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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그러운 초여름의 송파나루를 배경으로 그린 <겸재 정선의 송파진>이다.
지금 화양동 쪽에서 비행기를 타고 보듯이 시점을 높이 띄워 멀리 내려다본 모습으로
한강의 양쪽 기슭이 모두 그려져 있다.멀리 남한산자락이 연초록빛으로 물들어 있다.
송파나루에서 서울 쪽으로 건너오는 나룻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제법 많고
모래사장에는 차일이 쳐져 있는 모습은 당시 번잡한 송파의 장시를 상상케 한다
미술사학자 최완수의 <겸제 정선의 송파진> 설명을 옮겼다.
"멀리 남한산성이 능선을 따라 굽이굽이 둘러지고 그 안에 철저하게 보호되어 길러진 노송림이
성벽 위로 솟아나니 마치 성위에 녹색 휘장을 둘러 놓은 듯하다. 이는 지금 보아도 똑같다.
이것이 바로 남한산성의 본 모습이며 그다운 아름다움이라 하겠다."
1930년대의 송파나루다.
송파진은 지금 송파대로가 석촌호수를 가르고 지나서 생긴 동쪽 호숫가에 있던 나루터다.
1925년 이전에는 한강 남안의 송파로 가려면 뚝섬나루에서 나룻배를 타거나
자양동에서 잠실 섬까지 건너간 다음 다시 잠실 섬에서 송파진까지 나룻배를 타고 건너갔다.
서울과 남한산성 그리고 광나루에서 각각 20리씩 떨어져 있던 교통의 중심지이었다.
광주(廣州) 읍치(읍소재지)가 남한산성으로 옮겨지는 병자호란(1636) 직후부터 서울과 광주를 잇는 가장 큰 나루터였다
송파장은 을축년(1925) 대홍수 때까지 270호의 객주가 성업을 이루었다.
이렇게 시장이 번창할 즈음 장판에는 되쟁이, 마쟁이(되나 말로 곡식을 되어주는 직업)
임방꾼(배에 화물은 싣고 푸는 직업), 잡심부름꾼, 술집 운송점(마루하치: 화물창고와 주문처) 선원 연초가공
신탄상 우시장 같은 갖가지 직업과 거상(巨商) 거부(巨富) 가 많았다고 한다.
송파(松坡)라는 지명은 고려시대 이전부터로 추정하고 있다.
소나무가 많은 언덕이라고해서 송파(松坡)라 불리웠다고 한다.
송파지역은 한강연안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하여 선사시대부터 신석기인들이 거주하였던 곳으로
고대국가성립과 함께 고조선의 생활무대였다.백제의 시조 온조왕부터 21대 개로왕까지 약 493년 간
백제의 수도였던 곳으로 4세기후반에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7세기 후반까지
한강유역은 백제(하남위례성 한성) 고구려(남평양성) 신라(한남주ㅡ남한산주ㅡ한주)의 세력다툼이
치열하였던 각축장이었다.
조선 후기 한강변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상인들이 상권의 새로운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정부의 세곡(稅穀)과 양반지주층 소작료의 임운(賃運)활동에 종사하던 경강상인들이었다.
이들 경강상인들은 송파나루의 송파장 상인과 지금의 의정부 근처 다락원장 상인들과 결탁하여
독점적인 상권의 특혜를 누렸던 시전상인을 압박하였다.
이들 두 지역의 상인들은 금란전권에 규제받지 않고 자유롭게 상거래를 할 수 있었다.
이 두 시장이 시전에 비해 거리가 멀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소상인들에게는 거리가 장애가 되었다.
이들 소상인들에게 볼 거리를 제공해 비교적 먼 거리에 찾는 소상인들을 유인하였다.
송파산대놀이와 양주별산대놀이가 바로 양대 볼거리로 두 시장과 함께 발전할 수 있었다.
이들은 도성안에 있던 칠패시장(지금의 중앙일보 근처)와 배오개시장(지금의 광장시장)의 소상인들을
주로 불려들였다. 이들은 금란전권 밖에서 물건을 사다가 시전에서 산 물건과 섞어팔면서
단속의 눈길을 교묘하게 피했다. 원래 모든 물품의 생산자나 지방에서부터 물품을 운반해 온 자가
한양에서 그것을 판매하고자 할 때는 관아에서 인가된 시전에 가서만 팔 수 있고, 다른 데서는 팔 수 없었다.
다른 데 가서 처분하면 이를 난전(亂廛)이라 하여 처벌하였다.이른바 금난전권(禁難廛權)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긴급 조처가 나왔다.
이에 힘입어 송파장은 경강상인과 함께 상권을 더욱 확장할 수 있었다.
송파산대놀이는 송파 지역에서 전승되던 탈놀이로, 놀이꾼들이 탈을 쓰고 재담ㆍ춤ㆍ노래ㆍ연기를 하며 벌이는 연극적인 놀음이다. 송파는 한강변의 5강(송파, 한강, 서빙고, 용산, 마포)의 하나로서 송파진(松坡津)으로 불리던 곳이며,
조선왕조 후기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향시(鄕市) 15곳 중의 하나인 송파장을 이루어, 송파산대놀이의 경제적 요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연희자의 한사람인 허호영(許浩永)의 말에 의하면 약 200년 전부터 송파산대놀이가 창성되었으나
중도에 쇠진되었던 것을 1900년부터 송파에 거주하는 허윤(許鈗, 1867∼1935)에 의해 구파발 본산대 연희자 윤희중
(尹熙重, 1840∼1923)을 초빙하여 재건하고, 그 뒤 연중행사로 정월 보름ㆍ단오ㆍ백중ㆍ추석에 놀았는데 7월 백중에는 크게 놀았다고 한다.1924년에는 큰 규모의 산대놀이 모임을 송파에서 열었는데 이때에 구파발ㆍ아현ㆍ퇴계원ㆍ의정부ㆍ노량진 등지에서 20여명의 이름있는 연희자들이 모였다고 한다. 이듬해 한강대홍수로 송파마을이 유실되자 주민들은 가락동과 돌말이〔石村〕에 정착하면서 산대놀이의 명맥을 이어오다가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서울놀이마당 전수회관에서 전수되고 있다. 송파산대놀이도 양주별산대놀이와 같이 그 주제를 보아서도 산대도감극
(山臺都監劇) 계통의 중부형(中部型)의 한 분파이다. 공연에 앞서 가면과 의상을 갖추고 길군악을 울리면서 마을을 돌아 공연장소까지 행렬하는 거리굿 또는 길놀이가 있다. 행렬의 순서는 붉은 바탕에 '산대도감(山臺都監)'이라고 쓴 기가 앞서며 다음 악사들이 서고 쌍호적·꾕가리·징·장고의 순으로 선다. 놀이를 준비한 모갑(某甲)이 가면을 쓰지 않고 서고 다음에 첫상좌·둘째상좌·연잎·눈끔적이·옴중·팔먹중들·샌님·신할아비·완보·취발이·포도부장의 순으로 뒤따르고 그 뒤에는 기타 여러 사람이 탈을 쓰고 서며 맨 뒤에 여역(女役) 탈들이 선다. 여기에 노장이 끼어 양쪽 소무를 거느리고 행진한다.
서울놀이마당 근처 석촌호수가 공원에서 '송파를 빛낸 얼굴' 한유성을 만났다.
한유성은 송파산대놀이 기능보유자 중요무형문화재 제 49호로 송파진의 산 증인이었다.
"아버지가 여기가 난전을 하였기 때문에 송파장의 모든 것을 가까이서 보고 자랐습니다.
날만 새면 장터에 나가 동전 줍는 게 일이었지요.어른들이 동전 정도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지 여기저기 널려 있었습니다.그런 흥청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열한살때부터
송파산대놀이를 익히게 되었지요."
1993년 7월 8일자 동아일보는 '토박이 한유성이 전하는 그 시절의 송파'를 싣고 있다.
"송파장의 본거지는 지금 석천호수 밑으로 가라 앉아 버렸습니다.
객줏집들은 석촌호수 남쪽에 난전 터는 객줏집보다 더 남쪽 석촌호수길 근처에 줄지어 있어지요."
초고층 대형 빌딩이 밀집되어 있는 국제도시 잠실이다.
잠실섬과 부리도(浮里島)또는 부래도(浮來島)는 한강에 있었던 섬이다.
옛날에는 강북이었으나, 조선시대 홍수로 신천강이 생겨 섬이 되었다.
행정구역상 고양군 뚝도면 잠실리와 신천리였으며, 현재의 서울 잠실에 해당한다.
한강의 범람이 자주 일어나 물에 잠기는 일이 빈번해 1970년대 잠실지구 종합개발 계획으로 인하여 육지가 되었다.
잠실은 조선시대에 양잠을 장려하기 위해 국가에서 설치한 잠실도회가 있었으므로 잠실이란 동명이 생겼다.
어느새 뽕나무가 무성했던 그 잠실이 초대형 초고층 빌딩의 숲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잠실은 지형상으로도 그렇고 공간 형태상으로도 그렇고 서울의 어느 동보다 변화가 많았던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본래 잠실은 조선초기까지 뚝섬에 이어진 반도였다. 한강은 지금과는 달리 광나루 쪽에서 직선으로 흘러가는 지금의
흐름과는 달리 잠실대교 동쪽에서 석촌호수로 흘러 아시아선수촌아파트 쪽으로 흐르는, 반타원형을 이루며 흘렀다.
그러던 것이 중종 15년(1520)에 큰 홍수가 나고 난 뒤 지금의 광나루 아래에서 뚝섬 방향으로 샛강이 생기면서
섬이 되어버렸다. 이 샛강을 사람들이 '새로 생긴 내'라 하여 '새내'라 부르고 한자로 신천이라 한 것이다.
현재의 신천동 동명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이후 장마가 지면 샛강 인근 마을에 피해가 컸으므로
8년 후인 중종 23년에 군인들을 동원하여 물길을 막으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이후 1960년대에 이르도록 잠실은
한강 본류와 샛강으로 둘러싸인 섬이었다. 그리하여 새내를 건너기 위해 잠실대교 부근에 신천나루가, 한강 본류를
건너기 위해 현재 석촌호수 동호 남쪽에 송파나루가 있어 행인들을 건네주었다.
새내와 한강 본류 사이에 생긴 섬에는 새내와 부리도, 잠실 세 마을이 있었다.
새내는 새로 생긴 강에 형성된 마을로서 현재의 잠실 1, 2동 지역이다.
부리도는 잠실섬 서남쪽 한강 본류에 있던 섬으로 잠실본동 지역의 우성아파트와 정신여자중고등학교가 있는 곳이다.
잠실은 그 외 지역이다. 1960년대 말까지 새내에는 120여 가구가 살았으며, 부리도에 40여 가구, 잠실에 50여 가구가
살았다. 새내와 잠실, 부리도 사이에는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새내벌에 펼쳐진 모래사장은 그 모래가 매우 고와서 서울시민의 피서지로 사랑받았다.
애초에는 새내를 따라 마을이 있었지만 장마로 물이 들 때마다 주민들이 섬 가운데로 옮겨와 새내 주위에는 넓고
아름다운 모래사장이 펼쳐졌다.
잠실섬 일대 한강을 메워 토지를 조성하는 공유수면매립 사업은 규모가 커 서울시에서 직접 맡았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역임한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의 회고를 통해 잠실개발계획을 살핀다.
서울시는 1969년 1월 건설부에 공유수면매립 인가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며 서류를 반려하거나 회신을 미루던 건설부가 70년 중반
'이 사업은 민자로 하는 게 바람직함'이라는 답변을 시에 보내왔다.
정부가 정치자금을 내는 조건으로 대형 건설회사들에 잠실지구 매립사업권을 약속했던 것이었다.
반포지구를 매립했던 현대.대림.극동에 삼부.동아 등이 새로 참여해 잠실지구 공유수면매립을 추진했다.
서울시는 공유수면 매립과 잠실섬에 대한 구획정리사업이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모두 2백80여만평이 잠실지구 구획정리사업 대상지로 지정됐다.
71년 2월 매립을 위한 물막이공사가 시작됐다. 주로 잠실섬의 남쪽을 흐르던 한강 줄기를 바꾸기 위해서는 섬의 동북부 지역을 깎아 광진교쪽에서 흘러오는 물줄기를 뚝섬 쪽으로 돌리는 '하천 절개공사'를 벌여야 했다.
마지막 물막이공사가 그해 4월 15~16일 이틀에 걸쳐 12시간 동안 진행됐다.
이 공사를 위해 청평댐 발전소는 발전을 중단, 공사 지점의 수위를 약 20㎝ 낮추고 강물의 속도를 느리게 했다.
물막이공사가 끝나자 잠실섬의 남쪽으로는 강물이 흐르지 않게 돼 잠실은 이제 섬이 아닌 육지로 탈바꿈했다.
이어 매립공사에 들어갔다. 강을 메울 흙이 모자라 쓰레기를 쏟아붓고 그 위를 흙으로 덮었다.
이렇게 해 78년 완공된 잠실지구 공유수면 매립공사로 약 75만4천평의 땅이 생겼다.
잠실섬 구획정리사업 대상을 합쳐 개발 가능한 면적은 약 3백40만평으로 확정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새로 개발되는 잠실지구에 국제경기를 치를 수 있는 운동장을 건설하기로 결심한 직접적인 계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67년 서울에서 열기로 했던 아시아경기대회를 경기장 등 기반시설 미비를 이유로 반납해 방콕이 대신 치르게 하고 그에 대한 부담금 25만달러를 내는 국제적인 수모를 겪었던 쓰라린 과거가 결심의 동기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볼 뿐이다. 73년 9월 하순 양택식 서울시장이 청와대로 불려갔다.
朴대통령은 잠실에 국제 규모의 체육시설을 만드는 것을 연구해보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의 지시는 당시 도시계획국장이던 내게 곧바로 전달됐다.
나는 홍익대 박병주 교수에게 아주 적은 용역비를 들여 체육시설 건립 계획을 세워달라고 간청했다.
朴교수는 중구 다동에 있는 삼성여관 3층에서 젊은 건축학도 조건영.신기철 등과 함께 밤을 새우며 작업했다.
나도 퇴근길에 여관에 들러 밤늦게까지 의견을 나누곤 했다. 잠실지구 설계에는 영국의 뉴타운계획과 일본의 다미.센리 뉴타운계획을 참고했다. 삼성여관은 재개발돼 현재 한국관광공사 건물이 들어서 있다.
약 한달간의 강행군 끝에 완성된 조감도를 들고 나는 서울시.건설부.중앙도시계획위원회.총리실 등에 설계안을 설명했다. 박대통령에게는 양시장이 직접 보고했다.
면적 3백33만평, 인구 25만명을 수용하는 내용의'잠실 뉴타운계획'은 커뮤니티의 유기성, 높은 수준의 교육시설, 충분한 오픈스페이스, 입체적 공간 조성과 랜드마크, 주거형식의 다양성, 원활한 교통체계 등을 추구했다.
이 계획은 이후 우리나라에서 이뤄진 많은 도시설계에서 하나의 모델이 됐다.
이 계획에 따라 1970년 기초공사를 하고 이듬해 2월 물막이공사, 곧 잠실대교 동쪽 한강 본류의 물길을 막는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곳은 강폭이 350m, 깊이 4m로서 500여대의 중장비로 매일 13만 입방미터의 흙을 메웠다. 물길을 막을 흙이 부족하자 송파 인근의 야산을 밀어 강에 넣었는데,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연탄재 등 쓰레기도 넣었다 한다. 그리고 2개월 만인 1971년 4월 15일 한강의 본류를 막는 물막이공사가 성공하였다. 그동안 밤낮없이 작업했던 트럭, 불도저 기사들은 서로 부등켜안고 눈물을 흘렸으며, 폭 350~400m, 길이 7km의 강줄기가 물이 막혀 흐르지 않게 되자 졸지에 삶의 터전을 잃은 수만 마리의 물고기를 잡느라 며칠동안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다.
이렇게 물막이공사가 끝난 후에는 잠실도 북쪽과 자양동 사이 새내의 너비 750m를 1,200m로 넓히고 여기서 파낸 모래를 날라 원래의 한강 본류 76만여 평에 메우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조성된 매립지 105만 평에는 잠실종합운동장과 주공, 시영아파트 등 대단위 아파트들이 건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강 물막이공사 후 유일하게 남은 한강 본류가 곧 석촌호수이다. 옛 한강 본류는 메워져 육지로 변했지만 이곳만은 남겨 옛 한강을 기억하게 하고, 산책로와 쉼터 등을
설치, 송파나루공원으로 조성하여 시민의 휴식공간이 되었다.
근래 1970년대에 건축되었던 주공, 시영아파트 등이 재건축되어 고층 대단위 아파트 단지로 거듭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잠실은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는 도시공간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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