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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 新羅古都 左道.
인동 장달수 편
異名: 길창(吉昌). 복주(福州). 지평(地平). 화산(花山). 창녕(昌寧).
고장(古藏). 영가(永嘉). 일계(一界). 우릉(右陵).
능라(陵羅). 고령(古寧). 고타야(古陀耶),
* 안동부사의 공식 명칭: 안동대도호부사겸 안동진병마첨절제사.
* 일명: 화백(花伯)
* 안동판관, 종5품. 병마절제도위 겸직.
* 안동교수, 종6품. 뒤에는 제독(5품)
* 관속(官屬)
* 유향(留鄕) 좌수(座首) 1인, 별감(別監) 3인. * 군관(軍官) 90인, * 아전(衙前) 234인, *지인(智印) 68인,
* 사령(使令) 71명, * 관노(官奴) 108명, * 관비(官婢) 99구(口)
* 관둔전(官屯田) 50결, 공수전(公須田) 15결
* 무학제독(武學提督)
* 영장(營將) 한 사람이다. 무신(武臣)으로 정삼품(正三品)이다.
효종(孝宗)(1653)에 군관(軍官) 200명과 군뢰(軍牢) 30명을 두었다.
* 안기찰방(安奇察訪) 참상 종6품(參上從六品)
역리 1백32인. 지인 86인. 노 36명. 비 20구. 사령 20명.
0 인구 을묘년 1735년(영조11) 기준
원호 1만5천5백97호. 인구 66,929명.
남자: 26,261명. 여자: 40,668명.
*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4리 여정. 5일 반.
* 동쪽으로 진보현(眞寶縣)의 경계까지 65리,
* 청송부(靑松府)의 경계까지 66리,
* 남쪽으로 의성현(義城縣)의 경계까지 44리,
* 서쪽으로 예천군(醴泉郡)의 경계까지 54리,
* 북쪽으로 영천군(榮川郡)의 경계까지 42리,
* 예안현(禮安縣)의 경계까지 32리이며,
* 대구감영(監營) : 2백10리. 여정. 2일.
* 울산병영(兵營) : 3백60리, 여정. 3일 반.
* 동래수영(水營) : 5백리. 여정. 5일.
* 고성통제영 : 5백80리. 여정. 6일.
* 동ㆍ서의 상거(相距)는 115리이고 남ㆍ북의 상거는 250리이다.
○ 임하현(臨河縣)은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굴화군(屈火郡)이니 신라 때 곡성(曲城)이라 고쳤다.
○풍산현(豐山縣) 신라 때의 하지현(下枝縣)이니, 영안(永安)으로 고쳤으며, 순주(順州)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현으로 낮추었다. 신라 때에는 예천에 예속되었다.ㆍ
○일직현(一直縣) 신라 때의 일직현인데 뒤에 직녕(直寧)으로 고쳤다. 도 속현이고, ○감천현(甘泉縣)ㆍ○길안현(吉安縣) 원래는 부곡이다.ㆍ
○내성현(奈城縣) 퇴곶부곡(退串部曲)인데 고려 때 현으로 승격시켰다.ㆍ
○춘양현(春陽縣) 가야향(加也鄕)인데 고려 때 현으로 올렸다.ㆍ
○재산현(才山縣) 덕산부곡(德山部曲)인데 고려 때 현으로 올렸다.ㆍ
○일계현(日谿縣)이 있다.
0 진관(鎭管: 군사 관할지역)
도호부(都護府)가 2 고을: 영해(寧海)ㆍ청송(靑松) ㆍ
군(郡)이 3고을: 예천(醴泉)ㆍ영천(榮川)ㆍ풍기(豐基).
현(縣)이 8고을: 의성(義城)ㆍ봉화(奉化)ㆍ진보(眞寶)ㆍ군위(軍威)ㆍ비안(比安) 예안(禮安)ㆍ영덕(盈德)ㆍ용궁(龍宮).
0 관청건물(公廨)
객사(客舍: 성내에 있다) 도재당(道齊當; 도헌북쪽에 있다)
장관청(將官廳: 성 남문밖에 있다). 인리청(人吏廳: 동헌 남쪽에 있다)
약원(藥院: 성 북문 밖에 있다)
0 군병(軍兵: 군사)
訓鍊都監砲保一百八十七名御營正軍一百十一名資保一百十一名官保二百二十二名禁衛正軍五十九名資保五十九名官保一百二十七名兵曹騎兵七百十三名步兵六百八十七名禁軍保一百五十七名袱直六名扈輦隊保七名京驛保七名補充隊余丁三名束伍軍馬軍二百四名保四百八名步軍一千七百十五名保一千七百十五名水軍九百十九名武學一百二十二名樂生一名保三名樂工七名保二十三名刻手保十六名烽軍六百名
0 진공(進貢: 공물을 갖다 바침. 진상품)
彩花席 別紋上席 黃龍紋席 滿花方席 小龍紋席 邊兒寢席 瓜龍紋席黃花 席 雜花席 中硯 小硯
0 토산품
철(鐵)ㆍ인삼(人蔘)ㆍ은어[銀口魚]ㆍ잣[海松子]ㆍ설면(雪綿)ㆍ꿀(蜂蜜)ㆍ왕골[莞草]ㆍ적복령(赤茯苓)ㆍ신무애뱀[白花蛇], 자석(紫石) 독천(禿川)에서 나오는데, 벼루를 만들 수 있다. 송이[松蕈]ㆍ석이버섯[石蕈]ㆍ오미자(五味子)ㆍ지황(地黃).
0 성씨
본부 김(金)ㆍ권(權)ㆍ강(姜)ㆍ조(曹)ㆍ장(張)ㆍ 고(高)ㆍ이(李), 우(禹)ㆍ곽(郭) 모두 내성(來姓)이다. 조(趙) 촌성(村姓)이다.
임하(臨河) 윤(尹)ㆍ이(李)ㆍ신(申), 전(全) 김(金)이라 하기도 한다. 임(林), 화(華) 개경(開京). 풍산(豐山) 김(金)ㆍ임(林)ㆍ유(柳)ㆍ홍(洪)ㆍ강(康)ㆍ심(沈), 민(閔) 강주(剛州). 일직(一直) 임(任), 손(孫) 본래 순(荀)인데, 고려 때에 현종(顯宗)의 휘(諱)를 피하여 손(孫)으로 고쳤다. 전(全)ㆍ노(盧)ㆍ전(田)ㆍ한(韓). 가량(加良) 소(邵)ㆍ윤(尹). 감천(甘泉) 이(李)ㆍ김(金)ㆍ조(趙)ㆍ전(全)ㆍ문(文), 장(張)ㆍ최(崔) 모두 속성(續姓)이다. 길안(吉安) 김(金)ㆍ임(林)ㆍ박(朴). 내성(奈城) 윤(尹) 속성(續姓)이다. ○ 재산(才山)ㆍ개단(皆丹)ㆍ소천(小川)도 같다. 소라(召羅) 엄(嚴). 춘양(春陽) 정(鄭)ㆍ윤(尹).
0【풍속】
부지런한 것과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농사 짓고 누에치는 일을 힘쓴다. 지리지(地理志). 무본절용(務本節用) 권시(權偲)의 향사당기(鄕射堂記)에, “풍속은 부지런하고 검소한 것을 숭상하며, 농사를 힘쓰고 씀씀이를 절약하여 당(唐)ㆍ위(魏)의 유풍(遺風)이 있다.” 하였다. 근검충의(勤儉忠義) 권제(權踶)의 덕민루기(德民樓記)에, “근검(勤儉)한 풍속과 충의(忠義)의 열렬함은 남쪽 지방의 으뜸이 된다.” 하였다. 남편은 밭을 갈고 아내는 누에를 치며, 굽은 수레[曲車]를 사용하고, 광주리를 짊어지고 다닌다 옛 사람의 기록이다. 풍속은 예스럽고 백성들은 순박하다 백문보(白文寶)의 금방기(金榜記). 풍기(風氣)가 혼륜(渾淪)하다 권반(權攀)의 모은루기(慕恩樓記). 『신증』 석전(石戰) 매년 정월 16일에 부내에 사는 사람들이 부(府)의 중앙에 있는 내를 경계선으로 하여, 좌우편으로 패를 나누어 돌을 던지며 서로 싸워 승부를 결정한다. 경오년 왜적(倭賊)을 토벌할 때에 석전(石戰) 잘하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선봉(先鋒)으로 삼았더니, 적이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0【형승】
안동은 도(道)의 웅번(雄藩)이다 이석형(李石亨)의 사청기(射廳記). 큰 강이 띠처럼 둘러 있다. 백문보(白文寶)의 금방기(金榜記)에, “무협(巫峽)이 왼쪽에 펼쳐져 있고, 성산(城山)이 오른쪽에 버티고 있으며, 큰 강은 띠처럼 둘러 있고, 물은 돌아서 호수를 만들고 있다.” 하였다. 물은 황지(黃池)로 흐르고, 산은 태백이 뛰어나다 무명씨(無名氏)의 백련사(白蓮寺) 침벽루기(枕碧樓記)에, “물은 황지로 빠져서 일만 구렁을 흡수하고, 산은 태백산(太白山)이 가장 뛰어나 뭇 봉우리를 통솔한다.” 하였다.
0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9백 47척(尺), 높이가 8척이며, 안에 샘물 18군데와 도랑[渠] 1군데가 있다.
0 【봉수】
* 남산(南山) 봉수 다른 이름은 봉지산(烽枝山)이다. 부의 남쪽 14리에 있다. 동쪽으로 신석산 봉수에 호응하고, 남쪽으로는 일직현(一直縣) 감곡산(甘谷山) 봉수에 호응하며, 서쪽으로는 풍산현 소산 봉수에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개목산 봉수에 호응한다.
* 신석산(申石山) 봉수 부의 남쪽 26리에 있다. 동쪽으로 임하현 약산 봉수에 호응하고, 서쪽으로 남산 봉수에 호응한다. 약산(藥山) 봉수 임하현의 동쪽 16리에 있다. 동쪽으로 진보현(眞寶縣) 남각산(南角山) 봉수에 호응하고, 서쪽으로 신석산 봉수에 호응한다.
* 소산(所山) 봉수 풍산현의 남쪽 4리에 있다. 서쪽으로 예천군(醴泉郡) 서암산(西菴山) 봉수에 호응하고, 동쪽으로 남산 봉수에 호응한다. * 당북산(堂北山) 봉수 내성현의 남쪽 3리에 있다. 동쪽으로 봉화현(奉化縣) 용점산(龍岾山) 봉수에 호응하고, 서쪽으로 영천군(榮川郡) 성내산(城內山) 봉수에 호응한다.
* 개목산(開目山) 봉수 부의 북쪽 39리에 있다. 남쪽으로 남산 봉수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예안현(禮安縣) 녹전산(祿轉山) 봉수에 호응한다.
*감곡산(甘谷山) 봉수 일직현의 동쪽 9리에 있다. 남쪽으로 의성현 마산(馬山) 봉수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남산 봉수에 호응한다
0 산천
* 청량산(淸涼山) 재산현(才山縣)의 서쪽에 있다.
* 하지산(下枝山) 다른 이름은 풍악(豐岳)인데, 풍산현(豐山縣)에 있다.
* 병산(甁山) 본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 고려 태조가 견훤과 더불어 여기에서 싸워 훤이 패주(敗走)할 때에 시랑(侍郞) 김악(金渥)을 포로로 잡았으며, 죽은 자가 8천 명을 넘었다.
* 문필산(文筆山) 다른 이름은 갈나산(葛那山)인데, 본부의 남쪽 23리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신라의 김생(金生)이 여기에서 글씨를 배웠으므로 산 이름을 문필산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 안축(安軸)의 시(詩)에, “신라 때의 김생은 글씨 쓰는 법이 신기하였는데, 산집[山室]에서 글씨를 배우던 일이 이미 천년을 지났네.” 하였다.
* 태백산(太白山) 소천부곡(小川部曲)에 있다. 자세한 것은 강원도의 삼척부(三陟府)에 있다.
* 이이현(耳而峴) 임하현(臨河縣)에 있다.
* 두모현(豆毛峴) 부의 북쪽 35리에 있다.
* 모현(茅峴) 길안현(吉安縣)에 있다.
* 노산(盧山) 본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 학가산(鶴駕山) 하가산(下柯山)이라고도 한다. 본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또 영천군(榮川郡) 편에 나온다.
* 천등산(天燈山) 부의 북쪽 28리에 있다.
* 치원봉(致遠峯) 청량산(淸涼山)에 있다. 최치원(崔致遠)이 여기에서 글을 읽었으 므로 이름 지은 것이다.
* 와부탄(瓦釜灘) 부의 동쪽 3리에 있다. 진보현(眞寶縣)의 신한천(神漢川), 청송 부(淸松府)의 남천(南川), 임하현의 금소천(琴召川)의 하류이며 견항진의 남쪽에 서 합류한다.
* 귀령(龜嶺) 일직현(一直縣)에 있다.
* 견항진(犬項津) 부의 동쪽 3리에 있다. 물야탄의 하류이다.
* 물야탄(勿也灘) 부의 동쪽 11리에 있다. 요촌탄의 하류이다.
* 요촌탄(蓼村灘) 부의 동쪽 40리에 있다. 예안현(禮安縣)의 부진(浮津)의 하류이 다.
* 독천(禿川)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근원이 의성현(義城縣)의 황산 (黃山)에서 나와서 견항진의 하류에 들어간다.
* 금소천(琴召川) 임하현의 서쪽 5리에 있으며, 부(府)와의 거리는 동쪽으로 27리 이다. 즉 청송부 관내 안덕현(安德縣) 서천(西川)의 하류로 와부탄의 상류에 들 어간다.
* 여자지(女子池) 풍산현에 있다.
* 화산(花山) 하나는 부의 동쪽 14리에 있고, 하나는 풍산현의 남쪽 5리에 있다.
* 송관산(松官山) 내성현(奈城縣)의 남쪽 5리에 있다.
* 문수산(文殊山) 내성현의 북쪽에 있다.
* 송대풍혈(松臺風穴) 청량산에 있다. 석현(石峴) 일직현의 남쪽 1리에 있다.
* 고암현(古巖峴)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 광탄(廣灘) 부의 동쪽 13리에 있다.
* 화천(花川) 풍산현의 화산(花山) 아래에 있다.
* 사천(斜川) 일직현의 앞에 있다.
* 망라담(網羅潭)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0 누정
* 관풍루(觀風樓) 부의 성안에 있다.
○ 김수온(金守溫)의 기(記)에, “조령(鳥嶺)의 남쪽에 웅대한 번진(藩鎭)과 큰 고을이 안개처럼 벌여 있고, 솥발처럼 병립하고 있으나 대도호부(大都護府)라는 칭호는 오직 영가부(永嘉府)만이 일컬어지고, 다른 고을은 참여하지 못한다. 무슨 까닭인가. 전조(前朝) 때에 공민왕(恭愍王)이 적의 침구(侵寇)를 피하여 남쪽으로 거둥하다가, 이 고을에 머무르면서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출동시켜서, 싸워 이겨 경성(京城)을 수복하고 임금의 행차가 서울로 돌아갔다. 그 큰 계책이 여기에서 큰명[大命]을 정(定)하여 능히 다시 우리 동쪽 나라를 안전하게 하였으므로, 고을 이름을 안동(安東)이라고 내렸으며,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켜 영남(嶺南)의 모든 고을 중에서 우두머리가 되게 한 것이다. 이때부터 부의 이름난 성씨와 거대한 가문들이 중외(中外)에 빛났으며, 장수나 재상의 지위에 이르는 자가 어느 시대에나 끊이지 않았다. 그 인물과 토산물의 왕성함은 또 다른 고을이 비교할 수 없다. 객사(客舍)의 동쪽에 옛날 다섯 칸의 누(樓)가 있었는데, 이름을 덕민루(德民樓)라고 하였다. 신묘년에 횃불 맡은 사람이 실화(失火)하여 하루 저녁에 타서 재만 남게 되었다. 이듬해인 계사년에,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공은 목사(牧使)로서, 일선(一善) 김성경(金成慶)군은 통판(通判)으로서, 함께 부(府)의 일을 맡게 되었다. 손공이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서 폐단은 없어지고 이로운 것은 일어나며 백성들은 화합하고 시절은 풍년이 들었다. 부(府)의 부로(父老)들을 불러 말하기를, ‘아래 읍(邑)이나 작은 현(縣)에서도 오히려 누대(樓臺)가 있어서 왕명을 받들고 온 사람들을 오르게 하는데, 너희 부는 큰 고을로서 홀로 누 하나 없단 말인가.’ 하였다. 이에 고을에서 나이 많고 준걸(俊傑)한 이들이 목사의 말을 듣고 번갈아 찾아뵙고는 누 세우기를 계속 청하였다. 손공이 말하기를, ‘나를 번고롭게 하지 마시오. 수령들이 법령을 까다롭게 하고 부세(賦稅) 징수를 빈번하게 함으로 인하여, 평민이 산중으로 도피하여 중의 옷을 입고 있는 자가 많게 되었으니, 이 고을 안에도 반드시 중으로서 기와를 잘 굽는 자, 나무를 잘 다루는 자, 먹줄을 잡아 길고 짧음을 잘 잴 줄 아는 자들이 있을 것이오. 그 자들의 이름을 적어 오시오.’ 하였다. 이튿날, 기와 굽는 사람, 나무 다루는 사람, 길고 짧음을 재는 자 수십 명의 명단을 올렸다. 손공이 그들의 기능의 순서에 따라 그 일을 나누어 맡기니, 여러 공장(工匠)들이 일제히 분발하여 제각기 경쟁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나무를 벌채하여도 백성들은 알지 못하였으며, 재목을 운반하여도 백성들은 알지 못하였다. 흙을 두드려 차지게 빚고, 가마를 축조하여 기와를 구워도 백성들은 모두 알지 못하였다. 이에 객사의 대문 밖에 터를 정하고 누 5칸을 기공하였더니, 두어 달이 채 못 되어서 날아갈 듯이 아름답고 훌륭한 누각이 우뚝 솟아 서게 되었다. 그 일을 준공하였을 때에 손공이 여러 공장들에게 술을 대접하고 낙성식을 올렸다. 그때 마침 감사(監司) 김영유(金永濡) 공이 부에 들어왔다가 이 누에 올라서 두루 살피면서 서성거리니, 온 부중(府中)의 좋은 광경이 좌우로 펼쳐졌다. 감사가 손공에게 말하기를, ‘누는 이루어졌소. 이름은 또 불타버리고 남은[回祿 불맡은 귀신] 옛 이름을 습용(襲用)하려 하시오?’ 하니, 손공은 말하기를, ‘부에 누가 없어서 부내의 사람들이 민망하게 여기었는데, 이제 누가 이루어지고 큰 손님이 내림(來臨)하셨으니, 청하건대 관풍루(觀風樓)라 고쳐서 오늘의 상공(相公)의 아름다운 정치를 드러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김공이 말하기를, ‘나 때문에 관풍루라고 이름을 짓는 것은 자기의 칭찬을 하는 것 같은 혐의로운 데가 있소. 그러나 실상 세상에 널리 통용되는 이름이니 무슨 해로움이 있겠소.’ 하고, 드디어 그 현액(懸額)을 ‘관풍(觀風)’이라고 썼다. 무릇 누대(樓臺)ㆍ정사(亭榭)라는 것은 본래 정치하는 도리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 누대를 폐지하고 일으키고 하는 일에 있어서는, 폐지해야 하고 일으켜서는 안 될 것이 있으며, 일으켜야 하고 폐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리하여 관리의 정치를 잘하고 못한 것도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안동부는 평지에 자리잡아 수읍(首邑)을 정하고 또 자성(子城)을 둘러 쌓았기 때문에, 관청의 청사와 객사(客舍)의 집이 모두 위치가 낮고 막혔으므로 답답하다. 더운 때를 당하면 비록 목사나 통판(通判)일지라도 또한 시원함을 취할 길이 없었다. 혹 천지가 화로 속 같고 불 같은 해가 공중에서 타고 있을 때에, 봉명사신(奉命使臣)이 거마(車馬)를 쉬지 않고 달리느라면 길은 멀기만 하고, 물과 산의 험난한 곳을 드나들지만, 역사(驛舍)는 황폐하고 길에는 쉴 곳도 없어 땀은 비오듯 하고 티끌은 옷에 가득하여, 몸은 더욱 피로하고 호흡 또한 곤난할 것이다. 이러한 때에 말을 버리고 높은 누(樓)에 올라 옷깃을 헤치고 헌함에 서면, 맑은 바람이 가볍고 시원하게 불어와서 마치 날개가 돋혀서 하늘로 훨훨 날아오르는 것 같을 것이니, 번열(煩熱)과 숨막힘을 씻을 수 있고, 정신을 시원스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뜨거운 것을 잡고도 가서 씻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것은 이런 경우를 말한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누대(樓臺)와 정사(亭榭)가 정치하는 도리에는 무관한 것으로서 주군(州郡)에는 없어도 좋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이제 손공은 놀고 있는 자들을 사역하여 백성들은 부역(夫役)을 알지 못하였으며, 불탄 것을 다시 지었을 뿐이고 새로이 창건한 것이 아님에랴. 수령(守令) 가운데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서민들은 편안하여 예악(禮樂)이 있을 뿐, 꼭 하는 바가 없어도 교화(敎化)에 잠기는 것을 누릴 수 있게 되고, 감사(監司)로써 훌륭한 인물이 있으면 관하(管下)에 있는 관원들의 벼슬을 올려 주는 일, 내쫓는 일들이 공정하여 수령들의 횡포하고 지나치는 폐단이 끊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근심과 한탄이 없는 아름다운 상태는 옛날 한(漢) 나라의 문제(文帝)와 그의 아들 경제(景帝)의 시대에 겨우 보였을 뿐이며, 형옥(刑獄)과 송사(訟事)는 없어지고 칭송하는 소리만 일어나는 상태는, 다시 옛날 서주(西周)의 성대(盛代) 같은 것을 볼 수 없는 것일까. 이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다. 홀로 수령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감사 또한 훌륭한 인재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감사 김공은 안동 김씨(安東金氏)로서 당대의 이름난 관원이 되어, 이 도에 감사로 부임하여 탐오(貪汚)한 자를 엄중하게 다스리니 아전들은 법을 두려워하여 부정부패한 자가 없고, 부세(賦稅)와 정사를 너그럽게 하니 백성들은 생업에 안정할 수 있어서 떠돌아다니며 이사해야 하는 괴로움이 없다. 죄형(罪刑)의 판결이 현명하여 감옥에는 미결로 오래 지체하는 죄수가 드물며, 감사 자신에 대한 추종(騶從)을 간이(簡易)하게 하고, 역전(驛傳)에는 살찐 말이 있다. 모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정사와 선인(善人)과 악인(惡人)을 구별하는 방법은 마련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영남의 70여 고을이 다 편안하게 살면서 생업을 즐기는 가운데에 있다. 다른 날 공이 조정에 돌아가서 공경(公卿)이 되었을 때에, 이 누(樓)가 큰 부(府)에 우뚝 솟아 남아 있으면, 마땅히, 옛날 주(周) 나라의 소공(召公)이 사랑[愛]을 남긴 남국(南國) 땅에 남은 감당(甘棠) 나무와 같이 백성들의 그 덕을 사모하는 대상이 될 것이다. 나의 4대조 판삼사(判三司) 손홍량(孫洪亮) 공이 정일품(正一品) 벼슬에서 물러나와 이 고을에 사니, 공민왕이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총애하였다. 그러니 나도 또한 이 고을 사람이다. 그런 까닭에 즐겁게 공의 어짊을 말하고, 인하여 뒤의 풍속을 관찰하는 자가 김공에게 짝할 만한 아름다운 정사를 하기 바라며, 그리고 또한 이 누에 이름을 걸게 되는 것을 다행하게 여긴다.” 하였다.
觀風樓記 식우집(拭疣集) 김수온 (金守溫)
嶺之南。雄藩鉅牧。霧列而鼎峙。至於大都護之號。則唯永嘉府之是稱。而他郡不與者。何也。前朝恭愍王。避寇南幸。駐驆是邑。命將出師。克復京都。乘輿返正。以其訏謨定命於此。而能復安大東。故賜號安東。陞大都護。以爲嶺南諸邑之冠。自是。府之著姓大族。蜚英中外。位之將相者。代不乏人。則其人物土產之盛。又非他邑之可比矣。客舍之東。舊有樓五楹。名曰德民。歲辛卯。燎人失火。一夕而黔。越明年癸巳。鷄林君孫公昭以牧使。一善金君成慶以通判。共莅府事。孫公下車未久。弊祛利興。民和歲熟。召府之父老曰。下邑小縣。尙有樓。以登王人。爾府之大而獨無哉。於是。鄕有壽俊。聞而交謁。雜然以請。孫公曰。無以子煩。自守令之苛于法令而繁于賦歛。齊民逃寄於山林。以緇其服者衆。爾府之內。必有髡而能陶埴。能攻木。能執繩墨。以度長短者。以名來。翼日。陶者木者。度長短者。數十人進。孫公序其技能。而分任其事。衆工齊奮。人各競心。伐木而民不知。輸材而民不知。搏土而埏埴。築塊而陶瓦。民皆不知。乃改卜客舍。大門外。起樓五楹。曾不數月。傑閣翬飛。屹然以立。及其告訖。孫公飮衆工人。以落其成。而適監司相國金公永濡入府。乃陟斯樓。顧瞻徘佪。一府之形勝。在於左右。謂孫公曰。樓則成矣。名又襲回祿餘乎。孫公曰。府之無樓。府人悶之。今樓成而大賓戾止。請易以觀風。以彰今日相公之美政。何如。公曰。以余之故而名觀風。似若嫌於指美於己。然實通號也。何害。遂以觀風。署其額。夫樓臺亭榭。固無關於治道。然其興廢也。則有可廢而不可興。有可興而不可廢。而吏政之得失。又可以觀於此。府因平地爲邑。又環以子城。其所謂官廨舍宇。皆卑隘堙鬱。當其暑月。雖牧通判。亦無爽處。其或天地爲爐。火日燒空。王人之鞅掌者。四牡騑而原隰廣。驛舍荒而棠茇弊。間關乎道途之遠。出入於河山之險。白汗翻漿。黃塵滿袂。身又疲而氣又困。於是。捨馬登樓。披襟當檻。淸風颯然。飄飄若羽擧於霄漢之上。可以滌煩苦。可以暢精神。詩云。誰能執熱。逝不以濯。此之謂也。是豈可以樓臺亭榭。不關於治道而可無於州郡乎。況以孫公遊手是役。而民不知。煨燼是興。而不創新者乎。守令得人。則庶民安而享禮樂無爲之化。監司得人。則黜陟公而絶守令橫濫之弊。乃何無愁嘆之美。僅現於文景之世。獄訟息。頌聲作。不復見西周之盛乎。此無他。非獨守令之不畏法。而監司亦未得人也。今公以府人。爲時名卿。出按是道。律貪以巖。故吏畏於法。而無瀆貨之人。賦征以寬。故民得安業。而無轉徙之苦。剖決明。而囹圄鮮滯囚。騶從簡。故傳舍有肥馬。凡便民之政。旌別之方。靡所不擧。嶺南七十餘州。皆席於安居樂業之中。異日公還朝。爲公爲卿。而斯樓突兀留于大府。當與甘棠如召公遺愛之地歟。僕四世祖判三司孫公洪亮。以正一品退居是府。恭愍王賜几杖以寵之。則僕亦府人也。故樂道公之賢。而因以觀風者之儷美於金公。而亦幸掛名於斯樓也。
安東望湖樓記 모재집(慕齋集) 김안국 (金安國)
安東。嶺南之雄府也。邑據形勢。擅聲朱墟。群山飛舞。環擁乎左右。一水縈紆。映帶乎其前。蓋二樂之勝。府實專而有焉。若其瀰漫演迤。澄靚澹泞。舒爲渟湖。激爲湍瀨。深淵淺灘。回灣曲浦。拭明鏡而鏘金玉。含媚嫵而納光景。霧亂縠披。雲敷鱗蹙。徐若便旋。疾若馳驟。喜若曼舞。斂若修治。晴容瀲灎。雨氣空濛。汀蘭岸芷。蔥蒨芬芳。鷗鷺龜魚。飛戲浮躍。沙渚煙磯。風漪月波。可以舟泳漁釣。可以歌嘯吟詠。近玩洒然而神淸。遠望爽然而意豁。變態流動。不能以千百狀。皆足以發舒游客之興。宣暢湮鬱之氣。曠然放懷於一時。而能成賓主之歡者。莫尙乎水。以此一邑眺觀之美。不于山而萃于南湖。因勝之美。而搆樓於湖之北岸者曰映湖。不知誰之建也。蓋欲以接主人而樂賓客。節勞逸而慰羈旅。以盡敬禮之意。其經營勤而慮周矣。於是。映湖之名。流播東方。有未嘗一登。而引領想像於髣髴者。不知其幾人。安國幸因王事。得一歷覽而遊矚。其後按節而往。又嘗再陟焉。然簿書鞅掌。竟不得流連縱憩。飫觀而飽賞之。每巡到于邑。心未嘗不在于湖也。或値朱曦蒸燠之候。其思湖也益甚。欲輒館于映湖。則距府治稍遠。供頓奔走。慮或貽弊。牒訴聽斷。亦所拘礙。欲但寓于客館。則氣塞意悶。竟日以無聊。若抱沈痾而不釋體。於是。不得已移就於所謂觀風樓者。四顧湫卑擁隘。亦無遐眺聘望之快。與處客館無甚殊。當是之時。意謂客館之側。豈無爽塏敞豁之區。可以起高樓挹湖光。接淸冷之灝氣。滌賓使之煩襟。以與映湖爲敵者哉。而乃用是聵瞀爲哉。蓋或數有所待。而恨余不及見也。自爾閑居田園。今將十載。追思疇曩遊賞之跡。若所謂南湖之勝。無日不往來于胸中。映湖近玩之景。常森羅在目。第未知遠望之樓。有能復爲之經營。以廣觀湖之趣。而具一邑之全勝否乎。久之。自南來者有稱今府使朴公好謙。乃於乙酉春。搆樓客館東軒之東。凡三楹。附以溫房爲接賓之所。名之曰望湖。試登而眺焉。湖水之觀。盡收入眼底。映湖之曩所全有而矜詑者。有不得獨擅焉。而其不離几席。不移跬步。兼聽斷便供頓。而坐領無前之興者。則映湖雖美。似若有讓於玆樓矣。安國聞之。啞然而笑曰。朴公眞得我心之所欲者矣。數之有待。不其然乎。一湖之勝。近玩遠望。曲窮其趣。於是乎爲無餘蘊。而賓客之遊觀寓處。又皆不離乎湖之範圍。而無一刻之阻。賞其規制。亦可謂備而無憾矣。公之所爲。豈不光于前人哉。欲爲書以賀。而公適因北還人。以記爲請。安國旣服公之興作出於尋常。而果愜余之素志。又幸鄙名之得託玆樓而永久也。敢不從而爲之辭乎。第恨安國今已衰矣。犬馬之力已罄。無復望於驅馳從宦之念。雖欲更踐游南之轍。以與公擧酒相屬於玆樓之上。而窮極前日未盡之觀。爲公鋪張而歷寫之。得乎。姑以舊識而依俙者。略書以復焉。嘉靖紀元之五年龍集丙戌夏五月下澣。資憲大夫前知中樞府事兼全羅道觀察使,兵馬水軍節度使聞韶金安國。記。
* 영호루(映湖樓) 부(府)의 남쪽 5리에 있다.
○ 공민왕이 남쪽으로 거둥하여 복주(福州)에 이르렀을 때에, 영호루에 나아가서 배를 타고 유람하여, 호수가에서 활을 쏘았는데, 안렴사(按廉使)가 임금에게 음식을 대접하니 구경하는 자가 담처럼 둘러 섰다. 어떤 이는 옷소매를 돌리어 눈물을 닦으며 탄식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참서(讖書)를 외우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홀연히 남쪽의 한 도적이 깊이 와우봉(臥牛峯)에 들어온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예전에 소[牛]가 크게 우니 용(龍)이 바다를 떠나 얕은 물에서 맑은 물결을 희롱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제 그 징험을 보는구나.” 하였다. ○ 백문보(白文寶)의 금방기(金榜記)에, “신축년 겨울 11월에 임금이 난(亂)을 피하여 가다가 복주에 이르렀다. 처음에 충주(忠州)ㆍ광주(廣州)로부터 조령(鳥嶺)을 넘으니, 관리들과 백성들이 난리에 당황하여 놀란 노루와 숨은 토끼처럼 되어서, 손발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였다. 비록 명령할지라도 걷잡을 수 없어서 임금이 마음으로 근심하였는데, 조령에 올라서 내려다보니 넓고 멀고 아득하여서 마치 천지가 가로놓인 것 같은 것이 경상도의 영역이었다. 영(嶺)으로부터 북쪽은 태백산(太白山)ㆍ소백산(小白山)이 웅장하게 솟아 있고, 그 남쪽에 구불구불 서린 것은 열이 넘는 주군(州郡)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복주는 거진(巨鎭)이다. 산은 높고 물은 맑으며 풍속은 예스럽고 백성들은 순박하다. 장군과 원수(元帥)의 기(旗)는 엇갈려 덮여 있고, 관면(冠冕)과 패옥(佩玉)의 차림은 서로 바라다보였다. 행궁(行宮)을 말끔히 정돈하여 임금의 행차를 인도하면서 태연하고 침착하여 여유가 있었다. 임금이 마음으로 기뻐하여 여기에 거가(車駕)를 멈추고, 장수에게 명하여 적(賊)을 치게 하였다. 이윽고 싸움에 이겨 경도(京都)를 수복하게 되자, 드디어 이 고을을 승격시켜 대도호부(大都護府)로 하고 조세(租稅)를 감면하였다. 하루는 고을의 영호루에 거둥하여 기쁜 마음을 시원스럽게 폈는데, 경도에 돌아간 뒤에도 멀리 생각함을 그치지 못하였다. 한가한 날에 친히 필연(筆硯)을 잡고 누(樓)의 현판(懸板)으로 할 큰 글씨 석 자를 써서 하사하여 그 누에 달게 하였다. 영호루는 호수를 굽어보고 있어서 기둥과 서까래, 대마루와 들보가 물속에 거꾸로 비쳐 그림자가 능란(凌亂)하다. 무협(巫峽)이 그 왼쪽에 펼쳐져 있고 성산(城山)이 그 오른쪽에 버티고 있다. 큰 강은 띠처럼 둘러 있고 물은 돌아서 호수를 만들고 있다. 무릇 물의 근원과 지류가 머리를 간방(艮方)에 두고 꼬리를 곤방(坤方)에 둔 것으로서 하늘에 있는 것을 은하수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복주의 글 잘하는 선비와 걸출한 인재가 가끔 이 정기를 타고 그 사이에 탄생한다. 대체로 해와 달이 형상을 드리우고 은하수가 문채를 이루는 것은 하늘의 아름다운 현상이다. 이 누가 은하수처럼 근원을 간방에 두고 꼬리를 곤방에 둔 강물을 누르고 섰으니, 하늘의 문채와도 같은 임금의 제자(題字)를 얻어 금벽(金碧)의 단청으로 새겨서 후세에 밝게 빛나게 함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임금의 덕의 밝은 빛이 이곳에 강림(降臨)하여, 몇 천 년을 두고 우러러보며 흠모하게 되었으니, 나라 일의 기틀에 불행함이 있었던 것이 도리어 누를 위하여 다행한 일이 되었다.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옛날에 우리 충렬왕(忠烈王)은 비록 태평한 세상을 만났었으나, 오히려 동쪽 변두리에 일이 있어서 이 지방을 순행(巡幸)하다가 이 고을의 영은정(迎恩亭)에 행차하여 또한 귀한 제액(題額)을 하사하였으니 또한 정자를 위하여 다행한 일이었다. 앞의 것과 뒤의 것이 빛나서 모범이 되고 해와 별처럼 밝아서 함께 한 고을의 영광과 광채가 된다. 아 거룩하도다. 이 누를 지은 것이 이미 오래이다. 금빛으로 새긴 현액의 자획은 하늘을 떠 받치는 기둥 같은데, 누의 크기는 그 현액과 걸맞지 않았다. 지정(至正) 무신년에 고을의 수령 신자전(申子展)군이 옛 규모를 고치니, 새가 날개를 펼친 듯한 자세와 꿩이 높이 나는 듯한 아름다운 채색으로, 바로 호수의 수면에 걸터앉게 되었다. 때로 누에 오르면 아침 해가 올라올 때나 저녁 달이 빛날 때에는, 황금 빛 현액과 광채를 다투는 것이, 곧 불빛 구름을 피워 올리며 용(龍)이 싸우는 듯한 광경이 갑자기 호심(湖心)에 변화를 일으킨다. 그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이 뛰고 혼백이 떨게 만들어서, 이 누에 오르내리는 것이 두려워지는 것만 같다. 진실로 바라보면 의젓하고 위엄이 있어서 두려워 침범할 수 없을 것 같다. 임금의 수택(手澤)만으로도 오히려 그러하니, 하물며 친히 몸소 임금의 덕화에 감화를 받은 사람임에랴. 봉익판전교(奉翊判典校) 권사복(權思復)군은 이 고을 사람으로 이미 그 누를 중신(重新)하여 그 현액을 걸고, 그 단서(端緖)의 기(記)를 나에게 청하였다. 내 비록 글을 잘하지 못하나 영원히 전하여질 훌륭한 일을 찬미하는데 이름을 싣는 것을 적이 기뻐하여 대충 누의 오랜 세월의 연혁을 서술하고, 뒷날에 있을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 같은 훌륭한 글을 기다리기로 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다른 날 강산의 유람을 나가서 다시 한번 이 누에 이르러 훌륭한 필적을 얻어 볼 수 있게 되면, 다시 절하고 시(詩)를 지어서 또한 나의 심정을 다하여 나의 평소의 뜻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이색(李穡)의 찬(讚)과 그 서문(序文)에, “지정(至正) 신축년 겨울에 국가가 남으로 복주에 옮기고, 군사를 출동시켜 북벌하여 이듬해에 드디어 적(賊)을 경성(京城)에서 섬멸시켰다. 복주를 승격시켜 안동도대호부로 하였으니, 대체로 그 옛 칭호를 회복한 것이고 또 기쁨을 표시한 것이다. 병오년 겨울에 임금이 서연(書筵)에서 영호루(映湖樓)라는 석 자를 큰 글씨로 써서, 정순대부(正順大夫) 상호군(上護軍) 신(臣) 흥경(興慶)에게 명하여 왕지(王旨)를 전달하고, 봉익대부(奉翊大夫)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신 사복(思復)을 불러들여 면전에서 글씨를 주었다. 그때 안동도호부의 판관(判官) 조봉랑(朝奉郞) 신 자전(子展)이 아전들과 더불어 의논하기를, ‘누의 규모가 누차하여 임금이 하사할 현액(懸額)을 빛나게 할 수 없을까 걱정이다.’ 하고, 이에 기일을 정하여 더 넓히고 더욱 물에 가깝게 하니, 그 규모가 더욱 크고 시원하였다. 신 사복(思復)이 그 까닭을 신에게 자세히 말하고 또 기(記)를 청하였다. 신이 말하기를, ‘누(樓)의 기(記)를 쓰는 일은 비록 능(能)하지 못하나, 신은 홀로 느낀 바 있다. 임금이 전날 복주에 머무를 때에 일찍이 이 누에 거둥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신이 시신(侍臣)으로서 실제 수종(隨從)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경계하던 마음은 게을러지고 또 잊은 지 오래 되었다. 아, 임금께서 안동을 사랑하여 돌보심이 이에 이르렀으니, 신이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고루한 것을 잊고 절하며 머리를 조아려 찬(讚)을 짓는 바이다.’ 찬에 이르기를, ‘높고 밝은 저 운한(雲漢)을 성인(聖人)이 법칙으로 삼아서, 마음과 자획(字畫)이 한결같이 바르고 곧다. 붓이 손에서 움직이니 광채가 하늘로부터 이루어졌다. 신기하게 변하고 불가사의하게 화하여, 어째서 그렇게 되는가를 알지 못한다. 굴절생시(屈折生柴)하는 저 곤(困)하게 배우는 자들은, 엎드려 감탄하며 놀라서 비지땀을 흘린다. 이 안동(安東) 고을은 우리가 다시 일어난 곳이라 하여, 영호루(映湖樓)라는 큰 글씨 석자를 써 주셔서 거(莒)를 잊지 아니하는 뜻을 보였네. 햇빛은 그 가운데에 있고 용(龍)은 와서 둘렀도다. 위에도 하늘이요 아래에도 하늘이니 물이 비쳐 주었다네. 이 현액 때문에 풍경은 모습을 고치고, 산천은 수려함을 더한다. 부로(父老)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임금의 만세수(萬歲壽)를 축원한다. 편안한 때에나 위태한 때에나 근심을 생각하면 반드시 창성하리라. 복주의 사람들에게 사사로운 정을 두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전하는 떳떳함이라네. 세상을 보전할 뿐만 아니라 또한 충성을 권(勸)함이라네. 신(臣)은 절하고 찬(讚)을 지어 신하들에게 고(告)하노라.’ 하였다.” 했다.
○ 정도전(鄭道傳)의 시(詩)에, “나는 용[飛龍]이 하늘에서 밝은 구슬을 희롱하니, 그 구슬 멀리 영가(永嘉) 고을 호수 위의 누(樓)에 떨어졌다. 밤에 구경할 때에도 촛불을 잡고 볼 까닭이 없나니, 신기한 광채가 1만 길이나 물가를 쏘아 비치네.” 하였다. ○ 고려 채홍철(蔡洪哲)의 시에, “요사이 바다로 산으로 많이 다녔으나, 티끌 세상 밖에 있는 것 같은 정신은 여기에 오니 더하여진다. 처음에는 꿈에 운우(雲雨)의 무협(巫峽)에 노니는 것 같더니, 점차로 몸이 그림 속의 집으로 들어가는 듯하구나. 남쪽 강의 가을 밤에는 1천 봉우리에 달빛 비치고, 북쪽 마을의 봄바람에는 1만 나무에 꽃이 피네. 비록 이 담담(淡淡)한 심정의 한가한 길 가는 자로도, 이 누에 오르니 마른 삭정이 같을 수는 없구나.” 하였다. ○ 고려 우탁(禹倬)의 시에, “영남에 만판 놀며 여러 해를 보냈건만, 이곳의 물과 산에 경치 더욱 좋은 것을 가장 사랑하네. 꽃다운 풀 우거진 나룻터에는 손[客]의 길이 나누어졌고, 푸른 버들 늘어진 둑 가에는 농부의 집이 있다. 바람이 고요하니 거울 같은 수면(水面)에는 연기가 그린 눈썹처럼 가로질러 비치고, 세월이 오래니 담 머리에는 이끼가 자랐구나. 비가 그친 사방 들에 격양가(擊壤歌) 들리는데, 앉아서 숲가에 차운 삭정이가 밀려온 것을 보노라.” 하였다. ○ 고려 조간(趙簡)의 시에, “이 누의 풍경은 사람을 애타게 함이 많아, 쌍계팔영(雙溪八詠)도 감히 더할 수 없으리. 깃발과 일산의 그림자는 초부(樵夫)와 목동(牧童)의 길에 엇갈리고, 피리와 거문고 소리는 아전과 백성들의 집에 떨어지네. 공중에 걸터앉은 처마가 훤하니 트여서 몸에 소름이 돋고, 물에 비치는 헌함이 높아서 눈에 아찔하게 현기증 인다. 옥도끼로 하늘 위의 광한전(廣寒殿)을 다듬어 이룬 것 같아서, 훨훨 나는 듯이 신선의 뗏목에 오른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였다. ○ 정포(鄭誧)의 시에, “말을 타고 총총히 두어 고을을 지나와서, 석양에 친구의 손을 잡고 다시 누에 오른다. 귀양은 왔을망정 물과 산이 좋은 것 싫지는 않고, 옛일은 가고 없는데 공연히 세월이 급박한 데 놀라네. 한쪽 벽만 비치는 희미한 등잔불 외로운 여관의 밤이요, 처마 곁의 성긴 나무에는 옛 동산이 가을에 잠겼어라. 이별한 뒤의 서로 생각하는 뜻을 알고자 하거든, 하늘가에 긴 강물이 곤곤히 흐르는 것을 보라.” 하였다. ○ 정자후(鄭子厚)의 시에, “이 누(樓)를 일으킨 시적(詩的)인 안목이 공력(功力)을 소모함이 많아, 달 도끼와 구름 날[月斧雲斤]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으리라. 스스로 횡취각(橫翠閣)에 등림(登臨)하였는가 의심하노니, 누가 나로 하여금 태청가(太淸家)에 날아 오르게 하였는가. 봄 강물의 푸르름은 포도주가 넘치는 듯 석양의 붉은 빛은 철쭉꽃이 만발한 듯. 지나가기를 기다리니 헌개(軒蓋)가 가까워 오는 것을 알겠구나. 나무 위에 때마침 까치가 우는 것을 보니.” 하였다. ○ 신천(辛蕆)의 시에, “이 누의 좋은 경치는 말을 많이 할 까닭이 없다. 좋은 것을 찾고 기이한 것을 더듬는 일은 나보다 더한 이는 없을 것이니, 백 리나 이어진 뽕나무의 그늘은 술집을 감춰 버리고, 사산(四山)에 가득한 소나무의 푸르름은 관가(官家)를 지키네. 비 내려 어두운 강가에는 풀이 하늘과 맞닿고, 안개 짙은 항구에는 꽃이 집 밖에 피어 있네. 다만 오르기만 하고 만약 묵묵(黙黙)할 뿐이라면, 시인(詩人)으로서 광채 없음이 삭정이와 같으리.” 하였다. ○ 전록생(田祿生)의 시에, “북으로 서울을 바라보니 첩첩히 봉우리들도 많아라. 누(樓)가 높으니 손[客]의 한(恨)이 더욱 더하여진다. 왕중선(王仲宣)은 부(賦)를 지어 우리 땅이 아니라 했고,강령(江令)은 돌아가기를 생각하였으나 집에 이르지 못하였네. 버들은 저혼자 시름 속의 실을 흔들고, 개나리는 난리 뒤에 처음으로 꽃을 피웠네. 만약 강물을 봄술[春酒]로 변하게 할 수 있다면, 가슴속의 찌꺼기와 삭정이를 시원히 씻으련만.” 하였다.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동ㆍ남 지방의 많은 군현(郡縣)들을 고루 거쳐 왔더니, 영가(永嘉)의 지세와 경치의 뛰어남이 더욱 더한 것을 알겠구나. 읍의 위치는 가장 산천의 형세 좋은 곳을 자리잡았고, 인물은 장군이니 재상이니 하는 고귀한 사람들의 집이 수두룩하구나. 논밭에 풍년이 드니 곡식들은 풍요하고, 누대의 봄 꿈은 꾀꼬리와 꽃으로 둘러졌다. 모름지기 흐뭇이 취하여 오늘 저녁을 보내야겠다. 만리 길을 처음으로 바다의 뗏목을 타고 돌았으니.”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손[客]의 몸으로 높은 데 올라 굽어보니 느낌과 탄식이 많고, 게을리 노느라 귀밑머리에는 흰머리 늘어가네. 바닷가로 흘러 떠돌면서 공연히 고국을 그리워하고, 고향이라고 돌아 왔으나 내 집은 없다. 백 척(百尺)이나 높은 위태로운 난간은 푸른 공중에 떠 있고,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내리신 임금의 글씨는 황금빛 꽃처럼 찬란하네. 긴 내[川]는 멀리 은하수와 이어졌으니, 곧 멀리멀리 한 개의 뗏목을 띄우고 싶구나.” 하였다. ○ 고려 권사복(權思復)의 시에, “누대 있는 곳이라면 어디를 가나 좋은 경치를 많이 볼 수 있지만, 이 누에 오르면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더하여진다. 갈대 언덕 저편에는 서쪽ㆍ남쪽으로 길이 뚫렸고, 뽕나무 우거진 마을에는 서너 채씩 농가가 있다. 영호루(映湖樓) 세 글자의 어필(御筆)은 금빛으로 물에 비치고, 한 지방의 좋은 경치는 비단 위의 꽃처럼 광채를 더한다. 어릴 때에 강가의 버들을 잡아 꺾었더니, 노쇠하여 돌아와도 그 버들은 아직 삭정이가 되지는 않았네.” 하였다. ○ 이원(李原)의 시에, “금년에 또 다시 영남 유람 길을 떠나, 남쪽 고을들을 두루 지나서 복주에 이르렀네. 땅이 후미지니 사람들이 검소를 숭상함이 자랑할 만하고, 정자(亭子)가 한가하여 손의 눈동자가 경치에 굳어지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산천이 어찌 흥망을 따라 고쳐지랴. 바람과 달은 응당 왼쪽에서나 오른쪽에서나 자유롭게 거둘 수 있으리라. 반나절을 누에 올라 굽어보니 가슴이 시원하여, 돌아가려다 가지 않고 거듭 머물러 있다네.” 하였다. ○ 조효문(曹孝門)의 시에, “영남의 아름답고 고운 경치는 이미 많지 않은데, 지형과 경치 좋기는 화산(花山)이 백 배나 더하다. 꽃다운 풀과 맑은 냇물에 나그네 길 나누어지고, 푸른 버들 긴 대는 인가를 가린다. 호심(湖心)에 날이 따뜻하니 물고기가 물결을 불고, 담 모서리에 바람이 잔잔하니 제비가 꽃을 찬다. 남으로 뛰어가서 북으로 달리는 일을 어느 때에 마칠 것인가. 영주(瀛洲)에서 장건(張騫)의 뗏목을 묻고 싶구나.” 하였다. ○ 최수(崔脩)의 시에, “강가의 누(樓)에 봄이 가득하여 경치가 많으니, 시인의 심정과 흥취는 전보다 더하구나. 온 성중의 복숭아와 오얏꽃은 반안(潘安) 고을과 같고, 양쪽 언덕의 동산과 못은 습씨(習氏)의 집과 같다. 목은(牧隱)의 새 글은 구슬이 달에 우는 것 같고,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고운 글귀는 붓에서 꽃이 피는 것 같다. 공민왕이 남쪽으로 피란하던 지나간 일을 구태여 물어서 무엇하랴. 늙은 나무에 조수(潮水)가 침노하니 누은 채 뗏목이 되었구나.” 하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기(記)에, “영호루(映湖樓)는 영가(永嘉)의 이름난 누이다. 그 강과 산의 뛰어나고 큰 모양은 비록 진주(晉州)의 촉석루(矗石樓),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에는 양보해야 할지도 모르나, 같이 낙동강(洛東江)의 언덕에 버티고 선 것으로 상산(商山)에 있는 관수루(觀水樓), 일선(一善)에 있는 월파정(月波亭)은 이 누와 더불어 갑을(甲乙)을 다툴 수 없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紅巾賊)을 피하여 남쪽으로 달아나다가 이 고을에서 거가(車駕)를 멈추고 이 누에서 노닐며 즐기다가, 환도(還都)한 뒤에 서연(書筵)에 납시어 손수 누의 현액(懸額)으로 큰 글씨 석 자를 써서 하사하였다. 이 고을 사람인 통판(通判) 신자전(申子展)이 누의 제도를 더 크게 하여 현액을 걸었는데, 지금까지 지붕과 마룻대 사이에 빛나고 있다. 이것은 촉석루나 영남루에는 없는 것이다. 자전의 일한 것이 이제 백 년이 넘는다. 그 사이의 수령들이 어찌 그 기둥과 서까래와 마룻장과 난간의 썩고 흔들리는 것과, 지붕의 기와와 계단의 벽돌 떨어진 것, 뚫어진 것을 수리함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같지 않다. 인사(人事)를 곡진(曲盡)하게 닦는 체하는 자는 윗사람에게 뇌물을 바치며 문안을 드리기에 급하고, 한갓 규모만 지키는 자는 장부와 문서, 회계 때문에 겨를이 없다. 그러니 누가 황폐하고 퇴락한 것을 수리하여, 나의 저축한 재용(財用)을 소비하기를 누가 달갑게 여기겠는가. 누가 날로 무너지고 헐어지는 것은 이상할 것 없다. 나의 동년(同年)인 제안(齊安) 김질(金耋)이 어사중승(御使中丞)으로 있다가 이 고을의 수령으로 오더니, 두어 해가 다 못 되어서 정치는 통창(通暢)하고 사람들은 화합하며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또 토지와 노비에 대한 소송은 온 도내의 사람들이 감사(監司)에게 진정서(陣情書)를 내어 김후(金侯)에게 가서 판결 받기를 원하였다. 후가 매양 양편을 판결할 때에는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신중히 재량(裁量)하여 결정하니, 승소한 자도 패소한 자도 다 만족해 하였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판결료로 받은 돈과 베가 창고에 차고 넘쳤다. 후가 이에 아전과 백성들에게 의논하여, 이 누를 고쳐 짓기로 하였다. 드디어 무신년 3월 어느 날을 기(期)하여 일 없이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이방(吏房)과 호장(戶長)을 윤번(輪番)으로 일보게 하였다. 터는 옛것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면적의 척수(尺數)는 자못 더하고 덜한 것이 있다. 그 높이와 넓이는 종래의 것보다 3분의 1일 더하였으며, 그 붉고 희게 장식하는 것과 금빛을 올린 현액은 또한 빛나고 밝아서 모양을 바꾸었다. 겨우 두어 달을 지나서 그 공사가 이미 끝나니, 고을 백성들은 늙은이나 어린이나 모두 쳐다보며 감탄하여 다 신(神)이라고 하였다. 이듬해 봄에 김후(金侯)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기술(記述)함이 있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나는 스스로 헤아리지 아니하고 속으로 담암(淡菴)ㆍ목은(牧隱) 두 노선생과 더불어 그 사이에 이름을 나란히 쓰게 된 것을 기뻐하여, 드디어 붓을 잡고 감탄하며 다음과 같이 쓴다. 김후의 정사함이 청렴하고 공평하며 까다롭지 아니하고, 움직이는데 법도로써 한다. 그 인사(人事)를 곡진하게 하는 체하는 자가 개돼지처럼 비열하게 할 뿐 아니며, 그 한갓 규모만을 지키는 자가 종이나 하인처럼 굴 뿐 아닌 데에 비교한다면, 김후는 아전과 백성들이 사랑하고 공경하여 공수(龔遂)와 황패(黃霸)를 천백 년 뒤에서 다시 보는 것 같으니, 그가 누(樓) 하나를 위하여 공(功)을 일으키는 것이야 여유가 있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고래로부터 순후한 풍속을 일컬음이 이 고을만한 데가 없으니 그 백성은 부리기가 쉬울 것이다. 하물며 이 누는 편안히 놀기 위한 것이 아니며, 후세(後世)의 이름을 위한 것도 아니다. 다만 옛 법을 떨어뜨리지 않는 데에 그친 것이겠는가. 문득 내가 더욱 느끼는 바가 있다. 옛날 성화(成化) 초년에 나는 몸이 군(軍) 관계의 직무에 소속되어, 울산(蔚山)의 융막(戎幕)에 종사한 것이 모두 2주년이었는데, 일찍이 일이 있어 이 고을을 왕래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기만 하면 반드시 이 누에 올라서 어슬렁거려 노니며 조망(眺望)하였는데 그 동쪽 30리는 바로 청부(靑鳧 청송(靑松)) 땅이다. 사록(沙麓)의 상서로운 구름이 왕성하게 하늘에 이어져 있으니, 곧 주실(周室)의 유태(有邰)의 경사(慶事)와 더불어 그 장구(長久)함을 같이 하리라. 그 북쪽 10리는 곧 병산(甁山)이다. 역적 견훤의 1천 군사가 험조(險阻)한 곳을 점거하고 있었으나, 드디어 무너져 달아나게 되고 거짓 장수는 머리를 바쳤다. 왕씨(王氏)의 의기(義氣)가 동남(東南)에 크게 떨치게 된 것은 이 싸움이 조짐이 된 것이다. 서쪽으로 풍악(豐岳)을 바라보며, 원봉(元逢)이 먼저는 귀순(歸順)하고 뒤에는 배반하여 여섯 태사(太師)와 더불어 공명(功名)을 누리지 못한 것을 슬퍼한다. 남쪽으로 갈나산(葛那山)을 바라보니 푸른 봉우리가 하늘을 떠받쳤는데, 그 연기와 구름과 초목이 완연히 김생(金生)이 글씨 배울 때에 붓을 휘두르고 먹을 뿌리던 남은 기세를 띠고 있는 것 같다. 왔다갔다하는 것에 게을러지면 반드시 배를 띄우고 노[棹]에 맡겨서, 만(灣) 안으로 굽어 나온 육지와 굴곡진 물가를 거슬러 올라가서 흘러 내려가곤 하다가, 혹은 밤중에 이르러서야 흥(興)이 다하여 돌아오고 하였다. 모든 누의 좋은 경치는 왼쪽에서나 오른쪽에서나 만날 수 있어서 얻은 바가 많았었다. 이제 이미 20여 년이 지나갔으나 오히려 잊을 수 없는 생각이 가슴속을 오락가락한다. 혹이나 김후의 임기가 차기 전에 나로 하여금 남쪽으로 돌아올 계획을 성취하게 한다면, 곧 마땅히 하인 한 사람, 말 한 필의 간편한 차림으로 다시 이 호수 위에 노닐어, 후(侯)와 더불어 누에 올라 옛일을 이야기하며, 또 시(詩)를 지어 고을 백성들의 좋아하는 칭송에 이을[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모은루(慕恩樓)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세조(世祖) 때에 부사(府使) 한치의(韓致義)가 세우고, 권반(權攀)이 명명하고 기(記)를 지었다.
*향사당(鄕射堂) 부의 성(城) 서쪽에 있다.
사청(射廳) 부의 성내에 있다. ○ 이석형(李石亨)의 기(記)에, “지금 임금의 즉위 13년에, 나는 팔도체찰사(八道體察使)로서 경기ㆍ충청ㆍ전라의 각 도를 순력(巡歷)하고, 다음으로 본도(本道)에 이르렀다. 본도의 지형과 좋은 경치는 다른 도에 비하여 가장 뛰어나다. 그리고 이 부(府)는 도의 웅번(雄藩)으로서, 또한 1ㆍ2위의 아래에 있지 않다. 객관에 내린 이튿날 부사(府使)와 통판(通判)이 청하기를, ‘본부는 주진(主鎭)이 되어 있으니 열무(閱武)와 습사(習射)에 사용할 장소가 없을 수 없으므로, 남문(南門) 안에 참루(塹壘)를 쌓아서 터를 만들고 한 채의 집을 세웠는데, 한가운데에 2칸을 세우고 좌우쪽에 각기 날개를 붙였으니, 땅은 시원하고 처마는 비어서 활쏘는 일에 편의(便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청(射廳)이라고 하고, 전월(前月)부터 시작하여 이달 초에 일을 마쳤습니다. 청(廳)이 처음 낙성되고 그대가 또 마침 왔으니 다행히 경개(梗槪)를 기술(記述)하는 일을 사양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내가 생각하여보니, 풍경을 구경하고 즐기기 위하여 누대 짓기를 좋아하는 이가 많다. 어찌하여 그대는 그러하지 아니하고 홀로 활 쏘는 일에 유의하였을까. 활 쏜다는 것은 남자가 할 일이다. 그런 까닭에 활 쏘는 것으로써 그 사람의 덕행(德行)을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공자(孔子)가 확상포(矍相圃)에서 활을 쏘니, 구경하는 자가 담처럼 둘러섰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군자는 다투는 일이 없으나 반드시 활 쏘는 일에서는 다투느니, 서로 읍(揖)하고 사양하여 오르고 내려와서 마시나니, 그 다투는 것은 군자의 다툼이다.’ 하였다. 활 쏜다는 것이 일에 있어서 진실로 이와 같이 중요한 것이니, 그대가 취하는 바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짝에게 읍(揖)하고 서로 사양하여 그 의식을 절도 있게 하니, 예(禮)가 여기에서 서게 되고, 벌주(罰酒)의 잔을 들어 서서 마시어 그 벌(罰)을 밝히니, 의(義)가 여기에서 시행된다. 예(禮)가 이미 바로 서고 의(義)가 이미 시행된다면, 비록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일일지라도 또한 이에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한 고을임에랴. 생각하건대 영재(鈴齋) 관아(官衙)에 날이 길고 소송하는 뜰에는 사람이 드물 때에, 책상을 치우고 헌함에서 내려와 술을 준비하고 과녁을 마련하여 편안하고 한가롭게 활쏘기를 즐기다면, 또한 한때의 기상을 보기에 넉넉할 것이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긴장(緊張)하기만 하고 늦추지 아니함은 문왕ㆍ무왕도 능히 하지 못하고, 늦추기만 하고 긴장하지 아니함은 문왕ㆍ무왕도 하지 않는다. 한 번 긴장하고 한 번 늦추는 것은 문왕ㆍ무왕의 도(道)이다.’ 하였으니 나도 그대에게 또한 이것을 기대한다. 만약 정사는 게을리 버려 두고 한갓 활 쏘는 것만을 일삼으면서 말하기를, ‘활쏘기는 남자가 할 일이다.’ 한다면 이것은 나나 그대가 취할 바 아닌 것이다. 부사 한치의(韓致義)군은 양절공(襄節公)의 둘째 아들이다. 백성을 안무(安撫)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민첩하여, 선군(先君)의 풍모가 있다. 그런 까닭에 내 그를 위하여 즐겨 기(記)를 쓰고, 이어서 시(詩)를 짓는다. ‘처음으로 새 집[新閣]에 오르니 하늘에 노니는 것 같아, 이것이 남쪽 지방의 첫째 고을임을 알겠다. 멀고 가까운 강과 산은 지맥이 웅장하고, 아침 저녁의 구름과 비는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한다. 활 쏘는 데는 다투어 버들잎을 뚫으며 대적할 자 없음을 자랑하고, 취해서 금잔을 기울이며 무르익도록 거두지 아니한다. 이름난 지역을 간 것이 지금까지 매우 많았지만, 풍경에 빠져 이곳에 오래도록 머무르네.’ 하였다.
* 영춘정(迎春亭)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옛 이름은 천재정(千載亭)이다. 영락(永樂) 18(1420)년에 부사(府使) 최관(崔關)이 천태종(天台宗)의 중 의호(義湖)로 하여금 시주(施主)를 모아서 짓게 하였다. 매년 입춘(立春) 날에는 제수를 차리고 여기에서 아침 해를 맞이한다. 영은정(迎恩亭)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이 일찍이 여기에 올랐다가 현액(懸額)을 제명(題名)하였다.
*망호루(望湖樓) 객관의 동쪽에 있다. 부사 박호겸(朴好謙)이 세운 것이다.
* 삼귀정(三龜亭) 풍산현(豐山縣)의 서쪽 6리에 있다. ○ 성현(成俔)의 기(記)에, “상사(上舍) 김세경(金世卿) 씨가 자기 고향인 풍산현 삼귀정의 상황으로써 나에게 기(記)를 요구하였다. 삼가 살펴보니 풍산은 안동부(安東府)의 속현이다. 서쪽 5리 남짓한 곳에 마을이 있는데 금산촌(金山村)이라고 하고, 그 동쪽 20보(步) 쯤에 봉우리가 있는데 동오(東吳)라고 한다. 그 높이가 겨우 60길[丈]인데 정자는 그 봉우리의 머리에 걸터앉았다. 동쪽ㆍ서쪽ㆍ남쪽은 모두 큰 들인데 그 지세가 시원하게 틔여서 조망(眺望)이 끝이 없다. 정자의 남쪽에는 곡강(曲江)이라고 하는 큰 내가 있는데, 곧 낙동강(洛東江)이다. 그리고 마라(馬螺)라는 못[澤]이 있는데, 못 위에 절벽이 힘차게 솟아 높이가 만길[萬丈]은 될 것이다. 강 위에는 긴 수풀이 잇따라 10리에 뻗쳤다. 정자의 북쪽에도 또 산이 있는데, 학가산(鶴駕山)이라고 한다. 쌍계(雙溪)가 이 산 사이에서 나와서 낙동강으로 들어가며, 그 물이 합수(合水)하는 곳이 병담(屛潭)이다. 혹은 화천(花川)이라고도 한다. 그 산의 봉우리에 또 석벽이 있는데 천 길이 넘으며, 병벽(屛壁)이라고도 한다. 쌍계의 북쪽에는 기묘한 바위가 있는데 붕암(鵬巖)이라고 한다. 시내 양쪽 가에는 밤나무 천여 그루가 있어서 층층의 푸르름이 어지럽게 펴지고 있으며, 정자 아래에는 벼 논과 보리밭이 있어서 봄이면 푸른 싹이 무성하고 가을이면 누런 구름 같은 벼가 물결친다. 진실로 뛰어나게 경치 좋은 곳이다. 화산(花山)은 김씨(金氏)의 관향(貫鄕)이다. 김씨는 우리 나라의 큰 벌족(閥族)으로서, 그의 외조(外祖) 권 상국(權相國) 제평공(齊平公)은 조정에 높은 명망이 있었다. 권씨(權氏)는 곧 그의 따님인데, 나이가 88세이다. 그의 아들 영전(永銓)ㆍ영추(永錘)ㆍ영철(永鐵) 등이 다 근읍(近邑)의 수령이 되어서 봉양을 지극히 하며, 또 이 정자를 지어 아침저녁으로 어머니의 놀고 쉬는 곳으로 하였다. 정자에 돌 세 개가 있는데 형상이 거북이 엎드린 것 같다. 그래서 삼귀정(三龜亭)이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매양 좋은 때와 길(吉)한 날을 만나면 어머니의 가마를 붙들고 정자에 올라가서, 노래자(老萊子) 같은 채색 옷들이 앞뒤에 빛나게 비친다. 뜰에 가득한 자손들이 빽빽하게 늘어서서 모시니, 어머니는 엿[飴]을 머금고 즐거워한다. 그 즐거움을 어찌 이루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세상 사람은 집이 있으나 좋은 경치를 얻지 못하며, 좋은 경치는 있으나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 지금 김씨 집안은 땅은 좋은 곳을 얻고, 사람은 어짊을 얻었으며, 어버이는 또 그 장수(長壽)함을 얻었으니, 여러 가지 아름다움이 고루 갖추어졌다. 어찌 선(善)을 쌓고 경사(慶事)를 기른 소치(所致)가 아니겠는가. 생물의 수명은 거북만큼 긴 것이 없고, 물건의 견고함은 돌만한 것이 없다. 자식은 누구나 어버이의 장수가 거북처럼 길고 돌처럼 견고하기를 원한다. 이제로부터 이후로 증손(曾孫)ㆍ현손(玄孫)에 이르고, 증손ㆍ현손으로부터 잉손(仍孫 7대 손자)ㆍ운손(雲孫 8대 손자)의 먼 후손에 이르기까지, 그들로 하여금 각각 자기의 어버이 섬기기를 지금 하는 것처럼 하게 하여 대대로 바꾸지 않는다면, 곧 고을은 장수하는 고을이 되고 사람은 장수하는 백성이 되어서, 마땅히 청사(靑史)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길 것이다. 나 같은 자는 비록 조그마한 고향이 있기는 하지만 명리(名利)의 고삐에 얽매어져서 퇴로(退老)할 방법이 없으며, 또 영근(靈根)이 이미 멀어져서 부모 모두 상사가 많았으니, 비록 오정(五鼎)의 영화가 있어 어버이의 봉양을 위하여 쌀을 져 온 자로(子路)와 같은 일을 하고자 하여도 마침내 할 수 없으니, 더욱 김씨의 여러 어진 형제가 능히 그의 어버이를 봉양하여 그를 즐겁게 하는 것을 부러워한다.” 하였다.
* 환수정(環水亭) 내성현(奈城縣)의 서쪽에 있다.
* 귀래정(歸來亭) 부의 동쪽 3리에 있다. 유수(留守) 이굉(李硡)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서 와부탄(瓦釜灘) 위에 정자를 지었다. ○ 이우(李堣)의 시에, “인끈[印紱]을 풀어놓고 일찍 돌아와서, 두 물이 나누이는 곳에 정자를 지었네. 내와 산은 주인이 있는 것을 알겠고, 갈매기와 백로는 무리를 짓는구나. 차조가 익으니 먼저 술 빚는 데에 쓰고, 마음이 한가로우니 구름으로 화(化)하려 하네. 은거하며 이곳에서 늙으려 할 뿐 임금의 부름을 받으려는 것은 아니라네.” 하였다. ○ 더듬어 천년의 비경(祕境)을 깨뜨리고, 맑고 새롭게 위에 의거하여 노닌다. 동쪽에는 두 갈래의 물이 와서 합하고, 서쪽으로는 긴 한 줄기 숲을 안았다네. 안개에 가렸을 땐 절인가 하였는데, 환하게 개이자 호수 위의 누(樓)라네. 오두(遨頭)가 가을에 농사를 살피다가, 여기에 이르러서 오래 머무르네.
0 역원
* 안기역(安奇驛) 부의 북쪽 3리에 있다.
○ 찰방(察訪)을 둔다. 본도(本道)에는 속역(屬驛)이 10개소가 있는데, 철파(鐵破)ㆍ청로(靑路)ㆍ운산(雲山)ㆍ금소(琴召)ㆍ송제(松蹄)ㆍ청운(靑雲)ㆍ문거(文居)ㆍ화목(和睦)ㆍ각산(角山)ㆍ영양(寧陽)이다.
○ 찰방(察訪) 1인. 옹천역(甕泉驛) 부의 북쪽 34리에 있다.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말 타고 가는 앞에 보이는 풍경은 손의 심정을 괴롭게 하여, 시내와 산의 경치는 가는 곳마다 그림 같구나. 시(詩)를 외우며 천천히 우거진 풀 사이 길을 가노라니 홀연히 한 나무 매화가 있어 눈부시네.” 하였다.
* 금소역(琴召驛) 금소천(琴召川)의 북쪽 언덕에 있다.
* 송제역(松蹄驛) 임하현(臨河縣)에 있다. 부(府)와의 거리는 76리이다.
* 안교역(安郊驛) 풍산현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37리이다.
* 운산역(雲山驛) 일직현(一直縣)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33리이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운산역 주변에 석양이 비끼는데, 시냇가의 그윽 한 꽃은 말을 둘러 싸고 향기를 피우네. 들꿩이 사춘(思春)하는 마음을 갖고 스 스 로 응하기를 꾀하니, 수풀을 사이에 두고 멀리 애여장(艾如張)이 보이네.” 하 였다.
* 유동역(幽洞驛) 감천현(甘泉縣)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1백 13리이 다.
* 관음원(觀音院)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 소을마원(所乙麽院) 부의 동쪽 12리에 있다.
* 관원(館院) 부의 남쪽 10리에 있다.
* 독천원(禿川院) 독천(禿川)의 언덕에 있다.
* 자제원(慈濟院) 부의 서쪽 2리에 있다.
* 영추원(迎秋院) 부의 서쪽 12리에 있다.
* 도솔원(兜率院)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 연비원(燕飛院) 부의 북쪽 12리에 있다.
* 낙목원(落木院) 부의 북쪽 24리에 있다.
* 비사원(飛沙院) 부의 북쪽 3리에 있다.
* 두모원(豆毛院) 두모현(豆毛峴) 아래에 있다.
* 오리원(吾里院) 부의 북쪽 21리에 있다.
* 망지원(望至院) 임하현(臨河縣)의 동쪽 10리에 있다.
* 신읍곡원(申邑谷院) 임하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 보제원(普濟院) 임하현의 서쪽 1리에 있다.
* 가라연원(加羅淵院) 소천부곡(小川部曲)의 남쪽 2리에 있다.
* 감마원(甘亇院) 풍산현(豐山縣)의 서쪽 17리에 있다.
* 양재원(楊才院) 감천현(甘泉縣)의 남쪽 1리에 있다.
* 귀모원(歸毛院) 감천현의 서쪽 8리에 있다.
* 모현원(茅峴院) 모현 아래에 있다.
0 사묘
사직단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부의 동쪽 6리에 있다. 여단 부의 북쪽에 있다.
0 총묘
* 김선평묘(金宣平墓) 부의 서쪽 고태장리(古苔莊里)에 있다.
* 장길묘(張吉墓) 부의 서쪽 성곡리(城谷里)에 있다.
* 권행묘(權幸墓) 부의 서쪽 본파곡리(本破谷里)에 있다.
0 사찰
* 백련사(白蓮寺) 노산(盧山)에 있으며, 침벽루(枕碧樓)가 있다.
○ 권한공(權漢功)의 시에, “10년 동안 글 읽던 곳을, 포의(布衣)로 이제 다시 놀러 왔네. 긴 소나무는 옛 길에 그늘을 지우고, 어지러운 돌들은 차가운 냇물에 씻기우며 있다. 산촌에 하루가 저무니, 동부(洞府)엔 봄빛이 그윽하기만. 어느 때나 천병만마(千兵萬馬)를 거느리고, 한 번 웃으며 강가의 누(樓)에 오를 것인가.” 하였다.
* 임하사(臨河寺) 부의 서쪽에 있다.
* 법림사(法林寺) 성 남쪽에 있다.
* 법룡사(法龍寺) 성 서쪽에 있다.
* 청량사(淸涼寺) 청량산에 있다.
* 개목사(開目寺) 개목산(開目山)에 있다.
* 법흥사(法興寺) 부의 동쪽에 있다. ○ 박효수(朴孝修)의 시에, “이 절에 오르면 황홀하여 공중에 있는 것 같으니, 열두 봉우리들이 서로 등지기도 하고 마주 보기도 하네. 들 비[野雨]는 빛이 먹처럼 짙어서 모든 자취를 검게 덮어 버리고, 호수에 날이 개니 가늘게 밝은 자태를 희롱한다. 먼 마을의 단풍 든 나무에는 저녁볕이 머무르고, 높은 산 차운 소나무에는 가을 안개 물러간다. 다른 날 임충의 수레 아래에서 이 누(樓)를 생각하게 된다면, 하루 밤에 남쪽 꿈을 두 번 꾼들 무엇이 싫으랴.” 하였다.
0 제영
* 영가산수호풍연(永嘉山水好風煙) 고려 때 홍간(洪侃)의 시(詩)에, “풀이 자라는 강남(江南) 삼월 철에, 영가의 산수는 좋은 경치.”라 하였다.
* 옥련행가혼작묘(玉輦行街渾作畝) 승[僧] 달전(達全)의 시에, “임금의 수레 다니던 거리는 모두 밭이랑이 되었고, 구슬발[珠簾] 깊던 가항街巷)은 반은 못[池]을 이뤘구나.” 하였다.
* 산수무비구안청(山水無非舊眼靑) 고려 김방경(金方慶)의 시에, “산과 물은 어느 것이나 예대로 있어 반갑고, 누대(樓臺) 또한 소년 시절에 보던 것처럼 다정하구나. 슬프다, 고국의 유풍(遺風)으로 남아 있는, 거문고와 노래 소리를 수습(收拾)하여 나의 길 가는 심정을 위로하노라.” 하였다.
* 선개방초도(船開芳草渡) 이집(李集)의 시에, “늘어선 배 우거진 나루터, 술은 떨어진 석양(夕陽) 비낀 누대.” 하였다.
* 노목창연루각풍(老木蒼煙樓閣風) 정추(鄭樞)의 시에, “영가성(永嘉城)가의 석양 속에, 노목(老木)은 푸른 안개에 잠기고 누각에는 바람이 부네.” 하였다.
* 인물천년성례속(人物千年成禮俗) 이원(李原)의 시에, “인물은 천년의 전통에서 예속을 이루었고, 물과 산 십리의 좋은 경치는 신선이 사는 집 같구나.” 하였다.
0【고적】
* 일계현(日谿縣) 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본래는 열혜현(熱兮縣)이니 혹은 이혜(泥兮)라고 한다. 신라의 경덕왕(景德王)이 일계(日谿)라고 고치고 고창(古昌)에 예속시켰다. 지금은 어디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하였다.
* 요촌부곡(蓼村部曲) 부의 동쪽 35리에 있다.
* 하양부곡(河壤部曲)ㆍ신양부곡(新陽部曲) 풍산현에 있다. 소라부곡(召羅部曲) 춘양현(春陽縣)에 있다. 봉화현(奉化縣)의 동촌(東村)에 넘어 들어가 있다.
* 토곡부곡(吐谷部曲) 내성현(奈城縣)의 북쪽에 있다.
* 청량산고성(淸涼山古城) 돌로 쌓았다. 둘레가 1천 3백 50척이다. 안 에 우물 7개소, 시내[溪] 2개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0 한전(旱田: 밭)
元帳付九千八百八十四結六十五負九束內各樣免稅陳雜頉并四千二百四十九結十九負八束己卯時起五千六百三十五結四十六負一束
0 수전(水田: 논)
元帳付四千八十二結五十負九束內各樣免稅陳雜頉并二千六百七十結六十七負六束己卯時起一千四百十一結八十八負三束
0 조적(糶糴) 환곡을 꾸어 주거나 거두어들이거나 하던 일.
*元會米六百五十六石三斗九升. *雜穀三千二十四石三斗八升.
*賑色米二千二百七石五斗一升.*雜穀二千八百五十石六斗五升
*常平廳米一千二百十九石十二斗五升.雜穀五萬二千六百十七石二斗九升 *私賑雜穀二千七十二石十三斗七升八合二
*夕別會米九百三十石六斗九升. *雜穀一千六百九十八石六斗五升
每年十月開倉十二月封庫己卯條爲准
주) 원회미(元會米) 설때(정초)에 빌려주는 곡식.
주) 진색미: 흉년이 들었을 때에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내리던 쌀.
0 전세(田稅: 논밭에 부과되는 조세)
* 米一千八百七石十一斗一合. * 太一千二百三十五石二合.
* 位太四百三石十一斗九升. 依定式作錢三月收捧四月以陸路六日達于京納于戶曺己卯 條爲准
0 대동(大同: 여러 가지 공물(貢物)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제도)
* 作木一百六十五同. 四月收捧五月以陸路六日達于京納
* 惠廳米一千三百九十八石七斗三升六合. 儲置本府一從惠廳區劃多夥無常己卯條爲准
0 균세(均稅: 군역 대신 내는 세금. 균역법)
* 田稅米一千一百三十五石七斗. 五夕太一千七百十四石二斗二升四合.
* 四夕作錢大同條木三十三同十九疋二十五尺.
* 結錢四千三百二十五兩三戔田稅一時收捧上納選武木十同十月收捧十月以陸路六日達 于京納于均廳己卯條爲准
0 봉름(俸廩: 벼슬아치들에게 주던 봉급. 18등급으로 나누어서 주었다.
衙棣位五十結米十四石十斗八升七合录豆五石三斗六升七合七夕
○公須位十五結米五石九斗五升四合七夕录豆十三斗三升四合七夕官需米四百二石民結所出每夫柴一舟四束炭一石藁草一舟五束式捧用雉雞則均役之後自官貿用
주) 아예위: 관아에서 이속 등에게 지급하는 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토지.
주)공수위. 공수전 : 관아의 접대비나 역(驛)의 경비를 충당하게 하기 위하여 지급 하던 토지.