘농혈濃血’, ‘일동부一銅釜’, ‘다동부多銅釜’, ‘철애’, ‘함량函’, ‘계鷄’, ‘회하灰河’, ‘작절斫截’, ‘검엽劍葉’, ‘호랑狐狼’, ‘한빙寒氷’ 등의 열 여섯 개의 소지옥이 각각 달려 있다고 한다. 요컨대, 이 ‘팔열지옥八熱地獄’에, 128개의 소지옥이 합쳐져 총 134개의 지옥이 있게 되는 것이다.
팔열지옥八熱地獄:
①등활지옥等活地獄 samjiva 살생을 많이 하면 이곳에 떨어지는데, 살생한 횟수를 상, 중, 하로 나뉘어 그에 따른 괴로움을 받게 된다. 똥오줌에 빠진 자는 냄새 때문에 괴로워하며, 그 속에 우글거리는 벌레가 온 몸을 파먹는다. 또한 칼날로 이루어진 무성한 숲을 지나면서 온 몸의 살점이 파헤쳐지고 베어지게 된다. 이윽고 온 몸의 살이 다 없어지면 찬 바람이 불어와서 살과 피부가 붙어서 되살아나고, 다시 이러한 고통이 끝없이 반복된다. ②흑승지옥黑繩地獄 kalasutra 만약 사악邪惡한 의견을 설법하거나, 자살하는 사람을 돌보지 않은 자는 이곳에 떨어진다.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온몸을 뜨거운 검은 새끼줄로 묶이고, 험한 언덕에서 날카로운 칼날이 풀처럼 무성히 솟아있는 뜨거운 땅으로 떨어져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진다. 이곳의 고통은 등활지옥보다 열 배나 더 지독하다.
③중합지옥衆合地獄 samghata 사람을 죽이거나, 도둑질을 했거나, 사악한 음행淫行을 저지른 자는 이곳에 떨어지는데 죄질에 따라 본 지옥과 그에 딸린 부지옥으로 떨어진다. 이곳에는 불에 벌겋게 달구어진 철구에서 끝없는 고통을 받는다. 또한 철구에는 구리가 녹은 물이 벌겋게 흐르는 강이 있는데 이곳을 한량없이 떠돌아 다녀야 한다.
④호규지옥號叫地獄 raurava 사람을 죽이거나, 도둑질을 했거나, 사악한 음행淫行을 저지르거나 술을 많이 먹고 나쁜 짓을 한 자가 떨어지는 지옥이다. 철퇴로 입을 찢기운 다음, 펄펄 끓어 불타는 구리물(銅汁)을 마시우고, 쇠솥에 거꾸로 매달려 끓는 불(湯火)로 찌는 등 극한의 고통을 당해야 한다. 이 참기 힘든 괴로움 때문에 모두가 울부짖으므로 호규지옥이라 하며 규환叫喚지옥이라고도 한다.
⑤대규지옥大叫地獄 maharaurava 사람을 죽이거나, 도둑질을 했거나, 사악한 음행淫行을 저지르거나 술을 많이 먹고 나쁜 짓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고도 만족해 하는 등 오계五戒를 어긴 자는 이곳에 배정을 받아 온다. 죄인의 혀를 길게 잡아 빼어 입으로 다시 집어 넣을 수 없도록 한 다음에 그 혓바닥에다가 펄펄 끓는 구리 쇳물을 붓거나 철퇴로 짓이기고 가루를 낸다. 이곳에서 받는 고통은 너무 가혹하여 호규지옥의 열 배에 이르므로 모두 참기 힘들어 살려 달라고 크게 울부짖기 때문에 대규지옥 또는 대규환지옥大叫喚地獄이라고도 한다.
⑥염열지옥炎熱地獄 tapana 살생殺生, 투도偸盜, 음행淫行, 음주飮酒, 망어妄語의 죄를 저지른 자가 그 삿된 소견을 벗어나지 못하면 이 지옥에 오게 된다. 옥졸이 죄인을 끌어다 쇠로 만든 성에 가두고 나서, 그 성에 불을 질러 쇠가 벌겋게 달구어지면, 그 뜨겁고 쓰라린 불길로 죄인을 태우고 구워 가죽과 살이 익어 터지게 하며, 불에 달군 철판 위에 죄인을 눕혀놓고 벌겋게 단 쇠몽둥이로 치고, 불타는 꼬챙이로 쑤시고 지진다. 그러나 죽이지는 않고 이러한 고통을 수없이 반복한다. 초열지옥焦熱地獄이라고도 한다.
⑦대열지옥大熱地獄 pratapana 살생殺生, 투도偸盜, 음행淫行, 음주飮酒, 망어妄語, 사견邪見으로 남을 속인 죄를 거듭해서 쌓고 착한 사람을 더럽힌 자가 오는 지옥이다. 지옥의 한가운데에 큰 불구덩이가 있어 불길이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는데, 그 양쪽에는 뜨거운 용암이 흐르는 커다란 화산이 있다. 옥졸이 죄인을 잡아다 쇠꼬챙이에 꿰어 불구덩이의 사나운 불길 속으로 집어 넣으면, 죄인의 몸이 익어 터지고 용암이 흘러 들어 온몸이 불타서 재가 되어 없어진다. 그리고 나서 죄인을 다시 살려내어 이러한 몸서리치는 끔직한 고통을 계속 반복한다. 소적지옥燒炙地獄 또는 극열지옥極熱地獄이라고도 한다.
⑧무간지옥無間地獄 avici 무간지옥은 팔대지옥 가운데에서도 그 규모가 가장 크며, 겪는 고통 또한 가장 심하여 지옥 가운데 지옥이라고 한다. 오역죄五逆罪를 짓거나, 부모를 죽였거나, 부처님이나 아라한을 해친 자들이 오게 되는 지옥이다. 이곳에는 필바라침必波羅鍼이라고 하는 악풍惡風이 있는데 온몸을 건조시키고 피를 말려 버린다. 또한 살가죽을 벗겨서 불꽃과 쇳물에 넣어 온몸을 붙태우고 쇠로 만든 매(鷹)가 날아와서 눈알을 파 먹는 등의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처철한 고통이 쉴 사이 없이 이어진다. 그 뿐만이 아니고 고통을 받는 사이사이에 염라대왕의 꾸짖음을 받으므로 이 지옥의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은 무섭고 놀라서 까무러 친다고 한다. 무간지옥의 고통은 다른 지옥보다 열배나 더하다고 한다. 무간지옥을 무간나락無間奈落 또는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하는데 아비규환阿鼻叫喚이라고 하는 말은 아비지옥과 규환지옥을 아울러 이르는데서 유래되었다. ----네이버 지식in 에서
만일, 그렇다면, 지옥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지옥이란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며, 인간의 도덕이 낳은 개념이라고 할 수가 있다. 형이상학이란 두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구하는 학문이며, 형이하학이란 언제, 어느 때나 인과론적인 검증이 가능한 세계를 탐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천국, 영혼, 지옥, 신, 천사, 악마, 선과 악 등은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이며, 그 개념들은 대상보다도 먼저 주어진 개념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에 반하여, 나무, 풀, 호랑이, 새, 돌, 조개, 폭포, 천둥, 비 등은 형이하학적인 개념들이며, 그 개념들은 대상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 이름이 붙여진 개념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은 그 개념들 뒤에 대상이 나타나고, 형이하학적인 개념들은 그 대상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이름이 붙여진 것들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지옥이란 그 개념(말)이 먼저 있고, 그 대상이 하나의 가상(허구)으로서 주어진 개념인 것이고, 따라서 지옥이란 개념은 우리 인간들의 도덕감정이 만들어낸 어떤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개인의 자유를 희생시켜가면서 사회적 동물들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무리를 짓는데서 최선의 삶의 수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인간들은 매우 폭력적인 위계질서를 안출해낼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 위계질서가 없다면 어떠한 사회 체제도 존재할 수가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반공법이 최고의 법이 되고, 어떤 때는 반공법이 악법이 된다. 어떤 때는 자유연애가 금기시 되고, 어떤 때는 자유연애가 권장된다. 이처럼, 선과 악이란 매우 자의적이며, 동일한 현상의 두 양면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 인간들의 사회는 그 사회가 요청하는 도덕에 따라서 선을 권하고 악을 벌하게 된다. 천당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버리고 사회 전체를 위해서 훌륭한 일을 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고, 지옥은 사회적인 도덕의 명령에 반하여, 자기 자신의 이익과 욕망을 쫓아간 사악한 인간들이 가는 곳이다. 천당과 지옥은 인간의 사후 세계를 지시하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그 세계를 가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러나, 천당과 지옥, 또는, 신과 악마라는 개념들이 없다면 이 세상의 도덕질서는 파괴되고, 우리 인간들은 상호간의 무차별적인 폭력과 투쟁 속에서, 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최선의 삶의 수단을 잃어버리게 될는지도 모른다. 천당이란 모든 것이 가능하고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세계이며, 지옥이란 자살이나 심지어는 자연스러운 죽음마저도 가능하지가 않은 곳이고, 끊임없이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 뿐인 세계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임금님과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어머니를 살해한 자들이 가는 곳도 지옥이고, 타인들이나 온갖 짐승들을 함부로 살생하는 자들이 가는 곳도 지옥이다. 사악한 궤변으로 사탕발림의 말만을 일삼거나 타인들의 자살을 막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도 지옥이고, 도둑질을 하거나 음탕한 짓을 하거나, 또는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전체의 이익을 훼손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도 지옥이다. 똥오줌통에 빠진 사람들이 그 지독한 냄새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그 구더기들에게 골수를 파 먹히고 있는 곳,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온몸을 검은 새끼줄로 묶이고 그 날카로운 칼날들이 무성한 수풀처럼 돋아난 절벽 아래로 떨어져야만 하는 곳, 철퇴로 입을 찢기운 다음, 펄펄 끓는 구리물을 마시고 쇠솥에 거꾸로 매달려 삶아지고 있는 곳, 죄인의 혀를 길게 뽑아 다시 집어넣을 수도 없도록 한 다음, 그 혓바닥에다가 펄펄 끓는 구리쇳물을 붙거나 철퇴로 짓이기고 가루를 만들어내는 곳, ‘필바라침’이라는 ‘악풍’ 때문에 온몸의 피를 말려버릴 수밖에 없는 곳, 너무나도 가혹하고 참기 어려운 고통 때문에 아비규환의 울음을 울부짖어도 염라대왕의 호통만이 있는 곳, 끝끝내 너무나도 가혹하고 참기 어려운 고통 때문에 죽고 싶어도 이윽고 온몸의 뼈와 살이 되살아나 죽어갈 수도 없는 곳----, 바로 이곳이 우리 인간들이 안출해낸 지옥에서의 삶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류인서 시인은 경북 대구에서 태어났고, 2001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했다. 2005년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창비간)라는 첫 시집을 출간했으며, 그의 [울음더위]는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지옥의 풍경화’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러나, 그의 지옥은 이 세상의 삶의 지옥이지, 지하세계의 지옥이 아니다. 사람지옥, 사랑지옥, 고소공포증의 지옥, 선남선녀들의 지옥, 맹수들의 지옥, 혼인 비행을 끝낸 여왕개비의 지옥, 망각의 의자에 갇힌 노회한 정치인들의 지옥, 시궁쥐와 비둘기와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서민들)의 지옥 등이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왜, “사랑지상주의자 a는 휴가 첫날 가방을 싸들고 폭풍의 언덕으로” 떠나가고 있는 것이며, 왜, “고소공포증의 b는 바다로” 떠나가고 있는 것일까? 왜, “겁 없는 선남선녀들은 맹수 아가리처럼 뜨거운 예식장 장미아치 안으로 걸어들어”가고 있는 것이며, 왜, “땅 속에서는 혼인비행을 마친 여왕개미가 힘겹게 산란굴”을 파고 있는 것이고, 왜, 또한, “강 건너 고립의 섬에서는 노회한 정객들이 망각의 의자에 엉덩이를 맡긴 채 오수에” 빠져 있는 것일까? 연애지상주의(사랑지상주의)란 사랑을 인생의 최고의 목표로 삼은 자들의 가치관을 뜻하지만, 그러나 그 연애지상주의자인 a가 휴가 첫날 가방을 싸들고 ‘폭풍의 언덕’으로 떠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그 어떠한 사랑도 얻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폭풍의 언덕}은 에밀리 브론테의 대표작이고, 바로 그 ‘폭풍의 언덕’에는 이 세상에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한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비극적인 죽음만이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고소공포증이란 강박신경증의 한 가지이며, 높은 곳에 오르면 그곳에서 자기 자신이 뛰어내리거나 추락해버릴까봐 두려워하는 증세를 말한다. “고소공포증” 환자인 “b"가 그 휴가를 바다로 떠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어쨌든, 그는 이 현실의 삶에서 ‘고소공포증’이라는 강박신경증을 치료할 수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고소공포증은 승진의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고, 실직의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불안 때문일 수도 있고,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지상주의자가 떠나간 곳이 폭풍의 언덕에 불과하듯이, 그가 찾아 떠난 곳은 물고기들의 바다에 지나지 않는다. 바다는 물고기들의 바다이지, 육지동물들의 바다가 아니다. 이곳도 지상낙원(천국)이 아니고, 저곳도 지상낙원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그 어떠한 출구도 없고, 그 어떠한 도피처도 없다. 따라서 “겁 없는 선남선녀들이 맹수 아가리처럼 뜨거운 예식장 장미아치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동안/ 땅속에서는 혼인비행을 마친 여왕개미가 힘겹게 산란굴을” 파게 되고, 또, 그리고, “강 건너 고립의 섬에서는 노회한 정객들이 망각의 의자에 엉덩이를 맡긴 채 오수에” 빠져 들게 된다. 과연 어떻게 맹수의 아가리와도 같은 예식장 장미아치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젊은이들의 미래가 아름답고 행복할 수가 있겠으며, 또한, 어떻게 그 짧은 혼인비행 끝에 힘겨운 노동만을 해야 하는 여왕개미와 망각의 의자에 갇힌 채, 깨어날 줄을 모르는 노회한 정객들의 삶이 아름답고 행복할 수가 있겠는가? 혼인비행이란 여왕개미와 수캐미가 비행 중에 교미를 하는 것을 말하고, 수캐미는 그 교미가 끝나면 곧바로 죽어버리지만, 여왕개미는 그녀의 일생내내, 즉, 12년에서 17년 동안, 그녀의 저장낭에 그 수캐미들의 정자를 채워두고, 그때 그때마다 자기 자신이 산란한 알들을 수정시키게 된다. 헤라클레스의 노역이 따로 없고, 시지프스의 노역이 따로 없다. 정치란 내-외적인 적들과 그 적들로 인하여 발생하는 모든 사회적인 혼란들을 잠재우고,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삶을 이끌어내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며, 따라서 노회한 정객들이란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투사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국가와 국가 간의 싸움과 온갖 정파와 정파 간의 싸움에서 백전백승의 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투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날이면 날마다 국태민안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열정을 불태우지 않으면 안 된다. 강 건너 ‘고립의 섬’에 갇힌 정객들은 노회한 정객도 아니고, 다만, 식물인간들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정치의 장’에서 밀려난 망명객들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그들이 앉아 있는 ‘망각의 의자’란 그들이 영원히 노회한 정치인으로 되살아날 수가 없다는 것을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도 지상낙원이 아니고, 저곳도 지상낙원이 아니다. 이곳도 지옥이고, 저곳도 지옥이다. 류인서 시인의 [울음더위]는 ‘지옥의 풍경화’이며, 그 풍경화가 풍경화로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하게 전개될 수가 있었던 것은 이 제1연의 ‘모순어법’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따뜻한 사랑의 열정과 차갑고 싸늘한 폭풍의 언덕, 높은 곳의 두려움과 바다의 편안함, 대지와 바다, 선남선녀들의 순진함과 온갖 맹수들의 사나움, 그토록 달콤하고 황홀한 혼인비행과 그 성교 끝의 그토록 어렵고 힘든 노역, 노회한 정객들과 망각의 의자에 앉아 있는 정객들이 바로 그것들이며, 바로 이러한 대립들이 상호 화해할 수 없는 양극단 사이의 균형을 잡아주면서, 그러나 이 세상의 삶 자체가, 바로, ‘지옥에서의 삶’이라는 것을 가장 처절하고 가장 압도적으로 인식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떠남이 돌아옴이 되고, 돌아옴이 떠남이 된다. 또다시 떠남은 돌아옴이 되고, 돌아옴은 또다시 떠남이 된다. 천당(지상낙원)은 지옥이 되고 지옥은 천당이 된다. 천당은 또다시 지옥이 되고, 지옥은 또다시 천당이 된다. 사랑은 없고 폭풍의 언덕만이 있는 곳, 고소공포증이 없는 대지는 없고 물고기들의 터전인 바다만이 있는 곳, 선남선녀들은 없고 온갖 사나운 맹수들만이 있는 곳,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은 없고 어렵고 힘든 노역에 지친 여왕개미와 망각의 의자에 갇힌 노회한 정객들만이 있는 곳----, 바로, 이 지옥이 우리 인간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한 것이다. 류인서 시인의 [울음더위]는 ‘삼복더위’와 ‘열대야 현상’의 한 가운데에서 씌어진 시이며, ‘울음더위’는 아비규환의 기원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울음더위]는 고통의 바다이고, 지옥의 풍경화이다. “시궁쥐와 비둘기와 떠나지 못하는 이들만 도심에 남아/ 그림자에 남은 수분까지 앗아가는 필바라침의 악풍을 견뎌내고 있다/ 가로등 아래 귀화종 매미가 밤 없이 울어댄다”라는 시구가 그렇고, “갈퀴덩굴처럼 우거져 귓전에 들러붙는 한 남자의 설레발과 오리발을 잘라내느라 계절 내내 당신도 잠을 설친다/ 두툼한 마스크를 안대 대신 눈에 쓰고 침대로 기어오르지만/ 당신 감정의 불안정한 기류가 뜻하지 않은 구름을 만들어 한줄금 격한 소나기를 부르기도 한다”라는 시구가 그렇다. 시궁쥐란 무엇이고, 비둘기란 무엇이며, 또한, ‘떠나지 못한 이들’이란 누구이란 말인가? 시궁쥐란 쥐목 쥐과의 포유동물이며, 일명 집쥐를 뜻하고, 비둘기란 비둘기목 비둘기과의 새이며, 이때의 비둘기란 리비아비둘기를 개량하여 만들어낸 집비둘기를 뜻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떠나지 못한 이들”이란 사랑지상주의자와 고소공포증의 환자, 또는, 이제 마악 결혼식을 올린 선남선녀들과 노회한 정객들과는 달리, ‘필바라침의 악풍’이 불어대는 삼복 더위 속에서도 그 어디엔가로 피서를 떠날 수가 없는 이 땅의 어중이 떠중이들(서민들)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시궁쥐와 비둘기와 떠나지 못하는 이들”은 이 땅의 서민들이며, 그들은 피안과 차안, 즉, 저 세상과 이 세상이 모두가 다같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그 떠날 수가 없다는 좌절감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들이 자기 자신들의 ‘필바라침’이라는 ‘악풍’의 진원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필바라침의 악풍’은 지옥 중의 지옥인 ‘무간지옥’에서 부는 바람이며, 모든 동식물들의 육체와 그 그림자의 피와 수분까지도 말려버리는 무서운 바람이라고 한다. 삼복 더위 속에서도 계급 차별이 있고, 열대야 현상 속에서도 계급 차별이 있다. 삼복 더위와 열대야 현상이 ‘필바라침’의 실제의 진원지라면, 피서를 떠나갈 수가 없는 이 땅의 서민들의 좌절감(분노)은 심리적인 차원에서 또다른 ‘필바라침’의 진원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로등 아래서 귀화종 매미가 밤 없이 울어댄다”라는 시구에서의 ‘매미’는 이 땅의 서민들의 표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귀화종 매미는 종족의 명령에 따라서 제 짝을 부르는 매미도 아니고, 밝고 환한 가로등 불빛 속에서 밤낮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매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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